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조신의 꿈

땡─ 땡─

고요한 하늘에 울리어 나아가는 범종(梵鐘) 소리를 들으면 서 조신(調信)은 낙산사(洛山寺)를 내려서 자기의 장사(농장집)로 향하였다.

봄날이었다. 신라(新羅)의 전성을 자랑하는 무궁화가 만개 하여 그윽히 좋은 절기를 산에, 벌에, 들에 장식하고 있었다.

명주 내리군(溟洲捺李郡)의 넓은 벌판에는 농사 준비에 분 망하다. 그 넓은 벌판에 산재하여 있는 전토가 모두 다 세 달사(世達寺)의 소유였다. 조신은 그 세달사의 농장을 감독 하고 관할하고 지배하려 득파되어 와 있는 지장(知莊)이었다.

자기의 관할 아래 있는 이 넓은 지역을 흥겨운 마음으로 둘러보면서 자기의 처소로 발을 옮기다가 조신은 문득 발을 딱 멈추었다. 딱 멈춘 그는 마치 그 자리에 깎아 세운 듯이 굳어져 버렸다.

그의 눈이 향하는 곳─ 거기에는 만개한 복숭아나무 아래 한 아리따운 계집이 앉아서 혼자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는 열 칠팔, 옥같은 살결이며 영채 있는 눈이며 삼단 같은 머리며─ 그야말로 선녀와 같은 아리따운 계집.

비록 승도(僧徒)라 하나 아직 젊은 조신이었다. 조신은 얼 빠진 사람 모양으로 그 자리에 서서, 그 계집만 바라보고 있었다. 계집도 조신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 이었다. 계집의 머리가 차차 돌리우고 이리로 돌아왔다. 눈 도 차차 들리었다. 커다란 광채 나는 눈으로 조신을 마부 보았다.

만약 계집으로서 한참만 더 조신을 보았더라면 조신은 너 무 흥분되어서 그 자리에 기절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요행 계집은 잠깐 조신을 바라본 뒤에는 얼굴을 한순간 찌푸렸다 가 귀찮은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에는 한 번 몸을 활 활 털고 저편으로 발을 옮겼다.

조신은 뜻 않고 계집의 뒤를 밟았다. 무슨 까닭으로 밟았 는지 모른다. 꿈결 같이 밟아갈 뿐이다.

계집은 그 곳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집 대문까지 이르러서 한 번 더 뒤를 돌아본 뒤에 대문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왜 다시 돌아보았을까?

이것이 조신의 마음에 몹시 걸리었다.

대문간에서 왜 또 돌아보았을까? 귀찮고 역하다고 돌아보 았을까? 혹은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까?

계집은 혹은 무신히 돌아보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한 번 다시 돌아보았다는 일이 조신의 마음에 걸려서 스스로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계집 사라진 대문간만 바라보고 있다 가, 조신은 정신을 수습하고 그 근처에서 떡장사를 하는 노 파를 발견하고 그에게 그 계집이 누구냐고 물었다.

노파는 의미 있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성주(城主) 댁 소저시라오.』

정혼(定婚)이나 안했을까?

아아, 세상에 이렇듯 아리따운 여인도 있을까?

『과년했으니 어디 정혼이라도 안했답디까?』

『그건 똑똑히 모르겠소.』

이 이상 더 물을 말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이야 태산같이 많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을 찢는 듯한 오뇌에 사로잡힌 이 젊은 중은 그 뒤부 터는 눈을 감으나 뜨나 눈앞에 서언히 보이는 김랑(金娘)의 자태에 거의 미친 사람같이 되었다.

밤에는 난잠을 못 이루었다. 그날 그 만개한 복숭아꽃 아 래서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수(繡)를 놓던 처녀의 자태며, 차차 자기에게로 구을러 오던 광채 나는 눈이며, 제 집 대 문간에서 다시 한 번 돌아보던 그 때의 눈빨이 서언히 보여 서, 잠시 한때도 마음이 가라앉는 때가 없었다.

김태수의 집 담을 일 없이 빙빙 돌아다녔다. 행여 다시 김 랑이 나올 때라도 있을까 하여 이 기약 없는 날을 만나기 위하여 멀리 숨어 서서 김태수집 대문 간을 바라보았다. 그 날 그 처녀가 앉았던 복숭아나무 아래 그 자리에도 매일 몇 번씩 가 앉아서는 그날 그 처녀가 앉았던 자리를 혼자서 즐 기고 하였다.

