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일제침략과 독립운동/일제의 침략과 민족적 항쟁
일제의 침략과 민족적 항쟁〔槪說〕
편집1850년을 전후하여 근대화(近代化)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진출을 꾀하여 오다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을 계기로 그 침략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한편 대원군(大院君)의 하야(下野)로 급격한 정세의 변화를 겪게 된 대한제국은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가 대립되어 국세(國勢)의 약화를 초래했으며, 이 같은 사태는 외국의 세력침투에 좋은 기회를 주는 동시에 각종 무기의 구입과 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 등으로 인한 배상금 지불로 국가재정은 극도의 궁핍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후진사회의 모순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외세의 침략이 날로 더할 때, 이에 대한 반발로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고 있던 청·일 양국의 충돌을 자아내어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다시 남하(南下)의 기회를 엿보던 러시아에 도전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구축하고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위(優位)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동안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켜 내정간섭을 시작하고,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으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작하더니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에 통감부(統監府)를 두고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실시, 외교권을 빼앗아 우리나라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이와 같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는 그 후 계속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압박을 받다가 헤이그 밀사 사건(海牙密使事件)을 계기로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맺어 차관정치(次官政治)의 시달림을 받았고 군대까지 해산하게 되었으며(1907), 그 후 기유각서(己酉覺書)에서 사법권을 빼앗기고(1907)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약의 체결로 29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 최근세의 역사적 과제는 안으로는 봉건적 사회의 탈피와 현대적 사회로의 재편성, 밖으로는 외세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확고히 하는 데 있었으나 합방으로 인한 실패는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고 식민지하에서의 현대화는 여러 모로 보아 병적(病的)인 발전을 보게 하여, 이후 36년 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완전실권(完全失權)이라는 수치스런 기간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를 병합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선(朝鮮)이라 개칭하고, 이에 따라 종래의 통감부(統監府)를 폐지하여 이보다 강력한 통치기관으로 동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제를 공포, 10월 1일부터 이를 실시, 조선통치의 전권(全權)을 통독에게 부여하였다. 총독의 일관된 정책은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를 위한 탄압과 경제적 착취 및 민족적 고유성(固有性)의 말살에 있었으나 사회적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들의 정책에는 다소의 변동이 있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의 변화에 따라 일제 시대를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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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편집이 시기는 식민지적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한 시대로서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되는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天皇)에 직속되어 정치는 물론 군무(軍務)까지 통합하는 절대적 권력을 쥐고 있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일본 통치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반항을 막기 위하여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중앙의 경무총장(警務總長)에 헌병사령관, 각 도의 경무부장(警務部長)에 헌병대장(憲兵隊長)을 임명하였고, 우리나라의 정치적 결사(結社)·집회(集會)는 물론 단순한 집회마저 금지되고, 한글로 쓴 신문까지 폐간하였으며, 관리나 교원(敎員)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였다. 또 재판을 거치지 않고, 헌병이 즉결처분(卽決處分)을 감행하였고, 태형(笞刑)을 존속시켜 애국지사들을 모조리 투옥(投獄)하였다. 한편 일본은 제국주의적 대열에 끼기 위한 부국책(富國策)으로 우리나라에 이민(移民)을 장려하여 온갖 이권(利權)을 독점하고 착취하게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그들의 식량공급지(食糧供給地)·원료공급지 및 상품의 독점시장으로 개편하기 시작하였다.이리하여 총독부는 우선 철도·항만·도로·통신 등의 기초적 건설사업에 착수하였으므로 화폐와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도량형(度量衡)의 표준을 정했다. 특히 총독부가 가장 많은 노력을 경주한 것은 대규모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으로서 이는 우리나라 침략에 따른 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과 소유권(所有權)의 확립을 위한 세부적이고 철저한 조사·파악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토지가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한편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게 되었다. 근 10년 간에 걸친 이 같은 대변혁은 수백 년 간 정체상태(停滯狀態)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주게 되고 구사회가 급격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근대화의 발전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일본의 식민지적 지배체제라는 기형적(畸形的)인 테두리에서 이루어진 개편 과정이었다.이같이 급격한 개혁과 가혹한 압제 및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에 따른 토지의 상실 등은 반사적으로 민족의 원한과 반항심을 북돋았으니, 각처에서 지사(志士)들이 일어나 국권회복을 부르짖었고, 한편으로는 해외에 망명하여 기회만 있으면 궐기했으며, 일본의 침략적 노동조건에 항거하는 파업투쟁도 극도의 탄압을 무릅쓰고 잇달아 일어났다. 마침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을 제창하자 조국을 잃은 우리민족은 크게 자극을 받아 드디어 겨레의 분노는 3·1운동으로 폭발하였다.
제2기
편집거족적인 3·1운동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전면적인 반격을 받게 된 일본은 우리 겨레의 독립을 위한 민족적 단결력과 저항정신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조선 통치는 무단정치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들의 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1919년 8월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 총독은 ‘일선융화(日鮮融和)’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 아래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정책의 변화를 선언하였다. 이 정책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세로운 대륙침략(大陸侵略)을 감행할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총독부 관제를 개정하여 제도상으로나마 문관(文官) 총독의 임명을 허용하고, 육·해군 통수권위임(統帥權委任)의 조항을 삭제했으며,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普通警察制)로 개정하여 그 사무집행의 권리를 도지사(道知事)에게 넘기고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 자치제도를 표방하였다.동시에 조선인 관리 임명의 범위를 확대하여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를 완화, 일본인에게만 한정되었던 보통학교(普通學敎) 교장에 우리나라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리고 관리·교원의 착검(着劍)·제복도 폐지하였으며 태형(笞刑)을 벌금형(罰金刑)으로 대치하였고,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시대일보(時代日報)』 등 우리말 신문의 간행을 허락하는 등,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도 허용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정치에 일부의 우리나라 사람을 참가시켜 극히 제한된 범위이긴 하나 정치적 발언의 길을 열어 주어 인심의 수습을 도모하였다.이 같은 문화정책은 우리 민족을 회유(懷柔)하고 우리나라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즉 이때에는 초기의 기초적 정책을 넘어서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종속시키려는 식민지경제의 확립에 그 특징이 있었다. 그 두드러진 시책이 이른바 증산미계획(增産米計劃)으로 이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일본에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여 국내에서 식량문제가 일어나게 되자, 우리나라의 식량사정을 무시하고 쌀의 증산분(增産分)보다 훨씬 더 많은 양(量)을 일본에 수출하였다.우리나라의 부족한 식량은 만주로부터 사들인 잡곡으로 보충하였으나 농민은 쌀을 팔아서 잡곡을 사먹는 비참한 사정이 되고 말았다. 여하간 이 증산미계획은 우리나라의 농업형태 내지 경제계에 큰 변화를 주어 우리나라 경제는 단작형경제(單作型經濟)로 옮아가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를 식량공급지로서 영구히 반봉건적인 농업국 상태에 머물게 하려던 일본은 1차대전의 전쟁경기(戰爭景氣)가 지나가자 조선을 유리한 자본투자(資本投資) 장소로 주목하게 되어 반공업(反工業)정책을 지양하고 1920년 회사령(會社令)을 철폐, 관세제도(關稅制度)를 개정하여 일본 자본의 우리나라 진출을 자유롭게 하는 일면, 주로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이 같은 일본의 자원독점과 자본 진출은 조선노동자를 급속도로 증가하게 만들어 이에 따른 비참한 노동조건은 ‘일제의 타도’라는 정치적 목표를 가진 노동쟁의(勞動爭議)로 발전하였고, 한편 어느 정도의 완화된 탄압을 계기로 대두된 사상적 정열은 총독정치를 비판하는 항일운동(抗日運動)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항쟁은 3·1운동의 실패로 잠시 진정되었던 민족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켜 노동자·농민·학생운동·지식층 등이 주체가 된 소작쟁의(小作爭議)·노동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사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운동은 민족주의자의 총단합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조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이러한 민족운동 중 가장 큰 활동은 6·10만세운동으로 이는 3·1운동 후에 일어난 최대의 민족해방 투쟁이었다. 한편 3·1운동 후 일제의 압박을 피하여 해외에 망명한 동포들은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수립, 주권 회복에 나섰으며,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는 여러 가지의 항일 무장운동이 전개되어 일제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1930년을 전후하여 다시 사상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더니,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자 본격적인 탄압을 가하고 조선통치의 근본적인 정책변환을 강구하였다.
