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讓寧)은 서울 있을 동안은 사오 일에 한 번씩은 잊지 않고 대궐에 사후하여 몇 시간씩 보내고 하였다.

기사년(己巳年) 겨울 어떤 날.

그 날도 왕은 왕이 지금 별궁으로 쓰고 있는 막내아드님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의 사저(私邸)에서 양녕과 마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형님!』

비록 공(公)으로는 양녕과 군신지간이라 하나, 왕은 언제든 양녕에게 대해서 사 분의 형 대접을 깍듯이 하였다.

『사자는 제 새끼가 사자 구실을 감당할 것 같지 못하면 그냥 죽여 버린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도 못하고 참으로 딱하오이다.』

만나는 때마다 늘 듣는 이 아우님의 하소연에 대하여 양녕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한참을 있다가야 비로소 대답하였다.

『전하, 헐 수 없는 일이올시다. 기린(麒麟)은 잠자고 스라소니가 춤추는 시대가 올 모양이니……』

『네 그 스라소니를 형님께서 돌보셔서 과히 숭한 춤이나 안 추도록 지도해 주셔야 할까 봅니다.』

『전하의 분부가 안 계실지라도 신의 힘 자라는껏 해 보기는 하겠읍지만 한 가지 근심은 스라소니도 호랑이의 새끼라 혹은 이 노마의 지휘에 복종할는지가 의문이옵니다.』

왕은 양녕이 마음을 잘 안다. 양녕은 세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양녕은 언제인가 세자에게 관해서 극단의 말까지 한 일이 있었다.

〈국가적 안목으로 보자면 스라소니(세자)와 스라소니의 새끼(세손)는 제거해 버리는 편이 좋겠다.〉

양녕이 세자에게 대하여 가진 생각은 이런 극단의 것이었다.

왕도 양녕의 그 생각이 그다지 비난할 것이 아닌 줄은 안다. 단지 이씨 사직의 만년지책으로 보아서 적장(嫡長)을 버릴 수가 없어서 그냥 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적장(스라소니나마)으로 하여금 좀 호랑이답게 만들어 보려는 것이 왕의 심사였다. 스라소니가 아무리 하여도 호랑이답게 되지 못하면 좋은 호랑이로서 스라소니를 호위케 하여 호랑이로 가식(假飾)이라도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왕은 세자에게 대하여 여전히 만족의 뜻을 보이지 않는 형님의 말에 잠시를 묵묵히 있었다.

한참 침묵이 계속되었다. 한참 침묵 뒤에 이 침묵을 깨뜨리는 왕의 옥성은 약간 떨렸다.

『형님, 마음을 탁 터놓고 형님께 말씀드립니다. 아직껏 사이에 막혀 있던 군신지분이라는 것은 터 버리고, 한낱 형체로서 이 이씨 일문의 일을 형님과 잠깐 의논하겠습니다.』

『…………』

『형님. 내 생각, 내 마음은 이렇습니다. 형님의 의견도 그러시겠지만 내 적출 소생 여덟 가운데서 후사(後嗣)로서 만약 걸출을 취하자면 유(수양)를 취할 것─여기 형님도 이의가 없으실 줄 압니다. 만약 가장 문학이 나은 자를 취하자면 용(瑢─안평)을 취하겠습니다. 여기도 이의가 없으실 줄 압니다. 또 만약 가장 사랑하는 자를 취하자면 염(琰─영웅)을 취하겠습니다. 이것도 형님이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걸출도 버리고 문학도 버리고 애총도 버리고 맏을 취한 것은, 이 까닭도 형님이 잘 아실 줄 압니다. 이것은 취해야겠으니 취한 게지 어느 볼 점이 있어서 취한 게 아닙니다. 스라소니─형님의 말씀과 같이 스라소니지만 맏인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단지 한 가지, 아직도 희망을 둔 것은……』

