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꿈과 향수

에콜 드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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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e de Paris

파리파(派)라고나 할까. 보통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파리에서 활약한 외국작가를 총칭하여 부른다. 물론 베르나르 도리발과 같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차 파리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를 포함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다. 도리발에 의하면 파리가 이른바 예술의 핵심이 된 적은 전후 3회인데 그 첫째는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고딕시대이고, 둘째는 말할 나위도 없이 19세기 프랑스의 황금시대이며, 마지막으로 에콜 드 파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예술가는 거의 전부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를 들면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출생이고 수틴은 리투아니아, 샤갈은 러시아, 키슬링은 폴란드, 반 동겐은 네덜란드, 파스킨은 불가리아, 후지타는 일본 출신이며, 이들에게 가령 피카소와 미로를 더하여 보면 이들은 에스파냐 출신이어서, 순수한 프랑스인은 겨우 마르케, 스곤작, 로랑생, 바라동, 위트릴로 등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아마도 에콜 드 파리시대가 전기한 두 시대와 달라서 완전히 시민문화의 미술이며, 그리고 그 중추는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개성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파리가 옛날의 오토노미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예술가의 개성을 자극하는 유니크한 도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루브르 미술관을 위시하여 헤아릴 수 없는 예술의 전통이 있으며, 좋은 의미로 철저하게 엄격한 개인의 의식, 즉 생을 솔직하게 향수(享受)하는 봉 상스(제2차 세계대전 후의 주요한 에콜 드 파리의 예술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다 실바, 한스 아르퉁, 장 아트란, 니콜라 드 스테르, 피에르 스라쥐, 알프레드 마네시에, 앙드레 마르샹 등이다.

위트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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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Utrillo (1883∼1955)

프랑스의 화가이다. 모친은 이전에 르누아르나 드가의 모델이었다가 프랑스 표현주의의 여류 화가가 된 바라동이며 부친은 분명치 않다. 청년 시절의 위트릴로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 후 기분 전환으로 화필을 잡은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며, 물론 이것을 권유한 사람은 모친이고 이는 1902년의 일이었다.

위트릴로는 처음 인상파풍(印象派風)의 풍경을 그리다가 얼마 뒤 '백(白)의 시대'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이어서 제3기인 '다색(多色)의 시대'를 맞는다. 주제는 모두 풍경인데 초기의 <몽마르트르 풍경>에서부터 파리의 길거리로 시점(視點)이 옮겨지고 그 중에도 몽마르트르는 그가 애호하던 장소로서 언제부턴지 유모러스한 점경(點景) 인물은 거의가 뒷모습인데 어딘가 야릇함과 슬픔을, 즉 인생을 짊어지고 있다.

백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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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時代

위트릴로가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시기를 가리키며 1908년에서 1914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베를리오즈의 집>, <마을의 교회> 등이 있으며 이 화면에서 복잡한 뉘앙스를 가진 백(白)이 기조색(基調色)이고, 모친 바라동을 계승한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스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조금 남루한 집들의 벽이나 낡은 성당의 그늘에서 발견된 아름다움이며, 내적으로는 쉽사리 음주벽(飮酒癖)이 낫지 않아 몇 번인지 모를 만큼 위트릴로가 더듬었던 을씨년스럽고 병적이며 고독한 길을 상기하게 한다. 왜냐하면 순결은 또한 가장 다치기 쉬운 빛깔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도리발은 이러한 위트릴로의 시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의 그것을 엿보게 한다고 말하였는데, 확실히 그의 백색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위트릴로는 백의 망집(妄執)에서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는 점경 인물도 거의 볼 수 없고 엄격한 구성과 백의 변화만 이 시정(詩情)을 북돋우고 있었다.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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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탈리아의 리보르노 출신이며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배운 뒤에 1906년 파리로 갔다. 초기에는 세잔의 영향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를 그렸으며, 1913년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여 키슬링, 수틴과 사귈 무렵부터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어 특히 인물·초상·나체 여성에서 신기축(新機軸)을 이룩했다. 타원형의 형태가 빚어내는 양감이 특색으로서 엷게 칠했고 눈에는 가끔 투명한 블루가 채색돼 있다. 모딜리아니가 '프랑스인의 눈동자에 이탈리아 하늘의 푸르름을 넣었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부도 미묘한 곡선의 구도인데 조각가를 지망했으니만큼 대담한 파악이며, 풍경은 겨우 2∼3점에 불과하여 작품은 모두가 신변의 신중한 인간표현에 의지한 감이 있다. 1916년에서 1918년의 3년간에 가장 수작이 많다. 이러한 집중적인 제작을 위하여 알콜과 아편에서 자극을 구하게 되었고 빈곤 가운데서 가슴을 앓아 요절하였다.

