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만리/제4부
제4부 노마지지(老馬之智)
편집1. 어서 가자 나귀여!
편집다음날은 비에 젖은 안개가 자욱하니 내려앉아 날씨를 보 다가 이럭저럭 다섯 시를 넘어서야 떠나게 되었다. 비를 맞 은 다음부터 다리의 상처를 아파하며 발열까지 하기 때문에 S동무는 며칠 더 이곳에서 떨어져 쉬기로 하였다. 이 대신 여기에 출장 나와 있던 분맹(分盟)의 N 동무가 동행하게 되 어 도합 역시 네 명으로 되는 일행이다. 여전한 황토층의 비좁은 길이 어제의 비에 먼지도 가라앉아 보행에는 매우 편하나 군데군데 물이 고여 발을 뽑기도 하고 때로는 나귀 위에 매달려 건너기도 하게 된다. 장마나 지면 강을 이루어 물이 고이기 십상이게 양옆이 흙의 단층을 이룬 곳도 없지 않다. 얼마쯤 가노라면 조그만 버드나무 숲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름 모를 부락을 지나가게도 되었다. 이 부근의 부락 도 대개는 황폐하였다. 소탕전이 격렬히 일어났던 곳으로, 행길이 무너진 집의 흙기와로 어지러우며 높은 홰나무도 시 꺼멓게 타 죽어 가지만 엉성하니 하늘에 걸려 있었다. 부락 을 지나면 길은 다시 푸른 전원의 단층 사이로 대지를 즐러 매려는 듯이 구불거리며 스쳐 들어가게 된다.
어떤 오븟한 마을에서는 청장년들이 모여 서서 총을 하나 씩 골라 쥐고 헝겊으로 닦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눈겨눔도 해보고 안전장치를 비틀면서 서로 떠벌리기도 하며 법석이 었다. 38식 보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일병에게 빼앗아 굴 속이나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을 새로 끄집어 낸 것이 라고 한다. 평시에는 밭을 갈며 씨를 뿌리다가도 일단 유사 시에는 총을 들고 나서는 민병들인 것이다.
중국의 해방전에 있어서, 더욱이 유격전에 있어 이 민중의 조직역량인 민병편의대의 역할은 매우 단단하다. 이들은 여 러 번 침략전을 겪어 오는 동안에 눈치가 열려 적이 쳐들어 오는 정보만 들어오면 부락의 부녀자들과 어린애들을 거느 리고 산속이나 깊은 굴 속에다 피난을 시키고 중요한 양식 과 가정 집물, 가마솥 등속까지 모조리 져날라 감추어 놓고 가축들도 모두 험산으로 몰고 올라가는 것이다. 일병이 와 닥와닥 당도하여 보면 온 동이를 꿩 구워 먹은 자리요 까치 둥지처럼 빈 껍데기였다.
그뿐인가, 조금만 움칫하여도 쾅 하니 지뢰가 터진다. 밭두 렁, 길목, 동구밖, 봉당, 변소, 방앗간 할 것 없이 어디서든 지 쾅……쾅……요란히 울리며 폭발하였다. 그리고 좀 사냥 을 해보려고 나서면 이 산모퉁이, 저 고개, 앞 재등, 귓등성 이에서 난데없이 총질을 해온다.
왜 또 전쟁을 할 모양이냐고 물으니까 지금 군대동무들이 나온 김에 조련(調練)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 는 14,5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도 섞여 총을 쓸어안고 매만지며 머리털이 허연 영감님도 두서너 명 총을 쥐고 앉 아 싱글거린다. 소년 하나가 보총을 들고 하늘을 날아가는 까마귀 떼를 향하여 쏠 것처럼 겨눔질을 하는데 보니 눈곱 이 더덕더덕 끼인 짜개눈이 심한 결막증이었다. 마침 호주 머니에 안약 용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꺼내 주니까 모두 신기로운지 모여들었다. 눈에 넣으라고 하였더니 소년은 허 급을 떨며 눈을 부빈다. 민병 제군들은 희한한 듯이 낄낄거 렸다. 이때에 농지거리꾼의 한 노병이 어정어정 나서며 젊 은 애들은 그래도 눈이 밝아 괜찮지만 이 늙은 것의 눈이란 밝아야 총질을 할 게 아니냐고 눈을 비집어 보이며 한 손을 내민다. 청맹과니이다. 우리들은 모두 떠들썩하니 웃어댔다.
동구 밖 넓은 터전에서는 민병들이 팔로 군인들의 지도 밑 에 수류탄을 던지는 연습이며 칼 꽂은 총부리를 내대이고 몰려가는 연습, 혹은 엎드려 사격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힘 있는 대로 막 던져 빗나가기 때문에 뻘건 깃발이 자꾸 흔들린다. 그러나 나무 손잡이가 달린 수류탄이 타원형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가는 광경은 자못 우람찬 것이었다.
이 마을을 지나서 번번한 산마루채기를 오르고 있을 즈음 우리는 소낙비를 만나게 되었다. 비는 억수로 퍼붓는데 비 피할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뒷걸음 질할 수는 없기에 비를 무릅쓰고 산길을 올라가니까 마루채 기 위에 조선으로 말하면 국사당(國師堂)이나 성황당처럼 생 긴 조그만 빈집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어차피 이 안으로 몰려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려 붙인 부처의 화상도 없으며 돌미륵 하나 진좌해 있는바 아닌 텅 빈 허청간이나 다름 없었다. 조석(彫石)의 부스러기만 몇 덩어리 흩어져 있 으므로 보아 산민들이 보호신으로 섬기는 우상을 일군이 소 탕 들어온 김에 깨부순 것인지 또는 미신타파의 여력(餘瀝) 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일병들도 여기에서 휴식 하였던 모양으로 토벽에 근등 조장이나 상등병 소림이나 오 장 아무개니 하는 낙서가 지저분하며 그 중에는 배구(俳句) 나 노래 비슷한 문구도 씌어 있었다.
비에 젖은 옷을 벗어 걸고 팔다리를 쓰다듬으며 담배를 피 우고 앉았노라니 N 동무가 내의를 벗어서 펴들고 ”최 동무 생각나나”41년도 5월 소탕 때 말이야. 이렇게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 바로 이런 사당(祠堂)에 둘러앉아서 이잡이하던 생각?“ 최 동무는 쓴웃음을 짓는다.
”……”
”이잡이를 하노라면 언제나 밑도 끝도 없이 그때의 일이 생각나거든……”
1941년도 5월 소탕이라면 몇만을 헤아리는 대병력이 동원 되었다고 일본에서도 떠들어 유명하던 대작전이었다. 소위 태항작전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중공 팔로의용군의 정치 간 부와 그 가족들이 주로 되는 비전투원 4,5천이 산골짜기 속 에서 적을 피하여 조반을 지어 먹고 금방 후방으로 떠나려 는 참이었다. 여기서 불과 백리도 안 되는 요현(遼縣) 산중 이었다. 갑자기 누구인지 적군이 내려온다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놀라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까 노랑 대가리 일군모가 산 위로부터 발발거리며 몰려 내려오는 것이었다. 동에서도 서에서도 북에서도 적군이 기어 내려온다. 사위를 두른 산 악이 마치 큰 파도를 이루어 흠칠거리며 내려앉는 듯하였다.
졸지의 일이라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독 수리 비행기까지 두 마리씩 저공으로 나타나 가로세로 하늘 을 찢으며 폭음 소리 요란히 떠돌기 시작하였다.
밤 사이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좁은 산골짜기 안이 벌컥 뒤집히기 되었다. 독안에 든 쥐로 전원이 포로가 되지 않는 다면 고스란히 몰살을 당하게 된 위기일발의 처지였다. 무 장대라고는 팔로군 몇 명에 조선의용군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드디어 결사적인 엄호령이 내렸다. 지대장 박효삼 동지를 선두로 의용군은 쏜살같이 뒷산으로 달려 올라가며 적의 십 자포화를 덮쳐 침묵시키더니 우리의 깃발을 꽂아 놓았다.
그리고는 기관총 3개와 보총으로 엄호에 착수하여 연신 산 위로 뽑아 올린다. 일군의 추격을 죽음으로 제지하는 판이 었다.
폭음, 총성, 아우성 소리, 지뢰 터지는 소리에 골짜기 안이 드르렁드르렁 울러 떠나갈 듯하였다. 대포알이 터지고, 기총 이 콩볶듯하며 비행기에서는 폭탄이 떨어진다. 마필(馬匹) 7, 8백도 큰 일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면서 울부짖으며 야단이다. 총에 맞아 창자를 땅에 질질 끌면서도 살길을 찾아보려고 주인의 뒤를 따라 산 위로 올라옴이 더욱 처참 한 느낌이었다. 일병이 쓸려 내려오는 바람에 산골짜기는 좁아들며 줄어드는 듯하였다. 의용군의 엄호전은 더욱 맹렬 하여 필사적이고 일군의 추격도 더욱 다급하였다.
쓰러지려는 것을 서로 붙들어 일으키고 병자는 등을 밀며 어린애는 손을 이끌고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하며 4, 5천이 뒷산으로 달려 올라가노라니 그야말로 야비규환의 생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김두봉 선생을 동앗줄로 허리를 동여매고 가까스로 산 위까지 끌어올린 것도 이때의 일이며 선생의 어린 따님은 어떤 동무가 등에 업고 허둥지둥 올라갔기에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중공 간부의 어떤 부인은 이제는 더 따라갈 기력이 없으니 차라리 일군의 포로가 되어 수치를 보게 하지 말고 당신의 손으로 죽이고 피해 달라고 애원하 며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는 바랑을 벗어 놓았다. 남편이 눈 물을 머금으며 싸창을 뽑아 들고 사랑하는 부인에게 총부리 를 향한 사실도 이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하여간 의용군의 용감한 엄호전으로 이렇다 할 만한 손상 이 없이 모두 산 위로 올라와 뒤로 빠져 내려가며 퇴각을 개시하였다. 중공과 팔로의 귀중한 생명을 건질 수 있은 것 은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독립동맹과 의용군의 중요한 일꾼 들도 대개는 이 소탕전에 걸려 구사에 일생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냥 추격에 추격이 계속되어 신고는 여간 아니었 다. 할수없이 팔로군 야전사령부 정치부 주임 나서경(羅瑞 卿) 씨의 발언에 의하여 이날 밤중으로 분산퇴피를 단행케 되었던 것이다.
”며칠 뒤에 골짜기 물을 찾아 목욕을 하고 나서 옷을 벗어 보니 이가 비로 쓸 지경이었지요.”
최 동무가 이러면서 웃으니까 내의를 툭툭 털던 N 동무의 하는 말이 ”비가 내려 부근의 사당 안으로 몰려 들어가 돌로 성을 쌓 아 놓고 옷을 털어 보았지요. 아, 이란 놈들이 어리둥절하며 사방으로 막 퍼져 부산하게 돌성벽 위로 기어 올라온다는데 이 꼴이 꼭 포위되었던 우리들과 같은 정경이거든, 그래 모 두 어서 뛰어라, 어서 뛰어라! 이렇게 성원을 하며 한바탕 실컷 웃지 않았소.”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웃었다.
이런 기막히는 이야기도 이들의 입에서 나올 때는 매우 유 머러스하게 전개되는 것이었다.
비가 멎었다.
아직도 구름이 휘날리는 하늘 위를 요란히 우르렁거리며 B51의 편대가 은빛 날개를 번쩍이며 동북쪽을 향하여 질주 하고 있었다. 우리 근거지의 후방에 있는 항공기지로부터 평한로(平漢路) 폭격차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추기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귀국의 도상에 오른 나는 장 가구로부터 열하 승덕으로 행군해 나오면서 이때의 일을 좀 더 세밀히 캐어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이 소탕전에 있어서 팔로군으로서의 최대의 희생은 야전사령부 부참모장 좌권 (左權)씨가 몸소 돌위작전(突圍作戰)을 지휘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한 사실이었다. 이 용감한 선열의 죽음을 길이 찬양 하기 위하여 전지인 요현을 이로부터 좌권현이라 개칭하였 다 한다.
이때의 우리 의용군측으로 본다면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노 약 병자, 여성동무 등 40여명의 존재가 무거운 부담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보호할 임무를 이상조(李相朝), 박무(朴茂), 이철중 등 여러 동무가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운 해방의 조 국에 돌아와 활약하다가 작년 애달프게도 순직한 이철중 동 지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바다.
해가 지면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출로로 급 류처럼 빠져 나가는 본대를 따를 수가 없어서 두봉 선생을 비롯한 노약자는 딴 길로 덤불 속을 뚫고 옆산등성이로 올 라온 것이다. 모두 기진맥진하여 턱턱 쓰러진다. 그러나 뒤 로는 일군의 추격이 여전히 다급하였다. 용감하고도 책임감 이 센 인솔자들은 그들을 일으켜 어깨를 걸고 혹은 팔을 잡 아 끌면서 비 내리는 산등성이를 헤맸다. 가다가는 엎어지 고 쓰러지고 어깻죽지에 늘어지며 버리고 어서 성한 사람끼 리라도 달아나라고 애원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어둠이 빗속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멀리서는 접전 의 기관총 소리가 계속 해 일어나고 산밑으로부터는 일병이 몰려 올라오는 구두 소리, 군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우리 쪽에는 대처할 무기라고는 권총 몇 자루가 있을 뿐 한 걸음이라도 더 달려 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싸워 보 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생각하니 서글프기 바이없었다. 절망 이 단애를 이루어 앞을 가로막았다. 하늘도 캄캄해지며 길 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껴안아 일으키며 떠밀며 당 기며 그냥 산길을 더듬었다.
마침내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추격은 등뒤에서 절박하게 되 자 한데 몰려서 퇴피하려다가는 전원이 도살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세 패로 나뉘어 여기서 또 갈라지기로 하였다.
서로 한번씩 껴안고 흐느낀 뒤에 운명이 허락하거든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동”서”남으로 산상에서 헤어졌다. 인솔 자 가운데서도 그 중 몸이 좋고 날쌔다고 해서 두봉 선생을 필두로 중요한 선배들은 이철중 동지가 인솔하게 되었다.
