동인사담집 4/술값 외상

임진 난리라는 무서운 국난을 겪기 때문에 국탕이 한때 죄 고갈되었던 그 상처도 한 삼십 년 지나서는 얼마만치 회복되었다.

임진 직후에는 무슨 관기(官妓)깨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가 보다 쯤으로 여겼지 명기니 무엇이니 구별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것도 한 삼십 년 지나니까 사람의 본능이란 할 수 없는 것이라 유흥이 늘어 가고 명기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차차 생겨났다.

이러한 가운데 자고로 기생으로 이름 높은 평양에 동정월(洞庭月)이라는 기생 —명기가 있었다.

노래 잘하였다. 춤 잘 추었다. 묵화(墨畵) 깨도 칠 줄 알았다. 기생으로 가져야 할 지식은 다 그만하면 제법이었다.

이상의 것을 마음여겨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명기가 되려면 꼭 필요하고도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자색(姿色)이라는 천품을 동정월은 남보다 훨씬 많이 타고 났다.

이 자색이 붙은 덕에 그는 적잖은 평양 기생 중에 명기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기라는 칭호를 획득한 원인에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즉 아직 사내와 접하지 않았다 하는 점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생리적으로 동정월은 지금껏 처녀라 하는 점이었다.

처녀 기생—얼른 듣자면 가소롭고 또 가소로운 이 칭호 때문에 동정월의 명기 칭호는 나날이 높아갔다.

위로는 감사 목사의 권력에도 굽지 않았다. 아래로는 돈 많은 관속, 얼굴 절묘한 도령, 글 많은 선비에게도 굽지 않았다.

「대체 어쩔 셈이냐.」

너무 딱하여 그의 부모가 채근이라도 하면 그는 판에 박은 듯이

「한번 잃으면 다시 못 찾을 정절을 허투로 버리리까. 장래 남편에게 바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재우쳐

「그럼 남편을 얼른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

「남편은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 그렇게 쉽사리 나서겠습니까.」

튀겨 버리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처녀 기생 동정월의 이름은 나날이 높아 갔다.

모두들 호기심과 호기안으로 동정월이를 보았다. 제가 장차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려나 기생의 신분으로 시집을 간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게다가 사람을 골라? 약간 질투심도 섞인 마음으로 동정월의 장래를 주시하였다.

이러한 때에 한 꼴꾼(柴商)이 이 권내에 등장하였다.

성은 아지 못하고 이름도 없는 인물이었다. 임진 난리통에 부모를 잃었다. 그때에 나이가 네 살이었다.

그러니까 기축생이었다. 자기의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다. 하물며 신분이라든가 부모의 성명을 알 까닭이 없었다.

어느 농가에서 장래 머슴으로 부려먹으려고 집어다가 길렀다. 기축생이라 이름을 기축이라 하였다. 성은 애당초에 필요치 않으므로 탐색치도 않았다.

「기축아.」

「야, 기축아.」

〈기축〉은 그의 성과 이름을 아울러 대표한 자였다.

이렇게 자라기를 근 삼십 년—어려서부터 장래 머슴가음으로 길러난만치 몸은 튼튼하고 건강하였다. 그러나 얼굴은 못생기디 못생긴 위에 나이 삼십이라도 아직 총각이라 수풀에 뜯기우고 덤불에 갈리운 쥐꼬리만한 꼬리가 뒤에 늘어졌다기보다 달려 있었고, 기역자 오른다리조차 모르는 알무식쟁이였다.

이 더럽고 무식하고 늙은 총각이 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어떤 다사로운 봄날 동정월은 몸종 하나를 데리고 답청(踏靑)을 나갔다.

모란봉에 올라갔다.

굽어보면 금수강산—이 세상에 에누리없는 간판이 없지만 단 하나 부벽루에 붙은 〈제일강산〉이라는 현판뿐은 에누리 없는 것이라고 천하가 일러주는 이 일대를 흥그러운 마음으로 돌아 가지고 석양녘에 청류벽 아래를 감돌아 성내로 향하였다.

