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槪說〕
편집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 재분할, 자본의 수출이 심화하였다. 러시아는 3국협상 등을 통해서 제국주의의 일익을 담당했으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균형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집중된 중공업과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자본주의화가 촉진된 농공업과 커다란 간격이 생기고, 노동자 계급과 농민 대부분이 제국에 있어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상태에 놓여 궁핍에 허덕이고 현상태에 큰 불만을 품고 있는 것 등이 러시아를 다른 자본주의 여러 국가들과는 또 다른 정세(情勢)로 만들었다.
대전이 장기화함에 따라 국민 생활의 혼란과 절망, 니콜라이 2세의 우유부단한 정치적 무능과 궁정(宮廷)의 부패상을 보고 1917년 3월, 민주주의 정당까지 포함한 민중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를 폐위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임시 정부는 민중이 원하는 평화를 추구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 반면 이 혁명을 추진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들이 만든 소비에트는 각지에 파급되고 농민 소비에트도 성립되었다. 그러면서부터 소비에트 내에서는 농민에 기초를 둔 사회혁명당 멘셰비키가 지도권을 잡고, 볼셰비키 세력은 약해졌다.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로서 소비에트가 혁명의 주도권을 잡도록 호소하여 볼셰비키는 그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7월에는 무장 시위 운동을 벌였으나 진압되었다. 9월에 접어들자 케렌스키 정권 아래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이 일어났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의해 만들어진 볼셰비키 지도하의 적위군(赤衛軍)이 이를 무찌르고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化)가 진행되어 농민은 토지 문제 해결을 볼셰비키에게 기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1월, 볼셰비키에 의한 권력 획득의 무장 봉기가 결행되어 11월 7일 소비에트 정권 수립이 선언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다음날 ‘토지에 관한 포고(布告)’로 토지의 무상(無償) 해방을 실행하고, ‘평화에 관한 포고’로 무병합(無倂合)·무배상(無賠償)의 즉시 평화가 세계에 호소됨으로써, 러시아의 새로운 역사적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3월혁명(2월혁명)
편집三月革命
1917년 3월(러시아歷 2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페트로그라드(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어 차리즘을 붕괴시킨 자유 민주주의 혁명. 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러시아는 군사적 손실을 입게 되고, 대전 중에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과 가축의 징발 등으로 농업은 황폐화되었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생필품의 생산감축 등 국민경제의 붕괴와 기아상태가 지속되었다. 민중의 생활은 압박되기 시작하여 푸티로프 공장의 파업을 발단으로 차리즘 타도, 전쟁 반대, 빵 요구 등을 내건 혁명적 데모, 스트라이크가 성행하였다. 이후 정치적 총파업으로 확대되고 노동자와 군인들의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하였다.
국회는 황제에게 양보를 요구했고, 국회내의 자유주의인 부르주아들에 의해 3월 2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했다. 사회혁명당·멘셰비키는 이것을 지지하여, 황제는 결국 퇴위하고 러시아 제정(帝政)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고는 있었지만, 국민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채 강제로 전쟁을 계속하였다. 3월혁명의 특징은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편집Soviet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의 민주적 자치 기관. 평의회(評議會)라는 뜻. 1905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조직되고 각지에서도 자주적으로 설립되었다. 3월혁명 때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 소비에트는 대개의 경우 결합하고 케렌스키 정권 때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이윽고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가 우위(優位)에 서서 11월혁명을 결행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케렌스키 정권
편집-政權
1917년 7월에 성립하고 11월혁명으로 붕괴된 케렌스키(Kerenskii, 1881
1963)가 수반이었던 임시정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와의 연립 정권이다. 7월 독일군에 대한 총공격은 실패하고 9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에 조우(遭遇)했다. 평화를 갈구하는 민중을 무시했기 때문에 전쟁반대 즉시 휴전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세력이 이 정권 밑에서 신장했다. 케렌스키는 사회혁명당 출신의 웅변가로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창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편집Bolsheviki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多數派). 분열의 원인은 당원 자격문제인데, 레닌 등은 당원은 당의 일정한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계급의 전위(前衛)인 자에 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연합대회가 열리고, 1907년에 런던 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국회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멘셰비키와 분열된 후 1912년 독립적인 당(黨)임을 선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멘셰비키가 조국 방위를 주창했음에 대해 볼셰비키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자본가와의 타협과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적으로 수정사회주의(修正社會主義)와도 대립했다.