제3기
편집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야욕은 그칠 줄을 몰라,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운 후 다시 북중국(北中國)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937년 7월 노구교(盧溝橋)에서 중국과 충돌,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도발하였다. 한편 일본은 유럽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1941년 12월 연합군을 상대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켰다. 이 동안은 일제의 우리나라 통치가 제3기로 접어든 시기로서 그 기본정책은 우리나라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자는 데 있었다. 이리하여 1936년 미나미(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자, 먼저 중요 산업통제령(産業統制令)을 공포, 군수공업(軍需工業)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경제(戰時經濟)의 확립을 목표로 우리나라 경제의 재편성을 강행하여 중화공업을 발전시켰고, 군사수송량(軍事輸送量)의 증강을 위하여 육운(陸運)·해운(海運)·공수(空輸)의 교통시설과 통신시설을 확충하였다. 이러한 전시동원태세(戰時動員態勢)는 정신적 방면에도 미쳐 조선사상범 예비구금령(朝鮮思想犯豫備拘禁令)·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을 공포하여서 일체의 사상운동을 탄압하였다.1938년는 교육령(敎育令)을 개정, 일본식으로 학교 이름을 고쳐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강령을 내세워 우리나라 학생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꾀하고 학교의 조선어 과목을 폐지, 드디어는 조선어학회 및 우리말 신문 등을 폐하여 민족문화의 제거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본정신을 양성하기 위하여 총독부는 황국신문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만들어 각 기관에서 수시로 외게 하고 소위 애국일(愛國日)을 정하여 신사참배(紳士參拜)·국기게양·궁성요배(宮城遙拜)·정오(正午)의 묵도·국민복(國民服)의 보급 등을 강제하였다. 일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명하여 전 인구의 80% 이상을 일본식 이름을 따르게 하고 집집마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부(神符)를 배부하여 이를 섬기게 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꾀하였다. 일제의 전시동원은 정신적·사상적 방면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적(人的)·물적(物的) 동원에도 미쳤으니 1937년에는 육군지원병제(陸軍志願兵制)를 실시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전쟁터에 보냈고, 근로보국대(勤勞保國隊)를 조직하여 군사시설·중공업에 강제 동원하였다.1943년 5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현안(懸案)인 징병제(徵兵制)를 시행, 이어 8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令), 이듬해 11월에는 학병제(學兵制)를 실시하여 드디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모조리 침략전쟁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다.이에 앞서 1938년에는 방공협회(防共協會), 1940년에는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을 만들고 행정단위마다 애국반·경방단(警防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사의 색출과 전쟁수행에 급급하였으며, 말기에는 각 가정의 금속기물까지 강제로 공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식량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통제하여 배급제로 하고 물심양면에 걸친 희생을 강요, 조선을 완전히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따라서 우리나라의 전통이나 국민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되고 오로지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었다.한편 1931년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이 제약을 받게 된 뒤에는 항일운동이 주로 해외에서 행하여져 만주·시베리아 등지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고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 광복군(光復軍)으로 하여금 중국군을 도와 일본과 싸워 우리의 독립정신을 열국(列國)에 보여 주었다. 태평양전쟁은 처음 일본에 유리하였으나 1942년 6월 미드웨이작전(Midway 作戰) 이후 일본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를 거듭하였고,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전국(戰局)은 이미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었다.드디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이어 얄타협정(Yalta 協定)에 의한 소련의 참전(參戰)으로 일본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니 이로써 우리나라는 36년 간의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되었으며 카이로(Cairo)와 포츠담(Potsdam) 선언의 보장에 의하여 우리나라는 독립의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
행정
편집이 시대의 조선통치는 최고 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중앙집권적 지배 밑에 이루어졌다. 그 장관인 총독은 천황에 직속되어 통치의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대한제국 황실(皇室)인 이왕직(李王職)을 제외한 모든 기관에 대한 강력하고도 광범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그 보조기관으로 친임(親任)의 정무총감(政務摠監)을 두어 부무(府務)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그 밑에 각 부·국(部局:초기에는 5부 9국, 1941년에는 3부 8국)을 설치하여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다.그리고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을 비롯한 여러 기관을 두었고, 지방조직은 대한제국 시대에 제정한 제도를 대체로 답습, 전국을 13도(道)로 나누고, 1914년의 개혁을 거쳐, 1941년에는 13도 21부(府) 218군(郡) 2도(島) 88읍(邑) 2,259면(面)으로 확정하였다.여기에 도지사(道知事:처음은 道長官)·부윤(府尹)·군수(郡守)·도사(島司)·읍면장(邑面長)을 배치하여 관청 및 공공단체(公共團體)의 사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도에는 지사관방(知事官房)·내무부(內務部)·산업부(産業部)·경찰부(警察部)를 두고 각 부장은 도사무관(道事務官)으로서 임명되었다. 이 같은 행정사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총독부는 보호정치(保護政治)시대 이래 실시해 온 관세관제(關稅管制)·조세징수규정(租稅徵收規定)을 한층 강화하여 재정적 충당을 계속하였고, 1926년에는 세제조사위원회(稅制調査委員會)를 조직하고 조세제도의 강화를 단행, 소득세(所得稅)·지세(地稅)·영업세(營業稅) 등 25종의 세금을 규정하였으며, 한편 경찰의 강화와 시설의 확충을 위하여 일본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았다.그리고 사법제도(司法制度)는 4급 3심제(四級三審制)를 실시, 서울에 고등법원, 서울·평양·대구에 복심법원(覆審法院), 11개 도시에 지방법원을 설치하고 각처에 지방법원 지청(支廳)과 출장소를 두었으며, 특히 독립운동가와 사상운동가를 단속할 목적으로 전국 7개처에 사상범보호관찰소(思想犯保護觀察所)를 두었다. 총독부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경찰제도로서 초기의 헌병경찰제도는 그 운영의 극악(極惡)함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거니와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 후에도 중앙의 경무국(警務局)과 각도의 경찰부(警察部)를 중심으로, 전국에 254개처의 경찰서, 2,332개처의 주재소(駐在所)·242개처의 파출소를 두고, 사무관(事務官) 13·경시(警視) 71·경부(警部) 477·경부보(補) 895·순사(巡査) 2만 326명을 배치
하였으며 이 밖에도 무수한 보조경찰을 두어 총독정치 수행에 앞장서게 하였다.