이상조 동지 등이 인솔한 근 30명은 산밑으로 도로 내려가 일군 본진이 추격차로 빠져 나간 골짜기 속을 뒤따라 나가 는데 성공하였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나온 교육지계였다.
허나 이철중 동지는 보행이 여의치 못한 일행을 이끌고 섣 불리 피해 보려다가 도리어 실패를 볼지 모른다는 판단 밑 에 용감히도 적의 포위권 내에서 잠적할 방책을 세웠었다.
그날 밤으로 적이 전진하려니 믿었기 때문이다. 토굴과 덤 불이 있어 그래도 몸을 감추기에 십상이었다. 야음을 이용 하여 그들은 덤불 속에 기어들었다.
이날 밤은 그나마 무사하였다. 다음날 새벽의 일이다. 노랑 대가리(일병)들이 여러패로 나뉘어 셰퍼드를 앞세우고 사방 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산민들은 도망치다가 죄없이 불을 맞고 쓰러지고 부녀자는 발견되는 대로 붙들려 간다.
”팔로 나오거라!”
”팔로야 나오라!”
이 고함소리는 산등 위로 골짜기 밑으로 덤불 속으로 토굴 안으로 갖가지 산울림을 일으키며 뒤범벅이를 친다. 그들이 잠복해 있는 덤불을 향하여 적병놈들이 소리소리 외치기도 하였다. 셰퍼드는 컹컹 사납게 짖어 댄다. 놈들은 미심쩍어 덤불속을 향하여 사격을 해왔다. 이때에 그냥 소리를 죽이 고 숨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미 발견된 줄로 알고 이왕이면 싸워 보다 죽는다고 몸이 싱싱한 두 동지가 뛰어 나갔다. 보기 좋게 기관총 소사에 걸려 진광화(陣光華) 동지 는 넘어지며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고 석전(石田)동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철중 동지는 동요하지 말고 꼼짝 말도 록 지시하였다. 그제야 놈들은 끝장낸 줄로 알고 대를 거두 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의 존중하는 두봉 선생은 이렇게 되 어 오늘의 영광된 조국에 살아 돌아오셔서 민주건국에 힘있 는 공헌을 하시게 된 것이다. 같이 행군하며 이때의 일을 물으니까 허정숙 여사는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만치 따라가는 것도 그때 달음박질을 멋지게 격난한 탓 이지요.”
이 산골짜기를 내려 서서 얼마쯤 가니까 조그만 부락이 하 나 깔려 있는데 초입에 무너져 가는 성문이 서 있고 그 토 벽에 '조선독립만세 조선의용군' 이렇게 횟가루로 아름차게 쓴 글씨가 눈에 번쩍 띈다. 최 동무가 돌아보며 ”왜 놀라시오. 우리 근거지가 얼마 멀지 않은 증거입니다.”
성문 옆 아카시아 그늘 밑에 휘장을 드리운 노점이 있다.
행인들이 짐을 내려놓고 앉아서 서퇴를 하며 차를 사 마시 고 있다. 우리도 여기에 나귀를 멈추고 그늘 밑에 기어 들 어가 다리 쉼을 하게 되었다. 소낙비 쏟아지듯이 쓰르라미 가 운다. 조선보다는 퍽 절기가 이른 모양이다.
오늘은 바쁜 길이라 앉은 김에 쇼빙(燒餠)과 복숭아로 요기 를 하기로 했다. 전과같이 여기서도 촌중(村衆)과 어린애들 이 우리의 셰퍼드 군을 구경하러 온다.
N 동무와 현 동무가 어린애들과 같이 놀면서 무슨 노래인 지 우스꽝스레 노래를 부르니까 어린애들이 웃음을 띄고 좋 아하며 따라 부른다. 촌중과 행인들도 히죽히죽거리며 때로 는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한다. 무슨 노래냐고 물으니까 최 동무의 말이 근거지까지 70리의 험한 산길을 우리 군정학교 학원들이 7만 근의 소금부대를 등에 지고 나르면서 부르곤 하여 이 일대에 널리 유행된 노래라고 한다. 곡조는 중국의 아리랑이라고도 할 양가조였다. 35리를 져 오면 또 딴 학원 이 받아 지고 35리를 근거지의 동맹 직영 31상점으로 져 날랐다. 이 지방에는 소금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비밀이 적 구로부터 들여 온 것을 전학원이 동원하여 운반함으로써 경 제적 자립책의 일조로 삼은 것이었다. 근거지에서는 우리의 군복과 우리의 모자, 배낭, 신을 만들기 위하여 방사공장도 돌리며 식량을 장만키 위하여 제분소도 경영한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곤란한 식량문제를 행동하기 위하여 이네들은 태항산 그악한 돌비탈을 캐어 화전을 일구고 8백 이랑이나 되는 땅에 감자와 호박을 심고 강변 모래밭을 갈아 일년감 과 붉은 무를 기르고 가을에는 심지어 도토리까지 줍는 형 편이었다.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꾸려 나가자! 이것이 또한 중요한 구호의 하나였다. 이러한 고역이 즉 우리의 원수 일 본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고생이고, 이것이 곧 우리가 원수 일본제국주의를 두드려 부수고 우리 조선민족을 독립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의 하나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 이었다. 적이 토벌 올 때 신을 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 각에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산허리에 부대를 파고 벼랑 밑 에서 도토리를 찾았다고 하니 아니 눈물겨운가”도토리 한 알이 총알을 줍는 것처럼 반가웠고 등골이 뻐근한 소금짐이 기관총을 얻어 멘 것처럼 기뻤을 것이다.
어쨌든 수염발이 잡히기 시작한, 말씨도 잘 통하지 않는 학원들이 긴 행렬을 지어 소금짐을 등에 지고 영치기영치기 하면서 져 나르는 광경은 일대가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물가에서 물을 얻으려 할 때나 마을에서 숨을 돌 릴 때며 산사람들과 마주칠 때에 색한 일이 두간두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의용군에 대한 인식을 중국민중에게 깊이하 기 위하여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이 노래를 서로 화창하 며 짐을 져 나르기도 하고 때로는 부락에 들려서 꽹과리를 치며 촌중을 모아 놓고 예의 솜씨좋은 연극도 보여주고 무 용놀이도 구경시키고 노래를 배워 주기도 하고 조”중 두 민 족의 친선과 해방전을 위한 고동연설도 하였다. 그들은 이 렇게 노동을 하면서도 정치공작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이래 이 근방에서는 조선의용군이라면 대인기이며 또 이 노 래는 애 어른없이 모두 귀에 익히 알고 있다. 어느덧 코흘 리개 애들이 일렬로 서서 N 동무의 지휘 밑에 참새 떼처럼 합창을 하고 있었다. 얼른 들어 재미있는 조선말식 중국말 노래로 우진파격으로 불러야 제격인 것이다. 참고삼아 불러 보자면 다음과 같은 노래다.
팔로군과 의용군은 단단히 좋아해(八路軍和義勇軍相好大大 的) 니데나 워데나 형제나 한가지(爾們那我們兄弟那一樣的) 둘이서 총을 메고 일본 족치니(”着槍站一起共同打日本) 왜놈이 아이쿠 데이쿠 도망이 갔다구(鬼子害伯”了”了的有) 짐승 같은 왜놈아 올려면 또 오라(野獸樣的鬼子又要來掃蕩) 의용군은 정치공세 전개하고(義勇軍農開了政治攻勢) 팔로군은 유격하며 민병은 지뢰 묻어(八路郡打遊擊民兵埋 地雷) 왜놈이 지뢰를 메시메시 꺼꾸러진다구(鬼子地雷메시메시死 了的有) 백성님네 우리의 어머니 한 가지(老百性是我們的母親一樣 的) 백성님네 없으면 우리도 메유데(沒有老百性那有我們的) 당신네는 군대 돕고 군대는 백성 사랑해(老百性擁軍軍隊愛 民) 니데 생산 워데 전쟁으로 파시스 멸망(爾們生産我們打拔消 滅法西斯) 금년은 우리들 승리를 하리(今年是我們的勝利的年頭兒) 백성님네 곡괭이 메고 우리나 총 들고(老百性拿鋤頭軍隊拿 槍桿) 퉁퉁대루 왜놈을 때려 부숴(統統的打死小日鬼) 중국인민 조선인민 해방 만세로세(中國人民朝鮮人民解放萬 歲) 매일 하던 버릇인 노상의 개잠을 그만두고 다시 길을 떠나 부지런히 걸음발을 옮기었다. 여러 날 동안의 보행에 단련 되지 못한 걸음걸이라 발이 부르트고 발가락에 염증이 생겨 저리고 쑤시며 게다가 감기 기미도 있어서 언짢으나 이제부 터는 비교적 좋은 길에 올라섰기 때문에 걸음새가 더디지는 않았다. 일군이 소탕 들어왔을 때 수송으로 닦아 놓은 길이 라고 한다. 오래간만에 비가 쏟아졌기 때문에 전원은 푸르 싱싱하게 생기를 띠고 밭에는 농부들이 떨어 나의 물곬을 치기에 부산하였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장거리를 찾아가는 바쁜 걸음의 나귀 바리들이 방울을 울리며 오고 간다. 양떼를 몰고 산으로 올 라가는 소년들의 커다란 농립이 나비처럼 푸른밭 사이를 너 울거린다. 어디로 가는지 총총걸음으로 배보(背褓)를 짊어진 군인들도 지나간다. 길이 좋아지면서부터 한결 이 벌길에 사람 그림자가 많이 보이는 것이다. 국내의 대륙을 남북으 로 헤매는 노마(駑馬)의 여행길. 이제 얼마 남지 않고 보니 새삼스레 또다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락가락 한다.
일로평안을 빌며 정거장에서 떠나 보내던 그리운 동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떠나기 전날 밤 모여 앉아 별주 (別酒)를 같이 나누던 동무들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진심으 로 모두가 나의 출분(出奔)을 축복하여 주던 선량하고도 우 애 깊은 동무들이었다. 지금쯤 어디에 모여 앉아 나의 거취 를 근심하며 걱정하고 있지나 않는지”이렇게 미더운 동지 들의 따뜻한 보호와 인도 밑에 일군의 봉쇄선을 무사히 넘 어 태항산중을 나귀를 타고 건득거리며 들어가고 있음을 어 떻게든 알려 주고 싶은 일이었다.
동무들이여 잘 있거라!
나의 이 행복된 탈출행이 도리어 사랑하는 동무들의 신상 에 불행을 가져오지나 않았을까”
이 동무들과 이 산중의 즐거운 길을 나란히 나귀를 타고 들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심지어 이 기나긴 이국 산중의 노상에 올라서며 보고 느끼고 들은 일이라도 이 동 무들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일이었다.
모두가 우리들에게 주는 산 교육이요 감격이요 암시요 고 무이기 때문이었다. 단시일이나마 나는 벌써 여기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으며 새로운 백성의 대지를 거닐고 있으며 새로 운 사람들을 대하였으며 새로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것이다. 원수를 물리치고 인민을 건지고자 다같이 일어나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빛나는 새날을 맞이하는 세계였 다. 그것은 가장 고귀한 정의와 진리의 힘이 밑바닥에 뿌리 를 박고 인민을 키우는 대지였다. 그것은 피와 굶주림의 지 루한 어둠 속을 지나왔기 때문에 새로 맞이하는 광명을 온 대지 위에 펼쳐 넓히기 위하여 싸울 줄을 알게 된 사람들이 었다. 여기서 새 정신, 새 생활, 새 문화가 이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의 별이 빛나고 자유의 깃발이 퍼득이는 세계의 6분지 1에 연달린 하늘이었다.
인민의 최하층에서 일어난 혁명!
최악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키워진 싸움!
이리하여 각고(刻苦) 반반 세기 동안 인민의 환호와 지지 아래 대하처럼 저지할 줄 모르고 외적의 철조망을 뚫고 전 제계급과 군벌의 쇠사슬을 끊으며 나가는 힘! 드디어 중국 인민은 일어난 것이다. 이 영예는 곧 중국인민의 영도자 모 택동 선생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요 이 영광은 중공의 머리 위에 팔로군의 깃발 속에 빛날 것이다. 인민이 일어나 제 나라를 다시 차지하게 된 민족은 얼마나 행복스러운 것인 가”모름지기 이 중국의 혁명과정은 거의 같은 단계에 처해 있는 우리 조선에 무한한 경험과 교훈을 제공하는 바다.
우리의 조국을 쇠사슬로 얽어 맨 파쇼 일본의 팔죽지에서 는 이미 맥박이 사라져가며, 우리 3천만의 가슴 동아리를 내리 밟고 있는 놈들의 모진 흙발에서는 거의 기력이 잦아 가고 있지 않는가.
일어나라 조국의 겨레여!
동무들이여 앞으로 나서라!
칠순 노모의 생각이 문득 일어난다.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버드나무 선 조그마한 섬동네의 해도 안 드는 침침한 방안에 앉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라도 부모를 사랑하는 아들의 옛일을 그리며 안전한 탈출하기만 축원하 고 계실까”집안에 어린애의 울음소리와 물소리가 떠나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였다. 어린 손주애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물레질을 하시며 멀리 떠난 이 아버지의 일을 옛말처럼 들 려주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것을 보고야 죽어도 죽는다던 어머니지만 어디 편찮아 누워 계시지나 않는지”
밀물이 들어오면 버드나무 그늘 밑에 물매암이가 떠도는 샛 강에서 어린애들은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을 것이다. 일년 감 농사라도 한몫 해보겠다던 연약한 아내는 구차한 살림살 이를 메워 나가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을까”
끄랴 어서 가자 나귀여!
”따따따─!”
나는 머릿속을 휩싸고 도는 여러 가지 상념을 후려갈기려 는 듯이 나귀 잔등에 채찍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 한 생각은 어느덧 나를 멀고 먼 어린이의 시절로 이끌고 갔다.
