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개소문과 당태종

도성 안은 평시와 조금도 다른 데가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작년도 재작년도 그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사아치는 가게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노인들은 한가스러이 길거리를 거닐고, 장인바치는 여전히 이마에 핏대를 세워가지고, 마치를 두르며― 솔개는 하늘을 날고 쥐는 땅을 기고….

“이럴까?”

신라(新羅) 사람 구문사(仇文司)는 자기의 예기, 또한 천하의 통례(通例)와 딴판인 이 고구려 서울(평양)의 오늘의 광경에, 의외의 얼굴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당사(唐使)가 이 서울에 돌아온다. 더구나 이번의 당사는 보통 다른 때(자기네 나라인 신라 등지에도 오는) 그런 따위의 낮은 관원이 아니요, 당나라에서도 천자[唐太宗[당태종]]의 신임 두터운 높은 관원― 사농승상(司農丞相) 현장(玄獎)이다. 더구나 천자의 내사(賚賜) 친서를 받들고 온다. 자기네 본국인 신라(뿐 아니라 천하 어느 나라이든)에서는 이런 높은 관원은 커녕 얕은 관원일지라도, 명색이 ‘칙사’혹은‘상사’라 붙는 이상에는 미리부터 그 맞이 준비에 떠들썩하며, 위아래를 통하여 무슨 명절이나 맞는 듯이 야단법석한다.

그런데 이 고구려 서울은, 보통날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다. 너무 평온하므로, 미심질로, 오늘 사실 황사가 오기는 하는가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오기는 틀림없이 온다 한다.

일찍 신라에 있을 때부터 들은 말이 있기는 있다. 고구려는 자기네 나라의 실력을 믿는지라, 다른 나라들 같이, 중원의 대국만을 천하 유일의 나라, 다른 나라는 죄 번병국(藩屛國)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네의 고구려도, 당나라와 대등의 국가라는 점을 스스로 믿고, 이전의 수(隋)나라 지금의 당(唐) 나라를 모두 동등국으로 친다고.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던 구문사는 여기서 비로소 그 증거를 보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두세 가지의 속담말이 지금의 이 고구려의 태도를 보매 저절로 생각났다.

연하여 수나라의 대군을 잔멸시켜, 나중에는 수나라라는 국가까지 무너 Em려 놓았고, 또한 그 뒤를 이은 명나라의 십만 이십만의 대군도 연하여 잔멸시켜 은연히 동방의 강대국을 형성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역(禹域)의 화종(華種)이 못되고 동방 오랑캐[東夷[동이]]의 하나로서, 참람되이 대성인(大聖人)의 친사(親使)를 맞음에 이렇듯 무례하랴.

이런 오랑캐 나라는 어서 없이해 버려야 할 것이다.

본국 대장군 김유신의 밀령을 받고, 염탐으로 고구려에 잠입해 있는 구문사였다.

신라는 고래로 고구려에게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 원수의 고구려에게 일 봉(一棒)을 가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수나라 당나라도 어린애 다루듯 다루는 강대국 고구려를, 약소국인 신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연해 수나라 당나라에 호소해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수,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에게 큰코를 다친 일이 있느니만치, 신라의 애걸에, (대국의 체면상 내 나라 힘이 모자란달 수도 없어서) ‘고구려는 예교(禮敎)를 알고 또한 번업(藩業)을 잘 지키니, 칠 필요가 없다. 너희네끼리 의좋게 지내거라’고 피해 버렸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나라의 피하는 까닭도 짐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구려가 강대하다 할지라도, 황군(당군)의 강성으로써 북방을 치고, 당군과 신라의 연합으로써 남쪽을 쳐서, 남과 북에서 협공을 하면,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방략으로써 당나라를 꾀었다.

그러는 일방, 염탐을 고구려에 들여보내서, 고구려가 상국을 업수이 여기는 태도 등을 연해 당나라에 보고해서, 당나라로 하여금, 겁보다도 증오심을 앞서게 하여, 당나라를 충동하고….

