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항일 근거지

편집

1. 진격하는 팔로군

편집

종일을 걸어 이날 저녁 우리 일행은 계곡으로 맑은 물이 돌돌 흐르는 어떤 아담한 산촌에 도착하였다. 태항산을 넘 어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처음으로 발견하는 물줄기였다.

개아지가 토실히 불어오른 개버들이 두 언덕에 줄줄이 가 지를 늘이우고 물은 발이 시려울만치 차가웠다. 여기서 먼 지를 털고 몸을 씻고 나니 그야말로 생명의 세탁을 한 것 같다. 먹음직한 청계수로 입가심을 못함이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가지고 온 은가제로 소독을 하자고 해도 소용없다 고 동무들이 웃으며 말린다. 중국 수토에 단련되지 않은 몸 으로 먹어나지 않은 냉수를 마시는 것을 열병을 들이키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이 태항지구에는 명색 모를 악질의 풍토병이 언제나 번성 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노상에서 우리는 창백한 얼굴에 눈이 앙당굴하니 패어 들고 핏기 하나 없이 쪼들쪼들 말라 빠진 병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굴속같이 캄캄한 방안에 드러누워 신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혹은 응달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수수떼 같은 팔다리를 버등거린다. 우리 군정 학교에도 지금 이 풍토병이 만연되어 숱한 학원들이 신고중 이라는 것이다.

아슬아슬 추워 오다가는 몸뚱아리가 와들와들 떨리고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증상이 학질과 비슷하였으나 도무지 '키니 네'로는 듣지 않았다. 하루에 한 차례씩 떨기 때문에 원만한 몸이라도 견뎌 내기 어려운데다 특효약이 없으므로 두석 달 씩 병석에 누워 있기가 예사였다.

워낙 황량하고도 신산한 산중 살림이라 호박국도 마다하지 못할 형편이나 어차피 영양 불량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첫째가는 발병의 원인일 것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작자급의 구호를 내걸고 부대까지 파 는 생산노동에 피로할 대로 피로하였다. 이것이 둘째가는 발병의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몸으로 비나 축축히 맞든지 더위에 덜미어 냉수라고 벌컥벌컥 들이키고 보면 영낙없이 열기를 띠고 턱턱 쓰러진다.

그러니 의사는 의사대로 없는 약으로 고쳐 보느라고 쩔쩔 매고, 취방에서는 취방대로 없는 재료로 영양요법을 쓰느라 고 갈팡질팡 야단이고, 환자는 환자대로 악을 받쳐 고비를 넘기느라고 그야말로 비장한 대병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공작원은 적구에 나가 주사약을 몰래 사가지고 돌아오며, 성한 동무들은 틈을 내서 동매기로 고기를 잡아 입원실로 보낸다. 회복기에는 유달리 입맛이 당기기 때문에 부주의하 여 조금만 과식하고 보면 또 악화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나니 또 하나의 새로운 적을 신변 에 의식하게 되었다. 주야로 기온의 차이가 너무 심하고 게 다가 비도 제대로 오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건조하여 자연 적 조건이 매우 좋지 않은 편이다. 재작년 같은 해는 여름 내내 비 한방울 떨어지지 않아 낟알이란 낟알이 모두 타 죽 고 산과 들의 풀잎까지 말라죽는 그러한 대흉년이었다고 한 다. 그 시들은 풀잎을 들과 산을 헤매서 거의 못 먹는 풀이 없이 모두 뜯어먹으며 가까스로 연명해 온 것이다.

”흔히 일백 열두 가지 풀을 먹었다고 합니다.”

”버들잎까지 먹으면서요?“ 하고 물으니 버들잎까지가 아니라 그것은 상식이나 다름없 다고 한다. 길을 가며 어쩌다가 농가에서 백성들이 훌훌 들 이키는 국물을 들여다보면 좁쌀을 띄운 허엽스레한 호박국 물에 푸르스르한 이파리가 떠 있었다. 애버들잎을 이른 봄 에 뜯어 우려서 쓴맛을 덜어 두었다가 이렇게 끼니마다 두 어 먹는다. 그 시금털털한 냄새가 일종의 향료로 되는 모양 이었다. 하기는 우리나라 버들과는 종류부터 다르다고 한다.

어쨌든 본시부터 이 산 지대의 자연적 조건이 헤아릴 수 없이 각박한데다 해마다 외적의 침해까지 더 덮쳐 산민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황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산중에는 먹는다는 '츠'라는 말은 없고 ' 허'라는 마신다는 말이 있을 뿐이었다.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니라 국물을 들이키기 때문이다. 이 버들잎을 띄운 국그 릇을 골목이나 행길가에 들고 나와 줄을 짓고 앉아서 이야 기를 반찬거리로 삼아 가며 훌훌 들이키는 것이다. 그러다 가 지나가며 인사라도 하는 이가 있으면 국그릇을 들어보이 며, ”허바!”한다.

힘을 받을 만한 국거리가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에 보통 네 번쯤 끊여 먹는 것이었다. 초토화한 근거지의 생활은 이 럴 수 밖에 없었다.

이날 저녁 우리는 객주집에 짐을 부려 놓고 조그마한 잔치 를 벌였다. 그러나 나는 아주 식욕이 감퇴되어 제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친애하는 두 동무가 새 동무 S를 맞이한 기쁨을 같이하고자 특별채를 주문하고 얼량(二兩) 술도 청하 였다.

자그만치 두 냥쭝이면 거아해진다고 해서 동무들은 '얼량 생각 안 나오”, 이렇게 술을 얼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대추로 지은 술이라는데 매우 역하다.

”술까지 사는 바엔 고기붙이도 좀 사보구려.”

서로 못할 말이 없을 만큼 친해졌기 때문에 입맛을 다시니 까 두 동무는 마주 보며 웃었다.

”8월달까지만 기다리시오. 소, 돼지라고는 왜놈들이 토벌와 서 씨알머리도 없이 잡도리하여 이 산간에서 고기를 먹을래 야 먹을 도리가 없는 걸요. 풀냄새가 가시게 되면 산양들을 잡습니다. 근거지에 가서 물고기나 잡아먹읍시다. 이런 팔뚝 만한 것이 곧잘 잡히지요.”

오래간만에 마시는 얼량술이 역하기는 하나 피곤한 몸에 호젓이 새려들었다.

우리는 셰퍼드 군을 객주집에 매어 두고 다시 계곡으로 나 와 다릿목에 앉아 소풍을 하며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 (異方) 사람이 왔다는 소문이 쭈루루 퍼져 여기서도 동네 사 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방 사람이라면 귀자요 귀자 라면 지옥의 악마처럼 여기지만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우리 들이 매우 이상스러운지 차차차차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들 이 이야기를 하는 조선말이며 담배 피우는 꼴, 심지어는 기 지개를 펴는 양까지 신기해하며 서로 옆구리를 찌르면서 키 들거린다. 사내 하나가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 현 동무가 하 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니까 모두 데그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왜놈이 아니라 조선 동지라고 한 소년이 신이 나게 떠들어 댄다. 그리고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은 한마음 한뜻이라는 시늉으로 두 손을 쥐어 흔들어 보인다. 모두 고개를 주악주 악하였다.

이러고 있을 즈음 군복을 입은 저은 사내와 편복 차림의 여병 두 명이 찾아왔다. 여병은 주접없이 우리들의 손을 잡 으며 티없는 웃음을 짓는다. 나부룩한 단발머리가 바람곁에 나풀거린다.

”동무들 메시메시 료(了)……”

우리도 마주 웃으며 인사하였다. 밥을 먹었느냐는 저녁 인 사인 모양이다. 일군이 쳐들어온 서슬에 그들이 주워들은 메시(밥)와 가에루(돌아간다는 말을 안녕히의 인사로 아는 모양)의 두 마디가 유행되어 이들은 이 말을 이방 사람에게 사용하기를 즐겨하는 눈치였다.

이네들은 전방공작을 하던 의무병(醫務兵)들로서 본부로 돌 아가는 길이라는데 평한로(平漢路) 절단의 새 지령 밑에 유 격전이 아주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타 고 들어온 것이 바로 이 평한로이니 며칠만 더 어물어물하 였더라면 불의의 봉변을 당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팔로군 의 금년도 작전방향은 일군을 대성시로 몰아넣고 포위하여 그야말로 고성낙일(孤城落日)을 만드는데 있었다. 그래 각 요소에 널려 있던 일본 경비대와 포대병들은 견뎌 배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놈들이 철퇴를 하면서도 함부로 민가에 불을 지르고 노 략질을 하며 백성들을 죽이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경비대를 포위하는 제가 섰습니다.”

그들은 전선의 피비린 기억을 들춰 내며 여러 가지로 새 소식을 알려 준다. 철퇴 중의 일병에게 길목에서 매복전을 일으켜 산간에는 군마와 병사의 시체가 너저분하였다. 포로 도 전에 없이 많이 끌려 들어오는 차였다. 아무리 생각하여 도 알맞게 잘 새어 들어온 셈이다. 우리 초소의 동무들을 한숨 닿았다고 눈부시게 활약중일 것이다. 퉁소 불던 삐오 넬, 박사 동무, 앓아 누워 있는 백 동무의 일이 생각난다.

우리들은 시냇가로 내려와 이네들과 같이 거닐게 되었다.

여병들은 호도를 한 줌씩 권하면서 우리들에게 노래를 청하 였다. 조선 의용군이라면 어디가든지 선전공작에 있어서 가 요와 무용, 연극 등으로 대인기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필경 좋은 솜씨가 있으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현 동무와 S 동무 가 노래를 좋아하며 그대도 좀 면무식이나 하고 나서 이번 은 우리가 여병들에게 노래를 청하였다.

봉싯거리는 입모습, 소담한 목덜미, 햇슴한 얼굴만을 겨우 알아볼 정도로 어둠이 짙어졌었다. 소리없이 반딧불이 날고 있다. 물 위에 흐느적거리는 개버들가지를 휘어잡고서 여병 들은 부끄러운 듯이 몇 번인가 비비 꼬며 사양하다가 갑자 기 도드라지게 에헴 하고 기침을 하였다. 그리고는 웃음 담 긴 목소리로 애교를 떨면서 새로 들어오는 조선 동지를 환 영하며 아울러 의용군 동무들에게 축하를 드린다고 우스개 로 일장 연설을 하고 나서 하나 둘 셋 하더니 합창을 시작 하였다. 곡조가 제법인 <도라지 타령>이다. 조선말의 발음 도 여간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두어절 합창을 하다가 종내 웃음 소리를 걷잡지 못하고 서로 껴안고 캐들거린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 매우 유쾌한 모양이었다. 의용군이 어느 지구엔가 선전공작차로 나왔을 적에 며칠을 두고 배웠 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인단의 노래며 팔로행진곡, 군가 이런 것도 여 러 개 들러준다. 현 동무와 최 동무도 군가를 따라 불렀다.

조”중 두 나라 뜻을 같이하는 군인들이 친선하여 즐기는 아 름다운 장면이었다. S동무가 말은 몰라도 몸짓 손짓을 섞어 가며 우스운 노래를 곧잘 불러 여병들이 연신 가는 허리를 부여잡고 캐들거렸다. 아주 귀엽고도 명랑한 소녀들로 조금 도 구김이 없이 천진스러워 새로운 세대의 중국 여성을 보 는 듯하였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까 하나는, ”북경!”

하나는 ”광동!”

북경서 여학생 시기에 전쟁을 만난 실눈의 여병은 전화에 몰려 후방으로 이동해 들어가는 대학을 따라 전전하다가 연 안으로 넘어갔었다. 광동서 온 여병은 방사공장의 여공이었 으나 전선으로 나가는 오빠를 따라 실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에 연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공부를 하고 나서 다시 전선 으로 공작을 받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여병들은 문학 예술 방면에도 대단히 취미가 있는 모양이 었다. 최동무를 사이에 두고 이들로부터 그동안 동정을 알 수 없었던 중국 문인들의 일을 대강 알게 되었다. 정령(丁 玲) 부인의 소설 이야기가 나와 《의외집(意外集)》인가 주 워 읽은 기억을 이야기하니까 좋아하며 현재 연안서 활약중 임을 알려 준다. 우수한 기법으로 동북 농민을 그리던 《제 삼대(第三代)》의 소군(蕭軍)이며 입파(入波), 여진우(呂振 羽), 이정(里丁), 오백소(吳伯蕭), 서군(敍軍), 주이복(周而 復), 애청(艾靑), 등 그 외의 여러 문학예술가들도 연안 혹은 변구와 전선에서 공작중이었다. 망명 10년의 일본을 탈출하 여 조국전쟁에 참가한 시인 곽말약은 아직도 중경에 머물러 인민전선진을 이끌고 활동중이나 《자야(子夜)》의 모순(矛 盾)을 비롯하여 애무(艾蕪), 사정(沙丁), 조우(曹禹), 전한(田 漢) 등 대개의 작가는 계림, 성도 이런 곳에 모여서 중공노 선에 호응하여 건필을 휘두르고 있었다. 노신 이후의 중진 모순 선생의 회갑이 금년이라느 말을 듣고 그렇게 연로한 분이었던가 하였다.

