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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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歷史〔槪說〕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타마 부다(Gautama Buddha)에 의해 현 네팔과 인도 동북부지방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발흥하였다. 고타마 부다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성(迦毘羅城:Kapilavastu)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要件)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정각(正覺)·포교(布敎)는 현 인도 비하르(Bihar) 지방에 해당되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이 마가다 왕국이 불교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불타는 가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

uddhodana)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는 사키야(Sakya:釋迦)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고 성(姓)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라 하였다. 후에 '깨달음(覺)'을 얻은 후 고타마 부다라 불렀다. 또 사키야족의 성자라는 데서 석가모니(釋迦牟尼:

akyamuni) 혹은 석존(釋尊)이라고도 불렀다.

불교 성립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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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成立-時代的背景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의 종교계는 다른 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animism)적 경향을 띤 원시신앙이 지배하고 있었고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개인에 내재 (內在) 하는 원리인 아트만(

tman)을 상정(想定)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 브라만(Brahman)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前生)의 업(業:Karma)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고,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윤회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을 당시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이론이나 실천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 업(業)·윤회·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철학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불타도 '깨달음(無上正等覺:Anuttara­samyak­sam)'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 그가 29세에 부인인 야수다라(耶輸陀羅:Ya

odhara)와 아들 라후라(Rshula)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택한 길이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이라는 당시 유행되던 수행 방법이었다. 알라라 칼라마 (

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 (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치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Buddhagaya)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의 내용이 4체(四諦)·12연기(緣起)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불타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Dharma)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비나레스(Benares)의 녹야원(鹿野園:Migadaya, 現 Sarnath)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說法)을 하고(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교리(敎理)·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아쇼카왕과 불교의 흥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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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oka王-佛敎-興隆

불타는 45년간 교화(敎化) 활동을 하며 승단(僧團)을 이끌다가 80세가 되는 BC 544년 입멸(入滅)하여 열반(涅槃)에 들고 승단은 마하가섭(摩訶迦葉:Mahaka

yapa) 등이 중심이 되어 불타의 율(律)과 법(法)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멸후(佛滅後), 곧 불타의 교법(敎法)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불타에 의해 수기설법(隨機說法)된 것을 결집(結集)을 통해 성전(聖典)으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

왕사성(王舍城)에 500명의 비구(比丘)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優波離:Upali)가 율(律)을, 아난(阿難:

nanda)이 법(法)을 암송하여 불설(佛說)을 정전화(正典化)한 것이다. 그후 불교는 마가다를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후(王侯)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BC 317년경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Maurya) 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쇼카(Aoka:阿育)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인 팽창을 보아 캐시미르,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식민지, 스리랑카(실론)·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전파했다. 아쇼카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왕이었다.

부파불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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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派佛敎時代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流通)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교파분열을 초래하였다. 불멸 후 100년경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를 낳았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Theravada)라 하였고 후자를 대중부(大衆部:Mahasamghika)라 한다. 부파 발생의 원인은 불타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 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유래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샬리(Vai

ali:毘舍離)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된 것이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으니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크게 둘로 갈라진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각각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부파 발생의 발단은 계율 해석의 학설상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독자부(犢子部)·화지부(化地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經量部) 등이 존재했다. 이 시기를 부파불교 시대라고 지칭하는데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外的) 확대와는 달리 불타 당시와 같은 순수성 내지 발랄성을 잃고 율(律)·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注釋學)에 빠졌다. 곧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으니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出家) 중심의 학문불교(學問佛敎)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러한 운동은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불교도가 주동이 되었다. 이것을 대승불교(大乘佛敎)운동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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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佛敎-興起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BC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는 쇠퇴·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보았고 그러한 세력은 실론을 위시한 남방 제국(諸國)으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4∼5세기간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소승불교와 함께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형성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Arhan)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불타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本生譚)·아바다나(Avadana:譬喩文學)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경전(經典)들이 만들어졌다. 대승경전의 성립이 그것이다.

1세기 후반에 쿠샨(Kusan:貴霜) 왕조가 성립되고 그 3대 왕인 카니시카(Kania)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한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그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現) 페샤와르(Peshawar)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로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 왕조의 영토가 인도와 중국을 잇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 지방에서 마투라(Mathura)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는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하여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 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有部)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캐시미르 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 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BC 1세기에서 기원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경전 가은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공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Nagarjuna)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Madhyamaka → karika)>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layavij

ana)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Maitreya)·무착(無着:Asanga)·세친(世親:Vasubandhu)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은 세친 이후 유력한 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佛護:Buddhapalita, 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Baviveka, 490∼570경)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Candrak

rti, 600∼650경)과 적천(寂天:

antideva, 650∼760경)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antaraksita, 680∼740경)·연화계(蓮華戒:Kamalasila, 700∼750경)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陳那:Dinnaga, 400∼480경) 계통과 덕혜(德慧:Gunamati, 420∼500경)와 안혜(安慧:Sthiramati, 470∼550경)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Dharmapala, 530∼561)·법칭(法稱:Dharmak

rti, 643∼673)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소위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밀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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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敎-成立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운 불교의 대두를 보게 된다. 곧 밀교(密敎)의 발흥이다. 밀교사상은 불타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진언(眞言:Mantra)·다라니(陀羅尼: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 밀교도 대승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의 퇴영적 일면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발생 이유는 세친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어 마치 아비달마 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된 것이다. 중관 사상도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 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하나의 불교 유파를 형성시켰으니 그것을 금강승(金剛乘:Vajrayana)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타라부저 (因陀羅部底:Indrabhuti, 687∼717?) 였다. 그의 아들인 연화생(蓮華生:Padmasam)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을 일으켰다.

티손데첸(Khrisron­Ide­bstan)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측의 점문파(漸門派:Rcen­Min­pe)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Ston­mun­pa)의 설은 배척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 불교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인도불교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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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佛敎-衰退

금강승(金剛乘)불교가 팔라(Pala) 왕조(750경∼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 지방과 서벵골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의 세력은 오히려 중국·한국·일본에서 흥왕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불(彌勒佛)·관음(觀音)·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은 불(佛)·보살(菩薩)들이 힌두교의 제신(諸神)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된 점에 있었고 그 위에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가 도태되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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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傳播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스리랑카·미얀마·타이와 중앙 아시아 제국(諸國)을 비롯해 티베트·중국·한국·일본 등 광범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민족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그 후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 시대에서 수(隋)·당(唐)을 거쳐 송(宋)·원(元)·명(明)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특한 불교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성격을 지닌 중국인에게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충돌을 면치 못했다. 그 전래 시기는 전한(前漢)경으로 소급되고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는 것은 후한(後漢)에 들어와서였으나, 현실을 떠나는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가 현세주의적 사상풍토를 조성하고 있던 당시에 쉽게 수용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중국불교의 초기 수용시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400년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 200년간 불교는 착실히 뿌리를 뻗게 되었다.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번역기술이 발달을 보인 이외에 많은 인도승(僧)들이 들어왔다. 구마라습(鳩摩羅什, 350∼409)·담무참(曇無讖, 385∼433)·보리유지(菩提流支, 5세기말∼6세기초)·진체(眞諦, 499∼569) 등이 나타나 본격적 번역을 행하여 학문상·신앙상의 기초를 이룩했다. 후대에 이르자 당시의 조류에 대해 비담종(毘曇宗) 등의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비담(阿毘曇)>·<성실론(成實論)>·<열반경(涅槃經)>·<십지경론(十地經論)>·<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이 경론(經論)을 연구 대상으로 한 학파에 대한 명칭이었고, 또 이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되었다.

수(隋)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대립이 통합·해소되고 불교계에도 발랄한 신기풍이 일어났다. 6세기 말부터 8세기 전반에 이르는 150년간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를 일으켰다. 가상(嘉祥) 길장(吉藏, 549∼623)의 삼론종(三論宗), 천태(天台) 지의(538∼597)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594)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645)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자은(慈恩)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현수(贅首)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 대감(大鑑) 혜능(慧能, 638∼713)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727)의 밀교 등의 종파가 발생된 것이다. 특히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528)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혜능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선종은 그후 임제(臨濟)·위앙·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 등 종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을 풍미하였다.

이렇게 수·당 송대를 거쳐 중국 특유의 종파불교가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일본도 대체적으로 중국의 중파적인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백제·신라는 수용한 종파불교를 종합불교(綜合佛敎)로 지향시키면서 난만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李 珉 容>

원시불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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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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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始佛敎

불교는 불타(佛陀:Buddha)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면서 그것이 계승·전파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하여 아시아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퍼져나간 불교를 모두 똑같은 한가지의 것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각기 다른 특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불타가 도(道)를 깨닫고 전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그의 입적(入寂)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성립된 불교를 일반적으로 원시불교라 한다.

그 기간은 불타의 제자들 사이에 분파가 생겨날 때까지의 약 2,300년간을 말하는데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원시불교의 특색은 불타의 가르침이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에 있으나 실은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口傳)된 것이 불타의 입적 후 정리된 것으로 그 확실성의 한계점을 긋기는 어려운 것이다. 불타 및 그의 직제자(直弟子)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그 후의 것을 협의의 원시불교라 하는 설도 있다.

불타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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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陀-傳記

불타는 역사적 실재인물이다. 그의 생애를 기록한 불전(佛傳)은 많이 있으나 거의가 불타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 거기에는 당연히 신앙적 욕구에 의한 신비적이고 영험적(靈驗的)인 여러 가지 윤색(潤色)이 가해지게 되었다.

가령 불전경전(佛傳經典)은 서력기원 전후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아습박구사(馬鳴) 작이라 하는 <부다차리타(Buddhacarita)>(漢譯<佛所行讚>)는 불타의 생애를 서사시풍으로 노래한 것이고, 한역으로 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은 60권에 달하는 불전의 집대성이다. 이들은 모두 신앙적 전기물로서 객관적인 기술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불전에는 전기와 전설이 혼재(混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실재로서의 불타의 생애는 이와 같은 다분히 전설적인 자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이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실증적으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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誕生

불타가 탄생한 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어서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타는 대략 서력 기원전 486년부터 483년경에 네팔 지방의 소왕국(小王國)의 왕자로 태어났다. 탄생일은 북방불교에서는 4월 8일이고 남방불교에서는 5월 보름날(이날을 베사카 제일로서 축하한다)로 되어 있다.

불전에는 이날 불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면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 불세출의 종교적 거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석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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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迦族

불교의 창시조 고타마 부다의 존칭인 석가모니(釋迦牟尼:Sakya­muni)가 석가족 출신의 성자(聖者)를 의미하는 것과 같이 불타는 석가족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은 아리아계통의 코살라 종족의 일파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석가족은 불타가 이세상에 나올 무렵 이미 북인도의 가비라성(迦毘羅城)을 중심으로 하여 소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인도는 오랜 귀족 공화정치로부터 왕족이 지배하게 되는 정치체제로 옮아가는 도중이었는데 불타가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아직 강력한 전제국가는 출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족의 주위에는 코살라국(國), 마가다국, 쿠시나가라국과 기타 왕국 또는 공화국이 병립하여 있어서 이들 사이에 낀 석가족의 정정(政情)은 불안하였다.

석가족은 무사계급에 속하고 농경과 교역에 종사하며 수공업도 발달한 편이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약체를 면치 못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뒤에 코살라 왕국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여 상징되는 석가족의 국가적 불안은 왕자로 태어난 젊은 날의 불타가 출가하게 되는 동기와 조금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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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飯王

가비라성의 왕. 싯다르타의 아버지인 수도다나(Suddhodana)를 말함. 그는 라자(왕)의 지위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그마한 나라의 공화정치의 대표자였다. 싯다르타를 깊이 사랑하여 그가 출가(出家)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이를 막아보려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뒤에 싯다르타가 정각(正覺)에 도달하여 불교를 펴게 되자 스스로 나아가 독실한 귀의자(歸依者)가 되었다. 76세 혹은 9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마야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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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耶夫人

싯다르타의 생모(生母)인 마하마야(Mahamaya)를 말한다. 구리성(拘利城)의 집정관 선각장자(善覺長者)의 딸로 태어나 이웃 나라 정반왕의 왕비가 되었다.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45세에 싯다르타를 잉태하여 당시 인도의 습관에 따라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하여 구리성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의 숲속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고 한다. 싯다르타의 출산 후 7일 만에 죽었다.

룸비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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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mbini園

중인도 카필라바스트(Kapilavastu:迦毘羅城)에 있었던 임원(林園). 불타가 탄생한 성지로 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그 소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7년 네팔국의 남쪽 룸민디에서 아쇼카왕이 룸비니를 방문한 기념석주(記念石柱)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판명되었다.

출가 이전의 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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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家以前-佛陀

불타는 가비라성의 왕자로 태어났다. 경전에 의하면 그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사파뎨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그는 성을 고타마(Gautama), 이름을 싯다르타(Siddhartha)라고 하였는데 이는 '소원성취'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부왕(父王)의 한없는 애정이 담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왕자였던 그의 소년시절은 물심양면에 걸쳐 행복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무예에 관한 교육을 받았으나 명상을 즐기는 폭넓은 성격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커서 외사촌인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후라를 얻었는데 그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출가하기를 희구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일찍부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고 하나 주요한 원인은 궁정생활의 형식적 행복에 젊고 순수한 불타가 견디지 못하였던 데에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일찍 생모를 여읜 일과 나아가서는 생(生)에 대한 보다 원초적인 회의가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전에는 젊은 날의 불타가 인생의 무상함에 눈떠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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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家

불타의 출가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타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여 그로 하여금 끝내 가족의 애정과 유대관계를 단절하고 왕국을 떠나가게 한 것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도(道)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정열이었다. 불전에 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는 노(老)·병(病)·사(死)·사문(四門)의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그의 강렬한 자각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불타는 인생문제에 관한 한 조금도 허술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인도에는 도를 닦으려 하는 자는 출가하는 풍습도 있어서 아들 라후라를 얻어 후계자에 대해 근심하지 않아도 된 불타는 29세가 된 어느날 밤에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 성문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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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行 시종과 헤어진 불타는 정발(淨髮)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구걸을 하면서 남쪽의 마가다국(Magadha國)을 향하여 갔다.

불타가 찾아간 이 나라 수도 라자 그리하(Raja­grha:王舍城)는 당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불타는 바라문교의 행자(行者)로부터 요가를 배웠으나 정신적인 만족이 없었으므로 다시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네란쟈나강(Nairanjananati江: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이 6년 동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때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다섯 사람의 수도자가 떠나갔으나 그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에 앉아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불타의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왕(魔王)들과의 싸움을 그린 불전에 잘 나타나 있다.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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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道

불전에 따르면 불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月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노·병·사의 본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煩惱)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정적(絶對靜寂), 즉 열반(涅槃)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 즉 정각(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자, 즉 불타(佛陀)가 되었다는 자기혁신의 일대 전환이었다. 불교는 이 자각을 얻은 자, 즉 불타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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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提樹

필발라나무 또는 아슈바타라고도 한다. 불타가 이 나무 아래에 좌선(坐禪)을 하여 정각(正覺:菩提=보리수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불타가 깨우침을 얻은 보리수는 네란쟈나강의 물가에 있었다고 하며, 불타 정각(正覺)의 고사에 관련되어 이 땅을 부다가야라고도 하였다. '보대수'라고도 발음한다.

