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환상의 미술

다다이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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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isme

제1차 세계대전 중 전후에 걸쳐 일어난 반예술운동(反藝術運動)으로 조형 예술뿐만 아니라 문학도 포함하고 있다. '다다'란 아이들의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 운동의 본질에 뿌리박은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한다. 1916년 2월 먼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인 트리스탄 차라와 리히알트 휠젠베크는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의 부정을 표방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콜라주나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오브제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풍자적이고 메캐닉하며 상징적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윽고 다다는 취리히에 한정되지 않고 뉴욕·베를린·하노바·게른·파리로 파급 또는 동시기에 발생한 쉬르레알리슴의 전주곡이 되었던 것이다. 주요 화가로서 한스 아르프, 에른스트, 슈비터스, 뒤샹 등이 있었으며, 역사는 되풀이되어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네오 다다'가 풍미하였다.

뒤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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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1887∼1968)

루앙 근처의 브란빌 출신인 프랑스 화가이며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과 화가인 쟈크 비용의 아우이다. 처음에는 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되려고 하였으나 파리에 나와서 아카데미 쥐리앙을 다니는 가운데 화필을 잡게 되어 후기 인상파의 작풍에 접근해 갔다. 이윽고 분석적 퀴비슴에 관심을 쏟아 1912년에 유명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제작해 세상에서 일컫는 동시주의(同時主義)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서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뒤샹은 1914년에 아홉개의 동편(銅片)을 두장의 글라스에 끼운 <아홉개의 수형(鑄型), 나쁜 남자들>을 발표하였고 1917년 뉴욕의 앙데 팡당 미술전에는 흰 변기(便器)를 보내어 확실히 반예술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뒤샹의 레디 메이드인 것이다. 결국 그는 보편적으로 낯익은 기성품에 새로운 시점(視點)을 제공한 것이고, '나는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개적인 사상의 소유주인 뒤샹은 이후 완전히 제작을 단념하여 버렸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피카비아나 만 레이와 더불어 추진한 반예술의 경향은 다다이슴의 선구로서 지금에 와서는 다다의 부활에 새로운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41년에는 브루인과 뉴욕에서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을 열었고 1947년에도 파리의 국제 쉬르레알리슴 전시회에도 참가하였으나 그는 1968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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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段-裸體

뒤샹이 1912년에 그린 작품인데 1913년 뉴욕의 '아머리 쇼'에 출품하여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고속도 사진의 한 코마처럼 색채의 다이너미즘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의 목표는 미래파의 작업과 거의 같다. 오토 쉬텔츠아의 <예술과 사진>에 의하면 미래파인 루이지 루소로의 작품인 <다이너미즘>은 모조리 그대로 탄도(彈道)의 고속도 사진과 중복되고 있으며 자코 모바르라의 <노끈에 매진 개>와 지노 세레비니의 <탬버린을 손에 든 무희>도 이러한 운동감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이미 사진 애호가인 드가가 <무희들>에서도 실험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뒤샹이 그 그림에 대하여 "누드의 환경이 갑자기 나에게 떠올랐을 때에 나는 이것이 자연주의의 노예적 쇠사슬을 영구히 단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말한 경우 그는 순수한 메카니즘 이외의 의미 내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는 단순히 나체의 하강만을 의미할 뿐이 아니고 나아가서는 심리적·성적 메타모르포제를 암시한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장의 그림이 만약 그 정도까지 내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놀라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뒤샹을 다다이슴뿐이거나 쉬르레알리슴의 원천으로 볼 때에는 당연히 이 작품을 들 수 있다.

슈비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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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t Schwitters (1887∼1948)

독일의 화가·판화가·조각가이다. 하노버에서 태어나 드레스덴의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베를린의 '시투름(暴風)'의 그룹에 참가하면서 시와 조형에서 다각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다다이슴의 잡지 <메르츠> 지(誌)를 발간했다.

<메르츠>에서 그는 과거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고 명백하게 '반예술'을 선언했고 그가 만든 각종 콜라주와 같이 그의 집에는 유명한 <메르츠바우> ― 길거리에서 주워 모은 판자나 잡동사니로 세운 기둥이 있고, 이것은 조각에 있어서의 콜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보고 있다.