더구나 모택동 선생이 문예강화를 발표한 뒤로는 작가의 입장이며 태도, 대상, 방법문제 등이 대단히 밝아지고 구체 화하여 작가들의 활동이 보다 더 정확하고도 적극적인 노선 위에서 더욱 활발히 진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리의 즐거움은 깨어지 고 말았다. 돌아와 침침한 '캉' 위에 드러누우니 빈대, 벼록, 모기가 물어 성화에 눈을 붙일 도리가 없었다. 무너진 담벽 사이로는 빗방울이 부서져 들어와 이불자락을 적신다. 그러 나 세 동무는 이따금씩 정강이를 긁적거릴 뿐 태평세월이었 다. 나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밤이 깊도록 밀려오던 일기 를 정리하였다.

밤중에 수런수런 떠드는 인기척이 나며 군마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셰퍼드 군이 대경실색하여 요란히 짖기 시작하였다. 비는 이미 씻은 듯이 개었었다. 하늘에는 쏟아지는 별이 총총하다. 군대가 들어온 것이다. 퍼런 군복 의 허리동이를 널찍한 혁대로 질끈 동이고 잔등에는 배보 (背褓)와 건량대를 짊어지고 보총을 지닌 행색들이 전선으로 나가는 부대인 모양이다.

모두 문짝 같은 것을 떠다가 마당귀에 뉘어 놓고서 배보를 끄르는 둥 신들메를 푸는 둥 야영준비가 매우 부산하였다.

등잔불을 들고 왔다갔다하며 서로 수선거리기도 한다. 이윽 하여 몇 명이 우리 방을 기웃이 들여다본다. 그들 역시 셰 퍼드 군이 짖는 소리에 놀란 것이다. 이런 군견을 끌고 다 니는 우리들이 정람 의용군임에 틀림없는가가 의심쩍은 모 양이었다. 최 동무가 일어나 들어와 같이 쉬자고 하니까 깨 워 일으켜 미안하다고 할 뿐 뒷손을 치며 굳이 사양하였다.

뜰안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새벽녘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가 느직이 깨어보니 군대는 이미 어디로인지 떠나고 없었다.

부득이 부락이나 민가에서 숙영하게 되면 이네들은 조금이 라도 백성들의 폐를 덜기 위하여 문밖이나 혹은 대문간 봉 당 같은 곳에 잠자리를 만들고 아예 방안을 침범하려고 하 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지럽힌 마당을 쓸어 주고 물 을 길어다 주고 가지고 온 양식이 모자라면 양표를 떼어 주 고서 쌀과 바꾸어 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건 이네들이 이렇게까지 돌봐 주고 아끼니 인민이 이 군대를 아니 따르고 아니 받들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아니 그들 자신이 인민인 것이다.

이 부락을 떠나 다시 보행을 시작한 우리는 길가에서 전방 으로 전신으로 진군하는 군대와 여러 번 마주치게 되었다.

새로운 진격령 밑에 전방으로, 전방으로─ 선두에는 첨병을 세우고 주력대 앞에는 선전대인 모양으로 여병들이 많이 섞여서 군가를 높이 부르며 행진한다. 전대 (全隊)의 사병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화창한다. 기관총, 야 포, 산포, 탄약상자 이런 것을 실은 노새와 나귀, 말들도 뒤 에 연달렸다. 어디 연습이라도 나가는 군대처럼 행진은 흥 성거리며 매우 즐거워 보인다. 복장과 감발은 모두 무명천 에 흙물을 들이거나 풀물을 올린 것으로 신발은 두꺼운 천 을 겹겹이 붙여 삼농이로 총총히 당친 산신이었다. 네모로 갈피어 우물 정자로 끌어맨 홑이불을 하나씩 잔등에 걸머쥐 고 혁대에는 양철로 만든 식기가 매달려 덜렁거린다. 꽁무 니에는 나무로 쥘 손이 달린 황색 폭약의 수류탄을 두세 자 루씩 찔렀다. 보총은 모두 일병이 쓰는 38식이었다. 독재주 의의 박해와 학살, 고난 속에서 어언간 25개 성상을 굽힘이 없어 뻗어 내려오며 2만 5천 리 피로 물들인 장정의 역사를 지녀 그 의기와 정열도 새로운 이네들의 군기는 외적을 물 리치러 나가는 길에 있어서 화락한 가운데도 숙연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노래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야말로 조국의 대지를 두 발로 디디고 등에는 민족의 희망을 지니고서 앞 으로 앞으로 태양을 향하여 전진하여 쉴 줄을 모르는 민중 자신의 무장인 것이다. 나라를 아끼고 평화를 사랑하는 노 동자, 농민,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인민의 전위대, 중국 인민 이 외적의 침략을 받고 있는 한, 봉건의 쇠사슬이 풀리지 않는 한, 제국주의의 착취가 없어지지 않는 한, 장개석의 독 재가 무너지는 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단결 하여 영원히 저항하며 진격할 인민의 군대였다. 외적을 국 경 밖으로 몰아내고 안으로는 반동세력을 두들기고 자유의 깃발을 태산 위에 휘날리기 위해 원야를 휘몰아치고 새외 (塞外)의 산강(山崗)으로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팔로군─ 우리는 발길을 멈추고 중국 백성들과 같이 두 손을 흔들어 환호하며 그들의 무운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이 팔로군이 있는 한 이 나라와 인민의 역사는 미더운 걸음으로 전진하 여 민주주의의 승리는 동아(東亞)의 큰 덩어리 대지 위에 또 한 확고부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같이 만세를 불렀다.

중국 공산당의 위대한 영도자 모택동 선생 만세!

인민의 군대 팔로군 만세!

그리고 또 같이 구호를 외쳤다.

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 일본제국주의!

2. 배장수 노파의 설움

편집

어떤 산모퉁이를 지나면서는 군인들이 백여 명이나 산골짜 기 속에 흩어져 곡괭이 질을 하며 떠드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농부들처럼 농립을 쓴 이가 많았다. 어떤 사내는 수 건동이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흙을 쳐내면서 노래를 부른 다. 금년도 한재의 징조가 보이기 때문에 분구사령부에서 산등성이와 골짜기 속을 샅샅이 뒤지고 조사하여 물줄기를 찾아 물곬을 파고 돌리고 모아서 밭에 물을 대도록 군대에 지령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황진(黃塵)이 더북더북 고이는 밭머리에 서서 한숨만 짓던 농부들이 이렇게 군대의 도움을 받아 수리(水利)의 기쁨까지 얻는 것이었다. 동원된 인민군대의 노력 조직이 대자연의 폭위에 거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밤비에 고인 고랑물 을 쳐내려 보내는 모양이었다. 추수기에는 이 군대들이 또 한 가을걷이를 도와주는 것이다.

이 산골짜기를 지나서 얼마쯤 가노라니 바른쪽으로 산등성 이 위에 거무스레한 포대가 보인다. 일군 경비대가 얼마 전 까지 남아있다가 밤중에 부랴부랴 걷어 메고 달아나다가 전 멸되었다고 한다. 투둘투둘 험한 산길을 걸어 들어가 바로 이 등성이 밑을 스치면서 언덕을 넘게 되었다. 울려다보니 이 길목을 노리고 앉은 포대는 거의 무너져 잔해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기관총을 걸어 놓고 행인을 사격하고 때로 는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하기로 유명한 마(魔)의 포대였다.

번듯하면 잡아다가 사다듬이(매나 몽둥이로 함부로 때림)를 하고 가축이며 과일이며 낟알을 약탈해 가고 심지어는 밭으 로 기어 내려와 일하는 부녀자들을 덮치곤 하였다.

아직 팔로군의 손이 용의주도하게 미치지 못했을 즈음의 일이다. 일군에게 투항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 있는 이른바 화평군도 몰려 나와서는 거드럭거리며 일병에 못지 않게 약 탈과 총살을 능사로 하였다.

하루는 일병이 부락으로 내려와 불쌍한 계란장수 계집애를 붙들어 갔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마음씨 곱 고 일 잘하는 계집애였다. 마침내는 참고 참아 오던 동네 사람들이 격앙하여 연장을 메고 소리소리 지르며 몰려가서 이 포대를 포위하였다. 돌은 던지고 발을 구르며 내놓으라 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 일병의 대답은 기관총의 세례였었 다. 그리고 이렇게 촌민들이 기세를 올릴진대는 필경 팔로 공작원이 들어와 선동한 것이라고 해서 총을 들고 부락으로 몰려 내려와 그 중 똑똑해 보이는 청년 네 명을 묶어 갔다.

몸서리치는 고문과 악형을 다한 뒤에 드디어는 장거리에 군중을 모아 놓고 본때를 보여야겠다고 총살을 하기로 하였 다. 청년들이 십자형 틀에 높이 매어 달렸다. 콧수염을 단 촌장 한간(漢奸)놈은 일병 대장의 선언을 통역하여 대 일본 군대에 항거하는 놈의 운명은 이렇게 추풍낙엽이 될 뿐이라 고 하였다. 불쌍한 촌민들은 치를 떨며 숨도 크게 쉬지 못 하였다. 여기저기서 가족과 친지들의 오열 소리가 들릴 뿐.

무시무시하게도 긴장된 순간이 1분, 2분, 3분…… 일병 총 수들은 군중 앞으로 다가와 배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에 어이된 일인지 군중이 부글부글 끊기 시작한 것이 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팔로 공작원이 감쪽같이 기어 들어온 것이다. 선동하고 고 무하는 놀음에 드디어 군중은 일어났다. 삽시에 풍우가 몰 아치고 번갯불이 이는 듯하였다. 총수와 한간놈은 어리둥절 할 사이도 없었다. 군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무기를 빼 앗으며 치고 받고 차고 지리 밟는 수라장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놈은 빠져 나가고 어떤 놈은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고 어떤 놈은 할딱거리며 달아나기 치부였다. 한간놈은 목덜미 니 다릿매니 허리춤 할 것 없이 여러 손에 끌어잡혀 뒹굴기 시작하였다. 포대 안의 일병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기관 총을 들고 나와 강도들을 구출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날 밤 팔로군이 출동하여 포대를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 한 것이다. 이에는 군중들까지 손에손에 연장을 들고 나서 서 협력하였다. 전화선은 이미 절단되어 통신이 두절되었으 며 탄약과 식량에는 한정이 있었다. 할수없이 놈들은 캄캄 한 밤을 이용하여 한쪽으로 혈로를 뚫으며 퇴각하려다 섬멸 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포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길을 더듬 고 있을 때 백발의 쪼들쪼들 늙은 할머니가 바구니를 들고 길목으로 나서더니 배를 사라고 양거 우쾌첸(五塊錢) 우쾌첸 하며 따라온다. 때아닌 배 장수가 웬일인가 하고 가까이 가 보니 빈바구니였다. 놀라서 쳐다보았다. 노파는 아랑곳 할 것 없다는 듯이 꽃씨라도 뿌리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양거 우쾌첸 우쾌첸을 부르며 지나간다.

우리가 산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이 노파는 회오리치는 바 람에 휩쓸려 오를 듯한 불안정스런 뾰족발 걸음으로 뒤따라 올라와 등성이에 표연히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일병들의 자취가 없어진 것이 언제냐고 물으니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 듯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오므라진 입을 벌 리고 웃는다. 실성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얼굴에 수심이 그득해지며 서글픈 목소리로 ”귀자들을 좀더 일찍 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려고……”

이렇게 괴탄하는 것이다.