여인의 두부(頭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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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조각이며 1913년경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서 <아르카이크 스마일의 여인>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1909년 모딜리아니는 조각가인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로 조각을 시도하게 되었다. 브랑쿠시나 흑인 조각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불가사의와 동양적인 명상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1901년 아직도 젊은 모딜리아니가 로마나 피렌체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그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티이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이 아니었을까. 카마이노의 원통형 목 위에 놓인 비스듬한 얼굴, 또는 수직의 콧마루와 길게 째진 눈, 그리고 표정 전체에 넘치는 신비적인 슬픔에 모딜리아니는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02년경에 그는 차라리 조각으로 나갈까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고, 여기에 브랑쿠시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보겠다.

파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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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Pascin (1885∼1930)

본명은 율리우스 핑카스이고 불가리아의 도나우 하반(河畔)의 소음인 비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곡물상인이고 원래는 세파르딤(에스파냐 유대인)이다. 빈과 뮌헨에서 배운 후 한때 잡지 <진프리치스므스>에 신랄한 풍자화를 그려 명성을 얻고 1905년 파리로 나왔다. 당시 그는 부셰, 프라고나르, 드가, 로트렉, 그로스, 뒤피 등의 영향이 현저하였으나 섬세한 필력에 넘치는 일급의 데생가(家)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얼마 뒤에 파리에 거처를 정하여 삽화의 일에 몰두하였으나 1914년부터 1921년까지는 미국에서 보내다가 또다시 파리에서 정주하였다. 파스킨은 무엇이든지 재빨리 데생을 하였다고 전한다. 메뉴에도 담뱃갑에나 종이, 냅킨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특질은 '부서진 인형'이라 부르는 퇴폐적이고 향기높은 나체 여상에 있었으며 저주받은 화가에게 어울리게 자살로 생을 마쳤다.

소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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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朴派

일반적으로 프리미티브(소박) 예술이라 말할 경우에는 원시·미개민족의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나, 여기서는 앙리 루소를 위시한 이른바 소박화가를 의미하고 있다. 이 화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금세기에 걸친 갖가지 유파(流派)의 교체를 외면하고 홀로 자기의 세계에 침잠(沈潛)하였던 화가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루소와 같이 한때 퀴비슴과의 관련 운운한 화가가 없는 것도 아니나 대체로 고독한 길로 나아가 때로는 일요화가(日曜畵家)라, 또는 서투른 화가라는 경멸을 받기도 하였다. 주요한 화가를 들면 프랑스의 앙드레 보샹, 루이 비뱅, 카미유 봉브와, 루이 세라핀, 아로이즈 소테 들이고 미국의 여류화가인 그랜도마 모제 정도일까. 원래 소박파란 명칭은 편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공통적인 주의 주장이 있을 턱이 없다.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들이 정규의 미술교육을 받지 못하였다는 점이고, 따라서 미술양식이나 그 운동에도 무관심하여 자연과 현실에 대하여 경건하리만큼 나이브한 태도를 가지고 독특한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현대미술의 문외한(門外漢)이며 아웃사이더라고 보겠다.

그러나 1900년대 퀴비슴의 발상(發祥)에 흑인 조각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또한 1910년대의 표현파 운동에 남방 원시미술의 거친 생명감이 크게 공헌한 것처럼 소박파는 현대미술의 저류에서 새로운 환상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소박파에서 세라피스나 소테 등은 '무의식의 쉬르레알리슴'이기도 하고 그들의 제작은 이따금 광기(狂氣)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특색은 얄궂은 장식의 과다(過多), 격렬한 표현력에 있으나 만약 그들을 소박파라 한다면 영국의 루이스 웨인과 독일의 페타 모그, 요제프 제르 들도 여기에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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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Rousseau (1844∼1910)

