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스파냐의 해외 진출

에스파냐의 해외 진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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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카스티야 양국이 합동하여 성립된 에스파냐 왕국이 이슬람교도 최후의 거점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국내 통일을 완성했을 때(1492), 포르투갈은 벌써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 인도 항로의 완성은 단순히 시간문제였었다. 해외 진출에 늦었던 에스파냐로서는 콜럼버스의 서방 항해에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60일을 넘는 괴로운 항해 끝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도달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으나 아메리고 베스푸치나 발보아의 활약에 의하여 그것이 인도와 다른 신대륙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향료는 없었지만 대신 풍부한 은이 있었다.

에스파냐는 즉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인도 제도를 근거지로 하여 콘케스타도르(征服者)라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의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원주민 인디언을 정복해 갔다.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공략하여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1521),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제국을 정복했다(1532). 중남미 연안 지역은 브라질을 제외하고 모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 에스파냐는 심한 식민지 경영을 하고 원주민으로부터 공납(貢納)이나 부역(賦役)을 징수하여 광산 개발 등의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몰아부쳤으므로 인구는 급속히 감소했다(원주민이 전멸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은산(銀山) 개발에 노력한 결과, 대량의 금·은이 에스파냐로 유입됐다.

또 아시아 방면에서는 필리핀 군도를 점령하였으며, 마닐라시(市)를 건설해서 동방 무역의 근거지로 했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는 유럽에 있는 에스파냐의 본토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등의 영토에 더하여 1580년에는 포르투갈을 병합해서 ‘태양이 지는 일이 없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하에서 최대의 번영을 이루었다.

에스파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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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國 Espa

a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나라. 켈트 이베리아인을 주된 주민으로 하는 이베리아 반도는 고대에는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어 로마의 속주(屬州) 지배를 거쳐 중세에 들어와 서고트족의 침입·건국이 있었으며, 이윽고 이슬람의 정복과 서칼리프 왕국의 성립이 있었다. 에스파냐의 중세사는 이슬람 지배로부터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점철(點綴)되는데, 에스파냐 왕국의 성립도 이러한 과정에서 배태(胚胎)되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등과 그 밖의 크리스트교 여러 왕국이 형성되고, 이들 여러 왕국은 동부의 아라곤 왕국과 서부의 카스티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과의 결혼에 의하여 두 왕국이 통일되어 여기에 에스파냐의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두 왕을 가톨릭 양왕(兩王)이라고 하며, 이 시대부터 신대륙에 광대한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또 1516년 이후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가 시작되자, 펠리페 2세 시대에 극성기를 맞는 에스파냐 절대주의가 확립되어 근대 초두(初頭)의 유럽번영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15세기의 후반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경제적 공세를 받아 그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자 국위는 실추(失墜)되었고, 에스파냐 계승전쟁 후에는 부르봉가의 계몽 전제 정치를 허용하였다. 프랑스 혁명 때는 시민혁명이 일어났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그동안에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부르주아적 발전의 미성숙으로 인한 혁명의 실패는 그 후에도 계속 후환을 남겨, 자유·공화파와 보수파의 행쟁 속에 19세기의 에스파냐는 내란과 혁명의 불안 속에 가로놓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 전쟁의 경제적 회복의 부진(不振)으로 한때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1930년 세계 공황의 파도를 타고 드디어 공화주의자가 승리를 거두어, 1931년 부르봉가의 알폰소 13세가 퇴위하고 에스파냐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이사벨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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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 (1451

1504, 재위 1474

1504)카스티야 여왕. 1469년에 아라곤 왕자 페르난도와 결혼하여 남편의 아라곤 왕위 즉위(1479)와 함께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였으며 에스파냐 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 1492년 이슬람교도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국토 회복을 완성하고 콜럼버스를 원조하여 신대륙 발견을 성취하였으며, 에스파냐의 국가 통일과 해외 진출을 동시에 강력히 추진했다.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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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Columbus (1446?