청류벽 기다란 석벽도 거진 끝났었다. 웬 노총각 하나이 지게를 비스듬히 지고 성내에서 이리로 향하여 나온다. 성내에 설을 팔러 갔던 꼴꾼일시 분명하였다.

무슨 콧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면서 석양 석벽하를 이리로 온다.

동정월의 주종과 마주쳤다.

무심히 지나가려던 동정월은 노총각의 얼굴을 보고 뜻하지 않고 발을 멈추었다. 번번이 우러러 보았다.

볼 동안 총각은 지나가 버렸다. 동정월은 그냥 차차 발을 돌리면서 노총각의 등을 바라보았다.

첫눈에 반하였다.

노총각의 어느 점에 반하였느냐? 만약 독자로서 이런 질문을 필자에게 던진다면 필자도 모르노라고 대답할밖에는 도리가 없다. 더럽고 못생기고 늙은 이 노총각에게 명기 동정월이 반할 만한 곳이 어더 있을까? 전하는 말이 그러니 필자는 다만 그대로 전할 뿐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반한 까닭을 말하라 하면 제일로는 청류벽보다도 더 건장하리만치 생긴 체격이 반할 만한 한 이유가 되겠다.

둘째로는 그의 뒤에 달린 초라한 꼬리였다. 꼬리가 훌륭하여서가 아니라 그 꼬리는 총각이라는 뜻을 나타내인다. 열두세 살이면 대개 장가드는 그 시절에 동정월이가 서방가음으로 총각을 고르려면 코 흘리는 어린애밖에는 없을 것이다. 자기가 처녀인 이상에는 총각한테 시집가고 싶다. 그러나 온갖 경력 다 겪은 기생 동정월의 눈에는 어린애는 너무 비리었다. 비리지 않은 서방을 구하자면 상처글루거나 소실 자리일 것이다. 처녀 동정월은 이는 안 바라는 바였다.

셋째로는 기생 신분인 동정월로서는 남의 정실 자리는 엿보기 지난한 일이었다. 소실이란 것은 자색을 보아 두는 것이니 늙어빠진 뒤에도 그냥 거느려 주리라고 안심할 수 없는 바다. 그런지라 소실 노릇 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자기의 신분이 기생이니만치 누구의 정실로 가자면 자기보다 신분이 썩 떨어지는 배우자를 구해야 할 것이다. 문서에 얽매인 종만 아니면 아무라도 좋다.

—이만한 까닭을 붙여 놓고 보면 동정월이가 꼴꾼 총각 〈기축이〉에게 마음 둔 점도 그럴듯하다. 제철이나 들었을 나이것다. 몸 튼튼하것다. 총각이것다. 자기와 내외가 되면 충실하고 불평 모르는 남편이 될 것이것다. 단지 하나 종의 자식이 아닌지 이것만 근심이었다. 그 점 하나만 면하였으면 (얼굴 하나이 환나지 못할 뿐) 삼중 사중으로 맞잡히는 호인이었다.

비교적 머리가 민첩하고 과단성 있는 동정월은 곁에 서 있는 계집종에게 분부하여 꼴꾼을 따라가서 내일 아침에 설 한 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날 밤 동정월의 꾸는 꿈은 몹시 명랑하였다. 나이 지긋하고 튼튼한 총각의 아내(첩이 아니다)가 된다.

부모네가 자기게 권하던 혼처라는 것은 관속 애첩, 부옹(富翁) 소첩, 첩, 첩, 첩.

〈첩〉에서 〈비읍〉을 떼버리고 〈처〉라는 것은 부모네는 모르나. 왜 첩, 첩, 또 첩첩. 귀찮고 역하다. 나는 첩이 아니로다. 아내로다. 코흘리개 어린애가 아니요, 건장한 남아의 아내로다. 총각과 처녀의 결합이로다.

이튿날 설을 가져온 총각에게서 자기는 머슴은 머슴이나 문서 있는 종은 아니노란 대답을 듣고 동정월은 속으로 춤을 추었다.


그날부터 동정월의 집안에서는 매일 싸움이 일어났다. 부모와 동정월과의 대립이었다.

