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근대의 서양화
근대 서양화의 전개
편집近代西洋畵-展開
한국 최초의 서양 화가이던 고희동이 귀국하고 그 뒤를 이어 서양화를 전공한 도일(渡日) 유학생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한국의 신미술은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고희동을 주축으로 서화협회가 결성되었으나 이 초기의 서화협회는 서양화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한국의 서양화는 1919년 이후부터 차차 한국적인 풍토에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1920년 7월 20일 동아일보 지상에 김유방(金惟邦)이 <서양화의 계통 및 사명>이라는 미술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화론(畵論)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1921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이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1922년부터 비록 일본 기관에 의해서이기는 하였지만 선전(鮮展)이 열려 종합적인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미술 연구기관으로 토월미술연구회, 고려미술원 등이 발족되어 후진양성과 동인전 개최의 길을 터 놓았다. 1925년에는 한국인으로 처음 이종우가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가 그곳 슈하이에프 연구소에서 유화를 전공하는 한편 1927년 살롱 도톤느전에 출품, 입선하는 등 최초의 국제전 참가를 기록하고 있다. 계속하여 장발(張勃), 나혜석, 백남순(白南舜), 임용련(任用璉), 배운성(裵雲成) 등이 미국을 위시하여 독일·프랑스 등지에 유학함으로써 일본을 통하여 우회하여 들어오던 서양화를 직접 수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을 전후하여 독미회(讀美會;미술학교 동창 그룹), 녹향회(綠鄕會), 목일회, 소성회미술연구소, 백우회, 신미술가협회(新美術家協會) 등 여러 미술단체가 결성되면서 미술활동이 활발해졌다. 1930년부터 1940년에 걸쳐 주로 일본을 통하여 받아들인 서구(西歐)의 회화 사조는 주로 구본웅(具本雄), 이중섭(李仲燮) 등을 중심으로 한 야수파적(野獸派的) 경향과 김환기(金煥基), 유영국(劉永國) 등을 중심으로 하는 추상파적인 경향의 2대 조류(潮流)였으며, 1932년대 조우식(趙宇植)은 초현실파((超現實派) 미술을 주로 글을 통해 소개하였으나 작품으로는 정착(定着)하지 못했다. 일본에 있던 한국인 화가들은 선전(鮮展)을 무시하고 주로 일본의 독립전(獨立展에), 이과전(二科展), 자유전(自由展), 신제작파전(新制作派展), 춘양회전(春陽會展) 및 국내의 서화협회전 등에 출품하여 작가적인 역량을 기르기도 했다. 2차대전 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차차 한국인을 그들의 전열이니 결전미술(決戰美術)이니 하여 전시체제로 완전히 전환시키면서 1940년 이후에는 일체의 정상적인 미술운동이 중지되었다.
서화협회
편집書畵協會
1918년 5월 19일 창설. 근대 초기의 한국인들만으로 이뤄진 순수한 미술 단체. 고희동이 주동이 되어 서화가 다수를 망라했다. 일제(日帝)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선전(鮮展)에 대항하여 그 저류(底流)에 민족적인 감정을 내재(內在)시키고 미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시적이나마 일부 회원이 선전에도 참가한 일이 있다. 창립회원 중 고희동만이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였고 나머지는 모두 전통적인 서화가였다. 따라서 초기의 서화협회는 서화가 우위(優位)를 차지했으나 후기로 가면서 서양화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근대미술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매년 1회의 협회전 및 회보(會報)의 발간을 보았으며, 1923년에는 서화학원을 동숭동(東崇洞) 회관에 설치, 동년 11월 10일에 개강하여 동양화·서예·서양화 등의 과목을 두고 가르쳤다.
◇ 창립회원: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정학수(丁學秀), 김응원(金應元), 강필주(姜弼周), 나수연(羅壽淵), 김규진(金圭鎭), 이도영(李道榮), 고희동(高羲東), 이상 화가. 정대유(丁大有), 오세창(吳世昌), 강진희(姜璡熙), 김돈희(金敦熙)- 이상 서예가.