그날 피었던 복숭아꽃도 차차 떨어져 버리고 그 대신 청청 한 잎이 나무를 장식하고 콩알만큼씩한 복숭아가 장차 붉어 질 날을 준비하는 양을 조신은 무한 적적한 마음으로 우러 러보고 하였다.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달이 가면 달이 갈수록 조신의 마 음은 더욱 설레고 더욱 초조하고 더욱 불타 올랐다.

그날 그 처녀는 무엇하러 밖에 나왔으며 나왔으면 나왔지 왜 자기의 눈에 띄었던가? 띄었으면 띄었지 왜 자기의 마음 이 이렇듯 설레는가?

또, 한 번 나왔으면 왜 두 번 나오지 않는가? ─ 마음이 설레면 설레느니 만치 남에게 물어보기도 쑥스러워서 조신 은 홀로 가슴만 태우며 김태수의 집 전후 좌우를 일 없이 배회하였다.

봄도 가고 여름이 이르렀다.

그 여름도 또한 어느덧 가고 가을이 이르렀다.

그러나 조신은 다시 김랑을 볼 기회를 못 얻었다. 매일 매 일 김랑의 집 전후 좌우를 일 없이 배회하나, 김랑은 다시 대문 밖에 자태를 나타내지 않았다.

불붙는 청춘, 애타는 가슴을 풀 길이 없는 조신은 마지막 에 하릴없이 부처의 힘을 힘입으려 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조신의 초췌한 몸집은 매일 낙산대비전(洛 山大悲前)에 나타났다.

합장 명목하고 염주를 비비며 부처님 전에 드리는 조신의 기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김태수의 딸 김랑으로 하여금 소 승의 아내가 되게 하여 줍시사.」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부처 앞에 드리는 이 청성의 기원─ 어린 시절부터 불문(佛門)에 들어서 기원과 축수를 이십 년 래로 하여온 조신이었지만, 지금의 이 기원만치 정성을 들 여 본 적이 없었다.

밤과 낮을 무론하고 부처 전에 단정히 꿇어 앉아서 오직 한 마음으로 오직 한 정성으로 드리는 기원─

「김태수의 딸을 소승께 주십사.」

가을도 훌쩍 넘어가고 겨울도 어느덧 넘어가고 다시 새로 운 봄이 이르렀다.

이때까지도 조신은 오직 한 마음으로 부처 전에 기원만 드 리고 있었다. 세상에는 다시 새로운 봄이 이르러 계림 천지 에도 무궁화가 다시 만발하고, 작년 봄 어느날 김랑이 수를 놓으며 앉아 있던 잔디밭 위에 또 다시 복숭아꽃이 만발하 여 봄빛을 자랑하되, 쓰린 마음의 주인인 조신은 낙산사 법 당에 들어박혀서 오로지 한결 마음으로 부처 전에 기원만 드리고 있었다.

그 봄도 또 가고 여름 가을 겨울, 또 일년이 지나고 또 일 년, 또 일 년 하여 조신이 김랑을 본 때부터 사 년 간이라 는 세월이 말 없이 흘렀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을 조신은 오 직 한 마음으로 한 처녀를 사모하여 부처 전에 정성의 기원 을 드리며 보냈다.

그러나 이 정성의 기원에도 아무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부처가 조신의 기원을 못마땅하게 봄인지 혹은 조신과 김랑 이 연분이 없는 까닭인지, 이 정성의 기원에 대하여 부처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러나 영험 없는 기운이라 하여 조신은 단념하지 않았다.

언제든 영험이 보일 때까지 꾸준히 정성을 다하여 조르려 하였다.

어떤 우물 앞을 지날 때에 우물에서 물긷던 노파 둘이서 하는 이야기가 선뜻 조신의 귀에 들어왔다.

『성주님도 참 사위 잘 맞으셨지.』

『암, 그 소저에게 그 사위야. 그야말로 천정 배필이지.』

성주? 사위?

무심히 귓가로 들어오는 이 말에 조신은 발을 딱 멈추었 다. 눈앞이 아득하였다. 몸이 비츨하였다.

조신은 흐늘흐늘 우물 앞으로 갔다.

『아주머니!』

『이게─ 대사, 안녕합쇼? 이즘 왜 신색이 이렇게 못되셨 수?』

조신은 이런 한담을 응대할 수가 없었다.