그런 필요 때문에 고구려에 와 있는 구문사였다. 첩보 재료를 더 속히 더 많이 얻기 위하여, 고구려의 자그마한 벼슬까지, 얻어 하고 있었다. 벼슬의 지위는 얕으나마 긴하기는 여간 긴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권세를 한 손에 잡고 있는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막리지는 병부상서(兵部尙書)에 해당하는 벼슬)의 사록사(私錄事)였다. 그러매 지위는 얕으나 구문사의 염탐 용무에는 꽤 긴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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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唐使)는 그날 낮이 기울어서 입성하였다. 지금껏 삼백 리, 오백 리의 길맞이의 경험만 가지고 있는 당사 현장은, 이 쓸쓸한 여도(麗都)에 적지 않게 불쾌하고 불만한 모양이었다. 그의 받은 중화(中華)적 교양과 예의가 있는지라, 그 불만을 표면에까지 나타내어 야료를 하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내색은 분명히 불쾌하였다. 많은 수원들에게도 말도 없이, 어디가 숙소 혹은 객관인지 물어보는 일도 없이, 턱으로 전방(前方)을 가리켜서, 수레를 정처없는 전방으로 내어몰았다.

아무리 고구려라 할지라도 사신의 묵을 객관과 사신을 맞아 대접할 접사관은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맞을 사람을 맞으러 마주 나가지 않고, 사신이 스스로 객관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당사의 일행은, 불쾌한 마음을 품고 묵묵히 이 십만 호의 대도시를 전방으로 전방으로 내몰았다.

사신 일행이 지나가는 소민(小民)의 인도로 객관을 찾아든 것은, 밤도 초저녁은 지나서였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 가시기에, 혹은 먼저 만나야 할 가까운 분이라도 계신가 했지요.”

조롱인지 진정인지 모를 이런 영접사를 들으면서.

때는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삼년,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십팔년 사월―그 해 정월에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던 데 대한 답례를 겸한 당사였다.

구문사는, 이 당사가 객관에 드는 전후의 태도를 보고, 절실히 느낀 바가 있었다. 자기네 신라에서는 당사라도 오면 위로는 임금을 비롯하여 노소 대신이 그야말로 종과 같이 시종들고 부족한 데나 없는가고 전전긍긍하는데― 그러는 데도 불구하고 당사는, 매사에 트집을 잡고 예절이 어떠니 격식이 어떠니 말썽을 부리는데, 여기서는 이 푸대접에도 일언반구의 불평이 없이, 도로혀 사신측이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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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사는 사흘간을 객관에 무위히 묵어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나라 임금은 몸이 좀 편찮아 사신 접견을 못하겠고, 막리지 연개소문이 만나볼 터인데,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사흘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 사흘간을 당사 일행은 이 나라의 문물제도를 시찰하였다.

무비(武備)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문화 방면의 찬란한 발달에는 눈을 크게 할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중국은 아무리 인류의 꼭두머리요 우주의 주인이요 문화의 근원지라고 자긍하지만, 십 년 백 년마다 나라이 없어지고 새로 생기고, 혁명과 역성 위주(易姓爲主)의 ‘국가놀이’때에 문화가 계통적으로 순조로운 발달을 할 수가 없었다. 자라던 문화는 꺾이고 다시― 새 것이 생기고, 그것이 또 자라 다가는 중도에 꺽이고― 잡연한 문화‘간색〔見本[견본]〕장’인 느낌이 있을 뿐이다.

거기 반하여 이 나라는, 한 나라로 계속된 지 이미 칠백 년, 북방 부여의 웅대한 대자연에서 비롯하여, 현재 평양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군치하(名君治下)의 안온한 국가생활 칠백 년은 이 나라 만성(萬姓)의 문화적 소질을 자유로이 마음껏 배양해 주어 석각에, 건축에, 그림에, 장식에, 또는 방적에, 칠기에, 철공, 목공에― 온갖 방면에 긍하여 찬란한 문화와 능란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견식이 넓고 건실한 현장은 이 점을 알아보고 내심 혀를 둘렀다.

각 방면으로 장차 ‘당문화(唐文化)’란 것을 이룩하여야 할 처지에 있는 현장은, 이 기성의 고구려 문화를 찬찬히 시찰하고 속으로 배운 바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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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에야 만나겠다던 막리지는 이틀 뒤에 갑자기 사신을 불렀다. 틈이 생겼으니 날짜를 다가 만나자는 것이었다.

현장은 수원 두 명을 데리고 이 나라 조방에 들어갔다.

본시 이 나라 사람의 체격이 큼직하여, 보통 민가도 큼직큼직하거니와, 조방은 유달리 높고 넓어서, 왜소한 체격의 주인인 현장은 먼저 이 방에 위압되었다.

인도하는 대로 큼직한 의자에 몸을 잠갔다.

