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槪說〕
편집1914년 6월 세르비아 청년에 의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의 암살 사건이 실마리가 되어 이 해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의 1주간 사이에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강국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협상국으로 나뉘어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이것은 개별적으로 볼 때 세계 정패(征覇)를 건 독일과 영국의 대립, 알자스 로렌 문제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발칸 반도에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적 대립 및 발칸 반도의 민족 문제 등이 제각기 직접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단계로 들어간 19세기 말 이래의 유럽 여러 강국 사이에서는 여차하면 대전쟁으로 발전할 정세가 임박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경과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독일은 동서로 러시아·프랑스와 대치하여, 두 정면 작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그를 위한 계획――소위 슐리펜 플랜을 19세기 말 이래 연마해 오고 있었는데, 이 계획에 의하면 먼저 서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후,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를 격파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서부 전선에서 1914년 9월, 마른 강변의 싸움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동부 전선에서도 예상외로 빨랐던 러시아의 진출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저지했으나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1914년 12월 이래 전투는, 서부에서는 스위스 국경에서 북부 프랑스를 거쳐 벨기에 해안에 이르는 전선, 동부에서는 발트해(海) 리가만(灣)에서 흑해로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고, 이외에 발칸 전선에 있어서도 전황을 좌우하는 해상전투는 없었다.
1917년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전국(戰局)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까지, 서부 전선에서는 베르됭과 솜에서 쌍방이 각각 돌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느쪽이나 다 실패로 돌아가고 대세에 변화가 없었다. 그 사이 1915년에 이탈리아가 협상국측에 가담, 그 외에 휴전 전까지 30여 개국이 참전하여 전세계적 대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대전이 이제까지의 전쟁과 현저하게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애초부터 세계 전쟁이란 점에 있으나, 더욱이 참전국이 총력을 기울여 전쟁 수행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었고 양 제국주의 진영이 자기측에서 참전시키기 위하여 혹은 자기 진영에 머물러 두기 위하여 주고 받은 상호 모순된 다수의 비밀 조약인 것이다.
전쟁은 1918년 11월, 전년의 러시아혁명에 이어 계속되는 독일혁명으로 종결된다. 4년 반 동안의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6천만명, 사상자 3천3백만 명(사망자 9백만 명), 전비(戰備) 3천3백억 달러, 독(毒)가스·전차(戰車)·비행기가 신무기로 등장했다.
사라예보 사건
편집-事件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처가 1914년 6월 18일,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된 사건. 사라예보는 6년 전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보스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 황태자 부처는 이 지방에서 거행되는 대연습 사열(査閱) 후, 이 시를 방문했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범행의 책임을 세르비아 정부에 추궁, 독일의 지지를 굳히고, 다음해 7월 최후 통첩을 발하자 세르비아는 그 요구를 거의 받아들였으나 7월 28일 선전포고되었다.
동부전선
편집東部戰線 Eastern Front
제1차 세계대전 때 동맹군(同盟軍)의 러시아 방면의 전선(戰線). 독일은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의 작전지체(作戰遲滯)로 동부로부터 러시아군(軍)의 공격을 받자, 힌덴부르크가 이를 타넨베르크에서 격파하였다. 소강상태(小康狀態) 후 1915년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함락하고 폴란드를 석권하였다. 1916년 재건된 러시아군은 다시 공격, 독일의 병력을 서부전선에서 분산시켜 한때 그 반격을 좌절시켰다.
서부전선
편집西部戰線 Western Front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의 전선을 주로 말한다. 1914년 전쟁 개시와 더불어 독일은 예정된 작전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돌파, 프랑스에 침입하였으나,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자 양군은 대치하여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서부전선 이상없음’이란 발표는 그 당시 매일처럼 보도되었다. 1918년 3월부터 11월에 걸쳐 루덴도르프의 작전으로 독일은 5차에 걸쳐 공격을 가하였으나, 연합군의 선전(善戰)과 미국의 참전을 계기로 역공세를 취하여 사실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동명(同名)의 전선이 있었다.
마른 전투
편집-戰鬪
1914년 9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서부 전선에서의 단기적 승리는 가망없어지고, 전투는 이후 기동전(機動戰)에서 진지전(陣地戰)으로 바뀌었다. 마른은 파리 근교의 센강(江)에 합류되는 강의 이름이다.
타넨베르크 전투
편집-戰鬪
1914년 8월 독일군이 러시아군의 침입을 저지하고 이후 동부에서의 전국(戰局)을 결정지은 전투. 쾨니히스베르크에 육박해 온 러시아군을 힌덴부르크 휘하의 독일군은 호소지대(湖沼地帶)로 유도하고 포위 전멸시켰다. 러시아군의 포로는 10 여만 명이라고 한다.