초전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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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轉法輪

성도 후의 불타는 한동안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 이러한 법락(法樂)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고자 우선 지난날에 같이 고행을 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修行者)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을 방문하였다. 그들 다섯 사람은 고행을 그만둔 불타를 경멸하였으나 드디어 불타의 설법에 감화되었다. 이때에 불타는 쾌락과 금욕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입장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타가 성도를 한 후 최초로 행한 설법(說法)을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법륜을 전(轉)한다 함은 법을 설파하고 그 실현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하여 불타의 제자인 5인의 비구(比丘)가 나타나게 되어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 성립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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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道

초전법륜은 불교 전도의 제일성이었으며 동시에 불타의 입멸(入滅)에 이르기까지의 45년간에 걸친 부단한 설법의 시작이었다. 불타는 왕사성(王舍城)과 사위성(舍衛城)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說法)을 해나갔다. 불타의 가르침은 심원한 것이었으며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과 비유·인연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차차 제자가 불어나서 경제적으로 불타를 돕는 독실한 귀의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입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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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滅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불타는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시(市)에서 받은 공양(供養)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을 앓더니 드디어 쿠시나가라의 땅에서 입멸하였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북쪽에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편 후 조용히 입멸하였다 한다. 이 날은 기원전 383년 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月의 만월의 밤)이었다고 한다.

교단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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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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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迦-發生

불교의 교단(敎團)을 승가(Sa­maha)라고 한다. 이를 약해서 승(僧)이라고도 하고 또 화합중(和合衆)이라고도 하며, 불타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한 집단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제도와 방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불교 교단의 경우 처음부터 어떠한 제도가 이루어지고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 의하여 다섯 사람의 비구를 제자로 삼은 이래 불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자연히 불타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가게 되었다. 그들은 수도를 위하여 청빈과 검소를 근본으로 하고 우계(雨季) 때의 옥내생활을 제하고는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탁발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자연히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약이 생기게 되었다.

불타의 가르침에는 교리로서의 법(法)과 개인이나 집단을 규제하는 율(律)이 있다. 원시승가에는 그리 많은 계율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차차 교단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또 승가 밑에는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재가신자(在家信者)가 증대되어갔음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 중에는 불타에게 죽림정사(竹林精舍)를 헌정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기원정사(祈園精舍)를 시주한 사위성(舍衛城)의 수다타 장자(長者) 등이 있었다. 원시불교 교단은 수도자인 비구와 비구니(比丘尼)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재가신자를 주위에 갖고서 점차 발달하여 갔다. 여기에 대하여 이교도의 방해와 내부로부터의 배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타의 사촌동생 테바다타는 교단의 분열을 획책하다가 실패하였다고 전한다.

10대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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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大弟子

불타의 제자들 중에는 개별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지혜가 제일이었던 사리불(舍利佛:Sariputra), 신통력(神通力)의 목건련(Maudgalyayana), 무집착(無執着)에 투철한 마하가섭(摩訶迦葉:Mahakasyapa). 천안력(天眼力)을 가졌었다고 하는 아나률(阿那律:Aniruddha),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잘 깨우쳤다는 수보뎨(須菩提:Subbuti), 설법에 능한 부루나(富樓那:Purnamaitrayaniputra), 토론을 잘하는 가전연(Katyayana), 지율(持律)의 우바리(優婆離:Upali), 다문(多聞) 제일의 아난(阿難:

nanda), 행지(行持)가 면밀한 라후라(羅候羅:Rahula)는 특히 10대 제자로 손꼽혀 전해지고 있다.

마하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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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訶迦葉 마하카샤파(Mahahasyapa),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불린다. 왕사성 부근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타의 제자가 되었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불타의 신임을 받아 문하생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불타가 입적한 후에는 비탄과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다. 영취산(靈鷲山)에서 불타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점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故事)는 유명하다.

제1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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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結集

불타의 설법은 주로 구화(口話)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불타가 입적하게 되자 그의 가르침의 내용이 올바르게 후대에 전해질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졌다. 이에 불타의 교법(敎法)을 옳게 파악해 놓지 않으면 사이비 설법이 세상에 나돌아 결국에는 정법정률(正法正律)이 없어지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 마하가섭은 불타의 입멸 이듬해의 우계(雨季)에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 500명의 비구를 모아놓고 불타의 가르침에 대한 결집(結集)을 거행하였다. 결집이라 함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가 이해하고 파악한 불타의 가르침으로서 다시 교단이 확인하는 일이다. 이것은 불타가 남긴 가르침의 산일(散逸)을 막고 교단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때의 결집을 오백결집(五白結集)이라 하며,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계율을 보지(保持)함에 으뜸인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였다. 경이라 함은 교리와 사문에 관한 설법이며, 율은 행위와 교단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나 이 결집으로 경과 율이 완성된 것은 아니고 제3회 후에도 몇회의 결집이 있었다.

제2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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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結集

제1결집에 있어서도 이미 신구(新舊) 사상의 대립이 엿보이게 되었는데 불타의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게 되자 계율에 대한 새로운 설을 제창하는 자가 있어서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발생하여 분규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베샬리(Vaisali:吠舍離)에서 야사(耶舍)가 중심이 되어 700명의 상좌부장로(上座部長老)를 모아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썼다.

이를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그후에 일설(南傳島史 등)에 따르면 이에 불복한 진보적인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었다고 한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大衆部)를 형성하게 되었다.

제3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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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結集

남방에 전해진 불교에 의하면 아쇼카왕대(代), 불멸후(佛滅後) 200년경에 10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율(律)·경(經)·논(論)의 삼장(三藏)을 결집하였다고 하며 이를 천인(千人)결집이라고 부른다.

아쇼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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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oka王

구(舊) 마가다국의 왕통을 이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인도에 처음으로 이상적인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왕의 사적에 관하여는 왕이 각지에 건립한 비의 비문 외에도 전설적 형식으로 된 아육왕전(阿育王傳)이나 아육왕경(阿育王經)에 의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서력 기원전 271년경 왕위에 오른 지 얼마 후 불교에 귀의하여 우바색(優婆塞:남성의 재가신도)이 되었는데 가릉가국 정복의 무자비한 전쟁을 체험한 뒤에는 더욱 깊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즉위 후 약 10년이 되어 '삼보리(三菩提)'의 정각(正覺)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며 이후 한층 더 불교에 정진하여 불교를 정치에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불법의 대관을 두어 각지를 순회시키고 소아시아·그리스·스리랑카 등의 먼 곳에는 사자(使者)를 보냈다. 또한 불교적 생활도덕을 설포하는 법칙(法勅)을 마애(磨崖)와 석주(石柱)에 새기고 병원과 사탑(寺塔)을 건립하였으며 약초를 재배케 하기도 하였다. 남방불교에서는 왕의 통치하에 제3회결집이 있었다고 하나 북전(北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왕의 시대에 불교 교단은 분열상을 보이고 있었고 왕이 귀의한 것은 상좌부 계통의 불교였다. 왕은 많은 국고금을 불교의 보호에 사용하였으므로 만년에는 국가경제가 궁핍해지고 왕 자신도 별로 행복스럽지 못하였으나 최후까지 불교에 대한 원죄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 대하여도 관용을 베풀었으며, 불교는 이 시대에 왕의 전영토와 주변에 확대되었다.

부파불교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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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2부의 분열과 부파불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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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二部-分裂-部派佛敎-成立

불타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하여 행한 제1회결집이 불타의 가르침에 충실하려 하였기 때문에 보수적 경향을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경향을 가진 장로비구(長老比丘)에 대하여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비구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에서의 결집에 대하여 부루나(富樓那)가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는 것을 열어 이의를 기하였던 것과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게 되었다. 불타입멸 후 110년경 진보파의 비구 발도자(Vajjiputtaka)는 계율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내세웠으나 상좌장로들은 이를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틈은 더욱 벌어져서 진보파의 비구들은 마침내 자파들만의 결집을 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많은 비구들이 모이게 되어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중부(大衆部)라고 하여 상좌장로의 상좌부(上座部)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을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하며, 이로써 불교 교단은 표면상 2대(二大)파로 분열되었다. 이어서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 부파불교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소승2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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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乘二十部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불타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승20부로서는 대중부 계통으로서 대중부(大衆部)·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鷄胤部)·다문부(多聞部)·설가부(說假部)·제다산부(制多山部)·북산주부 (北山住部)의 9부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독자부(犢子部)·법상부(法上部)·현주부(贅胄部)·정량부(正量部)·밀림산부(密林山部)·화지부(化地部)·법장부(法藏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輕量部)의 11부, 합계 20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비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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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毘達磨

아비달마(Abhidharma)라고 함은 논(論)이라고도 불리는 것처럼 경전의 설명과 주석을 의미한다. 성전으로서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불교가 여러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에 일단 성립되어 있었으나 이것에 대한 설명과 주석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 논장(論藏)으로서 정리된 것은 부파불교의 시대에 들어가서부터였다. 각부파는 자파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하여 각각 독자적인 성전을 편찬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불타시대의 볼교의 순수성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되었으며 동시에 종래의 경전에 대하여 쓸데없는 해석학적 경향을 더욱 심회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아비달마적 경향은 불교를 출가 중심의 은둔적 학문불교로 만들어 불타 재세시에 있었던 율동적인 힘을 잃게 하였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대두한 것이 대승불교인데 이 대승불교도 뒤이어 논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를 부파불교의 소승론에 대한 대승론이라고 한다.

카니시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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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ishka王

중앙 아시아 대월지족(大月氏族)으로부터 일어났던 쿠샨족은 서력 1세기 중반에 서북인도에 진입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카니시카왕은 이 나라의 3대째 왕으로 2세기 전반의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조로아스터교의 신도였다고 전해지나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아쇼카왕을 이은 불교보호자가 되었다. 왕의 주변에는 아습박구사(馬鳴)왕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장로 파르슈바(脇尊者)가 있어서 이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국내 각지에 많은 불탑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쿠샨 왕조 시대의 문화는 그리스·로마·이란 등으로부터 들어온 서방문화와, 중앙과 중앙 아시아에서 온 동방문화의 영향을 융합하게 되었으므로 카니시카왕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후비슈카왕 시대에 걸쳐, 문화사상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리는, 후세의 아시아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준 불교예술을 형성하였다.

대승불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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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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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佛敎-擡頭

대승(Mahayana)이라 함은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중생을 운반하는 커다란 탈것을 의미한다. 당시 상좌부 계통의 불교는 경전의 훈고·주석에 치우쳐 형식화되었고 승원(僧院)에 있어서의 출가 중심의 고답적인 독선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를 반성한 혁신적인 비구들과 당시에 성불(成佛)을 이상으로 보살행(菩薩行)에 정진하고 있던 재가(在家) 신자들 사이에 형식보다도 내용을 중시하고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초월하여 널리 사회를 구제하려는 실천적 신앙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강조하고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자기본위의 전통적 불교를 소승(Hinayana)이라 낮춰 부르고 자기들의 입장을 대승불교라고 불렀다. 대승불교는 불타시대의 근본정신 회복을 지향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것으로서 형식화된 부파불교의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밀교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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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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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敎-擡頭

인도는 본래 다신교의 나라였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제신(諸神)을 숭배하였으며, 재앙을 막고 복을 받기 위한 요가수행과 성구(聖句)·만트라(眞言)의 구송(口誦), 불속에 물건을 던져넣으면서 하는 여러 종류의 기원 따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노력에 의하여 정각(正覺)에 이를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타의 가르침은 이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으나 꽤 오래 전부터 불교 속에 바라문교의 여러 신들이 수호신으로서 받아들여졌고 또 수호주(守護呪) 따위가 독송되고 있었다. 7세기에 들어와서 화엄경(華嚴經) 등 대승불교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바라문교와 기타 민간종교의 주법(呪法)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교가 성립되었다. 밀교라 함은 다라니나 만트라를 욈으로써 마음을 통일하여 정각에 이르고자 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이며 그 심오한 경지는 외부에서 들여다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비밀교라는 뜻의 약칭이다. 여기에는 범신론적인 불타관은 나타나지 않고 만다라(曼茶羅)와, 외면 영험을 얻게 된다는 다라니(陀羅尼), 식재(息災)·조복(調伏)·증익(增益)을 위한 호마법(護摩法) 등 제법(諸法)의 채용이 그 특색이다.

잡밀·순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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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密·純密

초기의 밀교사상에는 제존(諸尊)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나, 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성립하여 밀교의 이론적 근거가 정비되자 밀교교리의 실천에 의한 성도(成道)가 강조되었다. 이것을 순밀교라 칭하고 그밖의 것을 잡밀이라고 하여 구별한다. 순밀은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한다.

좌도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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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道密敎

밀교는 바라문교 혹은 힌두교의 지반을 이용하여 퍼지게 되었는데 뒤에는 힌두교의 일파인 시바의 여신 샤크티(性力)를 숭배하는 샤크티파 따위와 결부되어 윤좌예배(輪坐禮拜)와 성적 황홀경 속에서 해탈을 얻으려는 좌도밀교(탄트라 불교)라고 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애욕과 쾌락을 긍정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가르치려 한 것이었으나 인도의 민중 사이에 잠재해 있었던 성(性) 숭배의 신앙과 겹쳐서 비외(卑猥)스러운 성적비의(性的秘儀)에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

인도불교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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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佛敎-滅亡

굽타 왕조(270∼470년경)를 중심으로 하여 최성기를 맞았던 대승불교는 뒤이어 고원(高遠)한 학문과 사상체계로 이론화되어 종교로서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밀교는 민중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힌두교적 색채가 강해짐에 따라서 불교 본래의 모습은 희박해지고 다시 좌도화(左道化)되어 타락의 길을 걸음으로써 당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고 있던 인도 제왕(諸王)의 민족의식과 결부되어 부흥기에 있었던 전통 바라문교-힌두교 앞에서 후퇴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었다. 특히 12세기말부터 13세기초에 걸쳐 배타적 일신주의를 내건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불교의 중심지였던 비하르지 방을 점령하고 밀교의 본거지였던 비크라마시라 사원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많은 승려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내외적으로 쇠퇴가 촉진되어 인도 땅에서 쇠망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샘이나 벵골 지방에서 소수의 불교도가 잔존해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는 부흥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제국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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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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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方佛敎

아시아의 남방지역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전파되었으나 그 계통과 형태, 지역에 따라 대략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미얀마·타이 등지의 파리 불교,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불교, 오늘날 유적만을 찾아볼 수 있는 캄보디아 불교, 남해 불교의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 신봉되고 있는 아시아 남방 여러 나라의 불교는 일반적으로 보수적 경향이 강하고 원시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특색을 갖고 있다.