딸을 기생에 붙일 때에 이 딸로써 권세 있는 대감 영감이나 돈 많은 사위를 얻어서 늙마에 세도 호강 다 부려 보려던 부모는 어디 거지 같은 것과 내외가 되겠다는 딸의 의견에 반대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사싸움이 벌어졌으나 결국의 승리자는 당자되는 동정월이었다. 당자가 끝끝내 고집을 세우는 데는 할 일이 없었다. 부모는 작은딸을 다시 가꾸어서 동정월로 보려던 호강을 수년간 연기하기로 작정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러한 사위는 꼴도 보기 싫으니 이 집에 있지 말고 나가서 잘되건 못되건 마음대로 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정월은 노총각 기축이와 간단한 결혼을 하고 자그마치 밑천(그것은 동정월이 기생 노릇을 하여 벌은 것의 일부분이었다)을 얻어 가지고 부모의 집을 나섰다.


부모의 집을 나선 동정월은 제 새 남편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동정월의 생각은 이러하였다.

첫째로 남편이니 자기 부모가 권하던 바 시골 관속들은 기성계급으로 그들의 목적은 관속과 토색과 치부(致富)에 있지 더 높은 곳은 바라볼 줄도 모르거니와 제도상 생각도 내지 못할 것이다. 장래 요행 행운이 돌아와서 한몫 보려면 남편이 기성계급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무대도 평양을 잡으면 과즉 얼마에 치부는 할지 모르나 사람을 호령할 지위는 얻을 가망도 없다. 임군이 계시고 정치의 중심지 되는 서울을 가 있어야 어떻게 빗굴러난 복덩어리가 있더라도 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서울을 올라갈지라도 이 정직함과 힘세임 이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남편을 표면에 내세우면 딱벌이꾼이나 되었지 별수가 없을 것이다. 동정월 자신이 많은 사람과 접촉할 기회를 얻어야 할지니 그러자면 술집 —색주가밖에는 다른 법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동정월 내외는 서대문 밖에 집 한 채를 장만하고 술집을 차려 놓았다.

술집이라 하여도 서울의 하고 많은 술집들이 벌써 단골을 잡고 있는 틈에 끼어서 그들보다 더 유명해지려면 특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술 좋고 안주 좋고 그 위에 값이 헐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더한층 특색 있게 장식하기 위하여서는 자기가 직접 진두에 나서야 할 것이다. 자색, 가무, 접대, 등등으로 이미 명기라는 이름을 얹었던 동정월이라 여기는 웬만치 자신이 있었다.

그런 위에 더욱이 동정월이 주력한 것은 술 먹으러 오는 손님들의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장차 한몫 볼 만한 기골을 가진 손님, 불평객들을 동정월은 그의 탁월한 감식안으로 잘 골라내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은 대개가 술값에 쩔쩔 몰리는 눈치를 본 동정월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얼마이고 외상을 주었다.

술과 안주 좋고 여주인의 인물 이쁘고 가무 능하고 친절한 위에 또한 술값이 싸다—이만하면 손님을 끄을 만한 조건이 구비되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아서 서대문밖 이 술집의 이름은 삽시간에 주객들 새에 이름 높아져서 손님들이 끓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위에 더욱이 몇몇 불평객에게는 더욱이 친절하고 얼마든 외상을 주고 외상 채근을 하는 일이 없는지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이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눈치 빠른 동정월은 손님들의 주간한담(酒間閑談)에까지 주의를 하여 그 손님들의 주의와 목적과 희망 등등까지 알아보려 노력하였다. 좀 큰 불평객인 듯한 손님이라도 오면 뒤쪽의 외따른 방으로 인도하고 무슨 저희끼리의 의논이라도 있는 듯이 보이면 동정월 자신도 피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표면으로 피한 동정월이 들창 아래 숨어 서서 손님들의 의논을 엿듣는 줄은 손님들도 꿈도 못 꾸었다.


이러한 불평객들 중에 묵동(墨洞)에 사는 김정언(金正言)과 이좌랑(李佐郞) 등 일꾼이 있었다.