좀 뒤에 저편에서 지끈지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신을 응대하던 이 나라 관원들의 태도가 긴장되었다.

이리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는―.

태산이 이리로 움직여 온다. 그 견고한 마루판장이 지끈지끈하며, 한 태산만한 인물이 배행 두 명을 데리고 온다.

일견 연개소문으로 알았다. 소문에 듣던 바 검(劒)다섯 자루를 차고, 고래 눈을 절반만치 닫고 이리로 이동해 오는 인물이야말로, 동이(東夷)의 나라에 태어나서도 영웅 소문은 천하에 높은 막리지 연개소문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현장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신하가 천자를 맞듯, 길이 네 번 절하였다. 그 위풍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는 틈에 절한 것이었다.

개소문은 손을 들었다. 절을 그만두라는 뜻으로 두어 번 손을 저었다. 그리고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사신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걸터앉았다. 앉으면서 사신도 앉으라는 뜻으로 두어 번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나 위풍에 압도된 현장은 앉지도 못하고 손을 공손히 읍하고 서 있었다.

개소문은 눈을 감았다. 감고 비로소 말하였다―.

“만리 원로를― 동방 상춘차는 아니시겠지.”

“네이. 우리 천자께오서 고구려 나랏님 전에 내새서(賚璽書)가 있읍니다.….”

“어디.”

손을 편다. 천자의 칙서를, 더구나 나랏님께 보낸다는 글월을 달라고 손을 펴는 막리지에게 현장은 공손히 그 글월을 바쳤다.

개소문은 그 글을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내용을 사신은 짐작하시오? 무슨 사연인지…. (잠깐 눈을 조금 떴다가 다시 감는다.) 좌우간 앉으시오.”

현장은 그래도 앉지 못하였다.

“네이. 그 내용은―.”

“그래서.”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신라는 나라를(연해 말을 더듬었다.)―상국에 바치고― 조공(朝貢)을… 성실히 하옵고… 그런데 백제― 는―.”

본시 ‘귀국과 백제는’ 이래야 될 것이지만, 그 날은 나오지 못했다.

“―조공도 게을리 하(옵)고― 또 귀국과 아울러… 신라를… 너무 그….”

문득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눈을 몰래 치뜨고 개소문을 보니, 깜박 잠든 듯, 약하게 코고는 소리가 난다.

현장은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 기다렸다.

꽤 기다렸다. 그러나 개소문의 코고는 소리는 차차 본격화해 간다.

현장은 부러 소리나게 한번 움직였다. 발에서는 쿵 하는 소리도 났다.

개소문은 눈을 번쩍 떴다.

“응? 응? 그래서.”

결국 너무 위압된 현장은, 어서 회견을 끝내고 싶기만 하였다. 개소문은 들었건 못 들었건 간에, 자기의 할 말만 끝내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사오면 신라에 대한 노염을 푸…시고 정벌을 좀 늦구어….”

태종의 분부는 ‘너희 고구려가 그냥 신라를 시달리면 짐(朕)이 명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벌하리라…’는 뜻을 고구려에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현장의 입에서 못 나왔다.

말을 다 들은 개소문은 눈을 뜨고, 손쳐서 막하를 불렀다.

“오늘 아침 남방에서 돌아온 유 장군을 좀 불러라.

막리지의 부름으로 유 장군은 달려왔다.

“유 장군, 오늘 아침 내게 한 보고를 여기, 다시 한 번 뇌이게.”

“네이. 계림(鷄林)의 두 성은 완전히 공략했읍고, 우리 충용군은 기호의 세(騎虎之勢[기호 지세])로 그냥 남진(南進)하는 중이옵니다.”

“수고했네, 물러가게. ―사신도 듣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금 계림의 참람된 죄를 벌하는 중이어. 그러나 이웃나라 천자의 간청도 있고 하니, 내 우리 나랏님께 여쭈어 반사(反師)하도록 하리다. 사신도 아시겠지만 중도(中途) 반사라는 건 패배(敗北)나 일반이야. 적병도 이겼노라고 하지, 고구려가 당황(唐皇)의 간청으로 반사했다고 하겠소? 마는, 내 맡아서 하리다.”

막리지의 이 순순한 말에 현장은 좀 용기를 얻었다. 좀 주저하고는 의자에 몸을 잠갔다.

“막리지. 우리 천자의 소청은, 이번에 한한 것이 아니라, 장래도 계림을―.”