경제
편집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자 식민지 경제의 본원적(本源的) 자본축척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토지사업을 필요로 하였다.이는 아직 근대적 토지소유의 관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조세수입(租稅收入)의 대상을 확고히 하고 부유한 지주층과 구귀족(舊貴族)을 보호하여 그들과의 타협에 의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불평·불만을 감쇠시키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강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다.그리하여 이 토지조사사업은 1905년 통감부(統監府)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가 한일합방 직후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9년 간의 세월과 2천만원의 비용을 들여 1918년에 완료하였다.그 결과로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상실하였고, 반면에 일본인의 토지취득(土地取得)은 보증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토지를 잃은 농민은 소작인 또는 유랑민으로 몰락하여 새로운 지주와 소작관계를 맺거나 고향을 버리고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국유지(國有地)로 편입된 토지의 일부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나 이민(移民)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어 일제의 강력한 보호 밑에서 일본인의 대농장이 생기게 되었다.한편 일제는 조선은행(朝鮮銀行)의 설치와 19 14년 농공은행령(農工銀行令)·지방금융조합령(地方金融組合令) 등으로 식민지배에 필요한 근대적 금융기관의 정비를 단행하고 일본상품의 판매시장으로 우리나라를 재빠르게 이용하였다.아울러 일제는 관세제도를 일본에 유리하게 개혁할 필요를 느끼고, 1920년에 이를 단행, 조선상품의 대일(對日) 수출세를 폐지하고 수입세의 대부분도 철폐하여 무역이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의 농산물 수출과 일본의 공업제품 수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특징이다.일본은 식량과 원료를 헐값으로 가져가는 대신 그들의 공업제품을 독점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상품시장을 차지하였다. 이 결과로 우리나라의 민족자본의 축적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노동자들은 저임금(低賃金)·장시간 노동 등 불리한 조건 하에서 착취를 당하고 말았다.따라서 우리나라는 식량공급지로서 일제의 최대한의 경제적 공헌을 한 셈이다.일본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식량공급지로 삼아 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여 국내에 큰 식량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한층 더 우리나라의 식량을 요구하게 되었다.이리하여 일제는 1920년에서 1935년까지를 제1기로 하는 증산미계획(增産未計劃)을 실시, 16,800만원의 자본으로 42만 정보(町步)의 토지를 개량하고, 920만 섬의 쌀을 증산하자는 것이었다.이 계획은 다시 한번 수정을 가하여 실시하여 왔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그 결과로 증산분(增産分)보다 많은 쌀이 일본에 수출되어 우리나라의 식량부족의 실정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대책으로 만주의 잡곡이 수입되었다. 한편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경제는 농업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후진적인 경제형태로 바뀌었으며 어느 정도의 경지(耕地) 면적의 증가와 기술상의 진보를 가져왔으나, 이는 주로 지주·가본가를 위하여 행해진 것으로 생산관계는 여전히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소작관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면화(棉花)증산에도 힘을 기울여 방직공업의 원료 충당에도 급급하였다.이와 같이 일제는 처음 우리나라를 식량·원료공급지로서 농업국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려 하였으나 제1차대전의 전쟁경기(戰爭景氣)가 지나가자 우리나라를 유리한 투자장소로 주목하게 되었다.이에 총독부는 우리나라의 회사령(會社令)을 철폐, 일본
자본의 우리나라 진출을 돕고, 일본인 회사의 설립을 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1926년에는 부전강(赴戰江)의 수원(水源)을 이용한 조선 수력전기 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이듬해에는 이 전력을 이용하여 조선 질소비료 주식회사가 흥남(興南)에 설치되어 공업화의 첫 출발을 하였다. 때마침 일본은 세계공황(世界恐慌)에 휩쓸려 고통을 받아, 그 타개책으로 값싼 임금과 유리한 노동조건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에 보다 큰 힘을 기울여 1931년을 전후한 수년 동안에 우리나라의 광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공업화는 민족자본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공업의 거의 전부는 일본인의 기업이었으며 특히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스미토모(住友)·노구치(野口) 등의 독점자본에 속하였다.1929년 우리나라의 민족자본은 일본의 5%에 지나지 않았고, 1941년 일본 회사의 불입자본(拂?資本)은 17억 5천만원인 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1억 7천만원에 불과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노동자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여 1911년에 불과 5만명이었던 것이 1937년에는 52만, 태평양전쟁 후엔 150
200만으로 증가했고, 가혹한 노동조건은 노동쟁의로 폭발하여 1917년에는 불과 8건에 1,148명이었던 것이 1923년에는 72건에 61,041명으로 증대하였으며, 1929년의 원산(元山) 제네스트 총파업, 이듬해의 서울 제네스트 파업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 이후는 그들의 전시경제(戰時經濟)의 확립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전시경제의 재편성이 시도되어 광공업(鑛工業)·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을 위주로 한 병참적(兵站的) 공업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재편성은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나라의 특수한 입장은 무시되었다.이리하여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46.9%(당시 일본은 0.3%)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아 우리나라의 노동자는 노동력의 재생산마저도 보장받지 못하였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독점적 군수자본(軍需資本)은 식민지에 있어서의 노동조건을 철저히 이용함으로써 전시이윤(戰時利潤)을 획득하였던 것이니 이는 곧 전쟁의 수행에 따른 식량의 궁핍은 공출제도(供出制度)라는 특수한 강제수매(强制收買)의 방법을 취하게 하여 농산물을 비롯한 잡곡·면포(棉布), 심지어는 송지(松脂)·고사리 등에 이르기까지 40여 종에 달하는 농림산물을 바치게 하였다.그 중에도 미곡에 대한 공출은 가장 가혹하여 생산량의 70% 이상을 할당하였고, 그 공출 가격은 생산비의 몇 분의 1도 되지 못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일제는 무장한 기동부대까지 동원하였던 것이다.
문화
편집한일합방은 조국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것으로 이에 대한 민중의 비분과 반발은 문화활동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적극적인 정치행동과 결부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족의 항일행동을 봉쇄하기 위하여 일본은 무력으로 탄압하니 힘 앞에 무력했던 민족의 독립정신은 비정치적인 다른 형식으로 표현되어 광의(廣義)의 개화운동이 각 분야별로 시작되었다.그러나 초기에 있어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그 움직임이 미약했으나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의 표방으로 인해 탄압이 완화되자 문화활동은 매우 활발히 전개됐다.국어에 있어서는 이윤재(李允宰)·김윤경(金允經)·최현배(崔鉉培) 등이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큰사전』의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우리말과 글의 정리와 보급에 이바지하였고, 최남선(崔南善)은 일찍부터 광문회(光文會)를 조직, 고전의 분석·재인식 및 현실의 역사적 재검토를 시도하여 역사와 문학에 있어서 조선주의(朝鮮主義)를 제창, 사라져가는 민족혼의 재생을 호소하였다.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은 역사 연구에 힘을 기울여 잘못 전해
오던 국사의 사실과 정신을 바로잡기에 노력하였고, 이병도(李丙燾) 등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학자들은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조직, 기관지 『진단학보(震檀學報)』를 통해 문화와 역사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신문학운동(新文學運動)은 형식적인 미완성과 내용적인 봉건성을 타파하고 그것이 지닌 근대적 요소에서 서구적인 성격에 부합된 문학을 제창하고 나섰으니, 계몽주의·이상주의·종교주의를 부르짖고 나선 이광수(李光洙)를 개척자로 한 현대문학은 그 후 여러 작가와 시인들에 의하여 분화·발전되었고 이들이 간직한 민족의 비운과 절망·우울 등은 소극적인 상태에서 퇴폐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 등 한 줄기의 문예사조(文藝思潮)를 형성하였으며, 세계를 풍미한 사회주의 사조도 이 땅에 흡수, 극히 짧은 동안이나마 경향파(傾向派) 문학·프로 문학의 일모를 보여 주었고, 한편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 민족적 정열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전환시킨 일련의 민중적 국민학파가 대두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아울러 『소년(少年)』 『청춘(靑春)』 『백조(白鳥)』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서울』 『장미촌(薔薇村)』 『금성(金星)』 등 많은 잡지가 발간되어 이들의 문화활동을 뒷받침하였고, 한편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민간신문이 간행되어 우리의 주장과 문학의 보급 전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이들 신문의 문화적 공로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1940년에 이들이 폐간당하기까지 민족정기의 구현(具現)과 항일투쟁을 위해 위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이 밖에도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는 우수한 화가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일본인에 의한 우리나라 문화의 연구도 활발하여 중추원(中樞院)에서는 구관조사(舊慣調査)와 법전(法典) 수집을 착수하고 세키노(關野貞) 등 일본학자들은 주로 고대의 유물·유적의 발굴 조사를 실시, 고고학에 기여한 바 있으며, 총독부 안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하면서 사료채방(史料採訪)을 하는 등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근대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길을 트게 하였다.