눈치 빠른 동정월은 이 일꾼을 분명히 빛깔 다른 사람들로 보았다. 술집에 와서는 자기네끼리 수근수근 밀의가 많았다. 김정언의 이름은 류(流)이고 좌랑의 이름은 귀(貴)인 것도 차차 알아졌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大北派)의 반대로 이귀는 이이(李珥)의 제자이니만치 서인(西人)에 합류되는 사람이요, 김류도 서인이며 정권에서 떨어진 그들이니만치 불평이 많은 무리였고, 그 불평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무슨 수단을 바야흐로 취하려는 눈치도 동정월에게는 짐작이 갔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에게는 이제 새삼스러이 뚫을 자리가 없지만 이 불평객의 거두들에게 신세를 끼쳐 두면 장차 요행 그들에게 정권이 잡히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막연한 꿈이 성공될 듯싶었다.

(이 양반들을 잘 사로잡자.) 일장춘몽으로 끝끝내 요 신세로 지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행 세월 바뀌는 날이 있다면 한번 고함쳐볼 날이 생겨나지 않을까.

그들의 심경(心境)을 좀 더 똑똑히 타진할 필요를 느낀 동정월은 어떤 날 김류에게

「우리 저이(자기 남편)가 일자무식이 돼서 술값 치부까지 일일이 소인이 하자니까 당초에 견딜 수가 없사와요. 생원님, 수고스럽지만 매일 아침 저 사람을 댁으로 보낼 터이오니 좀 글을 가르쳐 주시면 그 신세는 결코 잊지 않으오리다.」

고 청하였다.

이 집에 적지 않은 술값을 지고 있는 김류는 (이 신세는 결코 잊지 않으오리다)는 말을 속으로 뇌어 보면서 쾌히 승낙하였다.

이튿날 아침 동정월은 무슨 책에, 그것도 첫장도 아니요 표를 하여 가지고 남편에게

「엊저녁에도 말씀한 바같이 오늘부터 김정언댁에 가셔서 글을 좀 배세요. 이 책에 표적을 한 곳이 있는 데 그 표적한 곳부터 배와 달라고 그러세요. 거기서부터는 안된다고 그러실지라도 굳이 고집을 부리셔서 거기부터 배와 달라고 떼를 쓰세요.」

부탁을 톡톡이 하여 책을 끼워서 김류의 집으로 보내었다 김류의 집으로 갔던 기축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잔뜩 성이 나서 돌아왔다. 들어오는 참 책을 동댕이쳤다.

「왜 벌써 오세요.」

동정월은 물어 보았다.

「여보게 이젠 그 김정언인가 그 사람을 아예 외상 주지 말게.」

「왜 그러서요?」

동정월은 넌지시 웃으며 물었다.

「그런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술값 아마 한 백여 냥 밀렸지? 에익 고약한 사람.」

「왜 그러세요.」

「글쎄 자네 표적한 곳부터 배 달라고 그랬더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다 못해 마지막에는 책을 동댕이치며 나더러 당장에 집으로 가라네그려. 그런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세요? 좀 심하셨군. 그만하면 알겠습니다. 그만해 두었으면 김생원님도 궁금하셔서 이따가 이리로 오실 터이니까 그때 좀 톡톡이 나무렴하리다.」

동정월이 책에 표적을 하였던 곳은 통감(通鑑) 제4권의 옛날 곽광(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하던 대목이었다. 부도한 임군 창읍왕을 곽광이 그 죄를 세이면서 폐한 한나라 역사였다.

말하자면 지금 이 나라 임군이 옛날 창읍왕과 같이 부도한지라 김정언 일파가 곽광을 본받아서 폐왕을 하려느냐 그 눈치를 따져보자는 동정월의 계교였다.

