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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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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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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佛敎-思想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a)가 35세에 불타(佛陀:Buddha), 즉 각자(覺者)가 되어서 창시한 교(敎)이다. 불타는 80세(BC 383년경)로 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교단은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나 불타 입멸 후 100년경 교단내부에 의견 대립이 일어나 부파(部派)로 분열되어 부파불교 시대로 들어갔다. 그래서 부파로 분열하기 이전의 불교를 일반적으로 원시불교라고 부르는데, 다시 그 중에서 불타와 그의 제자들이 생존했던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고 해서 엄밀하게 구별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근본불교를 고타마 자신의 근본사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서술하여 보기로 하자.

고타마는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 있어서 논의되고 있던 갖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논쟁, 예컨대 "나와 세계는 상주(常住)하는 것인가 혹은 무상(無常)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유한(有限)한가 무한(無限)한가, 육체와 영혼과는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如來)는 사후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이러한 문제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결코 해결을 얻을 수 없는 무익한 의론(議論)으로 끝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타마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내심(內心)의 적정(寂靜) 경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고타마가 최초에 당면한 것은 인생고(人生苦) 문제였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無常), 거기에 고정적인 실체(實體)라는 것은 없는데(無我), 우리들은 거기에 무엇인가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아(我)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煩惱)가 생겨서 고민한다(苦).

그 번뇌(煩惱)는 무명(無名:진리에 대한 無知)과 갈애(渴愛:執着)에 입각한 것이므로(十二綠起說) 바른 수행(八正道)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여 진리에 눈을 뜨면 마침내 갈애를 끊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解脫),

이상의 경지(涅槃)에 도달할 수가 있게 된다. 고타마는 이와 같은 것을 항상 제자나 신자들에게 설교하였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바로 사체설(四諦說)이다. 고타마의 근본사상, 즉 근본불교란 이러한 내용의 것이다.

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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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陀

불교의 개조(開祖)이며 교주로서, 불교는 인도의 가비라성(현재 네팔령)을 수도로 하는 석가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35세에 세계인생의 진리(法)를 깨달아(成道), 불타(覺者)가 되어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시작한(初轉法輪) 데서 비롯된다.

불타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인 각자(覺者) 고타마라는 뜻으로 우리들은 석존(釋尊) 혹은 부처님이라 부른다.

원래 세계인생의 진리 자체는 영원불멸한 것으로서 고타마의 출·불출세와는 무관하며 고타마 자신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 진리가 고타마 자신에 의해서 체득되고 설교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으로서 거기에 고타마의 불타로서의 위대성, 교주로서의 존엄성이 있으며, 후일 사람들이 신앙귀의(信仰歸依)의 대상으로 초인화하거나 절대화하게 된 요소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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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 여래는 부처의 10가지 명호(名號:佛十號) 중의 하나이며 그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범어의 타타가타(tathagata)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타타가타(tatha­gata)로 보는가 타타 아가타(tatha­agata)로 하는가에 따라 2가지 뜻으로 나누어진다.

불교 교리상에는 이 2가지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타타가타는 '여(如)로부터 온다', 타타아 가타는 '여(如)에로 간다'라는 뜻으로서 '여(如)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설(眞如)', '진리 그 자체'를 뜻한다.

따라서 고타마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체험 위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지혜를 주로 한다면 '진리에로 간다', 즉 '여거(如去)'가 되며, 반대로 진리를 깨달은 결과 나타난 힘, 즉 자비의 이타행(利他行)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진리에서 우리들 쪽으로 오는 것', 즉 '여래(如來)'가 되는 것이다. 한역(漢譯)에서는 진리에 따라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으로 '여래'가 사용되고 있다.

法 법은 다르마(dharma)의 번역으로서, '지키는 것'·'지지하는 것'이 원뜻이다. 불교의 3보 중에서도 중심관념을 이루는 것인데, 인도에 있어서의 기원은 오래된 것으로서 베다에서는 신적 의지(神的意志)에 대해 인간 편에 서서 인간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최고의 진리, 혹은 종교적 규범(宗敎), 사회규범(法律·制度·慣習), 행위적 규범(倫理·道德) 등 넓은 범위에 걸친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도 법은 ① 교설(敎說)이나 성전(聖典:敎法), ② 최고의 진리(깨달음의 내용), ③ 일체의 현실존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로 존재케 하고 있는 법칙과 기준, ④ 법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유형·무형, 심적·물적의 일체 존재(存在:現象),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등과 같이 매우 복잡하며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법을 일체의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인도사상(印度思想) 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다방면의 인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

五蘊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갖가지 법 체계가 설명되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이 5온설(五蘊說)이다. 온(蘊)이라는 것은 스칸다(skandha)의 역어로서 적취(積聚), 즉 '집합'을 의미하며 집합으로서 다른 집합과 구별되는 요소라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5온이라 함은 원래 우리들 개인의 존재가 5개 요소의 집합으로 보지(保持)되고 형성되고 있다는 견해에 의한 것으로서 그것은 '색(色, 肉體)', '수(受, 의식의 感受作用으로서의 감각)', '상(想, 의식 중 槪念·知覺·表象을 구성하는 작용으로서의 表象)', '행(行, 受·想 이외의 능동적인 심리작용으로서의 의지나 행동적 욕구)', '식(識, 대상을 분석판단하고 종합 인식하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한다. '수(受)' 이하의 4종은 마음에 관한 것으로서 '색(色)'인 육체와 합쳐서 5온은 몸과 마음, 즉 개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개인존재는 이 5온의 어느 것인가로 분해되며, 그밖에 '아(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데도 존재할 수 없다(無我)는 것이다. 후에는 5온을 개인존재에서 확대 해석하여 일체법의 구성요소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 경우에는 '색(色)'이 물질계를, '수(受)' 이하 마음에 관한 것이 정신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苦 고타마는 29세에 왕자의 위치와 처자까지 버리고 출가하였으나 그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생은 고(苦)이다"라고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현실세계의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직시(直視)한 고타마가 얻은 것은, 모든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뜻대로 하고 싶다는 자기모순적인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라고 하며 자기모순적인 욕망이야말로 고의 원인이라고 밝혀 낸 것이다.

후에 이 고는 구체적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고와 게다가 사랑하는 자와 이별(離別)하지 않으면 안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원한 깊은 미운 자와 만나야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求)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 모든 것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오취온고(五取蘊苦)의 4고를 더하여 4고8고(四苦八苦)로서 정리되었다.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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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常

무상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써 무상을 설명한다.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이란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실의 실상(實相)이 제행무상으로써 표시되었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경전에도 "무상한 까닭에 고인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며 무상은 고의 전제라고 했다.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에 비유되어 불교적 인생관의 특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 하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의(眞意)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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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我 무아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는 것이나, 고타마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아(我)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고타마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로서 설명 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된 것이지만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無我)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의 이상(理想:涅槃)이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열반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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涅槃寂靜

열반이란 니르바나(nirvana)의 음사(音寫)로서 '불어서 끄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탐욕(貪慾), 분노(憤怒), 어리석음(愚痴) 등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는 번뇌의 불이 꺼지고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있어서는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 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말한다. 고타마는 현실의 생사의 고(苦) 세계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파악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고(苦)를 멸(滅)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한 것이다.

고타마가 생존했던 시기의 인도에서는 각종 인생관이 존재하여 제각기 이상세계란 것이 제시되고 있었으나 그 이상세계가 단순한 관념으로만 끝나거나 혹은 사후에 있어서만 달성가능한 것이었던 데 비해 고타마가 이상으로 한 적정(寂靜)한 열반은 세계인생에 대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현세에 실현되는 것이었다.

3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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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法印

법인이란 불교의 기치 또는 슬로건이라는 것으로서 불교의 일대 특색을 나타낸 것이다. 최초에는 '일체개고 (一切皆苦)'·'제행무상 (諸行無常)'·'제법무아 (諸法無我)'의 세 가지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일체개고'를 대신하여 '열반적정'이 들거나 혹은 이 두 가지를 넣어서 4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고타마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이다(一切皆苦)라고 하는 현실인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고(苦)인 원인은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諸行無常),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諸法無我)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의 원인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를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인 것이다.

4성체(4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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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聖諦(四諦說)

연기설(緣起說)이란 고타마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세계인생의 진리를 말하는데 그 연기(緣起)의 도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시키기 위하여 조직화하고 해설한 것이 4성체 또는 4체설이다. 체(諦)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성체는 인생의 근본 문제와 그 해결에 관한 4가지의 진리라는 것이다.

우선 방황하는 범부(凡夫)의 현실적인 생존은 고(苦)라고 하는 인식(認識:苦諦)은 다시 그 고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긴 것인가 하는 원인추구(集諦)로 향한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구명된 원인은 즉 범부가 갖는 갖가지 마음의 미혹(迷惑)·번뇌·욕망(欲望:渴愛)에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진리를 깨닫고 모든 욕망을 없애버리는 것(滅諦)이야 말로 우리들의 이상인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길(道諦)이라고 하는 것이 4체설의 내용이다.

4체설은 인생의 고(苦)와 낙(樂), 무지(無知)로 인한 방황과 지혜에 의한 깨달음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부정(否定)을 매개로 한 인과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우선 고(苦)·집(集)의 제2체(諦)에 있어서 우리들이 아직 인생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뇌 많은 현실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과, 그 고뇌의 현실적인 원인·이유라는 방황의 인과관계(因果關係:流轉緣起)가 설명되고 멸(滅)·도(道)의 2체(諦)에 의해서 이미 인생의 올바른 의의·목적을 자각하여 그 이상(理想)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이상세계에는 어떤 방법으로 도달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인·이유라는 깨달음을 향하는 인과관계(因果關係:還滅緣起)가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인과관계를 각각 '염(染)의 연기(緣起)'·'정(淨)의 연기'라고도 말하는데 이 양자도 서로 무관계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현실과 이상, 인생의 고(苦)와 열반의 낙(樂), 번뇌에 의한 방황과 지혜에 의한 깨달음과 같이 한 개인의 마음의 표리를 이루고 서로 타의 부정에 의해서 확립되는 인과관계에 있다. 즉 고가 있는 한 낙은 없고, 방황하는 한 깨달음은 없음과 동시에 고를 없앤 것이 낙이며 방황을 떠난 것이 깨달음이라는 관계인 것이다.