개소문은 그의 커다란 머리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못 들을 소청― 계림과 우리와의 오랜 원혐이 있으니, 즉 예전 수적(隨賊) 입구(入寇)할 때, 북방에 수적을 잔멸시키느라고 남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나적(羅賊)이 남방에서 우리 땅 오백 리를 훔쳤어. 그 행위도 벌하려니와, 우리 잃은 땅도 도로 찾아야겠으니, 장차까지는 약속치 못 하겠소.”

“그게야 기왕지사가 아니오니까. 기왕지사를 말하자면 요동의 제성(遼東諸城[요동제성])은 모두 본시는 중국 군현이었던 게 지금 귀국 당이 됐읍지만, 중국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개소문은 눈을 한번 들어 현장을 보고는 다시 곧 감았다. 무슨 위협미를 띤 눈이 아니었건만, 현장은 몸을 소스라쳐 다시 일어섰다.

“무슨 당찮은 소리― 요동도 본시는 부여의 땅, 한때 중국에게 도적맞았던 것을 도로 찾은 것이지―.”

현장은 꽤 주저하고서, 그의 마지막 말을 빨리 하여 버렸다―.

“그러면 우리 폐하는 정려(征麗)의 사를 일으키실 것이외다.”

“그러면 당황(唐皇)도 수의 양제같이 말고기(馬肉[마육])를 자시고 정강말(腿馬[퇴마])을 타고 분환(奔還) 귀국하시게 될 게요.―자. 만리 길 잘 가시오.”

개소문은 그의 커다란 몸집을 일으켜서, 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들어가려던 발길을 다시 돌이켰다.

“사신. 한데, 당군이 정도(征道)에 오르면 군량은 대개 어떻게 하오?”

“글쎄옵니다. 각자가 아마 자기의 한 달 식량은 몸에 지니고 오리다.”

“글세. 그러면 마음놓이오. 우리나라는 작금 흉년이 계속돼서, 만성(萬姓)이 먹을 게 걱정인데―요행 당인(唐人)이― 백만으로 잡고― 한 사람 닷 되씩 지니고 온다면― 오백만 되 오십만 석― 매명 많이씩 지니라고― 이 나라는 흉년으로 양곡이 부족하니 많이씩 지니고 오도록 부탁해 두오.”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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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은 황황히 귀국하였다.

곧 당 태종께 복명하였다. 무론 복명함에는 자기의 비겁하고 치사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고구려를 과장하여 나쁘게 복명하였다.

태종은 개소문에게 격노하였다.

무론 개소문이 당나라에 순종하고 공순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과거에도 개소문의 마음을 사려는 뜻으로 궁복(弓服)이며 명마, 금전 등을 여러번 개소문에게 하사(下賜)하였었건만, 그 매번을 개소문은 한 마디의 사례도 없을 뿐더러, 천자의 하사품을, 초개같이 여기고 하인배에게 주어 버리고 하였는지라, 현장의 복명이 반가울 만한 것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였지만, 이번의 현장이 천자의 사신으로 그 푸대접도 푸대접이려니와, 태종의 분부를 일일이 조롱하는 태도로 묵살해 버리니, 노염이 클밖에 없었다.

곧 천하에 조(詔)를 내렸다.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은 자기의 임금을 시(弑)하고 대신(大臣)을 없이 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외에, 또 지금 짐(朕)의 조(詔)를 거역하니 이를 토벌하노라.”

그리고 칠월 경부터 착착 고구려 정벌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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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월에 연개소문은 태종께 백금(白金)을 약간 보내며, 사람 오십 명을 함께 보내어 숙위(宿衛)로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취직운동의 뇌물이었다.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는 한낱 조롱이었다.

태종은 장안의 부로(父老)들을 불렀다.

역시 같은 말(요동은 본시 중국 땅이었던 점, 고구려 막리지는 제 임금을 시하고 백성을 괴롭게 하는 흉적이니 징벌한다 운운)로써 부로들을 달래고 그 자손들을 나라에 바치기를 요망하였다.

이런 때에 있어서는 늘 같은 일이 거듭되지만, 부로들은 역시 이 싸움에 반대하였다. 일찌기 고구려 정벌군이 참패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런 때마다 본시 몇백만이라는 큰 무리로 떠났다가, 살아 돌아온 자 겨우 몇천 명 뿐이라는 역사만 가지고 있는지라, 이 명목 모호한 전쟁에 자식을 내보내기가 싫은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결심은 굳었다. 그 동짓달, 태종은 낙양(洛陽)에 이르러, 거기서,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을 갔던 일이 있는 정 모(鄭某)라는 사람을 행재소로 불러서, 의견을 들어 보았다.