나도 어렸을 때 때때로 배를 타고 이 동네 앞 두루섬 고모 네 집으로 놀러갔었다. 갈밭으로 나와 더벙게를 잡느라고 질벅거리기도 하고 옷을 벗어 던지고 미역을 감으며 동막이 놀이도 하였다. 때로는 흐믓한 흙냄새가 떠오르는 풀 언덕 에 누워 떠다니는 고깃배를 바라보면서 창가를 부르며 놀았 다. 흰 돛을 올린 풍선이 노래를 물위에 띄우며 강 한복판 을 달리는 광경도 못내 상쾌하였다. 나의 아름다운 회상은 차차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이 섬 앞쪽에는 병풍을 세운 듯이 깎아지른 만경대의 절벽 이 깊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멋들어진 노송 이 그 잿등 위에 몇 그루 일어서서 바람에 흐느적거렸다.
단애(斷崖)의 바위 사이에는 절기를 찾아 진달래, 개나리, 도라지, 산딸기 등 가지각색 초화가 돋아난다. 그리고 제철 을 따라 이 푸른 하늘에는 종달새가 높이 뜨고 메추라기, 미라부리, 파랑새들이 지저귀며 노래하고 뻐꾸기도 산속에 숨어서 한나절을 울었다.
나는 이런 풍경에 지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꼬리를 휘 저으며 풀을 뜯는 송아지와 격수가 되어 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버들피리를 불기도 하였다. 배가 고플 때는 아 무 밭으로나 기어 들어가 참외를 따고 가지를 찢고 무를 뽑 으면 되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고모님과 사촌누이가 벌써부터 감자를 구 워 놓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감자를 입에 넣고 오무적거리 며 사촌형이 겨울 한철 고기잡이를 나가려고 뜨는 그물 구 경을 한답시고 연신 붙어 돌며 방해를 놓았다. 사촌형은 시 물시물 웃으며 콧노래를 부르다가는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질 러 나를 홀딱 놀라게 하고 나서 은근히 '저리 비켜!'하였다.
이 구경도 싫증이 나거든 동네의 벙어리애 아빼를 집으로 찾아가 둘이서 서로 손짓 몸짓으로 시늉을 하며 한참을 같 이 웃었다. 나는 아빼를 무척 좋아하였다.
내 아이놈도 요즘 섬에서 이렇게 즐거이 지낼 수가 있을 까”
달도 없는 밤에는 고모님의 무릎 위에 머리를 얹고 누워서 옛말을 들었다. 곱살한 얼굴에 조굴조굴 주름살이 진 고모 님은 갖가지 목소리를 다 내면서 무섭고 슬프고 우스운 얘 기를 얼마든지 할 줄 알았다. 때로는 어머니와 같이 채전을 다루며 뼈가 부스러지도록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도 옛말 처럼 들려주었다. 고모님은 올케인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나 이 섬동네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때 내 어머니를 친어머니 처럼 여기고 좋아하였다. 하나 고모님은 밭 일에 지쳐서 몇 마디 안짝에 그만 부스스 잠이 들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살금이 빠져 나와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거기 서는 수놓이를 하느라고 모여 온 섬 처녀애들이 나를 환영 하였다. 외간방에는 화대를 두셋씩 세워 놓아 영등같이 불 을 밝히고 둘러앉아서 밤이 깊도록 수를 놓는다. 붉은 비단 천 바탕에 파란실, 노랑실, 분홍, 초록, 연두, 갖가지 명주실 로 사군자에 사슴이니 소나무, 학, 원앙새를 수놓아 베갯모 도 만들고 돌띠도 만들고 꽃주머니도 굴개도 만들었다. 그 러면 어머니들이 이것을 장날 평양성내로 가지고 들어가 팔 아다가 딸 시집 보낼 자장도 하고 살림살이에도 보태는 것 이었다.
이 처녀애들은 보통 때에 보면 그렇게도 얌전하고 수줍은 듯하나 저희끼리 모여 앉으면 아주 딴사람처럼 명랑하고 쾌 활하였다. 서로 찧고 까불고 해들거리고 꼬집고 야단이다.
옆에 앉아 이런 번화한 광경을 자못 놀라운 눈으로 말똥말 똥 쳐다보던 일이 생각난다.
그들은 돌려 가며 내게 옛말을 들려주기도 하고 친절한 애 는 내 버선에 꽃도 수놓아 주고 모자에 솔다리를 달아 주기 도 하였다. 때로는 시집 갈 날이 가까운 애를 들어 붙어 놀 려주기도 하고 어느 총각이 장가 간다더라고 의미있게 동무 를 성화시켜 울리기도 하다. 그러면 수다스런 애는 쩍쩍 입 을 다시며 ”나는 이 조꼬맹이나 장가 간다면 울지 울 이유가 없을 것 같구나!”
하여 다시 웃음판을 꾸며 놓았다. 나는 머리끝까지 붉어졌다.
모두가 불빛에 얼굴이 능금알같이 불그레하고 까만 눈이 정기롭게 빛나고 손길이 물고기처럼 넘나듦이 한없이 화려 한 느낌이었다. 그 중에도 나는 우리 사촌누이가 제일 이쁘 고 일도 제일 곱게 한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어쩌다가 처녀애들이 나를 가지고 놀 양으로 얼굴을 들이 대며─그 중에서 살눈썹이 긴 쌍겹눈의 처녀애가 이러기를 좋아하였다.
”요 쪼꼬맹이야, 넌 섬 처녀한테 장가 안 들라니”……색동 저고리 입혀 꽃굴개 만들어 씌워 가지구 업고 다닐 테루 다!”
이러한 또 한 애가 나를 끌어당기며 ”안 준다. 시러배 계집애에게는 못 주겠다!”
하여 또다시 한바탕 까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불현듯이 이런 옛날의 하염없는 가지가지의 일이 생각나니 어찌된 일일까”어린애 큰놈이 바로 이 시절의 나와 비슷한 나이로 섬으로 나갔기 때문일까”하기는 내게 있어서 이 어 렸을 때의 섬 생활이 유일한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였다. 그 러나 아이놈이 나와 같은 이러한 아름다운 세계를 즐기기에 는 너무도 시달림과 설움이 많은 오늘의 섬이었다. 이 감미 로운 목가를 어느 놈이 빼앗아 갔으며 이 행복된 생활을 어 느 놈이 짓밟았던가”
보름이 가고 한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가 고 모의 저고릿감을 끊어 가지고 배를 타고 섬으로 나오셨다.
고모님은 신발도 못 신고 뛰쳐 나가 어머니를 얼싸안으며 어린애처럼 캐들거리며 좋아하였다. 본디 늙어도 애티가 떠 나지 않는 그였으나 그것은 정녕 그리던 친어머니를 맞이하 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도 고모님의 잔등을 두들기 며 기뻐하신다. 아─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들이여! 내가 다시 고향에서 그들을 만날 날이 언제나 올까, 만약에 이 기쁨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그것은 정녕 내가 원수의 총에 거꾸러지는 날일 것이다. 아무렇게서라도 싸워 이겨 돌아가리라! 내 어머니를 껴안고 어린애들을 쓸어 부등키고 동무들을 다시 만나고 누이들과 고모님을 보게 되지 못함이 과연 있어서 될 일일까”그동안 너나없이 우리들의 살림에 는 풍상이 많았고 고초는 심하였다. 떠나기 얼마 전 나는 평양 길가에서 우연히 이 섬동네의 사촌누이를 만났었다.
때 묻은 무명저고리를 후줄그레하니 걸친 채 등에는 어린애 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잔뜩 이고 있었다. 그 옛날의 탐스 럽게 빛나던 검은 머리는 흩어지고 호수처럼 맑기 바이없던 눈은 정기를 잃었으며 언제나 그칠 줄을 모르는 웃음이 터 져 나오려던 도톰한 입술이 핏기 하나 없었다. 화려하고도 슬기롭던 인상은 고생에 지치고 지치어 그 자취도 알아볼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까지 일본의 어느 탄광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더욱이나 간고해진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노라고 날마다 밤 을 새워 가며 열두 새 무명을 짜가지고 나왔노라고 하였다.
눈에는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다. 병어리 아빼네는 벌써 전 에 만주로 떠났고 나를 놀려 주기 좋아하던 쌍겹눈의 색시 는 남편을 공출놀음에 때워 놓고 고생한다고 하였다. 아─ 어째서 이런 일이 그대로 있어 될 것인가”사촌누이의 얼굴 속에 또다시 어여쁜 웃음빛이 떠오르고 아빼네도 다시 제 고향으로 땅을 찾아 들어오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쌍겹눈 의 색시의 남편도 감옥에서 나오고 누이의 사랑하는 이도 생지옥에서 솟아 나올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할 것이다.
오직 이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느니 목숨을 바치고 싸워야 하리라. 싸우리라! 어서가자 나귀여!
”이쪽으로 갑시다!”
하는 N 동무의 소리에 그제사 나는 화닥닥 놀라 자신으로 돌아왔다.
2. 야화
편집차츰 하늘을 씻은 듯이 개이기 시작하고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온다. 물도랑에서는 개구리가 낭자하니 울고 있었다. 여 기저기에 무너진 집채가 널려져 있는 흙집 동네가 몰켜 서 있고 그 변두리에 감나무니 호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태 항산 길은 골짜기 속을 상당히 벗어 나온 모양으로 산줄기 가 동편에 아득히 물러나 앉았다. 그 위로 흰구름이 뭉게뭉 게 피어 오른다. 여전히 단층을 이룬 황토지대로 길은 다함 없이 언덕을 오르내리게 된다. 얼마쯤 가노라니 왼쪽으로 뻗어나온 뾰족한 산등성이 위에 포대(砲台)가 솟아 있었다.
아지랑이 속에 희끄무레한 것이 가물거린다. 태항산계와 병 행하여 남하(南下)하기 때문에 우리는 태항산 줄기에 바둑알 펴듯이 요소마다 포치된 일군 포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다. 최동무가 손을 들어 가리키며 ”얼마 전 저 포대에 큰 비극이 있었습니다.”
”최근까지 왜놈이 있었소?“ ”불과 두 달도 못됩니다. 거덜난 것이…… 하기야 벌써 전 부터 기능이 봉쇄된 포대였지요. 이쪽이 자꾸자꾸 뒤로 돌 아 앞으로 앞으로 나가니까 자연 자살포대가 될 수 밖에요.
완전히 고립상태였었는데 이걸 일본인 해방연맹 친구들이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
후방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원군이 올 가망도 만무하여 빠 져 나갈 구멍도 없어지고 보매 이 일군 포대는 도사리고 앉 은 독사의 모가지와 다름없었다. 이 포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언덕 밑에 조그만 부락이 있었다.
놈들은 미처 도망을 못 쳤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 졌음을 알게 되자 모두 포대 안에 들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여태 마을에 내려와서는 공으로 술을 먹고 지랄하고 촌민을 두들기고 여편네에게 행패하던 놈들이지만 일시에 겁을 집 어먹게 된 것이다. 기관총, 보총, 있는 대로 모조리 걸어 놓 고 본대로부터 진격해 오거나 구원 오기만 눈이 까맣게 기 다리는 판이었다. 아마 일본 무사도의 권화요 천왕의 충성 된 간성으로 자임하던 모양이다. 촌장을 보내 항복하도록 권고하면 뺨을 갈겨 돌려 보내고 정규군사(正規軍使)가 찾아 가 사세 부득이함을 일러주어도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최후 의 일병에 이르기까지 결사전이 있을 뿐이라고 악을 바쳤다.
물론 군대를 풀어서 포위하고 집중공격을 하자면 일조에 이슬로 변할 일이었다. 하나 조금이라도 쓸데없이 피를 흘 릴 필요가 없으며 또 이 사수병들을 이끌어 내는 문제도 서 기 때문에 양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투항하려니 하고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하나 나중에는 이 포대가 산적의 소굴로 변하고 말았다.
촌장이 또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양식도 거의 떨어져 식 량과 음료수의 조달을 요구하였다. 이행치 않는 경우에는 그 대상으로서 폭탄을 퍼붓겠다고 위협하나 상대하지 않았 다. 하니까 일병들은 망대 위로부터 살피다가 나귀 바리가 언덕 밑 산길을 지나가면 총부리로 겨누며 고함을 질러 짐 짝을 져 올리게 하였다. 양을 몰고 가는 사람도 협박하여 짐승을 마음대로 빼앗았다. 하루는 광주리를 메고 계란을 팔러 가는 어린애를 이 모양으로 소리소리 지르며 오지 않 으면 쏜다고 위협하였다. 애는 무서운 생각에 고삿길로 쏜 살처럼 울며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포대에서 연기가 일어나 며 총성이 울리더니 어린애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런 보고가 들어오자 마침내는 밤중으로 1중대가 급파되 어 날이 밝기 전으로 요절을 내게 된 것이다. 포대를 물샐 틈없이 포위하고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만반 배치가 되 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일본인 해방연맹 친구들이 군구사령 부로 찾아와 자기네의 힘으로 놈들을 투항시켜 보겠노라고 한 것이다. 이에 허락을 얻은 그들은 일본 군복을 주워 입 고 무장을 갖추고 나서 우리 의용군이 행용 쓰는 본때를 써 보게 되었다.
아닌 밤중에 난데없이 이 포대 안의 전령이 요란히 울린 것이다. 주림과 피곤 속에 호곤이 잠들었던 일병들은 놀라 일어났다. 오랫동안 울려 보지 못한 전령이 달빛 속에 먼지 를 뽀야니 일으키며 진동한다. 번병(番兵)이 전화통에 매달 려 감격에 사무쳐 떨리는 목소리로 ”핫 하이 고맙습니다. 고대합니다. 주위에는 이상없습니다.
하……하이……”
”구원이야?“ 하며 수염이 부루루한 대장놈이 벌떡 일어나 번병을 떠밀 고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이 나중에 포 로가 된 일병의 입으로 소상히 알려진 것이다.
”하 거기가 어딥니까”반 키로의 지점”하이, 통신 두절로 연락을 할 수 없습니다. 네 대위 어른 눈물이 다 납니다. 눈 물이. 어서 와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대장놈은 부하들을 둘러보며 의기양 양하여 ”이 등신들아 어서 빨리빨리 일어나! 자─내 말이 맞지”
흠 구원대가 온다. 대대 본부에서……겁이 시퍼렇게 나가지 고서 꽁무니를 새리려 들더니……이 등신들아!……황송하옵 신…… 기착! 천황폐하를 무엇으로 알아”응 우리 충성된 신하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줄 알았느냐”어림없다. 임마 기착! 네놈은 속으로 항복했으면 했겠다”잔말 말아! 기착!