8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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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

팔정도는 8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이다. 이 도가 파리어로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8개가 하나의 성스러운 도의 각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 즉 상섭(相攝)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8정도는 4성체인 도체(道諦)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설명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8종이다.

(1) 정견(正見) ―― 올바른 견해라는 뜻으로서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가리킨다. 즉 연기(緣起)의 도리라든가 4성체라든가 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관한 지혜라는 뜻으로 그 체득·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2) 정사유(正思惟) ―― 올바른 사고방식, 올바른 마음 가짐을 말한다. 우리들은 항상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바르게 사유(思惟)하고 자기의 본분은 무엇인가, 자기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3) 정어(正語) ―― 바른 언어적 행위(言語的行爲)이다.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고방식에 의한 말이라면 당연히 바른 말이 될 터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말(妄言), 욕설(惡口), 중상(兩舌), 쓸데없는 말(綺語)의 4가지를 행하지 않을 것을 들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성실하고 정다운 말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업(正業) ―― 올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불륜(不倫) 등 잘못된 행위를 떠나 선행(善行)을 쌓는 것이다.

(5) 정명(正命) ―― 올바른 생활이라는 것으로서 신(身)·구(口)· 의(意)의 3업을 바르게 하여 규칙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 올바른 노력, 올바른 용기라는 것으로서 무엇을 하든지 용기와 노력을 가지고 임하지 않으면 성공을 얻을 수 없고 사회적 진보도 없다는 것이다.

(7) 정념(正念) ―― 올바른 상념(想念), 올바른 의식이라는 것으로서 자기의 입장, 주위의 입장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는 것이다.

(8) 정정(正定) ―― 올바른 선정(禪定)이며 정신의 안정으로서 이에 의해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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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

고타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도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 고행도 고타마에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뿐으로서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은 되지 않았다. 출가 전의 고타마는 왕자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만으로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타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한 것이다.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우선 설교한 것이 그것이었다. 중도는 8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에 의해서 부지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일변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된 것이다.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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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起

고타마가 보리수 밑에서 얻은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의 이법(理法)이라고 말해지며, 따라서 연기는 불교의 근본진리이며 불교에 의한 세계관·인생관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반드시 불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고타마의 출세·불출세와 무관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의 진리, 보편 타당한 객관적 진리라고 하며 이것을 법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든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고 말한다. 즉 진리로서의 연기를 올바로 보게 된다면 불교를 이해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란 어떠한 것인가. 연기란 "연(緣)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연기의 법칙이란 3법인(三法印)이나 4법인(四法印)에서 도출되는 것으로서 '제행무상'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으며,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타(他)와의 관계없이 고립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일체개고'로서 현실의 방황하는 인생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지혜에 의한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 욕망을 없앰으로써 이상(理想)으로서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이며 무앙인 모든 현상이 변화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양상은 결코 무궤도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에 관계 변화(關係變化)의 법칙이 있어서 그에 따라 생멸하며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법칙이 연기의 법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그것도 멸한다"라는 말로써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12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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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因緣

12인연은 12연기·12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하며 12지, 즉 12항목으로 된 연기의 설(說)을 의미한다. 연기의 법칙의 구체적 내용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라고 하는 '이것'과 '그것'의 두 개 항목에 대해서 그 두 가지가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다고 하는 상태를 표시한 것이며 4체설(四諦說)의 고집멸도(苦集滅道)도 고·집, 멸·도라는 연기(緣起)하는 두 가지 항목을 두 가지씩 병렬한 것이다.

그 밖에도 갖가지 항목의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서 설명되어진 것이 12항목으로 이루어진 십이지연기설이다. 그 12지의 내용을 보면,

(1) 무명(無明)이란 명(明), 즉 지혜가 없다는 것, 현실적으로는 연기의 도리를 올바르게 알 지혜가 없고 올바른 인생관·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2) 행(行)이란 행위와 그 행위 경험의 축적(蓄積)을 말하는 것으로서, 만일 무명에 의하여 야기된 행위라면 필연적으로 고뇌에로 이끌어갈 그릇된 행(行)이 된다.

(3) 식(識)이라 함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前五識)에 의한 감각작용과 제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추리(推理)·기억(記憶)·판단(判斷) 등 일체의 의식작용 및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行)가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4) 명색(名色)은 정신적인 것(名)과 물질적인 것(色)으로서 이 현상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

(5) 6입(六入)은 6처(六處)·6근(六根)이라고도 하며 6개의 감각기관으로서 이 감각기관을 통해 식(識)이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6입과 명색과 식과의 접촉이 (6) 촉(觸)이며, 그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며, (7) 수(受)이다. (8) 애(愛)는 갈애(渴愛)라고 하여 맹목적인 애념(愛念)을 말한다. 감수작용이 강하면 애증(愛念)의 염(念)도 그만큼 강한 것이다.

(9) 취(取)는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증의 염(念)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동이며, 이러한 애(愛)·취(取)라는 행위가 잠재적으로 되는 데에 현존재, 즉 (10) 유(有)가 규정되며 그것에 의해서 (11) 생(生)이, (12) 노사(老死)의 고(苦)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순관·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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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觀·逆觀

연기설은 일반적으로 12지(支)의 연기로 설명되고 세계인생의 일반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현상의 관계항목을 가리킨 것처럼 보이기 쉬우나 연기가 설명된 본래의 목적은 그러한 일반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고뇌가 생기고 또 어떠한 인연조건(因緣條件)에 의해서 고뇌를 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인생의 현실과 그 초극(超克)으로서의 이상실현의 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연기설이 문제로 하고 있는 현상은 선악업(善惡業)과 그 과보(果報)로서의 고락과 같은 종교적·윤리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그 경우 현상이 가치적으로 악화하는, 즉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으며 촉에 연해수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老死)·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라고 정형적(定型的)인 글에 의해서 표시되어 있다.

이에 대응해서 현상(現象)이 순화(純化)되고 정화(淨化)하는, 즉 고뇌의 유전(流轉)이 멸해지고 이상의 열반계(涅槃界)로 돌아가는 연기의 관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말해지며 또 이것을 연기의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한다.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名色)이 멸한다.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입(六入)이 멸한다. 6입이 멸하기 때문에 촉(觸)이 멸한다.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受)가 멸한다.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한다. 애가 멸하기 대문에 취(取)가 멸한다.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有)가 멸한다.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生)이 멸한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우비고수뇌의 갖가지 고가 멸한다"와 같이 설명된다.

또 연기의 순관은 현실의 노사 등의 고에서 소급해서 고의 근본으로서의 무명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도 하지만, 경전에 설명된 정형적인 글로는 무명에서 고에의 연기가 나타나 있다.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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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脫

해탈이란 '해방된다'·'자유로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심신의 고뇌·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이 해탈에 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목표를 이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인생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이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여실하게는 지견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해탈에의 도는 중도(中道)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8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과 동일시되고 있다.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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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漏 누(漏)라고 하는 것은 '흐른다'라는 것으로서 인간이 번뇌 때문에 각종의 악업을 하고 그 결과 고를 누출배설(漏出排泄)하고 미혹의 세계에서 유전(流轉)하게 되는 데서 번뇌를 의미하며, 번뇌와 관계하여 이를 더욱더 증대시키는 것을 유루(有漏)·유루법(有漏法)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번뇌를 단멸해 버린 상태를 무루(無漏)·무루법(無漏法)이라고 한다. 예컨대 4체설에서 말한다면 방황의 현실의 과(果)와 인(因)인 고체(苦諦)·집체(集諦)는 유루법이며, 이에 대해서 깨달음에의 인과 과인 도체(道諦)와 멸체(滅諦)는 무루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필 4체설뿐만 아니라 모든 법은 번뇌의 유무에 의해서 유루·무루가 되는 것으로서 육신(肉身)을 유루신(有漏身)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불신(佛身)을 무루신(無漏身)이라고 하며, 세속을 대상으로 해서 생기는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고 하는 데 대해 부처의 깨달음을 대상으로 하는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無漏智)라 하고, 범부(凡夫)가 이룬 선(善)이 유루선(有漏善)인 데 대해 성자가 이룬 선을 무루선(無漏善)이라고 함과 같이 갖가지로 사용된다.

부파불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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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실유법체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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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實有法體恒有

부파불교 중에서 가장 유력하고 부파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가장 현저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이다. 설일체유부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일체법(一切法)을 유(有)라고 설명하는 부(部)라는 것인데 이 부파의 주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인 것이다.

3세(三世)란 과거·현재·미래의 3세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의 법이 이 3세에 걸쳐서 실재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근저이다. 그 점에서 이 주장이 근본불교의 무상설(無常說)이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유부(有部)에서는 현재세(現在世)를 일찰나(一刹那)로 보고 법체(法體)는 항유(恒有)이지만 찰나멸(刹那滅)로서 미래에서 현재를 통과하여 과거에 낙사(落謝)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유부의 설이 단순한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심리현상이 찰나멸인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상주불변(常住不變)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변화는 결국 찰나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나 집·산 등 찰나찰나의 연속 위에 성립하는 것은 실유(實有)의 법(法)으로는 되지 못하고 색(色)이나 형(形)·향(香)·맛 등 찰나에 존재하는 실유의 법의 결합 위에 성립하는 것도 가법(假法)이라고 한다.