”왜 일찍 당신네들이 아니 왔던교?“ ”할머니 인제는 먼 데서나 전쟁을 하지 여기는 또 그런 일 이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최 동무가 이렇게 큰 소리로 일러주니까 알아들었는지 고 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왜 벌써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고, 글쎄 귀자(鬼子)들이 우 리들의 혼을 뽑아 가지고 그걸로 비행기도 날리고 화차도 움직인다누마……”

”할머니, 지금 혼이 빠지게 되기는 귀자들이라우!”

”할머니 손주가 전쟁 나갔수?“ ”아들이 없습네, 손주도 없습네……”

”왜요?“ 갑자기 노파는 키키키키 웃어댄다. 귀기(鬼氣)가 서려 온몸 이 쭈뼛해지는 웃음소리였다. 포대에 있던 일병들에게 관련 된 무슨 운명적인 일이라도 그의 가정에 벌어졌던 모양이 다. 그리고는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웃음을 걷고 머리 카락이 갈기갈기 흩어진 채 다가와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명태 껍질이라도 씌운 듯한 오므라진 두 눈에 새파란 불빛이 서려 돈다. 일순간 공포와 증오의 그림자가 비끼더니 속 자춘 목소리로 당신네들은 어디 사람 이냐고 묻는다.

”할머니 우리는 귀자가 아니라 중국 사람들과 같이 왜놈 군대와 싸우러 다니는 조선 사람이외다, 조선 의용군!”

할머니는 입을 오물거리며 무어라고 송알거리더니 알아들 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혼자 끄덕이며 내려간다. 일군의 참혹스런 침략과 살육에서 빚어진 하나의 비극이 이 산마을 에서는 이런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탈주병 S동무는 매우 언짢아서 악마 일군의 군대생활을 돌이켜 보고 이를 갈며 하루바삐 총을 메고 나가 일군과 싸울 테라고 하였다.

산밑으로 내려서니 길가에서 한 젊은이가 이끼 앉은 거무 스레한 벽돌을 나귀 위에 싣고 있었다. 어떻게 된 벽돌이냐 고 물으니까 일군 포대를 부숴 치워 져내려오는 것이라면서 실어다가 굴뚝을 쌓으리라고 한다. 우리와 이야기하던 노파 는 여기에 내려와 부스러진 벽돌을 바구니에 주워 담으며 혼잣소리로 양거 우쾌첸 배를 사라고 역시 중얼거리고 있었 다. 집의 할머니냐고 물으니까 젊은이는 고개를 흔들고 나 서 머리를 가리키며 나사가 물러났다는 시늉을 하면서 쓴웃 음을 짓는다.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소?“ ”아들이 죽은 날부터지요.”

젊은이는 나귀의 고삐를 쥐고 돌아보며 설명한다.

”전쟁에 나가 죽었소?“ ”아니지요. 저 포대에 있던 왜놈들이 배를 사자고 저분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다 집어먹으니까 돈을 내라고 하였지 요. 정말 가난한 배 장수였습니다. 하니까 엉덩이를 걷어차 며 나가라고 하겠지요.”

”몇 살이나 되던 사람인데?“ ”스물셋이었지요. 외아들인걸요. 그래 할수없이 나오노라니 까 또 들어오라는군요. 그래 또 들어가니까, 임마 네 여편네 를 보내라, 돈을 줄테니.”

”그래 어떻게 되었소?“ 젊은이는 울상을 짓는다.

”침을 뱉았다나요, 족히 그럴 사람인걸요. 저하고 아주 친 한 동무였습니다.”

”그래 맞아 죽었소?“ ”죽은 줄이야 몰랐죠.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기에 저 할 머니가 아들을 찾아 포대로 가서 들어가려니까 거팃하니 어 깨를 치는 게 매달려 알겠지요. 화닥닥 놀라서 물러서서 자 세히 보니 자기 아들의 시체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거든요.

이걸 본 뒤로부터 실성했습니다. ……”

”부인은 있었소?“ ”있었습니다. 임신중이었습니다. 동리 사람들이 몰려들어 왜놈들을 쳐부술 때 따라나섰다가 총에 맞아 죽었지요……”

노파는 제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고 그냥 양거 우쾌천을 부르며 오던 길을 되짚어 되뚝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무엇이라 형용 못할 애달프고도 노여운 심사로 묵묵히 거닐 뿐이었다. 간악한 일군의 침략이 죄없는 의젓 한 인간을 얼마나 많이 죽였으며 가난한 살림살이를 불태웠 던가”그리고 다시는 영 씻을 수 없는 굴욕!

침략자와 제국주의 전쟁에 이 인민들의 분노는 영원히 가 시지 않을 것이다. 저버린 행복과 기쁨과 노래가 그리웁기 에 오직 싸우러 일어남이 있을 뿐. 사실 지금 와서는 옛날 의 전설인 양 그 자취도 사라지고 산야에는 전곡이 무르익 어 태양의 황금빛 속에 춤추고 있다. 그러나 한때는 여기의 산간에도 역시 참혹한 침략군이 몇 번이고 몰려들어 왔었 다. 비행기는 하늘에서 폭탄을 던지고 기관총이며 장갑대는 지축을 울렸을 것이다. 몽몽한 흑연이 불타는 산야를 뒤덮 었고 포탄은 민가를 파괴하였으며 기관총의 단속음은 산간 으로 울려 오며 달아나는 인민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다.

하나 우리는 뼈아픈 역사의 산 주인공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노파와 대하게 되었을 때 찬물이 등골을 타고 발꿈치까 지 흘러내림을 의식치 않을 수 없었다. 전지로 나가는 군인 들의 행진을 볼 때보다도 이 산 송장이 전쟁을 보다 더 가 까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니 웬일일까”

나의 머릿속에는 이유없이 이런 서러운 이야기가 회상되었 다. 평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떤 촌락에서 일어난 일 이다. 외로운 한 과부의 아들이 소위 지원병으로 되어 평양 병영으로 끌려왔다가 몇 달 안 되어 달아난 것이다. 연일연 야로 무장한 헌병과 주재소 순사놈들이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빼앗기고 나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불쌍한 과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놈들은 숨긴 곳을 대라고 총부 리로 때리며 위협하고 당장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사형을 하느니 징역을 보내느니 못살게 굴었다. 둘째 아들은 인질 로 잡아 묶어 갔다. 아예 집이라고 찾아오지 말고 어디로든 지 무사히 몸을 피해 다오─이것이 과부의 밤을 새워 가며 신명(神明)에게 기도드리는 염원이었다.

어떤 날 밤중에 문 가에서 무엇이라고 고함 소리가 들리더 니 난데없는 총소리가 일어났다. 놀라서 이 과부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흩어친 채 뛰어나갔다. 달밤이었다고 한다.

밤마다 집을 포위하고 있던 놈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것이었을까. 환각이었을까 이상한 일이라고 뜰안 을 더듬어 다니며 살피던 그는 별안간 '악'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못박혔다. 넘어오던 반신이 담장 위에 늘어진 채 달 빛 밑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달려가 쓸어 안고 보니 분명 헌병대로 붙들려 들어갔던 둘째 아들이었다. 얼마 안 돼서 불쌍한 과부가 정신에 이상을 생겨 온 동네와 근방 사람들 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비슷한 이런 이야기의 회상에 잠겨 있을 때 학도병 S동무는 무거운 침묵 을 깨뜨리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린다.

”그 같은 참혹한 일이 여기에만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이상 몇 배 더 악착스런 일이 얼마든지 있지요. 참말로 왜 놈들은 악마입니다……제가 있던 경비대 놈들은 근방에 있 던 한 부락을 몽땅 불지르고 학살한 걸요. 언젠가 팔로유격 대가 와이 부락을 등지고 싸우고 간 뒤의 일입니다. 놈들은 석유초롱을 들고 다니면서 가솔린을 퍼부었습니다. 삽시에 온 부락이 불바다로 되더군요. 불을 쓰고 허둥지둥 나오던 동네 사람들이 기관총 소사에 모두 쓰러졌습니다. 그래도 불이 붙지 않은 집으로 몇 젊은 여인네만은 피할 수 있었지 요. 젊은 여인네들만입니다. 그 뒤로 이놈들은 이 여인네들 을 덮치려고 승냥이떼 무리같이 몰려들었습니다. 독 뒤에, 아궁이 밑에, 건초덤불 속에, 쌀자루 옆으로 기어들어 토끼 처럼 떨던 모양이 지금도 눈앞에 어물거립니다. 비명 소리, 울음 소리, 악바라지 소리…… 참 말할 게 있습니까, 놈들은 이런 때에 가장 통쾌한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는군 요……”

그의 애끊는 눈은 희끄무레한 허공에 불타는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뒤에 이 집까지 불질러 사람째 태워 버리더군요. 놈들 은 자취를 없애기 위해 꼭 이렇게 합니다. 저는 제 어머니 나 누이동생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다리 가 떨렸습니다. 제가 달아났다고 놈들은 아마 제 어머니를 무던히 들볶겠지요……”

그러나 이런 절통할 참극을 겪어 온 여인네들이 지금은 새 나라를 이룩하기 위하여 힘을 모아 적을 물리치며 반동을 때려 부수는 싸움에 용감히 나서게 된 것이다. 어떤 이는 직접 사병으로, 어떤 이는 공작원으로─그리고 모두 다 생 산과 학습에 열을 내어 새 나라 백성다운 자질을 기르고 있 다. 동족의 원통한 무덤 뒤에서 혹을 쏟아 놓은 피에 젖은 채 참을 수 없는 치욕 밑에 망연히 쓰러져 있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해방구의 인민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얼마쯤 가노라니 매우 소담한 호두나무 숲이 토굴 속 같은 길을 중간에서 자르며 눈앞에 나선다. 호두나무가 빼곡이 들어앉아 풀밭 위에 서늘한 그늘을 늘이웠다. 키가 얕아 다 박솔밭처럼 자잘분한 숲이었으나 바람결에 푸른 잎이 너울 너울 나부낀다.

밭에 나와 일하던 농부들이 이 그늘 밑에 모여 앉아 떠벌 리고 있었다.

여인네들은 따로 모여 앉아 서로 긴하게 이야기를 주고받 는다. 저고리를 벗은 뼈마른 노인 하나가 신바닥으로 땅을 깔기며 무엇이라고 역설하는 모양이었다. 사내들이 모두 고 개를 끄덕이며 찬성한다.

호조회(互助會)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열린 모양이라고 한다.

우리는 왁자지껄 웃음보가 터지는 소리를 귓결에 흘리며 이 언덕을 또 넘었다.

3.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편집

거의 기계적으로 따라가기는 따라가나 온몸이 저리고 아프 며 다리 마디가 쑤셔 주저앉고만 싶다. 양쪽에 토층이 깎아 질리운 사이로 굴 속 같은 길이 그냥 끌이 없이 연달렸다.

바람은 한점도 불어오지 않고 먼지만 더북더북 일어난다.

토층 위에서는 불그스름한 옥수수 수염이 매달려 길을 굽어 본다.

”한 십오 리 더 가서 묵읍시다. 왜 팔로인 줄 아시오”길 을 걸을 팔자라서 팔로(八路)라우……”

최 동무의 재담에 모두 웃었다.

”그래 동무는 중국 와서 얼마나 걸었소?“ ”상해로부터 쫓기는 걸 남경, 무한을 거쳐 중경까지 갔다 가 탈출하여 서안을 지나 연안으로 해서 이리 나왔으니 나 도 아마 수만 리 걸었겠지요. 전지(戰地)를 뛰어다니던 리 (里) 수만도 퍽이나 되리다. 동무도 이 왜놈을 쫓으며 조선 까지 나가노라면 만 리는 걸어야 할거요. 추격만리, 그럴 듯 하지 않소”손으로 쓰기보다도 바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노 라는 노신(魯迅)의 말을 생각해 보시오. 좋은 때 동무는 들 어옵니다.”

보고 듣는 일이 모두 새로워 나는 발로 좇아가기보다도 손 으로 쓰기가 더 바쁜 모양이었다.

”쓰시오, 쓰시오. 모두 기록에 남겨 두시오. 이 화북 땅에 도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동무들이 있 었다는 것을 때를 만나 돌아가거든 국내 동포에게도 알려야 지요. 이 관내의 중국 땅에서는 그래 총을 들고 왜적과 싸 우기는 우리들입니다. 중경서 영감쟁이들은 책상머리에 대 신(大臣) 말뚝이나 세워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군요. 일 본이 망하면 돌아가서 한자리씩 해볼 궁리만 앞서지 왜놈들 과 싸울 생각이야 날 뻔하오”하기는 실지 공작을 하는 가 운데서 동무로 더 절실한 기록을 쓰게 되리다.”