네놈두 네 속 맘두 안다! 무엇이”기착! 이 앙큼한 놈 네 상 판에두 그렇게 쓰여 있어!”
이렇게 호통을 뽑으면서 무장을 갖추다가 생각하니 혹시 나”하는 불안스런 공포감이 엄습하는 모양이었다.
'일어 잘하는 팔로는 아닐까”' '조선의용군 놈들의 계교에 빠지는 거나 아닐까”' 부르르 치를 떨었다. 부하들의 얼굴에도 기대와 불안의 그 림자가 섯바뀌어 들고 있었다. 대장놈은 이 모양을 보니 성 이 벌컥 났다. 제 자신에 대하여도 노여워졌다.
”네놈들은 흥 팔로나 요보(조선놈)면 어떻거나는 생각에 지 금 속으로 덜덜 떨고 있겠다. 내가 다 안다, 알어!”
”하 그렇습니다……”
억망 중에 한 녀석이 침을 딸곡 삼키니까 뺨을 갈겼다.
”이 자식! 하 그렇습니다”어림없는 소리 말아! 내가 되놈 과 요보의 일본말을 분간 못할 테냐”올 데 갈데 없는 아끼 다(秋田) 방언이었다. 아끼다 방언─최후까지 머물러 싸워 온 결사대의 영예를 가지게 된 게 대체 뉘 때문이야”으흠 그리구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의외로 적이라면 옥쇄가 있을 뿐이다! 포로만 되면 달아매고서 우리의 눈알을 뽑고 귀를 베고 불을 질러 죽이는 줄 알지! 적이라면 옥쇄가 있을 뿐, 기착! ××군조가 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임무를 져야 한다.
그리고……”
운운의 명령을 내렸다.
이때에 망우대에서 보초가 부르짖었다.
”대장님 나타났습니다. 분명히 구원대입니다. 우군입니다.”
황호성이 포대 안에서 일어났다. 총 안으로 내려다보니 달 은 이미 기울었으니 밤안개 속에 거밀거밀 나타나는 그림자 가 분명 일본 군복이었다.
”자! 모두 위치에 붙엇! 되놈이나 요보거든 알지?“ 대장놈은 이렇게 외친 뒤에 기관총을 들고 문 옆에 몸을 기댔다. 구둣발 소리가 들린다. 팔로군의 산화가 아니라 영 락없이 군화 소리다, 두런두런 말소리도 들린다. 모든 신경 이 귀뿌리고 집중되었다. 틀림없는 일이다. 대장놈은 병사들 을 돌아보며 비죽이 웃고 웃다가 얼마나 자기가 침착하며 용의주도한가를 보이려고 큰 기침을 하더니 동요하지 말라 고 손을 내저었다. 보초가 와당와당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 더니 너무도 기쁜 김에 달려오며 문을 열고자 하였다. 대장 놈은 녀석의 정강머리를 걷어찼다. 보초가 비칠비칠 뒷걸음 질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이 ”열게나 문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지기로 지령된 ××군조는 섣불리 대답하였다가 보초마냥 걷어차일까 두려워 대장을 돌아보자 대장 자신이 너무도 기다리기가 바쁘던지 기관총을 든 채 문고리를 비틀며 환성을 지른 것이다.
”××대위 어른 고맙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밤안개와 같이 별빛을 지고 침입하기는 분명 일어를 쓰던 일병들임에 틀림이 없으나 들어서는 참으 로 불호령이었다.
”손들어!”
동시에 기관총부리를 들이댔다. 병사들은 엉겹결에 총을 던지고 한 군데로 몰리며 손을 들었다. 하나 황겁하여 비칠 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대장놈이 방아쇠를 당기었다. 드드 드…… 침입자 두 명이 고꾸라졌다. 총성을 듣게 되자 사위 에서는 와─하고 몰려드는 팔로 포위군의 함성이 일어났다.
어느 새에 대장놈은 가슴에 권총알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병사들은 하나하나 손을 들고 나오며 팔로군으로 인도되었다.
해방연맹의 일인 친구 두명은 이렇게 되어 희생되었으며 한 명의 중상자까지 낸 것이다. 이 추도회가 얼마 전 군구 사령부에서 팔로군, 의용군, 해방연맹원 참석하에 성대히 벌 어졌다고 한다.
”우리 진영에도 포로되어 온 사람이 있는가요?“ ”더러 있습니다. 군속이나 사병 중에…… 그러나 탈출해 온 이들이 더 많지요. 대개 학교에 넣어 새로 교육하고 있 습니다.”
N 동무가 어깻죽지에 패어드는 배보(背褓) 줄을 옆으로 제 쳐 놓으며, ”요즈음 참 유쾌한 선장 포로가 하나 들어왔는걸요.”
”선장이?“ ”암, 선장으로도 어엿한 군용선장이지요. 대련서 일본을 왕 래하는 수송선이라나…… 돛을 단 범선이랍니다.”
하면서 새로운 얘기를 퍼놓는다.
남포항의 어떤 섬에 한여름 나가 있는 동안 이런 배가 역 풍을 피하여 앞바다에 들어닿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일행 이 생선을 사러 쫑선을 타고 섬으로 올라왔을 때 보니 선장 이랍시는 자는 일인이다. 통역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선장은 쿠리 선원들이 무서워인지 꽁무니에 권총을 찌르고 있었다.
선부가 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는 성처럼 기다란 목조선이었 다. 역시 우리 포로 선장도 꽁무니에 권총을 찌른 이런 수 송선의 선장이었다고 한다.
”부산 태생으로 부두살이에 어떻게 주워 들어 일어는 그래 도 좀 통하는 모양이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판무식쟁 입니다. 요즈음 가갸거겨부터 배우고 있지요. 이 선장 선생 대련서 소금을 한 배짐 잔뜩 싣고 일본 당진을 향하여 떠납 신다구 돛을 올렸다는데 닿아 보니 얼투당투 않은 천진 앞 바다 당고(塘沽) 였더랍니다. 바람이 잘못 불었다는 게지 요.”
애전에 큰일날 선장인 모양이다.
”그래 거기서 붙들린 모양이오?“ ”아니지요, 사연이 좀 긴걸요.”
N 동무의 이야기 솜씨도 아주 구수하여 들을 만하다.
”그래 바람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느라고 하루 이틀 묵는 새에 차차 본성이 나타나게 된 모양이오. 워낙 술꾼이요 난 봉이라 청루에 올라 두꺼비처럼 늘어붙어서 아침부터 부어 라 마셔라입니다. 이렇게 몇 사흘 지나노라니 밑천이 떨어 져 선내 비품을, 로프나 구명대니 물통이니 나중에는 쫑선 까지 모조리 팔기 시작합니다. 아마 술만 먹으면 개판이던 모양입니다……그래도 선부들은 눈을 끔적거리며 보고만 있 겠지요. 장사치들이 소금짐까지 팔라고 하니까 내친 걸음이 라 될 대로 되라 하고 모두 져 내리니까, 그제야 선장 어른 소금까지 팔았다가는 콩밥을 먹습니다 제발 말리더랍니다.
그러나 이제야 아무러면 콩밥 안 믿겠느냐 징역 살 바엔 실 컷 먹고나 보자고 어서 썩썩 져 내리라고 호령을 하였습니 다. 하니까 이 쿠리들이 져 내리기는커녕 모조리 들어붙어 서 닻을 감고 돛을 올리더라나요. 배가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아무리 총은 있댔자 어떡합니까”……그래 선 장실에 자빠져서 몰려가던 잠을 아마 스물네 시간쯤 잔 모 양입니다. 술기운이 가셔서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지남침 이니 항해도를 펴놓고 보니 이번도 배가 얼토당토 않은 곳 으로 달리겠지요. 눈깔이 뒤집혀 방향을 돌리라고 하니까 쿠리 대장이 싱글거리며 다 왔다는군요. 이 녀석 오다니 어 디를 다 와”어서 돛을 내리고 차를 돌리라고 노발대발하나 쿠리들은 벙글거리기만 합니다. 악이 받쳐 권총을 뽑으려니 까 빈 껍데기입니다. 어느새 권총이 없어지고 케이스만 달 려있더라나요……”
”너무 이야기가 삼국지 식이구려……”
”글쎄 말이오……”
”그럼 그 쿠리 대장이 팔로였소?“ 이야기는 차차 더 흥미 있어 간다.
”아마 연락원쯤 되던 모양입니다. 이 쿠리 대장의 말이 아 주 좋은 데로 왔다는 군요……여기가 어디야”…… 산동(山 東) 바다입니다…… 산동 바다”저기 물이 보이지 않습니 까”……큰일났지요. 이쪽으로 떠났다가 배도 사람도 아주 안 돌아오는 일이 간간 있었습니다. 역시 이 녀석들이 흉악 한 해적의 끄나풀이었구나, 이제는 죽었구나……아니나다를 까 뭍으로부터 통통배가 살같이 달려오며 정선하라고 몇 방 인가 총 소리를 빵빵 울리더랍니다. 선장 선생 기급하여 주 저앉았습니다. 쿠리 대장이 염려 말라는군요. 웬걸 통통배로 부터 뱃전으로 기어 올라오는 걸 보니 장총을 둘러멘 해적 들입니다. 선장 선생 손을 들고 입을 쩍 벌렸지요. 하니까 이 해적 친구들이 다가와 흔연히 손을 잡으며 수고했다고 치하하겠지요. 쿠리 대장과 는 서로 껴안고 야단입니다. 해 적이 아니라 바다의 민병들이었지요. 뭍으로 끌려 내려 본 부로 가기까지는 아무리 친절하게 굴며 염려 없다고 하나 자꾸 목줄이 헤우며 총 맞아 죽을 생각만 나더랍니다. 본부 에 들어서니까 어떤 군복 입은 장교가 그의 손을 그러쥐며 소금을 싣고 도망온 게 당신이야, 우리 군대에서는 소금이 매우 귀하다, 고맙소 고맙소 하기에 선장 선생 그제서야 마 음을 놓고 자기도 그럴 줄 알았노라고 하였다나요.”
우리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유쾌한 선장입니다. 분맹을 거쳐 여러 동무들과 같 이 들어왔는데 노상에서도 매우 애를 먹였던 모양입니다.
요즈음 학원(學員)들은 저녁마다 모여 앉으면 이 동무의 이 야기를 듣느라고 야단이지요.”
”들어와 감상이 어떤 모양이오?“ ”죽을 지경이라고 혀를 뽑습니다. 지금까지 갖은 고생을 다 해보았으나 이렇게 혼나기는 처음이라나요.”
”학교에 다니오?“ ”아직은 생산공작을 합니다. 가갸거겨도 배우고 머리도 두 들겨 고쳐야겠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놀아먹던 친구들은 교육하기도 매우 힘들 군요.”
최 동무가 옆에서 한탄한다.
”그래 도로 돌아가겠다고 야단치지는 않습니까?“ ”아직은 아무렇든 붙잡아 두고 사람을 만들어야죠. 또 어 디 돌려보낼 수는 있어요”모든 비밀이 적에게 알려질 터이 니……그러면서도 사람은 대단히 순진합니다. 오히려 백지 (白紙)라고 하리만치……”
”이야기하자면야 별의별 사람이 다 많지요. 더욱이 통역이 니 군속들을 하다가 들어온 이들 가운데 문제의 인물이 많 습니다.”
최 동무는 거의 다 들어온 탓인지 조금씩 근거지의 내용을 엿보인다. 여태 이쪽에서 거기의 일을 묻지도 않았으며 그 들도 얘기하고자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떠한 사람이나 우리 진영에 들어와 의식을 고치 고 과거를 뉘우치고 또 사상을 옳게만 선다면야 같이 손잡 고 일할 수 있을 게 아니오”동맹이란 군중단체니까……하 나 대체로 적령기에 달려 들어온 중등 졸업생의 젊은 동무 들이 제일 진보가 빠르군요. 북경상업학교 같은 곳은 우리 의용군의 예비사관학교 격입니다. 졸업하면 일본군대로 들 어가지 않고 줄곧 우리 군대로 도망쳐 들어오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 일행은 얼마 뒤에 보잘것없는 조 그만 부락으로 찾아 들어가 짐을 풀었다. 강파로운 산비탈 길에 가난한 흙집들이 대여섯 채 옹송거리고 있었다. 본래 무리하여 밤중에라도 근거지까지 대려는 예정이다. 그러나 새벽 출발이 더디었고 도중에 비까지 만나 이럭저럭 가망이 없이 되어 여기서 쉬고 가기로 한 것이다.
현 동무는 개를 데리고 벌써부터 도착하여 빈집을 얻어 놓 고 거적자리를 털고 있었다. 객주집이 없어 보통 민가의 외 간방을 빌린 것이다. 여기도 비가 온 탓으로 땅이 질벅거려 노숙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직 해는 서천에 걸려 있으나 밤중같이 캄캄한 방이었다.
북으로 난 영창이 시꺼멓게 내어 그을은 마굿간 비슷한 방 이었다. 고리타분한 흙냄새와 이상야릇한 풀향기가 코를 찌 른다. 아닌게아니라 꼴을 베어다 채워 두고 있었다. 세 동무 는 상의를 벗고 나가더니 서로 나뉘어 밥 지을 준비를 시작 하였다. 현 동무는 양표와 바꾸어 온 좁쌀을 까리고 최 동 무는 열심히 솥을 가셔 내며 N 동무는 밖에 나가 죽은 나뭇 가지를 한아름 꺾어 가지고 들어온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궁이 앞에서 불을 피워 주고 있었다.
솥밑을 긁어모은 까만 재를 담은 접시에 부숫돌로 불을 떨 구니까 재가 반짝거리며 타 들어간다. 성냥이 있었으나 신 기하여 물끄러미 견학하였다. 그제는 유황을 끝에 묻힌 삼 때를 대어 불을 확 하니 일으켰다. 아마 가장 원시적인 점 화법일 것이다.