『김랑이 출가를 했소?』

『대사두, 한 동리에 계시면서 그게 벌써 언제라구 아직 모르신단 말씀이오?』

『금시 초문인데요.』

『벌써 석 달 전이라우. 내외 금실도 좋구.』

어쩌구 어쩌구 조잘거리는 노파의 말을 조신은 다 듣지 못 했다. 놀라서 자기의 등을 바라보는 노파를 버려 두고 조신 은 도망하듯이 그 자리를 피하였다.

처음에 사로잡힌 감정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사년 간의 정성도 헛일이냐? 김랑은 드디어 남의 사람이 되었느냐?

이 절망의 감정 때문에 통곡하고 싶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조신은 더벅더벅 거리를 벗어나서 낙산사로 돌아왔다. 그러 나 차차 오는 동안, 그의 마음에 새로이 일어난 감정은 부 처에게 대한 분노였다.

사년 간의 자기의 정성을 떡 잘라먹듯 떼어먹어 버린 부처 에게 대하여 끝없는 분노가 가슴에 폭발하였다. 부처가 영 험이 없다 하여도 섬길 <가치>가 없을 것이요, 정성을 몰라 준다 하여도 섬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놈의 부처, 영험 없는 부처를 그래도 행여나 하고 사년 간이나 정성을 드린 것이 분하였다. 조신은 숨을 헐덕이며 낙산사로 올라왔다. 올라와서는 댓바람 본당으로 뛰어 들어 갔다.

들어가 보매 아까 정성 드리노라고 켜놓았던 촛불이 아직 도 깜틀거리고 있다. 조신은 부처의 맞은편에 딱 버티고 마 주섰다.

억분하기 때문에 찡그려지는 얼굴, 떨리는 사지─ 부처는 조신의 발길에 채어서 삐뚤어졌다.

『그래 이 놈, 그 정성을 떼먹는단 말이냐? 영험? 너 같은 것에게 영험이 다 뭐냐? 내가 어리석다. 너한테 속기를 사년─』

사람 없는 고요한 본당에 들어오매 이젠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조신은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거꾸러져서 통곡하였다. 온 세상이 눈앞에 꺼져 없어진 듯하였다. 아까 우물 곁에서 그 비보를 들은 때부터 목구멍으로 치받쳐 올라오던 울음을 한 꺼번에 쏟아 놓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면서 통곡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하고 통곡한 끝에 기진한 조신은 그 자리에 넘어져서 혼혼이 잠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꿈결같이 들리는 소리─ 부드러운 손이 조신의 어깨를 가 만가만 흔든다.

조신은 벌떡 깨었다. 눈을 뜰 때에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조신은 일어났다. 일어나서도 말도 못하고 눈만 멀찐멀찐 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 사이 사년 간을 오매불망하던 김랑이 와 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 아!』

마치 반벙어리였다.

『대사!』 머리를 푹 숙이는 김랑─

『아, 웬 일이시오?』

『대사! 용서하세요. 그 언제 대사를 한 번 뵈온 뒤 부 터…. 그 사이 사년 간을 꿈같이 지내다가 부모님의 엄명으 로 출가라고는 했지만…』

『김랑! 김랑!』

『지금 몸을 빼쳐 도망해 왔읍니다. 용납해 주세요.』

『아, 금…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꿈이냐? 꿈이면 깨지 말과저. 조신의 두 눈에서는 눈물만 비오듯 하였다. 너무 격동된 찰나, 입을 벌려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저녁부터 조신의 그림자는 내리군(捺李郡) 일대에서 사 라져 없어졌다.

이튿날 조신과 그의 아내는 조신의 고향에 나타났다.

작다란 오막살이를 하나 장만하고 그들은 여기 사랑의 보 금자리를 이루었다.

한때 너무도 분하여 욕하였던 부처이언만 지금 김랑이 제 품으로 들어오고 보니 이것도 부처의 영험이라, 조신이 비 록 환속은 하였다 하나 부처에 대한 정성은 다시 일어났다.

『여보세요!』

『왜 그러우?』

서로 마주 얼굴을 보고는 싱긋이 웃는 젊은 내외─ 꿈과 같았다. 꿈과 같았다.

사년 간을 밤낮으로 두고 사모하던 여인을 지금 집안에 데 려다 놓고 아내라 부르게 되었으니, 조신의 마음은 마치 하 늘에 오른 듯하였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초라한 생활이었다. 아침에 나가서 벌지 않으면 이튿날 먹을 것이 없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 들은 이 생활에 만족하였다. 사랑하는 아내 있으니, 사랑하 는 남편 있으니, 고생이 고생답지 않았고 가난이 가난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즐겁고 기쁘기만 하였다.