<메르츠바우>는 10년 세월에 걸려 만들었다. 후에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노르웨이에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는 제2의 <메르츠바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의 망명지였던 영국에서도 이것을 시도하였다. 그만큼 마치 어린 아이처럼 진지하게 소재와 놀아난 다다이스트도 없을 것이다.

에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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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Ernst (1891∼1976)

독일의 쾰른 근처인 브뤼르에서 출생하였다. 본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1910년경 표현파 화가 마르케와 사귀게 되면서부터 회화의 길에 들어섰다. 최초에는 미래파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입체파를 거쳐 1919년 한스 아르프와 함께 쾰른에서 다다의 운동을 일으켜 종전의 회화개념을 타파하여 이듬해 파리에서 콜라주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부터 파리에서 살았고 1924년에는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동 25년에는 독자적인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타주를 고안하여 쉬르레알리슴에 신국면을 개척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꿈과 현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되어 있어서 새로운 환상을 얻은 셈이다. 194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46년에는 애리조나로 거처를 옮겨 또한 원시의 야성적인 세계를 탐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이듬해에는 대회고전(大回顧展)을 열었다. 대표작은 <커다란 숲> <비 뒤의 유럽>이 있고 연작인 <박물지(博物誌)>와 <백두녀(白頭女)>도 유명하다.

쉬르레알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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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現實主義 surrealisme

프로이드 정신 분석학의 영향 아래 전개된 예술운동이며 조형예술과 문학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은 포브와 표현파에서 시작하여 퀴비슴을 경유하여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으로 발전하는데 다다이슴 이전에는 시와 조형을 포함한 예술운동은 표현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야수파나 입체파의 운동은 순전히 조형상의 문제에 한정되어 있어서 화면에서 비어져 나오는 미지수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표현파는 문학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식 이상으로 인간의 감성과 내부세계의 격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포브와 표현파의 차이는 형식을 중히 여기는 프랑스적 감성과 내용을 중시하는 독일적 정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블라맹크, 드랭의 작품 이상으로 키르히너와 쉬미트 로틀루프의 화면쪽이 더욱 파국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다이슴은 한층 더 파괴적이었으며 쉬르레알리슴은 프랑스적 감성 위에서 한번 더 내용을 전면으로 밀어 내는 조작(操作)은 아니었을까.

테크닉에서 본다면 쉬르레알리슴은 퀴브에서 다다로, 다다에서 초현실로 몇몇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쉬르레알리슴은 이념과 기술 양면에 걸친 20세기 최대의 예술운동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쉬르레알리슴의 어원은 아폴리네르에 있으며, 주의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제일선언'(1924)에서 비롯되었고 오토머티즘을 통하여 꿈의, 심층의, 불가시(不可視)한 세계가 백일하에 노출되었다.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는 그러한 표현에는 불가결의 수단이었다. 여기에서는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독일의 파울 클레를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초현실의 일면을 갖추고 있다.

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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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de Chirico (1888∼1978)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그리스의 볼로스에서 출생, 기술자가 되려고 공학을 수학하였으나 화가생활로 전환하였다. 아테네의 미술학교와 뮌헨의 미술학교를 거쳤고, 특히 독일의 화가 뵈클린과 클링거에게 접근, 결국 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1910년 쉬르레알리슴을 예고하는 최초의 그림을, 1911년 파리에 체재하며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들과 사귀어 퀴비슴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적으로 조상(彫像)이나 기하학적 도형을 배치한 움직임이 없는 양식을 확립하였고, 1917년에 친구인 카를로 카라와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형이상(形而上)의 심리학을 목표로 하고, 명상적이고 신비적이며 또한 추억적인 화면이다. 이러한 그의 정숙한 구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의 영향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전기한 뵈클린과 클링거에로의 경도(傾倒)를 생각할 때에, 또한 키리코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수많은 쉬르레알리스트의 존재를 생각할 때에 그에게서 헤겔과 니체를 원천으로 하는 독일적 사념을 연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24년 파리의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발레나 오페라의 무대장치에도 몽환적인 구도를 전개하였으나, 1933년부터는 또다시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돌아와 이른바 전위운동에서 물러나와 버렸다. 대표작은 <시인의 불안>(1913), <봄의 트리오>(1914) 등이다.

