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1945년 이후의 미술

살롱 드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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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Mai

살롱 드 메(5월의 전람회)는 1945년에 비평가인 가스통 디르의 주장에 따라 파리에서 창설된 초대제(招待制)의 전람회이며 매년 5월에 개최된 데서 이 명칭이 생겼다. 이것은 1941년 5월에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던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전통 청년화가 미술전'의 레지스탕스 정신의 오의(奧義)를 계승하였고 바젠, 에스테브, 마네시에, 상지에 등 비구상계(非具象系) 화가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미노, 로르주 뷔페 등 옴 테모앙(시대의 증인)계 그룹의 구상화가까지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1946년에 설립된 레알리테 느베르(新現實展)는 아르퉁, 폴리아코프, 바자렐리 등을 포용하여 순수 추상으로 향한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1947년 이후는 레알리테느베르계(系)의 화가까지도 흡수하여 전후(戰後)에 먼저 일어난 추상과 구상의 대립을 초월해서 추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바자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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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Vasarely (1908∼1997)

헝가리 출신.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하여 부다페스트 대학 의학부의 입학 자격을 얻었으나 그것을 포기하고 디자인 학교에 진학하였다.

모홀리 나기의 작품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고 말레비치, 몬드리안, 칸딘스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

1930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계속 파리파(派)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중에는 주로 그래픽의 작업에 종사하였으나 종전 후에는 재차 회화에 열성을 쏟았고 동시에 태피스리의 의장(意匠) 디자인이나 석판화 분야에서도 폭넓은 활약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구성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인데 기하학적인 색면구성에 의하여 순수한 객관을 화면에 나타내려고 의도하였다. 그는 정서적인 표현이나 주관의 표출을 극력 피하고 일반적으로 차가운 추상이라 일컬어지는 비개성적인 기하학적 형태의 배합으로써 순수한 것, 절대적인 것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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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1928∼1985)

파리에서 출생하여 1944년 파리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47년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이 개인전은 전후의 불안을 단적으로 묘사한 사실적인 수법에 의하여 널리 공감을 얻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20세라는 약관으로 크리틱상(賞)을 수상하여 일약 화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후 매해마다 테마를 정한 연작을 발표하였고, 1958년 샬판티에 화랑에서 개최한 대전람회가 성공을 거두어 그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같은 크리틱상 수상자인 로르주 등과 함께 결성한 '시대의 증인' 그룹을 본거로 하여 추상회화와 대립했다.

뷔페의 특색은 예각적(銳角的)인 선묘(線描)와 흑·백·그레이를 기조로 한 간결한 배색에 의한 사실이며 이따금 그리는 야위어 빠진 얼굴이나 다리·풍경·새·광대 등은 전후의 폐허에 허덕이는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법의 마네리화(化)는 이윽고 비참주의(悲慘主義)·과장벽이라는 비난까지도 받았다.

코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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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ra

코브라는 코펜하겐·브뤼셀·암스테르담의 각 머릿글자를 맞춰서 만든 전위미술(前衛美術) 그룹의 명칭인데 1948년 덴마크·벨기에 및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을 멤버로 해서 집결되었다. 북구의 표현주의와 쉬르레알리슴적인 환상을 혼합한 화풍(畵風)을 추진하면서 활약을 하였으나 1951년에 해산하였다. 요른, 아펠, 아레신스키를 중심으로 하였고, <코브라>라 는 동명의 기관지를 10호까지 발행하였다.

추상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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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

추상미술의 경향을 총칭하는 개념인데 1950년대 처음으로 일어난 유럽의 앵포르멜·타시슴과 미국의 액션 페인팅도 이 개념 속에 포괄할 수 있다. 기하학적인 도형을 중심으로 한 순수 추상의 차가움과 비교하여 일반적으로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불린다. 1940년대 종말에 가서는 이 추상의 냉열논쟁(冷熱論爭)이 자주 일어났으나 이윽고 뜨거운 추상이 주류를 점유하게 되었다.

앵포르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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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el

비정형(非定形)이란 의미이다. 앵포르멜이란 1951년 프랑스의 비평가인 미셀 타피에가 조직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운동이며 전후 회화의 이념을 명확하게 밝히려고 한 최초의 시도이었다. 회화에 있어서 모든 정형화(定形化)를 배제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생명의 자취를 그리려는 행위 바로 그것, 혹은 마티에르의 집적(集積)과 공간의 긴장 속에서 직접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1951년의 '격정의 대결' 전시회와, 1952년의 '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 전시회에 의하여 전후 회화의 하나의 중요한 도표가 되었다.