실유의 법이란 이와 같이 가법으로서의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要素)라고 하며 그것은 체계적으로 수(數)로 헤아려서 물질계의 실유의 법(色法)이 11종, 정신계의 법에는 마음의 주체(心王)가 1종, 감각·의지·욕망 등의 마음의 작용(心所法)이 46종, 다시 물질에도 정신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법(心不相應行) 14종이 세워져 이상의 72법은 연기(緣起)되는 존재라고 해서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말해지며, 이 밖에 허공(虛空)이라든가 열반 등 연기한 존재가 아닌 것 3종을 무위법(無爲法)으로 해서 일체법을 유위법 4, 무위법 1의 5위와 다시 그 5위를 분류한 75법에 의해서 5위 75법으로 조직하였다. 이것은 객관적 세계의 구성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고 주체적 현실에서의 일상생활의 성립, 선악의 행위와 결과의 관계, 마음의 자세, 번뇌와 그 단멸(斷滅)에 관한 이론체계를 의도한 것이다.

불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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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陀觀

고타마는 진리(眞理:法)에 눈떠 불타가 되고 불타로서 유례없는 위대성으로 인하여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불타에 대한 무한한 귀의심(歸依心)이 일어났고 특히 불타의 입멸 후 불타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염(念)에서 불타의 초인화·절대화·완전화가 행하여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불타의 위대성을 당시 인도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에 입각하여 그 전세(前世)에서 이루어진 뛰어난 선근공덕(善根功德)에 연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그 전생은 무히 확대되고 무한히 오랜 기간(三阿僧祇劫)에 걸쳐서 생을 되풀이하면서 보시(布施), 기타 6종의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였다고 설명하고 그 구체적 실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타카라고 불리는 수많은 전생(前生)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여기에서의 주인공, 즉 불타의 전신은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것을 불타가 되기 이전의,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에 정진하고 있는 고타마라고 했다.

불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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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身觀 불타가 80세로 입멸하고 나서도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불타의 입멸은 다만 불타가 자기들 눈앞에서 모습을 감춘 데 불과할 뿐 불타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불타는 영원한 실재이다. 아니 불타는 불멸의 진리 그 자체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법신(法身)으로서, 80세에 입멸한 생신(生身)의 불타는 임시 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화하여서(化身), 세인구제(世人救濟)를 위해서 응현(應現)한 데(應身)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또 업보윤회설(業報輪廻說)에 기하여 무한한 과거세(過去世)로부터 보살로서의 수행을 쌓은 과보(果報)로서 현세에 있어서 불타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보신(報身)이라는 견해도 생겼다.

이와 같이 법신과 생신의 2신설(二身說)이 우선 생각되고 여기에서 발전하여 법신(法身)·보신·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3신설, 다시 나아가 4신설에로 발전해 갔다. 즉 불신관의 발전은 불교에 있어서 인격신앙의 발전·성립을 뜻한 것이다.

아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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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羅漢 아르하트(arhat)의 음역(音譯)으로서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데서 응공(應供)이라고 번역된다. 즉 일체의 번뇌를 끊고 해야 할 일을 완성하고 다시 더 배울 바가 없으며(無學),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원시불교에서는 불십호(佛十號)의 하나로서 응공이 쓰여져서 불타도 아라한이라고 불렸으나 부파불교에서는 불타에 대한 추모의 염이 높아짐과 동시에 불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불타는 과거 수백천생(數百千生)의 장기에 걸쳐서 갖가지 이타(利他)의 선행을 해온 특별한 인격이며 석존 혼자만이 불타로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제자들은 이 인격완성자로서의 불타의 가르침을 듣고(聲聞) 그에 따라서 수행함으로써 성문으로서의 최고위인 아라한으로 될 수 있지만 불타로는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이 불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한 후 아라한은 소승(小乘)의 성자(聖者)에게만 국한하게 되었다.

4향4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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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向四果

불제자들은 불타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함으로써 아라한이라는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함에는 4향4과라고 불리는 8종의 위계(位階)가 있다고 했다.

즉 아래서부터 말하면 '예류(豫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의 4위가 있어서 그것이 과(果)를 향해 수행(修行)해 가는 단계(向)와 그에 의해 도달한 경지(果)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4향4과이다.

예류는 수타원(須陀洹)이라고 음역(音譯)되는데 깨달음에의 도를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에 참여한 것, 즉 불도수행에 대한 확신이 생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일래는 사타함(斯陀含)이라고 음역되는데 수행의 도상에 있어서 한 번 뒤로 물러가는 것으로서 유회의 세계에로 물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환은 아나함(阿那含)이라고 음역되는데 더 이상 윤회의 세계로 물러가는 일이 없다는 데에서 불환이라고 하며, 아라한향(阿羅漢向)은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의 위계(位階)로서 아라한과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되었다.

심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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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性觀

우리들이 방황하는 것도 마음이며 깨달음 또한 마음이다. 우리들이 수행한다는 경우에는 방황에서 깨달음에로 마음을 전환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는 것으로서, 불교는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마음가짐 여하라는 것이 된다. 즉 마음은 실천의 주체로서 마음이 청정(淸淨)하게 되면 자기가 청정하게 되는 것이며, 자기가 청정하게 된 상태가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은 원시불교 이래 불교에서 일관된 근본문제가 되어 그에 대한 갖가지 고찰이 이루어져 왔다. 특히 부파불교 시대에 유부(有部)에서는 일체법(一切法)을 5위로 분류하여 그 중에서 마음을 분석하여 마음의 주체로서의 심왕(心王)과 마음의 속성, 즉 심작용(心作用)으로서의 심소법(心所法)으로 나누었는데, 그러한 분석을 하는 한편, 마음이 본래 어떠한 것인가 하는 마음의 본성에 대한 고찰도 활발하게 행하여져서 마음의 본성 즉 심성(心性)에 관한 각종 학(學)이 출현했다. 이것이 불교의 심성설(心性說)·심성관(心性觀)으로서 대승불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후의 불교교리 전개의 중심적 문제로 되었다.

심성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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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性本淨

우리들의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부파불교 중의 대중부(大衆部)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즉 우리들이 진(眞)을 진으로서, 선(善)을 선으로서, 미(美)를 미로서, 각각 위(僞)·악(惡)·추(醜)에서 변별(辨別)하고 판별(判別)할 수가 있으며, 또한 생사의 미망(迷妄)을 끊고 열반의 이상(理想)으로 향할 수가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마음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번뇌에 뒤덮이고 유전하여 타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번뇌는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외래(外來)의 2차적 존재에 불과하고 마음의 본성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무구한 것이며 이것을 자각하여 청정한 심성을 현현(顯現)시키면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상의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중부의 본래 청정한 심성은 후일의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이라고 하여 여래(如來)가 될 본성(如來胎)으로서 모든 사람이 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염오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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染汚不淨

심성 즉 마음의 본성은 설혹 본래 청정한 것이더라도 현실의 마음가짐 즉 심상(心相)이 만약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모르고 망상(妄想)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거기에서 생기는 번뇌 때문에 감염되고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염오부정(染汚不淨) 혹은 유루(有漏)라고 한다. 즉 번뇌에 뒤덮인 더럽혀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그 행동이나 태도도 더럽혀진 그릇된 것이 되어 미혹의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한 미혹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고계(苦界)를 유전(流轉)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번뇌(無明煩惱)의 미망(迷妄)을 버리고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알고 진실한 지혜에 의해서 열반의 이상의 경지로 나아갈 청정환멸(淸淨還滅)에의 도가 설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현실 모습, 현상(現象)으로서의 마음에 의해서 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상좌부(上座部)계의 유부(有部)나 경량부(經量部)의 입장이며, 그 견해가 후에 대승불교에도 채용되어 법상유식설(法相唯識說)로 전개되었다.

초기 대승불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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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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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

대승이란 마하야나(Mahayana) 즉 위대한, 뛰어난 탈것이라는 뜻이다. 탈것이란 가르침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가르침에 의해 사람들을 미혹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간다는 것이다. 즉 소승(小乘)이 자기완성(자리:自利)을 목표로 한 탈것임에 대하여 대승은 자기완성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구제(이타:利他)를 목적으로 하는 큰 탈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주장했다.

초기의 대승불교는 부파시대의 불교가 석존 당시의 활동성·순수성·일반성을 상실하고 아비달마라고 하는 고정적·번쇄적·전문적인 훈고해석에 빠져버려 중생제도(衆生濟度)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을 그 본래의 자세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으킨, 말하자면 불교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의 발생과 그 추진역(推進役)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서력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재가(在家)를 중심으로 한 혹은 불탑(佛塔)을 수호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지역도 남인도에 원형(原型)이 생겨서 북인도에서 확립되었다고 한다.

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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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乘

소승이란 히나야나(Hinayana), 즉 열등의 작은 탈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된 후 대승의 입장에 선 자가 스스로를 이타를 목표로 한 위대하고 뛰어난 탈것이라 하고 그 이전의 부파불교를 자리(自利)만에 시종하는 열악(劣惡)한 탈것이라고 폄칭(貶稱)한 데서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치비판적인 의미에서 붙여진 호칭이며 부파불교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은 이 폄칭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를 테라바다(Theravada), 즉 상좌(上座)의 불교라 부르고 있다. 소승불교는 불멸 후 100년경에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고, 불멸 후 300년경에는 전부 20부로 분열하였는데, 각 부파는 아비달마라고 불리는 번쇄하고 형식적인 학문체계를 가진 논서(論書)를 만들어 각부 독자(獨自)의 삼장(三藏)을 전지(傳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단은 출가자만의 이른바 출가교단이며, 이윽고 재가의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새로운 대승불교를 일으키는데 대승의 교리에도 소승의 것이 상당히 쓰여지고 있으며 대승 흥기 후에도 동남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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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乘

삼승이란 3종의 탈것이라는 뜻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 부처를 목표로 하는가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가의 차이에 따라 타는 것도 달라진다는 생각에서 대승 편에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는 부처를 목표로 하는 불보살승(佛菩薩乘)이며 소승은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의 2승(二乘)으로서 아라한은 될 수 있어도 부처로는 영원히 될 수 없다고 하여 구별한 것이다.

우선 성문(聲聞)이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서 도에 정진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불제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문승이란 불제자의 도로서 구체적으로는 부처의 교법에 의해서 4체(四諦)의 이(理)를 보고 스스로 아라한으로 될 것을 이상으로 하는 낮은 수행자라고 한다.