멜랑콜리와 가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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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街路-秘密

키리코의 1914년 작품으로 대표작 중 하나로 이 길게 뻗친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투시법은 될 수 있는 한 보는 사람의 시선을 깊숙하게 끌어들이고 그것과 교차하는 듯이 침침한 건물이 오른편에 배치되고 있다. 빛과 그림자, 연장과 정지, 앞과 뒤, 미래와 과거 등 대상은 저마다에 형이상의 의미를 가져서 심리의 주름살을 엿보게 한다. 굴렁쇠를 돌리고 있는 소녀, 그녀도 앞으로 달리고 있는 듯이 보여서 사실에 있어서 회상의 실을 끌어당기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이러한 관념의 대립이 초현실주의 최대의 내적인 수법이 된다.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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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ro (1893∼1983)

에스파냐의 화가. 바르셀로나 근처인 몬토로이크에서 출생하여 바르셀로나의 미술 학교를 마친 후 1919년 파리로 나와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퀴비슴 운동에 공명하였고 1925년 앙드레 브르통 등의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한 후에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출품도 하였으며 파울 클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농원>(1921)과 같은 사실적인 작풍으로부터 특징있는 조형언어의 세계로 옮아간 것도 이 시기인데 대상은 단순하게 추상화되었고, 히에로그리프에 흡사한 기호가 지배적이다.

1928년에는 네덜란드 여행, 그 해에 미국에서 개인전, 1937년에는 만국박람회 에스파냐관(館)에 벽화를 제작,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1948년 귀국한 후로는 파리와 바르셀로나에서 제작생활을 하였다.

미로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특유한 어두운 꺼림칙한 느낌이나 심리묘사는 적고 밝은 소박성이 특질이며 모두를 순수한 상징기호로 바꾸어 가는 매력이 있다.

탈출의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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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가 1940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원숙기의 것이라 한다. 미로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기묘하게 희학질하는 생물, 불가사리·초승달, 별, 뱀 등이 기호가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이 '이들의 형태야말로 공간에서 한기(寒氣)를 뺏는다'고 비판하였으니 만큼 화면은 과연 유머에 넘쳐 있고 이 때문에 색채도 겨우 청·흑·적의 배치로 총족하고 있다.

기호는 마치 음표와 같다. 그러기에 리드미컬하여 눈으로 보는 작품 이상으로 눈으로 듣는 작품이란 인상을 받는다. 미로 연구가 중에는 화면에 마구 뿌려진 별과 뱀, 달과 마물(魔物)에는 이 지상과 하늘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고 하지만 심각성은 없다. <탈출의 사다리>가 미로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것은 1936년경부터라고 하는데 그래서 전쟁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다만 한편의 동화와 같이 즐거운 율동의 세계이다.

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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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elvaux (1897∼1994)

안타이트 출신인 르네 마그리트와 더불어 벨기에의 쉬르레알리스트이다. 부친의 희망으로 건축을 배웠지만 수학이 떨어져서 화가로 전환하여 1920년에 4년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 다녔다. 델보 초기의 풍경화는 포브이며 인물은 대체로 벨기에의 표현파 안소르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으나 얼마 뒤에 키리코와 만나 쉬르레알리슴으로 기울어져서 거의 독자적인 힘으로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1935년 후에는 직접으로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출품하여 '몽유병적 나부가 거니는' 그의 이미지네이션은 최근에 와서 겨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1969년 파리에서 회고전(回顧展)을 열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델보는 낡은 플랑드르 풍차가 청동(靑銅)의 빛 속에 진주의 쇠사슬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영혼의 영역과, 바로 이것을 통괄하는 단 한 사람의 여성에게 일체를 맡기고 있다.'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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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보가 1943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델보의 매력도 키리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추억과 결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하여 포착할 수 없는 순수한 이념이고 특정한 추억은 아니다. 단지 델보는 이것을 꿈의 반복에 유사한 되풀이의 수법으로 표현한다. 그리스풍(風)인 신전(神殿)의 열과 창백한 달빛을 받으면서 나체인 채로 걸어가는 여인들. 그녀들은 원근법의 초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작아져 어즘푸레해져간다.