1506)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출생하였으며 토스카넬리의 대지 구체설(大地球體說)을 믿어 서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인도로 가는 지름길이라 확신, 포르투갈 왕국에 지지를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영국, 프랑스 왕에게도 거절당한 끝에 1492년에 이르러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얻을 수가 있었다.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號) 이하 3척에 120명을 태우고 파로스항을 출범, 고난을 극복, 10월 12일 서인도 제도에 당도하여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 명명했다. 또 다시 쿠바, 하이티를 발견하였으며 하이티에 40명을 남겨 두고 귀국했다. 그 후 제2회(1493

1496), 제3회(1498

1500), 제4회(1502

1504)의 중남미 항해 탐험을 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곳을 인도라 믿고 있었다. 불굴의 의지와 자신감이 신대륙 발견을 성공시켰지만, 그것이 그의 인식을 방해한 것이기도 하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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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go Vespucci (1451

1512)피렌체의 상인으로서 에스파냐로 옮겨가서 식료품 중매업을 하고 있었다. 1499년 에스파냐 사람 오헤다의 원정대에 참가한 것을 최초로 전후 4회 주로 남아메리카를 탐험했다.

카브랄이 발견한 브라질 탐험을 위한 포르투갈 왕의 명령에 따라서 행한 제3회(1501

1502) 탐험이 유명하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신대륙의 발견’을 주장했다. 후에 독일의 지리학자 와르트제뮤라가 『세계지 서설(世界誌序說)』을 내고 신대륙을 그의 이름을 따라 아메리카라 한 것이 오늘날의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기원이라 한다.

마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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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Magellan (1480?

1521)

포르투갈의 항해자. 포르투갈 왕실을 섬기고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인도에서 활약했지만 후에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1517년 에스파냐로 가서 칼로스 1세(1516

1556)를 섬겼다. 에스파냐 국왕과 안트워프 상인의 지원을 얻어서 서쪽으로 돌아서 향료(香料) 군도로 가는 계획을 실행했다. 1519년 8월 10일 기함 트리니다드 외 5척의 선박을 이끌고 출발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고, 남아메리카 연안을 남하하여 1520년 10월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발견하였으며(마젤란 해협), ‘파도가 잔잔한 평화로운 바다’인 태평양을 서쪽으로 항진하여 98일 간의 괴로운 항해 끝에 괌섬에 기항하고, 1521년 3월 16일 필리핀 남단에 도달했다. 그는 여기서 토인에게 살해되었으나, 빅토리아호와 선원 18명은 이듬해 1522년 11월 6일 에스파냐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세계 일주 항해가 달성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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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nando Cortes (1485

1548)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 19세로 신대륙에 건너가 산토 도밍고, 쿠바에서 근무한 다음 1518년 에스파냐 탐험대에 의해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 정복에 기용되었다. 1519년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으며, 원주민과 싸우면서 진군하여 동년 11월에 수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에 입성했다. 주민의 반항을 받았으나 1521년 4

8월 9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동시를 공격, 대규모적인 파괴 전투 끝에 점령하였으며, 폐허 위에 노바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는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강압적인 통치를 했으므로 원주민의 반란을 초래했지만 피투성이의 탄압으로 이를 억압했다.

마야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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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 Maya

잉카문명과 병립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대문명. 6세기경까지 마야 종족(種族)에 의하여 옥수수 경작(耕作)을 기초로 우악삭툰, 과테말라 지방에 코판, 팔렌케, 티칼 등의 도시 국가가 성립되고(古國), 8∼10세기경에 주민은 이들 도시를 버리고, 유카탄 반도의 북부로 이주하여 욱스말, 치첸이트사, 마야판 등의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新國). 그 뒤, 이들 도시국가의 분란을 틈타 북방 멕시코 계곡으로부터 톨테크족이 침입, 13세기 초엽 무렵에 이를 정복, 이윽고 1532년 이 지방의 문명은 에스파냐인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다. 정치는 귀족정치에 의한 신권정치적(神權政治的) 색채가 농후하고, 씨족 단위의 토지공유에 의한 농경생활이 영위되었다. 종교는 창조신(創造神) 외에 풍우(風雨)의 신, 옥수수의 신 등이 숭배되어 피라미드 형의 기단을 갖는 신전에 봉안되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를 사용하였고, 천문·역학(曆學)의 진보가 현저하여 태양력, 간지력(干支曆) 등이 있었다. 청동(靑銅)의 주조는 볼 수 없으나, 금·은·동(銅)의 세공(細工), 고사본(古寫本), 채도(彩陶), 벽화(壁畵) 등은 유명하다.

마야 문화는 (1) 형성기(기원전 300∼기원후 300), (2) 고전기(300∼900), (3) 후고전기(900∼1530) 등 3시대로 구분된다.