그 대목을 표적하여 가지고 와서 부득부득 거기서부터 배워 달라는 기축이를 김류는 처음에는 무심히 여겨

「여보게. 글이란 것은 대체 글자를 알어야 글을 밸 것이니까 천자(千字) 같은 것으로 글자를 배우고 그뒤 대학(大學) 같은 것으로 차차 글뜻을 배와서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니 이 책은 도로 가져가고 천자나 유합(類合)을 사 가지고 오게.」

이렇게 타일렀다. 그러나 아내의 분부를 듣고 난 이 정직한 사내는 그냥 통감 제사권을 고집하였다. 그 책에서도 표적 있는 곳부터 배우기를 고집하였다. 김류는 이 고집불통에 고소(苦笑)를 하면서 책을 받아서 표적한 곳을 보았다. 그것은 의외에도 국광이 창읍왕을 폐하던 대목으로 지금 마음에 큰 야망을 품고 있는 김류는 가슴이 선뜩하였다. 안색이 창백하여졌다.

마지막에는 책을 동댕이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과연 그날 오후에 김류가 단 혼자서 이 술집으로 왔다.

팔짱을 찌르고 묵묵히 뒷방으로 들어갔다. 동정월의 애교를 떤 인사에는 대답도 없이— 동정월은 술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갔다. 김류는 역시 침묵한 채로 몇 잔을 받아먹었다.

드디어 동정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아침에는 글 가르키시노라고 얼마나 애를 쓰셨습니까?」

김류는 힐끗 동정월을 보았다. 동정월의 표정으로써 마음 뜻을 알아보려는 듯이— 잠시의 침묵……

「자넨가? 거기부터 배우라고 표적해 보낸 것은?」

「………」

「응?」

힐난조였다.

「네……」

작다란 동정월의 대답. 김류는 동정월의 얼굴을 그냥 보고 있다.

「글을 처음 배우는데 거기서부터 능히 감당할 줄 아나?」

「………」

「왜 대답이 없는가?」

「글자보다도 글의 뜻을 배우라 보냈습니다.」

「무얼!」

「생원님. 소인네 같은 무식한 것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생원님 같으신 분이 옛날의 국광과 같은 높으신 분으로 믿삽고……」

「그게. 그럼 내가 역적도모를 한단 말인가. 에익!」

큰 소리는 아니나마 경악과 경계로 떨리는 소리였다. 동정월은 거듭 눈을 들어서 김류를 우러러 보았다.

「그럼 국광이 역적도모를 한 것이오니까?」

여기는 김류도 할 말이 없었다.

「생원님. 소인을 속이지 마십쇼. 지금 이 난정(亂政)에 심복할 이 누구 있사오리까.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소서. 무슨 밀의(密議)라도 할 일이 계시오면 이 방을 빌려드릴 터이오니 염려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셔서 의논하십시오. 이 집은 술집이라 누가 드나들든 의심받을 염려가 없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시면 혹은 의심을 안 받겠습니까?」

그 대신 소인네 같은 천한 백성이 무슨 복에 벼슬을 바라리까. 행여 당신네들의 일이 이 뒤 성취되는 날이라도 있으면 하다못해 선달 한 자리라도 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동정월의 김류에게 대한 부탁이었다.

김류는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으로써 승낙하는 뜻임을 (남의 속을 비교적 잘 보는) 동정월은 알아보았다.

김류가 돌아갈 때에 문간에까지 따라나가면서 인사를 한 뒤에 자기네 방에 돌아오니까 그의 남편은

「그래 좀 톡톡히 말했는가?」

묻는다.

「단단히 매우 힘있게 톡톡히 말을 했지요.」

동정월은 명랑히 웃었다.

그 뒤부터 이귀 김류 일행은 더욱 잦게 동정월의 집에 출입하였다. 대개 제각기 따로 오지만 모이기는 한 방에 모이고 하였다.

술값은 한 번도 안 내었다.

「이 다음에 주세요.」

동정월은 그들이 셈을 치르려 할 때에도 도리어 굳이 사양하였다. 그 말의 뜻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 뒤로 성공하는 날이 이르면 그날에 (돈이 아니고) 다른 것을 달라는 뜻이었다.

「이다음에 빚 갚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 동정월은

「갈려버리지요.」

하고는 웃는다.

「이 사람 빚 톡톡히 많이 치울 셈일세그려.」

그들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사회의 상태를 간단히 말을 하자면 이러하다.