델보의 연구가들 중에는 그가 평생 나부(裸婦)를 계속 그렸다고 하는 이유로 단적으로 평하여 에로티시즘 화가라 말하기도 하지만 델보의 누드는 항상 정신의 등불이었으며 순결하고 갭직하였으며 밤 사람이어서 결코 옮기는 일이 없다. 아마도 델보의 그림 속에서 보이는 옷 입은 사람 편이 차리라 교활하고 물질적인 존재로서 죄지은 것같이 겁을 집어먹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델보는 그리스 정신을 계승한 정당한 적자(嫡子)라 하겠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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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Magritte (1898∼1967)

레시느 태생. 벨기에의 쉬르레알리스트이다. 브뤼셀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파리에 체재(1920∼1926)하여 입체파와 미래파를 거쳐 쉬르레알리슴의 그룹과 사귀게 되면서 환상적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마그리트의 환상이란 이상한 것, 놀라운 것을 세련된 기법으로 일상생활 속으로 지양하여 유니크한 사물과 사물과의 관련을 구축하는 것일 뿐 결코 기괴취미도 아니고 도깨비 따위도 아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 뒷받침할 수 있겠다.

"인간이 어떠한 사물에서 보고 있는 사실은 또 다른 하나의 사물이다. 중요한 일은 어떤 물체를 통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아니고 놀란 자기에게 놀라는 일이다"라 말하였다. 대표작으로 <빛의 왕국> <비레네의 성> <커다란 가족>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규방(閨房) 철학> 등이 있다.

빛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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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대표적 작품이며 화면에는 소읍의 작고 평화스러운 한채의 집이 그려져 있다. 그저 그뿐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으로서는 문득 생각에 잠겨버린다. 문은 어둠에 싸였고 가로등이 켜졌으며 집도 마당도 그리고 나무도 밤의 정적 속에 잠겨 있는데 하늘만이 그렇게도 밝고 흰 구름마저 뚜렷이 떠 있는 것은 어쩐 일인지.

이것은 마그리트가 되풀이하는 수법이다. 즉 데페이즈망이다. 프랑스 말로 depaysement(사람을 다른 생활환경에 둔다)이란 말은 실은 프로이트가 '꿈'의 한 현상으로서 지적한 성질로 전위(轉位)라 표기하여도 무방하다. 꿈에는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꿈에서는 일체가 가능하며 A란 장소에서 어느 틈에 Z의 장소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마그리트의 <빛의 왕국>은 밤인 동시에 한낮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일종의 트릭이라 말해 버리면 그만이기는 하겠지만 마그리트는 묘사력에 있어서 보통이 아닌 기량을 가졌기 때문에 밤과 낮은 종이 한장의 차이인 것이다.

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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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Tanguy (1900∼1955)

프랑스 화가로서 파리 출신이나 미국에 귀화하여 코네티컷 주 우드벨리에서 사망했다. 부친은 해군장교였던 관계로 청년시대는 선원으로 아프리카·에스파냐·남미 등을 항해, 1922년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가끔 포르 기욤의 화랑에서 키리코의 작품에 매혹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쉬르레알리스트들과 사귀어 1927년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탕기는 최초부터 구상(具象)을 그리지 않았는데 항해 중의 추억에서였던지 마치 해저(海底)와 같은 백그라운드에 화석 혹은 생물 비슷한 오브제를 배열하여 비현실의 회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27년 이래에 그가 추구한 바는 일관하여 변하지 않았고 점토상(粘土狀)의 원형질을 대지(大地)로 하는 그의 우주발생의 풍경은 점점 확대되어 그의 꿈은 그 나름의 리얼리티를 유지해 나갔다. 대표작은 <때의 신기루>(1954)와 대작 <호(弧)의 증식>을 남겼다.

Wifredo Lam (1902∼1982)

쿠바의 사구아에서 출생하였다. 하바나·마드리드·파리에서 배웠고 1938년부터 파리에서 살았다. 그 해에 에른스트와 빅토르 브로넬을 사귀어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여 1940년에는 앙드레 브르통의 책에 삽화를 그렸다. 동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차 파리로 돌아왔으나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제작활동을 하고 있다.