하루 종일 나가 벌어서 명일의 생활비를 구하여 가지고 피 곤한 몸을 집으로 돌이킬 때는, 신체는 비록 죽게 피곤했으 나 마음은 희망으로 들뜨고 하였다. 집에서 기다릴 아내의 모양을 머리고 그려 보면서 싱글벙글 집에까지 이르면 그의 젊은 아내는 문 밖에 나와 기다리다가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얼마나 곤하세요?』

『곤하기는 뭘 그만 일에─』

내어던지는 이 말에 미소로써 응하는 젊고 이쁜 아내. 하 루의 피곤이 무엇이랴. 이 미소를 만나면 해를 본 서리와 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여보!』

『네?』

『전에 그때 말야.』

『그때란 언제란 말씀이야요?』

『아따, 그때─』

『아따 그때가 언제야요?』

『에익 요것!』

『호호호호, 말씀하세요.』

『그때 왜 대문간에서 돌아보고는 그냥 들어갔소?』

『그럼 어떻게 해요, 안 들어가고?』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해 보지.』

『망측해! 왜 당신은 아무 말씀도 못하셨어요?』

『내야─ 내야 중이 아닌가?』

『내야 처녀 아니야요?』

지나간 시절의 첫번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즐기는 젊은 부처─

『여보, 사 년을 오죽이나 안달했겠소? 나는 중이요, 당신 은 태수댁 소저. 이루기 힘든 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부 처님께 억지를 쓸 때 오죽이나 애타고 속상했겠소?』

『그래도 당신은 사내라 마음대로 나다니시기나 했지, 나 는 나다니지도 못하고 꾹 백여서 혼자 속을 쓰노라니─』

사 년 전의 상사를 다시 되풀이하는 젊은 부처─

이 한 쌍의 꾀꼬리의 노는 양에 동리의 처녀 총각들은 한 숨을 쉬고 젊은 과부는 바람이 나고 할머니들은 수군거리고 영감네들은 웃었다.

이리하여 꿈에나 바랐던 행복의 세월은 고요히 고요히 흘 러갔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사 년 간을 사모하던 두 사람이라 처음은 끌과 같이 달았 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괴로운 세계는 이 젊은 부처에게도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 사 년, 오륙 년 간 은 그래도 사랑의 긴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긴장 시기 를 넘어서면서부터는 현실의 괴로움이 차차 이 젊은 부처의 생활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 생활이었다. 어찌 어찌하여 하루를 벌지 못하면 이튿날은 벌써 끼니를 굶지 않을 수 없는 그들 이었다. 사람의 몸은 무쇠가 아니라 때때로 병이 나는 때도 있었다. 날씨라는 것도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지라 것 도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지라 벌이를 못 나갈 때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촐촐 굶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비록 굶는 한이 있을지라도 서로 사랑의 긴장이 다분히 있는 동안이라 굶는 것도 그다지 쓰라리지 않았으 나, 그 긴장이 좀 플리면서부터는 차차 짜증도 나기 시작하 였다.

『여보, 오늘 굶는구료.』

『그러니 할 수 있나?』

『할 수야 없지만 딱하지 않소? 벌써 사흘째구려.』

『사흘이 열흘이라두 내가 일어나야 어떻게든 하지. 몸이 아프니 어떡허우?』

『우리가 서로 만난 것이 불행이외다. 당신은 당신대로 세 달사(世達寺) 지장으로 지나시구, 나는 나대로 최씨 집 며느 리로 있어야 될걸. 무슨 바람에 뛰쳐나와서…』

병든 남편의 앞에서 아내는 이런 불쾌한 넉두리조차 할 때 가 있도록 그들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일찌기 농사 짓는 법이나마 배웠어야 그래도 어떻게든 생 활의 안정을 얻을 것인데, 어려서부터 부처를 섬긴 조신은 농사지을 줄을 몰랐다. 게다가 몸도 그다지 튼튼한 편이 못 되었다.

농사 지을 줄을 모르는지라 막벌이 한 가지 밖에는 호구지 책이 없는데 몸까지 약하고 보니 그야말로 삼순 구식이었 다.

굶주리고 헐벗은 내외는 인젠 신혼 당시의 긴장까지 풀리 고 굶으며 먹으며 이 고생 바다를 하루 또 하루 헤엄쳐 나 가는 것이었다.