서화협회전·서화협회 보
편집書畵協會展·書畵協會報 서화협회의 동인전 및 동인지. 제1회 서화협회전은 1921년 4월 1일-4월3일 사이에 중앙학교(中央學校)에서 열렸으며 이 제1회전에서의 서양화 출품은 고희동, 나혜석 등이 각각 2점씩 도합 4점뿐이었다. 제2회전부터는 주로 보성(普成), 휘문(徽文) 두 학교를 빌려 회장으로 사용하며 매년 열었다. <서화협회보>는 2호로 절판되었는데 매회 200부씩 인쇄하고 고희동이 편집을 맡았다. 창간호는 10월 25일 발행, 판형(版型)은 4·6배판이며 장수는 21매이다. ◇ 서화협회전 연혁(沿革):제1회전(1921. 4. 1-4) 중앙학교, 제2회전 (1922)·제3회전(1923. 3.31) 보성학교, 제4회전(1924. 3.26-30) 보성학교, 제5회전(1925. 3.25-29) …… (중략) …… 제19회전 (1939. 최종회). ◇ 서화협회보의 주요 내용:서(書)의 연원(淵源)-김돈희, 동양화의 연원-이도영, 서양화의 연원-고희동, 서양화를 연구하는 길-고희동, 서가열전(書家列傳), 화가열전(畵家列傳), 서도(書道)연구의 요점-김돈희, 동양화의 강구(講究), 제1회전의 경과, 협회의 연혁(沿革)과 상황, 회원의 방명(芳名)과 주소, 협회 규칙.
선전
편집鮮展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약칭. 일제(日帝) 총독부가 주관한 관전(官展)이다. 사이토(齋藤) 총독시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의 발전을 기한다는 취지 아래 출발하였으며 직접적인 동인(動因)은 서화협회전에서 받은 자극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1년 5월 당시의 정무총감(政務總監)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가 서화협회측의 미술인을 초청하여 자문(諮問)한 후 신중한 추진 끝에 1922년 1월 12일 총독부 고시(告示) 제12호로 선전의 규정을 공포하는 동시에 동년 4월 16일 심사원 결정, 5월 10일 선전협의회, 5월 13일 심사원 임명, 5월 31일 입선작 발표, 6월 1일 개막 등의 일정(日程)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양화에 있어서의 사군자(四君子)의 문제, 제11회전 이후 서(書)를 제외하고 공예부문을 제3부로 한 것. 시상(施賞에 있어서는 모든 작품에 등급(等級)을 두다가 특선제로 고쳤으며, 제7회전부터 미술의 공로자를 참여시키는 한편 추천제도를 두어 연속 특선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전시 회장은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제8회선 이후부터 경복궁 내의 미술관(당시의 박람회회장)으로 고정되었다. 1944년 제23회전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막을 내렸다.
◇ 선전 서양화부 한국인 관계 출품작 수 및 수상작:수 제1회전 3인, 3점, 제2회전 6인 8점(4등-2인 입상), 제3회전 15인 18점(3등-2인, 4등-3인), 제4회전 19인 21점(3등-1인, 4등-2인), 제5회전 28인 39점(특선-4인), 제6회 26인 35점(특선-5인), 제7회전 38인 47점(특선-4인), 제8회전 30인 42점(특선-2인), 제9회전 36인 55점(특선-2인), 제10회전 75인85점(특선-5인), 제11회전 84인 94점(특선-2인), 제12회전 43인 54점(특선-3인), 제13회전 48인 54점(특선-4인), 제14회전 48인 55점(창덕궁상·총독상 포함, 특선-5인), 제15회전 46인 52점(특선-3인, 추천-1인), 제16회전 44인 51점(창덕궁상·총독상 포함, 특선-3인, 추천-1인), 제17회전 40인 48점(특선-3인, 참여-1인), 제18회전 60인 70점(특선-5인, 추천-1인), 제19회전 80인 90점(특선-4인, 추천-3인), 제20·21회전 미상. 제22회전 42인 56점(특선-3인, 추천-2인), 제23회전 37인 45점(특선-7인, 추천-2인, 참여-1인).