형성기의 문화는 올멕 문화와 뚜렷한 구별이 되지 않는다. 150년경에 이르러서야 마야인은 독자적인 문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그러나 고전기 전기에 있어서는 멕시코 고지의 문화, 후고전기에는 톨테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명확하다.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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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文

마야 문화는 석비(石碑)와 그림문서(繪文書)에 의해 확인된다. 석비는 가장 오랜 기록으로 신(神)이나 사람의 상(像)과 함께 상형문자와 역(曆)의 기호를 가득 새긴 석판이다.

그림문서는 수피(樹皮)를 종이처럼 엷게 두드려서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역(曆), 예언, 종교의례 등을 상형문자나 채색화로 나타낸 것인데,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이것을 악마의 책이라고 해서 태워버렸기 때문에 겨우 4책(冊)밖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해독된 상형문자는 대개 역(曆), 왕명(王名), 신명(神明) 등이며, 문법이나 음운에 대해서는 간신히 실마리를 잡은 정도이다.

그림문서에는 사실(史實)을 나타내는 내용이 빠져있으나 이곳을 정복한 에스파냐의 승려가 원주민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기록하여 마야어를 라틴문자로 적은 기록서나 마야어로 된 수사본(手寫本)에 의해서 어느 정도 보족(補足)된다.

마야의 계수 표기는 20진법(法)으로 점(點)과 가로줄이 각각 1과 5를 나타내고, 제로(零)는 조개껍질 모양의 기호로 적었다. 마야인이 숫자의 단위(單位)를 발견한 사실은 주목할 일이며, 그들은 밑에서부터 위로 순차숫자(順次數字)를 써서 단위를 높였다.

그림문서 중 가장 보존이 잘된 드레스덴 문서에는 태양, 일식, 금성의 운행에 관한 정밀한 관측결과가 설명되어 있다. 마야인이 태양(太陽)의 주기(周期)를 계산한 정밀성은 그레고리우스력에 의한 1년보다 오차가 적은 근사치를 얻고 있었다. 마야의 1년은 1개월을 20일로 하는 18개월에, 불길한 날로 여겨진 5일을 더한 3백65일로 구성된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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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

마야의 정치·사회 제도는 대단히 복잡했다. 그들은 그리스인처럼 도시국가로 된 소규모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도시동맹을 맺은 일도 있었다.

사회계급은 귀족, 농민, 평민, 노예 4계층이었는데, 노예는 전쟁에서 잡힌 포로나 형벌로 지위가 격하된 사람과 그들의 자녀였다. 직업은 세습이었으며 혼인은 친족이 상의해서 정했는데, 아버지와 동명(同名)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귀족은 2명 이상의 처를 가질 수 있었으나 일반 사람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였으며, 간통은 사형으로 처벌되었다. 마야인은 주로 농경을 했으며, 그들이 재배한 것은 옥수수 외에 카카오, 목화, 용설란(龍舌蘭) 등이었다. 교역은 육지와 바다에서 성행했으며 카카오, 콩, 케찰 새(鳥)의 깃털, 조개껍질 등이 화폐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도시는 고전기와 후고전기에 있어 그 구조가 달랐다. 고전기의 도시는 교역품을 교환하는 장소이며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활동의 근거지였지만 거주지로서의 성격을 갖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수장(首長)이나 신관의 주거인 궁전은 있었으나 신전, 천문대, 광장, 구희장(球戱場) 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고전기에 가서는 성벽이나 방새(防塞)를 두르고 궁전은 신전보다 더 많아졌고 또 일반 서민의 집도 많아졌다. 이것은 마야의 도시가 제사 도시에서 거주 도시로 변모한 것을 의미한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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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

마야 석조예술의 정수는 그

부조에 잘 나타나 있다. 벽조(壁彫)나 석비(石碑)에는 위압적인 신상(神像)과 국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상형문자가 훌륭한 장식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회화는 프레스코화(畵)의 기술을 구사한 보남파크의 벽화가 걸작이다. 그 그림은 건물의 방의 벽면 전체에 의례, 무용(舞踊), 전투 등의 정경이 그림 두루마기처럼 그려져 있어 마야의 의복, 장신구, 악기 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예술적 감각과 상상력이 풍부한 마야인의 민족정신보다 더 훌륭한 예술표현은 단경호(短頸壺), 다족토기(多足土器), 향로 등의 토기에서 볼 수 있다. 이 토기는 아름다운 오렌지색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검정이나 빨강으로 채색하고, 회반죽으로 덮기도 하였다. 또한 부조(浮彫)의 기법이 사용된 예도 많다. 그 주요한 테마는 물고기나 사슴 등을 도안화(圖案化)한 문양, 신(神), 전투 등이며, 여기에서 신성문자(神聖文字)가 장식적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아스텍 제국 (아스텍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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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國(-文明) Azt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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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에 멕시코의 아스텍인(Aztecs)이 만든 국가로 마야 문명을 계승(繼承)하여 발달했으며, 14세기 중엽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에 장려한 도읍을 축조하고 멕시코 일대를 지배하여 일종의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하였다. 석조의 계단 피라미드, 문자, 역법 등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금속기의 발달은 늦었다. 그 후에 에스파냐인 코르테스의 침략을 받아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파괴되어 멸망했다(1521).