프랑스의 화가. 서프랑스의 라바르에서 출생하여 변호사 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파리의 입시세관(入市稅關)의 관리가 되었다. 여가를 틈타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세리 루소'라는 이름이 있다. 1880년경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추정을 하고 있는데, 1884년에는 루브르 미술관에 다니면서 옛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였고 당시의 관학파(官學派)인 부그로, 제롬, 클레망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행복한 콰르테트>(1902)는 제롬의 <순결>에서, 그리고 <잠자는 집시의 여인>(1897)도 제롬의 <두 사람의 왕>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1886년 앙데팡당 미술전에 첫 출품을 하여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사귀게 되었지만, 특히 그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은 1906년 피카소와 들로네 그리고 시인 아폴리네르와 비평가인 우데를 통해서였다. 이듬해에 빌헬름 우데가 최초로 그의 에세이에서 그를 호평하게 되었다.

루소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⑴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 ⑵ 파리 및 파리 근교의 풍경 ⑶ 브르타뉴와 엑조틱한 풍경 ⑷ 정물 등. 이들 가운데에서는 무엇보다도 ⑶의 이국 풍경이 유명하지만 루소는 어떤 경우에나 면밀 세심한 묘사와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콤퍼지션으로써 항상 나이브한 정감을 잊지 않았다. <일몰(日沒)의 처녀림(處女林)>(1907)과 <제니에 영감의 마차>(1908) 등에서는 사진조차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주목할 것은 화면에서의 과거와 현재의 교차이며, 이것은 그의 숲과 나무의 콘트라스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범인(凡人)이라면 나뭇잎 백장을 그린다 해도 그것은 백의 나뭇잎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소가 이것을 그리면 백장의 나뭇잎 플러스 알파(+α)가 된다고 하는 말은 루소를 평하는 적절한 말이며, 이 알파야말로 그의 시정(詩情)이어서 그는 소박파 중에서도 발군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뱀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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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1907년에 제작하였으며 이국 풍경을 취급한 작품이다. 1904년부터 몰년(沒年)까지 루소는 이들 일련의 엑조티즘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는 이러한 착상을 <마가장 피토레스크> 등의 잡지에서 얻었고 열대 동식물에 관한 진기한 기사는 그의 흥미를 강렬하게 끌었던 것 같다. 루소가 젊었을 적에 멕시코로 갔다고 하는 설은 오늘날에 와서는 부정되고 있으므로 <뱀 마술사>도 그의 팬터지가 만들어 낸 동화이다.

화면에서 식물의 잎사귀는 한장 한장씩 극명하게 그려졌고 배경인 섬의 묘사는 흡사 에른스트의 그림 표면처럼 섬세하다. 중천에 걸린 달, 이 달빛에 이끌려 퉁소를 부는 사람, 이 음색에 매혹되어 춤을 추는 뱀, 화면에는 푸른 하늘과 녹색의 수풀에 싸여 퍽이나 몽상적이다. 어느 식물학자는 루소의 작품에 용혈수(龍血樹)나 사란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여기에서도 갖가지 식물의 종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비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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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Vivin (1861∼1936)

프랑스의 화가이다. 보쥐 지방의 롤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 적에 이미 집안의 문이란 문은 그림으로 메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친이 그의 화가 지망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61세로 퇴직할 때까지 우체국에 근무하였다. 1889년 우체국 직원 작품 전시회에 처녀 출품한 이후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이사하여 유명한 사클레 크르를 중심으로 하는 몽마르트르의 풍경이 알맞는 화재(畵材)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내부>를 그리고 <폐병원(廢病院)>을 섬세한 종횡의 선으로 정성들여 그리고 있다. 이렇게 제작한 작품은 그물 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이것은 그가 늑대가 있는 숲속 나무를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며 장식미도 넘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파리 풍경이 침침하며 실존주의적인 도회 풍경이라 한다면 비뱅의 풍경은 밝고 발랄한 도회의 풍경이라 하겠다. 그도 또한 우데에게 발탁된 화가였다.