남방상좌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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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方上座部-佛敎

아쇼카왕은 포교사를 각지에 파견하였으므로 왕이 귀의하였던 상좌부 불교가 아시아 남방 각지에 퍼지게 되었다. 그 거점이 된 곳은 스리랑카였으나, 현재는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들 지역의 불교는 공통적으로 파리어(巴里語)의 성전을 근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파리불교라고도 한다. 이것은 비교적 오래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원시불교의 연구를 위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스리랑카 (실론)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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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e­Lanka-佛敎

서력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왕자로 상좌부의 장로였던 마힌다(Mahinda)는 왕명에 의하여 실론섬에 파견되어서 섬의 지배자를 귀의시키려고 아누라다성에 대찰(마하비하라)을 건립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상가미타(Sangamitta)도 비구니가 되어 실론에 건너가 불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론에 상좌부불교가 전하여진 최초의 일이었는데 서력 기원전 1세기경에 바아다가마니 아바야왕이 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함으로써 대사파(大寺派)와 대립하게 되고 뒤에 다시 기타림사파(祇陀林寺派)가 분리되어 실론의 불교는 3파가 정립하게 되었다.

5세기가 되면서 부다고사를 비롯한 고학자가 나타나서 교학의 기초가 튼튼해졌다. 보수적인 상좌부불교의 대사파에 대하여 다른 부파의 비구들에게도 개방적이었던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는 한때 우세를 보였으나 11세기 이후에는 이민족이 침입하고 불교가 쇠퇴하자 역대 왕은 불교부흥정책을 취했는데 특히 13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왕은 대사파(大寺派) 부흥에 힘써 상좌부불교가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부다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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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aghosa

중부 인도 부다가야 지방 사람으로 430년경 실론에 건너간 상좌부 계통의 불교학자. 일설에 의하면 브라만 출신이라고 하며, 불교에 귀의하여 삼장(三藏)을 배웠다고 한다.

실론에 건너간 후 대사(大寺)에 거주하면서 그 절에 소장되어 있는 성전을 파리어로 번역하기를 힘쓰고 또한 파리삼장에 대한 주해를 완성하였다. 만년의 활동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도에 돌아왔다고도 하고, 미얀마로 갔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의 스리랑카 불교 형태는 이러한 교학자(敎學者)들에 의하여 대략 형성되었다.

미얀마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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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ma-佛敎

오랜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는 나라로 알려진 미얀마의 불교는, 아쇼카왕의 전도사가 건너가 포교한 것이라고도 하고, 부다고사가 실론으로부터 와서 전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상좌부 계통의 불교가 전해졌던 듯하며, 후에 대승불교가 성행하였으나 얼마 뒤에 성력숭배(性力崇拜)의 외교적(外敎的) 요소가 가미되면서부터 타락하고 말았다. 11세기에 파간 왕조의 아나와라타왕(Anawarata王)이 국토를 통일하고 성력숭배의 종교를 추방한 다음 특히 계율을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를 남방으로부터 수입하여 보호하였다. 이후에 실론계의 상좌부 불교가 세력을 떨쳐서 파간 왕조 시대의 전성기에는 미얀마

불교의 특색인 불탑(파고다)과 승원(僧院)이 많아지게 되었고, 왕조가 바뀌어도 역대왕들은 모두 불교에 열심히 귀의하였으므로 더욱 발달하게 되어 영국 통치하에서도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지속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버마의 불교는 일반적으로 계율이 엄격하며 특히 이를 강조하는 술라간디(Sula­gandi)파와 이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마하간디(Maha­gandi)파로 갈라졌다.

타이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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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iland-佛敎

타이에는 8세기경에 대승불교가 전해졌으나, 11세기 중반에 미얀마의 아나와라타 왕의 침공과 함께 상좌부 계통의 소승불교가 크게 일어나 대승불교를 쫓아냈다. 그후 13세기 말에는 실론으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수입되어 계율 중심의 소승불교가 타이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국왕은 대대로 불교에 귀의하며 특히 차이크 왕조(1782년 창립)의 라마 1세와 라마 4세는 사원을 건립하고 경전을 편찬하며 승풍(僧風)의 쇄신을 도모하고 불교의 보호와 흥륭(興隆)에 힘썼다. 국민도 불교에 귀의하여 남자는 성인이 되기 전에 한 차례 승적에 들어가 사원에서 수도생활을 체험할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강력한 사회적 전통이 있으며,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수도승을 존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무상의 기쁨으로 하고 있다. 현재 타이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불교는 국교이며 국민의 94% 가량이 불교도이고 타이 문화의 전반에 걸쳐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캄보디아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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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odia-佛敎

국민의 대다수가 소승불교의 신자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크메르족으로 중국에서는 이들을 부남(扶南)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와 힌두교 등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크메르 왕조의 역대왕은 도읍지인 앙코르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다. 유명한 앙코르 와트(Angkor­Wat:都城寺院)는 12세기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교의 비슈누신을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남방불교 건축의 정수(精髓)로 일컬어진다. 1181년에 즉위한 자야바르만 7세는 열렬한 불교 신자로서 스리랑카로부터 불교를 수입해 포교에 힘썼다. 왕은 인도의 아쇼카왕을 본받아 병원을 세우는 등 많은 불교적 사회사업을 일으켰으나 그후 이 왕국은 쇠운의 길을 걷게 되어 크메르 불교도 쇠퇴하게 되었다. 13세기말에 크메르가 타이에 의하여 정복되었기 때문에 종교 또한 타이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남해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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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佛敎

옛날에 자바·수마트라·말레이시아 등지에 번영하던 불교를 통틀어 남해불교라고 한다. 처음에는 소승불교가 행하여졌으나 뒤이어 대승불교가 세력을 얻게 되고 나중에는 밀교(密敎)로 옮겨져서 8세기를 정점으로 극히 융성하였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 인도네시아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이슬람교가 지배하고 불교도는 약 150만에 불과하다. 다만 뛰어난 불교 조각 등을 남긴 자바의 보르브도르 대탑(大塔) 등이 옛날 불교 전성시대의 면모를 오늘에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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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佛敎

인도지나 반도의 동쪽에 위치한 베트남은 중국인으로부터 '월남(越南)'이라고 일컬어지며 한(漢)시대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 베트남의 종교는 무술(巫術)을 중심으로 한 각양각색의 민간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이 위에 중국으로부터 불교·유교·도교 등이 수입되어 퍼지게 되었다.

특히 불교는 6, 7세기경에 들어와서 뒤에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풍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 19세기 이후 프랑스 식민지 정책 아래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진출하게 되고 또 제2차대전 후의 독립과 남북 베트남으로의 분열, 이에 따른 국내전쟁이라는 비종교적 기운 속에서 불교 세력은 차차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고, 더욱이 남베트남 공산화와 이에 따른 남북 베트남 공산정권의 통일로 인해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고 있으나 아직도 80%가 불교도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다.

불교의 북전(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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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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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域-佛敎

서역은 중국에 인접한 서방 지역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통 파미르 고원, 톈산(天山)·쿤룬(崑崙) 양산맥에 둘러싸인 타림분지의 일대를 중심으로 이에 연속된 투르케스탄(Turkestan) 지역을 포함하여 가리킨다. 이 지방은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 옛날부터 문화가 꽃피게 되어 한대(漢大)에 있어서는 서역 36국(西域三十六國)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아쇼카왕이 보낸 불교포교사에 의하여 간다라나 캐시미르의 서북인도 지방에 성행하던 불교가 흘러들어간 것이다. 서역(西域)의 불교국으로서 예로부터 대월지국(大月氏國:토카라)·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우전(코탄)·강거국(康居國:호르기스)·구자(龜玆:쿠차) 등이 알려졌으나 이들 나라의 불교는 인도로부터 들어온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서역의 중요한 문화에 수용되어 변용된 서역불교이다. 또한 이것이 거점이 되어 불교를 다시 한(漢)의 중국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구실도 하였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포교승과 역경승(譯經僧)은 대부분 서역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역 여러 나라에 불교가 퍼지게 되면서 동시에 조각·회화·자수·불탑건조 등의 불교미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양항로의 발달에 따라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서역의 중요성은 상실되고 다시 9세기 이후 이슬람교도의 침략에 의하여 투르케스탄 지방이 황폐해진 것 등으로 말미암아 서역의 불교문화는 오랫동안 망각과 모래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 지방에 대한 학술탐사가 시작되어 스웬 헤딘(1865∼1952), 오레르 스타인(1862∼1943), 폴 펠리오(1878∼1945) 등에 의하여 서역불교의 유적과 고문헌 등이 발견되었다.

티베트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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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t-佛敎

험준한 산악과 거친 기후를 가진 티베트에는 예로부터 민족종교인 본(Bon)교가 있어 항마와 예언, 점복(占卜) 등의 주술신앙이 성행하였는데, 7세기경 라사를 중심으로 왕조를 개창한 손센 감포왕(569∼650)은 불교의 독실한 신자로 중신(重臣) 톤미 삼보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티베트 불교 전래의 공식적인 경위이고, 불교경전의 전래에 따라 티베트 문자가 만들어졌다. 그 후 치스롱 데트산왕(755∼781)은 불교를 국교로 하고, 많은 불승(佛僧)을 인도로부터 초빙했다. 이 중에는 좌도밀교(左道密敎) 비법에 능한 파드마 삼바바(蓮華上坐師:티베트 이름으로 파드마 쥰네), 샨타라크시타(寂護, 티베트 이름은 시바쏘) 등이 있었다. 이리하여 티베트의 불교는, 인도불교 가운데에서도 특히 성력숭배(性力崇拜) 경향이 강한 좌도밀교, 즉 탄트라불교가 고유신앙인 본교의 지반 위에서 발달한 것으로, 라마교라고 불린다. 라마(Bla­ma)라 함은 구루(Guru), 즉 스승(師)을 뜻하는데 불(佛)·법(法)·승(僧)의 3보(三寶)에 법을 전하는 사(師)를 더하여 4보(四寶)라 하고, 여기에도 귀의한다. 이러한 특색을 외부에서 평하여 라마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10세기에 들어와서 티베트 불교가 받아들인 밀교의 성적(性的) 요소를 배제한 카담파가 성립되었고, 이들로부터 분리된 사키야파의 파스파(1239∼1280)는 라마교의 교두(敎頭)임과 동시에 정권을 장악하고 법왕국가를 건설하여 세력을 신장하였다. 이 무렵에 라마교는 티베트와 같은 유목민족인 몽고인 사회에도 퍼지게 되었다.

쏭카파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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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ong­ka­pa-改革

15세기가 되면서 쏭 카파(Tsong­ka­pa, 1357∼1419)에 의한 라마교의 개혁이 이루어져 현세의 이익을 비는 주술(呪術)이 배척되고 계율의 준수가 강조되었다. 이 파는 라사의 동남쪽에 있는 가단사(寺)를 근거로 하여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렀으며 종래 라마교의 홍모파(紅帽派), 원시 본교의 흑모파(黑帽派)와 구별되었다. 계율을 중시한 황모파는 대처(帶妻)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윤회(輪廻)에 의한 전생설(轉生說)로 후계자를 얻으려 하였다. 뒤에 황모파는 라사의 포탈라사(寺)와 시가세의 타시룬포사(寺)로 분열하여 쏭카파(宗喀巴)의 제자 둘이 각각 라마의 칭호를 가지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법맥(法脈)을 유지하였다.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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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ai Lama 라사의 포탈라사(寺)를 근거로 하는 쏭카파의 후계자들. 달라이라고 함은 몽고어로 '바다(海)'를 의미한다. 16세기말 제3대의 소남 감초(1543∼1588)가 몽고의 알탄한(汗)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존칭을 받게 되면서부터 역대의 라마 전체의 칭호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대대로 전생설(轉生說)에 의하여 계승되고 활불(活佛)·관음보살의 재생으로서 숭배를 받으며, 단지 종교세계뿐만 아니라 정권도 장악하여 티베트의 최고 지배자로 군림한다.

판첸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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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chen Lama

쏭카파의 고제(高弟) 케루브의 계통을 이은 활불로서 전생설에 의하여 대대로 타시룬포사(寺)에서 계승되었다. 미륵보살의 재현이라고 하여 숭배되었으며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2대 활불의 하나였으나 그 세력은 달라이 라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10대가 내려왔다.

만·몽의 라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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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蒙-Lama敎

중국의 북부 및 동북부의 변경지방에는 유목생활이 영위되고 있었는데 주민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샤먼적인 주술신앙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으므로 본(특히 몽고에서 일어난 원조(元朝)의 여러 군주들은 왕의 장수와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는 화려한 밀법(密法)에 매혹되어 역대 왕이 라마교를 신봉하고 드디어는 그 광대한 영토가 라마교의 영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나라가 명에 의하여 멸망당하자 중국에 있어서의 라마교는 쇠퇴해지고 북방의 몽고인들 간에는 이것이 민족주의의 물결을 타고 민중 속에 널리 퍼져갔다. 또한 동북부에서도 만주왕조인 청조(淸朝)가 대 티베트 정책으로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보호하였으므로, 베이징을 비롯하여 선양(瀋陽)과 러허(熱河) 등지에 라마의 묘당(廟堂)이 세워지게 되었다. 특히 러허 승덕(承德)에 있는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는 포탈라 사원을 모방한 순 티베트식 건축물로서 이를 보호하였던 건륭제(乾隆帝)의 신앙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중국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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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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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初傳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게 해준 단서가 된 동서교통로의 개척은 전한(前漢)시대에 이루어졌다. 전한의 무제(武帝, BC 140∼BC 87)는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 루트를 처음으로 개척하였는데 이것은 각기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갖는 중국과 인도를 연결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유교나 바라문교는 민족종교적 색채가 농후하여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으나 전통적인 바라문교를 비판·극복하고 탄생한 불교는 그 보편주의적 성격으로 인하여 향토색이나 민족에 구애됨이 없이 인근 여러 나라에 대한 포교와 전도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불교는 이미 기원전 250년경의 아쇼카왕 시대에 인도 국경의 북쪽을 넘어 전파되었고 그후 차츰 중앙 아시아의 사막에 산재한 오아시스 국가에도 침투해 들어갔으므로 중국에의 전도는 필연적이며 시간문제였다. 배타적이며 중앙편중을 특색으로 하는 중국의 옛 기록에도 서력 기원 전후에 불교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즉 전한(前漢) 말기의 애제(哀帝) 원수원년(元壽元年:BC 2)에는 박사제자(博士弟子)인 경로(景盧)가 대월지(大月氏)왕의 사자 이존(伊存)으로부터 부도경(浮屠經)을 구전(口傳)받은 것(<魏略>), 혹은 영평(永平) 8년(65)에 명나라 황제의 이복 동생인 초왕(楚王) 영(英)이 그의 봉지(封地)인 팽성(彭城:장쑤성, 江蘇省)에서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미언(微言)을 읊조리고 부처의 인사(仁祠)를 존중하며 상문(桑門)·우바색(優婆塞), 즉 승속(僧俗)의 불교도를 존중하였다"는 기록(<後漢書>) 등이 있다. 실크 로드를 통해서 중국을 방문하는 대상(隊商)이나 사절 중에 불교 신자가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또 승려를 동반하여 왔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므로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되었던 둔황(敦惶)·장안(長安)·뤄양(洛陽) 등지의 연변에는 서력 기원 전후에 불교가 서서히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역 여러 나라의 불교가 이 동안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특정한 연대를 결정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일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다. 당시 서역제국에는 대승·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인도불교 그대로가 아니고 이른바 서역화된 불교였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불교는 서역불교였다.