역시 반대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 운반도 힘들고, 또 동이가 잘 지켜서 속히 이기기 힘드옵니다” 하는 것이었다. 거기 대하여,

“수 때와 지금을 비할 배 아니니, 두고 하회를 보라.”고 장담하였다. 각 장수들을 명하여 각도(各道)로 나누어 요동에서 모이도록 분부해서 대군을 떠나보냈다.

또 조(詔)를 내렸다. 역시 이전의 것과 대동소이한 중에, ‘이전 수 양제는 백성을 학대하고 고구려 왕은 백성을 사랑했으니, 사란(思亂)의 군사로 안화(安和)의 무리를 치려니 어찌 실패치 않으랴’하고, 이번은 꼭 이길 것이라 하여 이길 연유를 다섯 가지를 들었다.

신라, 백제, 거란(契丹) 등에도 명하여 군사를 내고 합세하게 하였다.

그 해도 지나고 이듬해 사월, 태종은 정주(定州)에서 또 천하를 불렀다.

‘예전 수씨는 네 번 동정(東征)해서 많은 중국 자제를 요동의 황야에 잃었다. 짐은 지금 그 자제의 원수를 갚을 겸 고구려 임금 잃은 백성의 설원도 해주려고 정도에 오르는 것이다.’하여, 부로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리고는 몸소 융복(戎服)을 입고 칼을 차고, 말께 올라 통수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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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벌의 당나라의 대군은 몇백 리의 요동 평원을 사진으로 날이 흐리게 하면서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수나라도 쓴 경험을 하였거니와, 당의 태종도 적지 않게 쓴 경험을 한 고구려 효용의 군사가, 이번에는 웬일인지 도무지 맥을 못 쓰고, 당군 이르는 곳마다 고구려의 성은 함락되고 영토는 유린되는 것이었다.

“이 봐라. 짐의 위력을.”

태종의 의기는 높았다.

연전연승, 승승장구하여, 당군은 동진하였다. 당군이 점령하는 곳마다, 땅 이름을 고구려식에서 당식으로 고쳐서, 개모성(蓋牟城)은 개주(蓋州), 백암성(白巖城)은 암주, 등으로 연해 고치면서 나아갔다.

이리하여 당군은 안시성(安市城)에서 사십 리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태종은 수백 기를 데리고 부근의 산천 형세를 관망하고자 좀 높은 언덕에 올라 살펴보았다.

즉, 전면에 무슨 새까만 줄이, 그 기럭지가 사십 리쯤 되는 것이 아물거리는 것이었다.

“야, 저 세까만 저게 뭐냐?”

“네이.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의 장사진(長蛇陣)이올시다.”

“무얼! 저 사십 리가 넘는 줄이 모두 모두 군사란 말이냐.”

“네이.”

태종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굴의 근육이 자연 굳어졌다.

“내 오산(誤算)이었던가. 너무 고구려가 만만히 지더니, 그거 예까지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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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리지 연개소문.

당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막료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서, 요동에 들었다. 그러나 친병, 친솔병은 하나도 없이 막료들과만 지냈다.

술만 먹었다. 그리고는 잠만 잤다.

변방에서는 연해 패보(敗報)만 이르렀다. 어느 성이 함락됐다. 어느 주가 빼앗겼다. 연해 들어오는 패보에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여전히 술만 불렀다.

막료들은 마음이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망령이 났나. 어쩌면 이 연한 패보에도 눈썹도 안 움직이고 술만 자시고 있는가.

“막리지. ×× 성이 또 함락됐답니다.”

“어? 응, 응,(잠에서 깬다) 으―ㅁ. ×× 성내에는 좋은 꽃동산이 있더니, 모두 군사에게 밟혔겠군. 아까워라.”

“막리지. 이러다가는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나라이 망합니까?”

“에끼! 그런 못된 소리두 하나. 전쟁은 내가 이겼다. 가련한 이세민(李世民―당 태종) 씨, 정강말 타구 장안에 돌아가시겠지.”

그리고는 하품, 기지개.

“△△주도 빼앗겼읍니다.”

“응? 응? 그래? 전쟁은 내가 이겼다.”