1917년 2월혁명 당시에는 소비에트내에서 극소수(極少數)에 속했으나, 4월 레닌의 귀국과 더불어 세력이 증대하였다. 7월 사건을 지도하여 임시정부 타도에 힘썼으며, 실패한 후 일시 열세(劣勢)로 떨어졌으나, 8월말 코르닐로프 반란을 전기(轉機)로 하여 10월에는 20만 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8년 3월 급진공산주의파(急進共産主義派)를 눌러 독일과 단독강화(單獨講和)를 맺고 당명(黨名)을 러시아 공산당이라 했다. 그후 국내전(國內戰)시대에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데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1921년에는 네프를 실시하고, 트로츠키파(派)를 눌렀다. 1926년에 전연방공산당(全聯邦共産黨), 1952년 소비에트연방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멘셰비키
편집Mensheviki
1903년, 제2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마르토프에 의하여 통솔된 소수파.
당(黨)을 구성(構成)할 때 소(小) 부르주아적인 인텔리, 모든 파업자, 시위운동자에게도 입당(入黨)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닌 일파(一派)인 볼셰비키의 엄격한 입당자격(入黨資格)에 반대했기 때문에 조직의 해체, 당규율의 파괴, 인텔리적 개인주의의 찬미, 무정부주의적 무규율(無規律)의 시인(是認) 등이 규정되어 볼셰비키와 갈라졌다. 국회에서는 카데트와 제휴(提携)를 주장했으며, 1927년 이후의 반동기(反動期)에는 해당주의(解黨主義)를 주창(主唱)하고, 비합법적(非合法的) 혁명운동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시에는 조국방위주의(祖國防衛主義) 입장을 취하였으며, 3월혁명 때에는 사회혁명당과 함께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카데트와 연립정부(聯立政府)를 조직하였고, 볼셰비키 정권이 출현하자 맹렬한 반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혁명(10월혁명)
편집十一月革命
1917년 11월(러시아歷 10월)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3월혁명 후 정권을 잡은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자, 대중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이러한 사태에 볼셰비키는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항의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의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 열기는 고조되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격분한 민중의 항의데모를 탄압하고 볼셰비키를 비합법화하는 동시에 정권을 케렌스키에게 넘긴후 사회주의 정부를 조직하여 민중의 지지를 꾀하려 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표면적으로는 민중의 지지에 의존하려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제정파(帝政派) 장군 코르닐로프에 의존하였다. 이 7월사건은 볼셰비키의 평화적 혁명 의도를 무장시위운동으로 바꾸게 하였다. 이후 8월에 케렌스키의 신임을 받던 코르닐노프 장군의 반란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적대시하고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반혁명적인 케렌스키도 진압을 위해 볼셰비키에게 원조를 구하여, 볼셰비키의 지휘하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반란군에 대항하여 승리하자, 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볼셰비키 당세(黨勢)는 9월에 들어와서 일어난 경제의 파국적(破局的) 양상에 아주 잘 부합되는 ‘평화와 빵과 토지’라는 슬로건의 영향과 더불어 급격히 확대되었다. 레닌의 지령으로 권력획득을 위한 무장 준비가 시작되고 11월 6일(1917년 10월 24일)부터 행동을 개시, 7일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동궁(冬宮)을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하는 등 케렌스키 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레닌
편집Vladimir Iliich Lenin (1870
1924)
본명은 울리야노프. 러시아의 혁명정치가·마르크스주의자. 학생 때 17세로 혁명 운동에 가담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오랫동안 제정(帝政)의 관헌에서 탄압을 받으며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계속했다. 세계대전 중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고 『제국주의』(1916)를 저술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 적응시키려 했다. 3월혁명이 시작되자 4월에 적국인 독일을 경유하여 귀국하고 노동자 및 병사에게 발표한 소위 ‘4월 테제’로 시민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移行) 투쟁 방침을 제시하여 혁명을 이끌었다. 7월 사건 뒤에 재차 망명했으나, 11월혁명으로 볼셰비키의 권력 획득을 지도하고 가장 잔인한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했다. 1918년 제2회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인민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좌우기회주의(左右機會主義)와 싸우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키 조약, 네프에서 보여주는 현실적응정책을 취하여 러시아 공산화에 주역이 되었다.