연각승의 연각(緣覺)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원래 고타마가 스승에 의하지 아니하고 혼자서 깨달음을 얻은(無師獨悟) 면을 나타낸 말인데 교리(敎理)상으로는 12연기를 관찰하여 미(迷)를 끊고 이법(理法)을 깨닫는다(斷惑證理)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독각은 제자도 없고 설교하지도 않으므로 이념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일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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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佛乘

소승의 2승에 대해서 대승불교가 스스로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 일불승 또는 일승(一乘)이다.

일불승은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직 한가지로서 그 가르침에 의해서 어떠한 사람들도 똑같이 성불(成佛)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승의 도에 따르는 수행자는 모두 석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살의 이름으로 불리고 석존이 전생에 무량(無量)의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쌓은 것처럼 대승의 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은 뒤로 돌리고 우선 다른 사람들을 구한다(自未得度先度他)고 하는 이타행(利他行)이 그 임무라고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제받지 못하는 한 스스로 이상의 세계로 들어가지 아니하고(無住處涅槃) 항시 현실세계에 있어서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는 입장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성문·연각의 2승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이며, 3승의 도를 구별하는 것은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방편설(方便說)에 불과하며 진실로는 오직 부처의 1승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가 <법화경> 등에 의해 강조되며 그것이 일불승의 본의로 되었다.

일체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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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皆空

공(空)이란 슈냐타(Sunyata)의 역으로 존재물(存在物)에는 그 자체·실체(實體)·아(我)라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이미 석존(釋尊)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해서 생겨났기 때문에(인연소생:因緣所生),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뜻하는 것인데, 특히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興起)하게 되자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근본사상으로 공이라는 사상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부파불교 시대(部派佛敎時代)에 상좌부계(上座部系)의 유부(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라는 입장에서 파악하며, 일체의 아집(我執)을 배격한 자유무애(自由無碍)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공을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인공(人空)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법공(法空)으로 나뉘며, 이를 합쳐서 인법2공(人法二空)이라 하여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 입장이 되었었다.

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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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樹(150?∼250?)

인도의 대표적인 불교사상가. 인도 이름은 나가르주나(Nagarjuna). 남인도 브라만 계급 출신으로, 출가(出家)하여 소승불교를 배우다가 후에 히말라야산으로 들어가 노비구(老比丘)로부터 대승불교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초기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經典)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그는 <반야경>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공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구명하고, 대승불교 교리의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

후일 중부 인도에서 남인도로 돌아가, 만년에는 남인도의 키스토나강 상류의 흑봉상(黑峰山)에 살다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제자 중 상족(上足)으로는 아리야데바(

ryadeva) 즉 제바(提婆)가 있고, 용수 이후의 모든 대승불교는 그의 영향 밑에 있어 후세 중국이나 여러 불교국에서는 8종(八宗)의 조상으로 존칭되고 있다. 용수의 저작은 한역(漢譯)으로 20부 154권, 티베트역으로 95부가 있는데, 오늘날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연기(緣起), 즉 공(空)에 의해 불교의 근본사상을 서술한 <중론송(中論頌)>·<십이문론(十二門論)>. (2) <반야경>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부류에 속하는 <대품반야(大品般若)>의 초역으로, 당시의 여러 사상·전설·교단의 규정 등을 해설하고 공의 입장에서 비판했으며, 특히 보살(菩薩)의 실천도(實踐道)로서의 6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하여 상설(詳說)한 <대지도론(大智度論)>. (3) <화엄경(華嚴經)> 중에서 아주 옛날에 성립된 <십지경(十地經)>을 주석하고 보살의 수행해위(修行楷位)인 십지를 해설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특히 이 중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를 외우고 마음에 새기는 길을 설파한 신방편(信方便)에 의한 이행도(易行道)가 후세 정토교(淨土敎)의 근거가 되었다.

(4) 불교 이외의 여러 학파, 특히 당시 논리학파의 주장을 공의 입장에서 비판한 <회쟁론(廻諍論)>. (5) 공의 입장에서, 세계는 유일심(唯一心)임을 설파한 <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 (6) 정치에 종사하는 자에게 실천수행(實踐修行)의 길을 명시한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등이 있다.

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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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婆

원명을 아리야데바라고 하며, 170∼270년 경의 사람으로서, 남부 인도에서 태어났다. 코살라국에서 용수(龍樹)의 제자가 되어 용수가 주창한 공의 이법(理法)을 체득하고, 용수의 입장을 계승함과 함께 이에서 초월하여 외교(外敎)를 격렬하게 논란했다.

용수는 그의 대표작 <중론송(中論頌)>에서 여러 문제를 '관찰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제바는 그의 저서 <백론(百論)>에서 여러 견해를 '파석(破析)한다', '차견(遮遣)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용수가 유무 2견(有無二見)의 파석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나타내려고(현정:顯正) 한 데 대해서 제바는 이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날카로운 논법으로 여러 학파의 이견(異見)을 논란(파사:破邪)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그에게는 <백론(百論)> 외에도 <사백론(四百論)> <백자론(百字論)> 등이 있어 모두 백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백의 원어(sata)가 '최파한다'는 동사의 어간(語幹)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그의 입장을 엿볼 수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외도(外道)의 원한을 사서 후에 암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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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薩行 대승불교는 원래 재가(在家)의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종래의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독점물이었던 것을 널리 전 불교도의 것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부파불교 시대의 보살이라 하면, 전생시대(前生時代)의 석존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데 불과했으나,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로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부처의 후보자로서 보살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보살이 되기 위한 수행, 즉 보살행의 실천덕목(實踐德目)으로 6바라밀(六婆羅蜜)이 세워졌다.

이 6바라밀은 단순히 재가 신도(在家信徒)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전불교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서 8정도(八正道)에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는 이타행(利他行)으로서의 보시(布施)가 제1차적으로 취급된 점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6바라밀 뒤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이타적인 내용을 가진 4개의 덕목이 추가된 십바라밀설(十婆羅蜜說)이 출현했다. 더욱이 이 이타(利他)가 그대로 자리(自利)로 되는 곳에 대승의 실천도의 묘미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6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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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婆羅蜜

바라밀이란 파라미타(Paramita)의 음사(音寫)로서 완전·구극(究極)·최고의 상태라는 뜻인데, 불교의 교리상으로는 도피안(到彼岸), 즉 이상경(理想境)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현실의 차안(此岸)에서 이상의 피안으로 사람들을 넘기기 위한 행(行)이라는 점에서 도(度)라고도 번역된다.

이 바라밀의 행에는 6종이 있으며, 대승보살의 실천 덕목으로되어 있었다. 6종의 행이란,

(1) 재시(財施)·법시(法施:진리를 가르침)·무외시(無畏施:공포를 제거하고 마음을 안정시킴)로 이루어지는 보시(布施).

(2) 계율을 지키고 항상 자기반성을 하여 행실을 규율하는 지계(持戒).

(3) 고난을 이겨 내는 인욕(忍辱:본래는 법을 진실로 인정하고 이에 복종하는 것).

(4) 보살로서의 수행의 길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정진(精進).

(5) 마음을 안정시켜 거기서 올바른 지혜를 낳게 하는 선정(禪定).

(6)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를 작용시키는 반야(般若)를 말한다.

이들 덕목은 우선 '주는 것'을 강조하고 최후에 지혜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최후의 지혜로서 다른 5행(五行)은 이에 바탕을 둔 것으로 결국 보살의 행이란 지혜에 의거한 자비행(慈悲行)이라는 것이 된다.

구원의 법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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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遠-法身佛

부파불교 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35세에 도를 깨닫고 80세에 입적(入寂)한 생신(生身)의 고타마 부다 한 사람을 의미하며, 불타가 입적한 후에 불타의 신격화가 이루어져 범인(凡人)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32상(相)에다 80종 호(好)의 특수한 모습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성하게 되자 대승의 여러 경전(經典)에는 이러한 불타를 초월한 불타가 기술되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法華經如來壽量品)>에서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닫고 불타가 된 가야근성(伽耶近成)의 석가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에 불과하며, 사실은 영원한 과거에 있어서 이미 성불을 완성하고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인간들을 교화해 온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法身佛)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불교가 본래 진리(법)신앙이며, 법은 영원불멸이기 때문에 그 법을 깨달은 부처도 진리와 일체(一體)이며, 법을 신체(身體)로 하고 있는(법신:法身) 영원불멸의 존재로 여겨 온 것이다.

화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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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世界

불교의 근본적인 진리로 되어 있는 연기설(緣起說)의 입장에 서서 이 현실의 현상, 차별(差別)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파한 것이 화엄의 세계관이며, 일반적으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한다.

이에 의하면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Virocana Buddha)의 현신(顯身)한 것, 따라서 법계(dharma dhatu)라고 하며, 그 법계에 있어서는 일미진중(一微塵中)에다 전세계를 반영시키고, 일순(一瞬) 속에 영원을 포함시킨다는 것처럼 하나를 들면 거기에 전우주가 관계되고, 일체는 개(個)의 하나 속에 포함되며, 서로 주종(主從)이 되어 무한에 관계되고 융합되며 작용을 주고 받는다.