경전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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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漢譯

인도에서 성립한 경전은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에 수입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나 서역의 언어문자로 쓰여진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에 의해서였다. 이 두 사람이 중국에 온 것은 2세기 후반으로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시대였다. 최초의 시기에 있어서 역경자들이 번역하는 데 얼마나 힘을 들였는가는 현존하는 그들의 번역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인이나 서역인들과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중국인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외래의 역경자들 덕택이었다. 이 두 사람 외에 축불삭(竺佛朔)·안현(安玄)·지요(支曜)와 강거(康巨)·강맹상(康猛詳)·축대력(竺大力)·담과(曇果)·지량(支亮)·엄불조(嚴佛調) 등도 후한시대의 역경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초기의 번역이 난해하고 딱딱한 것은 역어(譯語)가 각각 다르고 역문의 형식이 고르지 않으며 음사어(音寫語)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다음에 오는 역경자들에 의하여 차차 개선되어 라습(羅什)과 현장(玄裝)에 의하여 획기적인 번역이 이뤄지게 되었다. 전자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후자를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안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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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世高

후한(後漢)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譯經僧)의 한 사람. 파르티아(安息國:현재 서북인도·페르시아 지방)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자(字)는 세고(世高), 안(安)은 그의 출신국인 안식(安息)을 나타낸 것.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고 148년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경전을 번역 소개하였다. 그의 경전번역은 중국 역경사의 최초기의 일이다. 후한시대의 역경은 대체적으로 생경(生硬)하고 난해하다.

지루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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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婁迦懺

후한시대에 중국에 온 역경승의 하나. 로칵세마(Lokaksema)의 음역. 147년 후한의 뤄양(洛陽)으로 와서 183년(中平3)에 이르기까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수릉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아축불국경 등 14부(일설에 의하면 23부)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가 사용하였던 원전은 거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이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지량(支亮)이 있으며 지루가참·지량·지겸(支謙:삼국시대의 역경자)의 셋을 삼지(三支)라고 한다.

주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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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行 한족 출신으로서 최초로 출가한 승려. 영천(潁川:허난성의 許州東北)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경전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의 강(講)을 받을 때에 너무 간략하여 의미가 애매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새로운 범본(梵本)을 찾아 260년(曹魏의 甘露5)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코탄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새로 얻은 범본을 불여단(弗如檀:法饒)에 위탁하여 뤄양(洛陽)으로 운반하였다. 뒤에 이것이 번역되어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 되었다. 주자행은 중국에 돌아오지 않고 코탄에서 죽었다.

축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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竺法護

서진(西晋)시대에 활약한 역경승. 법호는 다르마라크샤(Dharmaraksa)의 음역. 월지국(月氏國) 출신으로 지법호(支法護)라고도 불리었으나 스승인 축고좌(竺高座)의 축(竺)을 따서 보통 축법호라고 부른다. 그는 둔황(敦煌)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둔황보살(敦煌菩薩)이라고도 한다. 툰황으로부터 장안·뤄양(洛陽)에 걸쳐 유랑하면서 경전의 번역과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손으로 번역된 경전은 반야경·법화경·유마경(維摩經)·무량수경(無量壽經) 등 초기의 대승경전에 속하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모두 154부에 달했다고 한다. 라습(羅什) 이전에는 질과 양에 있어서 최대의 역경승이었다.

교단형식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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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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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圖澄(233∼348)

불도등 혹은 부도징(浮圖澄)이라고 쓰기도 한다. 후조(後趙)시대에 활약한 서역승(西域僧).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젊어서 출가하였다. 오장국과 계빈국에서 수학하고 경전을 독송하기를 수백만어에 달하여 경전의 본의(本義)에 정통하였다 한다. 310년(西晋의 永嘉 4)에 뤄양(洛陽)으로 왔다. 영가(永嘉)의 난이 있은 뒤 백성의 괴로움을 구하기 위하여 잔인스러운 맹장이었던 석륵(石勒)을 교화하고 홍법(弘法)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왕의 고문이 되어 군사와 정치에도 참여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북방민족을 불교문화와 신통력으로 이끌어나갔다. 후조의 왕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신임을 받아서 교단과 국가와의 관계가 밀접해졌으며 후조국(後趙國) 안에 있어서의 포교는 석씨(石氏)의 후원에 의하여 강력히 추진되었다. 335년 석호가 업(河南省安陽縣)에 천도(遷都)하게 되어 그 뒤를 따랐으며 항상 계율의 엄수와 전도에 힘써 그때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한인(漢人)의 출가를 허용하도록 꾀하였다. 제자에는 도안(道安)·축법태(竺法汰)·법화(法和)·법상(法常) 등이 유명하며 하북불교(河北佛敎)를 융성하게 하였다. 그가 창건한 사원은 893개이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승도(僧徒)는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348(永和 4) 12월에 118세로 죽었다.

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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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安(312∼385)

초기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高僧). 상산부유현(常山扶柳縣:河北省)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서역으로부터 온 불도징(佛圖澄)에 사사하였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였으나 마침 전란시대여서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허베이(河北)·산시(山西)·허난(河南)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랑하였다. 뒤에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더불어 양양(襄陽:湖北省)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엄숙한 구도와 연수를 위주로하는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79년에는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초빙을 받아 장안에 가서 국가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명실공히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게 되고, 특히 캐시미르 출신의 승가발징(僧伽跋澄)·승가제바(僧伽提婆), 토카라국의 담마난제(曇摩難提) 등 외국승을 도와 소승경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는 또한 그때까지 내려오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오류를 반성하고 반야경의 이역(異譯)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 또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총목록(<綜理衆經目錄>)을 편찬하여 새로이 승단생활의 의식과 규범을 제정하였다. 출신국을 성으로 쓰는 종래의 방법을 폐지하고 승려는 모두 석(釋)을 성으로 할 것을 제창하여 스스로 석도안(釋道安)이라고 불렀다. 경전 해석에 서문(序文)·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3분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교학연구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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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연구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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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學硏究-發達

중국의 불교는 불도징과 도안의 출현으로 사상과 교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상과 불교교리를 그대로 중국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 편의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빌려 불교사상을 유추적(類推的)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축법아(竺法雅)나 강법랑(康法朗) 등은 이 격의불교의 대표자였다. 도안(道安)이나 혜원(慧遠)도 그것의 한계성을 느끼면서도 이 격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라습(羅什)이 장안에 들어와 신역경론(新譯經論)을 내놓게 됨에 따라 종래의 잘못된 해석이 바로잡혀 라습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연구가 왕성해졌다. 그 중에서도 승조(僧肇)는 반야(般若)와 공(空)에 관하여 독특한 논문을 발표하고, 도생(道生)은 돈오성불(敦悟成佛)과 천제성불(闡提成佛)을 주장하였다. 라습 이후 인도의 경론이 속속 수입되어서 특히 반야경·법화경·화엄경·열반경 등 대승경전의 연구가 활발하였고 다시 나아가 경전 상호간의 시간적 전후와 교리적 우열 따위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하며 수당(隨唐)의 종파 성립에 대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격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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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義佛敎

위진시대(魏晋時代)의 중국불교계에 행해졌던 불교 연구의 일종.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일들을 유교의 고전과 노자·장자의 사상과 비교하여 유추(類推)함으로써 불교교리의 이해를 쉽게 하고 접근하기 쉽도록 하려는 방법. 가령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을 노장철학의 무(無)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 등을 말한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에 관한 학문이 성행하여 청담(淸淡)이 유행하였고 특히 노장사상과 유사한 표현 형식을 갖는 반야경과 유마경이 애독되고 이를 노장과 역(易)의 사상과 대비하여 연구 토론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리하여 불교의 공(空)의 의의에 관하여는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중국적 해석이 다투어 생겨났다. 이른바 이와 같은 철학적 격의를 특히 '현학(玄學)'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깨닫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 도안(道安)이었는데 그도 역시 그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반야경 등의 본의(本義)가 잘못됨이 없이 이해되기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에 들어와 공관불교(空觀佛敎)의 교리가 올바르게 번역·소개된 이후부터였다.

구마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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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350∼409경)

당대(唐代)의 현장(玄奬)과 더불어 일컬어지는 대번역가. 쿠마라지바(Kumarajiva)의 음을 따서 구마라습이라 하고 이를 약하여 라습(羅什) 또는 습(什)이라고도 한다. 서역의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에 어머니를 따라 계빈·사륵(沙勒)에 유학하여 소승불교와 인도 학문을 배웠다. 사륵에서는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로부터 대승불교를 배우고 다시 용수계(龍樹系)의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연구한 다음 귀국하였다. 20세 때에 십송률(十誦律)을 배워 비구가 되었다. 뒤에 후진(後秦) 요흥(姚興)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들어가 국사(國師)로서의 대우를 받고 소요원(逍遙園)과 대찰에서 경론의 번역에 종사하여 역경사에 있어서 하나의 시기를 이룩하였다. 그의 밑에 모인 학승(學僧)이 3천이었다고 하며 승조(僧肇)·도생(道生)·도융(道融)·승예(僧叡) 등 천하의 준재들이 학문을 겨뤘다. 그의 번역은 35부 294권으로 내용이 탁월한 데다 번역 문장이 유려하고 뜻에 달통하여 후세에 이르기까지 귀중히 여겨졌다. 그 주요한 것으로는 반야경·법화경·유마경·아미타경·중론·백론·12문론·대지도론·성실론 등이 있으며 교리적으로 중요하여 후세에 영향을 미친 경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산(廬山)의 혜원과의 사이에 교환된 교리에 관한 질의 응답은 <대승의장(大乘義章)>으로 정리되었다.

교상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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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相判釋

교상(敎相)·교판(敎判)·판교(判敎)라고도 한다. 수천권에 달하는 많은 경전은 석가 일대의 설법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설법의 형식·방법·순서 및 내용과 교리에 따라 분류·체계화하고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행하는 것. 인도에서는 역사적인 전개과정을 밟아 성립된 여러 경전이 중국에 수입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성립의 순서에 관계 없이 무질서하게 번역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불교 관계자들이 차차 이러한 경전의 기록상 상호모순과 불일치를 느끼게 되어 어떤 것이 과연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인가를 판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여기서 일체의 경(經)을 시간적 또는 내용적으로 배열·정리하고 가르침의 깊이와 우열을 독자적인 기준에 따라 체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남북조시대부터 당대(唐代)에 걸쳐 가장 성행하였으며 종파 성립의 교리적 전제는 이렇게 하여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들어 보면 삼론종(三論宗)의 2장 3륜교(二藏三輪敎), 천태종(天台宗)의 5시 8교(五時八敎), 법상종(法相宗)의 3교 8종(三敎八宗), 화엄종(華嚴宗)의 5교 10종(五敎十宗) 등이다.

유·도 양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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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양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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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道 兩敎-關係

불교는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민중적인 종교였던 도교와의 사이에서 이것들과의 대립항쟁과 절충융합 등 여러 형태의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교는 한제국(漢帝國)을 뒷받침하는 정통사상으로서 불교가 수입될 당시에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지위에 있었다. 도교는 후한시대의 장도릉(張道陵)에 의하여 기초가 잡히고 노장사상으로부터 여러가지 민간사상을 배워들이고 뒤에는 불교경전의 영향을 받아 도장(道藏)을 이루게 되었다. 유교와 도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최초의 문헌은 삼국시대의 <변도론(辯道論)>과 <이혹론(理惑論)>이다. 서진시대에는 백원(帛遠)과 왕부(王浮)의 논쟁이 있었는데 왕부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만들어 도교의 우월함을 주장하였다 한다. 3교의 대립은 동진시대 이후 더욱 격화되었고 동시에 격의불교(格義佛敎)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상호간의 조화와 융합의 경향도 현저하게 되었다. 유교와 불교와의 논쟁 테마는 주로 사회적·윤리적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신의 영원불멸에 관한 문제와 응보윤회(應報輪廻) 문제 등이 많이 논의되었다.

이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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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惑論 모자(牟子)의 저서. 저자의 생몰연대는 잘 알 수 없다. 불교에 공명하면서 노자와 유가(儒家)의 오경(五經)을 연구하는 모자를 세상사람들은 사도(邪道)에 빠진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으므로 이에 답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그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유·불·도 3교의 조화를 지향하면서 이들의 공통점과 상위점을 밝히고 있다. 불교를 유·도의 양교 위에 놓으려고 하는 저자의 자세는 불교에 대한 양교로부터의 비난공격에 대하여 논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전체는 37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거론된 것은 동진시대 이후에 3교(三敎) 사이에 논쟁이 많던 문제 ― 출가둔세(出家遁世)는 세속의 도덕에 반한다는 윤상문제(倫常問題), 인간의 영혼이 사후에 없어지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 중하(中夏)의 사람은 이적(夷狄)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이하론(夷夏論), 불교계의 부패와 타락 문제 등 ― 를 테마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이론이 언제 성립하였는지에 관하여는 학자들에 따라 설이 다르지만 아마도 3교 관계를 논한 것으로서는 이 책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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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佛

중국에서 있었던 불교탄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원·불당·불상·경서를 파괴하고 승려와 니승(尼僧)을 환속시키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장원(莊園)과 노비를 국가가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불교사상에는 4번의 큰 폐불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고 부른다. 삼무(三武)라 함은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당(唐)의 무종(武宗)을 말하며, 일종(一宗)이라 함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을 가리킨다. 폐불을 단행하게 된 이유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유·불·도 3교, 특히 불교와 도교 양교의 대립항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을 이용하여 그것을 결정적인 단계로까지 이끌어간 것은 역시 정치적·경제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의 지배자는 폐불을 단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교단 쪽에도 페불을 유발할 만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세금과 노역(勞役)을 피하기 위하여 출가한 방대한 인구는 이를 감당해야 할 정부의 재정을 위협하고 또 그들의 타락과 비행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육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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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朝-佛敎

육조시대라 함은 강남(江南)의 건업(建業:建康)에 도읍을 두었던 6왕조(六王朝), 즉 삼국시대의 오(吳) 외에 동진(東晋),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의 시대를 말한다. 육조(六朝)라 함은 강남 땅에서 번영한 귀족정치·귀족문화라는 공통성에 착안한 문화사적인 명칭이다. 육조불교의 특색은 육조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귀족적·고답적·학술적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불교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조에는 족벌귀족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제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지니고 현학(玄學)을 숭상하며 청담(淸淡)을 즐겼다. 불교도 이들에게는 방외은일적(方外隱逸的)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유마경(維馬經)과 반야경(般若經) 등이 애호되었다. 격의불교가 성행된 것도 이때였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사문(沙門)은 방외(方外)의 빈(賓)이므로 세속적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동진(東晋)의 귀족사회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조시대의 불교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북조에 있었던 폐불도 없었고 왕후귀족에 의하여 웅대한 사원이 건립되어서 불교의 연구시대라고 칭할 만큼 경론의 연구와 강설(講說)이 성하였다. 제(齊)의 태자 문혜(文惠)와 동생 숙자량(肅子良)은 열렬한 불교 신자로서 많은 학승(學僧)을 사우(師友)로 하여 강석(講席)과 법회(法會)를 설치하고 불교서의 편찬사업 등을 행하였다. 양(梁)의 무제(武帝)는 남조의 여러 제왕 중에서도 뛰어난 교양을 갖고 있어서 불교의 교리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저술하고 대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무차대회(無遮大會)와 같은 대법회를 10여 차례나 열었다.

