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일제침략과 독립운동/러·일 전쟁

러·일 전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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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후 중국은 열강에 의한 세계분할의 무대로 화하였다. 러시아는 뤼순(旅順)·다롄(大連)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하고 이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위협하였다. 이것은 청·일 전쟁 후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일본 자본주의의 한국 침투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이럴 즈음 청국에서는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났고,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英)·일(日) 양국은 러시아를 가상적(假想敵)으로 하는 영·일 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이 동맹은 일본의 대러전(對露戰)의 방향 결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일본은 영·미 양국과 함께 러시아군이 만주에서 철퇴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에 대해 러시아의 만주 점령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을 넘어 용암포(龍岩浦)에 들어와서 조차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한국과 만주를 가운데 놓고 일본과 러시아의 두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의 침략적 마수를 노골적으로 맞대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병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최고의 이익을 점유하는 것을 허용할 것과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의 상업상 진출을 허용할 것을 협상으로 제기하였다. 교섭은 수차에 걸쳐 행해졌으나 이 정치적 흥정의 타협점은 찾아지지를 않았다. 이에 일본이 광무 8년(1904) 뤼순에 대한 기습을 단행함으로써 양국은 교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한국은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서울로 침입하여 각종 위세를 과시했고 병력의 위협 속에 한·일 의정서를 성립시켰다. 나아가서 황무지 개척안으로 영토를 강탈하려다 실패하자 한·일 협정서를 체결하여 소위 고문정치를 강행하였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했다. 세계최강의 육군이라고 불리던 러시아군과의 전투는 악전고투를 면치 못할 일이었지만 펑톈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발틱 함대까지 격파하였다. 이 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알선으로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9월에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 최후 최강의 적대 세력을 축출, 한국 식민지화의 길로 줄달음쳤다.

일본의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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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浸透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식산흥업의 경제정책과 국방강화 그리고 열강간의 세력균형 유지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궁내부가 광산, 철도, 인삼, 포사 등을 직접 관장한 것도 이들의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열강의 압박이 워낙 거세고, 또 모든 산업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고려하여 부득이 수입의 일부를 징수하는 조건으로 철도·광산·산림·어장 등의 각종 개발권을 러시아·미국·영국·일본 등에게 골고루 넘겨 주었다. 러시아에게는 대체로 두만강·압록강 그리고 동해안 연안지대의 광산·산림·어업권을 넘겨주고, 미국에는 은산금광채굴권(1899)과 서울의 전차운영권(한·미합작), 영국에는 은산금광채굴권, 독일에는 강원도 당현금광채굴권을 각각 양도하였다. 그러나, 열강 중에서 가장 많은 이권을 얻은 것은 군대파견을 협박하면서 나선 일본이었다.일본은 경부철도 부설권을 비롯하여 경인철도·경의철도·마산철도부설권을 얻어냄으로써 한반도의 남북을 관통하는 주요 간선철도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이 철도부설공사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겼고, 또 철도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농민들이 또다시 반일의병운동을 일으키게 된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일본은 철도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금광과 전국 각지의 어업권을 획득하였으며, 무역 분야에 있어서도 대한제국 수출액의 80

90%를, 수입액의 60

70%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주로 무명제품을 들여오고, 쌀·콩 등 식량을 가져갔다. 또 서울을 비롯한 개항장 일대에 은행을 설치하여 금융시장을 잠식하였다. 일본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제일은행권’이라는 지폐를 한국내에서 강제로 통용하게 하였다. 농촌의 내부 모순에 더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농민·어민·부두노동자, 그리고 소상인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전라도 일대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다시금 하층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898

1899년에 일어난 이른바 영학당(英學黨)의 운동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충청·경기·경상도 일대에서는 행상과 무직자·빈농·노동자·걸인들이 활빈당(活貧黨, 1900

1905)을 조직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투에 항의하면서 일본 상인과 부자들을 습격하였다. 활빈당이라는 이름은 「홍길동전」의 활빈당처럼 의로운 도덕이 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지방의 보부상들이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하고,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를 조직한 것도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상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러시아의 침투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96년 5월 웨베르-고무라(小村) 각서를 시작으로 잇따라 러시아와 의정서(1896. 6)·협약(1898. 4)들을 맺으면서 러시아를 견제해 오던 일본은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한 특수권익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영국은 중국의 의화단(義和團)의 난(1900)을 함께 진압한 후 만주를 차지하려고 획책하고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의 조선독점을 승인하는 대신 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다.영·일동맹에 의해 입지가 강화된 일본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외교교섭을 벌여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을 인정할 것과 만주에 대한 경제침투를 허용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히려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과, 북위 39도 이북의 땅을 중립지대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이 경부선철도부설이 군사적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협상에 실패한 일본은 바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경부선철도를 빨리 건설할 것을 명령하고(1903. 12), 1904년 2월 최후통첩과 함께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1903. 12 입항)을 습격하고, 요동반도의 여순항(旅順港)을 기습공격하였으니(1904. 2), 이로써 러·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보다 앞서 대한제국 정부는 러·일전쟁을 예상하여 미리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1904. 1).