램의 작품에는 원시림과 정글 그리고 서벤너의 망령이 서로 밀치고 있다고 평한다.

조포하고 난잡한 배색에서 유달리 빛나는 괴물이 떠올라 마치 그것들은 적도지대의 수목을 치장하는 의태(擬態) 곤충인 것만 같다. 말하자면 원시와 신화가 뒤섞여 흔들려 움직이는 세계이지만 아무튼 토착의 향기가 강하게 풍겨 쉬르레알리슴의 이색적인 화가라 말하겠다. 칠레 출신인 초현실의 화가 마타가 인공세계의 착란을 그린 데에 비하여 대단히 야성적이다.

벨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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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Bellmer (1902∼1975)

폴란드의 카드비체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사진작가로서 출발하였으나 [인형]이라고 제목을 붙인 일련의 기분나쁜 사진에서 명성을 얻고,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나왔다. 쉬르레알리슴 잡지 {미노토르}에도 그 사진 한장을 게제하였는데 귀여운 소녀가 분해되고 해체된 그림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다고 한다. 다만 마르셀 장의 말에 의하면 그 소녀의 얼굴은 사별한 벨메르의 부인을 꼭 닮았다고 한다.

소묘가로서도 탁월하였으며 유채화는 별로 많이 그리지 않았으나 데생과 판화에 새로운 해부학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막스 에른스트, 가스통 바쉬라르, 포르, 에뉘아르 등의 초상 외에 그 변형이 가능한 오브제 [인형]도 제작하여 진귀한 심리적·성적인 발상(發想)을 환기시킨다.

대표작에는 [밤에 피는 장미] [이미지의 해부학] [안구담(眼球譚)] 등이 있다.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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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dore Dali (1904∼1989)

에스파냐의 화가이며 바르셀로나 근처의 피게라스에서 출생. 1921년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1924년 형이상화(形而上畵=키리코, 카라)에 관심을 깊이 가지면서 동시에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28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와 쉬르레알리스트와 교유하여 이듬해 파리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달리는 매우 훌륭한 기법을 구사한 화가이어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세부묘사와 여기에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단장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에 걸쳐서 대표작 <기억의 고집> <황혼의 격세유전(隔世遺傳)>을 발표하는 한편 1930년에는 <눈에 보이는 여성>을 제작하여 편집광적(偏執狂的) 비판의 방법론을 명백히 하였다. 이른바 이중상(二重像)의 작품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1940년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고, 1941년에는 뉴욕에서 대회고전(大回顧展)을 열었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의 전형적인 화가이다.

내란의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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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亂-豫感

달리 작. 일명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라고 하는 이 그림은 1936년 소위 에스파냐 내란이 일어나기 반년 전에 제작하였다. 지평선을 가능한 한 낮게 잡고 부드러운 물체를 심하게 잡아 늘인 이 수법은 달리 독자적인 왜곡(歪曲) 원근법의 일종인데 이 때문에 화면은 실로 다이내믹한 구성력을 갖추고 있으며 거기에 동족 상쟁의 내란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가을의 인육(人肉) 먹기>(1936∼1937)가 있는데 이것은 울적한 가을풍경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살을 뜯어 먹는 작품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권태감이 화면 전체에 덮여 있다.

이에 비하면 <내란의 예감>은 글자 그대로 격발(激發)의 찰나라고 하는 야릇한 긴박감이 특징일 것이다.

흰 구름이 떠 흐르는 하늘의 푸르름 또한 이러한 긴장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예술은 예언이라 말하지만 바로 여기에 그 좋은 예가 있으며, 이후 현대예술은 미래로 향한 통찰력을 상실해 버렸다.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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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or Fini (1918∼ )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쉬르레알리슴의 가장 독창적인 여류화가로서 현재는 파리에서 살고 있다. 한스 리히터에 의하면 쉬르레알리슴풍(風)의 그림을 그리는 여류화가는 피니뿐만 아니고 레오노라 카린톤, 드로테아 타닝, 메레트 오펜하임 모두가 에른스트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듯한데 확실히 피니가 잘 그리는 동굴이나 폐가·황야나 늪지대는 게르만적이었지 결코 라틴적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그녀 선조에 독일사람의 피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피니가 그린 상징의 오브제는 달걀이고 해골이며, 어느 것이나 생성과 사멸에 직결되고 있다. 스핑크스는 아마 그 양쪽을 다 지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표작으로는 <세계의 끝> <지질학적인 기억>이 있으며 1955년 이후는 중국회화의 전통을 포용한 풍경이 뛰어났고 최근의 작품에는 색채가 한층 더 현란해 가고 있다.