육조시대에는 인도와 서역으로부터 속속 역경승이 들어와 중국승과의 협력하에 많은 중요한 경론을 번역하였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강량야사(畺良耶舍)·구나 발타라(求那跋陀羅)·진체(眞諦) 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또한 양대(梁代)에는 승황(僧晃)·법운(法雲)·지장(智藏)의 3대법사가 출현하였고 또 불교사가로서 유명한 승우(僧祐)가 나와서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과 <홍명집(弘明集)> 따위의 많은 저작을 남겼다. <고승전(高僧傳)>을 지은 혜교(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북위의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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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石佛

북위시대에 건조된 대규모의 석굴불상.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운강석불(雲崗石佛)과 용문석불(龍門石佛)이 있다. 전자는 산시성 다퉁현(大同縣)의 서쪽 20km 지점에 있으며 사문통(沙門統) 담요(曇曜)가 문성제(文成帝)에 상주하여 454년에 건국 이래의 5제(五帝)에 대한 추선(追善)과 참회멸죄(懺悔滅罪)를 기원하여 5굴(五窟)을 열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더욱 큰 것으로 15굴이 만들어져서 이들은 조각사상 운강기(雲崗期)를 형성하게 된다.

둔황석굴(敦煌石窟)의 계통을 이어 받으면서 타쿠바쓰족의 웅혼(雄渾)한 솜씨가 넘쳐 흐른다. 후자의 것은 뤄양천도(洛陽遷都)와 더불어 그 교외에 있는 이수하반(伊水河畔)의 용문산(龍門山)에서 파서 만든 것. 운강의 것과 마찬가지로 선제(先帝)의 추선(追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20여 년의 세월과 거액이 투입되었다. 주요한 북위굴(北魏窟)이 14개 남아 있는데 이들이 용문기(龍門期)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특색으로는 일반적으로 우아 화려하고 서방(西方)적인 냄새가 희박해지며 중국 고유의 것이 나타나 있다. 운강·용문 외에 공현(鞏縣)·천룡산(天龍山)·향당산(響堂山) 등의 석굴도 북위시대의 것이다.

수·당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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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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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唐-佛敎

수·당시대는 중국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였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隋), 그 뒤를 이은 당(唐)은 세계사적으로도 공전(空前)의 번영을 이룩하였는데 이러한 통일국가 시대가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종파가 형성되고 중국인 자신에 의한 불교의 체계화·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수·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섭론종(攝論宗)·성실종(成實宗)·지론종(地論宗)·열반종(涅槃宗) 등의 종(宗)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존재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學派)라고 불러야 할 것으로 뒤의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삼론종(三論宗)은 아직도 학파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었으나 수대(隋代)에는 지의가 대성한 천태종(天台宗)이 법화경(法華經)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의 교판(敎判)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어냈다.

당대(唐代)에 들어와서 법장(法藏)이 화엄경(華嚴經)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사사무애,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교리를 완성했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을 연구하여 율종(律宗)을 창시하고 현장(玄奬)·규기(窺基)가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이 들여온 밀교(密敎)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그것이 미친 영향의 영역으로 보아서 불교의 중국화·민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선종(禪宗)은 3조(三祖) 승찬(僧璨)·4조(四祖) 도신(道信)을 거쳐 5조(五祖) 홍인(弘忍)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고 6조(六祖)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혜능의 계통은 남종(南宗)이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北宗)이라고 부르며 2파로 갈라진 채 각기 교선(敎線)을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토교는 담란(曇鸞) 이후 도작(道綽)·선도(善導)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하여 무식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會昌5)의 폐불(廢佛)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당의 불교는 중국불교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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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藏(549∼623)

수나라 시대의 불교 인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 그의 선조는 파르티아(安息國) 사람이다. 금릉(金陵:江蘇省南京市)에서 태어나 출가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진체삼장(眞諦三藏)을 만나 길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12세 때에 흥황사(興皇寺)에서 법랑(法朗)의 강의를 듣고 이듬해에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회계(會稽)의 가상사(嘉象寺)에서 삼론(三論)을 연구하였으므로 가상대사라고 받들어 일컫는다. 597년(開皇 17)에는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와 문통(文通)을 하였다. 뒤에 수양제(隋煬帝)의 칙명에 따라 양주(楊州)의 혜일사(慧日寺)에 들어갔다가 다시 장안의 일엄사(日嚴寺)로 옮겨 법화경을 연구하였다. 당의 무덕(武德) 초에 10대덕(十大德)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나, 얼마 후에 연흥사(延興寺)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섭령상승(攝嶺相承)이라고 하는 삼론 연구의 전통을 법랑으로부터 이어받아 이른바 신삼론(新三論)의 교리를 대성하였다. 그 자신은 새로운 종파를 창설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인도의 중관불교(中觀佛敎)의 진의(眞義)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같은 시대의 지의와는 대조적이다. 그의 저작물은 대단히 많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삼론현의(三論玄義)>·<대승현론(大乘玄論)>·<이체의(二諦義)>·<중관론소(中觀論疏)>·<법화현론(法華玄論)> 등이 있다.

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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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597)

수나라 시대의 불교승. 천태종의 개조(開祖).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자대사(知者大師)의 존칭으로 불리어진다. 형주(荊州)의 화용(華容:湖南省華容縣) 사람. 한때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전란으로 인하여 양친과 친족을 잃었다. 18세에 출가하여 율장(律藏)과 비담(毘曇)·성실(成實)·선법(禪法) 등을 배워 익혔다. 그후 남악대사(南岳大師) 혜사(慧思)의 문중에 들어가 지관법문(止觀法門)·삼론계(三論界)의 교리와 선관(禪觀) 달마선(達磨禪) 등 소위 북방계의 교리를 이어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에 의하여 대오(大悟)하였다. 30세에 금릉(金陵)에 나아가 8년간 법화경 등의 강론에 힘썼다. 576년 명리(名利)를 떠나 천태산에 들어가 여기에서 약 10년간 수도 생활을 하였다. 천태교리의 대강(大綱)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그 후 금릉에서 다시 대지도론(大智度論)·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법화경 등을 강론하였다. 수양제의 청에 의하여 보살계(菩薩戒)를 수여하고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게 되었다. 고향 형주에 돌아가 옥천사(玉泉寺)를 세우고 천태3대부(天台三大部)인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설하였다. 문하에는 장안(章安)·지월(智越) 등의 뛰어난 인재가 나왔다. 저작도 많으며 34부가 현존한다.

말법사상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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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사상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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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法思想-佛敎

말법사상이라 함은 6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성행된 사상으로 불교의 시대관·역사관을 나타내고 있다. 즉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3시사상(三時思想)에 따르면 정법시(正法時)는 정법이 엄존하여 교(敎)·행(行)·증(證) 모두가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으나 상법시(像法時)에 들어오면 증(證)이 없어지고 교와 행만이 있게 되며 다시 말법시(末法時)에 이르게 되면 행과 증(證)은 없어지고 오직 교의 껍데기만 남게 된다고 한다.

이 3시사상 외에 5탁악세(五濁惡世)와 법멸(法滅)사상도 말법관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상말(正像末) 3시(三時)의 연한에 관하여는 경전에 기술이 각각 다르나 정법(正法) 500년, 상법(像法) 1000년, 말법은 1만년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의하면 석가 멸후 1500년 지나면 말법의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이때가 552년(梁帝의 承聖 1, 北齊文宣帝의 天保 3)경에 해당된다고 한다.

남북조시대에 말법과 법멸사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말법사상을 고취한 <대집월장경(大集月藏經)> 등의 경전이 번역된 일과 교단의 타락과 부패, 전국적인 폐불운동 등이 불교인들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는 것 등의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말법 도래의 사상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에 알맞은 불교를 창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도작(道綽)·선도(善敎)의 정토교(淨土敎)이며, 신행(信行)이 개창(開創)한 삼계교(三階敎)였다.

도작(道綽)은 "지금이 말법이로다. 바야흐로 5탁악세(五濁惡世)에 이르렀으니 오직 정토일문(淨土一門)만이 있어 통입(通入)해야 할 길이로다"라고 설파하고 창명염불(唱名念佛)이라고 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야말로 말법시대에 어울리며 그것만이 현실사회에서 유효한 불도의 실천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작과 같은 시대의 신행도 말법사상과 죄악관에 입각하여 현대에 필요한 것은 경전을 연구 강술하고 그 우열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교를 실천·체득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일이라 하고, 말법시대에 적합한 방법은 비판선택을 가하지 않고 겸허한 자세로 오로지 제경(諸經)을 받아들이고 제불(諸佛)을 예배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전수염불(專修念佛)과 보경보행(普敬普行)과는 실천방법으로서는 정반대이나 현세가 말법이라는 강렬한 시대적 인식 속에서 발생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양자 모두 말법사상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삼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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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階敎

수대(隋代)에 신행(信行, 540∼594)이 새로 일으킨 불교의 일파. 수대로부터 송대에 걸치는 약 400년간 유행한 혁신적·이단적인 종교이며 삼계종·삼계불법·보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한다.

신행은 젊어서 출가하여 불교가 극히 융성하였던 북제(北齊)의 도읍인 업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577년에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북제에 침공해 들어와 흑심한 폐불을 단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신행도 다분히 도시를 빠져나가 산중에 몸을 숨길 것인가 혹은 환속할 것인가를 강요당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고통에 찬 심각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현실사회와 그 속에서의 생활을 직시함으로써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갈 수 없는 무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면으로 보아서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불교는 당연히 지금까지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581년 북주 대신으로 일어선 수(隋)가 불교부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취하게 되자 다시 상주(相州)에 돌아가 새로운 불교를 제창하였다.

그가 제창한 삼계교의 교리는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에 입각한 것이라고 하며 일체의 불법(佛法)에 3계(三階)를 세워 일승(一乘)을 제1계, 삼승(三乘)을 제2계, 보법(普法)을 제3계라 하고 보법만이 말법인 현재에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석가의 입멸 후 500년(제1계)과 1000년(제2계)의 사람들은 각가 일승과 삼승의 '별법(別法)'에 의하여 증(證)을 얻었으나 1500년을 경과한 현재는 말법시대 이므로 제3계인 '보법(普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제3계의 불교는 경(經)도 불보살(佛菩薩)도 선택을 가하지 않고 오로지 이를 공경하고 행해야 하는 겸허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어떠한 사람도 오직 여래장불(如來藏佛)·불성불(佛性佛)·당래불(當來佛)로서 공경하는 것만이 죄악에 충만한 범부(凡夫)가 구제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신동행(同信同行)의 실천을 승속(僧俗)에 권장하였다. 589년에 장안에 들어가 진적사(眞寂寺)에 삼계원(三階院)을 두고 여기에서 신자들과 같이 살며 선교에 힘쓰는 한편 <삼계불법(三階佛法)> 기타 많은 저술을 하였다. 신행(信行)이 죽은 후에도 제자들의 노력은 커졌으나 600년과 725년 두 차례에 걸쳐 사교(邪敎)로 몰려 교의 신봉이 금지당하고 전적(典籍)도 소멸되었다.

선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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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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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宗-發達

선(禪)은 선나(禪那:jhana)의 약칭으로서 정려(靜慮)라고 번역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종교적 실천이다.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나 중국에 전해져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유력한 종파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이라고 하는 호칭은 당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여러 가지 명칭을 가졌었다고 한다. 선종의 처음 조사(祖師)라고 하는 보리달마는 2입 4행설에 입각한 좌선을 권장하였다. 선종은 그 후에 2조(二祖) 혜가(慧可), 3조(三祖) 승찬(僧璨), 4조(四祖) 도신(道信), 5조(五祖) 홍인(弘忍)에 전해져서 도신과 홍인의 시대에는 종회에 참가하는 자가 500명에 이르렀다. 당의 초기에는 신수(神秀)의 북종(北宗)과 혜능(慧能)의 남종(南宗)이 대립하여 분열되었다. 북종은 점오(漸悟)를, 남종은 돈오를 표방하였다고 한다.

혜능은 6조(六祖)가 되어 문하에 회양(懷讓)·행사(行思)·신회(神會) 등이 있었고 강서와 호남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백장(百丈)은 선원에 있어서의 집단생활의 규범이 되는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5대에 걸쳐서 위산·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 5가(五家)가 성립되어 정토교와 함께 송대(宋代)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보리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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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提達磨

중국선종(中國禪宗)의 창시조. 생사 연대 불명. 남인도 또는 파사국(波斯國)에서 태어났다. 520년경 전후에 북위(北魏)의 도읍 뤄양(洛陽)에 갔다가 그 후 숭산 소림사(小林寺)에서 좌선수행(坐禪修行)에 정진하고 그 선법(禪法)을 혜가(慧可) 등에게 전수하였다. 달마의 전기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당송(唐宋) 시대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그의 전기가 추가, 보완되어 선종의 1대조로서의 달마상(達磨像)이 역사적 사실과는 별도로 확립되게 되었다.

양무제(梁武帝)와의 문답에 관한 이야기, 혜가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 서역(西域)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는 달마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권릉가경(四卷楞伽經)을 중시하고 2입(二入:理入과 行入)·4행(四行:報行·隨綠行·無所求行·稱法行)의 가르침을 말하고, 북위 말기의 귀족적 가람(伽藍)불교와 수행체험(修行體驗)을 도외시한 강설(講說)불교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일, 중생의 동일진성(同一眞性)을 믿고 선의 실천수행에 노력한 것 등은 사실로 인정된다. 제자에는 혜가(慧可)·도육(道育)·승부(僧副)·담림(曇林) 등이 있다.

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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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可(487∼593)

수대(隋代)의 선승(禪僧). 선종의 제2대조. 무뢰(武牢:河南省洛陽 부근)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 이름을 광(光) 또는 신광(神光)이라 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노장(老莊)의 전적과 불전을 공부하고 후에 뤄양의 용문(龍門) 향산(香山)에 가서 보정선사(寶靜禪師)를 따라 출가하여 영목사(永穆寺)에서 계율을 받았다.