◇ 주요 선전출품 수상작가(서양화):나혜석(羅惠錫) 제2·3회전 각 4등, 제4회전 3등 입상, 제5·10회전 각 특선. 김종태(金鍾泰)-제7·8·12·14회전 특선, 제15회전 최초의 서양화 추천(推薦), 김중현(金重鉉)-제9·10·15·16회전 특선, 이인성(李仁星)-제10·11·12·13·14회전 특선, 제14회전 창덕궁상(昌德宮賞), 제17회전 참여(參與), 제16·18·19·22·23회전 추천, 임응구(林應九)-제13·14회전 특선, 제14회전 총독상(總督賞), 심형구(沈亨求)-제15·16·17·18회전 특선, 제16회전 총독상, 제19회전 추천, 제23회전 참여. 김인승(金仁承)-제16·17·18전 특선, 제16회전 창덕궁상, 제19·22·23회전 추천.
토월미술연구회
편집土月美術硏究會
1923년 8월 6일 창립. 미술강습소. 안석주(安碩柱), 김복진(金復鎭) 등의 발의(發議)로 정동(貞洞) 정측강습원(正則講習院)에서 창설되었으며 교습 과목은 서양화·조각·미학 등이었다.
고려미술회
편집高麗美術會
1923년 9월 29일-10월 1일의 제1회 서양화전에는 동인 및 공모작품 60여점이 진열되었다. 1924년 1월 4일 미술연구소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을 개설하고 남녀공학으로 미술을 지도하였다. 지도교사로는 동양화의 김은호(金殷鎬), 허백련(許百鍊), 서양화의 강진국(姜振九)와 이종우 등 10여인이 담당하였으며,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등이 이곳에서 수학하고 나간 화가이기도 하다.
◇ 회원:강진구(姜鎭九), 김석영(金奭永), 김명엽(金明嬅), 정규익(丁奎益), 나혜석(羅惠錫), 이병직(李秉直), 이재순(李載淳), 박영래(朴榮來), 백남순(白南舜).
◇ 사무소:관수동(觀水洞) 43번지
소성회 미술연구소
편집塑星會美術硏究所
1923년 창립. 평양(平壤) 소재.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김관호(金觀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27년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종우와 김찬영(金瓚永) 등이 가세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평양지방에서도 많은 서양화가가 배출되어 평양양화협회(平壤洋畵協會)가 결성되기에 이르러 1935년 10월 1일-7일 동 협회전을 개최한 바도 있다.
목일회
편집牧日會
1935년 창립. 미술단체. 서양화가들의 모임이며 여기 참가한 사람은 8인,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될 때까지 매년 동아일보 사옥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 회원:이종우(李鍾禹), 이병규(李昞圭), 이마동(李馬銅), 공진형(孔鎭衡), 구본웅(具本雄), 황토수(黃土水), 길진섭(吉鎭燮), 김용준(金瑢俊).
백우회
편집白牛會
1937년 창립. 미술단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모임이다. 데이코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한국 근대미술의 올바른 정립, 의식적으로 왜곡(歪曲)된 선전(鮮展)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하였다. 일본 당국은 백우(白牛)라는 문구가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자주의식과 독립정신을 상징한다 하여 개명(改名)을 요구함에 강압에 못이겨 다음해 '재도쿄미술가협회(在東京美術家協會)'로 고쳤다. 1940년을 기점으로 서울에서 여러 차례의 발표전을 가진 바 있다.