환상적 레알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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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想的- fantastischer realism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빈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환상예술의 운동인데 시인이자 화가인 알베르트 파리스 폰 귀타스로가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빈은 나치스의 통치하에 있었고 전후의 빈은 4개국의 공동관리로 인하여 완전히 분단되어 이른바 예술의 공백상태가 생겼으나, 원래 그 곳에는 세기말부터 금세기에 걸쳐 구스타프 크림트와 에곤 실레 등 뛰어난 인물이 있었고 프로이트나 와이닌겔, 무질, 그리고 호프만스타르, 마라와 센베르크 등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 현저한 연쇄반응을 보여왔다.

1950년 쉬르레알리슴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에드거 쥐네가 빈에 왔을 때 당시 20대의 젊은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는데 르돌프 하우스너, 월프간그 프티, 안톤 렘덴 등이고 그 후에 에른스트 프크스, 에리히 브라우어, 피터크리치 등이 첨가되었다. 그들은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있어서 그것을 반드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역할과 동시에 조형(造形)의 미를 경멸하는 관념의 유희인 네거티브한 면도 발견하게 되어 새로운 쉬르레알리슴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먼저 전통으로 되돌아와서 뒤러, 레오나르도, 알트도르퍼, 브뤼겔, 알텐보르트 등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하고 이어서 기술의 수련을 목적으로 하여 갖가지 mischtechnik(기술의 복합)를 구사하여 무엇보다도 아르티장임을 모토로 하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폭스, 브라우어, 렘덴이 뛰어났으며, 폭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떤 의미에서 쉬르레알리슴의 수정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림을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일, 결국 회화의 기술이란 정밀 적절한 필기법-내용의 한 자 한 구절을 소홀히 하지 않는 기술법-즉, 무엇을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

오토마티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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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matisme 自動書記法

우연을 이용하고 동시에 만인에게 가능한 쉬르레알리슴의 방법으로 이성이나 의식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 가운데에 화필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방법은 쉬르레알리스트 가운데서 행하여졌던 우미한 사해(死骸)와도 어딘가가 닮아 있다. 후자는 한장의 종이를 순서대로 서로 돌려서 각자가 생각나는 그대로의 한 낱말과 한 줄의 선을 그려 최후에 얻어진 일련의 기괴한 문장이나 야릇한 데생을 보고 즐기는 방법이다.

물론 우미한 사해에 비교하면 오토마티슴이 원초적이며 문명의 냄새가 묻지 않은 무의식의 메시지라 하겠다. 우수한 화가이기도 하였던 빅토르 위고도 이 방법을 사용하였고, 시인 아르님도 이러한 마법의 구술(口述)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브르톤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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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oticism

쉬르레알리슴의 중요한 무기는 에로티시즘이다. 초현실주의가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을 정신적인 지주로 하고 있는 이상 이는 극히 당연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쉬르레알리슴이 그들의 원천(源泉)으로서 찾았던 과거의 화가 가운데에 가령 보쉬, 피에로 데 코시모, 위스리, 고야, 귀스타브 모로, 뭉크 등 남녀의 성애를 저마다의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후작의 갖가지 저작은 인간의 육(肉)과 영(靈)을 극도로 긴박하게 대립시키는 것이라 하여 애호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피엘 드 만디아르그, 조르즈 바타이유, 장 쥐네, 앙드레 브르통과 같은 시인이 자라날 수가 있었다.