선조대왕 초엽에 어떤 원로재상 한 사람이 신진(新進) 벼슬아치 한 사람을 처신 잘못하는 곳이 있다고 소인(小人)이라 비웃었다. 그러매 신진들은 모두 성세를 합하여 그 원로를 배척하였다. 동시에 그 원로뿐 아니라 원로란 원로는 모두 배척하였다.

신진은 동촌에 살므로 동인(東人)이라 하였다. 원로는 서쪽에 살므로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로들은 죽거나 은퇴하거나 하고 그 자리에 신진들이 들어앉았다. 그뒤를 이어 생기는 신진들도 모두 동인(東人)에 가담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동인 전성의 시대를 이루었다. 전성시대가 이르매 또한 끼리끼리의 싸움이 생겨서 동인은 갈려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되고 북인은 다시 갈려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되었다.

선조대왕 승하하고 그의 아드님 광해군이 즉위한 때는 대북이 정권을 잡고 다른 파들은 모두 밀려나 있었다.

정권에서 밀려나매 자연 불평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임군(광해군)은 임진 난리에 불탄 대귈들을 중수하는 등 토목을 많이 일삼기 때문에 민간에서 세납을 많이 걷었다. 이것이 민간의 원망을 샀다.

그런 위에 이 임군은 왕족 중에도 많은 불평을 샀다. 대체 이씨조선 개국 이래, 임군과 왕족의 사이는 아주 좋지 못하였다. 태조 때에 벌써 방번 방석의 난리라는 것이 있었고 또한 방간의 난이라는 것이 있어서 적지 않은 왕족들이 살륙을 당하였다. 정종대왕은 아우님 되는 태종대왕의 강권에 왕위를 내어 놓았다.

이렇듯 그 시초를 벌써 왕위계쟁에서 시작된 이조는 어느 대에나 왕위 문제 때문에 몇몇 왕족이 해를 일었다.

이 임군 때에도 왕족이 여러 사람이 해를 입었다.

왕족에게 신망을 잃고 (대북파 이외의) 재상 사류들에 신망을 잃고 백성에게 신망을 잃은 임군이었다.

물론 그 허물의 대부분은 당시 집정하고 있던 대북파에게로 돌려야 옳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이나 남인의 생각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 임군을 그냥 두면 자기네는 벼슬 잡아 볼 기회가 없다. 이 임군을 없이 하여야 자기네도 벼슬을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 임군을 추대하여야겠다. 새 임군을 추대하려면 이 임군께 원혐 많은 왕족 한 분을 골라서 그이를 추대하여야겠다. 이것이 정권을 잃은 남인과 서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 아래서 골라내인 왕족이 후일 인조대왕이라 일컬은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지금 임군의 배다른 동생의 아드님이었다. 능양군의 아우되는 이가 임군께 해를 입은 까닭으로 능양군은 임군께 원혐이 있었다.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다.

이만한 계획으로써 서인(西人) 김류며 이귀 등은 삑삑이 숨어 다니면서 능양군을 추대하고 지금 임군을 퇴위시킬 의논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런 틈서리에 동정월이 뛰쳐든 것이었다. 이맛 기미를 넉넉히 보았기에 장차 성공하는 날은 반정공신(反正功臣)이 될 김류며 이귀 등에게 술 외상을 끊임없이 주며 술값 대신으로 다른 것을 요구하는 눈치를 보인 것이었다.

과연 동정월의 눈은 밝았다.


하늘이 사람을 내심에 균형을 잘 취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대신 직(直)하다 하는 한 가지의 덕을 주셨다.

기축이는 어리석었다. 그대신 직하였다.

그밖에 또한 하늘에서 타고난 몇 가지의 특점이 있었다.

첫째로 입이 무거웠다. 웬만한 일에는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보고도 못 본체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다.

