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0
10
편집기사(己巳)년이 가고 경오(庚午)년이 이르렀다.
기사년 가을부터 놀랍게 쇠약해진 왕의 건강은 경오년 철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더하였다.
초승에 잠깐 조신들의 하례를 받기 위하여 근정전까지 거동하였던 것이 빌미가 되어 드디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즈음 잦은 한낱 감기쯤으로 여겼더니 환후는 차차 침중하여 갔다.
어떤 날, (보름께 쯤) 수양은 시어소(영웅대군 사택)에 부왕의 환후 문안을 왔다.
『전하. 좀 어떠합신지요?』
몹시 추워하기 때문에 겹겹이 장을 친 침침한 웃곡에 엎드려서 수양이 문안을 드릴 때에, 왕은 수척한 용안을 수양에게 향하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였다.
수양은 수척한 아버님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과거 삼십여 년 간 이 나라의 주제자로서 날고기는 많은 신하들을 마음대로 구사하던 명군의 야윈 면영을 수양은 엎드려서 머리만 조금 들고 부왕의 안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도 아무 말 없이 이 젊은 아들의 눈만 마주보고 있었다. 서로 보는 눈과 눈, 무표정한 듯하고도 뜻깊은 눈이었다.
『야!』
한참 뒤에야 비로소 왕이 입을 열었다.
『네……』
『내 병환은 골수까지 스미었다.』
『…………』
『아마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부다.』
『천만에……』
계속하려는 말을 왕이 막았다.
『아니 네 진정으로 대답을 해라. 그럼 네 생각에는 내가 다시 일어날 때가 있을 듯싶으냐?』
수양은 가슴이 선뜻하였다. 본 바의 이 아버님은 다시 일어날 날이 있음직도 않았다. 자식된 욕심에는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서, 만에 일의 요행을 바라고 싶은 생각도 있기는 있으나 냉정한 이성으로 생각할 때는 이번의 이 병환이 마지막 병환으로 볼밖에 없었다. 그 사이의 과도한 노력 때문에 드디어 스러진 이 아버님의 이번 병환은 그의 전 생애를 막음 할 병환일 것이다.
춘추로 보자면 아직 멀었지만 업적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이 몇 대를 두고 하여도 다하지 못할 만한 업적을 겨우 삼십 년간에 끝낸 이 거인(巨人)은 그 업적의 일단락과 동시에 삶의 막음도 할 것으로 보였다.
수양은 부왕의 하문에 대답을 못하였다. 수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왕은 말을 계속하였다.
『얘야. 이상허구나!』
『?』
왕은 말을 끊었다. 야윈 눈가죽 아래서 눈알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무엇이오니까?』
수양이 재쳐 물을 때에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왕의 눈에는 아직껏 이 왕에게서 볼 수가 없던─동정을 구하는 듯한 가련한 표정이 나타났다.
『너의 집에 누워서 앓고 싶구나!』
『?』
무슨 뜻? 수양은 얼른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부왕을 우러를 뿐.
『너의 집─ 너의 집 후당……』
수양은 깜짝 놀랐다. 눈물이 칵 한 꺼풀 눈에 씌어졌다.
사 년 전─왕비가 승하한 곳. 환후 침중하매 문득 그 방이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왕비(세자며 수양, 안평 등 여덟 왕자의 어머님)도 환후 침중하매 대궐에서 나와서 당신네의 가장 걸출 아드님인 수양의 사택 후당에 나와서 마지막 숨을 들이킨 것이었다. 지금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드님의 집에 누워 있으나, 환후 침중하매 문득 사 년 전 왕비의 승하한 그 방이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수양은 눈에 한 껍질 씌워진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푹 수그렸다.
『전하의 처분에 달렸습니다마는 날씨가 하도 차오니까 환후에 어떠하올는지……』
『아니. 말이 그렇지, 가길 무얼 가겠느냐!』
말이 끊어졌다.
수양은 머리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있었다.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이젠 벌써 사십을 눈앞에 보는 중년 사나이. 그 사상에 있어서든 골격에 있어서든 완숙한 장년으로서의 그는 애상적(哀傷的) 기분이란 것을 잊어버린 억센 사람이었다. 웬만큼 성낼 만한 일은 모두 장자(長者)다이 일소에 붙여 버리고 웬만큼 센티멘탈한 일은 애당초 느끼지도 않을 만큼 호활한 사람이었지만, 이 부왕의 자조(自嘲)를 띈 하소연에는 가슴이 쿡 찔리었다.
부왕의 지금의 심경을 동정하자면 물론 자기의 집으로 모셔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왕을 자기의 집으로 모셔 가면 (그렇지 않아도 사사에 기괴한 에누리를 붙여서 자기를 감시하는) 동궁이 어떻게 생각할까.