몸이 약하고 보니 식구는 단 둘이나마 그 두 식구의 호구 조차 당할 수가 없어서, 마지막에는 두 식구가 다 벌이로 나섰다.

아내는 삯빨래, 삯바느질, 온갖 어려운 일을 다 하였다.

남편도 또한 힘이 자라는 온갖 일을 다하였다.

그러나 푼푼이 버는 이 벌이로는 저축도 할 수 없고 겨울 에는 헐벗어 떨고 밥 대신 죽으로 연명을 하여 가면서 허덕 허덕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나이가 삼십 고개도 넘어서고 사십 고 개도 넘어섰다.

그들이 서로 만난 지 어느덧 삼십 년이 지났다. 그 때는 그들은 더불어 백발이 성성한 늙은 내외가 되다.

그 동안에 자식이 다섯이 생겼다. 열다섯 살 나는 맏이로 비롯하여 다섯 명의 자식이 울룽줄룽 그들의 ■

단 두 식구때에도 호구가 곤란하던 그들이었다. 지금 도합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자니 입에 풀칠조차 힘들었다.

새벽 동틀녘쯤 되면 그들 늙은 내외는 뿔뿔이 헤어져서 벌 이를 나간다. 벌이를 나갔다가는 저녁도 기울어서야 겨우 돌아온다.

어버이들이 벌이를 나간 뒤에는 좁고 어둡고 침침한 오막 살이에는 다섯 아이가 눈이 휑하여 집을 지키고 있다. 배 고프다고 보채는 갓난애로 비롯하여 조금 철이 들은 맏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굶주린 배를 부둥켜안고 어버이들이 벌어 가지고 돌아올 쌀을 기다리고 있다.

날이 기울어서 그래도 제집이라고 찾아 돌아오는 내외─ 그러나 피곤한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 받을 겨를이 없었 다. 말없이 우굴우굴 끓여서 들여놓는 죽밥을 말없이 퍼먹 고는 다먹기가 바쁘게 자리 속으로 기어들어서 자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튿날은 또 날이 밝기도 전에 제각기 제 벌이를 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수년내로 이 부처는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서로 사괴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말을 한다면 짜증 뿐이었 다.

조신은 때때로 한길에서(벌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정신 없이 앉아서 지난 일을 생각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렇듯 그리고 사랑하던 사람을 아내로 맞을 때에 어찌 오 늘과 같은 참담한 날이 장차 있을 줄 꿈에나 생각했으랴.

봄동산과 같은 즐거운 꿈이 장래 영구히 계속될 줄만 믿었 다.

그 날의 검던 머리가 성성한 백발로 변한 오늘에 앉아 과 거를 돌아 보건대 무상(無常)의 한 마디로서 끝이 날 것이 다.

하기는 신혼한 뒤 한 동안은 즐겁기도 하였고 재미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즐거운 기간이 단 며칠이었더냐! 그 뒤에 이른 빈곤─ 검던 머리 희게 변한 오늘까지의 사십 여년 간 을 악을 쓰며 싸와 오노라고 천천히 인생을 즐길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 동안에 울룽줄룽 생겨나 어린것들. 하나이 생기고 둘이 생기고 셋 넷 다섯이 순식간에 생겨나서 인제 는 삼순 구식조차 힘들게 되었다.

한때 예쁘던 아내의 자태는 어디로 사라졌나? 한때 즐겁던 그 생활은 어디로 사라졌나?

『꿈이다! 꿈이다!』

세달사의 지장으로서 부처를 섬기며 안온한 일생을 보낸 편이 훨씬 좋지를 않았을까?

우두커니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할 때는 그의 늚은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들은 종내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어디로 간단들 더 생활이 펴리라고 생각한 바는 아 니되, 행여 다른 데는 좀 나을까 하고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떠나서 정처 없는 길을 나섰다.

어린것들은 아비 어미가 하나씩 둘러업고 나머지 세 자식 은 손목을 덜레덜레 끌고 길을 떠났다.

늙은 남편은 어린것 하나를 둘러 업고 앞서서 묵묵히 걸었 다. 그 뒤 한 서너 걸음 떨어져서 늙은 아내로 어린것 하나 를 둘러업고 역시 묵묵히 걸었다. 손목을 서로 잡고 어린것 셋이 그 뒤를 따랐다. 서로 한 마디의 말도 사괴지 않았다.