현 동무는 좁쌀을 앉치고 나서 도마 위에 호박을 올려놓고 썩썩 썰기 시작하였다. 최 동무는 흥얼거리며 불을 때고 N 은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나 혼자 옆에 웅크리고 앉 아 빈손을 비비적거리며 무엇 하나 거들어 줄 도리를 몰라 하였다.
개를 보고 이 집의 어린애들이 무서워하기 때문에 요행 내 가 할 일이 생겼다. 셰퍼드 군을 붙들고 밥 짓는 구경을 하 는 일이었다.
현 동무는 썰어 놓은 호박을 옹배기에 넣고 호도기름을 몇 방울 떨군 뒤에 옆주머니 속에서 검은 호렴을 꺼내 틀어 두 고 마구 휘젓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맛을 보느 라고 입을 쩝쩝거리더니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됐는데 됐어, 맛이 제법이야!”
나는 이 동무가 이렇게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아직 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참 오래간만에 먹어 보는군.”
이렇게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리면서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 는 것이었다. 다부진 적동색 얼굴 속에 코끝이 약간 들리웠다.
”이 호박국을 제대로 자실 줄 알아야 합니다. 산생활을 하 려면……”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이 현 동무는 내게 있어서 하나의 경의의 존재였 다. 하기는 이 산중에서 만나는 여러 동무들의 일이 모두 나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는 것이었으나 현 동무는 더욱이 그러하였다.
어느 때나 이 동무는 힘든 일을 앞서가며 치우고 또 마다 는 일이 없고 안하는 일이 없었다. 우선 개를 데리고 가는 귀찮은 일도 결코 남의 손에 넘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여도 놓아 주면 개란 놈은 노라리치기 때 문에 백 리길도 한 3백 리는 걷게 되리라면서 동의하지 않 았다. 북경서부터 가지고 떠난 보따리도 이왕이면 나귀 위 에 실을 것 같지만 꼭 제 잔등에 붙이고 다닌다. 나귀를 아 무도 타지 않을 때는 나귀를 몰고 가는 일도 꼭 자신이 돌 보려고 하였다. 어디를 가든지 적당한 시간을 택하여 쉴 자 리를 잡아 놓았고 어두워지면 그 중 좋은 객주집을 정하여 저녁을 시켜 놓고 기다렸다. 어디에 우물이 있고 어디에 변 소가 있는 것까지 알려 주며 자기 전에는 반드시 발을 씻어 야 된다고 물을 떠다 주며 명령하다시피 하였다. 이 밖에도 언제나 모든 손 가는 일, 남이 생각도 못하는 일을 혼자 앞 서가며 수벅수벅 치워 놓는 것이다. 아침에도 제일 일찍 일 어나 나귀에게 풀을 먹이고 짐을 실어 놓고 셰퍼드 군도 먹 을 것을 찾아 먹였다. 그는 결코 우리의 종졸이 아니며 동 맹에 있어서도 한다 한 간부인 것이다.
천하 게으름뱅이요 눈치꾼이요 이기주의자인 나는 이 현 동무 앞에서는 언제나 어쩔 줄을 모를 일종의 존경에 가까 운 마음을 의식치 않을 수 없었다. 자연 머리가 수그러지려 고 하였다.
그는 결코 또 수다스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말도 하지 않고 실없이 웃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압박감도 거리감도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 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그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노 래도 제법 불렀고 여병들과도 같이 유쾌히 군가도 불렀다.
그것은 아미 필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서는 일언반사도 이야기하 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공작상으로 본대도 적구를 드나드 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 역시 먼저 한마디 따려고 하지 않았 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일은 말씨로 보아 그가 평안도 사 람이요 중국말을 하도 잘하니 어려서 이 중국 땅에 나왔을 것이고 중국 백성이 농사할 줄 모른다고 한탄한 적이 있으 니 분명 농민 출신일 것이다. 그리고 또 우연히 알게 된 일 이라면 국내에 외가가 있으며 무한(茂漢)인가에서 임정파(臨 政波)와 싸우고 감금되었다가 사지를 겨우 빠져 나와 이 항 전지대로 넘어온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짐작하며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동안이 지나 저녁밥이 되어 우리는 식기를 빌려 가지고 마 당에 거적을 깔고 둘러 앉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애버들 잎 새의 데친 것을 갖다 주어 고맙게 받았으나 구리어 도무지 입에 받지 않는다. 자연 호박국에 조밥을 말아 배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호도기름이 들어가 좀 구미를 당기는 부 드러운 맛이 있었다.
식후에 나는 할 일을 겨우겨우 연구하고 발명하여 밥 먹은 그릇 부시는 일을 도맡아 치우게 되었다. 이것도 먼 거리를 걷지 않아 피로가 덜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한참을 어 린애들을 데리고 놀다가 들어오니까 현 동무는 방안에 모기 쑥을 피우고 또 다른 두 동무는 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달빛이 창문도 없는 영창으로 흘러 들어온다. 달이 밝다.
이날 밤 나는 자리에 누워서 동무들로부터 대후방의 이야 기며 동맹의 일을 조용히 듣게 되었다. 실지로 국민당 통치 구역에서 오랫동안 투쟁하고 온 동무들이기 때문에 매우 절 절한 실감이 있다. 이 기회에 중국영내에 있어서의 민족해 방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적고자 한다.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멸망되면서 허다한 애국자들은 침 략자의 추구를 피하여 중국의 만주와 관내로 망명하게 되었 다. 이래 망국 후 30여 년간에 걸쳐 독립운동이 중국영내에 서 영용하게 전개된 것이다.
더욱이 만주에 있어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의 손길을 뻗침에 따라 이주 동포들의 직접 참가와 성원 밑에 반일투 쟁이 일어났다. 물론 일본제국주의는 이 독립운동을 강압하 고자 하였으나 불같이 일어나는 그 위세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기에는 이 독립운동이 전고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의 위대한 10 월 혁명이 성공을 함에 자극을 받아 종래의 민족주의자 중 심이던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변을 가져오게 되었다. 혁명적 사상에 무장된 보다 더 활발하고 광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케 된 것이다.
동시에 같은 원인으로 중국관내에 있어서도 3”1운동 직후 부터 독립운동이 두 개의 노선 밑에 전개케 되었으니 하나 는 민족주의 노선이었고 또 하나는 민주주의 혁명 노선이었 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소위 대한임시정부란 것이 바 로 전자를 말하는 조직체다. 또 한편으로 계급운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인 정치결사가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국공합작 밑에 일어난 북벌전쟁(1925?6년)에 재중국관내의 조선 애국자들은 대거 참전하여 영용무쌍한 투쟁을 하였다.
그 일례로 가장 고전적이었던 남창공략전에 조선청년들이 결사대를 지어 위훈을 세운 바는 중국작가들의 종군기에도 명백히 소개된 사실이다.
그러나 장개석은 북벌이 태반 성공하자 간악하게도 태도를 표변하고 혁명분자들에게 참혹한 학살정책을 강행하게 되었 다. 이 쿠데타에 조선 출신 동지들도 무수히 억울한 죽음을 보았다. 드디어 저 유명한 광동폭동이 일어난 뒤 우리의 일 부 동지는 중공 소비에트로 따라가게 되었고 일부는 상해의 법조계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이 광 동폭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던 최석천(崔石泉)은 직접 일제와 무장투쟁을 하려고 동지들과 같이 광동을 떠나 북만 으로 옮아 들었다.
이즈음 만주에 있어서는 조선민족해방운동이 날을 거듭할 수록 더욱 치열하게 발전되고 있었다.
더욱이 9”18사변을 전후하여 재만 조선인민의 무력항전은 실로 공전절후의 장관을 이루어 세기의 일대 신화가 된 것 이다. 적어도 국내외 독립운동 30여 년래의 투쟁과정에 있 어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반일역량의 총집결체로서 성장했 다. 그 영도하에 두 나라 민족의 공고한 항일연합전선이 결 성되었고 조선인민의 민주역량도 최대한 발동되어 정면으로 불을 터뜨리며 일본제국주의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발전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 속에 서 솟은 것이 아니었다. 진실로 조국의 자유와 인민의 행복 을 위하여 인민들 가운데서 인민들의 조직으로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위에는 반제동맹, 청년의용군, 농민자위대, 생산유격대, 부녀단체, 소년단 등의 수십만 대중이 집결되었으며 또 이네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나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국내에도 끊임없이 화살을 보내고 또 몸소 진격하였다.
무엇보다도 밤낮이 없이 계속되는 이 무력항전이 삼엄한 국경지대의, 다구나 적이 자랑하는 백만 정예군의 포위 속 에서 십여 성상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영광의 역사를 지속 한다는 것은 세계의 경이일 뿐더러 세기의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이 무력항전은 1937년 7”7 사변 이래 발발과 동시에 더욱 최고조에 이르렀다. 가히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한편 관내에서도 이 7”7사변을 계기로 하여 중국의 내정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9”18사변 이래 내전을 정지하고 일차단결하여 항일하자는 중공의 강력한 주장을 소위 <회외 필선안내(懷外必先安內)>의 한간 이론을 고집하던 국민당도 할 수 없이 동의 아니치 못하게 된 것이다.
국공합작이 재현되고 항일전쟁이 확대되어 전선이 위급해 짐에 조선독립운동자들도 또한 안절부절을 못하게 되었다.
정치운동보다도 직접 총을 들고 침략일제의 타도를 위하여 전선으로 나가는 문제가 그들 앞에 가장 엄숙하게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용감한 청년들은 서로 다투어 무장을 갖추 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군대는 이미 전의를 이고 패퇴의 일로를 달 릴 뿐이었다. 중요한 도시를 마구 버리고 달아나며 전략요 지를 싸우지 않고 내어 맡기고 혹은 총을 던지고 속속 투항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 정부의 내부도 여지없이 타락 하고 부화하여 국가의 일대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관오리의 국난재(國難財)의 편취를 능사로 하고 인민을 압 박 착취하였다. 게다가 패주하는 군대까지 약탈을 자행하여 도탄에 든 백성들은 참담한 전화 속에 유리전전하는 현상이 었다.
오직 중공영도하의 팔로군만이 가장 불리하고도 악착스러 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 능히 일군 재중국 병력의 반수를 견 제하며 철저한 유격전쟁을 강행하여 인민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침략 일제에 향하여 이를 갈고 조국의 독립해방을 염원하 여 마지않는 조선의 혁명가들의 갈 길은 스스로 명백하였 다. 드디어 1938년 무한이 풍전의 등화처럼 위급을 고하는 긴박한 시기에 있어서 무한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허다한 애국청년들이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향북항전(向北抗戰)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김두봉 선생 이하 여러 선배들도 그 뒤를 따라 수천리의 행정에 올랐다. 그것은 두 나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직접 총을 겨누고 일제와 싸우고자 팔로군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구구하게 이 이상 더 후방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도 없지 않았다. 바로 대한 임시정부파들의 눈에 겨운 치욕스런 행동이 그것이었 다. 이들은 벌써부터 애국자의 미명하에 고물전 간판을 떠 지고 다니는 정상배로 전락하였다. 진보적인 성실한 인사들 이 그 주위에서 떠난 지도 이미 오래였다. 본시 이 '대한 임 시정부'의 간판주인 소위 주석은 이왕의 친족이 된다는 이승 만이니 이시영대감 등이었다. 조선 팔도에 이 이상 더 훌륭 한 양반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왕당적인 봉건그룹이었다. 그러던 차 일제의 상해 사변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고관들을 살상한 의거가 일어났다. 이네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네의 공로로써 국민정부에 이 의거를 팔아넘겨 보기좋게 시세를 얻은 것이 다. 당시의 살림살이들이 말이 아니던 판이라 장개석의 도 움을 받는데 유리할 듯하여 이러한 흥정까지 아니할 수 없 었다.
이 뒤부터 임정은 간판을 떠지고 국민당 정부를 따라다니 며 구걸을 하고 반동두목들의 앞잡이질을 하며 푼전을 비라 리하게 되었다. 그들이 생각에는 조선의 독립은 우리의 투 쟁노력 여하에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 정세가 유 리하나 장차 장개석이가 독립을 줄 것이요 혹은 미국 대통 령이 베풀 것이며 또 어떻게 되면 일본 천황이 하사할지도 모르게끔 생각하였다. 따라서 앞날의 영화를 기하는 정권욕 에 팔장을 깊이 찌르고 앉아 서로 으르렁거리며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의 당쟁 알력에만 눈이 벌개 영일(寧日)이 없 었다. 이로 말미암은 온갖 음모술책과 모해, 이간, 테러가 이 임정의 유일한 사업이었다. 이 당파싸움에 가담치 않거 나 혹은 반대한 연유로 얼마나 많은 애국열사와 혁명청년들 이 길가에 피를 흘리고, 자하실에서 썩어나고, 자루를 쓴 채 양자강의 물귀신이 되었는지 모른다.
─ 현 동무는 입을 꽉 다물고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며 묵묵 히 듣고만 있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전되니까 벌떡 돌아 누우며 ”그놈들은 그저……”
눈을 지리 감고 이틀을 덜덜 떨었다.
아마 공산분자라서 그들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던 때의 일이 불현듯 회상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또한 성내는 일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N 동무는 마치 불행한 병자 라도 간호하듯이 그의 몸뚱이에 이불 끝을 덮어 준다. 현 동무는 말없이 곰방대를 당겨 연거푸 뻑뻑 빨기 시작하였 다. 무거운 침묵이 한참을 달빛 속에 잠기었다. 동무가 휴─ 한숨을 내짚는다.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도대체 상상도 못합니다.”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 는 환경이었다. 이로부터 허다한 지사와 청년들이 뒤를 이 어 자꾸 팔로구역으로 달아나게 된 것이다. 1939년 여름까 지에 중공 영도하의ㅡ 항일군정대학을 마친 조선혁명청년들 의 수효만 하여도 근 4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밖에 또 이 항전지대에는 본래 홍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선배동지들 도 적지 않았다. 이에 항대(抗大)를 마친 청년들은 곧 여러 선배와 동지들의 뒤를 따라 팔로군과 신사군의 유격지대로 출동하여 연래의 숙망이던 항일전투에 직접 참가하게 되었다.