트로츠키
편집Leon Trotsky (1877
1940)
러시아의 혁명정치가. 1903년 이래 멘셰비키로 1905년 혁명 때에는 메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그 후 망명하여 3월혁명 후 5월에 캐나다에서 귀국,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11월혁명에 레닌과 더불어 지도하고 소비에트에서 외무·국방위원이 된다. 1920년경부터 레닌 및 당 주류의 방침에 반대하여 세계혁명을 표방하는 영구혁명론을 부르짖고,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과 대립하여 1929년 국외로 추방되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Brestlitovsk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혁명 후의 정권인 소비에트가 힘겨운 대독(對獨)전쟁에서 이탈하기 위해 교전국 독일과 맺은 단독 강화조약. 폴란드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투르크(터키), 불가리아와 조인, 1917년 11월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협상국에 대해 3개월간의 휴전을 제의하였으나 무시되자, 마침내 동맹국측에 무배상(無賠償)·무병합(無倂合) 및 종속민족(從屬民族)의 자결을 기초로 하는 강화를 제의했다. 12월 5일 우선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체결되고 이어 강화조건을 토의했는데 독일이 제출한 조건이 너무 가혹하여, 이를 수락할 것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당내의 의견이 대립하여 교섭은 1918년 2월 10일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공격을 재개한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에 진격하는 형세에 이르자, 무조건 수락을 주장하는 레닌은 무조약(無條約) 종전(終戰)을 주장하는 트로츠키를 누르고 강화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폴란드, 발트해 연안의 국가들의 일부를 포기하고, 핀란드, 우크라이나, 그루지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내용의 매우 굴욕적인 조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조약은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에서 파기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편집-聯邦
11월혁명으로 성립. 1918년초 노병(勞兵) 및 농민 소비에트가 합동대회를 열어 국가 권력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가 발족했다. 3월, 공산당이라 개칭한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원칙으로 국정을 담당하고, 7월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최초의 소비에트 헌법도 제정되었다. 1918년 여름부터의 열강의 혁명 간섭 반혁명 전쟁, 국내 전쟁에 대처해서 소비에트 정권은 혁명 방위를 위한 적군의 조직, 전시공산주의, 국제적으로는 코민테른의 결성 등으로 비상사태를 탈피하고, 1921년부터는 네프에 의하여 국내 경제 재건을 기도했다. 1922년에는 각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고, 1924년에는 연방 소비에트 헌법도 제정되었다.
전시공산주의
편집戰時共産主義
소련에 있어서 열국의 대(對)소 간섭전쟁과 국내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치·경제·문화에 걸쳐 취해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비상정책. 적군(赤軍)과 노동자에게 대량의 소비물자를 공급할 필요와 도시와 농촌과의 사이에 군사적·정치적 수단에 의한 생산물의 직접적 교환을 행할 목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전기업의 국유화, 곡물의 국가독점과 식량징발, 외국무역의 독점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20년 대체로 전란이 가라앉았을 때 이 비상 강경정책에 의한 식량징발에 대하여 농민의 불만이 높아져 생산은 저하되었고, 많은 농민 반란과 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1921년의 제10회 공산당 대회에서 식량징발은 식량세로 바뀌어졌으며 전시공산주의는 네프로 옮겨지게 되었다.
네프
편집New Economic Policy
1921년부터 1928년의 5개 계획 개시까지 채용한, 전시·공산주의에 대신한 경제정책. 국내 전쟁에서는 농민을 토지의 무상(無償)해방으로 혁명에 참가시켰다고는 하지만, 과중한 부담을 지웠기 때문에 불만을 자아냈다.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생산의욕을 무시하고 사회건설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소생산자(小生産者)들을 사회주의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를 필요로 했으므로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공산당 내부에서의 논쟁이 일어났으나 레닌 등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농민의 수확물 자유판매, 사회주의 체제 테두리에서의 소기업경영(小企業經營), 상거래 등 자본주의적 방법도 인정했다. 이 때문에 부농(富農) 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편집Communist International (Comin- tern)
국제공산당의 약칭.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레닌 등의 주도로 모스크바에 30개국의 공산당과 좌익 사회주의자가 모여서 결성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워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철저히 배제함과 동시에 세계 혁명의 제일선으로서 각국의 공산당을 지도하였는데,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1920년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의 ‘농업 및 식민지 문제’의 테제를 채택했고, 1928년 제6차 대회에서는 제국주의전쟁의 위협에 대한 이른바 공산당의 무장을 결의했고, 1935년 제7차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노동자의 통일전선·인민전선 운동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독·소 전쟁의 발발과 함께 연합국의 전쟁협력에 장애가 되어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