술집 주인이라 단골손님이며 거래하는 곳 등에 보통 예사 사람 같으면 꽤 교제가 넓을 것이지만 어리석고 직하고 입이 무거운 기축이는 손님들을 보아도 못 본체 만날 씩씩 머슴과 같이 일만 하였다. 그 집에 출입하는 단골들로도 기축이가 동정월의 남편인 줄을 아는 사람이 얼마가 안 되었다. 장사는 일체 동정월이 맡아 하고 기축이는 머슴같이 지냈다. 이렇기 때문에 더욱 영업에 흥하기도 하였거니와…… 또 한가지 하늘에서 타고난 특점은 그의 놀라운 힘이었다. 보통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이 달려들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물건을 기축이는 가벼이 들어 치우고 하였다.

이런 몇 가지의 점을 발견한 이귀며 김류의 일당은 이 기축이를 무엇에든 이용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술값 외상을 갚는 일종의 전제(前提)였다.

그들은 동정월과 의논을 한 끝에 기축이를 능양군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능양군——만약 이귀 김류 등의 꾀하는 일이 성사가 되는 날에는 이 팔도 삼백주의 지존으로 모시려는 분이 즉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지금 임군의 조카님이었다. 능양군의 아버님은 지금 임군의 배다른 동생 정원군이었다.

연전 능양군의 동생되는 능창군이 어떤 몹쓸 사람의 고자질 때문에 역모(逆謀)로 몰려서 정배를 갔다.

비록 현재로는 정배를 갔다 하나 이것은 임시 처분이요, 사사(賜死)가 내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능양군은 이 죽음에 직면한 동생을 구하고자 삼촌 임군께 탄원하여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다시 수단을 돌이켜서 이번은 왕비의 오라비 되는 유희분을 움직여서 유희분의 힘으로 왕비를 움직이고 왕비의 힘으로 왕을 움직여 이러한 사단식의 방식으로 동생을 구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교한 유희분은 능양군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능양군은 분이 상투끝까지 치밀었다. 선왕의 손주님이요 지금 임군의 조카되는 당신이 한 개 재상을 만나보지도 못하단 웬일인가.

그러는 동안에 정배가 있던 능창군에게는 약사발이 드디어 내렸다.

능양군은 무고한 동생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아버님 정원군마저 울화가 성병되어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말하자면 능양군은 이 임군 때문에 아버님과 동생을 잃었는지라 그만치 임군께 원혐이 컸다.

지금 임군께 그만치 원혐이 큰 왕질(王侄) 한 분과 역시 임군께 원혐을 가진 몇몇 재상들은 세상을 한번 뒤집어 놓기를 도모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이 임군은 폐위하여야만 할 혼주(昏主)인지 어떤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많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임군의 대에도 그만하였으면 사람을 적지 않게 죽였다. 그러나 사류(士類)를 많이 죽인 수효로는 중종대왕이 훨씬 승하다.

역모의 의심으로 왕족은 꽤 여러 번 사사를 하였다.

그러나 태종대왕은 어떠하였으며 세조대왕은 어떠하였나.

주색을 즐기기는 성종대왕만 못하였다.

당쟁에 휩쓸려들기는 후일의 숙종대왕만 못하였다.

뿐더러 그 모든 불미한 일은 임군이 책임을 질 종류의 것이 아니고 당국 대신이 책임을 질 것이었다.

당국 대신이 꾸며서 만들어놓은 일들로서 구중 깊은 곳에 있는 임군은 직접 그 책임을 질 바가 아니다.

그대신 이 임군의 훌륭한 업적을 찾아보자면 이 임군대의 정원일기는 반정 신하들이 모두 말살하여 버려서 알아볼 바이 없지만 단 한 가지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는 자는 국도부흥(國都復興)이다. 임진 난리에 죄 불타고 헐리고 한 서울이 이 임군 재위 겨우 십오 년간에 거진 회복이 되었다.

다시 다른 면으로 관찰하자면 〈반정〉하였다는 제신들이 과연 후일에 훌륭한 업적을 남기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여 무위무능한 여생을 보낼 뿐이다. 뿐더러 반정 직후에 또다시 반정한다고 이괄이 난리를 일으키는 등 온갖 추태를 다 연출하였으며 공(功)의 차등으로 별별 암투가 다 있고 동정월의 술값 외상 신세를 반정공(反正功)으로 갚는 등 눈을 들어 바로 볼 수 없는 더러운 일이 부지기수였다.