즉,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卽一)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법계의 양상은 (1) 차별현상의 사법계(事法界), (2) 우주의 모든 사물은 진리가 현현(顯現)된 것으로 보는 이법계(理法界), (3)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이사법계(理事法界), (4) 현상계는 서로 교류하여, 1개와 여러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사무애법계의 4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정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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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思想

대승불교의 특징은 반야의 지혜와 부처의 자비이며, 자비의 관념은 제불(諸佛)의 중생구제(衆生救濟)의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구제불(救濟佛) 사상이 일어난 것은 불탑(佛塔)을 신앙하는 재가(在家)의 사람들이 스스로는 교법(敎法)의 실행을 할 수가 없으나 부처의 자비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종교적 욕구에 응한 것으로, 이들 구제불이나 보살들이 사는 곳을 정토라 하였다. 예를 들어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 약사불(藥師佛)의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 미륵불(彌勒佛)의 도솔천, 관음보살의 보타락산(普陀落山) 등이 그 예이다. 이들 특정한 종토에 대해서 현실세계를 예토(穢土)라 하는데, 그러나 <유마경(維摩經)>을 보면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원한다면 우선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하면 정토도 깨끗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듯이, 마음만 청정(淸淨)하면 예토나 정토나 모두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정토라고 하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가르침이 정토교(淨土敎)라는 것이다.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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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陀佛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바(Amitabha), 즉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을 가진 것(無量光)과 아미타유스(Amitayus), 즉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가진 것(無量壽)이라는 두 종류의 원명의 음사(音寫)이며,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개의 덕성을 갖춘 불타라는 뜻이 된다.

구제불(救濟佛)의 신앙으로 출현한 부처로서, 과거 구원겁(久遠劫)의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때에 국왕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보살(法藏菩薩)이 되어 부처 밑에서 수행하고 제불(諸佛)의 정토를 견학한 다음, 5겁(五劫)의 긴 세월 동안 생각한 끝에 서원(誓願:48願)을 일으키고 그 이래 덕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10겁(十劫) 전에 그 원행(願行)이 완성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고, 10만억토(十萬億土)나 떨어진 서쪽에 극락세계를 세워 지금도 설법(說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정토라고 하면 이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킬 만큼 일반인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으며 각종 존상(尊像)이 예배되는데,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옆에 관음과 세지(勢至) 두 보살을 가진 것이다.

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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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願

대승의 보살들은 자신의 오도(悟道)는 뒤로 돌리고 우선 남을 구제하는(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 것을 이상으로 하였고, 이러한 중생구제의 염원과 깨달음을 찾아 불도에 들어올(발심:發心) 때부터 그 맹세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소원을 마음으로 맹세하는 것, 즉 서원을 일반적으로 본원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나 약사불의 십이원(十二願)의 종류 등이다.

그러나 정토교에서는, 아미타불이 법장보살이었을 때 중생제도를 기원하여 세운 사십팔원 중 특히 제18원을 본원 중의 본원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왕본원(王本願) 혹은 단순히 본원이라 하여 존중하였다.

제18원이란 '생명을 받은 일체의 것이 지심(至心)으로 신락(信樂:信心歡喜)하고 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겨우 십성(十聲)의 염불만을 외었다 할지라도 이를 구제하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서원(誓願)이며, 아미타불 편에서 말하면 염불하는 자를 구하기를 맹세한 것이고, 중생편에서 보면 염불을 하면 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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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勒佛 고타마는 현세에 있어서 진리에 눈뜬 현재불(現在佛)인데, 그 진리는 영원한 과거에서 미래영겁(未來永劫)에 이르기까지 결코 변하지 않는 불멸의 진리이므로 과거세(過去世)에 있어서도 고타마와 같이 이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하여 부파불교 시대에 과거불에 대한 설이 일어났고, 석존 앞에 6불(六佛)을 헤아리는 과거7불(過去七佛), 더 나아가 연등불(燃燈佛)이라는 최초의 부처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미래에 있어서도 전리에 눈을 떠 부처가 되는 이른바 미래불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일어났는데 이것이 미륵(Maitreya)이다. 미륵은 현재는 보살인 채, 그 정토인 도솔천에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지만 석존의 예언으로 그 목숨이 4천세(인간 나이로 56억 7천만년)가 되었을 때 이 인간계(人間界)로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하고, 그 때 비로소 불격(佛格)을 얻어 미륵불이 되며 석가불을 대신하게 된다고 해서 보처(補處)의 보살로 지칭된다. 따라서 미륵에 관해서는 미륵보살·미륵불의 두 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중기 이후의 대승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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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파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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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觀派-思想

석존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고 공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지은 용수(150∼250년)는 후세 불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제자인 제바(提婆), 또 그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파라고 불리는 계통이 성립되었다.

이 중관파의 중심사상은 공이며, 유부(有部)의 법유(法有), 즉 모든 것에는 그 자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실체적인 자성(自性)이 있다고 하는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러한 자성이 없는(無自性), 즉 무자성·공(空)이기 때문에 현상이 성립되며 또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만일 법유의 입장에 서 있는 본질과 같은 것을 실체시(實體視)한다면 현상계의 성립변화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리하여 무자성(無自性)이고 공인 현상계의 개개 존재는 서로 타(他)와의 상의상대(相依相待) 위에서 성립되어 있다고 보아 그와 같은 입장을 용수는 연기(緣起)라 부르고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 칭하며, 무아(無我)와 동의(同義)로 해석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론송(中論頌)>에 있어서, 불생불멸(不生不滅)·불상부단(不常不斷)의 8불(八不)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느 한 편에만 집착하지 않는 입장에 선다 하여 중도라고도 불리며, 중관파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파는 후일 불호(佛護:470∼540년경)의 계통을 이어받은 프라산기카파(必過性空派)와, 이를 비판한 청변(淸辨:490∼570년경) 계통의 스와탄토리카(自在論證派)의 두 파로 나뉘었다.

이것은 공의 입장을 파악하는 방법의 상위(相違)에서 오는 것으로 불호(佛護)는, 공은 입장이 없는 입장에 있으며 타(他)를 파석(破析)함으로써만 표출(表出)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 청변(淸辨)은 공이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불호의 계통에서는 월칭(月稱)·적천(寂天) 등이 나오고, 청변의 계통에서는 관서(觀誓)가 나와 각기 용수의 <중론송>에 독자적인 주석을 가하였고, 후일의 대승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식파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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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識派-思想

중관파(中觀派)의 사상은 현상계의 제법(諸法)이 공임을 여러 논법으로 논증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계의 존재가 어째서 그 같은 질서 밑에서 성립되어 있는가를 체계적·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이 유식파의 사상, 즉 유식설(唯識說)이다.

유식이란, 일체의 것은 인식(認識:識)뿐이라는 설이며, 주관의 구조도 식, 객관의 구조도 식이라 주장했다. 이 이론체계에는 유부(有部)의 법상(法相), 특히 마음의 분석이 채택되어, 그것이 새로운 대승의 공의 입장에서 바르게 해석되고 있다.

이 유식설은 이미 그 경전들인 <해심밀경(解深密經)>이나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 속에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을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도록 제기한 것은 미륵(彌勒:270∼350년경)이며, 그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비롯한 제론(諸論)에 나타나 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着:300∼390경)의 <섭대승론(攝大乘論)>과 그 밖의 여러 논서(論書)에서 조직화되었고 더욱이 무착의 동생 세친(世親:320∼400년경)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의 저서를 통해서 크게 이루어졌다. 유식설에서는 인간의 현실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법은 실유(實有)가 아니며 그 실상(實相)은 공인데, 오직 공이라는 하나의 원리에 따라 현실차별의 상(相)이 현출(現出)할 수는 없는 일이며, 여러 존재가 현재 있는 그것처럼 달성되기 위해서는 각기 공에 뒷받침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이미 가능력(可能力)인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종(種)이라 하고, 이는 순수한 정신작용으로서의 식(識)으로서 모든 것은 오직 이 식에 의해 나타난 것(唯識)이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설하는 유식설은 선정체험(禪定體驗)에 있어서의 인식 대상이 선정실천가의 주관에 의해 현현(顯現)되는 것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 설이 선정, 즉 유가행(瑜伽行:요가)의 실천가(瑜伽師)에 의해 조직·계승되었다 하여 이 유식설을 역설하는 사람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요가차라)라고 한다.

무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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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着

원명은 아상가(Asanga)라고 하며, 300∼390년경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이다. 북서 인도 간다라 지방 부루사부라성의 브라만 집안에서 3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유부(有部)에 출가했으나, 후일 중인도 아유차국으로 가서 대승의 유가행에 힘썼다.

전설에 의하면, 아상가는 수행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이에 의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을 전지강설(傳持講說)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들 저서는 아상가가 아유차국에서 유가행의 스승이었던 마이트레야로부터 받은 학설로서, 후세 마이트레야가 미륵보살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미륵보살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식설을 조직·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밖에 <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 <순중론(順中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나타내어 유가 행파의 대표적 논사(論師)로 꼽혔다.

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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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親

원명은 바수반두(Vasubandhu)로서, 320∼400년경 인도의 불교 사상가이다. 간다라 지방 부루사부라성의 브라만 가문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그와 같이 사상가로 유명한 아상가(무착)이다. 출가하여 처음에는 유부(有部)에 속하였으며, 캐시미르와 간다라에서 유부를 비롯한 여러 부파의 학설을 수업하고 이들 학설의 요강서(要綱書)인 <구사론(俱舍論)>을 지었으나, 후일 형인 아상가(무착)의 감화로 대승으로 전향하여 아상가 및 그의 스승 마이트레야의 저서에 주석을 붙여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의 완성에 힘썼고,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저술하였다.

더욱이 그 입장에 서서 반대설을 깨뜨리고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또한 유식설 입문서로서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을 지었다.

<유식삼십송>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들의 손으로 여러 주석서가 나왔고, 후일 현장(玄奬)이 호법(護法)의 주석을 중심으로 10대논사(十大論師)의 여러 주석을 합쳐서 번역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은 법상종(法相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아뢰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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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賴耶識

알라야비즈냐나(alayavijnana)의 음사(音寫)로서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도 쓰며, 유식설은 우주만유전개(宇宙萬有展開)의 근본으로서, 만유를 굳게 보지하여 잃지 않기 때문에 무몰식(無沒識), 만유를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장식(藏識), 만유발생의 씨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유식설에 의하면 우리들의 경험은 모두 의식(意識)으로 간주된다. 외계에 있는 빛의 파동(波動)도 눈(眼:視力)이 없으면 빛깔이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빛깔이 나타나는 것은 눈(眼)이 원인(原因)이며, 외계의 빛의 파동은 조연(助緣)에 불과하고, 눈(主觀)에 갖추어진 힘의 요소만이 빛깔(客觀)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눈은 빛깔의 주관적인 입장, 빛깔은 눈의 객관적인 입장에 불과하며, 이 양자는 동일 존재인 것이 주객(主客)으로 분열된 모습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六識)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六境)을 역설하고, 이 6식의 구석에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 또한 이들 7식(七識)이 성립되는 근거로서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 역설되고 있다.