세라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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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Seraphine (1896∼1942)

프랑스의 화가. 오아즈의 닷시에서 출생하였고 소녀시절을 양몰이로 보냈다고 한다. 얼마 뒤 상리스에서 중류 가정의 가정부가 되고 클레몽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녀를 발견해 낸 사람도 비평가 우데이다. 우데가 기술한 바에 의하면 1912년경 파리 부근의 상리스에서 살고 있었을 때에 이상한 정물화를 보고 이것에 이끌려 조사하여 본 결과 자기 집에 매일 오는 청소부였다고 한다. 세라핀은 봉브와와 루소와는 달리 정물(靜物)과 꽃만을 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꽃그림에는 '중세기풍(中世紀風)의 퍼내틱한 격정(激情)'이 있고 무기미한 빛을 던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불타는 듯한 색채의 화염은 상리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받은 영감이다'고 말하는데, 확실히 거기에는 스테인드글라스 특유한 신비로운 색조(色調)나 태피스트리에서 보이는 패턴의 반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 과잉을 넘어 더욱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녀의 굳은 집념이며 분열병 환자에게 있기 쉬운 폭발적인 어두운 분위기이다. 세라핀이 초라한 방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촛불을 밝히면서 제작하였다든지, 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극도로 싫어했다든지 후에 화필을 집어 던지고 '세계는 멸망해 간다'고 중얼거리면서 상리스의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하는 기록은 상기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에 틀림없다.

따라서 세라핀의 꽃은 루소의 그것처럼 이국취미도 아니며 보샹과 같이 따스한 것도 아니라 예사로운 <포도의 방>이고 단순한 <과실의 꽃>이며 그것들이 기묘하게 집중과 확산의 조형을 보여주고 있다. 조화는 여기에서는 균일화(均一化)되었고 말셀 브리온이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말이 꼭 들어맞을 만큼 정밀하고 또한 환상적이다.

낙원의 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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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핀의 작. 그녀의 작품은 거의 전부 제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화면은 무수한 잎사귀의 난무이며, 나무 줄기마저 잎사귀의 집적으로 잘못 보인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시간을 오래 잡아 천천히 그렸다기보다 분열증 환자의 억압 상태에서 단숨에 그려진 듯한 어떤 종류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이며 편집적이어서 결코 남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폐쇄적인 완고함이 있다. 그러하지만 만약 생명이 운동이며 작품은 그 표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처럼 찰나적이고 현기증 나는 바이탈리즘이 있을까.

잘 살펴보면 화면의 중앙쯤에 하나의 열려진 눈이 있다. 이러한 눈은 옛날에 '신(神)의 눈'이라 하여 르네상스 예술에도 가끔 나타나는 것인데 민중예술에서는 소박함과 직절(直截)함이 존중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동(動) 가운데 정(靜)이라는 느낌이며, 이 눈만이 움직이지 않는다.

보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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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Bauchant (1873∼1958)

프랑스 화가이며 샤토르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원예사이었으며 보샹도 17세로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했다. 1921년에 살롱 도톤에 출품한 <마르스의 전투>를 보면 그는 군대에서 비로소 자기의 그림 재주를 의식한 듯하다. 본격적으로 화필을 잡은 것은 46세부터인데 이것은 정신병 환자인 아내를 간호하기 위하여 전원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압도적으로 꽃이 많다. 그는 데생을 하지 않고 흰 캔버스 위에다 직접 꽃들을 그렸다. 꽃은 때로 이상하게 커서 주위와 언밸런스를 이루나 색채는 투명,

아름다우며 신화나 성서(聖書)에서 취재한 경우도 많다. 1921년 르 코르뷔지에와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아 무대장치를 담당한 적도 있고 루소 이후 가장 중요한 소박화가로서 1949년에는 대회고(大回顧) 전시회가 열렸다.

봉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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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lle Bombois (1883-1970)

프랑스의 화가로 부르고뉴의 브나레 롬에서 출생하였다. 16세경부터 농가에서 일을 하는 틈을 타 전원풍경과 시골의 풍속을 그렸다. 후에 파리로 나와 공사판에 막벌이와 인쇄공 등 갖가지 직업으로 전전하였으나 한시도 화필을 버린 적은 없었다. 1924년부터 화업(畵業)에 전렴하였고 1922년에는 가두전시회를 연 적이 있고 그 때에 비평가인 빌헬름 우데의 눈에 띄게 되었다고 한다. 풍경·정물·나부(裸婦)·서커스·떠돌이 광대 등 모티프도 다채로우나 특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한없이 청결한 화면 구성이며, 이것을 갖춘 작품으로 <아르비의 카테드랄> 등은 그 전형이라 하겠다. 사진적(寫眞的)인 정확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거기에 감도는 분위기는 차갑지 않다. 우데는 그 특질을 '그는 화면의 원근을 부정하고 사물을 엑스터시로까지 승화시킨 독자적인 생명감으로 감싼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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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Marquet (1875∼1947)

