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일제침략과 독립운동/20세기 전반의 한국
20세기 전반의 한국
편집〔槪說〕20세기에 접어들어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근대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문호개방 이후 개화혁신을 통한 근대사회로의 지향은 자체의 기반을 보존하고 있던 전통사회의 여러 요소를 불식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일제에 대한 항일민족운동이 심화되었는데, 이 때를 계기로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운동이 발전·성장하고 있었다.1876년의 개항(開港)에 이어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거쳐 1896년의 독립협회 활동은 모두가 한국의 근대를 향한 중요한 족적(足跡)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19세기를 종결하는 1898·1890년대의 독립협회 해산으로 이러한 근대화의 지향이 보수집권세력에게 제주되어 그 진행이 완만하였다. 이어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 속에서 국권을 상실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고, 1910년 일본은 한국의 국권(國權)을 강탈함으로써 한민족의 주권이 말살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유린당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과정을 대외적인 측면에서 보면 1919년말부터 러시아 세력과의 사이에 한국의 독점을 서로 다투던 일본이 영·일 동맹(英日同盟)과 미·일 협상(美日協商)이라는 국제적 배경하에서 1904·1905년의 러·일전쟁(露日戰爭)으로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로부터 한국에 대해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을 밀고 나갔다.한편 이 기간 동안의 항일운동은 한국에서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하여 1905년에 봉기한 을미의 항일의병으로, 이는 그 후 계속되어 1907년 이후의 6,7년 간에 걸쳐 항일전을 수행해 갔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독립협회와 그 맥락이 통하는 개화층 주도의 근대적인 언론·교육 등 문화면에 있어서의 계몽운동이라 할 수 있다.국권을 강탈하고 난 다음에 일제는 한국의 식민지 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했다. 이후 일제는 이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문화민족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강행했다. 무단정치하에서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마음대로 뜯어고쳤으니 그 중에서도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 경제를 그들의 식민지 경제로 개편시키는 작업의 하나였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그 밖의 자원과 금융에 대해서 비슷한 경제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민족경제를 식민지 경제체제 안에 편입시켜 나갔다.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의 이러한 무단정치에 결코 굴종할 수 없었던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가 민족적 총화를 이룬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민족적 분노를 그들의 우세한 무력으로 탄압하고 살륙·구금·방화·고문 등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것이다.3·1운동은 비록 그 열매를 맺지 못하였지만 일제의 정책을 문화정치(文化政治)란 일시적 호도책(糊塗策)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식민지 정책의 부분적 수정 이후 일제는 한국을 그들의 식량공급지 내지 상품시장으로 강화하였으며, 나아가 중공업과 광업을 개발하는 등 한국을 그들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상태 속에서 민족자본은 질식되고, 농민과 민중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1920년대 후반에 국내에서는 6·10만세운동, 신간회(新幹會) 활동과 광주학생운동 등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해외에서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내와 국외의 민족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연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민족문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문화를 연구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진단학회(震檀學會) 등의 활동이 이때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서·북간도(西北間島)를 중심으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안의 한인 교민 항일 독립군을 편성하여 10여 년에 걸쳐 국경선을 중심으로 항일전을 벌였던 것이다.일제는 1932년에 만주국을 수립하였으며, 1937년에는 중·일전쟁(中日戰爭), 이어서 태평양전쟁을 확대하는 등으로 그들의 제국주의적 도전을 노골화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에서의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축적된 경제력과 제국주의 열강에 발맞추어 상승된 그들의 국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한민족에게 더욱 큰 시련을 요구하였다.이 시기에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진행했으니, 이 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일제는 교육기관을 동원했고 우리말의 사용조차 금지시켰다. 또 모든 민족적인 문화활동을 단속하였으며, 식량·원료 및 노동력의 강제 동원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백여만의 청·장년을 전쟁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 강제노동·지원병제도·징병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심지어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여 한민족을 아예 말살하려고까지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질곡 속에서도 민족운동의 지도자나 일반 민중은 최후의 항쟁을 전개,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인적·물적 총동원령을 거부하는 각종 형태의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징병·공출 등의 각종 동원에 저항했으며, 한국사와 한민족의 문화 및 언어 연구로 민족문화를 지키기에 사력(死力)을 다했다. 이러한 민족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은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 수행되어 민족해방의 날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