이 문간에서는 한 술 밥을 얻어서는 남편이 먹고 저 문간 에서 한 술 밥을 얻어서는 아내가 먹고, 다른 데서는 아이 가 먹고, 이리하여 번갈아 겨우 먹어가면서 표박의 길을 방 랑하였다. 불행히 집을 못 얻어 만나는 때는 사흘을 굶기가 일쑤였다.

『아빠, 배고파!』

『엄마, 다리 아파!』

배도 고플 것이다. 다리도 아플 것이다. 그러나 배고프고 다리 아파도 그냥 가야 집을 얻어 만날 것이고, 집을 얻어 만나야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는 형편이라, 배고파도 그 냥 가고 다리 아파도 그냥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밤에는 벌에서 잤다. 자리가 있으랴, 이불이 있으랴. 하늘 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돌을 베개로, 일곱 식구가 굶주린 배를 붙안은 채 곤히 쓰러져 자는 것이었다.

어떤 해 가을 날, 그들의 표박의 발은 해현령(蟹縣嶺)에까 지 이르렀다.

오늘 안으로 이 嶺을 넘어서야겠는데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자, 어서 가자.』

늙은 남편은 앞서서 갔다. 그 사이 인가를 얻어 만나지 못 해 굶은 지 나흘째였다. 어린것 셋은 그래도 어떻게든 목을 좀 추기게 하고 열 다섯의 큰애와 늙은 내외는 그 사이 샘 물로만 채우고 한 것이었다.

고개를 넘으려니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지 않고 걸음마다 주저 앉아지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지 않으면 여기서 일곱 식구가 그냥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판이라, 없는 기운을 다 내고 없는 악을 다 써가면서 가파로운 영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가지 못하여 맏아들이 불렀다.

『아버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아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서 가!』

『아버지, 잠깐 쉬어서 가.』

『어서 가자.』

그냥 갔다. 좀 가다가 돌아보니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야!』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이놈 어디 갔어?』

『글쎄요. 아마 곤하니까 쉬는 모양이지요.』

『애들아, 형 어디 갔나?』

『몰라요.』

늙은 아비는 혀를 채었다. 그리고 업었던 애를 내려놓고

『자식도─』

중얼중얼 욕을 하면서 다시 아래로 길을 더듬었다.

좀 내려가서 보니 아들은 아까 제 아비에게 쉬어 가자고 청하던 그 자리에 엎디어 있다.

『야!』 대답이 없다. 아비는 가까이 갔다. 가서 발로써 아 들의 엉덩이를 흔들었다.

『야!』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가슴이 철썩 주저앉아지며 아들의 머리를 추켜 들고 보니 아들은 벌써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야 이 자식아. 야 야! 정신차려! 밥엣다!』 부르짖어 보았 으나 소년의 눈은 다시 뜨일 길이 없었다.

남편이 내려가서 다시 올라오지 않으므로 아내도 아이들을 끌고 뒤따라 내려왔다. 내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서로 얼 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외의 늙은 눈에서는 눈물만 연하려 흘렀다.

이윽고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굶어 죽었구려.』

거기 대하여 내어던지는 남편의 대답─

『굶기는? 오늘 아침에두 냉수를 두 대접이나 먹었는데!』

아내도 남편의 이 대답의 속뜻을 안다. 알므로 다시 아들 의 불쌍한 주검편으로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다.

『좌우간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으니 길가에라도 묻어야 지.』

『이게 웬 일이오?』

『그렇고 그렇지! 웬 일은 웬 일?』

좌우간 앞길이 바빴다.

죽은 아이는 죽은 아이려니와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지금 겨우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까지도 어찌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없는 힘을 다하여 거기 구멍을 하나 파고 소년의 시체를 묻었다.

길이 바쁘기 때문에 다시 떠나는 그들─ 그러나 발길이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불쾌한 듯이 연하여 코를 킁킁 룽 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지만 아내는 돌아 보며 돌아보며 산을 기어올랐다.

방랑은 그냥 계속되었다.

이리 저리로, 헐벗은 몸으로 굶주린 배로 방랑을 계속하는 이 여섯 사람의 일행은 우곡현(羽曲縣)까지 이르러서는 더욱 큰 곤란에 직면하였다.

내외가 한꺼번에 병이 난 것이었다. 늙고 헐벗고 그런 굶 주리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 얼른 쾌차할 바이 못되었다.

『어떡하려우?』

이제는 생활이라는 데 기진맥진한 그들이었다.

『움막이라도 치고 여기서 겨을을 날밖에 없지.』

나무 부스러기, 거적을 여기 저기서 주워다가 되는 대로 움막을 하나 쳤다.