왕은 말을 끊었다. 뒷말을 할까 주저하였다. 뒷말은 해도 좋은 말인지 아닌지─아직껏 왕 혼자뿐이 때때로 생각해 본 일로서 남의 앞에까지 내놓기는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왕은 잠시 주저하고 있다가 드디어 이 형의 앞에 말하여 버리기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단 한 가지 희망을 둔 것은─형님. 이 말씀은 한 편 귀로 들으시고 한 편 귀로 흘려서 곧 잊어 줍시오. 무서운 말씀이외다. 다른 게 아니라, 세자가 몸이 약한 데 한 가지의 희망을 두었습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식이 몸 약한 것을 다행히 여긴다는 것이 여북하면이니까. 세자가 몸이 약해서 내 생존 중에 타계(他界)하고 세손이 제 아비를 닮지 않아서 영특하면…… 이것이 단 한 가지의 희망이외다. 마음 아픈 희망이지만 이 밖에는 다른 길로는 희망 붙일 곳이 없는가 하옵니다.』

양녕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양녕의 활달한 얼굴에도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전하. 성의(聖意)는 신 이미 잘 알고 있는 배옵니다. 유도 또한 성의를 짐작하는 모양─단지 전하께서 스라소니를 낳으신 것만이 불찰이옵지. 유도 그 인물됨이 (전하께서 더 잘 통찰하실 배옵지만) 호활하고 활달해서 웬만한 작은 감정에는 구애되지 않을 인물이오니까 장래 세자가 대위에 오른 뒤라도 유는 끝까지 신자의 도리를 지킬 것은 신이 장담이라도 하오리다. 단지 세자의 투기가 너무도 괴벽해서 유에게 위해라도 가하는 날이 있다면, 이 사직을 지킬 가장 귀한 기둥을 스스로 꺾어 버리는 셈으로서 사직이 위태로울까 하옵니다. 용(안평)은 단지 문학지사라고 흩볼 인물이 아니라, 만약 세자가 누구를 경계하려면 누구보다도 용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 아닌가 하옵니다. 이 양녕의 눈이 아직껏 사람을 헛본 일이 없아온데, 양녕이 본배, 유는 작은 지위나 절(節)에 구애될 소인이 아니옵고, 무엄한 말씀이오나 전하와 넉넉히 어깨를 겨룰 만한 인물이옵니다. 소홀히 여긴다고 그런 것을 나무랄 인물도 아니옵고, 중히 여긴다고 또 거만해질 인물도 아니요, 아무런 대접을 할지라도 제가 믿는 바대로 꾸준히 해 나갈 인물이옵니다. 경계할 것은 용─대체 문학지사라는 것은 좀되고 간특하고 속으로는 이(利)를 취하고 겉으로는 의를 가식하는 것─전하 천추 만세지후에는 유 있으니 이 사직도 반석과 같겠지만, 유만 없으면 용은 무서운 인물이옵니다. 전하도 보셨겠지만 바둑의 수는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세자의 바둑은 방비를 위주하는 것으로서 방비만 하다가 요행적이 공세를 취하기 전에 이편의 방비가 다 되면 그렁저렁 견디거니와, 이편의 방비가 끝나기 전에 저 쪽이 공세를 취하면 세자의 바둑은 전멸이 되옵니다. 유의 바둑은 공격을 위주하는 것─공세를 취하는 중에 한 점 한 점 자기의 진형도 지켜서 적이 공세를 취할 기회를 안 주고 그러는 중에 적을 전멸시키는 것─용의 바둑은 살살 속임수만 뚫어서 눈을 속여서 기리(奇利)를 취하려는 것─이 세 사람의 바둑은 각기 그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수로 보아서 세자의 바둑이 가장 센 모양이온데, 대국을 하오면 한 번도 제 수로 유를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유가 짐짓 져 주는 일이 있아온데 유가 지면 독이 있는 말로 유를 야유하옵고 유에게 지면 안색을 변해 가지고 다시 두자고 강청을 하옵니다. 패배를 인정치 않고 또 두자고 강청을 하는 모양 등은 과연 그다지 향그럽지 못 한 일……』

『딱한 일이올시다.』

『참 딱한 일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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