아뢰야식은 인간의 생명력에 타고난 유전적 요소나 여러 행위의 결과로서의 기억, 그리고 이에 의해 형성된 성격 등이 결합된 심리적 기체(心理的基體)로서 이에 의거해서 인식이나 판단이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다.

7식이 현재적(顯在的)인 데 대해서 아뢰야식은 잠재적이며, 과거의 여러 행위, 즉 업(業)의 결과가 종자(種子)로서 감추어지고 보존되어 인연(因緣)이 합쳐지면 또다시 아뢰야식에서 7식으로 현행(現行)하며, 또한 7식에 의한 경험은 업(業)의 형태로 아뢰야식으로 훈습(熏習)되며 종자로서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잠재적인 아뢰야식에서 7식이 생기며, 이것이 주객으로 분열되어 인식이 성립되는 경과를 전변(轉變)이라 하고 아뢰야식에 의거, 현실의 현상세계가 성립되고 있는 상태를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라고 한다.

이같은 외계의 일체를 식의 현현(顯現)으로 보고 그 유식관(唯識觀)을 익혀 아뢰야식의 본질을 개조(改造:轉依)하여 전식득지(轉識得智)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려 하는 것이 유가행파의 입장이다.

여래장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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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藏思想

여래장이란 원명을 타타가타가르바(tathagata­garbha)라 하여 여래태(如來胎)로도 번역된다. 태란 모태와 태아의 쌍방을 뜻하며, '그 태내에 불(佛)을 잉태한 것'과 '성장해서 불이 될 태아'라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생래적(生來的)으로 갖추어진, 여래(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여래장 또는 불성(佛性)이라고도 한다.

즉 현실적으로는 범부(凡夫)의 마음은 미혹(迷惑)과 더러움에 뒤덮여 있지만 본성은 청정하여(自性淸淨心), 수행에 의해 청정한 본성을 전부 나타낸 것이 여래라고 역설한다. 이처럼 인간의 미혹과 깨달음, 일상심(日常心)과 여래장의 관계를 역설한 것이 여래장연기설(如來藏緣起說)이다.

이 여래장의 사상은 인도에선 유식설보다 먼저 성립되어 중관(中觀)이나 유식의 사상과는 다른 계통을 이루고, 제2기 대승경전의 <승만경>을 비롯하여 <여래장경(如來藏經)>·<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세친(世親)의 <불성론(佛性論)>·<섭대승론석론(攝大乘論釋論)>, 견혜(堅慧)의 <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등에 조직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아직 이 시대에는 아뢰야식과 여래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한 논설이 없었다. 그러다가 제3기 대승경전으로서의 <능가경(楞伽經)>·<밀엄경(密嚴經)>·<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 출현하게 되자 아뢰야식과 여래장과의 조화가 이루어져 여래장연기설이 대성되었다.

유식설에서는, 아뢰야식이란 미혹의 근거이며 깨달음의 능력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아뢰야식에는 미혹(不覺)과 깨달음(覺)의 두 성질이 있다고 보고 어째서 미혹의 현실이 성립되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오도(悟道)로 향할 수가 있는가를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의거하여 역설하고, 미오(迷悟)는 둘이며 동시에 둘이 아니라는(不二) 것을 주장하였다.

일체중생실유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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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는 대승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주장이다.

불성이란 원명을 부다타(buddhata), 부다트바(buddhatva)라 하며, 각성(覺性)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불타의 본성, 깨달음 그 자체의 성질 내지는 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뜻으로, 여래장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본래 불이라 하면 석가모니불만을 지칭한 것인데,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에는 본래 불과 똑같은 본성(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역설하고, 우리들의 마음의 구조는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불이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추고 있으나 우발적·일시적으로 밖으로부터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근심·걱정에 뒤덮여 더러워져 있을 뿐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객진(客塵)인 번뇌의 진(塵)을 떨고, 더러움(汚)이 없어졌을 때, 즉 불이 되는 종자가 전현(全現)되었을 때가 '깨달음(悟)'이며 성불(成佛)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의 하나로 되어 있다.

밀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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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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曼茶羅 만달라(mandala)의 음사(音寫)로서, 구역(舊譯)으로는 단(壇), 신역으로는 취집(聚集)이라고 한다. 밀교에서는 다라니(陀羅尼)를 암송함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제존(諸尊)의 공양이 강조되며, 방형(方形) 또는 원형의 토단(土壇)을 지어 제존을 이곳에 안치하고 제공(祭供)을 울렸다. 이 단을 만다라라고 하는데, 불보살이 충만되어 있다고 해서 취집이라고도 하였다. 본래는 '본질의 것'이라는 뜻으로, 불교의 본질은 보리(菩提), 깨달음이기 때문에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境地)를 나타내고 이를 신성한 도장, 단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등지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하여 제존을 배치한 그림을 가리켜 만다라라고도 한다.

7세기 후반에 중부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대일경(大日經)>은 제존을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집대성하여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라 하였고, 이론적으로는 <화엄경(華嚴經)>의 설을 받아 현실의 사상(事象) 위에 우주의 진실상(眞實相)을 직관(直觀)할 것을 주장하고, 또한 이보다 얼마 후에 남부 인도에서 성립되었다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는 유가행파의 설을 받아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를 역설하고 있다.

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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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言

만트라(mantra)의 역으로 주(呪)·명주(明呪)·신주(神呪) 등으로 번역되며, 또한 밀교에서는 진언은 주다라니(呪陀羅尼), 즉 진언에 의해 재난이 면제되는 힘으로 취급되어, 진언이 다라니(陀羅尼;dharani)의 대표인 것처럼 존중되었다.

원시불교에서는 세속의 주술(呪術)·밀법을 행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나, 실제로는 원시불교 경전에 이미 호주(護呪)가 쓰여져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는 부분적으로 다라니(陀羅尼)나 진언이 채택되어 대승경전 속에는 차차 다라니가 증대하여 갔다. 이것이 잡부밀교(雜部密敎)의 경전이다.

그러던 것이 4세기경부터는 주법(呪法)만을 역설하는 독립적인 경전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와 같은 주구(呪句)를 진언이라 했으며, 후에 대일여래의 설법이라고 자칭하는 밀교가 출현하게 되었다.

용어는 범어(梵語) 또는 속어로서, 그 내용은 본존(本尊)의 범호(梵號) 또는 종자를 나타내는 한자(一字)의 것, 본존 등의 탄덕(嘆德)의 구(句)로 이루어진 것, 교리를 설명한 것, 자의미상(字義未詳)의 구를 늘어놓은 것 등 여러 종류이며, 한역(漢譯)으로는 한자(漢字)에 의한 음사(音寫)를 쓰고 있다.

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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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摩 homa의 음사로서 범소(梵燒)라고 번역된다. 지혜의 불로 미혹·번뇌의 나무를 태우고, 진리의 성화(性火)로 마해(魔害)를 없애는 것을 뜻하는 밀교의 수법(修法)이다. 이것은 본래 인도에서 화신(火神) 아그니(Agni)를 공양(供養)해서 악마를 제거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행하여진 화제(火祭)를 불교에 채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밀교의 수행법으로서는 본존·노(爐)·행자(行者)의 3위(三位)가 구족(具足)해야 하며, 부동명왕(不動明王)이나 애염명왕(愛染明王) 등을 본존으로 하고 그 앞에 의칙(儀則)에 의거한 화로(火爐)가 있는 호마단(護摩壇)을 놓고, 행자(行者)가 규정된 호마목(護摩木)을 태워 불 속에 곡물 등을 던져 공양하며, 재난을 제거하고 행복을 가져올 것을 기원한다.

이처럼 실제로 호마단을 향하여 올리는 유형적(流刑的)인 의식 수법을 외호마(外護摩)·사호마(事護摩)라 하고, 이에 대하여 화단(火壇)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단장(壇場)으로 하여 불(佛)의 지화(智火)로 내심의 번뇌(煩惱)나 업을 태우는 것을 내호마(內護摩)·이호마(理護摩)라 한다. 또한 이 수법(修法)의 기원의 취지를 나무판자나 종이에 쓴 것을 호마찰(護摩札)이라 하여 호부(護符)로 쓴다.

대일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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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如來 원명을 마하바이로차나(Mahavairocana:摩訶毘盧舍那)라고 하며, 대광명편조(大光明遍照)·편일체처(遍一切處)·편조(遍照) 등으로 번역된다. 밀교의 교주이며 우주의 진실상을 불격화(佛格化)한 금본불로서, 일체의 제불제보살(諸佛諸菩薩)이 모두 여기서 출생하는 최고의 이지체(理智體)로 되어 있다.

이 지덕의 면을 나타낸 것이 금강계대일여래(金剛界大日如來), 이덕(理德)의 면을 나타낸 것을 태장계 대일여래(胎藏界大日如來)라고 한다.

그리고 양부(兩部)의 대일(大日)을 합쳐 일체로 한 곳에 대일여래의 전불격(全佛格)이 원만해진다는 것이다.

밀교는 이 대일여래가 설파한 것, 따라서 석존을 교주로 하는 종래의 대승불교와는 다르다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바즈라야나(Vajrayana), 즉 금강승(金剛乘)이라 칭하고 있다. 이 석존과 대일여래의 관계는 천태밀교(天台密敎:台密)에서는 본래 일체(一體)이며 이불동체(二佛同體)로 보는 데 비하여 진언밀교(眞言密敎:東密)에서는 현교(顯敎)의 교주인 석존과 밀교의 교주인 대일은 별체(別體)의 것으로 보고 있다.