그 후 각지를 편력하며 내외의 고명한 학문에 접하고 지식을 넓혔다. 32세에 다시 향산에 돌아가 8년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520년 숭산 소림사를 찾아 선종의 제2대조인 보리달마의 제자가 되어 이 곳에서 8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였다. 처음에 달마를 찾았을 때 쉽사리 입실(入室)을 허락받지 못하자 무릎이 빠질 만큼 쌓인 눈 속에 서서 밤을 새워 끝내는 자기의 팔을 잘라 구도를 위하여는 신명을 아끼지 않는 정신을 보임으로써 하락을 받았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552년에 도를 제자인 승찬(僧璨)에게 전수하였다. 그 뒤에 업도에서 선(禪)을 펴기 34년, 박해(迫害)에도 굴하지 않고 각지를 돌면서 도문(屠門)과 주가(酒家)에도 출입을 하였다 한다. 광구사(匡救寺)에서 열반경을 강하여 많은 학승이 모였다. 마지막에는 중 변화(辨和)의 미움을 받아 읍장(邑長)인 적중간(翟仲侃)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법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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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融(594∼658)

당 시대의 선승(禪僧)이며 우두선(牛頭禪)의 개조(開祖). 윤주(潤州)의 연릉(延陵:江蘇省)에서 출생. 19세에 경사(經史)의 학문에 널리 정통하였으나 반야경을 읽은 후 그때까지 배운 유교와 도교의 학문에 회의를 느끼고 모산(矛山)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삼론경법사(三論炅法師)를 따라 출가하여 20년간 조용한 숲속에 묵좌(默座)하여 깨우침을 얻었다. 뒤에 우두산의 유서사(幽棲寺)에 머무르면서 칠장(七藏)의 경서를 풀어 8년 동안 초략(抄略)을 만들었다. 643년에 절 북쪽 벼랑 아래에 선실을 짓고 좌선을 계속하였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그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4대조의 도신(道信)도 그 중 한 사람이었으며 법융으로부터 돈오(頓悟)의 법문을 이어받게 되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80리길을 혼자서 한 섬 여덟 말의 쌀을 등에 지고 다른 중들을 위하여 운반하였다 한다. 652년 건강(建康)의 건초사(建初寺)에 초빙되어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강하니 승도 1,000명이 모였다. 그의 선풍(禪風)을 그가 머문 곳의 이름을 따서 우두선(牛頭禪)이라고 부르나 그것은 삼론적(三論的) 요소가 짙은 것이었다. 문하에 제자 지엄(智嚴)·도기·도빙(道憑) 등이 있다.

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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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忍(601∼674)

당나라의 선승(禪僧)이고 선종의 제5대조. 기주의 황매(黃梅:湖北省)에서 출생하였다. 607년 일곱살 때에 기주 쌍봉산(雙峰山) 동산사(東山寺)에 가 선종 제4대조인 도신(道信)을 좇아 출가하였다. 그는 돈점(頓漸)의 주요한 뜻을 연구 통달하여 개오(開悟)하였다. 도신에 사사(師事)하기 30년, 51세 때 스승의 명령에 따라 탑을 건립하고 그 공적에 의하여 스승의 법의(法衣)를 받게 되었다. 동년 9월 도신이 죽으므로 그 자리를 이어받고 선종 제5대조가 되었다. 쌍봉산의 동쪽에 있는 빙무산(憑茂山)으로 옮기고 법문(法門)을 선양하였다. 그의 회하(會下)에 모인 사람은 700명을 넘고 절의 이름을 따서 당시의 사람들이 동산의 법문이라고 불렀다. 그의 선사상은 심성(心性)의 본원에 철저할 것을 본령으로 하고 수심(守心)을 참학(參學)의 요체로 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현적·혜능(慧能)·신수(神秀)·지선·혜장(惠藏)·법여(法如)·현약(玄約) 등이 있었고 혜능이 법통을 이어받아 제6대조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23인의 제자에게 각기 뜻을 말해 보라 하니 신수가 처음에 계로써 답하고 이어서 혜능도 계를 읽었으나 홍인은 혜능에게 법의(法衣)를 주고 법통을 물려주었다 한다.

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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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秀( ? ∼706)

당 시대의 선승이고 선종의 제5대조 홍인의 제자. 북종선(北宗禪)의 시조. 개봉(開封:河南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교와 노장에 관한 전적과 나아가 삼승(三乘)의 경론과 사분율(四分律) 등에 널리 정통하였다. 625년에 뤄양 천궁사(天宮寺)에 출가하였다. 50세때에 기주 쌍봉산 동산사에 들어가 5대조 홍인(弘忍)에 사사하였다. 700여 명의 문하생 중에서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었고 제일좌(第一座)로서 신수상좌(神秀上座)라고 불리었다. 동문인 혜능과는 서로 친했고 피차 계발(啓發)하는 바가 있었다. 후에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로 옮겨갔는데 그의 높은 덕을 따라서 많은 도인들이 모여들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이 소식을 듣고 내도장(內道場)에 그를 모시고 법요(法要)를 강의하게 하였다. 무후(武后)·중종(中宗)·예종(睿宗) 3제(三帝)의 국사(國師)로 있었고 장안 뤄양(洛陽)의 법주에 추대되어 6년간 그 직을 맡았다. 칙명에 의하여 당양산(當陽山) 도문사(度門寺)를 건립하고 주지가 되었다. 백여 살의 장수를 누리면서 뤄양 천궁사에서 죽을 때까지 장안·뤄양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華北)·하남(河南) 지방에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대통선사(大通禪師)라고 시호(諡號)되었다.

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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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能(638∼713)

당대(唐代)의 선승이며 선종(禪宗)의 제6대조. 일반적으로 6조대사 또는 조계대사(曹溪大師)라고 한다. 신주(新州:廣東省)에서 태어나 세살 때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자랐는데 어느 날 나무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데 금강경(金剛經) 외는 소리를 듣고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다. 24세 때에 기주 황매산(黃梅山:湖北省)의 동선원(東禪院)으로 5대조인 홍인(弘忍)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는 홍인으로부터 선법(禪法)을 물려받게 되었다. 소주(韶州) 조계(曹溪)의 보림사(寶林寺)·대범사(大梵寺)에 머물면서 신도들의 귀의를 크게 얻었다. 대범사에서의 혜능의 설법을 중심으로 편찬한 것이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이란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사법(嗣法)을 이어받은 문하의 제자가 43인을 헤아렸고 중국의 선종은 이 문하의 시대부터 융성하게 되었다. 그의 계통의 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하여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선과 대립하였으나 당의 말기 이후에는 전자의 것만이 번영하였다. 남종(南宗)은 돈오(頓悟)를, 북종(北宗)은 점오(漸悟)를 주장하였다. 후세에 이 양자의 선풍의 차이를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 하였다. 문하의 제자 중에는 청원행사(靑原行思)·남악회양(南岳懷讓)·하택신회(荷澤神會)·석두희천(石頭希遷)·영가현각(永嘉玄覺) 등이 가장 유명하다. 대감선사(大鑑禪師)라고 시호되었다.

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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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丈(749∼814)

당나라 때 선승.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지만 정식으로는 백장산회해(百丈山懷海)이다. 휘(諱)는 회해(懷海). 푸조우(福州) 장락현(長樂縣:福建省)에서 출생. 서산혜조(西山慧照)를 따라 삭발하고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 밑에서 구족계(具足戒)를 깨우쳤다. 여강(廬江)의 부차사에 들어가 그곳의 경장(經藏) 안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연구하였다. 그후 767년경에는 남강(南康:江西省)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만나 사사하였다. 마조 밑에서 수도를 하여 대오(大悟)하였다. 후에 백장산(江西省)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 제자들을 지도 교화하였다. 그 중에는 황벽희운(黃檗希運)과 위산영우도 있었다.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고 하는 백장의 말은 그의 선풍(禪風)을 나타내어 주는 유명한 말이다. 그는 백장산에 율원(律院)으로부터 독립한 선원(禪院)을 창설하고 다시 율전(律典)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선종 독자의 규율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많은 수도승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자급자족하는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는데 '백장청규'는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밀교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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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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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敎-發達

밀교라 함은 현교(顯敎)에 대한 말로 불교의 비밀심오(秘密深奧)한 교리를 뜻한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밀교는 대일여래(大日如來)로부터 금강살타·용수(龍樹)·용지(龍智)를 거쳐 금강지(金剛智)·선무외(善無畏)에 전해졌다고 한다. 중국에 전래된 것은 오래 전에 동진시대(東晋時代:317∼419)의 전반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大灌頂神呪經), 시기병경(時氣病經), 청우주경(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 경전이 번역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諸天)의 위덕(威德)을 찬미하는 따위의 주문이 주를 이루며 이른바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주술적(呪術的)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순수한 밀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나 그 밀법(密法)은 중국사회에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의 소위 개원(開元)의 3대사(三大士)에 의하여 밀교의 교리·의식궤범·만다라(曼茶羅) 따위가 조직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들이 전한 밀교는 <대일경(大日經)>이나 <금강정경(金剛頂經)> 등에 기초를 둔 인도의 정통밀교(正統密敎)였다.

선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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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無畏(637∼735)

당대(唐代)의 불교승. 인도로부터 중국에 밀교를 전한 역경승(譯經僧). 원명은 슈바카라 심하(Su­bhakara­simha:淨獅子)라고 한다. 동인도의 오다국(烏茶國:오릿사)에서 출생, 13세에 출가하였다. 중부 인도의 나란다사(寺)에서 달마국다(達磨鞠多)에 사사하고 밀교를 배워 그 깊은 뜻을 깨우쳤다.

중국에 가서 밀교를 전파하라는 스승의 명령으로 캐시미르를 거쳐 716년(開元 4) 장안에 들어왔다. 현종황제(玄宗皇帝)의 귀의를 받고 흥복사(興福寺)·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밀교를 선포(宣布)하고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번역하였다. 724년(開元 12)에는 뤄양(洛陽)의 복선사(福先寺)에 있으면서 이듬해에는 밀교의 근본 성전 가운데 하나인 <대일경(大日經)> 7권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이미 당의 학승(學僧) 무행(無行)이 인도에서 입수하여 당에 보낸 원형(原型) 6권에 선무외가 가져온 것을 더하여 7권으로 한 것이다. 이 사업에는 제자 일행(一行)이 필수인(筆受人)으로서 참가하였다. 99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 몇개의 밀교경전을 번역하였다. 제자에는 보사(寶思)·명사(明思)·온고(溫古)·일행(一行)·현초(玄超)·의림(義林) 등이 있다.

금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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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智(671∼741)

당나라 시대의 불교승. 밀교경전의 역경자. 원명은 바즈라 보디(跋日羅菩提:Vajra의 제5대조. 중부 인도의 마라야국(摩羅耶國)에서 태어나 10세 때에 나란다사(寺)에 출가하였다.

성명(聲明)·인명(因明)을 배우고 다시 대소승(大小乘)의 율(律)·중관(中觀)·유가유식(瑜伽唯識) 등을 공부하였다. 31세때 남인도에 가서 용지(龍智)에게서 밀교를 배워 금강정경(金剛頂經) 등의 밀교경전에 정통하게 되었다. 38세때 중부인도에 돌아와 불적(佛蹟)을 참배하고 다시 남인도 및 실론을 순례하였다. 716년경에 중국에의 포교를 뜻하여 남해를 건너 719년(開元 7) 광주에 도착, 이듬해 뤄양과 장안에 들어갔다. 현종(玄宗)의 칙령에 따라 대자은사(大慈恩寺)에 거주하였고 뒤에는 대천복사(大薦福寺)로 옮겨 밀교경전의 번역과 선교에 힘썼다. <금강정유가중략출념송경(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 4권 등 8부 11권을 번역하였다. 밀교의 수도법도 전하였으며 제자에 불공(不空)·혜초(慧超)·원조(圓照) 등이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대홍교삼장(大弘敎三藏)이다.

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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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空(705∼774)

당나라 시대의 불교승. 밀교경전의 역경자. 원명은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이고 번역해서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 하며 보통 불공이라 약칭한다. 밀교창법의 제6대조. 실론(일설에는 북인도)에서 태어나 720년(開元 8)에 스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따라 남해를 경유하여 뤄양(洛陽)에 왔다. 이후 약 30년간 금강지에게서 밀교를 배우고 산스크리트와 중국어의 재능을 살려 스승의 역경사업을 도왔다. 금강지가 죽은 뒤 그의 유지를 받들어 함광(含光) 등과 함께 실론·인도에 건너갔다. 우선 실론의 보현아사리에게서 비법을 배우고 뒤이어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범본(梵本)과 밀교경전을 얻어가지고 746년(天寶 5)에 장안에 돌아왔다. 그후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의 3대에 걸쳐 후한 대접을 받고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역경에 전념하였다.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비롯해 110부 143권을 번역하고 후세에 4대번역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역경뿐만 아니라 수법(修法)과 관정(灌頂)도 행하고 밀교의 포교에 노력하였다. 제자에는 함광(含光)·혜초(慧超)·혜과(惠果)·혜랑(慧朗)·원교(元皎)·각초(覺超) 등 여섯 사람의 상족(上足)이 있다.

유·불·도의 대립과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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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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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敎談論 당나라 중기부터 성행하게 된 궁중에 있어서의 유교·불교·도교의 대표자들에 의한 토론회.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자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의 초기 고조(高祖)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武德 7)에 박사(博士) 서광(徐曠)에게 <효경(孝經)>을, 사문(沙門) 혜승(慧乘)에게는 <심경(心經)>을, 도사 유진희(劉進喜)에게는 <노자(老子)>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太宗)은 639년(貞觀 13)에 제주(祭酒) 공영달(孔潁達), 사문(沙門) 혜정(慧淨), 도사(道士) 채황(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弘文殿)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후 대종(代宗)·덕종(德宗)·경종(敬宗)·문종(文宗)·무종(武宗)·선종(宣宗)·의종(懿宗)·소종(昭宗)과 역대 황제를 통하여 연례행사로 개최되었으나 차차 의식화되어 진지한 맛이 없어져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3교담론은 초기의 종교토론회와 같은 것으로부터 전혀 내용이 없는 궁중의례의 하나로 변화되고 말았다. 3교의 항쟁은 당의 중기부터 격화되었으나 항쟁의 이면에는 서로 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노자의 상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유자(儒者)나 도사(道士)로서 불교를 연구하여 출가하는 자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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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琳(572∼640)

수당(隋唐)시대의 불교승. 영천군(潁川郡:河南省)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출가하였다. 박학하여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하였는데 도술을 배워 도사로 전향하였다. 다시 불교에 귀의한 뒤로는 장안의 안제법사(安濟法寺)에 자리잡고 강설을 폈다.