지고도 이겼다고 호어하는 막리지―.

드디어 요양성도 있을 수 없어서 피해 나왔다.

전쟁에 쫓겨서 동으로 동으로 옮겼다.

고급 막료 몇 사람만이 막리지의 분부로 어디 수삼 일씩 다녀오고 하는 뿐, 보통 막료들은 영문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은 해를 거듭하기 이 년, 그동안 고구려측에서 한 일은, 그저 쫓기는 것 뿐이었다. 좀 지켜보다가는 성내의 양식들을 죄 옮기던가 불사르고 성을 비우고는 쫓겼다.

당병은 성을 빼앗고 그냥 더 동진을 하면 쫓겨 숨어 있던 무리들이 이 구석 저 구석서 나와서 당군의 뒤를 엄습하고, 교란하고, 양곡 등을 빼앗고는 숨어 버린다. 막리지는 아무 방략도 강구하지 않고, 쫓기는 우리 군사, 항복하는 우리 성의 보고를 듣고는 그저 술만 부르는 것이었다.

어떤 견고한 성 같은 데서는, 좀 버티어 보려고 그럴 만한 꾀를 안출해서 막리지께 아뢰면 막리지는 여전히 잘 듣지도 않고, 코를 골고 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쫓기기를 안시성까지 이르렀다.

백여 리 밖에까지 당의 대군이 이르렀다. 다른 데서면 당군이 백 리쯤 되는 곳까지 이르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하던 막리지였지만 이 안시성에는 일부러 찾아 들어갔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신을 거꾸로 신으며 뛰쳐 나와 맞았다.

“막리지, 대적을 치시기에 얼마나 노심하십니까?”

“내야 술이나 먹고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거니와, 성주는 고성 지키기에 얼마나 애쓰시오.”

아문(衙門)에 들었다.

“이 성내에는 양식은 넉넉하시오?”

“삼 년 지킬 것은 있읍니다.”

“우물은?”

“깊은 우물이 웬만한 시내에 지지 않을 만한 게 수십 군데옵니다.”

“궁시(弓矢)는?”

“넉넉하옵니다.”

“내 한동안 여기 있겠소이다. 오래간만에 양공(楊公)의 명궁(名弓) 솜씨를 좀 봅시다.”

이리하여 막리지의 일행은 안시성 안에 잠겨버렸다. 요동에도 가을이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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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측에서는 이 안시성을 먼저 치랴, 건안(建安)을 먼저 치랴 하다가 안시를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안시는, 성주 양만춘이 굳게 지키는 위에 막리지 개소문이 들어 있느니만치 사기도 크게 떨쳐 그리 쉽게 낙성될 까닭이 없었다.

아직껏 치면 치는 곳마다 항복하는 곳만 겪어오던 당군은, 여기서 뜻밖의 굳은 저항을 받았다. 더구나 당의 태종은, 여기서 그 새 그림자를 감추었던

‘고구려 혼’의 면영을 발견하고, 내심 몸서리쳤다. 그럴 까닭이 없는데 너무도 쉽게 함락되고 하더니, 여기서는 딱 버틴 그 저항력에 벌써 ‘고구려 혼’의 면영을 발견하고, 왜 그런지 공포까지 느꼈다.

높고 견고한 안시의 성은, 밖에서 아무리 활로 쏘아도 용처가 없이 헛되이 살만 허비하는 뿐이었다.

당군은 여기 인력으로, 한 개 산을 쌓기로 하였다. 안시성 내를 넉넉히 굽어볼 만한 높은 산을 쌓고, 거기서 성내를 정찰하고 공격하기 위하여.

연(延)인원 오십만이라는 많은 힘을 들여서 안시성보다 높은 산을 하나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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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당황(唐皇)이 아니오니까?”

성내에서는 막리지 개소문과 성주 만춘이 대작을 하다가 만춘이 깜짝 놀라며 말한다.

그것을 따라 보니, 그 축산 위에는 태종이 몇 명 시신을 데리고 올라서 성내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개소문은 만춘을 보았다.

“성주의 명궁(名弓)의 솜씨―대궁(大弓)말고, 소궁(小弓)을 한번.”

빙긋 웃었다.

만춘은 알아들었다. 소궁을 꺼내어 들었다.

만춘의 손이 한번 움직일 때에, 만춘의 손에 있던 작은 살은, 태종을 향하여 날아갔다.