에쿠. 이야기가 딴 길로 들어갔구나.

기축이는 능양군과 이귀 일당의 새의 연락군이 되었다. 생김생김이 하인 꼴로 되었는지라 기축이의 출입은 〈서인이며 능양군을 단단히 감시하고 있는〉 나졸들도 무심히 보았다.

이러한 가운데서 가장 마음을 죄이는 것은 동정월이었다.

자기의 취한 길이 과연 현명하였나?

밑져야 본전은 본전이다. 시골 아전의 첩으로 가기나 여기 지금 주모로 있기나 의식에 걱정 없기는 일반이다. 행세로 따진단들 아전의 첩이면 얼마나 행세를 하랴.

요행 일이 바로 되어서 그 위에 부인(夫人) 직첩이라도 어떻게 얻게 된다면 얼마나 장하고 쾌한 일이냐.

어서 성사합소서. 어서 성사합소서, 이귀 일당은 이귀 일당으로 마음을 죄이느니만치 동정월은 또한 동정월로 마음을 죄이며 기다렸다.


이귀 일당의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청년 장수로 이름 높은 이괄도 자당에 끄을어 넣었다. 훈련대장 이흥립까지도 내응하기를 승낙하였다.

그보다도 더욱 그들의 힘을 북돋우어 준 것은 오리 이원익의 승낙을 얻은 것이었다. 오리는 그때 여주에 중도부처(中途附處)로 가 있었다.

이귀 일당—무명 오합지중인 자기네만이 임군을 폐하고 새 임군을 맞았다 하면 백성들이 승복을 안 할 것이다. 정부의 수뇌자로는 명망 있는 재상을 끌어오지 않으면 민심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원두표(元斗杓)가 몰래 여주로 잠행하여 오리정승의 심중을 타진하여 본 결과 내락을 듣고 다시 상경하였다.

인제는 거사의 일로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이 임군 십오년 삼월 열나흗날 거사하기로 작정되어 제각기 자기 관하의 군졸을 영솔하고 모화관으로 모이기로 시각까지 약속되었다.

그러나 원체가 남의 눈을 기이어야 할 일인 위에 오합지중의 하는 일이라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약속한 시각에는 장령들과 군졸들이 모이지를 않았다.

이때에 이괄의 과단(果斷)만 없었더면 이번 일은 흐지부지해 버리고 능양군이 하는 모두 역모로 저세상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주에 그냥 여기서 꿈질거리다가는 필연코 발각이 날 것이요, 일은 시급하니 인목이 적은 곳으로 잠시 물러가서 약속한 장졸들이 다 모인 뒤에 습격하자 하여 연서역(延曙驛)까지 물러갔다.

약속하였던 군사는 날이 기울어서야 이르렀다.

지금 임군을 폐하고 능양군이 전국보를 받은 것은 그날 야반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논공행상을 할 때에 기축이는 술값 대신으로 삼등 훈으로 완계군(完溪君)으로 봉군이 되고 기축(己丑)이라는 이름은 너무 초라하니 기축(起築)이라 고치라는 새 임군의 천명으로 이름을 작정한 위에 성(姓)이 없으니 안 되었다 하여 국성(國姓)인 이 씨 성을 하사하여 이기축이라 하였다.

더욱이 술값의 원채권자인 동정월은 공이 더 크다 하여 일품 정경부인을 봉하였다.


꿈과 같이 여겼던 동정월의 야욕은 드디어 성공을 하였다. 과즉 부옹의 소첩이나 관속의 애첩밖에는 바랄 수도 없던 신분으로 비상한 호운을 타고 오늘날 그의 남편은 봉군이 되고 자기는 정경부인까지 된 것이었다.


그뒤 병자호란 때에 기축이는 장수로 출전하여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화의가 된 뒤에는 볼모로 심양(瀋陽)에 가는 왕세자를 모시고 가서 세자 신상 보호에 노력하고 귀국해서는 부귀의 일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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