하여간 거처할 만한 움막이 생겼다. 움막은 생겼지만 벌이 할 내외가 넘어졌으니 여섯 식구가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 나?

하릴없었다.

『야, 너 나가 밥 좀 얻어와!』

열 살 난 계집애가 바구니를 끼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겨우 열 산 난 계집애가 나서서 얻어 오면 얼마나 얻어 오 랴.

식구는 여섯 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효에….

되는대로 거적을 둘러친 움막 안에서 병들은 늙은 내외는 느른히 누워서 앓고 있고, 어린애 셋은 우들우들 떨면서 오 그리고 있고─ 하늘에는 해가 있고 땅에는 곡식이 있다.

하지만 모든 이 천혜에 멱감치 못하는 가련한 식구는 오직 열 살난 계집애가 바구니에 얻어 가지고 올 양식의 분량을 상상하면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외는 서로 말도 사괴지 않았다. 말하자면 짜증이 요, 짜증도 할 기운이 진하였는지라, 자리를 나란히하고 누 워 있으나 다른 나라의 사람 모양으로 서로 보지도 않았다.

자기네의 환경을 잘 아는 세 어린애는 조르지도 않고 콧물 만 훌쩍거리며 묵묵히 있는 것이었다.

이 움막 안에서는 사람의 버스럭거리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한 때도 나본 적이 없었다.

웃음과 이야기를 잊어버린 생활─ 이 식구의 얼굴에서 웃 음의 그림자를 본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이요, 그 뒤아직 웃 음이 나타나 보지 못하였다.

『에 추워!』

행인들은 두꺼운 옷에 싸여서도 추위를 호소하는 겨울에도 이 움막에는 추위를 호소하는 소리조차 안 들렸다. 맨땅 위 에 거적을 깔고 역시 거적을 덮어서 겨우 추위를 지탱하기 는 하지만,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빠져 나갔다.

그러다가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묵묵히 이 추위를 겪을 뿐이다. 몸을 사시나무와 같이 떨 면서<으으으으>하는 신음성을 약간 내는 뿐이었다.

그 어떤 겨울날, 이 암담한 움막에서 또 한 개의 비극이 생겼다.

동냥 바구니를 끼고 양식을 얻으러 나갔던 계집애가 동리 개에게 넙적다리를 물려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돌아올 때는 겁결에 달음박질로 돌아왔다. 총알과 같이 이 움막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그러나 들어와서 넘어져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아야!』

기운 없는 신음성만 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죽겠구나. 아이 어머니, 나 살려 주!』

한 마이 한 마디씩, 끊어서 내는 이 기운 없는 신음성─ 그러나 어찌하랴. 부르는 아버지, 부르는 어머니, 다 역시 누워 있는 몸이요 그 아래로는 여덟 살, 여섯 살, 네 살의 철없는 애들만 있는 것을.

계집애는 밤 새도록 기운없는 신음성을 계속하였다.

새벽녘에 가서야 신음 소리가 안 들리게 되었다.

신음 소리가 안 들으므로 잠이 들었나 하고 아비가 손을 더듬어 만져 보니, 계집애의 몸은 벌써 얼음장과 같이 차게 되었다.

『야, 야! 야!』 부르고 흔드나 대답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밝은 날 아침, 늙은 아내가 몸을 수습하며 일어나 앉았다.

『여보세요.』

『왜, 그러우?』

오래간만에 서로 부르고 불리는 말이었다.

『가만 생각해야 이젠 달리 차보를 대야겠소이다.』

정색하며 하는 이 말에 남편은 머리를 기울였다─

『어디 말해 보오.』

『우리가 처음 만날 때는 당신이나 내나 다 한창 청춘으로 살림도 재미나고 흥이 나지 않았소? 맛있는 음식 한 가지가 생겨도 서로 나누어 먹고, 따뜻한 자리도 서로 함께 즐기고, 그야말로 아기자기한 살림이 아니었소? 함께 만난 지 삼십 년 간에 정도 깊고 은애도 깊어서 좋은 연분이라고 생각했 더니, 뜻밖에 병이 걸리고 몸이 쇠약하고 보니, 기한이 심하 고 남의 문전에 걸식을 하는 창피한 일까지 지금 겪고 있는 처지구려. 살림이 그렇게 되고 보니까 내 배 고프고 아이들 배 고프고 그것 채우기에 겨를 없으니 어느 하가에 내외간 의 재민들 보고 서로 함께 담소할 때라도 있겠소? 웃음도 옛날 꿈이요 담소도 옛날 꿈이요, 지금은 내게는 당신이 짐 이되고 당신께는 내가 잠이 된 셈이구려. 이미 이렇게 된 이상에 또 가만히 생각해야 장래 언제 다시 즐거운 날이 있 겠소?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떳떳한 일이니, 일시의 의리라는 것을 끊고 서로 갈라지고 마는 편이 짐이 가벼워질 것 같구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이 말에 대하여 남편은 한참을 대답치 못하였다.