”물론…… 옳은 말씀이오.”

말로는 이렇게 수긍하면서도 어디엔지 아직도 풍월객이나 종군작가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 자신을 느끼게 되어 부끄러웠다. 내 자신에게 일러주는 말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많이 배워야죠, 많이 배워야죠……”

”현재 우리 동무들 가운데서 시인, 작가, 미술가, 무용가, 배우,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워낙 시라고는 읽어 보지도 못한 동무들이 제법 노래를 지어 보느라고 머 리를 긁적거리는군요. 저저마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 고 고함도 쳐보고 싶어하며…… 아마 우리들의 절절한 생활 감정을 무슨 형식으로든지 표현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저절 로 단단해지는 때문인가봐요. 물론 본시부터 좋아하는 동무 들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마는…… 이 예술공작이 큰 작용을 일으켜 동무들을 고무하고 민중을 계몽하며 위안도 주고 하 지요.”

”대상은 물론 중국 사람들이겠죠?“ ”야회나 기념일에 즐기는 때는 우리끼리 조선말로 하고 군 중 상대일 때야 중국말로 하지요. 극본은 주로 선전부장 동 무가 바쁜 틈을 타서 집필합니다.”

선전부장이 극작가라는 말이 듣기에 매우 반가웠다. 들어 가 공작에 붙는다면 나 역시 선전부에 소속할 것이기 때문 에 작가부장이라니 얻음이 더 클 것이다. 상연되는 극본의 내용은 전쟁에서 취재하여 전투의식과 희생정신을 고취하는 것도 있고, 끝끝내 굽힘이 없는 감옥투쟁의 내용이며 혹은 아픔과 주림 속을 헤매는 국내 동포의 생활을 그린 것 등 다채로웠다. 너무 뼈저리고도 직접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또 보고 또 보아도 무대 앞에서 늘 울게 된다고 한 다. 주먹을 그러쥐고 몸부림도 치고…… 중국 사람을 대상 으로 할 때는 주로 조선 사람의 반항정신이며 일본 제국주 의의 잔인한 압박, 동포 생활의 참상, 이런 것을 테마로 하 여 보여주었다. 조선의 실정과 조선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 하여─ ”노래는 학원 동무들이 저저마다 써내며 작곡까지 제법으 로 붙여 행진하며 부르는걸요. 벽보판에도 서툰 솜씨나마 곧잘 그림을 그려 붙입니다. 아마 전쟁과 혁명은 예술을 낳 는가 봐요……”

사실 그런 예술이 정말로 산 예술일 것이다.

”동무도 앞으로 많이 쓰셔야 합니다. 우리 의용군에서는 이 예술공작과 선전공작을 대단히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습 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으며 굴 속 같은 길을 빠져 나오 니까 비교적 널따란 들판 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개를 몰고 가는 현 동무와 S동무의 타고 가는 나귀는 벌써 저만치 앞 서서 먼지를 뽀야니 일으키며 재빨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최 동무가 웃으며 ”저 현 동무는 우리 의용군에서도 걸음 빠르기로 유명한 ' 황천왕동'입니다. 해 뜰때에 떠나 저물기 전으로 이백 리 가 량 걷기는 식은 밥 먹듯하는 걸요.”

”적지로 드나들려면 축지법도 써야겠죠……”

”축지법만 아니라 천리안(千里眼)에 변환술(變幻術)도 쓸 줄 알아야지요……무엇보다 대담하고도 치밀하고, 그러면서 도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보 장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적구공작원이란……”

그러나 생사의 계선을 넘나들며 싸우는 이런 백전고투의 용사가 얼마쯤 가서 조그만 어린애들에게 붙들려 문초를 받 으며 쩔쩔매고 있었다. 감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던 어린애 두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그들을 멈춰 세우더니 번갈 아 가며 묻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가느냐?“ ”근거지로 간다.”

”근거지가 어디냐?“ ”대줄 수 없다.”

”옳지, 그건 그렇고…… 어디서 오느냐?“ ”북경.”

”북경?“ 어린애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한놈이 잽싸게 감나무 위로 신호기를 올리려고 하여 현 동무는 아예 의심할 사람들이 아니니 제발 사람들을 불러오지 말라고 사정사정한 터다.

하니까 그럼 믿을 만한 증거를 보이라고 하여 우리들이 뒤 따라오기를 가다리고 있었다. 역시 셰퍼드 군이 의혹을 갖 게 했으며 둘째로는 나귀에 올라탄 S동무가 중국말을 알지 못해 어물어물함이 수상했던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의 여행 증명서는 최 동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감시꾼들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둔덕을 넘어서면서 바라보 니 지금까지 발을 들여놓은 어느 부락보다 훨씬 큰 장거리 가 들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거리가 아니라 훌 륭한 성읍이었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해의 낙조를 받고 아지랑이 속 을 가물거리는 토성의 풍경이 영화에라도 나오는 장면같이 아름다웠다. 산양떼가 성기슭을 밀려 다니고 있었다. 이 근 방치고는 그 중 큰 물자의 집산지로 여기에 우리 동무들이 나와 생산공작을 하고 있으니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묵으 며 노독을 풀고 가자고 한다.

이 성읍도 역시 침략의 참화를 입은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 였다. 성문 지붕은 부서지고 토성도 군데군데 포격을 당하 여 무너진 채였다. 성문 담벽에 횟가루로 아름차게 중공 10 대 정책(中共十代政策)이 쓰여 있었다. 1943년에 이르러 중 공 중앙은 가장 간고스럽던 과거 2년 동안에 걸쳐서 인민을 이끌고서 과감한 대일항전을 견지하고 나서 승리에의 길로 발전하며 매진하기 위하여 감조감식제(減租減息制)를 단행하 고 생산운동을 일으키며 옹정애민(擁政愛民)의 정책을 보다 더 강화하였던 것이다.

10대 정책이란 대개 이러하였다.

1. 대적투쟁(對敵鬪爭) (민중조직으로써 인민의 부담을 덜게 하고 동시에 군민의 항전역량을 증강한다.)

2. 정병간정(精兵簡淨)

3. 통일영도(統一領導)

4. 옹정애민(擁政愛民)

5. 생산운동(生産運動)

6. 정돈삼풍(整頓三風) (1942년 2월에 '정돈학풍(整頓學風), 당풍(黨風), 문풍(文風)'의 모 주석 보고다 있은 뒤부터 전당 전군에 대하여 사상을 개변하고 작풍을 개조하는 정풍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다.)

7. 삼삼제(三三制) (공산당, 국민당, 무당파가 모두 연합하여 민주정권을 건설하고 중지중력(衆智衆力)을 모아 일치 항 전하자는 주장이다.)

8. 감조감식(減租減息) (적군의 분할과 봉쇄를 분쇄하려면 각 계급의 단결을 더욱 굳게 하며 계급 대립을 적게 할 필 요가 있기 때문에 전쟁중에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않고 소 작료는 백분지 이십오(百分之 二十五), 금리는 백분지 십(百 分之 一十)을 넘지 못하게 한다.)

9. 심사간부(審査幹部)

10. 시사교육(時事敎育)

이러한 순서로 모두가 내전분열을 피하여 외적을 물리치며 동시에 새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도 긴요한 군사”정치”경제”문화 일반에 대한 정책이었다. 이 10대 정 책이 차츰 위대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게 되자 1944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인민의 참군운동(參軍運動)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수천만의 청년이 전장으로 몰려 나갔으며 가을철 에 이르러서는 군중운동이 일어나 수없이 많은 전투영웅과 노동영웅이 배출되고 모범적인 공작자가 뒤이어 나타났다.

이들이 여러 사람들의 선봉이 되고 골간이 되고 교량이 되 어 전 방면에 일대 추진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관”민”병 의 단결은 일층 공고히 되어 초부터의 해방구를 확대키 위 한 공성탈지의 적위섬멸전(敵僞殲滅戰)이 과감히 시작된 것 이다.

참으로 내우외환이 접종하는 이 나라의 일대 위기에 처하 여 모 주석이 제기한 신민주주의의 정책과 방향은 신 중국 의 나갈 길을 가장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신민주 주의의 혁명강령이야말로 항전기의 칠칠암야(漆漆暗夜)를 밝 히는 유일의 거화(炬火)였다. 항전대중은 이 거화 속에 무한 한 힘을 발견하여 용기를 북돋우고 일어나 어떠한 악조건 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위하여 최후의 피 한방울 까지도 쏟아 바치며 투쟁하기로 결의를 새로이 한 것이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며 보니 집집이 전화를 입어 완전한 집 은 거의 하나도 없을만치 스산한 거리였으나 그래도 약방, 음식점, 잡화점 이런 것들이 즐비하였다. 서점도 두어 집 보 인다. 옛날에는 봉건영주의 집이었음직한 큰 집들이 대개 인민집회장이나 기관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으로 그 앞에는 성민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벽보판에 전선 뉴스를 내걸고 있는데 한 사내가 커다란 소리로 읽어 가며 들려주 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사령부와 현정부가 있으려니 하였더 니 그런 기관은 모두 조그만 부락에 들어박혀 있다는 것이 다. 비밀의 보장과 방위의 전략적 견지에서─ 서점을 발견했음이 반가워 스탈린 저의 《레닌주의의 제문 제》를 비롯하여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니 《논연합정부 (論聯合政府)》니 그의 팔로군에 관한 것이며 중공의 정품문 건, 소설, 번역서 등을 몇 권 구하여 바랑 속에 찔렀다.

이 거리에는 우리 동무들이 생산공작에 종사하는 솜공장이 있었다. 동무 하나는 동맹으로 연락을 가고 없었으나 마침 산동분맹(山東分盟)으로 연락 가는 길에 C 동무가 들른 참 이어서 도합 세 동무가 반가이 맞아 주며 전방소식을 묻는다.

하나 오히려 우리들보다 그들이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셈이 었다. 전선의 부상병들이 대개 이 거리를 지나서 사령부 병 원으로 옮아 가기 때문이었다. 평한로가 하복성에서만 두 군데나 절단되었으며 요처요처에서는 격전이 일고 있는데 대체로 차차로 포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튿날은 떠날래야 떠날 수 없이 궂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 였다. 그래 여기서 예정대로 이틀 동안을 쉬게 되었다. 발이 부풀어 약을 바르노라니까 새 신을 그냥 신어 그렇다고 하 며 C동무가 비를 듬뿍 맞힌 뒤에 망치로 두들겨 준다. 한 동무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개를 한 마리 구해 오겠다고 나가더니 허탕을 치고 비만 맞으며 돌아왔다.

C동무는 어렸을 때 동화의 세계에서 상상하며 그리던 독립 단원처럼 아주 걸걸하고도 호협한 인품이었다. 산돼지를 물 어 가는 호랑이처럼 수염이 더부룩한 얼굴속에 그득해 보이 는 커다란 눈알을 득실득실 굴리며 여러 가지로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여준다. 또한 이야기의 명수였다. 얼마 전 연안 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름 익히 들어오던 백연(白淵) 선생을 비롯하여 최창익(崔昌益), 허정숙(許貞淑) 등 선배의 동정도 알 수 있었으며 그 외 모두 처음 듣는 분들이나 한빈(韓斌), 박효삼(朴孝三), 등 여러 지도간부의 이야기, 학원들의 이야 기, 노신 예술학원의 내용이며 예술계의 동향 이런 것도 듣 게 되었다. 국내에서 행방이 주목되던 김태준 씨도 애인과 같이 바로 몇 달 전에 무사히 들어왔다고 한다. 어렸을 적 부터의 동무인 고찬보(高贊輔) 군이 벌써부터 북경에서 지하 공작을 하다가 연안에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도 비로소 이동 무로부터 듣고 가슴이 뛰놀았다. 여태까지는 봉쇄선을 넘어 오면 연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으나 후방에 있는 이들도 차차 앞으로 전진해 나와야 할 정형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는 태항산(太行山)에 집결하도록 되어 모두 태항산 근거지로 모 이는 셈이었다.