드디어 1941년 1월 10일 재회북 화중 조선인민들의 혁명 역량을 총집결하여 조선청년연합회가 진동남(晉東南) 태항지 구의 전투환경 속에서 결성되었다. 결성된 지 반 년도 못되 어 이번은 대후방 중경과 낙양 방면에서 또한 일제와 투쟁 하던 다수의 청년동지들이 연달아 대오를 이루고 넘어왔다.
이로써 1942년 7월 10일 조청(朝靑)은 확대된 자체역량에 비추어 제2차 대회를 소집하고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선민족독립운동 선상의 일익으로서 조국독립사업 을 위하여 돌진할 것을 중외에 선포한 것이다.
이래 전선공작은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20만 좌우의 조선 교포에 대한 선전 조직공작도 점차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 하였다.
3. 남풍도(南風島)로 가는 길
편집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는 날이다.
한나절을 걸어 들어가니까 지대가 비교적 평탄해지며 올망 졸망 아담한 동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피비린 전쟁의 기 억도 멀리, 평화로운 촌락의 모습이 완연하였다. 댓돌 밑을 병아리 떼가 밀려다니고 울담장 위를 호랑나비가 쌍을 지어 날고 있었다.
집집 담벽에는 백성들의 주장과 정부의 슬로건이 씌어 있 고 선전문이 모퉁이마다 부딪치어 있으며 벽보판에는 신문 도 나붙었다. 조선 글자로 다니 선동적인 호소문이 가끔 우 리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도 한다. 일군 토벌대에 끼어 들 어올 가능성이 있는 조선인 강제병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었 다. 이런 이국 산촌으로 왜놈들에게 끌려 들어와 이 호소문 을 발견하였을 때의 청년동포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라”
'우리는 동무를 기다렸다. 어서 오라! 조선의용군.' '달려오라! 조국의 깃발 아래로' 등등.
어떤 동네에 들어가니까 마침 아동극단이 들어와 누각 위 를 무대로 삼고 한창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 는 남녀노소 없이 촌중이 욱실욱실 모여 서서 벅작거리고 있다. 어깨말에 올라탄 어린애, 애를 안은 부인네, 윗옷을 벗어 멘 사내며, 담뱃대를 입에 문 노인네가 서로 키춤을 추며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한 사내는 죽그릇을 들고 훌 훌 들이키며 어떤 영감은 나귀를 멈추고 올라앉아 싱글거리 며 어떤 부인은 물통을 내려놓은 채 정신을 팔았다. 담배장 수, 실과장수, 떡장수까지 모여들어 장날같이 흥성거린다.
장치랄 것도 별로 없는 단조로운 무대 위에서 울긋불긋하 게 갑옷으로 분장한 장사(壯士)와 요염한 미인이 나타나 무 엇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삥삥 돌아간다.
옆에서는 호구이며 꽹과리, 북 소리가 서로 한데 어울려 울리는 가운데 노랫소리가 미어져 나온다. 아마 농민들이 모두 친숙할 수 있는 엿날 형식 속에 새로운 의도를 넣어 가지고 풍자를 통하여 대중을 선전 교양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이 해방구내에서는 이러한 야외극의 역할이 대단히 큰 것이었다. 봉건지주와 군벌의 억압 밑에 노예생 활을 강요받던 이 농민대중이 바로 그 선전과 계몽의 대상 이다. 오늘날 중공과 팔로군 덕에 그야말로 팔자를 고쳐 정 치에도 참여하고 글도 배우고 생활수준도 날로 높아가고 있 으나 역시 그들의 문화정도는 아직도 말할 수 없이 옅은 것 이다. 그러니만치 출판물보다도 해설사업과 연예공작 같은 방법에 의함이 선전이나 계몽에 있어서 보다 더 효과가 클 것이 당연하였다. 이리하여 해방구내에서는 이런 가두촌극 과 야외무요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을 앙가라고 부 른다. 신민주주의 문화계몽의 중요성에 의하여 1942년 연안 노신 예술학원에서 비로소 탄생되었고 이에 따라 뒤이어 이 앙가대의 조직이 전지역에 퍼졌다. 오늘에 와서 이 앙가대 는 각 지방에 뿐만 아니라 군(軍), 관(官), 향(鄕), 매기관, 촌락, 학교에마다 하나씩 조직되어 농민의 계몽과 위안을 위해 커다란 공적을 나타내고 있다.
정치적으로 되는 인민의 요구와 실제로 현실문제에서 부딪 치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 사건에서 교묘히 취재하여 대중이 좋아하는 유모어를 풍부히 섞어 가며 항일의 식을 제고하고 생산의욕을 높이고 문맹퇴치며 감조감식(減租減息), 옹정애 민(擁政愛民) 등이 정책을 절절히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부락에서 보게 된 것은 앙가가 아니라 또 하나 의 중요한 형식이라고도 할 평극에속하는 연예였다. 봉건적 인 옛날의 것이지만 민중이 좋아하며 알기 쉬워하는 이런 구 내용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 농민들을 깨우친다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그래 이와 같은 평극도 또한 대유행 이었다. 매우 재미가 나는 모양으로 군중들이 힝글힝글 웃 기도 하고 무어라고 서로 끄덕이기도 하고 왁자지그르 웃음 을 터뜨리기도 한다.
한참 동안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 는 우연히 조선 동무들의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칠팔 명 군복을 입은 이가 민가의 조용한 담모퉁이에 모여 앉아서 다리쉼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발견하더니 모두 반색을 하며 일어난다.
북경, 천진 방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동무들이었다. 그 중에 는 북경서 학교를 갓 나오고 떠나오는 홍안 소년이 두어 명 끼어 있었다. 석 달 가량 걸어오는 동안에 기념으로 길렀다 는 구레나룻 수염의 청년도 있었다. 천진서 조그만 공장을 경영하며 지하조직에 자금을 대는 일방, 직접 거미줄같이 늘이운 경계망을 넘나들며 연락공작을 해오다가 신변이 위 험해져 몸소 투신하여 오는 길이었다. 간해 봄 천진에 들렀 을 때 내가 온 줄을 알고 이리저리 다리를 놓아 연락하려다 가 놓쳤노라고 수염속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일본 서와 국내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싸워 오던 분 이었다. 신의주중학을 스트라이크 사건으로 쫓겨난 것이 바 로 내가 평양서 중학을 쫓겨나던 해와 같을 제는 서로 연계 가 없지 않은 한 사건의 희생자였다. 해주, 평양, 신의주 이 렇게 세 학교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홍일점으로 여성 동무 한 분도 섞여 있었다. 부부동행으로 탈출해 오려고 행장을 차리던 중 불행히도 남편이 붙들려 들어가 공작원의 권고에 의하여 어차피 혼자 떠나오는 길이 었다. 우리더러 언제 북경을 떠났느냐고 묻고는 남편의 안 위를 들을 길이 없어 자못 안타까워한다. 이 여성 동무도 역시 서너 달 동안 길 위에 서 있었다.
대개 북경, 천진 방면에서 탈출하여 일단 북경 만주산 뒤 의 연락참에 모였다가 대를 지어 같이 떠나온 길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육십여 세 되어 보이는 노인도 한 분 섞여 있었다. 딴은 군복이 아니라 편의(便衣)였다. 맷돌 위에 배 낭을 깔고 돌부처처럼 단정히 앉아 눈을 내리감고 조용히 어깨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그의 무릎 앞에는 쑥을 말려 새끼처럼 엮어 놓은 화승(火繩)이 칭칭감기어 철구렁이같이 목을 솟구고 있었다. 불이 달아 바람결에 빨갛게 타오르며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마 무던히 담배를 즐기 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담뱃불을 이 화승으로부터 배급받고 있었다. 실로 칠 개월 동안이나 걸려서 여기까지 걸어 들어 오는 노인이라고 한다. 산해관(山海關)서 얼마 멀지 않은 당 산(唐山)농장에 살고 있었다고 하니 직선으로 걸어온 대도 삼천리 길은 족히 될 것이다.
인솔자의 말에 의하면 아주 우수한 조직자요 선동가로 벌 써부터 동맹내에서 이름이 높은 이였다.
”우리 조직으로 보내 온 사람만도 근 삼십 명이라는군 요……당산농장 안으로 우리의 손길이 들이밀었을 때 맨 먼 저 호응한 이가 바로 저 노인입니다.”
인솔자 동무는 길을 떠나면서 이렇게 설명해 준다. 나귀를 노인에게 사양하고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의술로도 유명하지요.”
이렇게 발을 달아 말하니까 ”중이라면서?“ 최 동무가 의아쩍은 듯이 묻는다.
”그렇지. 불도로서도 상당한 골짜야……”
그리고 보니 나귀를 타고 뒤따라오는 이 노인이 어떻게 보 면 의원 같기도 하고, 부처님 같기도 하다. 아까 동네에서 만났을 때 인사를 여쭈니까 노인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 다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리던 것이다.
”허─어디서 보던 이로군.”
”저는 기억이 없는데요.”
할밖에. 하니까 ”허─아무래도 늘 보던 병색이야……염통에 고장이 있는 얼굴이야……”
십중은 정확하다고 할까”심장이 약하여 산길을 걷기에 매 우 고초를 겪는 몸이니……어쨌든 좀 다른 영감이었다. 소 시적부터 역시 남보다 생각도 다르던 모양으로 열다섯 살 때에 벌써 병란에 뛰어들어 양주의병진(楊洲義兵陣)에서 활 약했었다.
총에 맞고 쓰러진 채로 일군에게 붙들렸다가 밧줄을 끊고 달아나 다시 얼마 동안 싸워 보다가 동무들이 모두 죽고 흩 어지고 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왜놈들이 자꾸자꾸 조선 땅으로 건너 오므로 그 꼬 락서니가 보기 싫어 차차 북으로 북으로 절살이를 전전해 오다가 종내는 동북 땅에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의술은 절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래 서간도 북간도로 이주 동포의 부락을 찾아다니며 침놓이를 하면서 지나노라니 이 번은 9”18사변이 터졌다.
만주 땅에까지 왜놈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노인은 또다시 보따리를 걸머지고 떠나온다는 것이 관내에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그냥 혈혈단신 홀아비살이였다. 그러자 얼마 안 되 어 또 7”7사변이 일어났다. 이 중일전쟁놀음에 이번은 발걸 음이 이럭저럭 개봉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벌써 이때는 나이 육십이었다. 놈들을 눈앞에 보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 재도 죽는 날까지 끌이 없을 듯하였다. 이미 백발이 성성하 게 되니 덧없는 향수도 치밀어 올랐다. 고향의 산천이며 고 국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그래 이번은 다시 보따리를 꾸며 가지고 조국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뒤에 천진에 당도하여 듣노라니 기동(冀東) 땅 당산에 조선인 농장이 있다고 하기에, 순박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거기에나 들러 보려고 찾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노인은 의 용군 공작원의 교육을 받아 신사상에 공명한 것이었다. 옛 날의 나라를 건지자던 그 열정이 쇠잔한 몸뚱이 속에서 뜬 숯처럼 갑자기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 노인의 간단한 내력이었다. 그는 농장 안에서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불을 질렀다. 농사는 여편네나 늙은것 들에게 맡기고 어서 길을 떠나야 한다. 다리마다가 싱싱한 녀석들이 이게 무슨 꼴이냐”어서 썩 못 떠날까. 이렇게 내 어 쫓다시피 내몰았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라!
이리하여 똑똑한 젊은이들을 거의 다 들여보내고 나서는 나도 이제는 들어가 좀 공산사회를 보고 죽어야겠다고 길을 떠나온 것이다. 살엄음이 진 크리크를 밤중에 발을 뽑고 두 젊은이와 같이 넘어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청년들 틈에 끼 어 배낭을 메고서 일군의 추격을 받아 가며 교전지대의 비 오는 밤길을 걸으며 아슬아슬한 산등성이를 타고 넘으며 반 만 리 길을 칠 개월 동안이나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요즈음 기대가 아주 배반되었노라고 대단 한 불만이십니다.”
”왜?“ 되물으니까 아직 여기가 공산사회 아님이 글렀다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로 알아듣도록 우리들이 밞아야 할 혁명 계단을 설명해 주어도 무슨 빌어먹을 놈의 민주주의 혁명이 냐”단번에 공산주의 하고 말게지…… 이렇게 막무가내하로 우겼다. 이런 천치를 보게, 이만치 고생했으면 무던하지 이 제 와서 고작 한다는 게 겨우 민주주의 혁명이냐”
”토론하다가 몰리게 되면 나는 귀도 어둡고 정신이 없어 잘 모르겠다. 아무랬건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는 못할 게 지 흥.”
이렇게 흉내를 내어 모두들 웃다가 쉬─소리에 돌아보니 노인의 나귀가 어지간히 접근하였다. 우리는 도망가듯 발걸 음을 재촉하여 다시 앞선다.
”과격분자시로군……”
”아 과격분자다마다요…… 그래도 공작만은 지나치게 열심 입니다. 행군중에 의무공작을 자진해 맡았는데 무슨 병이건 꼭 침으로 고친다는 게지요. 여기에도 저 노인의 성미가 여 실히 나타납니다. 어디가 아프냐”머리가”음 그러면 바지 를 걷어 올리슈. 배가”허 손가락을 찔러야겠군……열이 있 다”그럼 의레히 잔등을 벗어야지…… 이 모양으로 아프다 는데 따라서 침을 놓는 자리도 달라집니다. 하기는 굵은 동 침이 반 치 가량이나 들어가는 데도 신기스레 아프지가 않 거든요…… 이튿날 다시 맞아 보려거든 좀 어떠한가고 넌지 시 물을 때에 훨씬 낫다든지 한결 거뜬하다든지 해야 말이 지 그러지 않았다는 큰 코 다칩니다. 막 골을 내거든요.”
그럼직도 해 보이는 영감이었다.