교육
편집이 시대에 있어서의 교육 목표는 철저한 식민지(植民地)국민의 양성이었다. 합방과 동시에 각급 학교 교장은 일본인으로 임명, 교원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여 교육의 군국화(軍國化)를 도모하였고, 1922년에는 보통교육에 있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였으며 고등교육제도를 억제하였다.그러나 문화정치의 표방에 따라 이 땅에도 전문교육의 실시를 허용, 1926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개강을 보게 되고, 사립학교의 설치에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다.일제시대의 학제(學制)는 보통학교(普通學敎:후에 國民學校) 6년, 중등학교(中等學校) 5년, 전문학교 3년(초기와 말기에는 2년),
대학교 4년으로 제정되었으며, 그 밖에 실업학교·사범학교를 두었다.교과(敎科) 내용은 초기에는 국사와 조선어의 과목을 인정하다가 민족말살정책의 수행에 따라 국사와 조선어의 강의를 철폐하였고, 1938년 교육령을 개정, 학교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고 조선 학생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꾀하여 일본말의 상용(常用)과 일본정신의 주입에 노력을 다했다.
종교
편집이때의 종교는 항일운동과 정신순화 및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갖은 방법으로 탄압을 가하여 기독교의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에 대체하여 신사참배(紳士參拜)·궁성요배(宮城遙拜) 등 미신적인 의식을 강요하였으며, 불교에 대하여는 1910년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시행하여 전국의 사찰을 31본산(本山)으로 정비, 여기에 진종(眞宗)·일련종(日蓮宗) 등 일본 불교를 도입시켜, 교단(敎團)의 순수성을 어지럽게 하였다. 특히 1915년부터 우리나라에 건립된
신사(紳士)는 민족혼의 말살과 정신적 세뇌(洗腦)를 강요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에 대한 신앙과 예배를 강요하였다.
항일운동
편집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투쟁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하에서도 즐기차게 게속되어 36년 간을 통하여 한때도 쉬지 않고 일관되었다. 이같이 면면히 계속된 항일 독립운동은 그 특징에 따라 2기(期)로 구별된다.그 제1기는 보호조약 체결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이며, 제2기는 3·1운동을 전환기로 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의 투쟁이다. 제1기에 있어서의 특징은 모든 민족운동이 민족감정의 자연적인 폭발로서 지도층이 그 중심이 되어 있고, 제2기의 민족운동에 이르러서는 청년·학생·근로자·지식층을 토대로 한 조직적이고 강인한 저항이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합방을 전후한 의병운동은 한때 일제의 무단정책으로 표면화되지 못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고 함께 대두한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은 우리 민족의 분노와 설움을 폭발시켜, 마침내 3·1운동의 거족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하였으며 비록 그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우리 민족의 강인한 기백과 슬기로운 독립정신이 전세계에 알려졌다.한편 이는 일제로 하여금 자기반성의 기회를 주어 문화정치의 전환을 보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주권회복에 나섰고, 대동단(大同團)·의열단(義烈團) 등이 생겨 항일부장투쟁을 전개하였다.또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 등은 만주를 무대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각처에서 의·열사(義烈士)가 눈부신 활동을 하였으니 강우규(姜宇奎)·김지섭(金址燮)·나석주(羅錫疇)·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김익상(金益相)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사회운동과 결부된 조직적인 항쟁을 계속하여 신간회(新幹會)·근우회(槿友會)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의 연합체가 결성되어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을 지도하였고, 노동자는 파업·쟁의 등으로 활발한 저항을 계속하였다.이보다 앞서 1926년에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 6·10만세사건이 발생하여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민족의 얼과 독립쟁취(獨立爭取)의 용기를 다시 한번 선양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는 쟁의와 사상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그 결과로 신간회는 해체되고 사상운동은 지하에 숨어 들어 겨우 명맥(命脈)을 유지하였으나 그 동안에는 해외에서는 꾸준히 국권회복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 1945년 2월에는 임시정부에서 일본과 독일에 선전을 포고, 앞으로 맞이할 광복을 위해 싸웠다.
한일합병
편집韓日合倂
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일컫는 말, 경술국치·국권피탈·일제강점·일제병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1903년 12월, 일제는 영국·미국의 지지하에 한국의 식민지화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그리하여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이다. 이어 같은 해 8월 일제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나아가 일제는 한국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을 벌인 결과,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결과 일제는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을사조약의 늑결로 말미암아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당했으며, 영국·청·미국·독일 등 주한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고자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그러나 헤이그 특사파견 사실을 안 일제는 7월 20일, 통감 이토(伊藤博文)로 하여금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대신 무능한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잇따라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더욱더 탄압하였다.일제의 국권침탈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다.한편,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909년 12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하여 한민족의 울분을 대신풀어주기도 하였다.그 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막바지 준비작업으로 헌병경찰제의 강화와 일반경찰제의 정비를 서둘렀다.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으니,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양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한편,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한국농업의 지배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많은 토지를 탈취하였으니 대다수의 한국농민이 일제수탈의 대상으로 화하고 말았다.또, 1910년 12월 내려진 ‘회사령(會社令)’은 한국인에 의한 기업의 설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문화·교육면에 있어서도 한국고유의 전통은 하나하나 파괴되어 갔으며, 한국민이 주체가 된 교육기관의 존치는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이 내려짐으로써 거의 불가능해졌고, 언론·출판의 취체는 더욱 극심해졌다.또한, 일어 사용이 강요되고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문화 및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종
편집高宗(1852
1919)
조선 제26대 왕(재위:1864
1906)휘는 형, 초휘(初諱)는 재황(載晃), 자는 성림(聖臨), 초자는 명부(明夫), 호는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입궐, 즉위했다. 당시 왕의 나이 12세였으므로 조대비가 섭정의 이름을 띠고, 생부인 흥선군이 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사를 결정했다.대원군의 집정 10년 후, 친정(親政)케 되었으나, 왕이 민씨의 일족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대원군 때의 보수 및 쇄국정책을 배제(排除), 일본을 비롯한 구미 열강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정에 있어서의 개화당과 수구당과의 알력을 격하게 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 제반 문물의 시찰, 군제의 개혁, 일본식 군사 훈련 등을 시행하여 결국 임오군란(壬午軍亂:1882)·갑신정변(甲申政變) 등 양당의 격쟁을 야기시켰다.1894년 동학란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유발, 일본측의 승리 후는 차츰 일본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 종래의 청국의 군례를 벗어나 독립국으로 행사하는 듯했으나, 이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억제하에 비롯된 것이다. 한때 일본 세력의 미약함을 알아 일본 대신 러시아와 결탁한 민씨 일파를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구축하고 1897년(고종 34) 8월에는 국호를 대한(大韓),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으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후, 일본의 강압을 받게 되었다.1905년 제2 한일 협정을 반대하고,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에게 신임장을 주어 제2 한일 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밀파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결국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퇴위했다. 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 기거하다가 일본의 간계로 독살되었다. 왕의 재위시는 조선 말의 복잡 다난한 시대로서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국운과 명을 같이했다.