타피에가 이 운동을 벌일 힌트를 얻은 것은 1945년에 개최된 포트리에 전시회에서 나치스에게 학살당한 무명인의 얼굴을, 얼굴이라고도 할 수 없는 형태의 상실과 박력있고 중후한 마티에르로써 그린 작품 <인질(人質)>을 보고 난 다음의 감명 때문이라고 한다. 이 운동에 참가한 주요한 화가들은 마튀, 아르퉁, 쉬마하, 뒤뷔페, 타피에스 등이다.

포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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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n Fautrier (1898∼1964)

그는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생후 얼마 뒤에 양친과 더불어 런던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부상을 입었으나 1920년부터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려 회화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의 제작을 '새우갈색의 시대'라 하고 있다. 1927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앙드레 말로의 지우(知友)를 얻어 단테의 지옥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주선해 받았다. 이 무렵을 흑의 시대라 한다. 이어서 그레이의 시대가 시작되어 그의 마티에르는 더욱더 강하게 됨과 아울러 비구상으로 향하는 의도가 현저하게 되었다. 스키 강사를 하면서 묘화(描畵:청의 시대)를 하고, 이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에 그는 앵포르멜풍(風) 양식을 거의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파리에서는 그의 집이 레지스탕스의 본거지가 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1942년에서 1944년까지 그 유명한 <인질>의 연작을 제작하였다.

마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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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Mathieu (1921∼ )

마튀는 처음 법률·철학·영문학 등을 배우다가 1942년경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47년 파리에 정주하면서 본격적인 제작을 하였다. 1951년 미셀 타피에의 초대에 응하여 '격정의 대결' 미술전에 참가한 후에는 앵포르멜의 대표적인 화가로 활약하게 된다.

그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긴 화필을 가지고 또한 독특하고 정열적인 제스처를 섞어가면서 즐겨 공개하는 제작을 하였음은 유명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린다는 것은 화려한 축제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의도나 계획을 배제하여 그리는 데에 몰입한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삶의 확증을 구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의지는 예술의 죽음이다'라고 하여 일순간의 속필(速筆)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 속필에 전생명을 맡겨 버려야만이 회화의 정신은 소생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행위뿐이라고 하는 그의 실천은 전후의 세대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

타시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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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chisme

타시슴은 1954년 비평가 샤를르 에스틴느가 주창한 이념인데 타시(얼룩:色斑)에 의한 오토매틱한 제작을 특징으로 한다. 그림물감의 비말(飛沫), 점적(點滴), 번짐 등 우연적인 효과에 의해 의식적인 묘화를 넘어서려고 하는 점, 즉 앵포르멜로 통하는 데가 있는데 원래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의 기법을 개척한 쉬르레알리슴에 의한 현대 회화로의 접근이라 생각할 수가 있다.

액션 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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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ainting

액션 페인팅은 1952년 미국의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명명(命名)한 전후 미국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이다. 이미지의 정착보다는 그린다는 행위(액션) 그 자체에서 순수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이며, 잭슨 폴록, 윌렘 데 크닝, 프랑츠 크라인 등에 의하여 대표된다. 본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에 망명한 쉬르레알리스트의 영향하에서 쉬르레알리슴이 개척한 오토마티슴의 기법을 더욱 철저하게 한 수법(바닥에 펼친 캔버스 위에 유동적인 마티에르를 떨어뜨려 나가는 드리핑의 수법 등)도 볼 수 있지만 쉬르의 이미지 주의(主義)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때를 같이 하여 1950년대의 미술에 뜨거운 추상의 선풍을 일으켰다.

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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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ock (1912∼1956)

폴록은 미국의 와이오밍주(州) 코디에서 출생하여 미국 서부의 애리조나와 북캘리포니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후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고등학교에서 조각과 회화를 공부하였다. 1929년 뉴욕으로 나와 1931년까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토머스 벤튼에게 사사하였다. 그가 작가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5년 이후의 일인데 추상적인 작풍으로 전환한 것은 1940년부터이다.

1942년 그는 뉴욕의 맥밀란 화랑에서 열린 '미국·프랑스 청년화가 미술전'에 첫 출품을 하였다. 이듬해인 1943년에는 유명한 여성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이 주최한 '금세기닝의 미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녀가 주최한 개인전은 1950년 유럽에서도 개최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그 해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회에서는 고키와 데 쿠닝과 더불어 젊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미국과 유럽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56년 뉴욕 교외인 사우잔프턴에서 자동차 사고로 급서(急逝)하였다.