“왼편 눈을 겨누었는데요.”

라는 말과 같은 순간에, 태종의 손이, 벼락같이 당신의 왼편 눈으로 올라갔다. 들리지는 않지만, 부르짖음을 내는 모양, 그러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솜씨 여전하시구려.”

개소문은 미소하며 만춘을 보았다.

“그물 코는 잡아 죄셨겠지요?”

“그럼. 당적(唐賊) 전멸이지.”

당군은 이 여름부터 차차 양곡이 뒤몰리게 되었다. 아직껏 점령한 곳마다 모두 고구려군이 불사르고 뛰었는지라, 본국의 조〔粟〕를 운반해 왔었는데, 차차 고구려 땅 깊이 들어오자 그것이 힘들어 갔다.

이런 양식난의 위협을 받으면서, 그래도, 연전연승하는 재미에 그냥 따라 오느라는 것이, 이곳(안시)까지 이른 것이었다.

여기서 아직껏 그런 일이 없이 뛰기만 위주하던 고구려가 딱 버티고 맞섰다.

싸움은 지구전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십 리쯤 밖에는, 고구려와 말갈의 병사가 사십 리의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 장사진은 그저 그곳에 움직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 무시무시하였다.

양식난의 위협은, 나날이 가중되고, 안시성은 견고하여 움직일 수 없고, 사십 리 밖에는 무시무시한 것이 복재해 있고― 게다가 가을은 고비를 넘어 차차 겨울이 되어 간다.

여러 가지 이런 점 등으로, 태종은 이 안시성이나 어떻게 처치하고는 그만 회군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적지 않게 품게 되었다. 굳이 반대하고 고집하여 일으켰던 전쟁이거니, 여기서 스스로 물러간다는 것은 좀 안 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번의 싸움에서는 전과 달라 번번이 이기기만 하였다. 인제 회군한다고 패전은 아니다. 패전이 아니요 그냥 승전을 계속해 오다가 회군하면 그래도 참패 분환보다는 좀 나았다.

제일 양곡과 엄동의 위협 때문에, 태종의 마음이 적지 않게 동요될 때에, 안시 성주 양만춘의 쏜 살 한 대가 태종의 왼쪽 눈에 박힌 것이었다.

살은 깊이 박히지 않아, 곧 뽑아 버려서, 한 눈을 잃은 뿐 뒷탈은 없지만, 이날 밤 태종은 장령들을 모아 가지고, 회군할 일을 의논하였다.

누구나 겨울의 위협과 식량의 위협을 받던 위에, 여기서 비로소 그새껏 그림자를 감추었던 고구려 혼의 면영에 접한 장령들은 태종의 의견에 곧 승복하였다.

도망치는 것 같지 않게 순서 있게 회군할 절차나 방략도 대개 의논하였다.

다음날 밤, 당군의 일부는 야음을 타서 안시성을 떠났다.

태종은 그 제일차 회군부대에 섞이어 도망의 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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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밤에 무서운 일이 생기고, 무서운 일이 전개되었다. 사십 리 기럭지를 뻗치고 있던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사진을 날리며 이 도피하는 당군에게 엄살해 온 것이었다.

당군은 포위되었다. 그물 안에 들었다. 놀랍고 무서운 일은 전개되었다.

몇백만인지 모르는 많은 사람이 안시성 근교에서 죽이며 죽이우며, 무서운 참극은 전개되었다.

이 근처 일대는 시산혈해로 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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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은 거진 전멸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 살육의 곳에서는 빠져나온 자도, 곳곳이 지키는 고구려의 유격군에게 붙들리어, 본국 당나라까지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못하였다.

하늘이 내신 사람인 태종―. 간신히 목숨은 유지하여 그야말로 말도 못 타고 정강말로 귀국하였다. 말은 잡아 먹은 것이었다. 시장하여.

“아아,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짐을 이 지경에는 안 빠지게 할 걸.”

태종은 길이 탄식하였다.

이듬해 오월에 고구려에서는 긴 글월이 태종께 왔다. 고구려 왕 보장과, 막리지 연개소문이, 당 태종께 사죄하는 글월이었다. 싸움에 이기어서 죄송합니다…고.

이와 같은 편에, 미녀 둘을 태종께 바쳤다.

‘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이 계집들의 친척의 상심할 일을 생각해서 짐은 받지 못하겠다.’하여 미녀들은 도로 각각 제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 거듭되는 조롱에 태종은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