◇ 회원:김학준(金鶴俊), 심형구(沈亨求), 김인승(金仁承), 조병덕(趙炳悳), 김원(金源), 주경(朱慶), 이중섭(李仲燮), 이유태(李惟台) 등 다수.
김관호
편집金觀鎬 (1890-1959)
서양화가. 평양(平壤) 출신. 1909년 도일(渡日)하여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 1915년 동교를 수석으로 졸업. 1916년 제10회 문전(文展)에 작품 <해질녘>이 특선함으로써 국내 미술계에 대단한 방향을 일으켰다.
귀국 후 1923년 제2회 선전(鮮展)에 작품 <호수(湖水)>를 출품했고 그해 평양에서 소성회 미술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고희동(高羲東)과 함께 한국 서양화 개척자로서 쌍벽을 이루었으며, 도쿄 유학생 가운데 3천재의 한 사람이라고까지 극찬을 받은 바 있으나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작품에 대한 의욕을 잃고 1927년 화단에 완전히 은퇴하고 말았다. 작품경향은 샤반느풍의 인상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종우
편집李鍾禹 (1899-1981)
서양화가.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 1917년 평양고보(平壤高普)를 졸업한 후 1923년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23년-45년 중앙고보(中央高普)의 교원 및 교감을 역임했으며, 1925년 한국인으로 처음 도불(渡佛)하여 슈하이에프 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927년 살롱 도톤전에 <여인상> 및 <인형이 있는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되었고, 1928년 제1회 개인전을 가졌다. 1934년 선전(鮮展)에서 작품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고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1949년-61년 국전 심사위원, 1951년-1958년 홍익대학 교수 및 미술과장, 미술학부장, 홍익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문총(文總) 부회장,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도불 이후의 작품 경향 은 일본식인 유화의 기반을 벗어나 프랑스 인상파 아류(亞流)의 사실적인 표법(描法)에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혜석
편집羅惠錫 (1896-1948)
여류 서양화가. 호는 정월(晶月). 경기도 수원(水原)출신. 1909년-1913년에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를 졸업, 귀국 후 함흥(咸興) 영생중학(永生中學)의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1921년 개인전을 가졌고 1922년-1927년 제1·2·3·4·5·6회 선전(鮮展)에 출품, 제3회전에서 4등상, 제4회전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1927년 도불(渡佛), 파리에서 수학한 후 1929년에 귀국했으며, 그해 도쿄 이과전(二科展)에 입선했다. 신문화(新文化) 초창기에 등장한 여류화가로서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했으며 새로운 사조(思潮)에 민감한 화가였으나 당시의 완고한 사회환경과 이념의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불우하게 만년을 보냈다.
김종태
편집金鍾泰 (1806-1935)
서양화가. 호는 회산(繪山). 평양(平壤) 출신. 1926년-1936년 선전(鮮展) 제5·6·7·8·9·10·11·13·14·15회전에 계속 출품, 이인성(李仁星) 등과 함께 선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 화가의 한 사람이다. 제7·8·12·14회 선전에서 특선, 1936년 제15회전에서 한국인으로 최초인 서양화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미술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그곳 이과전(二科展)에 여러 차례 입선한 바도 있다. 인상주의적 수법에서 야수파적인 경향으로 옮겨가는 화풍을 보이는 작품 <낮잠> <청장(靑裝) 등이 있다.
김중현
편집金重鉉 (1901-1953)
화가. 호는 철마(鐵馬). 서울 출신. 1919년 경성성애학교(京城聖愛學校)를 졸업. 체신국(遞信局) 및 USIS, 서울신문사 촉탁 등을 역임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주로 선전(鮮展)이 활동무대였으며 서양화뿐만 아니라 동양화가로서도 위치를 굳힌 화가이다. 1925년의 제4회 선전에 출품, 특선했으며 제9·10·15·16회전에서도 특선한 바 있다. 물론 서양화를 전문으로 그렸으나 때때로 동양화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