그는 보통 화면을 수평으로 두고 상하 좌우의 구별 없이 어느 쪽에서도 그려 가지만, 만들고 있다는 의식을 배제한다는 그 화면에는 놀랄 만큼 밀도 있는 공간을 짜고 있다.

데 쿠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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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데 쿠닝은 로테르담에서 출생, 네덜란드·벨기에에서 수학한 후 1926년 미국에 정주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아실 고키의 친구이나 고키가 섬세한 데에 비하여 그는 대담한 다이너미즘의 작풍이 특색이다. 폴록이 죽은 뒤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하다.

네오 다다이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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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Dadaism

네오 다다이슴은 1960년 전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한 경향인데, 그린다고 하는 행위를 지상(至上)으로 삼은 액션 페인팅에 대하여, 현실적인 기호나 오브제를 화면에 받아들인 데에 신선한 느낌이 있다. 이 비(非)에스테틱한 성격이 과거의 다다이슴 운동을 상기하게 한다는 데에서 이 명칭이 붙여졌다.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이 그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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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per Johns (1930∼) 재스퍼 존스는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52년 이후 뉴욕에 살았고, 1954년경 신문지로 만든 파피에 콜레에 납(蠟)그림물감을 사용하여 표적·숫자·알파벳·기(旗) 등의 미국적인 심벌을 그렸다. 거기에는 주관적인 마티에르를 신중히 배제하고 표현을 가능한 한 오브제에 접근시키려는 배려를 엿볼 수 있다. 1958년 뉴욕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어 네오 다다이슴의 선구적인 화가로서 주목을 모았다. 그는 이 때까지의 액션 페인팅의 열기 띤 표현에 차가운 문장(紋章)이나 기호나 표적 등을 대립시켰는데 이것은 물체 그 자체가 가진냉담한 실재성과 상징성에 의하여 감정이입을 주로 한 종래의 회화를 뿌리째 뒤집으려고 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라 생각된다. 1959년 이후부터 그의 화면에는 완만한 색채가 더하여졌다.

라우센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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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Rauchenberg (1925∼ )

라우센버그는 텍사스주(州)에서 출생하였다. 해군에서 복무를 마치고 파리의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회화를 배웠다. 1948년 그는 다시 노스캘로라이나의 조셉 앨버스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 앨버스가 주창한 백(白) 일색(一色)의 회화, 즉 화이트 페인팅은 그에게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화이트 페인팅에 금속·천·종이 또는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넣음으로써 실재의 세계를 보는 사람에게 강하고 선명하게 인상지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비(非)에스테틱한 성격에 있어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서 전후에 걸쳐 일어난 다다이슴 운동을 상기케 한다.

그는 사물을 이미지에 종속시키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이미지를 파괴하고 혼란시켜서 때로는 넌센스, 또는 역설적으로 현실인식의 다른 길을 내보여 주고 있다.

팝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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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Art

팝 아트란 1960년대 초엽에 뉴욕을 중심으로 출현한 미술의 한 경향이다. 그 명칭은 파퓰러 아트의 약칭인데 1950년대의 영국에서 선전미술의 명칭으로서 로렌스 아로웨이가 명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도시의 정보문화가 만드는 파퓰러한 이미지를 대폭적으로 받아들여 미술을 대중적인 영역으로서 독자적으로 확대해 가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등이 그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1960년 프랑스의 비평가인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여 결집된 누보 레알리슴(신레알리슴)도 제2의 자연으로 화해 버린 도회적인 현실에 대응한 포퓰러 아트를 추진하고 있다. 아상블라쥐(모아 합치기)와 정크 아트(廢品藝術)는 네오 다다이슴을 더한 이세 유파(流派)에 공통되는 기법이다.

폰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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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o Fontana (1899∼1968)

루치오 폰타나는 아르헨티나의 산타 페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에 집안이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자랐다. 그는 회화·조각·도예(陶藝) 등 다방면에 걸친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이것이 그에게 새로운 소재에 대한 왕성한 관심을 환시시켰고 동시에 새로운 공간의 탐구로 유도하여 갔다.