연안 다녀오는 길에 동포로를 넘다가 봉변하던 이야기는 매우 아슬아슬하였다. 염석산(閻錫山) 의 패진군이 노략질을 하며 횡행하고 일군이 또한 이동하면서 살상을 자행하는 험 악한 지대로 뛰어들어가 이리 피하고 저리 숨어 다니다가 마침내는 번번한 산등 위에서 노랑 대가리(그는 일병을 이 렇게 말하였다) 삼십여 명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동무들 네 명은 연 사흘 동안을 꼬박 굵었기 때문에 달아날래야 달아 날 데도 없지만 기력조차 없어 덤불 속에 숨어들었다고 한 다. 발견만 되면 영락없이 죽는 날이었다.

일병들은 어떤 젊은 농군에게 너 말 들이 쌀부대를 지워 앞세우고 슬렁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은 위험지대이기 때문에 사위를 충분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저벅저벅 돌을 밟는 소리며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 온다.

돌아다보니 동무들은 모두 권총을 빼들고 얼굴이 새하얘져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가까워져 십여 미터 쯤 상거한 길가에 놈들이 나타나고 보니 도리어 무서운 생 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나, 둘, 셋……이렇게 놈들이 앞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니까 자칫하면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들어 다시 마음이 다급해지며 어서 지나가라 어서 지나가라…… 조장 녀석의 견장이 보인다. 풀을 툭툭 걷어차기도 한다. 전투부대가 저 산중에 있는 모양이니 그 리로 가보라고 하는 농군의 망눈치가 모략을 쓰는 모양이었 다. 중국어를 모르는 조장은 심마(甚磨)”무엇이 무엇이 하 며 멈춰 서서 따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때에 웬만하면 뛰 어나가 통역을 해주고 싶었노라고 하여 우리를 웃겼다.

놈들이 지나가고 난 뒤에 산 위로 기어 올라가 내려다보노 라니 배고픈 생각에 이번은 주제넘게도 쌀부대를 빼앗아 볼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 총을 한 방 딱 울리니까 일병 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부랴부랴 미끄러지듯이 달려 내려 가고 젊은 농군은 엉겁결에 쌀부대를 집어던지고 짐승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인제는 밥을 먹었느니라 하고 내려가 부 대를 찾고 보니 주둥이가 벼랑 밑을 향하여 쏟아져 하얀 옥 백미가 산산히 흩어져 있었다. 얼마나 아까운지 이제와서 생각해도 분하다면서 입을 쩍쩍 다셨다.

1941년 12월 팔로군의 정치공작에 배합하여 석가장(石家 莊) 부근에 출동하였던 29용사의 장절한 실전담도 이 동무 로부터 듣게 되었다. 만리이역에 눈이 뒤덮인 산지에서 십 중포위의 일병진을 통렬하게 무찌른 이들의 불 같은 돌격정 신과 애끊는 조국애, 동지애는 듣기에도 눈물겨웠다. C동무 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는 적이 뼈저려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봉쇄선을 넘나드는 무장선전대였다고 한다. 의용군 선전대의 존재를 의심치 못하게 되자 일군은 눈깔이 새빨개 진 것이다. 전선에 끌려 나와 허덕이는 수많은 조선인 사병 과 군속들에게 그리고 조국 땅에서 못살고 몰려나온 동포들 속에 화약이 달려서는 큰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씨알머리를 없애고자 적은 경”중 기관총에 박격포까지 가지고 견고히 무장한 이백 명의 결사대와 중국 화평군, 다 시 말하면 국민군에서 투항한 반역병 150명으로 이들의 뒤 를 미친개처럼 쫓게 했다. 하나 우리의 용감한 선전대는 5 리 내지 2, 30리씩의 거리를 두고 옮아 가며 끊임없이 선전 공작과 교란공작을 감행할 뿐더러 곳곳에서 군중대회를 열 고 때로는 기회를 엿보아 유격전을 일으켜 적을 두들겨 부 수고 하였다.

호가장(胡家蔣)부락에서 마지막 군중대회를 가지고 내일이 면 근거지로 돌아가게 된 날 밤중의 일이었다. 한간의 내통 으로 숙영이 감쪽같이 포위된 것이다. 방심하여 보초를 멀 리까지 세우지 못하였음은 불찰이었다.

그러나 겨우 네명의 희생으로써 진퇴유곡의 사지를 돌파하 여 반격한 사실은 매우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돌위전 에 있어서 대장은 팔을 잃었으며 또 한 명은 총탄에 넘어져 불행히 일군에게 납치되었다. 이네들의 성명과 약력이며 최 후의 정경은 대략 이러하다.

손일봉(孫一峰:29세) 제2분대장, 평북 회천군 태생. 과묵침 용의 인품으로 여태까지 한 번도 생장의 역사를 밝힌 적이 없으므로 세밀한 일은 알 수 없으나 다만 나라 일이 중하고 민족의 일이 귀하여 단란한 가정을 버리고 나와 혁명의 험 로를 밟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중앙군관학교 광동분교 포과 출신으로 평생 소원이 산포와 야포의 방렬을 짓고 통 절히 일군을 무찌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군관이 되어 국민 군 전선에 가담해 있다가 이 팔로구역으로 넘어온 것은 사 상의 혁명도 혁명이지만 무엇보다도 투항을 모르고 그냥 싸 워 나가는 팔로군이 그리웠음이었다. 그처럼 왜놈이 미웠으 며 한 놈이라도 더 쏘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남으로 내일은 북에서의 유격생활에 포병전 의 염원은 못 이루었으니 최후의 돌격분대를 지휘한 분대장 으로서 중대한 임무를 완수한 뒤에 장쾌한 전사를 하였다.

대장 이하 여러 사병이 최후까지 머물러 싸우겠다는 것을 억지로 몰아내서 전진을 시키고 나서 분대의 사병을 이끌고 선두로 내달리며 돌격전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미 때는 늦 어 완전포위를 당하여 빠져 나갈래야 나갈 틈서리가 없었다 고 한다. 다부진 몸뚱이가 도시 열덩어리의 용사로 평시에 도 몸을 아끼지 않고 앞서가며 힘든 일을 도맡아 하려는 그 야말로 희생정신의 화신이었으니 모름지기 만족한 죽음일 것이다.

박철동(朴喆東:30세) 평북 의주군 태생. 어려서 조국을 떠 나온 이래 이 중국 땅에서 성장하여 중학을 나오고 중앙군 관학교 낙약분교를 졸업하였다. 이 역시 손일봉의 여러 청 년 동지들과 같이 국민당 구역을 탈출하여 이곳으로 달려나 와 전선에서 활약하던 것이다. 이 전투에 있어서 그는 돌격 로를 칼로 헤쳐 동무들의 전진을 완전케 한 뒤에 겹겹이 돌 려친 적진 속으로 혈혈단신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적을 찌 르고 또 찌른 뒤에 마침내 기가 진하여 적을 찌른 칼을 뽑 지 못하게 되자 옷을 벗어 던지고 이 내 가슴을 찔러라 이 놈들아─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쓰러졌다. 나중에 시체를 찾고 보니 그야말로 총상과 칼자리로 만신창이었다고 한 다……

내가 다 맡을 테니 동무들 어서 전진하시오 전진하시오 하 고 부르짖던 비통한 고함 소리가 지금 귓결에 들리는 듯하 다고 C동무가 숙연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왕현순(王現淳:24세) 평북 벽동군 태생. 일찍이 혁 명가의 집안에 태어나 고난에 고난을 거듭한 생애였다. 그 생활 자체가 싸움이요, 성장 그것이 바로 싸움의 역사였다.

총을 들고 나선 두 형을 따라다니며 이십평생을 이슬 맺힌 풀숲 속이 아니면 포연탄 위 아래 혹은 산상의 요새에서 하 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지내왔다. 성품이 고고하여 남에게 뒤서기를 원치 않았고 남 앞에 공을 내세우려고도 하지 않 았다. 그러나 실천과 공작 속에서 얻은 이론의 박진성은 언 제나 동무들을 고무하고 깨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별명은 '싸움꾼'이라고 하다시피 논쟁도 좋아하였다. 하나 일단 실 천에 들어서서는 불언직행(不言直行)이어 모름기지 군인으로 서 훌륭한 전형적인 존재였다. 언제나 웃을 줄을 몰랐다. 몸 뚱이 자체가 하나의 폭탄인 듯하였고 전장판에서는 그 기백 이 승리의 상징이었다. 중앙군 훈련반 출신.

이번 전투에 있어서도 경천지의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하였 다. 본대를 전진시키기 위해 엄호전을 일으켰을 때 가장 가 는 장애가 적의 기관총 소사였다. 어느 새에 이 동무의 자 취가 없어졌다. 이와 동시에 적의 기관총 소리가 뚝 끊어졌 다. 다음 순간 전우들은 적의 기관총을 휘두르며 선두에 나 서 가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끝으로 한청도(韓淸道:26세) 충청도 태생. 작달막한 키에 가로 퍼진 몸뚱이를 둥실거리며 입가에는 웃음빛을 거두지 못하여 왕현순 동무와는 그야말로 대척적인 인품이었다. 어 떤 기한과 고통 속에서도 벙글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낙천 가였다. 어떻게 보면 천하에 없는 게으름뱅이 같기도 하였 다. 하나 낙천적인 천성이 동무들에게 늘상 은연한 힘을 주 었으며 또 느닷없이 웃기고 즐겁게 하여 없지 못할 보배로 운 존재였다.

”한 놈에 하니 두 놈이라……요놈!”

이러면서 바위 밑에 붙어 앉아 사격하는 이 동무를 전우들 은 보았다. 하나 완전포위 속에 들게 되자 그는 분대장의 뒤를 따라 일어나 수류탄을 쥐어 뿌리며 사자와 같이 막 덤 벼들었다. 탄알이 다하였던 것이다. 불행히 적탄이 다리마디 를 울렸다. 엎으러지면서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 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마지막 수류탄을 터뜨려 부둥켜안은 채 자폭을 한 것이다.

이 영용하기 바이없는 돌격전과 비창한 돌위전에 대한 보 고에 접하게 되자 팔로군구 사령부에서는 전군에게 이 위훈 을 선포하는 동시에 장렬한 최후를 지은 사난 열사들을 위 해 추도회를 열게 되었다. 한편 정치부에서는 조선의용군의 돌격전을 길이 찬양하기 위하여 인민학교 교과서 안에 이 전투의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추기 다음날로 한간이 민중의 손에 붙들려 왔으며 또 이 포위전 에 참가하였던 일병 하나를 얼마 뒤에 붙잡게 되어 이 전투 에 있어서의 일군의 손실이 소상히 드러났다. 사망 18. 중경 상 32. 그리고 다리를 총에 맞아 쓰러진 채 붙들려 간 동무 는 일본 어떤 형무소로 끌러갔다고 할 뿐 그 생사와 진위를 알 수 없었던 바 이번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으로부터 돌아 왔다. 척각의 작가 김학철(金學鐵)군이 바로 이 사람이다.

왼팔을 총에 잃고도 그냥 머물러 지휘하려는 대장을 등에 걸머지고 맨발로 눈구덩이 가시밭길로 적진을 뚫고 나간 동 무도 들어가 만나 더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해방된 조국을 향하여 우리 의용대의 별동대 에 끼어 진군해 나오는 도중 나는 여러 동무들과 같이 피눈 물에 젖은 이 고전장에 들러서 오랜 시간 움직일 줄을 몰랐 다. 깊은 산중 돌각담의 가시밭길에 잡초만이 무성하고 때 아닌 가을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다. 29용사가 서로 엄호 해 가며 내달려 올라가 진지를 잡았다는 호산산은 말이 없 고 이끼 앉은 바위 위에는 낙엽만이 쌓여 있었다. 두 팔로 휘어잡은 기관총을 내두르며 달려나가는 용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고래고래 지르는 우렁찬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 였다. 이 불스러운 조선의 아들들이 무엇 때문에 이 깊은 이방산중에서 흔연히 미소를 짓고 쓰러질 수 있었으랴”

이 쓸쓸한 고전장의 뒷마을 높지 않은 잿등 위에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앞쪽이 훤히 트이고 양옆으로 열을 산줄기가 내달린 포근한 자리로, 동북을 향하여 멀리 조선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가에서는 가을 벌레도 울지 않았다. 이름 모를 이 나라의 산새만이 우리의 해방의 기쁨을 같이 즐겨하며 위안하려는 듯 지저귀며 노래하고 있 었다. 우리는 이 용사들의 무덤 위에 눈물과 더불어 꽃을 뿌리고 차마 떠나기 어려워하였다. 뒤를 따라나온 촌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북경을 내왕하는 조선의용군 동지들이 이 부근을 지날 때 마다 또는 옛날의 이 전적을 아는 중국 동무들이 지나칠 때 에 무덤 앞에 머물러 벌초를 하고 꽃도 던지더라는 것이다.