의친왕
편집義親王 (1877
1955). 조선 고종의 셋째 아들. 휘는 강(堈). 순종의 이복 동생. 서출(庶出)로서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피봉되고, 1894년 초빙을 받아 특명 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0년(광무 4)에는 의친왕(義親王)에 피봉, 1920년에는 항일 단체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김가진(金嘉鎭) 등과 의논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그 요지는 “일본이 매국 간신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내 부왕(父王)과 모후(母后)를 살해한 것이오, 결코 부왕께서 병합을 긍허(肯許)하신 게 아니다. 나는 한국인인즉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되기를 불원하는 바이니 임시정부가 설립된 당지에 가서 광복을 위해 만(萬)의 일(一)이라도 보조하려 한다. 이 결심은 오직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함과 조국의 독립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함에서이다”와 같다.이 해 11월 의친왕은 밤중을 이용하여 인사동(仁寺洞) 궁궐을 빠져 나와 세검정(洗劍亭)에서 정남용(鄭南勇)과 상의한 끝에 상복 차림을 하고, 정남용을 동반하여 상하이를 향해 출발, 3등 차편으로 만주 안둥 현(安東縣)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울에 송환되었다. 그 뒤 일본 정부의 강청(强請)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도일(渡日)하지 않아 배일정신을 지켰다.
을사조약
편집乙巳條約
1905년(광무 9)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체결한 조약. 일명 제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한일보호조약(韓日保護條約).
배경
편집청나라·러시아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진출을 꾀하여 오던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우리나라에 대한 발판을 굳게 하고 마침내 1904년(광무 8) 2월 러일전쟁(露日戰爭)을 일으켜 러시아와 마지막 대결을 시도하였다. 한편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고문정치(顧問政治)를 행하여 침략의 준비를 갖추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끝내자 우리나라 정복의 야욕을 한층 굳게 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는 한일합방의 직접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며 사실상 우리나라의 병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립과정
편집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러시아와의 강화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시작하였는데 이에 앞서 일본은 영국과 맺은 동맹조약에 수정을 가하여 영국은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일본의 자유행동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어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정치·경제·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의 박탈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1905년 10월 포츠머스회담의 일본대표 고무라(小村壽太郞),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 총리대신 가쓰라(住太郞) 등은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오를 황제 위문의 특파대사(特派大使)라는 구실로 우리나라에 파견, 한일협약안(案)을 정부에 제출토록 하였다. 이달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오는 그 다음날 황제를 배알(拜謁)하고 일본 천황(天皇)의 친서(親書)를 봉정(奉呈),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韓日協約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에는 반대가 심하였다. 17일에는 일본 공사가 우리나라 정부의 전 각료(閣僚)를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의 요소(要所)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새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시위(示威)하였다. 이날 이토오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駐韓日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 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궁중의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지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 공사는 이토오를 불러왔다.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오는 즉시 각료의 한사람 한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參政大臣:首相)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度支部) 대신 민영기(閔永綺)가 반대하였을 따름이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오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이를 찬성하였다.격분한 한규설은 황제에게 달려가 이 회의의 결정을 거부(拒否)하도록 아뢰려다가 도중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오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당시 내각의 인물은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 내부대신 이지용(李趾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탁지부(度支部)대신 민영기(閔泳綺),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 등이었는데 그 중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은 조약체결에 찬성한 자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결과
편집조약의 내용은 외교권의 접수,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인데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대외교섭은 끊어지고 통감정치가 실시되었다. 한편 이 사실이 장지연(張志淵)에 의하여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보도되자 전 국민은 의분에 불타 조약 반대 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법부주사(法部主事) 송병찬(宋秉瓚), 전참정(前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상(李相尙),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병정(丙丁) 전봉학(全奉學)·윤두병(尹斗炳)·송병선(宋秉璿) 등의 중신(重臣) 들과 지사(志士)들이 자결하고, 충청도에서는 전참판(前參判) 민종식(閔宗植), 전라도에서는 전참찬(前參贊) 최익현(崔益鉉),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 강원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 등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테러 행위도 일어났다.이 조약으로 영·미·청·독(獨)·불(佛)·백(白)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을 거두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1906년(광무 10)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생겨 초대 통감으로 이토오가 취임하였다. 이 통감부는 일본에 필요로 하는 사항을 직접 우리나라 정부에 명령·집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외교 뿐 아니라 내정(內政)도 간섭케 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통감부
편집統監府
1905년 12월 일본은 을사조약에 의하여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인천·부산·마산·원산·군산·목포·평양 등에 이사청(理事廳)을 두었다. 통감으로는 하세가와(長谷好道)가 임시 통감대리로 있다가 이듬해 이토오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 통감의 권한은 실제에 있어서는 모든 내정간섭, 관리통활, 병력 사용권마저 쥐고 있는 사실상 우리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가졌다. 통감은 일본 천황에게 직속된 기구로서 이토오·소네·데라우치 등이 통감으로서 전제적인 정치를 했다.
일진회
편집一進會
대한제국 말의 친일 정당. 일찍이 민씨(閔氏) 일파의 박해를 받아 10여 년 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宋秉畯)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 일본군의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더니, 1904년(광무 8) 8월 18일 구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잔당인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住)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명칭을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했다.이 회는 발족과 동시에 ① 왕실(王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회원은 모두 단발(斷髮)과 양복 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일진회의 이와 같은 활동은 서울을 무대로 했을 뿐 지방조직이 없어 세력을 확대치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동학당(東學黨)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이용구(李容九) 등이 조직한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양 단체의 합동을 추진한 결과, 이해 12월 6일 진보회를 통합하기로 결정을 보고, 이용구가 13도 총회장, 송병준이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취임했다.1905년(광무 9) 11월 총회에서 다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 윤시병, 지방총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했다. 활동은 본궤도에 올라 일본군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자금원조를 받는 한편 일본인 고문으로 모치쓰키(望月龍太郞)를 채용하여 송병준이 본래 품었던 야심대로 적극적 친일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이때부터 일진회는 항시 우리 민족의 애국운동에 대항하여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에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이해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에 대해서도 유독 매국적 지지선언을 했으며, 기관지 『국민신보(國民新報)』를 통해 온갖 친일적 망발을 퍼뜨렸다.또한 송병준은 이완용(李完用) 내각과 결탁하여 자신이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종의 양위(讓位)를 강요했다.1907년(융희 1) 7월 마침내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당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 회원들을 토살했으며 국민신보사도 습격을 당했으나, 1909년 10월 이토(伊藤博文)가 하얼빈에서 암살당한 후부터는 더욱 매국행위에 열을 띠어 한일합방안(韓日合邦案)을 융희황제(隆熙皇帝)께 상주(上奏)하고 각하되면 다시 올리면서 광분하였다.이에 당시 전민족적인 감정을 대변하여 중추원장 김윤식(金允植) 등이 송병준·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일제의 비호로 뜻을 못 이뤘고, 1910년 8월 22일 망국의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니 이해 9월 26일 일진회는 7년여에 걸친 매국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하였다.