1947년에 발표한 '공간주의(空間主義) 선언'에서는 과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1951년의 '공간주의·기술선언'에 이르기까지 그는 네온관(管)을 사용하여 빛의 교차를 시험하는 등 여러 가지 공간적 실험을 하고 있었다. 색채·소리·운동·공간 등 모든 종류의 물질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통일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의 목적이 있었고 종래 미술의 영역 개념을 넘은 조형의 이념을 세우려고 한 점이 그의 새로운 입장이었다.

회화에서는 1950년대 말에 캔버스를 예리하게 칼로 찢은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캔버스는 이미 그 위에 무엇이 생겨나는 뉘트럴한 공간이 아니고 현실의 공간과 호응하는 관념적이고 동시에 물질적인 공간으로서 의식되고 있다. 폰타나의 공간 탐구는 과거의 이탈리아 미래파의 오의(奧義)를 잇는 것인데, 그것이 추상적인 공간이 아닌 현실적인 고동(鼓動)하는 환경 형성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의의가 있다. 그는 추상미술의 한계점을 예견한 미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키네틱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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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etic Art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움직이는 예술로서 과거에 콜더의 모빌이 고안되었으나 키네틱 아트에서는 관중이 작품에 참가하여 자유롭게 이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과(아감의 가변회화 등) 동력을 사용하여 작품 자체를 움직이는 것(팅겔리의 기계와 셰페르의 사이버네틱조각 등)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1961년 암스테르담과 스톡홀름에서 키네틱 아트의 총합전시회가 개최되고부터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의도한 바는 빛 혹은 움직임이라는 동태를 파악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하여 이따금 작품 그 자체보다도 이를 둘러싼 방 전체, 환경 전체를 개변하는 방향으로 진전한다. 거기에서는 빛·소리·움직임·색채 등을 종합적으로 취급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예술의 영역 개념도 애매하게 되어버린다. 파리의 시각예술 탐구 그룹인 뒤셀도르프의 그룹 '제로'는 이러한 혼돈 가운데서 예술의 원점을 탐구하려는 동향이다.

시각예술 탐구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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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覺藝術探究-Groupe des Recherches d′Art Visuel

시각예술 탐구 그룹은 1960년 갈시아 로시, 쥐리오 르 팔크, 프랑시스코 소브리노 등 6명에 의해 파리에서 결성된 그룹인데 비닐·아크릴·플라스틱·알루미늄 등 소재를 사용하여 움직이는 오브제를 구성하고 여기에 빛을 비추어 시각적인 효과를 낳게 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이 그룹은 1961년의 파리 청년 비엔날레 전시회에서 <미로>라는 제목을 붙인 큼직한 작품을 집단적으로 제작가하여 주목을 끌었다. 빛과 움직임을 결합한 그들의 조형물은 관람자조차 그 내부로 끌어들이는 환경예술을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이라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입장에 서는 그룹에는 독일에도 그룹 제로가 있으며 여기에는 오토 비네, 오토 하인츠 마르크, 귄터 유카의 세 사람이 멤버로서 기관지 <제로>를 발간하고 있다.

Experiments Art and Technology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실험'의 약자이다. EAT는 1966년 화가인 라우센버그와 벨 전화연구소(電話硏究所)의 기사인 빌리 크뤼버의 발안으로 결성된 그룹인데 뉴욕의 화가·무용가·음악가 등 예술가와 기술자를 폭넓게 결집하여 새로운 기술 협력을 얻은 여러 가지 예술상의 실험을 시도하였다. 예술과 과학기술의 단층을 메우려는 최신의 경향이라 하겠다.

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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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fino Tamayo (1899∼1991)

멕시코의 화가로 남부 와하카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산 카를로스 미술 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후에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에콜 드 파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1923년 국립인류박물관의 민족국 국장이 되어 고대 멕시코의 전통예술에 심취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수립하였다. 1933년 멕시코시(市)의 음악학교에 벽화를 그렸고 그 이외의 작품으로는

[자화상] [흰 나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멕시코의 민족적인 이야기를 화제(畵題)로 다루면서 이를 역학적인 추상 형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색채는 강렬하고 인디오의 전통이 맥맥히 흐르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술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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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Soulages (1919∼ )

프랑스의 화가. 로마네스코 조각·미술의 유품이 많이 남아 있는 중남부의 아벨이 로데스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혼자의 힘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1939년 파리로 나와 활동을 하였으며, 중후한 풍경화 및 정물화에 능하였다.