아스텍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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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 Aztecs

중부 아메리카 선사문화를 건설한 부족의 하나. 14세기경 도시 테노치티틀란(현재의 멕시코시)을 건설하였고, 15세기초부터 1520년경 에스파냐에게 멸망되기까지 주위의 도시와 군사적인 도시 동맹을 맺고 상업, 약탈, 공납 등으로 번영하였다. 원래는 유목민이었으나 멕시코 고원에 농경민으로서 정착한 후는 1000년의 전통을 가졌던 중부 아메리카 문화의 유산을 이어받아 복잡한 사회조직을 구성하였으며 많은 유적, 유물을 남겨 놓았다. 에스파냐인의 기록에 의하여 그 역사와 문화는 중부 아메리카의 여러 문화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국가의 종교적 행사 때는 포로를 희생으로 하는 많은 인신제물이 바쳐졌다. 그들의 신앙은 괴기한 다신교이며, 오늘날 남아 있는 종교적 건축, 회화, 조각에는 그로테스크한 것이 많다.

문화 및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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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社會

2세기 이상에 걸친 아스텍 문화는 문명과 만행의 기묘한 혼합을 나타내고 있다. 아스텍인은 정복민의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 예술, 문학, 음악의 소양을 갖추었으나, 한편 그 잔혹한 종교의례나 전쟁의 방식 등의 광포하고 무서운 모습은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아스텍인의 세계관에 의하면 우주는 명계지옥(冥界地獄)과 천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자(死者)는 생전의 행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방식에 의해서 각각 사후(死後)의 나라에 간다고 생각했다.

아스텍의 왕은 처음에는 세습이 아니고 귀족, 신관, 그리고 군사 지도자로 구성된 최고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차츰차츰 왕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왕이 외출할 때에는 가마를 타는 것이 보통이지만, 도보일 경우에는 많은 정신(廷臣)이 땅에 융단을 펼치면서 선도(先導)했다. 신관층(神官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으며,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귀족계급과 전사에게도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보다 한층 낮은 계층에 상인이 있어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고, 그 다음 계층이 직인(職人)이고 가장 낮은 계층이 서민, 그리고 노예였다. 노예는 포로나 중죄인(重罪人)이었다. 아스텍인은 원래 수렵 채집만을 했으나, 이후 정착하여 농경에 종사하게 되었다. 가장 많이 재배한 것은 옥수수와 강낭콩이며 용설란(龍舌蘭)의 일종인 마게이로 풀케라는 술을 만들기도 했다. 카카오, 벌꿀, 담배는 아열대 지방에서 수입했다. 텍스코코호 수면에는 치남파라는 부유농원(浮遊農園)이 있었는데, 이것은 갈대잎을 깔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것이었다.

아스텍의 문자는 마야만큼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표의(表意)방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역(曆)은 대단히 복잡하여 1년이 20일로 된 18개월로 구성되어 있다. 의학은 많이 진보하여 세습의 전문의사가 환자를 치료했다.

팔이나 다리를 부목(副木)으로 고정시켜서 골절(骨折)을 치료하고, 자락(刺絡)으로 치료하거나 상처를 꿰매기도 했다. 또한 충치, 피부병, 눈이나 귀의 질환도 치료하고, 산부(産婦)의 분만을 돕기도 했다. 여러 가지 병과 상처에 사용하는 약품은 초목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에스파냐인도 그 의술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여 약품의 조합법을 배웠다.

아스텍인은 특히 서정적이고 종교적인 시(詩)를 지었다. 그것은 대대로 구전(口傳)되어 왔으며, 일부는 에스파냐인에 의해 전사(轉寫)되었다.

거대하고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기념 건조물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수도가 장기간에 걸친 에스파냐인의 포위공격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조각류는 그 재난을 모면했는데, 그 중에서 「역석(曆石)」 「코아틀리쿠에 여신상(女神像)」 등이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많은 토기, 터키석(石)의 모자이크, 진주, 우모세공(羽毛細工) 등도 발견되었다.