베르됭 전투
편집-戰鬪 1916년 서부 전선 베르됭 요새(要塞)에 시도된 독일군의 돌파 공격 4개월에 걸쳐 50만명의 인명과 많은 물량(物量)을 투입했으나 프랑스 장군 페탱의 굳은 수비를 뚫을 수 없었다. 전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은 이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미국의 참전
편집-參戰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 전쟁에 중대한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미국은 개전될 때에 중립을 선언하고, 교전국 쌍방에 물자를 팔려는 중립국 입장을 선택,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었는데, 영국이 우세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봉쇄했기 때문에 사실상 영국·프랑스와의 통상이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되고 영국·프랑스도 자금이 궁핍하여 이미 미국 은행에서 많은 차관(借款)을 받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 자본은 영국·프랑스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참전의 유일한 장해는 전통적 정책 ‘중립’이었다. 1915년 5월 영국 객선(客船) 루시테이니어호(號)가 독일 잠수함에게 격침되어 외국인 114명이 희생된 이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潛水艦戰)은 제한되어 있었는데, 1917년 2월 전국 타파(戰局打破)를 위해 재개·강화되자, 이것을 기회로 4월 미국은 연합군측에 서서 참전을 결행했다. 참전의 배후에는 영국·프랑스 재정의 불안정으로 기인하는 무역의 정체(停滯)와 금융 불안이 이미 민간 회사로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또한 절박해 있다고 판단한 미국 대자본의 이해 관계가 깔려 있다. 이 참전은 따라서 군사상의 공헌보다 영국·프랑스측에 대한 군수·재정상의 원조 강화면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되며, 동시에 이 전쟁에서 미국이 쌓아온 경제적 우위에 서서, 윌슨은 14개조(條)의 평화 원칙을 제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4개조 평화원칙
편집十四個條平和原則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선언한 것으로 대전 처리를 둘러싼 원칙. 민족 자결·무배상·무병합(無倂合)·승리 없는 평화 등을 근본 원칙으로 한 14개조로 되어 있으며, 최후로 국제연맹(國際聯盟)의 결성을 제안하고 있다. 이 주장은 이상론(理想論)으로 받아들여져서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기본 원칙으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승 강국(戰勝强國)의 정치적 이해로 인하여 무너지고, 그 정신은 국제연맹의 성립 이외에는 바르게 실현되지 못하고 문제를 뒤로 미룬 결과가 되었다.
무제한 잠수함전
편집無制限潛水艦戰
대전에서 독일이 취한 해상 봉쇄 작전(海上封鎖作戰). 영국의 제해권(制海權)을 파괴할 목적으로 1915년 2월, 독일은 잠수함에 의한 해상 봉쇄를 선언했으나, 동년 5월 루시테이니어호(號) 격침 사건 이래 잠수함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러나 전황(戰況)이 불리하게 기울어진 1917년 2월 재개되어 미국 참전의 동기를 준 결과가 되었다.
킬 군항의 반란
편집-軍港-反亂
독일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1918년 10월 말, 군항인 킬에서 무의미한 출격 명령에 반항하여 수병(水兵)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 시내의 노동자도 제네스트로 호응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혁명의 물결은 북·서 독일에 파급, 11월 베를린 혁명 운동에 의하여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하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윌슨
편집Woodrow Wilson (1856
1924)
아메리카 합중국 제28대 대통령. 1912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분열한 덕택에 민주당으로 당선됐다. 1912년부터 1920년까지 2기를 종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처음에 중립 정책을 취했으나 1917년 참전을 결단하고, 14개조의 평화원칙을 제안하여 베르사유 강화회의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상원(上院)에서 근소한 차이로 우위에 선 공화당의 반대로 말미암아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이 부결되었고, 1920년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후 실의 속에서 서거했다.
비밀조약
편집秘密條約
대전중 자본주의 강대국 사이에 맺어진 전승 후의 영토 분할 및 강대국과 종속민족 사이에서의 전후의 독립·건국을 약속한 밀약(密約). 수정되기도 하고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기도 했다. 수정한 것으로서 대표적인 내용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사이의 터키 분할이 있고, 모순된 예로는 영국이 아라비아인·유대인 쌍방에 준 팔레스티나 건국이 있다. 어느 것이나 전쟁 말기·전후의 혁명운동·민족운동이 고조된 가운데 실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