즉신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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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身成佛

현신성불(現身成佛)·현생성불(現生成佛)이라고 하며, 현실의 육신(肉身) 그대로의 상태로 부처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부모에게서 받은 이 육신을 변하지 않게 하여 그 육신상에 불덕(佛德)이 이루어져 대일여래의 법신(法身)이 현증(現證)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부처나 중생, 그리고 이들이 사는 환경도 우주를 구성하는 심적·물적 근본요소인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6대(六大)로써 만들어지며, 그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또한 부처나 중생도 신(身)·구(口)·의(意)의 신기한 작용인 3밀(三密)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나 중생은 모두 평등하며, 자신이 범부(凡夫)라는 그릇된 생각을 고쳐 손에 인계(印契)를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외며, 마음으로는 불상을 염(念)한다는 체험을 통해서 용이하게 자기와 부처가 일체가 되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밀교는 현실에 임한 성불(成佛)을 역설하고 있는 점에서 뛰어난 면을 갖고 있으나, 현실을 절대시하는 점에서 자칫하면 타락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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梵天 인도어 본명은 브라마(Brahma)이며, 인도 바라문교에서 '만유의 근원'으로 되어 있는 브라만(梵:Brahman)을 신격화한 것이다. 불교에 채택되어, 3계(三界) 중에서의 색계(色界:음욕·식욕의 2욕을 떠난 자가 사는 세계) 중 초선천(初禪天)의 주(主)로 지목되었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 되었고, 밀교에 있어서는 12천(十二天)의 하나로서 천상계(天上界)의 통령이 되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지배하는 신, 즉 사바주범천(娑婆主梵天)으로서 불타에게 설법을 권하거나 불법을 찬탄호지(讚嘆護持)하는 신으로 되어 있다.

제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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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釋天

원명을 인드라(Indra)라고 하며, 범천(梵天) 등과 함께 인도 고대 신화의 대표적 신(神)인 천계(天界)의 태양신(太陽神) 또는 뇌정신(雷霆神)으로 간주된다.

쌍두마차를 타고 금강의 공이(杵)를 든 용맹신(勇猛神)으로 '베다'의 찬가(讚歌)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 채택된 후에는 3계(三界) 중 욕계(欲界)의 제2 도리천의 주(主)가 되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희견성(喜見城)에 자리잡고, 아수라(阿修羅)와 투쟁했다고 한다.

석존의 수행시대를 통해서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하여 32장수를 거느리고 범천과 함께 불법 수호에 몸을 바친 호법 신이다.

부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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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動明王

원명을 아시알라(Acala)라 하며, 힌두교 시바신(Siva神)의 이명(異名)이 그대로 불교에 채택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동여래사자(不動如來使者)라고도 하여 이 명왕(明王)에게 사자로서의 성격을 주고, 후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서 번뇌(煩惱)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의 행자(行者)를 수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형상을 한 분노신(忿怒身)으로서 맹염(猛炎)이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그의 몸 모양이 동자형(童子形)을 하고 있는 것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되어 밀교행자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의거한 것이다.

조상(造像)에 있어서는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다고도 하며, 불상 중 가장 인도적(印度的)인 명왕부(明王部)의 대표격이다. 즉 7세기 후반 <대일경>이 성립되자, 이 부동명왕은 5대명왕(五大明王)의 주존(主尊)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중국불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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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교학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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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台敎學-思想

<법화경(法華經)>을 근본성전으로 하여 천태대사 지의에 의해 대성된, 중국 불교 중에서 대표적인 교학이다. 그 계보는 멀리 인도의 용수(龍樹)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북제(北齊)의 혜문(慧門), 남악혜사(南岳慧思)를 거쳐 수(隋)의 지의에 이르러 확립된 것이다. 지의의 손으로 이루어진 <법화현의(法華玄義)>·<법화문구(法華文句)>·<마하지관(摩訶止觀)>의 3대부(三大部)가 교의강요서(敎義綱要書)로 중요시되고 있다.

천태교학의 특색은 실상론(實相論)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법화경>에 역설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법(諸法)이란 현실 세계에 여러 현상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가리키며, 실상이란 진실의 모습·존재의의·진실재(眞實在)를 가리킨다.

즉 모든 현실의 존재에는 그 근저(根底)에 진실성이 있고 바로 현실 속에 이상이 있다고 하는 현실의 절대적 긍정의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3면(三面)으로서 <삼체원융(三諦圓融)>이라는 것이 역설되고 있다. 3체(三諦)란 공(空)·가(假)·중(中)의 3체로서 모든 것은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공으로서의 존재이며, 또한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는 가적(假的)인 것이며, 더욱이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초월한 절대존재로서의 중(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체의 것은 이처럼 3체의 면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3체가 원융(圓融)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진실성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주관이 성립된다. 우주는 하나의 통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의 삼천법(三千法)도 모든 것은 일념(一念)에 갖추어져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설(敎說)로 표현되며, 그 사상을 관법(觀法)으로서 실천하는 길이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해설되어 있다. 즉 일체의 존재로서의 삼천, 삼체의 진리를 현실일상(現實日常)의 미혹일념(迷惑一念)의 마음 위에서 관찰하며 그 미혹의 일념의 마음 속에 삼천을 갖추고, 즉공즉가즉중(卽空卽假卽中)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이 관법(觀法)인 것이다.

이처럼 천태교학에서는 이론(敎)과 실천(觀)의 두 가지가 서로 어울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참다운 불교에는 이 교관2문(敎觀二門)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독자적인 교학을 확립하였다.

5시8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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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時八敎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가 역설한 천태종(天台宗)의 교판(敎判)이다. 교판이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뜻으로서, 경전을 가치적으로 비판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일종(一宗)을 확립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지의는 석존 일대의 설법 순서를 5시(五時)로 나누었는데, 부처가 성도(成道) 당초에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역설한 화엄시(華嚴時), 정도를 낮추어 아함경(阿含經)을 역설한 녹원시(鹿苑時), 소승을 버리고 대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역설한 방등시(方等時), 대·소승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편집(偏執)을 제거한 반야시(般若時), 올바른 진실의 가르침을 역설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가 그것이다.

한편, 가르치고 인도하는 형식방법상으로는 곧장 부처의 깨달음을 역설하는 돈교(頓敎),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향하는 점교(漸敎), 서로에게 알리지 않고 적절한 가르침을 베푸는 비밀교(秘密敎), 듣는 자의 능력에 따라 체득시키려는 부정교(不定敎)의 4교(四敎)로 나누어 이것을 화의(化儀)의 4교라 하였고, 또한 가르침의 내용상으로 소승교(小乘敎)의 삼장교(三藏敎), 3승(三乘)에 통하는 대승교의 통교(通敎), 성문연각(聲聞緣覺)과는 별도로 보살의 가르침만으로 모든 것을 차별 면에서 바라보는 별교(別敎), 부처의 깨달음 그대로 모든 것을 원융하는 원교(圓敎)의 4교로 나누고, 이를 화법(化法)의 4교라 하여 두 방면에서 제경(諸經)을 비판적으로 체계화했다.

5교10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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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敎十宗 화엄종(華嚴宗)에서 불교를 5교10종으로 분류하고 비판한 교판(敎判)이다. 5교(五敎)는 두순(杜順)이 관법상(觀法上)으로 소승교·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로 나눈 것을 법장(法藏)이 교의화(敎義化)한 것으로 10종(十宗)은 그것이 표현된 교리상으로 10종류로 나눈 것이다.

5교는 소승자(小乘者)를 위한 가르침인 <아함경(阿含經)>의 소승교,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역설한 <반야경(般若經)>이나 연기(緣起)에 의해 본체와 현상의 구별을 역설한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의 시교(始敎), 모든 것은 본래 변하지 않는 진여(眞如)이지만 이것이 염(染)이 되거나 정(淨)이 된다고 역설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종교(終敎),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역설하는 <법화경>·<화엄경> 등의 원교(圓敎)이며, 특히 그 중에서 제경(諸經)을 초월해서 무진(無盡)의 불법(佛法)을 역설하는 <화엄경>을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삼고 있다. 또한 10종은 주객(主客)을 모두 실체로 삼은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객관만을 실체시(實體視)하는 법유아공종(法有我空宗), 일체를 공으로 하는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모든 본성을 진여(眞如)로 하는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진리를 불가설(不可說)이라 하는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일체를 중중무진(重重無盡)이며 공덕을 원만(圓滿)하고 있다는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을 말한다.

화엄교학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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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敎學-思想

<화엄경(華嚴經)>이 처음 중국에 전역(傳譯)된 것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95∼429)에 의해서이며 그후 이 경전의 연구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나, 화엄의 교학은 이들 경전 연구자들보다는 수(隋)에서 초당(初唐)에 걸쳐 활약한 선관(禪觀)의 실수자(實修者)인 두순(杜順)에서 비롯되어, 지엄(智儼)을 거쳐 현수대사법장(贅首大師法藏)에 의해 대성되었고,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등의 저작에 의해 1종(一宗)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화엄교학의 특색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로 되어 있다. 화엄에서는 법계를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사사무애법계의 4종으로 나누고, 사법계는 현실의 미혹의 세계, 이법계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 이사무애법계는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의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즉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현실즉이상(現實卽理想)의 세계를 나타내었고, 마지막으로 사사무애법계는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특히 제4의 사사무애법계는 화엄교학의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중중무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로 불린다. 여기서는 일체의 존재란 타(他)와 상즉상입(相卽相入)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一)를 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그 속에 수용되며, 하나를 주(主)로 하면 그 밖의 것은 반(伴)이 되어 일체의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고, 차별의 세계 자체가 부처의 목숨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생사의 세계야말로 부처의 주처(住處)이며, 연기(緣起)하는 일체의 것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는 무상(無常) 속에 부처 자체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 현실긍정관(現實肯定觀)을 세웠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설은 '십현연기무애법문'이라든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회상(懷相)의 6상설(六相說)에 의한 <6상원융(六相圓融)> 등의 교설로 강설되며 화엄교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다만 화엄의 교학은 천태(天台)의 교학이 실천으로서의 지관(止觀)을 중시한 데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관법(觀法)은 천태지관(天台止觀)에게 양보하고, 심원(深遠)하고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이론면에 편중하였기 때문에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생명력이 약간 부족한 했다.