원래 '시란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사물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관념으로, 관념에서 명확한 실체로 향하는 몇 차례의 다리를 걸어 준다'(르네 크르베르)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미지의 관념의 복권(復權)이었던 쉬르레알리슴이 문학과 시와 나란히 갔다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어서 때로는 바타이유의 소설이 화가들의 데생력을 자극하였던 일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쉬르레알리슴이 시대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시기에 나왔다고 본다면 에로티시즘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하여 <에로틱 드 쉬르레알리슴>이라는 서적이 간행될 만큼 쉬르레알리슴은 에로티시즘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람들은 벨메르나 파울 븐더리히의 인체해부학에서도, 그리고 월터 스완벨크나 바르티스의 소녀들에서도 브로넬의 요정이나 만 레이의 사진에서도 오펜하임이나 피에르 모리니에의 오브제에서도 에로티시즘을 발견해 낼 수 있겠다. 본디부터 그들 가운데에는 섹스 이퀄 에로티시즘이라고 하는 직절적(直截的)인 도식도 있으며 앙드레 마송, 존엔시테른 등은 그 전형이라 간주된다.

프로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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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ttage

본뜻은 마찰하다 또는 문지르다의 뜻인데 독일어는 Durchre, betechnik이다. 나무토막·돌·나뭇잎·베 등 요철(凹凸)이 있는 물질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이것을 위해서 연필이나 목탄으로 문질러 거기에 떠오른 우연의 효과를 노린 한 수법을 말한다.

1925년 여름에 에른스트는 브르타뉴의 포르닉에서 이 수법을 발견하였다. 무심히 바라다보던 호텔 방바닥의 요철에 흥미를 가졌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꺼질 듯이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선의 궤적이었으며 혹은 무(無)에서 이룩된 형식이라고도 할까. 그러나 이 무한히 작은 형식은 인간의 무의식에 계류되는 제작충동을 자극하여 점차로 확대되고 분기(分岐)되어 간다. 마치 레오나르도의 그 벽의 얼룩과도 같다. 이리하여 에른스트는 프로타주로써 쉬르레알리슴의 한 특징 테크닉의 가능성을 암시하였다. 석쇠나 어탁도 프로타주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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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ge

무엇을 바른다는 뜻인데 퀴비슴 시대에 피카소나 브라크가 시도한 파피에 콜레를 발전시킨 기법을 가리킨다. 다만 파피에 콜레는 화면에 우표나 티켓이나, 모조지·신문지 등을 발라 붙여서 조형적인 효과를 노린 데 대하여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의 콜라주는 깃털·철사·성냥개비, 따위 응용하는 소재의 종류도 넓어졌고 쇼킹한 효과를 구하는 경향도 강화되었다.

즉 파피에 콜레의 경우는 어느 정도 화면의 하모니에 따라서 무엇을 발라도 발랐던 것이어서 세련도가 높은 데 대하여 콜라주는 다른 소재와 맞부딪치게 되고 또한 생각지도 못한 언밸런스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인상은 결코 최초의 충격을 뛰어 넘을 수가 없다. 여기에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콜라주는 그림에서 태어나온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성에 반대되는 특색과 우연한 트릭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성공한 예로서는 막스 에른스트의 <백두녀(白頭女)>와 <친절 주간>이 있다.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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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alcomanic

이 말은 프랑스어 decalquer(복사하다. 전사하다)와 manie(편집)의 합성어인데 쉬르레알리슴 기법의 하나이다. 오스카 드민게스가 이 기법을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글라스나 아트지와 같은 비흡수성인 소재에 그림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다른 종이를 댄 다음 위에서 눌렀다가 떼면 기괴한 형태의 무늬가 생겨나는 우연한 테크닉이다.

오스카 드민게스는 1906년에 카나리아 군도(群島)의 테네프리에서 출생하여 1928년 파리로 나와 쉬르레알리슴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정열적이었고 발명에 대한 재능이 우수하였던 그는 어느날 두 장의 고무 수채화를 문질러 맞췄다가 떼내어서 유니크한 풍경을 제작하였다.

막스 에른스트가 이것을 유채화에 응용한 일은 유명하였지만 보통 이러한 제작은 시머트리컬하게 되기 쉬워 드민게스는 그것을 피했다. 대표작에는 <미래의 기억>이 있다. 끝으로 드민게스는 1957년 섣달 그믐달에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부기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