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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동양 진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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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이래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에 의해 국토회복 운동이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의 여러 나라들이 형성되어 갔다. 포르투갈의 경우 12세기에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였고, 15세기에는 조웅 1세(재위 1385

1433)하에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로 성장했다. 이 왕권 밑에서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이 진행되었다.

국토 회복에서 아프리카 오지(奧地)에 있다고 믿었던 ‘성 요한의 나라’와의 제휴를 도모하려고 했던 이 계획은 그 속에 더 깊은 물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향료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무역의 이익인 것이다. 헨리 항해왕 밑에서 이미 14세기 전반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은 착착 추진되었으며, ‘성 요한의 나라’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부는 리스본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동양의 부를 구하는 ‘신항로’ 개발이 현실화되었다. 1488년 디아스는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 이윽고 1498년 5월 20일 아라비아인의 뱃길 안내인에게 인도된 가마의 선단이 인도의 항구인 캘리컷에 드디어 자태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남해 무역에 활약하고 있던 것은 이슬람계 상인이었으며 인도 서해안의 그들 거류지에는 4000 가족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독점적 이윤의 위협을 민감하게 느끼고 진출을 방해하려 하였다.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알메이다는 1509년 마물루크 왕조의 이집트 해군을 인도 서해안 디우항(港) 밖에서 격파하였다. 알메이다를 계승한 인도 총독 알부케르크는 이듬해 1510년 고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그 곳을 동방 무역 지배의 근거지로 했으며, 이듬해에는 말라카를 점령하여 말라카 해협을 제압한 후에 향료 군도에 진출했다. 1517년에는 중국(明)에 진출하여 마카오를 점거하였고, 1543년에는 일본과도 통상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는 동방 무역을 독점해서 거대한 부를 얻었으며, 수도 리스본은 한때 세계 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헨리 항해왕(엔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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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航海王 Henrique o Navegador (1394

1460)

포르투갈 왕 조웅 1세의 제4자. 유럽의 서남단 산 비산데곶의 사그레스에 천문·항해에 관한 시설을 창설하고 항해자를 육성하여 대서양 및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대를 보내어 ‘항해왕’이란 이름을 남겼다. 1415년에 세우타 공격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진하여 보하도루곶을 지나서 베르데곶 남방 북위 8도선까지 도달하였고, 대서양에서는 마디라·아조레스의 여러 섬을 탐험하고 개발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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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tholomeu Dias (1450?

1500)포르투갈의 항해자. 국왕의 명령을 받아 1487년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 이듬해 폭풍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남단 아르고만(灣)에 도달했다. 귀로에는 희망봉을 발견하자 그는 이것을 폭풍우의 곶이라고 명명했지만 왕이 희망봉이라고 개정했다. 그 후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에도 참가했지만 도중에 송환되었으며, 1500년 카브랄의 항해에 참가했는데 희망봉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조난사했다.

바스코 다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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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co da Gama (1469

1524)

포르투갈의 항해자. ‘인도 항로’의 발견자. 국왕의 명을 받아 1497년 7월 8일 세 척의 배에 168명을 태우고 리스본을 출범하여 11월말에 희망봉을 돌아 이듬해 초에 아프리카 동해안 말란디에 도착했다. 당시 아라비아해는 남해 무역의 근거지에 해당하였으며 이슬람계 상인의 활약 무대였다. 여기에서 아라비아인의 뱃길 안내인 아프맛드 비 마지드를 고용하여 아라비아해를 횡단하고 1498년 5월 20일에 목적지 캘리컷에 도달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선단은 계속 이 지방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 곳에 야기된 사실은 포르투갈인과 이슬람계 상인과의 상권을 둘러싼 전쟁과, 인도 여러 항구의 정복이었다. 그 자신도 그 후 1503, 1524년의 두 번 이 곳에 방문하고 1524년 코친에서 사망하였다.

토르데실라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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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條約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포르투갈, 에스파냐 사이에 발견한 토지의 귀속 문제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1493년 이것을 조정하여 베르데곶 여러 섬의 서방을 통과하는 자오선(子午線)에 따라서 서쪽은 에스파냐령으로,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하는 교황의 경계선을 설정하였다. 이 결과 포르투갈은 주로 동양으로, 에스파냐는 신대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직접 교섭해서 1494년에 체결한 것이 토르데실라스 조약이며, 경계선을 조금 서쪽으로 옮겼다.

카브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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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Alvarez Cabral (1460?

1526?)

포르투갈의 항해자. 가마에 이어 1500년 왕명을 받고 인도로 항해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브라질에 표착하였고 이곳을 포르투갈령으로 했다.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후 이슬람계 상인과 사건을 날조하여 포격하고, 인도 서해안의 다른 항구를 경유하여 이듬해 1501년에 귀국했다. 13척 중에서 리스본에 귀환한 것은 5척이었다.

알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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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de Almeida (1450?

1510)

포르투갈의 군인·초대 인도 총독. 1505년에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고 코친에 본부를 두었다. 이슬람계 상인을 추방하고 포르투갈의 주권을 인도 서해안에 확립하기 위해 싸웠으며 근처에 요새를 구축했다. 1509년 디우의 전투가 끝난 후 알부케르크에게 지위를 양보하고 귀국하던 중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원주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디우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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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戰

포르투갈과 이집트·이슬람계 상인과의 남해 무역을 둘러싼 해전(1509). 남해 무역에 활약하고 있던 이슬람계 상인은 포르투갈의 진출에 의해서 무역의 독점이 위협받자 양자간에 분쟁이 계속되었다.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정돈한 마물루크 왕조의 이집트는 인도의 이슬람계 여러 왕국과 짜고 포르투갈 세력의 축출을 시도했다. 1509년 양자는 인도 서해안의 항구 디우에서 대전, 결국 포르투갈이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했다.

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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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

인도 서해안의 도시. 1479년 이슬람교도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남해 무역의 중계 도시로서 번영하고 이슬람계 상인으로 번창했다. 1510년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알부케르크는 무력으로 이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 근거지로 번영했다. 포르투갈 세력 쇠퇴 후에는 더불어 쇠퇴하였으며, 후에 1961년 12월 디우, 다만과 함께 해방되어 이듬해 1962년 3월 인도에 반환되었다.

말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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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cca

말레이 반도 서남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말래카 해협의 요충이다. 남해 무역의 중계 시장이며 몰루카 제도의 향료,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포 등의 집산지였다. 1511년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알부케르크에 의해 점령되어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 거점으로 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령이 되었으며, 1824년에는 영국에 양도되어 양국 해협 식민지의 일부였으나 현재는 말레이 연방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