헌정연구회
편집憲政硏究會
광무 9년(1905)에 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윤효정(尹孝定) 등이 만든 정치적 계몽단체. 민중을 계몽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광무 10년(1906)에 장지연 등에 의하여 ‘대한자강회’로 발전되었다.
한규설
편집韓圭卨 (1848
1930)
한말의 대신. 자는 순우(舜佑), 본관은 청주(淸州).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무 9년(1905)에는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내각을 조직했다. 이 해 을사조약의 체결에 있어 일본 전권대사인 이토가 개별적으로 각 대신에게 가부(可否)를 묻자 끝까지 반대하다가 회의장에서 일본병에게 끌려나가기도 했으며, 조약 체결 후 파직되었다. 후에 다시 중추원 고문·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했고, 국권강탈 후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거절했다.
민영환
편집閔泳煥 (1861
1905)
대한제국의 정치가·순국지사.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고,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겸호(謙鎬)의 아들. 1878년(고종 15)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임오군란에 피살되자 일시 퇴임했다. 다시 도승지·이조 참판·기기국총판(己祇國總辦) 등을 비롯하여 병조 판서·형조 판서(1893)·한성부 판윤·독판 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등의 요직에 있었다. 그 뒤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의 특명 전권대사로 각국을 순방하면서 서양 문화에 감명을 받고 개화사상을 실천하려고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 등 여러 제도의 개혁을 건의했으나 군제(軍制)개혁만 채택되고 원수부(元帥部)가 설치되어 육군을 통합하게 되었다.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한때는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면되기도 했으나 뒤에 다시 기용되어 참정 대신·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표훈원(表勳院) 총재·헌병사령관을 역임, 일본의 내정 간섭을 성토, 친일파 대신들과 대립하여 한직(閑職)인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을 인솔,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고,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소청(疏廳)을 열고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조병세
편집趙秉世 (1827
1905)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 철종 10년(185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대사성(大司成)·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했다. 갑오경장 후 은퇴하였다가 건양 1년(1896) 폐정 개혁을 위해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백관을 인솔하여 수일간 궁궐에 연좌하여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가 연금당했고, 석방되자 대한문(大韓門)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표훈원(表勳院)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을사오적
편집乙巳五賊
을사조약 체결 당시 조약에 찬성한 5대신.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의 다섯 사람을 가리킨다.
이완용
편집李完用 (1858
1926)
대한제국 때의 매국노.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본관은 우봉(牛峰)·판충추 부사(判中樞府事) 이호준(鎬俊)의 아들. 1882년(고종 19) 문가에 급제, 대교수찬(待敎修撰)을 지내고, 뒤에 주차 미국 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 도미(渡美)했다. 귀국하여 한때 승지(承旨)·이의(吏議)를 지내더니 다시 주미 대리 공사로서 2년을 지내고 돌아왔다. 그 뒤 외무협판(外務協辦)·학부대신 등을 지내고 18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친러내각(親露內閣)의 외부대신이 되었다. 1901년(광무 5)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1905년(광무 9) 학부대신이 되어 이 해 11월에 입국한 일본 특파 대사 이토(伊藤博文)가 보호조약 체결을 제의하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어 이토의 무력적 협박을 배경으로 외부 박제순(朴齊純) ·내부 이지용(李址鎔)·군부 이근택(李根澤)·농상공부 권중현(權重顯) 등 대신들과 함께 왕을 위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괴수가 되었다. 그 뒤 의정대신서리(議政大臣署理)에 외부대신서리를 겸직, 1907년(융희 1)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이 되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통감(統監)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 대신에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했다.이해 6월 헤이그밀사 사건(海牙密使事件)이 일어나자 일본으로부터 급파된 외무대신 하야시(林董) 및 통감 이토, 일진회장(一進會長)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면서 양위(讓位)를 강요, 마침내 7월에 왕위를 순종에게 물리게 했다. 이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항일 의거가 일어나고 서울의 의거 민중은 이완용의 집을 불질러 전소시켰다.1909년(융희 3) 8월 22일 온 겨레의 지탄을 무릅쓰고 정부 전권 위원의 자격으로 데라우치(寺內正毅) 통감과 일본의 국권침탈에 앞장서서 나라와 겨레를 완전히 외적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그 공으로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伯爵)을 받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취임, 1919년 3·1운동 때에도 동포를 공갈하는 경고문을 3회나 발표, 이듬해에 후작(侯爵)을 받는 등 끝까지 매국 매족, 일신(一身) 영달의 죄업(罪業)을 다하고 죽었다.
일본의 금융지배
편집日本-金融支配
광무 8년(1904) 한·일 협정서가 성립되고 재정고문으로 메가다(目賀田種太郞)가 오더니 그는 한국의 재정에 관해 광범한 권한을 갖고 화폐의 정리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그는 당시에 유통되고 있던 엽전과 백동화(白銅貨) 대신 신화폐를 만들어 이를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 상인들은 신화폐를 신용하지 않고 토지나 가옥 등에 투자하여 버렸으며, 일본인들은 신화폐의 가치가 등귀함에 따라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화폐의 정리로 일본의 경제적 진출은 더욱 쉬워졌다. 당시 한국에는 제일은행을 위시해서 제18은행 등이 있어 이들이 한국의 금융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특히 제일은행은 사실상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빌렸다. 이렇게 해서 쌓인 국채의 부담은 정부로 하여금 더욱 일본에 의존하게 하였다.
국채보상운동
편집國債報償運動
융희 1년(1907) 경향의 관리 및 민중들이 일본에 대한 국채(國債)를 갚자고 일으킨 운동. 한·일 협정서의 체결 이후 일본에 대한 구한국의 외채(外債)가 너무나 많아서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처음 발기한 사람은 대구의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이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번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보』 『만세보』
등 여러 언론기관은 의금(義金)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금연운동이 일어났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이에 호응하였다. 통감부는 이 운동이 배일운동(排日運動)이라 하여 탄압 수단을 쓰게 되었고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梁起鐸)을 보상금 횡령이란 누명을 씌워 구속하기도 했다.
헤이그 밀사사건
편집-密使事件
광무 11년(1907) 이준·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이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출석, 을사조약의 체결이 황제의 뜻이 아니고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려 한 사건.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당하자 이에 한국은 국제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되었다. 마침 광무 11년(1907)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인에게 신임장을 주어서 회의에 참석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케 하였다. 그러나 의장은 한국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밀사들은 고종의 조인이 없는 조약은 무효라고 하였으나 끝내 참석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밀사들은 신문을 통해서 또는 ‘국제협회’에서의 실정 폭로로 열국의 여론을 일으키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대표 중의 이준은 울분을 못 이겨 타국에서 객사하였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종을 양위케 하고, 순종을 황제에 즉위시켰다.
융희
편집隆熙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한말의 마지막 왕 순종이 즉위한 해인 1907년부터 1910년 국권강탈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준
편집李儁 (1858
1907)
한말의 열사. 호는 일성(一醒), 함경도 북청(北靑)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가 되었으며 건양 1년(1896)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평의장(評議長)이 되었다.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족 주권 회복의 길을 찾던 중 광무 11년(1907)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할 자격마저 얻지 못한 채 객지에서 순사(殉死)하고 말았다.
이상설
편집李相卨 (1871
1917)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 호는 부재, 본관은 경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가두에서 대중에게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을사조약이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10년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한·일 신협약
편집韓日新協約
융희 1년(1907)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예비조처로 체결한 조약. 을사조약 이후 한국에 대해 내정 간섭을 해오던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양위시킴과 동시에 한·일 신협약을 맺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즉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법령의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 처분에 있어서 통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고 고등관리의 임면 및 외국인 초빙에도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또한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해야 했다. 이리하여 소위 차관 정치가 실시되었다.