초기에는 세잔·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퀴비슴적인 경향을 띠었으나 1946년부터는 추상화로 옮겼다. 자유롭고도 표현의 풍부함을 꾀하였으며 외계에 대한 어떠한 대상도 배제하는 순수한 추상양식에다 조형 공간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그는 1948년과 그 이듬해에는 레알리테 누벨르전(展)에, 그 이후부터는 살롱 드 메에 출품하였다. 1952년의 베네치아, 1953년의 상파울루의 비엔날레전(展) 등에 출품하여 수상하였으며 그 밖에도 국제적인 상을 많이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청색과 갈색 계통의 침착한 느낌을 주는 색조를 즐겨 사용하고, 그 이전의 강한 느낌을 주는 검은 형태를 밝은 색조와 결합시켜 간결하고도 힘찬 화면구성을 하고 있어 현대적인 약동감이 대담하고 자유롭게 나타나 있다.

주요 작품에는 <회화> 등이 있다.

오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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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ia O'keeffe (1887∼1986)

미국의 화가로 위스콘신주(州)에서 출생하였다. 17세가 되던 해에 미술 연구소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버지니아 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광고미술, 교직에 종사하다가 1916년경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으며 1920년이래 줄곧 뉴멕시코주(州)에서만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검은 꽃과 푸른 참제비고깔>이 대표하는 연속의 꽃작품으로 유명하며, 뉴멕시코주州)의 황량한 사막과 협곡, 뉴욕의 수십층 되는 높은 건물, 텍사스, 조개껍질, 해골, 공동묘지의 십자가, 구름 등을 소재로 하여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특징적인 것은 소, 말, 사슴 등의 희게 노출된 두개골에 꽃을 배치하는 강렬한 형태를 구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화풍은 매우 단순화되어 물상은 백·박청·도색·회갈색 등의 색조로 매우 섬세하다.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시카고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국 현대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3월 98세로 사망하였다.

마네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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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Manessier (1911∼1993)

프랑스의 화가로 상투앙에서 출생하였다. 파리 미술학교와 아카데미 랑송에서 공부하였으며, 피카소·루오·세잔·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추상적인 종교화, 퀴비슴, 초현실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종군 생활과 전후(戰後)의 사상적 동요를 거쳐 열렬한 카톨릭 신자가 되어서 종교화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살롱 드 메의 중심인물이 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비구상 형식에 의해 종교적인 테마를 표현하였고, 잘 조화된 선의 섬세한 구성과 광선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섬세한 색조에서 맑고 깨끗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955년 카네기 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상을 수상하였으며 '추상회화에 의한 구도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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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th Noland (1924∼ )

미국의 화가로 노스 캐롤라이나주(州)에서 출생하였다. 블랙마운틴 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파리에 가서 파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새로운 추상을 개척하였고 1951년부터 1960년대까지 카톨릭 대학에서 교직하였다.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로 출발하였으며, 입체주의 영향으로 명쾌하고 구획된 색면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또한 원이나 산 모양을 원색의 색대(色帶)를 병렬로 하여 평면성을 강조하는 색면회화를 이루고 있다.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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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n Johns (1937∼ ) 영국의 팝 아트화가로 사우샘프턴에서 출생하였다. 혼시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64년부터 1년간 뉴욕에 체재하면서 대중잡지나 상품, 카탈로그의 도안을 발상원으로 하여 이용하였다. 특히 여성의 다리를 주제로 한 에로틱한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판화, 조각 작품도 시도하였고 1970년 '대 칼카타'의 무대장치, 의상 디자인에도 손을 댔다.

아르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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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artung (1904∼1967)

현대 프랑스의 추상화가로 본래는 독일인이데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였다.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배웠고, 드레스덴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그후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31년 드레스덴에서 첫 개인전을 연 그 이듬해부터 2년 동안 미노르카섬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파리로 되돌아와 제2차대전이 발생하여 프랑스군의 외인부대로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여 파리에 정착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추상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껴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색채의 점이나 얼룩을 이용하여 그리는 타시슴 회화를 그려 그 방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전후(戰後)에는 다이내믹한 선의 움직임과 리드미컬한 구성으로 추상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크게 활약하였다.

마더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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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otherwell (1915∼1991)

미국의 화가로 워싱턴주(州) 애버딘에서 출생하였다. 오티스 미술연구소,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웠으며, 스탠포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하버드 대학 대학원, 그르노블 대학,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을 나왔다.

1941년 손에서 놓은 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에 감화되어 오토마티슴의 실험을 꾀하였다. 그 후에는 일정하지 않은 추상형태를 뜯어 맞추어서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전개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연작 <에스파냐 공화국에 대한 애가(哀歌)>가 있고 이론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