촌민은 군중대회를 열고 조”중 두 민족의 우람찬 해방전사 인 이 국제 붕우들의 무덤 앞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의한 지 이미 오래나 일군의 드나듦이 빈번하여 지금까지 실천치 못하였는데 이제는 마음놓고 치성케 되었노라고 한다. 원컨 대 안식하시라.

4. 일병 포로수용소

편집

오후에 이르러 비가 걷고 날이 개이기 시작하였다. 화제는 자연 동무들이 간절히 그리워하는 국내 이야기로 진전하였 다. 가지고 온 어린애들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서로 머리를 마주 대고 들여다보며 끔직히도 좋아한다. 몇 살이냐, 유치 원에 다니느냐, 노래는 무슨 노래를 부르느냐, 눈깔사탕이 십 전에 몇 알이나 되느냐, 할머니에게 무슨 옛이야기를 조 르느냐, 계집애도 말을 할 줄 아느냐 한참 동안은 그들 자 신이 모두 어린애로 돌아간 듯하였다. 더구나 수첩을 꺼내 어 어린애들이 끄적거린 색연필 그림을 보였더니 서로 낄낄 거리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아무 것도 아닌 그림의 내용을 구태여 그럴 듯한 의미를 붙여 보려고 열심히 궁리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친애하는 동무들이 한참 동안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아서도 어린애들의 사진과 그림을 가지고 떠나온 일 을 무척 다행으로 알았다. 소꼽노래 부르고 술래놀이하던 억울히 빼앗긴 어린이의 시절을, 흥부와 놀부의 옛말을 들 으며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던 아름다운 옛날을 이네들이 일순간이나마 도로 찾은 것이다. 초선의 지붕 위 에서 퉁소를 불던 삐오넬의 영상이 덧없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이윽하여 팔로군 간부의 한 명이 우리의 숙사로 놀러왔다.

대단히 겸허하고도 예절이 도타운 믿음직한 청년군인이었 다. 멀리 조선서 들어온다는 말은 듣고 찾아왔노라면서 일 본 국내의 형편이며 조선내의 사정을 각 방면에 걸쳐 세세 히 물으며 답변을 수첩에 열심히 적어나간다. 학습자료로 삼으련다고 하였다. 혹시 능숙한 조사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잡담을 하고 나서 일병 포로를 만나 보지 않겠느냐고 묻는 다. 도망치다가 수수밭 속으로 숨어 든 것을 덮쳐서 붙들어 보내 온 것인데 다섯 명 중에서 한 녀석이 아직도 밥그릇을 발길로 걷어차며 말썽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밥을 영 안 먹소?“ ”기아투쟁인 모양입니다.”

하면서 웃는다.

”다른 녀석들은?“ ”감지덕지로 어쩔 줄을 몰라 하지요.”

”일본인 해방연맹으로 넘기게 됩니까?“ ”사령부에서 취조하고 나서 넘기지요.”

C동무와 같이 따라나서서 포로수용소로 찾아갔다. 감옥도 아니요 유치장도 아닌 예사 민가였다. 비교적 큼직한 것으 로 보아 옛날 토호의 장사이던 것을 군 연락처 비슷하게 쓰 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문 밖에 파수병이 서 있었다. 돌담으 로 둘러막은 널따란 안뜨락 화단에는 시방 맨드라미꽃이 방 선으로 피어 있었다. 뒤채 골방의 어득시근한 '캉' 위에 득 실득실 누워 굴고 있던 네 녀석이 우리가 들어서니까 모두 일어나 앉으며 굽신거린다. 위치가 바뀐 탓인지 악독하고도 잔포한 이 일병놈들이 견딜 수 없이 미워야 할 터인데 징그 러운 모멸감을 억제치 못할 뿐이다.

일군의 침략 속에서 태어나 놈들의 노예교육을 받고 자라 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신경이 마비된 탓이라고 스스로 느 껴진다. 그러나 동행의 두 동지는 적을 앞에 두고 도리어 빙글거리는 것이다. 천만의외였다. 이네들의 사랑하는 전우 를 찔러 죽이고 쏘아 죽이던 적병놈들이다. 어버이의 집을 불태우고 연약한 아내를 짓밟고 누이를 겁탈한 적병놈들이 다. 전원을 전차로, 도시를 대포로 유린하고 파괴한 적병놈 들이다. 그들에게 비참과 굶주림을 강요하는 적병놈들이다.

또 한 녀석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팔로 동무의 말이 밥 도 먹지 않고 못되게만 굴어 딴 방으로 따로 내보냈다고 한 다. 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털개지같이 수염이 답실그레한 오장(伍長)놈이 밑으로 내려서면서 아침에 그놈도 종래는 밥 을 먹고야 말았다고 큰 공로라도 내세우는 듯이 손짓과 몸 짓으로 시늉을 해가며 외마디 중국말을 더듬는 것이다.

”왜 좀더 굶어 보겠지……”

하니까 뜻하지 않았던 일어에 일병들이 모두 눈이 둥그래 진다.

”아니올습니다. 먹어야지 안 먹는다고 해 별수 있습니까.”

털개지 오장이 비굴스레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린 다. 말썽 부리던 녀석까지 밥을 먹었다는 소리가 매우 대견 한 모양, 팔로 동무는 혼자 버룩버룩거리며 좋아한다. 내가 묻기 시작하였다.

”녀석은 왜 밥을 안 먹고 지랄이었던가?“ ”하, 우리들한테 늘 뻐겨 오던 말이 있으니까요. 공연히 여 러분께 염려를 끼쳐서 하, 죄송하올습니다.”

”상관이었던가?“ 눈알이 생쥐처럼 올롱한 녀석이 별안간 일어서며 딱 기착 을 하더니 ”하잇, 사관학교를 나오셨습니다. 중위 어른입니다.”

”이 자식 아가리 닥쳐!”

털개지 오장이 후려갈길 것처럼 팔구비를 젖히며 ”여기는 계급을 소중히 아는 데가 아니야……하, 실례올습 니다. 적에게 살아서 욕됨을 볼 바에는 배를 가르고 자결해 야 한다고 매일같이 호통을 뽑아 오던 처지에 넉작넉작 밥 을 받아 먹을 수 있어요”더욱이 우리들 부하가 보는 앞에 서……하……”

이런 연고로 밥을 먹고 싶어도 못 먹었을 모양이라고 C동 무에게 일러주니까 C동무가 팔로 동무에게 웃으며 통역해 들려준다. 이 사이에 녀석들도 의아스런 눈초리로 나와 C동 무의 얼굴을 흘금흘금 번갈아 가며 살펴본다. 이외의 조선 말에 어리둥절해진 모양이다.

”그래 혼자 있게 되니까 넌지시 먹어치운 게로군?“ 하니까 모두 굽실거리며 ”하, 그렇지요. 그러기에 저희는 벌써부터 따로 내어 주었 으면 했습니다. 하, 첫째 우리들이 살 수 없거든요. 첫날 밥 그릇이 들어오니까 발로 걷어차며 어서 죽여달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하, 이게 약을 친 밥이다 치사스레 적의 밥을 얻 어먹다 독사할 테냐고 우리들까지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망할 자식 저는 상관이니까 총살이 되지. 하, 우리들이야 뭐……”

”녀석은 총살될 줄로 아는가?“ ”하, 아무래도 하나쯤이야 죽이지 않을라고요”아무리 팔 로님들이 사정이 많으시다고 해도……하……저희들이야……

하, 저희들은 정말로 공산주의를 찬성하는걸요.”

하니까 고소를 금치 못하게끔 모두 고개를 주악주악한다.

”자식 때문에 저희들도 처음 몇 끼는 굶었는걸요. 하얀 옥 백미를 어디서 구해 왔는지 자기네는 좁쌀죽도 변변히 못 끊이면서 지어 주는 것을……하, 죄송 천만입니다……

하……그런데……”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간사스런 웃음을 입가에 띄며 오장 녀석이 조심조심 이렇게 발을 달아 묻는다.

”하, 조선분이시죠?“ ”그래 왜 묻는가?“ 불기하고 어성이 높아졌다. 역시 지금까지 일인들로부터 조선사람 아니냐고 질문을 받아 올 때마다 반발심을 느껴 오던 버릇이 쳐받쳐 오른 때문일 것이다.

”하, 그저 반가워서 말씀입니다……”

한 녀석이 진정으로 반색을 하며 이런 소리를 하였다. 무 슨 좋은 도리라도 생길까시피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반가워?“ C동무를 돌아보며 ”이 녀석들이 우리들 조선 사람을 만나 반갑다는구려.”

하니까 C동무가 노상 커다란 눈알을 부라렸다. 녀석들은 자는 범을 일으킨 듯하여 여깻죽지가 축 늘어지며 얼굴빛이 시리죽었다. 그 중 조그마한 녀석이 양해를 구해 보느라고 ”하, 우리 중대에 조선사람 상등병이 하, 한 분 계셨습니 다. 하, 우리들과 아주 친했습니다. 하.”

이렇게 가쁜 숨길을 몰아치니까 털개지 오장이 녀석을 잡 아뜯으며 ”임마, 저분들은 조선의용군 사람이야……함부로 조잘거리 지 말어……알지 못하면……하, 미안합니다……그런데 앞으 로 저희들이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은 당신들과 형제들이나 같은 사람이니까……하, 사령부에 가더라도……”

”이 자식 왜 자꾸 곁방구질이야!”

털개지 오장이 면박준다.

”일본이 망하면 조선은 독립이야! 알아?“ ”몇 해나 중국에 와 있었는가?“ ”하, 저는 5년째 됩니다.”

매우 약고도 눈치가 빠른 오장이다.

”그래 팔로님의 일인지 의용군의 일인지 대개는 짐작합니 다. 하,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신병들이어서 사령부에 가서 는 죽는 줄만 압니다. 하……글세……”

팔로 동무가 이야기의 내용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염려 말라고 일러주시오. 사령부에 가서 물어 볼 일 물어 본 뒤에 일본인 해방연맹에 넘기게 될 터이라고……”

이 소리를 듣더니 녀석들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감사 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여 진의를 아주 똑똑히 알았노라고 천조대신(天照大神) 모시듯 내 앞에 합장배례하 는 녀석도 있었다. 같이 있었다는 조선인 상등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아마 전사했으리라고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싸움이었던가?“ 털개지 오장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들이 소속되기는 하남 성 북부의 어떤 작은 성읍을 경비하는 중대였다. 팔로군이 근방에 출몰한다는 정보를 받고 두 소대가 일어나 출격한 사이에 이 성읍이 포위공격을 받아 성을 지키던 1소대가 전 멸을 보았다고 한다. 동포 상등병도 이와 운명을 같이한 모 양이었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성으로 돌아오다가 그들은 매복전에 걸려 대패를 보고 몇 살아 남은 놈끼리 수수밭 고 랑으로 기어들었었다.

”팔로는 아주 용감하거든요.”

”저 중위도 달아나다가 붙들렸습니다.”

”저희들은 대들지 않고 공손히 손을 들었습니다. 하, 정말 입니다.”

”하기는 제 형님이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하,”

모두 형편 돌아가는 대로 한마디씩 재잘거린다.

돌아나오면서 C동무더러 정말로 백미를 구해다가 녀석들에 게 밥을 지어 먹이느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한다.

”어떻게서든지 하나라도 더 우리 사람을 만들자는 게지요.

당장 쳐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얼려 잡아 정치적 자료도 얻을 겸 재교육하여 민주역량을 더하자 는 것입니다. 죽여 버리기야 가장 간단하지요. 하나 그것은 소극적인 적개심의 표현입니다. 반민주전에 대한 적개심이 강렬하면 할수록 우리 사람을 더 많이 만들어야지요. 우리 는 애국자인 동시에 진정한 국제주의자가 아니겠소?“ 기아투쟁의 흉내를 내다가 혼자 있게 되니까 입맛을 돋치 기 시작한 중위군은 바로 옆채의 외간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이 들어서니까 놀라 일어나 도사리고 앉았다.