군대해산
편집軍隊解散
융희 1년(1907) 8월 한국 군대를 해산한 일. 통감인 이토(伊藤博文)는 한·일 신협약 체결 후, 동년 7월 31일에는 융희 황제로 하여금 군대 해산에 관한 칙허(勅許)를 내리게 하고 8월 1일을 기하여 해산식을 단행할 계획을 비밀리에 짰다. 당시 서울과 지방에는 시위보병(侍衛步兵)·시위기병(侍衛騎兵)·포병(砲兵)·치중병(輜重兵)·진위보병(鎭衛步兵) 등을 합하여 겨우 9천명의 군대가 있었다. 이 적은 군대나마 일본을 제어하는 존재였다. 해산의 구실은 재정 곤란과 징병제도가 실시될 때까지의 잠정적 조처라는 것이었다. 이에 군대가 해산되었고 한국은 방위력 없는 허수아비 나라가 되고 말았다.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보병 제1대대장 박성환(朴性煥)이 분하여 자살하니 제1대대의 장병이 봉기하였고, 제2대대가 이에 호응하여 일본 군대와 시가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후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무력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간도문제
편집間島問題
만주에 있는 간도지방의 영토귀속권(領土歸屬權)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서로 분쟁한 사건. 간도는 원래 읍루(?婁)·옥저(沃沮)의 옛터이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로서 발해 멸망 후 여진족이 거주,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윤관(尹瓘)·김종서(金宗瑞) 등이 이를 정벌한 바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건국한 후 북방의 경계선이 분명치 못하여 오랫동안 한광지대(閑曠地帶)로 존속해 오던 중 점차 조선의 유민(流民)이 입주하여 미개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자, 청나라는 처음 간도를 금봉지(禁封地)로 설정하고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였으나 산동지방의 유민이 잠입(潛入), 조선 유민과 대립하여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1712년(숙종 38) 참판(參判) 박권(朴權),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는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과 경계선을 결정, 목극등과 조선 통관(通官) 김경문(金慶門)이 실지를 답사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그 후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는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정식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 주민을 청나라 사람으로 취급하겠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간도의 유민쇄환(流民刷還) 문제를 주장하는 한편, 1883년(고종 20) 5월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에게 정계비를 조사케 하고,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을 회령(會寧)에 파견, 청나라의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와 담판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정계비에 적혀 있는 ‘토문(土門)’을 두만강의 동어이자(同語異字)라 주장, 조선측에 실제적인 증거를 들어 간도는 마땅히 토문강 이남, 즉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회담은 3차에 걸쳐 개최되었으나 청나라측은 자기의 불리함을 알고 마침내 이를 결렬시켰으므로 아무런 성안(成案)을 보지 못하였다.1900년(광무 4)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이를 한성 주재 청국공사(淸國公使)에게 통고한 후 포병(砲兵)을 양성하고 조세를 받아 간도지방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양국간에는 다시 분규가 거듭되다가 러일전쟁으로 중단, 러시아가 패전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간도문제는 일본·청나라간의 외교문제로 바뀌었다. 일본은 처음에 통감부(統監府)의 출장소를 용정촌(龍井村)에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 우리나라의 영토로서 인정을 하였으나, 1909년(융희 3) 남만철도(南滿鐵道)의 안봉선(安奉線) 개축문제로 청나라와 대립,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은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양보하였다.
간도협약
편집間島協約
1909년(융희 3) 간도의 귀속(歸屬) 문제를 협정한 청나라와 일본간의 협약. 전문 7개조. 간도는 고종 이후 영토권 문제로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많은 분규를 거듭하여 오던 중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다시 만주에 철도를 놓기 위하여 청나라와 교섭, 동년 9월 8일 협약을 체결하고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그 내용은 두만강을 한·청(韓·淸)의 국경으로 하여 간도를 청나라에 이관하는 한편 간도에 일본의 영사관을 두고 한국사람의 거주를 보장하며 일본은 길회선(吉會線:延吉
會寧)간의 부설을 인정받는 것이다.
박성환
편집朴性煥
한말의 의사(義士). 융희 1년(1907) 8월 1일 구(舊)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당시 시위보병(侍衛步兵)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그는 민족의 앞날을 통탄하고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병들은 모두 비분강개하여 병영을 접수하러 온 일본 병사와 접전하여 서로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의병운동
편집義兵運動
대한제국 때의 의병은 보수적인 사상가들에 의한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이단배척(異端排斥)의 이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대의 의병활동은 대개 3기로 나누어지는데 그 성분은 주로 유학자·구식군인·관리·일반민중들이었다.제1기는 19세기 중엽, 이항로(李恒老)와 그 문하생(門下生)들의 양왜배척(洋倭排斥) 정신에서 유래되며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의 살해와 단발령(斷髮令)의 실시로 인한 민중의 격분을 대표하는 의병의 출현이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인물은 유인석(柳麟錫)·이인영(李寅榮)·이강년(李康秊)·허위(許蔿)·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홍사구(洪思九) 등으로 민중을 규합, 배외적(排外的)인 사상을 고취하고 유교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받들어 조정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 일본과 그 도당(徒黨)의 축출을 외치며 일어났으나 충주(忠州)·제천(堤川)에서 패전하자 자연히 해산되었다.제2기는 1905년(광무 9)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에 일어난 의병운동이다. 이때의 지도자는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錫)·이은찬(李殷贊)·이재구(李載九) 등이며 그들은 각지에서 애국정신을 고취,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산발적(散發的)인 전투를 감행하였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적군을 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제3기는 1907년(융희 1) 고종황제의 양위(讓位)와 군대해산 등에 자극되어 일어난 의병활동으로 이때는 어느 정도의 조직과 무기를 갖추고 대규모적인 항전을 감행하였다. 즉 이은찬·이재구는 관동군(關東軍) 6천명, 이강년은 호서군(湖西軍) 5백명, 허위는 경기군 2천명, 권중식(權重植)은 해서군(海西軍) 5백명, 방이관(方仁寬)은 관서군(關西軍) 1백명, 정봉준(鄭鳳俊)은 관북군 1백명, 문태수(文泰洙)는 호남군 1백명을 각각 규합, 동년 12월에는 경기도 양주(楊州)를 근거로 하여 대집단을 결성하였다.이리하여 전군(全軍)을 24진(陣)으로 조직,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軍師長)으로 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한편 각국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어 이 행동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니 각국은 이를 이해하고 국제공법(國際公法)에 의거, 교전단체(交戰團體)로 인정하고 지지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훈련의 부족과 무기의 부족으로 인하여 동문 밖에서 패전하고 그 후로는 각지에서 산발적인 유격전술로 일본군대를 괴롭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 같은 의병의 항쟁은 당시 일본측에도 큰 영향을 끼쳐 의병 진압을 직접 지휘하던 일본 경찰부장 이마무라도 '의병단체수는 전국에 약 6백에 달하고 1단(團)의 병력도 3~6천명 정도였다. 이를 완전히 진압할 때까지는 병오년(丙午年:1906)부터 5개년이나 걸렸으며, 그 지도자들은 학문·덕망·인격에 있어서 당당한 인물이었다. 그 중 민종식·허위·최익현·유인석·이강년·박병찬(朴炳讚)·전종규(田鍾圭)·이인영·정철화(鄭哲和)·이홍남(李弘南)·기삼연(奇參衍)·민긍호(閔肯鎬)·차도선(車道先) 등은 유교의 교리를 터득한 도의심의 소유자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찬양하였다. 대한제국의 의병활동은 그 정신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었으며, 민족의 정기를 높인 데 있어서 우리나라 근대사상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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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편집崔益鉉 (1833
1906)
조선의 정치가로서 배일파(排日派),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慶州). 경기도 출생. 화서(華西:李恒老)의 고제(高弟). 유림(儒林)의 명사로 문도(門徒) 수천여 명을 헤아렸다. 1855년(철종 6)에 문과에 급제, 1868년(고종 5)에 장령(掌令)이 되었고 1873년 호조 판서로 상소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귀하고 서원(書院)을 폐지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 정책을 반대하여 제주도에 귀양갔다.후에 한일 통상을 반대하여 정배되었다가 특사(特使)를 받아 1894년 공조 판서로 임명되고 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 등을 배명받았으나 사퇴하고,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여 다음 해 6월 제자 임병찬(林炳瓚)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 중 체포되어 임병찬·유준근(柳濬根) 등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익현은 임병찬 등의 권고도 듣지 않고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는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 하고 단식을 하다 사망했다. 시체가 본국에 반환될 때 수많은 동포가 부산 포구에 나와 통곡하며 맞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민긍호
편집閔肯鎬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신.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정교(正校)로서 융희 1년(1907) 의병을 일으켜 제천(堤川)의 의병대장 이강년과 합세, 충주를 공격하여 왜병을 많이 사살했다. 이인영이 양주(楊州)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 관동군 창의대장(倡義大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치악산(雉嶽山) 강림촌(講林村)에서 전사했다.