나귀를 타고 뒤따라오는 이 노인에게 우리는 멈춰 서서 때 때로 불을 빌리게 되었다. 청구렁이 같은 화승을 목에 드리 우고 뭉실뭉실 연기를 흩어뜨리면서 따라온다. 수수하니 생 긴 젊은 사내 두 명이 마치 호위병처럼 나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농장에서 데리고 들어온 청년들이다. 입산수도하러 가는 석가여래의 행차라도 보는 듯하여 미소를 자아내며 더구나 목에 걸친 화승이 염주처럼 매어달려 일이채(一異彩)였다.
불을 빌려 주며 한번은 이 노인이 나더러 이렇게 물었다.
”젊은이는 어디서 떠나오우?“ ”평양입니다.”
”평양”음 용하오. 불원만리하고 떠나오는군…… 그리 젊 은이는 남풍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남풍도라니요?“ 어리둥절하여 쳐다보니까 ”글쎄 그런 데가 어디 있겠소마는 우리들이 어려서 의병 다니던 때의 일이오. 나도 들은 풍월이라 똑똑히는 모르겠 으나 왜놈들이 하나도 없는, 사철 꽃이 만발하고 땅은 기름 지며 바다에는 굴, 조개, 고기 수북한 꿈 같은 섬이라겠지 요. 의인들이 많이 모여 나라를 찾으려고 무술을 닦고 있다 는군……”
”그럼 노인어른 아마 여기가 남풍도인가 봅니다.”
하며 웃으니까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에 친구들을 따라 못 떠난 일이 일평생 한이었소. 농 장서 생각할 때는 아마 남풍도가 다름 아닌 태항산중이라 이렇게 생각했지요. 왜놈도 없는 곳이오 의인들이 모여 칼 을 갈고 있으니. 그러나 들어와 봄에 어디 여기다 연화대(蓮 花臺) 같은 극락세상이오”지상극락이란 꼭 공산사회라야만 됩니다.”
아미 민주주의 혁명 공격의 전초전인 모양이었다.
”또……또또……영감 동무도……”
구레나룻 수염의 동무가 웃으며 손질을 하니까 노인은 정 색을 하며 눈을 흡뜨는 것이었다.
”저 동무는 전에 공산주의깨나 했다면서……”
”어서 갑시다. 어서……”
동무들은 껄껄거리면서 달아난다.
현 동무는 여전히 개를 몰며 황청왕동의 걸음으로 앞서가 다가는 저만치 멈춰 서서 우리들이 빨리 뒤따라오기를 기다 린다. 남풍도를 그리는 노인의 나귀는 농장 청년들과 같이 다시 맨 끝으로 뒤떨어져 온다. 여성 동무가 나보다도 오히 려 건각으로 부지런히 앞서 가는 것이 매우 대견하였다. 두 소년 동무는 먼 곳으로 하이킹이라도 가듯이 유쾌히 둘이서 서로 실랭이질을 하며 조여 걷는다.
어쨌든 최근에는 이렇게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많은 사람들 이 연달려 들어오는 형편이었다. 12,3세의 어린소년까지도 여러 명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 중에는 이 색분자가 끼어 들어왔다가 달아나는 수도 없지 않았다.
”대개는 처음부터 비밀을 알아 가지고 나갈 생각으로 들어 온 특무들이지요. 그러나 모두가 얼마 가지 못하고 붙들리 고 맙니다.”
최 동무의 설명을 듣지 않는대도 이 해방구와 유격지구 내 의 군중이 조직되어 있는 형편으로 보아 벼룩 한 마리 새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는 물론 고생에 못 이겨 달아나 보려는 자도 있습 니다.”
”그런 특무의 잠입이 빈번한가요?“ ”……많지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적구내의 조직으로부터 곧 정보 가 들어오니까 집어 내기가 아주 수월하다고 한다. 감쪽같 이 들어왔대도 그런 놈은 반드시 적구공작원의 손을 거치지 않고 들어오기 때문에 자연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들어온 코스로 보아서도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적구공작 원 하나하나에 특정된 비밀코스가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걸어 들어온 노상의 부락 이름도 여기에 세 세히 기록치 못하게 된 것이다. 만약의 일이 생겨 이 수기 라도 드러난다면 우리들이 들어온 비밀코스가 알려질 것이 기 때문에─그리고 놈들이 들여보내는 특무는 대개가 불량 자, 무뢰한, 아편장수, 변절자 이런 것들이었다. 들어가 비밀 을 알아 가지고 나오면 금품을 주기로 하는 청부제도 있으 나 녀석들이 애첩이나 부모자녀를 인질로 잡아 넣고서 들어 갔다 나오면 놓아 준다는 조건제가 더 흔하다고 한다. 그래 터벌터벌 들어왔다가 그 사이에 애첩을 형사나 헌병놈에게 빼앗긴 녀석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들여보내나 한 놈도 새 어 나가지 못하니까 밑 빠진 독이었다. 그러나 왜놈들로서 는 밑천 먹는 노릇이 아니기 때문에 요새 와서는 더욱 성벽 내기로 들여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정보가 곧 뒤이어 들어 오고 자료도 있고 게다가 또 모두 경각성이 단단하기 때문 에 암만 교묘한 놈이라도 포열흘이 못 가서 정체를 폭로하 고야 말았다.
”무엇보다 신실치 못한 생활을 해오던 습성 때문에 우리들 과 어울리지 않는 걸요. 대개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 다.”
이렇게 N 동무가 덧붙여 설명하는 차에 북경 일행의 인솔 자 동무가 슬쩍 눈짓을 하기에 우리는 이야기를 뚝 그쳤다.
커다날 몸뚱이에 키가 멀쑥하고 살눈썹이 시꺼먼 청년이 길 가에 주저앉아 신들메를 고쳐 묶고 있었다. 이 청년을 다시 금 앞세워 놓더니 인솔자 동무의 말이 바로 저 사내가 북경 의 무슨 공관인가의 특무기관에 근무하던 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아주 점잔을 빼며 야단이더니 차차 본색이 나타 나더군요. 요즈음 내 눈치가 다른 것을 보고 속으로 안달증 이 난 모양입니다.”
”혼자 넘어왔던가요?“ ”물론이지요……연락참까지 용히 찾아왔습니다.”
”눈치를 채고 도중에 달아나려 하지는 않습니까?“ ”특무기관에 있었으니만큼 여기 사정을 대강 알고 있기 때 문에 달아날 생각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벌써부터 쑥스러우 리만큼 비굴한 태도로 하이 하이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호 기가 등등하더니 며칠째 되는 날 밤엔 동행하는 여성 동무 에게 손을 대려고까지 하지 않았겠소……”
4. 태항산채(太行山寨)
편집서산에 해도 기울기 시작하였다. 수수밭 사이로 길이 굽이 굽이 감돌며 언덕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까마귀 떼가 숲 속으로 찾아들며 까욱거린다. 폭격을 나갔던 P51의 편대도 하늘 높이 우르렁거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언덕길 모퉁이에 임자 없는 오막살이 집 한 채가 주저앉았 는데 무너진 지붕 위에 일군모(一軍帽)를 걸어 논 막대기가 비죽히 나와 바람결에 흔들거리며 조밭을 망보는 허수아비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군모는 뚜껑이 갈기갈기 헤어 지고 붉은 띠가 비바람에 물이 낡아빠지고 성장은 뿌여니 녹이 슬어 청맹과니의 눈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행인들이 채찍질을 하며 나귀를 끌고 가다가 돌아보며 이 일군모를 향하여 힝하니 손으로 코를 풀어 던진다. 산사람들은 이 일 군모를 역병신같이 여기는 모양이었다. 무너지다 남은 담벽 에 어느 동무의 장난인지 조선말로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일병의 노래)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 갈 길 왜 왔던고 (의용군의 노래)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어 승리는 우리를 재촉하나니 우리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어지간한 울림받이 길이던 모양이다. 겨우 오 리 앞도 내 다보지 못하게끔 단구(段丘)를 이룬 지층의 갈피 사이를 이 리 구불 저리 구불 감도는 길이었으나 여기서 고개 둔덕을 올라서니까 조망이 활짝 눈앞에 트인다. 자욱한 은보라색의 안개를 끼고 태항산계가 줄기줄기 검극을 두른 듯이 늘어선 포진 속에 자질펀한 분지가 꿈나라같이 아늑히 깃들이고 있 었다. 이런 심심산중에 이렇게 넓은 터전이 벌어지리라고는 천만 뜻밖이었다.
”이제야 다 왔군.”
현 동무가 바람에 옷깃을 휘날리며 조상처럼 버티고 서서 중얼거린다. 사선을 넘나들기 몇 달 만에 임무를 마치고 무 사히 돌아와 근거지를 바라보는 그의 감개, 적이 무량할 것 이었다.
백악나무와 호두나무, 감나무 숲이 여기저기 몰켜 선 사이 를 백사지가 지도같이 펼쳐진 가운데 한줄기의 시내가 굽이 쳐 흐르고 있었다. 강 이름을 물으니까 두루두루 산간을 감 돌아 창덕(彰德)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시내라고 해서인지 청 창하(淸彰河). 팔뚝만한 메기와 숭어며 바위만한 자라가 꿈 틀거린다는 것이 바로 이 강일 것이다. 태항산중에서도 드 물게 맑은 물이라고 한다. 강을 끼고 점점이 촌락이 들어앉 아 있고 그 주위에는 기름진 밭이 초록 비단을 깔라 바야흐 로 오곡백화에 무르녹았다. 푸르른 전원에 수를 놓은 듯이 옹기종기 하얗게 서리어 도는 것은 식채로서 유명한 황하의 재배전이라고 한다. 이 분지 안 골짜기와 산밑을 끼고 군구 사령부가 들어앉았으며 우리의 의용군, 독립동맹, 군정학교 도 위치를 잡고, 일본인 해방연맹지부도 박혀 있는 것이다.
동남향으로 저 멀리 석양이 비낀 속에 날아가는 대붕의 날 개인 양 펼쳐진 거악의 이름이 바로 오지산(五指山)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섯 손가락이 하늘을 어루만지려는 듯이 가지 런히 늘어선 형상이다. 동무들이 가시덤불을 일구고 돌비탈 을 갈아 부대를 파고 감자농사를 지으며 도토리를 줍는다는 곳이 바로 저 산복이며 산정일 것이다. 이 산밑에서 얼마쯤 물러나와 절벽처럼 단구를 이룬 둔덕 위에 저녁 노을로 물 들어 빛나는 부락이 그림같이 아련하였다. 저녁 연기가 뽀 야니 일어나 명주필이 걸린 듯하다. 여기를 가리키며 이 남 장촌(南庄村)이 우리의 동맹과 의용군의 본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나귀의 고삐를 쥐고 이런 산간노정에서 비로소 대하게 되는 기름지고도 아름다운 산수의 조망을 즐겼다.
넉넉히 잡고도 20리 안짝이니 어둡기 전으로 대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원으로 내려서면서부터는 의용군색이 아주 농후해진 다. 두루두루 언덕 밑으로 돌아 내려가니까 파락된 성문이 서 있고 그 석벽에 한글로 '환영' 이렇게 씌어 있다. 영문으로 찾아 들어가는 신병의 감개로 이 성문을 통과하였다. 이 전원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일군이 침입하였던 탓으로 역시 촌락은 황폐하였었 다. 재작년 가을에도 일군의 소탕을 겪었다는 것이다. 집집 의 담벽에는, '총을 던지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왜놈이 아니 다.' 혹은 '조국의 부모형제는 너희들이 값없이 죽기를 원하지 않는 다!'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길에 모두 돌아서서 나가자!' 등등의 호소문이 힘차게 씌어 있었다. 그 중에는 일본인 해방연맹의 이름으로 된 일문도 더러 보인다.
'팔로군은 결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상관놈들에게 속지 말고 총을 버려라!' '무엇 때문에 중국인민을 죽이고 고향의 어머니를 눈물짓게 하느냐”' 침침한 이 거리를 지나 밭두렁길에 다시 올라서니까 우리 들이 걸음발은 자연 빨라진다. 죄악과 허위와 노예의 세계 를 두루 헤매기 30유여 년, 이제 빛을 섬기는 싸움의 길을 찾아 머나먼 노정을 끝내고선 몽매간에도 그리던 곳에 당도 하게 되니 형용할 수 없는 감회 속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난만히 꽃을 피운 황하밭가를 지나노라면 그윽한 향기가 바 람결에 흐뭇이 퍼져 흐른다. 멀리서 우리 의용군의 나팔소 리가 대기를 흔들며 유량히 들려 온다. 수수밭 사이 밭두렁 길을 농부들이 연장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황하밭 속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한아름 흰꽃을 안고 서서 우리 일행을 유심히 바라본다. 낙조가 물들기 시작한 전원 에는 소리 없이 저녁 안개가 내려덮히고 있었다. 현 동무는 우리의 도착을 미리 알리기 위하여 셰퍼드 군을 몰아세우며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북경 일행도 기운이 나서 두 소년을 선두로 현 동무의 뒤에 바싹 달린다. 노인의 나귀도 방울을 울리면 우리의 앞으로 나선다.
”아무래도 여기가 분명 남풍도인가 봅니다.”
하고 돌아보고 웃으니까 노인도 시물적 웃으며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산수요……”
청창하의 맑은 물줄기는 우리 의용군의 본거인 남장촌의 언덕 밑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상은 대단히 넓으나 자갈 밭과 덤불 사이를 기어내리는 실개천이었다. 남장촌과는 거 의 이삼 리 되나마나의 상거로 둔덕 위에서 학원들이 배구 놀이를 하며 떠드는 광경이 멀리 바라보인다. 시냇가의 모 래땅에 가꾸어 놓은 채전으로 내려와 일년감이며 가지를 따 고 있는 학원들의 그림자도 희끗희끗 보이고 호두나무숲 사 이를 산책하는 젊은이들의 그림자도 눈에 뜨인다. 저녁의 미풍이 산들거리고 물은 가량없이 차가웠다.
여기서 강을 건너서면 바로 하남점(河南店)이라는 장거리인 데 조선의용군이 근방에 있음으로 해서 말하자면 군대거리 나 다름이 없었다. 이 장거리 안에 들어설 때는 이미 어둑 어둑 어두웠었다. 앞서 보고하러 들어간 현 동무의 이야기 를 듣고 마중 내려온 조직과장이라는 군복을 입은 젊은 여 성 동무가 성문가에서 해맑은 얼굴에 담뿍 미소를 띄며 손 을 내민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 동무들이 나타나며 반겨 맞아주는 것이었다.