22, 3세의 새파란 젊은 청년장교였다. 탁자 위에는 다기(茶 器)와 지필(紙筆)이 놓여 있으며 일본말로 된 서적도 몇 권 있었다. 팔로 동무는 이 중위와도 그체없이 벙글거리며 악 수를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고 떠보니까 갑 자기 놀라는 눈초리로 반반히 쳐다볼 뿐 좀체 입을 떼지 못 한다.

”왜 부모 생각이 나지 않는가?“ 강도단의 소두목 젊은 '사무라이'는 자못 기가 막힌다는 듯 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모양을 바라보면서 저런 친구도 한 달만 치어나면 차차 생각을 고쳐 먹으며 바른 길로 나선 다고 C동무가 설명해준다. 팔로 동무는 되도록 원만히 담화 해 주기를 원하였다.

”고향은 어디인가?“ ”구루메(久留米)”

외마디 소리였다.

”아버지는 뭐하시는가?“ ”공장에 다닙니다.”

”사무원인가?“ 머리를 흔들어 보인다. 노동자인 모양이다.

”왜 밥을 먹지 않으려 했는가?“ ”……”

”군보다 훨씬 상관인 일본 사람들도 앞으로 많이 만나게 되리라고 하는데……만나 보고 싶은가?“ ”……”

얼굴을 치켜 들고 의아스런 눈초리로 한참 동안 쳐다본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본 해방연맹의 이야기를 못 들었는가?“ ”여기 와서 들었습니다. 흥 그 따위 매국노들이……”

딴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경솔하게도 이런 이야 기가 튀어나온 것을 진작 후회하는 눈치로 얼른 말꼬리를 돌려 ”당신은 일본 유학생이지요?“ ”음…… 그리고 조선사람!”

삽시에 낯색이 달라졌다.

”왜 의외인가?“ ”……”

”일본이 이번 전쟁에 이길 줄 아는가?“ 대답이 없다. 담배를 꺼내서 권하니까 공손히 받아 들더니 삿자리 위에 놓아 둔 제 담배를 우리에게 한 대씩 권한다.

팔로에서 공급한 것인데 시의심으로 좀체 피우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불통에 가루담배를 담아 풀석풀석 피우던 팔로 동무는 치하를 하며 받아 들고 불을 갈아 댔다.

”전쟁이 머지 않아 끝날 줄을 아직도 모르는가?“ ”이제라도 중국과 일본이 악수만 하면 됩니다…… 왜 팔로 에서 일본과 제휴를 하지 않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습니 다. 이번 전쟁은 서양민족과 동양민족의 싸움입니다……우 리 일본은 어디까지나 동양민족의 맹주로서 힘을 모아 백색 종을 때려 눕히자는 것인데……”

단숨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매우 용기를 요하는 모양으로 말소리가 떨린다.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손(神孫)은 지금 까지 교육받은 대로, 신문에서 선전한 대로 일본 민족이 동 아를 지배해야만 될 권리가 있음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 전쟁이 벌어졌으며 도대체 어떤 놈이 터뜨 려 놓은 싸움인지도 분간 못하는 모양이다. 장황히 이야기 할 겨를도 없고 간단히 치료될 병집도 아니기 때문에 화제 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면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일본의 패전은 어차피 불가피한 사실이며 일본이 지고 보 면 군도 살아서 돌아갈게 아닌가”팔로군은 결코 포로를 죽 이지 않으니까.”

이 소리를 귀가 솔깃하여 기색을 엿보는 듯 살며시 쳐다본 다. 그리고는 또다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전선에 나오기는?“ ”사관학교 졸업하면서 곧 나왔습니다.”

”언제 졸업했는가?“ ”재작년입니다.”

”얼마나 중국백성을 죽였는가?“ 얼굴이 파래지면서 ”아닙니다. 저는 거진 서주에 있었습니다. 서주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전쟁도 얼마 해보지 못했어요. 솔직한 말 로……”

생명이 아깝다는 사무라이도 매일반인 모양이었다.

팔로 동무는 영문을 모르고 그의 어깨를 치면서 낙심 말라 고 위로하며 차를 따라 준다. 우리도 쓴 차를 한 잔씩 얻어 마신 뒤에 이 방을 하직하였다.

팔로 동무의 말이 포로 신세가 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저희 놈끼리 윗놈자세를 하며 부하들을 골리고 있다고 한다. 중 위군이 격리되었으나 지금은 아마 털개지 오이장 녀석이 그 중 왕땅일 것이다. 밥도 윗놈 차례로 먼저 뜨고 반찬도 맛 있는 것은 윗놈이 먼저 성큼성큼 집어먹는다면서 웃는다.

언젠가는 쭈르르 일렬로 앉아서 서로 윗놈들의 어깨를 주물 러 주고 있었다.

털개지 오장네 방 앞을 지나치려 할 때 갑자기 방안에서 ”

기착!”하는 호령 소리가 들렸다.

네 녀석이 일자로 딱 뻗치고 서서 경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를 나오는 길로 팔로 군인들의 생활을 보려고 영사로 향하였다. 같이 길을 거닐며 팔로 동무는 중위군과 의 문답 내용과 거기서 얻은 소감이라든가 암시를 자세히 알려 달라면서 수첩을 꺼낸다. 사령부에 가면 물론 일어를 잘 아는 이가 있어서 충분히 취조도 하고 지도도 할 것이나 혹시 참고가 될 자료라도 있을지 몰라 알아두겠다는 것이 다. 그는 포로와의 대화내용에 매우 흥미를 느끼는 모양으 로 혼자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지으며 때때로 되묻기도 한다. 이네들이 이렇게까지 신중히 적을 취급하며 연구하고 조사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병놈들은 이네들 동족의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하 였는가”격검연습 재료라고 하면서 등, 가슴을 찌르고 군도 로 목을 무, 배추 베어 버리듯 하였다. 여병들은 의복을 벗 기고 달아매서 불로 유방을 지지고 차마 형용 못할 모욕으 로써 민사(悶死)케 하였다.

중국인이라면 개 돼지처럼 여겼다. 둘러메치고서 면상을 구둣발로 내려다지고 코와 입에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심지어 는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서 화형을 하고 산채로 웅덩이 속 에 묻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몸서리치는 일을 모르는 그들 이 아닐 테다. 자기네 형제가 그렇게 죽었고 어버이가 그렇 게 죽었고 아들딸이 그렇게 죽었다. 만약에 불행히 그들이 붙들린 대도 또한 이렇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총을 던지고 손을 들었다고 하여 좋은 방안 에서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책을 보고 있다. 휘 파람을 불고 있다. 당장 입으로 물어뜯고 생피를 마셔도 시 원치 않을 이 포로놈들을 앞에 두고 너그러운 웃음빛이 도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노예 근성이냐”아니다, 비굴이냐”물론 아니다. 자비심이 냐”더욱이 아니다. 보다 더 적극적인 적개심 때문에!

참으로 새로운 세계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는 새로운 윤 리를 창조한 것이다.

전장에 나서면 귀신도 울리는 용감성을 발휘하는 이네들이 아닌가”저놈이 우리 어버이를 죽인 놈이다. 저놈이 내 집 에 불을 질렀다. 저놈이 아내를 잡아 갔다. 그들은 이를 갈 고 치를 떨며 대드는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 못할 잔 악한 이 파시스트 군대를 가장 미워하기 때문에, 원통한 마 음이 너무도 가슴을 두드리기 때문에 도리어 그 원수의 채 찍에 내몰려 온 굴개 쓴 말들을 피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이 는 것이다. 이 마왕의 사자(使者), 지옥의 사신(使神)들 역시 전제국가의 가련한 인민들이기 때문이다. 이네들도 굴개를 벗어 던지고 바른 정신이 든다면 머지 않아 새 세계를 이룩 할 역군이 될 것이며 민주일본 건설의 귀중한 주석이 될 것 이다.

헐벗은 백성에게 길을 밝히신 레닌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혼자 마음속 깊이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여, 이렇게 부르짖 었다. 이 스승들의 바치는 태양이 힘을 줌으로써 설움과 아 픔 속에서도 온 세계의 누리가 서로 피 묻은 몸뚱이를 껴안 으며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엔 저도 모르게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저 자신을 의식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와 같이 널리 헤아 려 보는 우람찬 사상의 옷깃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미워할 줄 몰랐던 것일까”30여 년간 우리의 기름진 국토를 타고 앉아 우리 겨레의 목줄기를 비틀며 사랑하는 부모형제 를 감옥 속에서 썩이고 우리의 동생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죽음의 전쟁판으로 몰아내고 심지어는 어린애들의 소꼽노래 까지 빼앗은 이놈들이다. 참지 못한 분노와 억제 못할 적개 심의 전위로써 끊임없이 싸워 왔던가”

조국의 깃발은 나의 가슴에 안기기 전에 나의 몸뚱이를 두 드리며 묻는 것이다. 충실하였느냐 조국 앞에”그동안 내가 찾아헤매던 것이 무엇이냐”안일이었다. 하찮은 자기 변호 의 그늘 밑이었다. 자포자기의 독배를 들며 나날이 여위어 가는 팔다리를 주물던 일이 결코 자랑일 수 없으며 깊은 골 짜기로 찾아 들어가 삼간초옥에서 나물을 먹고 물 마시며 팔을 베고 도사인 양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누웠대서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엄정히 말할진대 도리어 놈 들의 총칼 앞에 무릎을 꿇기가 일수였던 치욕의 반평생─뉘 우침이 스며들어 치가 떨렸다. 이러한 시기에도 허구한 오 랜 세월 총칼을 들고 이 나라 우수한 아들딸들은 적들과 죽 기로 싸워 왔거늘. 적을 가장 옳게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 제 나라를 가장 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보 다도 적을 좀더 미워할 줄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적의 가시덤불 속에서 멀리 떠나와서야 나는 비로소 적을 보다 더 가까이 느끼는 듯하였다.

포로를 수용하고 있는 집에서 뒤로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곳에 군인들의 임시 영사가 있었다.

대개 빈집이라든가 쓰지 않는 집을 얻어 가지고 군대가 들 어 있기 때문에 인민의 이해와 일상생활에 간여함이 없을 모양이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옛날의 묘원(廟院)으로 시 설이라고는 별로 없으나 아주 질서 있고도 정결하였다. 1중 대쯤 수용할 수 있는 모양인데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가 끔의 식기와 수건, 세면구, 학습장 등 이 벽에 걸려 있고 밑 에는 가지런히 침구가 놓여 있었다. 옆방은 구락부로 되어 여러 가지 신문과 잡지, 오락도구가 비치되어 있으며 벽에 는 지도, 표어, 포고, 벽신문, 만화 등이 다채롭게 장식되어 있다. 전방으로 나가는 군대가 여기에 머물러 며칠씩 쉬고 서 떠난다고 한다. 이러한 행군과 이동도상에서도 군인들은 군사”정치상의 훈련과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문화”오락 방면의 공작도 또한 열렬히 전개하는 것이다.

군사”정치위원회라고 할지 이런 조직이 있어서 군사”정치 과목의 학습을 지도하고 군사토론, 정치토론조를 만들어 가 지고 군인의 정치적 자각과 병사지식을 제고한다. 그리고는 문화”오락위원회라고 할지 음악대, 식자반, 독보조, 극단 이 런 것을 조직하여 군인들의 시국문제 토론을 지도하고 체 육, 음악 등 문화교양을 높이도록 노력한다. 여기서도 우리 는 군인들의 소조를 이루고 둘러앉아서 토론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구락부에는 열심히 독서하는 이, 신문을 보는 이, 학습을 하는 이들이 그득하였었다. 또 뒷마당에서는 그 물을 치고 두 패로 갈라서 배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에는 아주 나이가 어린 소년군인이 섞여서 장정군인들을 교 묘한 기술로 골려서 웃음판이 터지기가 일쑤였다. 풀밭에는 사병들이 촌민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서로 히죽히죽거 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하기는 사병 자신의 농민이기 때문 에 병농일치(兵農一致)가 아니라 적어도 여기서는 그야말로 병농일체(兵農一體)인 것이다.

