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서양화의 전래

서화와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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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畵-美術

서화란 곧 글씨와 그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및 구한국시대 말기, 일제(日帝) 초기에 많이 쓰이던 용어(用語)이다. '미술'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여지기는 일인(日人)들에 의해서였으며, 서양의 근대미술이 도입(渡入)되던 시기 이전에 사용하던 화(畵)·누조(樓彫)·서(書) 등 미적(美的)인 기예(技藝)에 대한 호칭을 통일총괄(統一總括)하여 미술이라는 신조어로서 사용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술은 영어 art 혹은 painting의 역어(譯語)이며 서화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전근대성(前近代性)과는 대조적으로 근대적인 의미를 띠고 등장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양화가 한국에 유입(流入)된 시기에도 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구태의연한 서화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동양화와 서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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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畵-西洋畵

서양화는 서양에서 발전하여 온 회화형식, 동양화는 동양에서 발전하여 온 회화형식이며 그 차이는 우선 재료 영역에서도 뚜렷하다. 서양식 회화기법이 도입된 후 중국화(中國畵)를 추종하던 재래식의 고유한 회화와 구별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양화 전래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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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洋畵傳來-諸問題

한국에서 양화가 전래된 시기가 어느 때부터인지 명확하게 단정하기는 곤란하며 다만 몇 개의 가설(假說)로서 그 시기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① 조선시대 말기의 회화에 나타난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는 예로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의 작품 <백합도(白合圖)> 및 작자미상의 <투견도(鬪犬圖)>가 있으며 이들 작품을 근거로 서양화가 전래된 시기를 대략 18세기쯤으로 보는 견해.

② 서양식 성화(聖畵)의 전래를 서양화의 전래로 간주하고 그 시기를 추출(抽出)해 내려는 견해. 이 경우 그 연대는 임진왜란 때까지 소급하여 오르게 되는데, 그것은 왜군(倭軍)을 따라 들어온 천주교 신부들이 성화를 전래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그러나 당시 신부의 활동 범위가 왜군 사이에만 국한된 점, 포교(布敎)의 실적이 없는 점 등으로 이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한국에 전래된 성화는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의 본격적인 전래 및 신교(新敎)의 포교에서 비롯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기독교 관계의 서양화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상, 성모상 성화의 삽화나 그것이 한국의 화단사(畵壇史)에 양식적인 공헌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서양화가 전래된 시기는 그 후 190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 와서 활약한 외국인 화가들의 기록과, 이에 자극받아 고희동(高羲東) 등이 일본에 건너가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을 하고 돌아온 시기까지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휴버트 보스, 레미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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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ert Vos, Remion

구한국 시대에 한국에 와서 활동한 첫 외국인 화가들. 직업적인 화가들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 화가들이었다. 보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1898년(광무 2년)에 와서 고종황제의 어영(御影)을 그렸다. 또 같은 고종시대에 프랑스인 레미옹이 철도원(鐵道院) 기사로 초빙되어 와서 궁중(宮中) 및 상류사회에서 서양화를 그려 화제를 일으켰으며, 국립미술학교까지 창설할 기운이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 그림은 대개 초상화였고 본격적인 미술작품으로 보기는 힘들며, 그들의 활동 범위도 궁중이나 상류사회에 한정된 좁은 범위였으나 서양화라는 새로운 조형방법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고희동의 서양화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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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羲東-西洋畵修業

1908년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미술학생으로 일본의 도쿄(東京)에 건너가 그곳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1905년(광무 9년)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외국인들에 의해 열린 소규모의 전람회에 서양화를 출품한 바도 있다. 그는 재학시에 나가하라 코타로(長原孝太郞)의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구로다키 요테루(黑田淸輝), 후지시마다케지(藤島武二) 등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들의 미술 경향은 대개 인상파(印象派)의 아류에 가까운 것이었다. 1915년에 귀국, 일본에서 배운 서양화의 기법을 한국에 제대로 이식하기도 전에 국운이 기우는 쓰라림을 안고 다시 동양화가로 전신(轉身)하여 서화(書畵)를 익히며 비극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였다. 고희동의 서양화 수업은 당시로서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으며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 탄생이라는 점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는 그 사회면에 '서양화가의 효시(嚆矢)'란 표제 아래 그의 작품 <자매(姉妹)>의 사진을 곁들여 톱기사로 취급할 정도였다. 1924년 제3회 선전(鮮展)에 출품한 유화(油畵)를 마지막으로 동양화로 전향하였으며, 전향의 동기는 '사회가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양화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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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洋畵 初期

1908년 서양화의 수업을 위해 최초로 고희동이 도쿄로 건너간 그 뒤를 이어 1909년에는 김관호, 1910년에는 김찬영(金瓚永)이, 1913년에는 나혜석이, 1914년에는 이종우가, 1915년에는 이병규(李昞圭)가 각각 도쿄를 항해 서양화 수업을 떠났다. 이들이 귀국하기 시작한 1915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서양화의 이식(移植)이 시작되는데 당시의 사회적인 여건은 이들의 선구자적인 활동에 적지않은 장애가 되었다. 즉 ① 봉건적(封建的)인 사회구조가 갖는 몰이해, ② 전통적인 서화가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화단 사정, ③ 국가의 멸망이 안겨다 준 좌절감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