이튿날 새벽 문 앞서 우렁차게 울려 나오는 나팔소리에 놀 라 일어났다. 내 숙사로 지정된 집이 바로 군정학교의 뒷골 목으로 접으들면서 대문이 마주 보이는 첫째 집이었다. 간 밤에 이 남장촌 본부로 올라와 이리로 안내되어 근거지 초 야의 꿈을 다복스레 맺은 것이다.
ㄷ(디귿)자로 생긴 농가의 남향채 두 간이 이제부터 내가 거처할 방이다. 문설주며 들창문이 시꺼멓게 탄 것을 보니 이 집도 역시 소탕전에 몇 번이고 왜놈의 불을 썼던 모양이 다.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노라니까 훈련장 쪽으로부터 구령 소리와 번호 부리는 소리가 매몰차게 들려온다. 새벽 조련 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이윽하여 대오 하나가 소리 높이 행 진곡을 화창하면서 집 옆을 지나간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삐죽삐죽 곡괭이나 호미를 둘러메고서 행렬을 지어 오지산 을 향하여 개황하러 가는 길이다.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 이 술렁거리며 또는 격류와도 같이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듯하였다. 기운찬 걸음걸이로 몰려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 맞춰 나가자 모두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 오네 우렁찬 행진의 함성 속에 의용군 깃발이 휘날린다.
여러 채로 널려 있는 옛날의 사원이 군정학교로 되어 있으 며 강당 교무청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군대 영사는 여러 군데 나뉘어 있고 조직도 또한 부서에 따라 부락안에 흩어 져 있었다. 6백 호 가량되는 오붓한 마을이었다. 오지산을 등에 지고 앞으로는 토층이 뚝 떨어져 널찍한 벌을 안고 있 는 구릉이었다.
수건을 들고 우물을 찾아가는 길에 학교 마당으로 나왔다.
대원들의 군사조련이 시작되어 분대장의 지도 밑에 여기저 기 널려서 행진하는 법식이며 사격태세, 총검술 등을 열심 히 닦고 있었다. 우리 말로의 씩씩한 구령에 따라 총대가 숲처럼 일어서고 총부리를 앞세우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몰려가는 광경,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감격 아님이 없었다.
담벼락 같은 가슴을 내어 밀고 넘쳐 흐르는 투혼과 적개심 을 함성 속에 터뜨리며 말없는 총대 속에 증오와 분노를 내 뿜으며 조국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우리의 군인들이다.
낭떠러지 위에서는 기관총부대가 널리어 일제히 아래쪽을 향하여 소사를 개시하고 있었다. 벼랑 밑의 넓은 수수밭 속 에서는 한 중대쯤 되는 병력이 개미 떼처럼 흩어져 총질을 하며 기어오르고 있다. 우익에서는 수류탄이 까마귀같이 하 늘을 날며 또 한편에서는 서로 함성을 지르며 마주 대들어 소규모의 돌격전이 일어난다. 기관총부대도 옆으로 전진하 며 민가를 의지하고 다시 사격을 시작하였다. 성문 옆에서 는 나팔소리가 울려 나오고 지휘관 밑으로 뛰어 내려가며 무엇이라고 소리소리 고함을 지른다. 출동명령만 내리면 왜 놈군대를 족치며 조국을 향하여 진격할 우리들의 군인이 여 기서 배양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 근방 여기저기 널려 있는 생산부대의 동무들이 벌써 부터 나와 물통을 메고 다니며 밭이랑에 물을 대고 있었다.
강당에서는 학습이 시작된 모양으로 학원들이 그득하니 모 여 앉아서 필기를 하는 가운데 강의하는 여성 동무의 아름 찬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나는 한참 동안 이 훈련장의 여가리를 거닐며 이 꿈 아닌 줄기차고도 통쾌한 현실 속에 못내 격동되었다. 등뒤에서 별안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대원 한 명이 다가와 기착을 하고 경례를 붙인다.
”저를 모르겠습니까?“ 조련이 소휴식중이었다. 알고 보니 지난해 여름 진포연선 (津浦沿線)의 경비대에 조카 A군을 찾았을 때 만난 동무였 다. A군과 같이 숙현부대(宿縣部隊)로 넘어갔다가 한 달쯤 떨어져 떠났노라고 한다. 나는 환성을 지르며 쓸어 안고 ”A군은 어떻게 되었소?“ 이렇게 다급히 물었다. 가뜩 그 후의 소식이 궁금하여 어 젯밤 도착하는 길로 알아보았더니 아직 여기에 오지 않은 모양이어서 대단히 불안하던 끝이었다.
”물론 무사히 달아났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벌써 백 리 가 까이 되는 해방부락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니까요.”
”그럼 어디 있을 모양이오”조직에서는 신사군 구역에서 공작중일 게라더군요.”
”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그도 이제는 늠름하고도 씩씩한 우리의 군인이었다.
”신사군이 근방에 있었습니다. 거기 우리의 강제병이 사오 십 명 모였는데 곧 이리 들어온다고 합디다. 이제 들어올 제만 보세요.”
A군 역시 죽지 않고 거기서 활약중이라면 얼마나 기쁘 랴……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하였다.
”왜 우리가 죽습니까?“ 나도 따라 웃었다. 호각 소리가 들려 그는 경례하고 다시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A군이 무사히 탈주에 성공하였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태항산중의 아침 해는 큰 눈을 뚝 부릅뜨고 앉아 있는 호 랑이 모양의 거악 위로 희멀거니 솟아올라 너훌너훌 안개를 흩어뜨리면서 청창히 맑은 시내를 금빛으로 적시는 것이다.
아침 햇빛을 받은 이 산중 분지는 그림같이 더욱 아름다웠 다. 호두나무 숲의 잎새들이 금빛에 발랑거려 금관의 진열 같이 호화로웠다. 이슬 앉은 밭두렁 길을 농민들이 오르내 리고 여기저기 바라뵈는 동네에서는 연기가 퍼져 흐르고 있 었다. 황하밭 위를 서너 마리 흰 두루미가 미끄러지듯이 날 아간다.
전방으로 공작을 나가는 모양인 편의를 입은 동무 하나가 농립을 삿갓처럼 눌러 쓰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목의 커다란 미릅나무 밑에서 동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구로 공작을 나가는 길이나 아닌지”이 때에 군복을 입은 멀쓱한 사내가 궐련을 피워 물고 군대본 부로부터 어정어정 나오고 있었다. 그 뒤를 총을 둘러멘 대 원이 따라나온다. 사내는 나를 보더니 계면쩍은 듯이 얼굴 을 돌렸다. 북경의 특무기관에 있었다는 사내로 어제 저녁 도착하는 길로 감금된 모양이다.
아마 이날의 하루 동안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감격의 날이 될 것이다. 본부에서 부른다고 하여 구락 부실로 가니까 여러 간부, 선배들이 식탁 주의에 둘러앉아 있었다. 여기서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고 굳은 악수를 하게 되었다. 담벽에는 중국 깃발과 함께 우리의 깃발이 장식되 어 있었다. 조국의 깃발 아래서 존경하는 선배 동지들의 따 뜻한 환영을 받는 기쁨은 불기하고 나에게 눈물을 자아내었 다. 이 우리 깃발을 눈앞에 버젓이 걸고 우러러보기는 이것 이 나의 반생에 있어서 처음 되는 일이었다.
여기에 모여 앉아 있는 이는 모두가 이 이역산채에서 전방 전선 혹은 적구 안의 조직을 걷어 쥐고 일야 조국의 독립해 방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지도간부들인 것이다. 의용군의 다채로운 선전공작을 지도하고 있는 선전부장 김창만(金昌 滿) 동지를 만나게 된 것도 이 자리였다. 조직부장 이유민 (李維民) 동지를 비롯하여 중요한 간부들이 대개는 선전공작 을 지휘하기 위하여 출동하고 없었다. 서휘(徐輝) 동지는 바 로 연안으로 향하였었다. 청창하에서는 학원들이 잡아온 물 고기를 끊여 놓고 대추술을 큰 잔으로 한 잔씩 부어 돌리며 즐거이 담소가 계속된다. 공방전의 연습을 지휘하던 이익성 (李益星) 대장은 도중에 나타나 참석하였다.
본부에서는 대원들이 모여 앉아 삼삼칠조로 박장 연습을 하며 이따금 가다가 '건너자 압록강 압록강!'하며 소리 맞추 어 외친다. 앞으로 맞이할 단오절에 대별로 각 부문의 대항 전이 벌어지기 때문에 응원 연습이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전승부대를 압록강부대라고 부르기로 하여 이 영광된 이름 의 쟁탈전이 전개될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먼 데서 실탄사 격 연습을 하는 총 소리가 찌르는 귀청을 울리며 들려 온 다. 주먹제비국을 뜨면서의 우리들의 이야기는이 총 소리에 두간두간 중단되었다.
여기서는 2식 제도로 아침 열 시에 조반을 먹고 저녁은 하 오 네 시에 먹기로 되어 있었다. 열 두 시에서 한 시 사이 를 휴식시간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시간이 끝난 뒤에 선전 부로 찾아갔다. 부장 동지가 중국민중과 이주동포들 속에 항전사상과 조직을 깊이 박기 위하여 대외 대내적으로 전개 되는 구체적인 선전방향”방법 등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 여 준다. 여러 동무들이 선전문을 등사하고 있었다. 부대로 부터 구락부 관계의 간부들이 자주 찾아와 공작상의 지시를 받고 돌아간다. 또 몇 동무는 마지를 사륙판의 크기로 베어 가지고 물감잉크를 찍어 가며 깨알같이 잔 글씨로 신문원고 를 쓰고 있었다.
”차차 아시게 되겠지만 이것을 보십시오.”
하며 부장 동지는 벽에 붙은 조직분포도를 가리켰다. 거기 에는 적구 안에 포치된 팔로군의 지하군 조직이 붉은 깃대 로 세밀히 기입되어 있다. 우로는 동북 열하에서 밑으로는 해남도 운남(雲南)에 이르기까지 감자덩굴처럼 박혀 있다.
그리고 이지하군 조직이 있는 곳에는 대개 우리들의 조직도 깔려 있어 우리 깃발로 표식되었다. 보기만 하여도 가슴이 술렁거리고 또 대견하였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무장투쟁의 전개입니 다. 동북에서는 밤에 낮을 이어 유격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 소”여기서도 무장역량을 확대하고 공고히 하며 싸우는 동 시에 적구내에 이렇게 백방으로 지하군을 조직해야 합니다.
관내의 이십만 교포를 묶어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선전도 이 방침에 따라 구상되고 실천되고 전개되고 있습니다.”하 더니 두 팔을 모두어 지도 위로 올려 밀며 ”때만 오면 우리 는 총공격을 개시하여 격류처럼 내닫습니다. 각처 분맹의 군대도 적을 쳐부수며 몰려 올라갑니다. 이 조직 하나하나 가 또한 불을 터뜨리며 호응하여 일어납니다.”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용히 오셨소. 많은 힘을 받쳐 주시오.”
그의 말에 의하면 물론 팔로군도 전선에서 대진격을 시작 할 것이고 여차직하면 붉은 군대도 결하와 같이 내리밀 것 이다. 우리들은 올라가며 이주동포들을 해방하고 조직하며 자원병들을 뒤에 이끌고 압록강으로 압록강으로─이리하여 조국으로 개선케 될 터이다.
그의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열일 띠어 떨렸다. 나는 수많 이 끄덕일 뿐이었다. 이윽고 일어나 다시 그리하여 있게 그 의 손을 잡았다.
”많이 배워주시오. 국내의 동포들도 일어날 것입니다.”
저녁에는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다. 적구로부터 새로 들어 온 동무가 여러 명 되기 때문에 국내에서 온 나까지 합하여 전원이 모이게 된 것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서도 조직 은 전체 맹원과 군대, 학원들을 교육하면 고무하고 단결지 어 기세를 올릴 것을 잊지 않았다.
집합장은 강당 앞 넓은 마당이었다. 하남점의 태항분맹에 서도 생산분맹을 인솔하고 최 동무가 올라왔는데 방사공장 에서 공작하는 여성동무들도 무수히 보인다. 학원들은 대열 을 지어 행진해 오고 오지산에 개황(開荒)하러 갔던 대오도 노래를 부르며 입장하여 장내가 북적거린다. 어둠이 내려덮 혔다. 정면에는 우리 깃발과 중국 깃발이 교차되어 엄숙한 기분을 북돋우고 양편 계단 위에는 횃불을 치켜 든 두 대원 이 뚝 버티고 서서 회장을 대낮같이 밝힌다. 장내가 차고 넘치게 되자 분부대표 동지의 간곡한 환영사가 있었다. 크 지는 않으나 거센 목소리로 선동적인 웅변이라기보다도 일 반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교양”선전적인 효과를 십분 기도 하고 있는 연설이었다. 사이사이 청중 속에서 구호를 외치 는 소리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일제히 슬로건의 함성이 폭 발하여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하였다. 대중 자신이 대중 을 선동하여 기세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행복된 흥분의 도 가니 속에서 주북히 눈시울을 적시는 눈물을 나는 혼자 몰 래 훔칠 길이 없어하였다.
”여기서도 또한 우리 조국의 깃발이 있는 것이오.”
대표 동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 깃발을 우러러 멀리 조국으로부터, 적지구로부터 사선 을 넘어 친애하는 이 동무들이 달려온 것이오. 우리의 깃발 은 이렇게 외칩니다. 멀지 않아 내 조국의 강토 위에, 민중 의 가슴 위에 퍼득이라라!”
소리없이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만장의 군중도 모두 주먹을 그러쥐고 팔뚝을 높이 치켜 들 고 구호를 부르짖었다.
이에 맞추어 북 소리가 두덩덩 울린다.
”왜놈을 쳐몰며 조국으로 나가자!”
”화북 조선의용군 만세!”
”조선 독립해방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