유명규
편집劉明奎
한말의 의병장. 융희 1년(1907) 구한국 군인이 해산되자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지휘하고 일본군을 격파, 황해도에 가서 의병과 합류하여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허위
편집許蔿 (1885
1907)
한말의 의병장. 경북 선산(善山) 출신. 광무 1년(1907) 이은찬(李殷瓚)·이기하(李起夏)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金山)·성주(星州) 등지에서 싸웠다.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었으며, 융희 1년(1907) 이인영 등과 원주에서 전국 의병 연합부대를 조직하여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려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강년
편집李康年 (1861
1908)
한말의 의병장. 자는 낙인(樂仁), 호는 운강(雲崗), 경상도 문경(聞慶) 출신. 유인석의 문인(門人). 고종 17년(188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동학혁명 때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하여 왜병·탐관오리를 무찔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융희 1년(1907)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전국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 가담했고, 그 후 인제(麟蹄)·강릉(江陵) 등지에서 승리했으나 청풍(淸風)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이인영
편집李麟榮 (1867
1909)
대한제국의 의병장.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문경(聞慶)에 이사한 후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과 협력하여 1885년(고종 22) 의병을 일으키고, 여러 차례 왜적과 싸우다가 1896년(건양 1)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광무 9)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강원도 의병장 이은찬(李殷贊)·이재구(李載求) 등이 찾아와 의병대장으로 추대하니 아버지의 중병에도 구애하지 않고 출전했다.1907년(융희 1) 양주(楊州)에 이르러 각지 의병을 연합하여 총대장이 되고 수만의 병력을 24진으로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다가 동대문 밖에서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별세가 전해오니 뒷일을 군사장(軍事長) 허위(許蔿)에게 맡기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적이 뒤를 쫓으니 늙은 어머니와 두 아이를
데리고 황간(黃澗)에 숨었으나 결국 잡혀 서울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複章)을 받았다.
남상덕
편집南相悳 (1881
1907)
항일의병. 조선시대 말 시위대참위(侍衛隊參尉)로 있다가, 1907년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대문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지휘관 가지와라(梶原)를 비롯한 3백여 명을 사살하고 전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신돌석
편집申乭石 (1878
1908)
대한제국의 의병장. 경북 영덕 출생. 을사조약(1905) 이듬해 1906년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인을 죽이는 등 당시 영남지방에서 그 세력이 자못 컸다. 그때 일본 경찰이 신돌석의 체포에 현상금을 붙인 것을 알고 그 돈에 탐을 낸 고종사촌인 김자성(金子聖)이 그를 집에 초대하여 독한 술을 먹여 도끼로 살해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유인석
편집柳麟錫 (1842
1915)
한말의 학자·의병장.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 체결 때 문하의 유생을 이끌고 상소하여 반대했으며, 동왕 31년(1894)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조직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제천 등지에서 싸웠으나 관군에 패전하여 단양(丹陽)으로 퇴각했다. 그 뒤 만주에 망명했으며, 융희 3년(1909)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이상설(李相卨)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쳐들어오려고 기도했으나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국권강탈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펑톈성(奉天省)에서 병사했다. 한말의 거유(巨儒)인 이항로(李恒老)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황현
편집黃玹 (1855
1910)
한말의 시인·우국지사. 호는 매천(梅泉),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 전라도 광양(光陽) 출신.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인근 선비들을 경탄케 했고, 고종 22년(1885) 생원과에 장원한 후 당시 문명(文名)이 높던 이건창(李建昌)·강위(姜瑋)·정만조(鄭萬朝)·김택영(金澤榮) 등과 친교가 있었다.시국이 혼란하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관직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시를 짓다가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택영과 함께 중국에 망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권강탈로 나라가 망하자, 유시(遺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순절(殉節)하였다. 저서로는 『매천집(梅泉集)』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있다.
안중근
편집安重根 (1879
1910)
조선의 의사(義士). 아명은 응칠(應七), 교명(敎名)은 도마.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14세 때 신천(信川)에 와 있던 프랑스 신부 밑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기질이 활달하여 산으로 사냥을 다니면서 총쏘기를 좋아했고,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 맞혔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1907년 7월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간도를 거쳐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1909년(융희 3) 이범윤(李範允)·최재형(草在亨)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좌익장군(左翼將軍)이 되어 두만강을 건너 경흥(慶興)에 들어와 일본군 50명을 사살, 회령(會寧)까지 진격하여 적과 교전했다. 이 해 10월 우리나라 침략의 주도적 인물 이토(伊藤博文)가 러시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Kokovtsev)와 만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되었다. 안중근은 이 기회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도착, 일본 사람으로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10보 이내의 거리까지 접근, 권총으로 이토를 쏘아 죽인 후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川上俊彦), 궁내 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를 중상케 했다.안중근은 거사의 성공을 기뻐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연히 포박을 당하였다. 1910년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변하다가 다음 해 3월 26일 상오 10시 사형을 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전명운
편집全明雲 (1884
1947)
한말의 의사(義士). 평안도 출신. 빈한한 농가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갔다가 광무 9년(1905) 하와이에 이민했다. 이듬해 미국에 가서 철도노무자 등을 지내면서 고학하였다.융희 2년(1908) 한국 정부의 외부 고문인 스티븐스(Stevens)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자 격분하여 살해를 결심했다. 마침 스티븐스가 일본 영사와 오클랜드역에 하차하는 기회를 이용하려 했는데, 별도로 스티븐스의 살해를 계획한 장인환이 출현하여 함께 거사했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
장인환
편집張仁煥 (1877
1930)
한말의 의사(義士). 평양 출신. 어려서 기독교인이 되고 광무 10년(1906) 미국에 가서 철도노무자 등으로 일하면서 ‘대동보국회(大同報國會)’ 회원이 되었다. 융희 2년(1908)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와 오클랜드역에서 하차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저격하려 했으나 한국인 청년 전명운이 먼저 쇠뭉치로 구타하고 격투하는 것을 보고 권총으로 쏘아 이틀 후에 죽게 했다. 그 후 출옥하여 1927년 귀국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병고(病苦)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