잉카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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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 Inca

페루를 중심으로 한 안데스 산맥(山脈)의 고원지대에서 일어났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대 문명. 수도는 쿠스코(페루). 마야, 아스텍 문명과 아울러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일컬어진다.

아시아 대륙의 신석기 시대의 농경문화가 베링해협과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거석(巨石) 문화시대를 거쳐, 1400년경에는 북쪽의 에콰도르로부터 남쪽의 칠레에 이르는 대제국이 출현하였다. 신의 화신이며 태양의 아들 잉카(국왕의 뜻) 밑에서 오리엔트나 고대 아시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전제정치가 시행되었다. 민족·국가적인 농업공산제와 집단노동제의 경제조직이 구성되었으며, 토지는 태양신의 것, 국왕의 것, 국민의 것으로 구분되었다. 고원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계단식 경작지가 많고, 운하공사를 일으켜 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 담배, 감자 등을 재배하였으며, 청동기, 금은기가 사용되었고, 문자는 실의 색과 묶는 방법에 의한 기호(키푸:結繩文字)를 사용했다. 수레의 사용을 몰랐으며, 인력(人力)에 의한 신전, 궁전, 운하 등의 대토목공사가 성행하였다.

1531년부터 2년간에 걸쳐 프란시스코 피사로 등 에스파냐인의 정복으로 왕국은 멸망하고 그 사회제도도 붕괴되었다.

국가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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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體制

잉카제국은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신권·봉건 체제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 피라미드 형 정체(政體)의 정점에 잉카황제가 있었다.

잉카는 신성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황제는 귀족계급에게 정무를 분담시켰으며, 가장 중요한 자리에는 가까운 친족을 두었다. 토지는 모두 황제의 것이지만, 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종교와 신을 위한 태양의 땅으로, 또 하나는 황제 자신의 땅으로, 나머지는 각 가족에게 할당했다. 토지는 그 마을의 인원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농민은 토지에 구속되어 있었고, 주거를 마구 이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나라의 방침에 따라 정복한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자기 가족의 농토뿐만 아니라 태양의 땅이나 황제의 땅도 경작하였다. 행정관과 병사들은 행정과 치안을 유지하는 일에 종사했다.

잉카 황제는 신이나 마찬가지로 숭배되었으며, 귀족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옆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일은 그의 아내들에게 맡겨졌으며, 한 사람의 정실(正室)과 많은 소실(小室)이 있었다. 황제는 순혈을 지키기 위해 자매들 중의 하나를 아내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는 잉카 제국 후기의 관습이다. 제국의 후기에는 후계자가 반드시 적출자(嫡出子)라야 했지만 반드시 장자(長子)에 한하지는 않았다. 대개는 가장 유능한 아들이 뽑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아버지(황제)의 군사적 행동에 참가하며 정치를 배웠다.

잉카 황제가 사망하면 그 유체(遺體)를 미라로 해서 궁전이나 태양의 신전에 매장했다. 소실이나 신하의 몇 사람은 왕과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가서 운명을 같이했다.

종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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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觀

종교는 잉카인의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잉카 황제의 선조인 태양신 인티는 특별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인티를 모시는 곳은 쿠스코에 있는 대신전이었다. 그러나 최고신은 인티의 아버지이며 창조신인 비라코차였다.

잉카의 우주관에 의하면 비라코차는 인류의 다섯 세계 가운데 제1세계의 신이고, 인티는 현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태양신이었다.

지방민은 잉카의 국가 종교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별도로 특히 농업에 관련된 여러 가지 소박한 신앙과 의례(儀禮)를 가지고 있었다. 잉카의 종교는 마술이나 미신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어 점(占)이 널리 행해졌으며, 재판에도 점이 이용되었다.

도로망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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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路網-發達

잉카의 도로는 해안과 산을 달리는 두 줄의 대간선(大幹線) 도로와 소로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폭이 넓고 아름답게 돌을 깐 곳이 많았다. 내(川)에는 나무 넝쿨로 만든 다리를 놓고, 가파른 산길에는 바위를 깎아서 계단을 만들고, 곳에 따라서는 터널을 파기도 했다. 이 도로를 따라 촌락과 숙역(宿驛)이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약 1천만의 주민을 수용한 넓은 영토의 각지에 많은 행정관을 두고 있었는데, 훌륭한 도로망과 숙역에 의해서 중앙과 지방 사이의 통신은 매우 빨리 이루어졌다.