621년(武德 4)에 부혁(傅奕)이 사원승니사태(寺院僧尼沙汰) 11조를 상주(上奏)하였을 때 즉시 상소를 올려 잘못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중향(李仲鄕)이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 유진희(劉進喜)가 <현정론(顯正論)>을 지어 불교를 비난하였을 때에 그는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맹렬한 반론을 전개하였다. 태종은 칙명으로 종남산(終南山)의 대화궁(大和宮)을 용전사(龍田寺)로 바꾸고 그를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파라파라가밀다라(波羅頗迦羅密多羅)의 역장(譯場)에서 필수철문(筆受綴文)에 종사하여 보성다라니경(寶星陀羅尼經)의 서(序)를 지었다. 도전승후(道前僧後)의 제도를 만들려고 하였을 때 즉시 항의하였으나 도사의 참언(讒言)을 받아 죄인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200여 조목을 들어 반격함으로써 결국 사형을 모면하였다. 호법(護法)을 위하여 신명을 걸고 싸운 논객(論客)으로 알려졌다.

교선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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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禪一致

교종(敎宗), 즉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종파와 선종(禪宗), 즉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불타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종파가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 전자는 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 등이고 후자는 소위 선종(禪宗)을 말한다. 교선일치의 주장은 당(唐)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후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교학(華嚴敎學)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일치시키고자 교선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일치의 사상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차차 뚜렷해져서 선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대(五代)와 송초(宋初)의 영명연수(永明延壽)의 교선일치 주장을 비롯하여 천태선·화엄선·염불선 등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게 되었다. 교종을 배우는 자가 선문(禪門)을 두드리기도 하고, 선에 몸 담은 자가 교종의 제학(諸學)을 탐구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송대 이후에는 대중적인 염불과 선을 융합시킨 염불선(念佛禪)이 가장 번성하였다.

천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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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台禪

소위 선종(禪宗)이 발생하기 수세기 전에 천태(天台) 지자대사(智者大師, 538∼597)는 모든 불교를 선(禪)이라는 한 글자로 통일하고 모든 수행(修行)을 좌선(坐禪)으로 요약하였다. 이 일문(一門)을 선종이라 부르고 그 영향은 후세의 선 집단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천태대사(天台大師)의 <초학좌선지관요문(初學坐禪止觀要門)>(통칭 小止觀이라 함)은 좌선에 관한 책으로는 사상 처음 완성된 것으로서 이 책을 모범으로 하여 뒤에 중국·일본의 좌선의(坐禪儀)에 관한 여러 종류가 생겨났다.

천태대사는 좌선을 만행(萬行)의 귀취(歸趣), 지관을 좌선의 내용이라 하여 이를 설파한 것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선문수증(禪門修證)>으로서 선(禪)이라는 한 자에 불교를 내포시키고 있다. 이들 저서에 실린 사상은 좌선이 불교의 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지관(止觀)은 좌선하는 가운데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좌선의 사상적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백히 한 것이 지관으로 <선문수증>에 있어서의 선 사상이 원숙해져서 <마하지관>과 같은 지관사상에 이르게 된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하지관>에서 지(止)는 염(念)을 법계(法界)에 매고 관(觀)은 염을 법계와 일치시킨다고 정의하고 이를 합하여 지관(止觀)이라 하여 선의 사상적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명하였다.

이 천태지관(天台止觀)의 사상체계는 또한 천태선(天台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염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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念佛禪

교선일치(敎禪一致) 사상은 당의 중기 이후 특히 송대(960∼1280)에 들어와 점차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대(五代, 907∼960)와 송초(宋初)에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교선일치설이 한층 이름이 높았고 천태·화엄·정토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고 선가(禪家)에서 교학(敎學)을 공부하는 자도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염불선이 가장 성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은 후세에 들어와 특별한 하나의 종파라기보다는 각 종파의 사람이 염불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성행하였다. 송대의 정토교도로서 유명한 사람이 선·천태 출신 중에 많고 특히 천태계통의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주창하고 <종경록(宗鏡錄)> 100권,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지은 영명연수(永明延壽)를 비롯하여 종이·종본(宗本)·법수(法秀)·의회(義懷) 등이 모두 염불선 출신이고 선정습합(禪淨習合)을 취한 인물들이었다. 선이 크게 떨쳤던 송대에 있어서도 선정(禪淨)의 인물들이 많았고 거사(居士)로서의 양걸(楊傑)·왕일휴(王日休) 등이 유명하다. 왕일휴는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을 지었다. 이와 같은 풍조로 인하여 선종은 가장 성하였으며 이들 인물과 신자들이 일반사회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보급되었던 정토교를 배워 매일의 일과로서 미타(彌陀)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서 염불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대(明代)에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소위 염불선이 성행하였다 한다. 청조(淸朝)의 옹정제(雍正帝:재위 1722∼1735)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며 열심히 선에 정진하고 그 중에서도 정토(淨土)를 신봉하여 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대 이후 이와 같은 형태로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송학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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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學-禪

송대에 와서 훈고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宋學)이라 한다. 이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방법으로서 참선을 하는 일도 있어서 주렴계(周濂溪)는 귀종사(歸宗寺)의 불인(佛印), 동림사(東林寺)의 상총(常總)으로부터 불교 학문을 배웠고, 장횡거(張橫渠)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명도(程明道)는 노석(老釋)을 공부하기를 수십년 동안 하였다 하고, 정이천(程伊川)도 선을 배웠다 한다.

특히 주자(朱子)는 어릴 때부터 대혜종고(1163년 寂)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의 선승(禪僧) 위산영우의 사상을 사랑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선이 당시 명유(名儒)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던가? 선은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직절(直截)한 수도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서 초범탈속(超凡脫俗)한 대덕(大德)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하였다. 또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對談)에 가득 찬 선가(禪家)의 어록(語錄)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 지심견성(指心見性) ―― 선(禪)이 교상(敎相)에 치우치지 않고 문자에 빠지지 않으면서 단도직입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구하여 대성하려고 한 수도의 방법. 이것은 도가(道家)의 주정복귀(主靜復歸)와 부합될 뿐만 아니라 유학(儒學)의 진심지성(盡心知性)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선의 실참실수(實參實修)에 의하여 비로소 도가에서 추구하는 이상향(理想鄕)에 이를 수 있으며 또한 유교의 뜻을 문자로 표현함에 있어 더욱 깊은 뜻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공자·노자의 가르침은 선의 중개 역할에 의하여 내용상으로 융합할 수 있었다.

(2) 승원(僧院)의 청규(淸規) ―― 승원의 규칙은 <백장청규(百丈淸規)>로부터 비롯된 청규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과 유교의 예악(禮樂)과의 조화를 실제주의를 통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해탈에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계율의 형식에 따라서 형성된 예악은 형식에 빠지기 쉬운 유교에 비하여 진지하며 아울러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함순청규서(咸淳淸規序)>에 "우리에게 청규 있음은 유가에 예경(禮經)이 있음과 같으니라"라 하고 <지대청규서(至大淸規序)>에 "총림예법(叢林禮法)의 대경(大經)이로다"라 하여 모두 청규로서 유(儒)의 예로 삼고 있다.

(3) 간명(簡明)과 탈속(脫俗) ――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은 이성과 정뿐만 아니라 곧바로 모든 인격에 호소할 것을 요구하고 번잡한 필설(筆舌)에 빠지게 되는 것을 피하였다. 탈속(脫俗)하여 초연한 입장에 서고 그 언동이 스스로 규구(規矩)에 합치되므로 사가(師家)의 명목을 발휘하는 선장(禪匠)의 생활은 형식적으로 되기 쉬운 유가(儒家)의 무리에 대하여 신풍(新風)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장(禪匠)의 간명과 탈속은 도가(道家)의 허무염담과 매우 유사하여 많은 제가(諸家)가 공명하는 바였다.

주씨(周氏)·소자(蘇子)의 법우(法友)였던 불인료원(佛印了元)과 구양수(歐陽脩)의 법우였던 조인거눌(祖印居訥), 장상영(張商英)의 법우였던 덕홍각범(德洪覺範) 등은 유불 2도(儒佛二道)에 달통하고 문재(文才)에 뛰어나 당시의 학자들을 움직였다. 종문(宗門) 제일의 서(書)라고 일컬어지는 <벽암집(碧巖集)>과 당의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에 나타난 <능엄경(楞嚴經)>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고 거사(居士)로서 주석자(註釋者)가 된 사람도 있다.

거사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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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士佛敎

오대(五代)와 송(宋)으로부터 근대에 걸쳐 거사를 중심으로 행하여진 불교를 말한다. 거사라 함은 원래 관계에 나가려는 뜻을 버리고 불교의 문에 들어온 사대부(士大夫)를 말한 것인데 이 시기에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불교의 경전과 교리에 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교단의 보호와 육성에 힘쓰는 독지가를 가리켰다. 오대로부터 송으로 넘어와서는 염불결사(念佛結社)가 이곳 저곳에 생기고 지식인들간에 열렬한 신자들이 생겨났다. 또 선종이 성행되면서 송학(宋學)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유가(儒家)가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어 양억(楊億)·소식(蘇軾)·양걸(楊傑)·왕안석(王安石) 등은 불교의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였다. 명대말(明代末)로부터 청대초(淸代初)에는 유불도(儒佛道) 3교의 융합이 현저해져서 깊은 유교적 교양을 몸에 지닌 속에 거사가 선·정토·율을 같이 배우고 염불신앙을 믿었다. 이러한 형태가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진헌장(陳獻章)·왕양명(王陽明)·원굉도(袁宏道)·주극복(周克復)이 있었고 또 운서주굉의 문하에는 많은 거사가 양성되었다. 다시 청대에 들어와서 거사불교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서민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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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民佛敎

서민들에 의하여 신봉된 불교. 대중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당대(唐代) 이후의 서민 사이에는 미타신앙(彌陀信仰)의 정토교(淨土敎)가 가장 널리 신봉되었었는데 이것과 병행하여 미륵(彌勒)의 정토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미륵신앙도 왕성하였다.

또한 법화경의 독송과 서사(書寫)의 공덕은 여러 가지 재난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고 믿어져서 특히 법화경 중의 관음경(觀音經)에 의한 관음신앙이 보급되었고,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이 각각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오대산(五臺山)의 문수신앙(文殊信仰)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불사리(佛舍利)에 대한 신앙도 성행하여 사리탑이 곳곳에 세워졌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신앙과 밀교의 전래에 의한 다라니(陀羅尼)의 신앙도 널리 행해졌다. 서민의 마음에 가장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십왕심판(十王審判)의 사상이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십왕경(十王經) 등의 경전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사람은 죽으면 염라대왕 이하 열 사람의 왕에 의하여 죄가 심판된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칠칠일(七七日) 중음(中陰)의 칠재(七齋) 행사와 추선공양(追善供養)을 위한 십왕재(十王齋) 신앙이 형성되었다.

행각승(行脚僧)이 각지에서 속강(俗講)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설화를 사용하였던 것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백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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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蓮宗

남송(南宋)으로부터 원(元)·명(明) 시대에 걸쳐 성행된 대표적인 민간 신흥종교. 백련교라고도 한다. 남송의 고종(高宗) 때에 오군(吳郡:蘇州) 연상사(延祥寺)의 사문(沙門)인 자조자원(慈照子元:?∼1166)이 창시한 것으로 미타염불을 수행하고 계행(戒行)을 엄수하였던 것으로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백련사(白蓮社) 이름을 따서 백련채(白蓮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알기 쉬운 방법으로 포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남녀가 입교하였고 세금과 노역을 면하려고 하는 빈농출신의 사람들도 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이 종교의 결사(結社) 활동은 탄압을 받게 되고 자원(子元)은 유배당하였다. 남송 말기부터 원대에 걸쳐 쟝쑤·저쟝·푸졘 등의 지방에서 융성을 보았으나 여러 차례 사교로 간주되어 금지와 탄압을 받았다. 간경(看經)과 염불을 남녀가 섞여서 하고 밤에 모여 아침에 흩어졌으므로 당시의 지배자는 사회불안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명(明) 말기에는 백련종 속에 빈농과 하층민간에 행해지던 미륵하생(彌勒下生)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명대와 청대를 통하여 가중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각지에서 반란과 봉기를 일으켰다.

백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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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宗

송(宋)·원(元)시대의 민간종교. 백운채(白雲菜)라고도 한다. 북송(北宋) 말경에 뤄양(洛陽) 보응사(寶應寺)의 중 청각(淸覺)이 항저우(杭州) 백운암(白雲庵)에 자리잡고 새로 연 종교로서 교도는 종조(宗祖)인 청각(淸覺)을 백운화상(白雲和上)이라 부르고 그의 가르침을 백운종이라고 하였다.

극단적으로 선종(禪宗)을 공격하였으므로 선종으로부터 격렬한 반격을 받고 사교로 판정되어 청각은 멀리 은주(恩州:廣東省)에 추방되었다. 그가 죽은 후 제자 혜능(慧能)이 유골을 여항남산(余杭南山:浙江省)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백운산 보령사(普寧寺)를 건립하였으며 이후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저쟝 지방이 백운종의 근거지가 되었다.

백운종은 천태종의 교계(敎系)를 이어받아 선종을 배척하고 대승십지(大乘十地)의 보살삼매(菩薩三昧)에 주(住)하여 이타행(利他行)에 정진하고 백련종과 같이 훈주육식을 금하는 계율주의의 신앙단체로서 유발(有髮) 재가종교(在家宗敎)였다. 관헌의 박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깊이 민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원대에는 강남지방에 일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후 교주 심명인(沈明仁)의 비위 사실이 원인이 되어 금단(禁斷)을 당하여 쇠망하고 말았다.

1290년 완성된 <항주여항현백운종남산대보령사대장경(杭州余杭縣白雲宗南山大普寧寺大藏經)>은 백운종 신도의 노력에 의하여 출판된 것이다.

정복왕조하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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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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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人邑會

요·금시대(遼·金時代)에 나타난 승속(僧俗)의 신앙단체. 기원은 남북조 시대의 법사(法社)·의읍(義邑)에까지 소급되는 것으로서 당 말기경에 성행하였던 결사와 동일한 것인 듯하다.

신앙인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일정한 회비를 납부하고 이로써 회원에게 경제적 원조를 해준다는 성격이 강하였다. 가령 금나라때의 낙중부(樂中府) 삼학사(三學寺)의 천인읍회는 그 절에 있는 승려의 생활을 유지하고 보장해 주기 위하여 설치되어, 회원은 승려도 포함하여 매년 10월에 돈 200판(貫), 쌀 한 말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또 미타신앙(彌陀信仰)을 중심으로 하는 미타읍회(彌陀邑會)도 있었다.