말법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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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法思想

석존 멸후(滅後) 불교가 행하여지는 입장에 대해 정상말(正像末)의 3시(三時) 시대구분이 이루어지는데, 정법시대(正法時代)는 교(敎)·행(行)·증(證)의 셋이 갖추어진 시대, 상법시대(像法時代)는 증(證)을 얻는 자는 없어지지만 교와 행은 존재하며, 말법시대(末法時代)는 교뿐으로 행이나 증이 결여된 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말법사상은 교법(敎法)만이 남고 불설(佛說) 그대로 수행하는 자나 깨닫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며, 말법(末法)으로 들어가는 시기는 정법(正法)·상법을 각기 500년 또는 1000년으로 할 것인가, 또는 전자를 500년, 후자를 1000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4종의 이설(異說)이 있으나, 요컨대 상법이 끝난 이후 1만년간이 말법시대(末法時代)라는 것은 일치된 의견이다.

말법이란 정법이 절멸(絶滅)한 시대이며, 그 시기에 삶을 받은 불교도에게 강한 반성과 분기(奮起)를 촉구하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였다.

이 말법사상이 중국 문헌에 나타난 것은 남악혜사의 <남악사선사입서원문(南岳思禪師立誓願文)>이라 하며, 이어 수(隋)의 신행선사(信行禪師:540∼594)는 말법은 제3계(第三階)의 시(時)로 보고, 특정한 일법(一法)에 의하지 않고, 보법(普法:全佛敎)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여 삼계교(三階敎)를 창도(唱道)하였다. 당대(唐代)에는 도작(道綽)·선도(善導) 등이 말법상응(末法相應)의 가르침으로써 정토교(淨土敎)를 퍼뜨려, 이것이 서민 사이에 크게 침투되었다.

정토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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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敎-思想

아미타불의 구원을 믿고, 염불을 외어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역설하는 정토교는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이른바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에 바탕을 두고 용수(龍樹)·세친(世親) 등의 사상적 조직화를 거쳐, 중국에 이르러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동진시대(東晋時代)에 노산(盧山)의 혜원(慧遠)에 의한 염불결사(念佛結社)로서의 백련사(白蓮社)에서 교단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참다운 중국의 정토교(淨土敎)로서 구칭염불(口稱念佛)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로 조직화를 완성한 사람은 담란(曇鸞:476∼542)이었다.

그는 <정토론주(淨土論註)>를 지어 범부(凡夫)의 왕생은 타력(他力)에 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에 의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역설된 염불관(念佛觀)이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옮겨졌다.

그리고 이것이 수(隋)와 당초(唐初)에 걸쳐 활약한 도작(562∼645)에게 계승되어 <안락집(安樂集)>이라는 정토교의 근본성전(根本聖典)을 낳았고, 나아가 당초의 선도(善導:613∼681)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선도는 도작에 의해 염불을 실행하여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를 저술했고, 일반 서민층에 정토교를 깊이 침투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한편, 선도의 계통과는 별도로 자민삼장혜일(慈愍三藏慧日:680∼748)이 주창한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입장에 선정토교가 있으며, 결국 중국의 정토교에는 노산 백련사(白蓮社)의 혜원류(慧遠流), 담란·도작·선도의 선도류(善導流), 자민삼장의 자민류 등 3파가 존재했다.

특히 담란이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판별한 이행도가 그 후의 정토교의 주류를 이루었고, 한편 선도는 일체행(一切行)을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으로 판별하여, 일심전념(一心專念)하여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염(念)하는 것을 정행으로 하고 그 밖의 제행(諸行)을 잡행으로 하여 정행만이 왕생(往生)에의 근본도(根本道)임을 역설했다.

이처럼 미타의 명호를 욈으로써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일행전념(一行專念)의 순수한 신앙의 입장은 당대(唐代)까지이며, 송대(宋代) 이후는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그 순수성을 잃어갔다.

선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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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思想

이론보다도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인은 인도불교와 중국의 도가(道家) 사상을 결합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실천적 불교를 세웠다.

이것이 중국에서 개화(開花)된 선(禪)이며, 선종(禪宗)의 발생은 중국의 불교가 학문불교(學問佛敎)에서 실천불교(實踐佛敎)로 옮겨지는 시기에 해당한다.

선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행(行)이며, 인도의 좌선법(坐禪法)을 역설한 선경(禪經)의 번역도 이미 오래 전부터 행하여졌고, 여기에 바탕을 두고 관법(觀法)을 수행한 불교인도 꽤 많았으나 이들은 대부분 번쇄한 소승선(小乘禪)의 영역에 머물렀고, 대승선(大乘禪)의 입장에서 지관문(止觀門)을 창설한 천태(天台)·지의나 도생(道生)이 설파한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 등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사상적 전개를 성취한 것을 달마(達磨)가 전하여 발전한 것이 중국의 선종(禪宗)이다.

달마는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왕자라 하며, 470년경 중국에 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면벽(面壁) 9년을 했다 한다. 달마의 저작(著作)으로 알려진 것은 수없이 많으나 대부분 후일 선종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달마의 진설(眞說)로 알려진 것은 겨우 <이입사행(二入四行)> 한편에 불과하다.

2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으로 되어 있는데, 이입은 중생이 본래 부처와 동일한 진성(眞性)을 갖추고 있음을 믿도록 역설한 것이고, 행입은 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 원소심(寃訴心)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보원행(報寃行), 도(道)에 순종할 것을 역설한 수연행(隨緣行), 탐욕을 떠난 무위(無爲)의 행도(行道)를 역설한 무소구행(無所求行), 성정(性淨)의 이(理)를 깨닫고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기를 역설한 칭법행(稱法行)의 4행(四行)이다.

달마의 선법(禪法)은 혜가(慧可)를 거쳐 승찬(僧璨)으로 전하여졌는데, 이 두 사람은 북주파불(北周破佛)에 의해 서주(舒州) 완공산에 숨어, 이른바 집단생활에 의한 선의 실천은 4조(四祖) 도신(道信), 5조(五祖) 홍인(弘忍)에 의한 동산법문(東山法門)에서 비롯된다.

5조 밑에는 남종선(南宗禪)을 연 혜능(慧能), 북종선(北宗禪)을 연 신수(神秀)가 있고, 그와 별도로 삼론계통(三論系統)의 우두(牛頭) 법융(法融)에 의한 우두선(牛頭禪)이 대두하여, 이들 선자(禪者)의 활약으로 사상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북종선이 성했으나 후에는 남종선이 유력해져, 이 계통이 중국선(中國禪)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선종의 특색은 문자(文字)에 구애되지 않고, 그 정신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여 사자(師資:스승과 제자)의 전등(傳燈)을 중시하고 부처와 동일한 자기의 본성에 눈을 뜸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 있다.

공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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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案禪

공안이란 본래 공부(公府)의 안독(案牘), 즉 정부의 공식포고와 같은 것을 뜻하는데, 선종에서는 뛰어난 선자(禪者)의 깨달음이나 인연·언행 등의 뜻으로 쓰이며, 학인수행(學人修行)의 길잡이, 학인접득(學人接得)의 방법으로 쓰였다.

이 공안을 공부하고 이를 화두(話頭)로 하여 본성을 구명하려 하는 선(禪)을 공안선·간화선(看話禪)이라 하며, 남송(南宋) 초기,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1089∼1163)에 의해 주장되었다.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설(說)하며 일정한 교의(敎義)가 없기 때문에 제자는 오직 사승(師僧)의 언행에 의지하여, 스승의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려는 것으로서, 그런 뜻에서 오경(悟境)에 이른 선승(禪僧)의 언행이 중요시되었고, 이를 기록한 어록(語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임제의현(臨濟義玄)의 <임제록(臨濟錄)>, 중현(重顯)의 송고백칙(頌故百則)에 환오극근이 평창(評唱)을 가한 <벽암록(碧巖錄)>, 굉지정각(宏智正覺)의 송고백칙에 만송행수(萬松行秀)가 평창을 가한 <종용록(從容錄)>, 무문혜개(無門慧開)가 사팔칙(四八則)의 공안을 점제(拈提:古則을 제시하여 이를 평창함)한 <무문관(無門關)> 등이 대표적인 공안집이다.

묵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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默照禪

묵(默)은 말이 없고 담연적정(湛然寂靜)한 불심(佛心)의 체(體:本質), 조(照)는 조용(照用)으로서 영묘불매(靈妙不昧)한 불심의 용(用:作用)을 말하는 것으로, 묵묵히 앉아 있는 곳에 스스로 깨달음이 나타난다는 선풍(禪風)이 묵조선이며, 남송 초기에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주창하였다.

묵조선의 호칭은, 대혜(大慧)가 굉지의 선풍을 지나치게 묵념부동(默念不動)에만 그쳐 활발한 선기(禪機)를 잃고 있다고 평파(評破)한 데서 온 말인데, 굉지는 이에 대해서, 묵조(默照) 두글자를 가지고 정전(正傳)의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북조명(默照銘)> 1편을 만들었으며, 묵좌(默坐)하는 것만이 혜(慧)의 작용을 활발히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정도(正道)라 하였고, 한편 대혜의 선(禪)을 공안에 구애(拘碍)받아 맹봉난갈(盲棒亂喝)을 휘둘러 득의만만(得意滿滿)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고 맹렬히 반격하여, 이로부터 묵조선·간화선의 병칭(倂稱)이 생기게 되었다.

양자의 논란(論亂)은 서로 상대를 멸시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인데, 얼핏 보기에는 대립적인 것으로 보이나 본래(本來)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자는 모두 동일한 선상(禪上)에서 일어난 선풍(禪風)의 차일 뿐, 철저하게 따져 나가면 모두 같은 곳에 귀일(歸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