도시는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도 건설되었으며, 전략의 요지인 골짜기 입구나 국경 부근에는 요새가 구축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추픽추이다. 이것은 1911년에 발견되었다.

마추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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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u Picchu

잉카 문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유산은 건축이다. 가장 중요한 건축물에는 네모난 돌이나 거대한 화강암이 사용되었으며, 돌이 접하는 면은 면도칼날도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갈아서 평평하게 되어 있다. 잉카의 건축은 세밀한 조각을 한 장식이 없기 때문에 마야나 아스텍의 것보다 간소한 느낌을 주지만, 황제의 주거나 신전의 내벽 전체에는 황금이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복자가 녹여서 가져갔다.

보존이 잘된 건조물로는 사크사와만과 마추피추 성새가 유명하다. 후자는 우루밤바 강 기슭 해발 2천4백 미터의 험한 곳에 있으며, 마치 주변 풍경의 한 부분인 것처럼 조화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수로와 못이 있고, 계단식 테라스가 층층이 밭으로 이용되었다.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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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Pizarro (1478

1541)

에스파냐의 정복자. 1509년 콜롬비아에 건너가서 탐험 활동에 종사했다. 1524년 잉카 제국의 정복을 계획하고 1528년까지 2회에 걸쳐 그 지방을 탐험한 다음에 에스파냐 왕 칼로스 1세의 원조를 받고 1532년 약 100명의 보병과 70명의 기병을 인솔하여 수도 쿠스코를 공격하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현재의 페루 리마에서 에스파냐 식민지의 건설을 시도했는데 후에 동지간의 다툼으로 인하여 살해됐다.

펠리페 2세(필리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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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Felipe Ⅱ (1527

1598, 재위 1556

1598)

에스파냐 왕. 아버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뒤를 이어 내외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절대 군주이며 에스파냐 제국의 황금 시대를 대표한다. 오스만제국이 키프로스를 점령했을 때 교황의 요구에 응하여 오스만제국의 해군을 레판토 연안에서 격파하고(1571), 1581년에는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해지는 일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 치세 아래에서는 상공업에 대한 중세와 구교정책(舊敎政策) 때문에 네덜란드가 반항하여 일어났으며(1572), 영국의 약탈과 모직물 산업이 에스파냐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1588년 시도한 영국 공격은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아르마다(艦隊)의 궤멸로 끝나고, 왕의 치세 후반 에스파냐의 국세는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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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la

에스파냐가 내항(來航)하기 이전에는 원주민의 소(小)부락에 불과했지만 레가스피 지휘하의 에스파냐 군대가 필리핀 북부를 정복할 동안 1571년에 건설되었고, 중남미 식민지와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계 지점이며, 에스파냐의 필리핀 통치 중심지로서 번영해 왔다.

레판토 연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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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岸海戰

펠리페 2세 치하에서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연합함대가 오스만제국의 함대를 코린트만에서 격파한 해전(1571). 오스만제국의 키프로스섬 점령에 대해서 로마의 교황은 에스파냐, 베네치아, 제노바를 규합하여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의 진출에 대비했다. 이슬람의 진출에 대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위라는 신성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와 북이탈리아 도시의 지중해에 대한 이익의 방위전이라는 성격이 짙다. 쌍방에서 300척이나 되는 함대를 편성하여 코린트만에 면하는 레판토 연안에서 싸운 이 해전은 연합함대의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제국의 지중해 진출은 저지되고 이 승리의 주인공인 펠리페 2세 치하의 에스파냐의 이름을 드높였다. 또한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아르마다(무적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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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敵艦隊) Invincible Armada원래는 병력, 특히 해군력을 나타내는 에스파냐어. 보통 무적함대라고 하며, 1588년 펠리페 2세가 영국에 파견한 대함대를 가리킨다. 전함 127, 승무원 8000, 대포 2000을 갖춰 절대로 패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무적함대라 불렀다. 영국의 약탈에 위협받고 있던 펠리페 2세는 이 함대에 육군을 태워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을 계획했으나, 1588년 도버 해협의 해전에서는 호킨즈, 드레이크의 지휘하에 80의 전함, 9000의 승무원을 갖춘 영국 함대에게 패하고 근근히 54척이 귀항하는 대패배를 당한 것이다. 그 결과 에스파냐는 해상권과 함께 신대륙 무역의 독점권마저 잃고 급속히 쇠퇴해 갔으며, 이에 대신하여 영국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