이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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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稅戶

요대(遼大) 민호(民戶)의 일종. 글안(契丹)의 종실(宗室)·귀족·공신·사원에 주어진 민호로서 그들은 세의 반을 정부에, 반은 소속된 귀족과 사원에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민호를 이세호라고 불렀다. 요의 멸망과 더불어 종실과 귀족에 소속된 이세호는 양호(良戶)가 되었다. 사원에 소속된 이세호만은 금의 시대에도 존속되었고 사원의 승도들의 압박에 의하여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일부 사원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세호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송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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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松行秀 (1166∼1246)

금나라 시대의 불교승. 조동종(曹洞宗) 청원(靑原)하의 23세(世) 선승(禪僧). 하내(河內:河南省)에서 출생하여 자주대명사(磁州大明寺)의 설암만(雪巖滿) 아래에서 대오(大悟)하고 뒤에 만송헌(萬松軒)을 지어 여기에 자적(自適)하였다.

장종(章宗)의 귀의를 받고 여러 큰 절에 머물다가 뒤에 종용암(從容庵)에 은퇴하여 굉지(宏智)의 백송(百頌)을 평석(評釋)한 <종용록(從容錄)>을 저술하였다.

엄격한 수선(修禪)에 정진함과 동시에 화엄교학에도 정통하였고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과 기타 제학(諸學)에도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하에는 종윤(從倫)·복우(福祐)·이순보(李純甫) 등이 있다.

팔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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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思巴(1235〔1239?〕∼1280)

파스파(Hphagspa)라고도 한다. 원조(元朝)의 초대 제사(帝師)가 된 티베트 사키야파의 법왕.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리하여 파스파(贅者)라고 불리었다. 즉위하기 전에 쿠빌라이에게 계(戒)를 수여했고, 그의 즉위와 함께 제사(帝師)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에 그는 티베트의 행정권, 몽고 전체의 불교행정권, 승려의 특권 등을 쿠빌라이로 하여금 승인토록 하였다. 1269년 티베트 문자에 기초를 둔 몽고 문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파스파 문자이다. 1274년 아우인 린첸에게 국사의 지위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명·청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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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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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宗一源

명(明)의 태조(1368∼1398)가 선승(禪僧) 출신이라고도 하며, 재상이었던 송염(宋濂)도 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두 사람은 다 같이 불교와 불교도를 보호하고 대장경의 간행을 행하였다. 종세(宗勢)로서는 선종이 우뚝하여 다른 종파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천태·화엄·정토의 제종파는 교종합동(敎宗合同)의 경향이 있었다. 저명한 불자(佛者)로서는 덕청(德淸:山大師, 1546∼1623)·주굉(1535∼1615)·지욱(智旭)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주굉은 선(禪)을 깊이 연구하고 정토(淨土)를 염원하여 선과 정토에 관한 저술이 많으며 사상은 제종파합동의 경향을 갖는다.

유자(儒者) 출신인 지욱은 주굉의 <자지록(自知錄)>을 읽고 주굉을 흠모해서 출가하여 천태·법상(法相)·염불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종파에 국한하지 않고 불교 전체를 연구하고 그 참뜻을 밝혀보려 하였다. 그 스스로 팔불도인(八不道人)이라고 자칭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스승 주굉과 마찬가지로 제종파합동의 경향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성상융회(性相融會)의 뜻을 품었으며 또한 선정융합(禪淨融合) 사상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선은 불심(佛心), 교(敎)는 불어(佛語), 율(律)은 불행(佛行)으로 불(佛)은 3학(三學)에 의하여 되는 것이므로 3학(宗)에 의해서 불도(佛道)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3학일치의 취지에 따라서 불교의 제종파는 일원(一源)에 귀일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3학일치(三學一致)는 이론이었고 실천방법으로서는 염불을 들었기 때문에 3학(宗)은 염불에서 나와 염불에 귀착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가리켜 삼종일원(三宗一源)이라고 한다.

운서주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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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1615)

인화(仁和:浙江省)에서 출생하였으며 연지대사(蓮池大師)라고 존칭된다. 화엄종의 학승(學僧) 변융(辯融)과 선승 소암(笑巖)에게서 불학(佛學)을 배웠으나 후에 여러 곳을 편력한 후 마침내 항저우(杭州:浙江省)의 운서(雲棲)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 운서사(雲棲寺)를 다시 일으키고 문하의 제자 교육, 신도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 밑에 1000여인(人)의 승속(僧俗)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광인(廣印)·원현(元贅) 등이 유명하다. 그의 사상적인 특색은 여러 종파를 융합하여 통일적인 불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점에 있다. 그는 계율(戒律)의 부흥에 노력하고 계율을 기초로 하여 이에 선(禪)과 염불을 융합시켰다.

일체의 행위를 선악2문(善惡二門)으로 나누고, 선악의 공과(功過)를 점수로 표시하여 하루하루의 행위의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는 공과격(功過格)사상을 중시한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여기에서 그의 유·불·도 3교의 조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으며 당시 중국에 온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격렬한 논쟁을 교환하였다. <선관책진(禪關策進)>·<자지록(自知錄)>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3교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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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敎一致

유교·불교·도교의 3교는 각기 성립 경위와 사상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3교를 조화시켜 절충융합하려는 움직임이 삼국시대 이후 끊임없이 나타났다. 손작(孫綽)의 <유도론(喩道論)>, 주옹의 <삼종론(三宗論)>, 고환(顧歡)의 <이하론(夷夏論)> 등이 3교조화의 입장에 있으며 맹경익(孟景翼)의 <정일론(正一論)>과 안지추(顔之推)의 <가훈(家訓)>은 2교일치(二敎一致)를 주장하고 있다. 수대(隋代)의 이사겸(李士謙)이나 왕통(王通), 당대(唐代)의 양숙(梁肅)·이고·징관(澄觀)·종밀(宗密)·여동빈(呂洞賓) 등은 입장이나 뉘앙스에 차이는 있으나 모두 3교합일론을 펴고 있다. 송대(宋代)에서는 계숭(契崇)·장상영(張商英)·효종황제(孝宗皇帝)·이순보(李純甫) 등이 있으며 원대(元代)에는 유밀(劉謐)이 있다. 명대(明代)의 대표적인 불교인으로서는 운서주굉과 감산덕청·우익지욱(藕益智旭) 등이 각각 제종융합, 3교조화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덕청의 <3교원류이동론(三敎源流異同論)>(일명 <觀老莊影響論>)은 불교의 입장에서 본 3교일치론으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감산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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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1622)

금릉의 전초(全椒:安徽省)에서 태어났다. 감산은 호로서 감산대사라고 존칭된다. 11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불교의 경론과 유교의 전적을 가까이 하였다. 19세때 출가하여 변융(辯融)·소암(笑嚴)·운곡(雲谷) 기타 많은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선풍(禪風)을 진흥함은 물론 여산에 초암(草庵)을 짓고 염불을 닦았다. 그의 사상은 선과 화엄과의 융합에 핵심을 두고 있으며 이로써 제종조화를 꾀하려 하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관릉가경기(觀楞伽經記)>·<법화경통의(法華經通義)>·<원각경직해(圓覺經直解)>·<기신론직해(起信論直解)> 등 특정한 종파에 구애받지 않는 폭넓은 점이 있다. 또한 <중용직지(中庸直指)>·<노자해(老子解)>·<장자내편주(莊子內篇註)> 등을 저술했는데 이들은 모두 불교사상으로서 유교와 노장사상의 전적(典籍)을 해석한 것으로 3교조화사상이 나타나 있다. <관노장영향론>(<三敎源流異同論>이라고도 한다)은 3교를 논한 것으로서 유명하며 3교 이동(異同)의 비교 검토를 통하여 조화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왕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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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1472∼1528)

명대의 유교학자. 이름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를 양명이라고 한다. 이른바 양명학(陽明學)을 펴낸 사람. 저쟝성 출생. 과거를 보기 위하여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다정다감하고 호쾌한 기질로 인하여 관학적(官學的)이고 형식적인 주자학에 만족할 수 없어서 임협(任俠)·기사(騎射)·문학·도교·불교 등에 차례차례로 탐닉하였다(이를 五溺이라 한다). 28세때 진사에 급제하여 관리생활에 들어갔으나 35세때 환관(宦官)의 횡포를 비난하였으므로 귀주성(貴州省)의 용장역(龍場驛)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지행합일(知行合一) 학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시기였다. 39세에 귀향을 허락받고 돌아와서 심즉리(心卽理) 학설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격물(格物)이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속에서의 일(物)을 바르게 하는 것(格)으로서 주자(朱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외전인 물(物)의 이(理)를 추구하여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학설에는 불교, 특히 선과 화엄사상(華嚴思想)이 들어 있으며 그 자신 거사(居士)로서 불교에 호의를 품고 있었다. 57세 때에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장하였다. <대학고본(大學古本)>·<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전습록(傳習錄)> 등을 저술하였다.

민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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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佛敎

중국에 있어서의 민간불교, 즉 일반 서민이 신앙하였던 불교는 명청시대(明淸時代)에도 전대(前代)에 비하여 변화가 없었다. 교단불교의 일반적인 형태는 선정융합(禪淨融合)으로서 좌선과 염불이 아울러 행해지고 있었으나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혼효(混淆)된 잡다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관음신앙(觀音信仰)이나 지장신앙(地藏信仰)은 아미타(阿彌陀)나 미륵신앙(彌勒信仰) 못지 않게 성해서 도교도(道敎徒)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반대로 도교적인 황제상(皇帝像)이나 신상(神像)이 사원 내에서 받들어지게 되었고 도교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서민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불보살(佛菩薩)이건 도교의 신들이건간에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고 행복을 내려주는 것이면 좋은 것이었다.

불교사상 가운데에는 인과응보 사상, 특히 그 중국적 발전 형태인 십왕사상(十王思想)이 꽤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지옥의 심판, 지옥의 처참한 모습은 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어서 죄의식을 키워주게 하였다.

변혁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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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革期-佛敎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인하여 청조(淸朝)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었다. 청말(淸末) 이래의 묘산흥학(廟産興學) 사업은 중화민국에 계승되어 사원이나 승려는 새로운 사회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극단론조차도 나타나게 되었다. 모든 옛것을 일소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5·4 운동(五四運動)에 이르러 이러한 움직임은 절정에 달하였고 유·불·도 3교나 민간의 미신적 종교에 대한 비판이 심해졌다. 이에 대하여 불교측에서는 민국 초기 이래 대동단결하여 불교의 위기를 타개해보려는 움직임이 여럿 있었는데 1929년에는 태허(太虛) 등에 의하여 중국불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태허는 뒤에 난징(南京)에서 중국불학회를 만들고 잡지 <해조음(海潮音)>을 주재하여 밖으로는 불교도의 이익을 옹호함과 동시에 안으로는 교단의 혁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정부의 '사묘관리조례(寺廟管理條例)' 따위의 불교압박에 반대하고 새로운 시대의 승려를 육성하기 위하여 무창불학원(武昌佛敎院) 등 여러개의 교육기관을 세웠다. 또한 불교기관지의 발행, 불교연구의 추진, 대장경의 출판 등 변혁기에 처한 불교인들은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5·4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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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四運動

'5·4'란 1919년 5월 4일을 뜻하는 것으로 이날에 베이징(北京)의 학생 약 3000명이 일본과의 21개조 조약과 파리평화조약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고, 이를 계기로 해서 전국에 파급된 애국정치운동이다. 이 데모는 베이징 군벌정부(軍閥政府)의 탄압을 받았으나 이것은 오히려 전국적인 공명을 불러일으켜 6월 3일 이후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상인·노동자를 포함하는 대규모 동맹파업으로 발전하여 결국 베이징 정부를 굴복시킴으로써 친일요인(親日要人)의 파면과 파리조약의 조인 거부를 승인하게 하였다.

인텔리겐차에 의하여 15년 이후 전개된 문화계몽운동(신문화운동)이 이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와 과학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유·불·도의 3교, 민간종교, 미신 등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하여 구 문화와 봉건적인 윤리도덕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급기야 반종교운동으로까지 발전하여 묘(廟)·사원(寺院)·도관(道觀) 등에 난입하여 신상이나 불상 따위를 파괴하는 자도 있었다.

감독사묘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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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督寺廟條令

중화민국 정부가 발포한 사묘(寺廟)를 감독 통제하기 위한 조령.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청조(淸朝)가 무너지자 청조 말기부터 주장되어 온 묘산흥학(廟産興學)운동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사원과 그 재산을 서민을 위한 교육시설로 개방시키려고 하였던 이 묘산흥학운동은 5·4운동 등 정치혁명·사상혁명·문학혁명의 고조(高潮)와 결부되어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29년 '사묘관리조례(寺廟管理條例)'가 정부로부터 공포되어 사묘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초등교육·도서관·구제원(救濟院:고아원·양로원·보육원)·빈민공창(貧民工廠:授産施設)·합작사(合作社:協同組合) 등을 경영할 것을 규정하였다. 사원 스스로의 손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불교계는 이 조례에 의하여 승니(僧尼)의 생활과 권리가 현저히 위협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국적인 중국불교회를 조직하여 반대운동을 폈다. 이 운동이 주효하여 동년 가을에 정부는 전의 조례를 '감독사묘조례(監督寺廟條例)'로 개정하였다.

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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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大革命

1966년 8월 홍위병(紅衛兵)의 출현을 발단으로 일어난 일대 투쟁. 이 투쟁은 학술·문화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으로 시작되어서 모택동(毛澤東)사상에 반대하는 당내 권력층의 추방이라는 권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빙우란(憑友蘭)·후외려(候外廬)·임계유(任繼愈) 등의 유력한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도 비판 공격이 가해졌다고 전해지나 종교가들이 어떠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구폐일소(舊弊一掃)라는 슬로건 아래 사원이 폐쇄되고 불상 등이 파괴된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연구활동 등이 정지되어 있는 것도 확실하며 <철학연구>·<역사연구> 등의 학술지도 휴간되었다. 일찍이 중국공산당은 종교인과의 통일전선을 제기하고 신앙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행정적으로 이를 금지하는 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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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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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佛敎

일본은 처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후 계속 고구려·신라를 통해 수많은 불교문물을 받아 소위 고대 일본문화의 여명기인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후 많은 일본승들이 한국에 와 불법(佛法)을 배워 갔고 또 일부는 당(唐)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배워 갔다. 일본불교의 특성은 본지수적사상(本地垂迹思想)에 있는데 이 사상은 일본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사상 경향은 나라(奈良) 시대에 싹트고 후지하라(藤原) 시대에 교리적 조직이 점차 이루어져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교리에 관한 여러 저술이 나타나 일본 특유의 신불(神佛)습합의 불교를 낳았다.

일본 불교사에서 특기할 시대는 정토종(淨土宗)을 이룩한 법연(法然)·친란(親鸞), 또 일련종(日蓮宗)의 종조(宗祖)인 일련(日蓮), 그리고 조동종(曹洞宗)을 창종한 도원(道元) 등의 고승을 배출한 가마쿠라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이러한 경향이 현대까지 내려오면서 일본 고유 불교의 여러 종파를 난립시켰다. 근세에 와서 일본 사원은 단가(檀家) 신도와 밀착되어 사원 경내는 단가 신도의 가족묘지가 되었으며, 사원은 조상제사를 위한 단가의 공양(供養)·희사(喜捨)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李 珉 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