활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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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貧黨

1899

1904년 사이에 한국의 남부지방에서 일어난 농민군 집단 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집단 동학농민전쟁 후 잔존한 농민군들은 일시 1896년의 을미의병운동에 가담했다가 해산 후 화적(火賊)의 상태로 있으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에 희망을 걸다가 그 운동마저 좌절당함을 보자, 1899년부터는 여러 가지 이름의 농민군 집단을 형성하여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에서 활빈당은 17세기 허균(許筠)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사상배경으로 하여 남부지방의 각지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활빈(活貧) 투쟁을 한 것이다.활빈당은 ① 자연 평등의 실현 ② 사회빈부 격차의 타파 ③ 국가의 혁신에 목표를 둔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구국 안민책으로서 ① 타국에의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국내시장에 외국상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 ② 각처의 시장과 연안 포구에 영세한 행상자(行商者)에 대한 징세의 폐해를 제거할 것 ③ 전지(田地)의 황폐를 가져오는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④ 사전(私田)을 파하고 균전법(均田法)을 실시할 것 ⑤ 곡가를 일정하게 할 것 ⑥ 악형의 법률을 혁파하고 인정(仁政)을 시행할 것 ⑦ 농우의 도살을 엄금하고 농업을 잃는 폐해를 제거할 것 ⑧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락하지 말 것 등을 주장하였다.활빈당의 조직은 전집단을 통솔하는 노사장(老師丈)을 두고 각 지방에는 유사(有司)를 두었으며, 1년에 한 차례의 대장(大將)과 수시로 열리는 장(場)을 회의기관으로 하여 토론과 결정사항의 전달을 하도록 하였다. 활빈당은 1899년 이후 농민들의 주장이 중앙정계에서 실현될 희망을 잃었을 때 화적이 된 농민군들이 그들의 주장을 폭력으로 주장한 운동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활빈당 운동은 1905년 이후의 의병운동에 연결되어 의병으로 흡수되었다.

한·일 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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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議定書

광무 8년(1904)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 러·일 전쟁이 발생하자 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키고 병력의 위협으로 이 의정서를 성립시켰다. 이 의정서의 성립에는 한국측에서 이지용(李址鎔)·구완희(具完喜)가, 일본측에서는 하야시(林權助)가 각각 참여했다. 이 의정서에는 관례대로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이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제3국이나 내란으로 한국 황제의 안녕이 위협받을 때 일본은 즉시 이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며 이것을 위해 군략상 필요 지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간섭을 합리화했다.

이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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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道宰 (1848

1909)

한말의 문신. 자는 성일(聖一), 본관은 연안(延安). 고종 19년(1882)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감사를 거쳐 학부대신(學部大臣)·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역임했다. 광무 8년(1904)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민간실업자와 조신(朝臣) 중의 유력자를 모아 농광회사(農鑛會社)를 만들어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제1차 한·일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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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韓日協約

광무 8년(1904) 8월 일본이 한국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 러·일 전쟁이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일본인 고문관의 초빙을 강요했다. 그 결과 체결된 것이 한·일 협정서라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자문한 후에 시행하게 되었다. 또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삼아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나 그 밖의 주요 안건은 사전에 일본과 상의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 결과 재정고문에 메가다(目賀種太郞)가 입국하고, 외교고문에는 스티븐스(Stevens)가 왔다. 이어 협약에는 규정이 없는 군사·경무·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으로도 일본인이 왔다. 이리하여 소위 고문정치가 시행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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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smouth 條約

러·일 전쟁 후에 체결된 강화조약. 러·일 전쟁이 세계의 여론을 뒤엎고 일본의 연승으로 이어지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강화의 알선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적절한 것이라 판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의 대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 또한 일본의 한국 보호 조치를 승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맺어진 것이 광무 9년(1905) 9월의 포츠머스 강화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 등에 관한 특수 이권을 가짐을 인정하고, 일본의 필요에 의해서 한국의 지도·보호·감리(監理) 등이 행해질 때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뤼순·다롄에 대한 러시아의 모든 권리를 일본이 이어받고 또 만주에서 러·일 양국은 동등한 상업상의 권한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