다시 회춘치 못할 부왕. 자기 집 후당에서 승하케 되면 부왕의 마음에는 흡족할지 모르나 동궁과 자기의 사이는 더욱 더 트게 될 것이다. 부왕 승하 후에는 동궁이 당연히 국왕으로서 자기의 보필이 없으면 도저치 한 국가를 요리할 수 없는 샌님이다.
동궁과 자기의 사이가 트게 되어, 자기가 국정에서 빠지게 되면 동궁의 시대에 나라를 붙들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서 부왕의 이 가여운 뜻은 듣기가 힘들었다. 부왕도 그 맛 일은 짐작하기에, 스스로 비웃으며 그 문제를 철회하기는 한 모양이나 부왕의 철회를 다행히 여기고 이 문제를 묵살해 버리려니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가련하신 아버님이시어!)
한참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 수양은 조금 머리를 들었다.
『전하. 일기가 하도 차서 거동합시기가 좀 힘들 듯합니다.』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지나가는 말이다. 마음에 두지 마라.』
또 잠시 침묵─
『야.』
『네?』
『마음에 두지 마라.』
『네.』
『그밖에 네게 좀 할 말이 있는데 가까이 오너라.』
『네……』
수양은 무릎걸음으로 바싹 가까이 내려갔다.
『동궁은 아까 다녀갔으니까 오늘 철로는 다시 안 오리라. 네게 좀 할 말이 있다.』
『네……』
왕은 눈을 감았다. 야윈 입술이 몇 번을 들먹들먹하였다.
『너 내 뜻을 알지?』
『네……』
『내 임종 전에 다시 너와 조용히 대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이 기회에 내 마음을 있던 말을 다 하련다. 즉 내 유언이나 다름없다.』
『네……』
『동궁은 약한 분이다. 약하기 때문에 의심 많은 분이다. 네가 붙들어야 한다. 동궁이 약하기 때문에 너를 미워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너는 탓하지 않고 충성을 다 해야 한다.』
『네. 늘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그렇지. 나도 안다. 네 마음을 알기 때문에─그러고 너를 믿기 때문에 이 부탁이다. 알아라. 너를 미워할지라도 너는 그 분을 원망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다.』
『일찍부터 알고 있습니다.』
『또 약하기 때문에 네가 붙들지 않으면 사직까지 위태롭다.』
『그것도 압니다.』
『동궁이 아무리 너를 괄시해도─네게 죽음을 명할지라도 너는 거기 거역을 못한다.』
수양은 눈을 들었다.
『상감마마. 신은 동궁마마의 괄시는 결코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신을 멀리 하시려면 거기는 거역하겠습니다. 신께 죽음을 명하시면 거기는 항거를 하겠습니다. 신이 멀리 가거나 신이 죽사오면 뉘 있어 이 사직을 두호하리까!』
『오냐. 내가 말을 실수했다. 네 충심을 믿는 배요 네 힘을 믿는 배니 네 마음껏 힘껏 동궁을 보좌해라.』
『네. 신도 일찍부터……』
하려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네……』
『어디 말을 해라.』
수양은 말을 더듬었다.
『네. 저─아직 생존해 계오신 전하께 이런 말씀을 여쭙기는 불충 불효한 일이오나……』
『마음에 안 남기마.』
『동궁마마 등극하시게 되오면 마마는 곱게 강녕전(康寧殿)에 모시옵고 신이 사정전(思政殿) 툇마루를 지킬까 이렇게 간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왕은 안정을 치떠서 아들을 건너 보았다. 약하고 기운 없던 눈에 약간 광채가 났다.
『믿는다. 너를 믿는다.』
『지성껏 보답하오리다.』
『또 한 가지, 동궁의 건강이 좋지를 못해.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건 지나친 일일는지 모르나 동궁께 불행이 있는 날에는 세손(世孫)의 장래까지 아울러 당부한다.』
『네. 신의 수(壽)만 넉넉하오면 대대로 몇 대까지라도 주공(周公)의 역할을 다 하오리다.』
『네가 참기 힘들만치 동궁이 괄시를 할 때는?』
『그래도 참으옵지오.』
『참다참다 참지 못하게 되면?』
『백부(伯父)께 의논하겠습니다.』
『아아!』
─내 아들아, 목에까지 나은 이 말을 왕은 꿀꺽 삼켰다.
『백부는 현인이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부께 가라. 네 지혜, 네 힘으로면 웬만치 어려운 일은 넉넉히 꺼 나갈 것이며, 네 참을성이면 대개는 무난하게 넘기겠지만 그래도 당키 어려운 때에는 백부께 문의해라. 동궁도 백부의 말씀은 거역을 못하리라.』
『그럴 생각이옵지만 참을 인(忍)자 한 자만 마음에 굳게 새겨 두면 백부까지 번거롭게 하지 않더라도 감당할 듯하옵니다.』
『음. 열 번 참아서 안 되면 스무 번 참고, 스무 번 참아서 안 되면 서른 번 참고─참고 참아라. 인젠 나도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