담정 밑의 풀밭에서는 여병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꽃수레 를 만들어 흔들며 나비떼처럼 춤추며 노닐고 있었다. 무슨 유희인 모양이었다. 어린애들이 해죽거리며 남실남실 춤을 추다가는 서로 깨울깨울 끄덕이고 또다시 돌아서며 꽃수레 를 든 손으로 원을 그린다. 그러면 여병들이 그들 사이로 제비처럼 재빠르게 빠져 나가며 꽃수레를 빼앗아 가지고 높 이 치켜 들었다. 어린애들은 일제히 흩어져 그 주위를 둘러 싸고 나팔을 불며 행진하는 시늉을 하며 돌아간다. 하니까 여병들이 항복한다는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꽃수레를 모아 머리 위에 싣고 끼울끼울 거리기 시작하였 다. 그제는 애들이 나비처럼 날아들며 꽃수레를 도로 차지 하고 일렬로 서서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부끄러 이 인사하며 꽃술을 주는 것이었다. 여병들을 비롯하여 여 러 군인들이 박수를 친다.

조금도 예기하지 못하였던 일이라 어리둥절하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눈등에까지 흔흔히 올라온다. 그 중 어린 계집애를 껴안아 올려 뺨을 부비면서 고맙노라고 여병들과 악수를 하였다.

”몇 살이냐?“ 고 물으니까 흙 묻은 조그만 손가락을 여섯 개 꼽아 보인 다. 춤을 추느라고 귀밑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 며 ”아버지는?“ 이번은 도리도리한다.

”몰라?“ 하며 웃으니까 여병 하나가 다문다문한 이를 구술같이 드 러내며 무엇이라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설명하여 준다. C동 무의 통변에 의하면 작년에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죽었고 어머니는 소탕 때 온데간데없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군 대에 와서 길러나는 불쌍한 애라고 한다.

다부룩한 단발머리에 곁채를 곱게 땋아 내리고 사이사이 분홍빛 분꽃을 달아매어 둥그스름한 얼굴이 말할 수 없이 이뻐보인다. 이 곁채머리를 어루만지며 서툰 말로 외마디 매우 이쁘다고 하니까 여병들이 좋아하며 좀 보란 듯이 다 른 동무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이때에 여가리에서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던 편복(便服)의 중년신사가 다가오며 반가이 악수를 청하는 것 이다. 정치위원 우 선생이라고 들었다. 환영의 인사를 마친 뒤에 여병을 돌아보며 싱글싱글 웃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군대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이 어린애의 머리본때가 자꾸 달라집니다. 여성동무들이 모두 제 취미대로 머리 모양을 매우 주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다행히 우리 여자군인 가 운데는 여승이 없기 때문에 아직 머리채만은 남아있군요.

그렇지?“ 하며 어린애의 손을 쥐고 흔든다. 모두 웃었다.

여기서 한동안 어린애들과 같이 유쾌히 즐긴 뒤에 우리는 우 위원의 인도로 영사내의 응접실 비슷한 방안으로 들어가 게 되었다. 벌써부터 조그마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반 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 간부 청년들이 참석하였고 조 금 있다가 최 동무도 안내되어 왔다. 어린애들한테서 받은 꽃수레로 식탁이 더욱 빛나게 꾸며졌으며 불이 들어와 어둠 침침한 방안이 가없이 밝아졌다. 담벽에는 여러 가지 강령 이며 표어가 붙어 있고 정면에는 모 주석의 화상이 걸려 있 었다. 우리 조선 동무들이 이 해방구역에 들어오면 팔로기 관에서 모두 이렇게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이었으나 나는 외 국 동지들에게 이처럼 초대를 받음이 처음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감격에 넘쳐흘렀다.

이 자리에서 나는 빈약한 소감이나마 솔직히 털어놓게 되 었다. 봉쇄선을 뚫고 들어와 유격지구와 해방구로 들어오는 도상에서 내 눈으로 직접 대하고 귀로 듣는 마음으로 느낀 바, 몸으로 체험한 바를 이야기하니까 우 위원은 이렇게 말 하였다.

”옳습니다. 우리 팔로군대는 정말 인민의 지지와 옹호를 받고 있지요. 이 군대가 인민 속에서 나왔으며 인민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일본 군대와 일본 인민과의 관계와는 아주 다릅니다. 멀리 일본의 예를 찾을 필요도 없이 국민당 군대를 보십시오. 우리 군대는 그 자체가 인민이니까……저 역시 하나의 농사꾼의 아들이외다.”

조금도 허식과 과장이 없이 순박하면서도 열에 넘쳐 매우 호감을 주는 태도였다. 참으로 농민 속에서 자라난 지도자 의 모습이 독특한 품격을 자아내는 듯하였다. 내기 굴욕의 진창 속에서 더러운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 이렇게 새로운 생애를 찾아 들어오게 되었음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축복하여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여느 간부 동무들도 새로 맞이하는 국제적 붕우라서 그야말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는 듯한 따사로운 태도로 위로도 하며 격려도 하여 준다.

조선문제가 나오고 역사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문학에 관해 서도 이야기가 벌어졌다. 우리 숙사로 찾아왔던 간부 동무 는 앞서 들으며 적어 놓은 수첩을 꺼내 들고 연신 이야기 참례를 하면서 조선통(朝鮮通) 구실을 하는 것이다.

중국문제를 논하면서는 우 위원은 매양 모 주석의 말을 인 용하였다.

”사실로 모 주석의 말씀처럼 우리 중국에는 두 가지의 노 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고 인민의 권 리와 생활을 파멸케 하며 나라를 망치고 적을 이롭게 하는 국민당 정부의 반동노선과 또 하나는 중국인민이 한길로 통 일되어 항일역량의 총동원 밑에 적을 두드려 부수고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우리의 노선─그러자면 하루빨리 우리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그리고 무당파의 대표 인물들이 단결하여 민주주의 임시연합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국민당 정부는 이 것을 반대하는 것이오. 도리어 적의 소망대로 우리 민족의 분열정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항일전쟁 속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하며 이 쟁취 속에서 또한 철 저항전을 요구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노선 위에서 전국 인민이 굳게 뭉쳐서 시급히 침략자 일제를 타도하고 새 중 국을 건설하자, 이것이 중국인민의 염원이 아니고 무엇이겠 소”국민당 정부는 이것을 반대하는 것이오.”

우 위원의 말씨는 차츰 고조되어 간다. 진실로 나라를 사 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인민을 아끼는 애타움과 분열을 증오 하는 노여움이 엿보이는 듯하였다. 사람 좋은 웃음빛이 사 라진 얼굴 위로 때때로 긴 머리털이 넘실거렸다. 대추나무 로 깎아 만든 파이프로 이따금 식탁을 두드리며 킁킁 콧방 귀를 뀌었다.

”이러한 장개석의 내전정책 아래 침략자 일군은 안심하고 주요 군사력을 국민당 전장으로부터 점점 해방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국민당 정부도 또한 안심하고 통치구내에서 일체의 민주세력을 탄압하여 지하로 몰아넣고 언론을 봉쇄하며 수많은 청년장교를 총살하고 애국투사를 투옥한 것입니다. 모 주석의 보고에 의하면 재작년에 벌써 침략자 일본군의 64퍼센트와 위군(僞軍)의 95퍼센트는 해방 구 전장으로 옮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당 군대는 이에 호응하여 우리 해방군대를 봉쇄하고 압박하며 공격까지 하 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원(外援)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진공을 계속하여 점령구 역을 축소하면서 적군을 구축하여 중국인민을 해방하고 있 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며 조직된 역량이 인민의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작년만해도 이와 반면에 국민당 군대는 멀쩡히 앉아서 하남, 호남, 광동 성 등지의 큰 지역을 적에게 내어 바쳤습니다. 제 나라 인 민과 닭, 돼지를 쏘는 군대의 하는 짓이란 대개 이 따위 일 입니다……”

그리고 또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를 쳐오던 적군은 지금 분신한 대로 견뎌낼 수 없어 서 한군데로 점점 모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계약에 빠지는 일이지요.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이렇게 우리의 작 전은 진전되어 갑니다. 여기 앉은 이 동무들도 역시 전선으 로 향하는 중입니다. 주위에서 군중이 또한 일어나 이 포위 작전에 나서서 적을 교란하고 습격하여 그물 속으로 몰아넣 는 중입니다. 요컨대 이 중국 대지를 일본 침략자로부터 해 방하고 인민대중을 내전과 반동으로부터 구원해야 할 임무 를 우리가 띠고 있습니다. 또 족히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 는 것이오. 왜”인민이 자기를 사랑하며 우리들의 편이기 때문에……”

우 위원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사천성(四川省)의 빈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혁혁하게 싸워 온 투사로서 상해파업 때에는 총살 일보 전에 파옥을 하는 둥, 2만 5천리 이동장정의 고초를 겪는 둥 무척 다난스러운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 뒤에 모스크바로 들어가 오랫동안 혁 명이론을 연찬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모두 하나같이 늠름하고도 겸손하며 우애가 도 타운 청년장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군이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필리핀 전황에 대하여 혹은 카이로선언 이후의 국제 정국에 관하여, 그리고 북방에서 엄혹한 자세로 견딜 수 없는 압력을 일제에 주고 있는 소련 군대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그냥 계속되었다.

모택동 선생의 일화와 주덕 장군의 일상생활에 관한 이야 기도 흥미진진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에 대하여 무한한 충성과 영 광과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김 동지도 보신 바와 같이……”

마주 앉은 미목이 수려한 청년장교가 불그레한 얼굴을 쳐 들었다.

”이 적구 항일 근거지의 환경은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으 리만치 곤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섬, 감녕변구(陝, 甘寧邊區) 역시 이렇지요.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항전은 여전 히 씩씩하게 계속되고 있으며 인민은 전에 없이 안거낙업 (安居樂業)하고 있습니다. 모 주석의 영도가 영명하고 우리 의 정책이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승전 후의 중국은 수월히 통일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 하여 우 위원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단언하였다.

”물론 우리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는 장개석이가 히틀러 제 2세 노릇을 그냥 꿈꾸느냐 그만두느 냐에 달렸지요! 그냥 독재정치를 내세우고 두목(頭目)에게 맹종하라고 주장하면서 내전을 불러일으키며 전민족을 협박 한다면 우선 인민들이 수긍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중국 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고함 소리로 벅차 있습니 다……그러나 사실은 앞으로도 투쟁이 없는 곳이 인민의 승 리가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 뒤에도 우리들은 여러 번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며 밤이 깊는 줄도 모르고 즐거이 담소하였다. 그들은 민족해방 운 동 선상에 있어서의 조선 사람들이 우람찬 투쟁과 우수한 민족적 자질에 대하여 심심한 경의를 표하였다. 중국혁명을 위하여 북벌군에 참가하여 위공을 세우며 싸우다가 장개석 의 학살 음모에 희생된 여러 조선 선배들의 이야기며 동북 반일유격대의 이야기도 나오고 국내의 지하투쟁사에 대해서 도 많은 질문이 나왔다.

우 위원은 조선 사람 가운데 대단히 친밀하고도 정예로운 동무들이 많노라고 하면서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한다. C와 최 동무가 옆에서 그 동무들에 대하여 주를 달며 설명해준 다. 모두 소련에서 배우고 돌아와 제일선의 중요한 간부로 활약하는 분들이었다. 동만유격대에서 싸우다가 유학하고 나온 이들이었다.

이날 밤의 이야기 중에 가장 감격적이기는 저 유명한 2만 5천리 장정의 피의 역사였다. 중공 소비에트 정부의 수도 서금(瑞金)이 함락된 뒤에 국민당군의 총공격을 받아 가며 서점하는 도상의 고란이란 실로 필설을 절하는 바였다. 몇 줄기의 유격선을 그리며 성운처럼 겨우 십만도 못되는 수효 가 구사일생으로 이동에 성공한 것이다(1934년에는 소비에 트구 70만 평방킬로, 공산군 35만이었다).

혁대를 삶아먹고 흙물을 끊여 마신 일도 이때에 있은 일이 었다. 장강(長江)을 피로 변색케 하였고 산을 시체로 높이었 고 진창밭 속에 빠진 채 나오지 못하는 동지들의 등줄기를 밟으며 눈물의 전진을 하였다. 연신 결사엄호대는 조직되어 쓰러지고 여동지들은 어린애를 정도에 버렸다. 이 이동장정 에 있어서 영웅적인 투쟁을 남기고 희생된 조선 동지들도 여러명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걸음걸음 피를 뿌린 2만 5천리─그러나 헛되지 않아 피로 물들은 꽃들이 오늘날 전국 강토에 만발하게 되 었다. 참으로 그들은 피를 뿌린 것이 아니라 씨를 뿌렸으며, 이래 반반세기 그들의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또한 그러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