한참을 머리를 수그리고 숨만 씩씩 하다가는 머리를 들었 다.

『할 수 없소. 지난 삼십 년을 꿈으로 알고 각각 그럼 헤 어집시다. 자식 다섯 놈 중에 둘은 잡아먹고, 남은 것 세을 당신 하나, 나 둘, 이렇게 갈라가지고 서로 떠납시다.』

『네, 이제 얼마를 더 살지 못할 늘그막에 망령인 것 같지 만 눈앞에 다닥친 기한(飢寒)을 어떻게 하겠소? 나는 우리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이리하여 삼십 년 간의 동고동락을 총결산하고 늙은 내외 는 여기서 서로 남북으로 길을 나누게 되었다.

어린애의 손목을 끌고 병든 몸을 혹독한 겨울 바람에 쏘이 면서 북으로 북으로 가는 아내의 초라한 양을 바라보며 조 신은 그 곳에 서서 한없이 울었다.

『우─, 우─』

자기의 신음성에 스스로 놀라서 조신은 펄떡 깨었다.

한참은 정신을 못 차렸다. 두리번 두리번 한참을 살펴본 뒤에야 겨우 자기의 주위를 이해하였다.

『아아, 나는 아직 독신이로다!』

김랑과의 삼십 년 간의 결혼 생활이라 하는 것은 한낱 꿈 이었다. 김랑이 시집을 갔다는 소문을 듣고 본당으로 뛰어 와서 통곡하다가 곤하여 잠든 틈에 기나긴 꿈을 꾼 것이었 다.

자기의 사위를 이해하면서 제일 먼저 그의 마음에 울린 생 각은 자기는 아직 독신이라는 점이었다.

자기는 아직 독신이다. 그것은 한 개 꿈이다.

조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까 발길로 차서 비스듬히 돌아앉은 불상을 황급히 도로 바로 하여 놓았다. 그리고 조 신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렸다.

『알았읍니다. 이 미련한 인생이 세상이라는 것이 그런 쓰 고 괴로운 것인 줄 모르고 거기를 가려고 사년 간을 축원을 드렸읍니다. 이 미련한 인생을 그래도 사랑하셔서 어리석은 기원을 성취치 못하게 해주신 높으신 뜻을 이제야 겨우 깨 달았읍니다. 용서해 주십사. 그리고 이 미련한 인생을 끝까 지 지도하고 가르쳐 주십사.』

미련한 자기를 깨쳐 주기 위하여 그 기다란 꿈으로써 가르 쳐 주신 부처의 사랑에 조신은 진심으로 감읍하였다.

고스란히 깊어가는 밤.

김랑을 자기에게 달라는 기원을 드리노라고 켜 놓았던 불 이 아직도 깜틀거리는 앞에(이제는 마음의 눈이 뜬) 조신은 경건한 태도로 엎드려서 예배하고 또 예배하였다.

밝는 날 조신은 해현령을 더듬어왔다.

꿈에 자기의 맏아들을 묻은 자리를, 기억을 더듬으면서 찾 아갔다.

거기 꿈에 아들을 묻은 자리를 파 보니 그 자리에서는 돌 미륵 하나가 나왔다.

이것을 얻어낸 조신은 그 미륵을 정히 씻어서 절로 가지고 와서 봉안하였다. 그런 뒤에는 곧 행장을 싸가지고 길을 떠 나서 서울로 올라갔다.

『지장의 임(任)을 사면하겠읍니다.』 세달사로 돌아와서 주지에게 사임장을 바친 뒤에 조신은 세달사를 나와서 산수 창명한 곳에 새로이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다.

일찌기 인생의 허무맹랑한 것을 꿈에 본 조신은, 다시는 잡념에 붙들리지 않고 생애를 고요히 불도(佛徒)로써 보냈 다.

快適須臾意巳閑
暗從愁 老蒼顔
不須更待黃梁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藏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贓
何似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一九三五年 六月 <月刊野談>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