프랑스의 화가.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890년 파리로 나와 장식미술학교(裝飾美術學校)에 다녔고 1897년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어 마티스와 루소를 사귀었다. 따라서 1905년의 포브 운동에 그도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수파의 격렬한 색채 구가의 시대가 지나자 마르케는 하반(河畔)의 풍경을 온화한 색조로 그리게 되었고, 가령 <퐁 느프의 풍경> 등은 아침나절부터 밤까지 끊임없는 색채의 다양성으로 표현하면서 캔버스에 정착되어 있는 것은 울적하고 고독한 파리의 풍경이다. 1912년에는 나폴리·함부르크·로테르담 등 항구를 그렸고, 1915년에는 마르세유에서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알제리에서도 살았다. 그의 색채는 한층 더 순도(純度)를 더해가면서 비평가나 화상(畵商)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이 이외에도 간결한 묘선으로 포착한 파리의 인물 스케치는 일품이다.

동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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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s van Dongen (1877∼1968)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나왔다(1897). 초기에는 인상파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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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 (1887∼1985)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시아의 비데브스크에서 출신. 유태인의 혈통이라 한다. 1907년부터 3년간 레닌그라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10년에서 동 14년까지 파리에 체재하면서 비평가 H. 바르덴에게 인정을 받아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포브와 퀴비슴의 경향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특질은 그 일체(一切)를 가난하였던 고향의 회상에 의탁하여 비현실적인 신화 세계와 동화세계로 바꾸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아폴리네르에게 바친다>와 <나와 마을> 등이 전기한 대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에 있었으나 1922년 재차 파리로 왔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 1947년에 또다시 프랑스로 건너가서 남프랑스에서 유유자적(悠悠自的)한 생활을 보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선 점차적으로 현란한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천사의 실추(失墜)>와 같이 어두운 예감을 간직한 것도 있고 <시간은 가없는 흐름>과 같이 초현실적인 작품도 있으며 <죽은 영혼>과 <라 퐁텐의 우화>의 판화는 걸작으로 꼽힌다.

나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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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이 1911년에 제작한 작품. "나는 묘화(描畵)의 대상을 러시아에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파리는 그 위에 빛깔을 주었던 것이다"라고 샤갈은 말하였는데 사실에 있어서 파리에서 제작된 이 그림에도 갖가지 고향의 추억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소·바이올린·잉어·닭·꽃다발 등 모두 샤갈이 자랑으로 여기는 조형 언어이며, 그의 소는 이집트의 Himmelkuh(천국의 소)와 같이 행복한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에는 입체파에 대한 관심도 엿보이며 원형, 삼각형이 교차하는 형식이 두드러진다. 집과 농부가 거꾸로 서 있는 것도 과연 그다운 착상이며 이것은 하늘로 나는 인간이나 떨어진 목 등과 같아서 비합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보인다. 그러나 에콜 드 파리의 많은 고향 상실자에게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꿈만이 생활의 지주이며 신화였을 것이다.

키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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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

se Kisling (1891∼1953)

폴란드 출신의 에콜 드 파리의 화가. 크라크프에서 출생한 유대계(系) 사람이다. 크라크프 미술학교에서 배운 뒤에 1910년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르에서 살았다. 키슬링은 벌써 크라크프 시대에도 당시 폴란드에서 절찬되었던 독일 예술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인상파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드랭에게 공명하게 되었으며 특히 모딜리아니로부터는 큰 감화를 받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수틴과 차이가 있으며 생래적으로 프랑스적인 세련성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보겠다. 1915년 의용병으로 출정, 중상을 입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전후에 재차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제재는 인물·꽃·풍경이었고 더욱이 소년·소녀상에 우수하여 마치 도기(陶器)의 표면처럼 투명한 색감과 유연한 그림자와 같은 묘선(描線)이 가장 뛰어났다. 그것은 슬라브인 특유의 밝은 생의 긍정 속에 일말의 애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수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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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

m Soutine (1894∼1943)

리투아니아의 민스크에 가까운 스미로비치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가난한 재봉사였다. 수틴은 어릴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비르나의 미술학교를 거쳐 파리로 나와(1913) 코르몽에게 배웠다. 여기에서 샤갈, 리프시츠, 모딜리아니와 사귀게 된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그레코,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를 연구하여 한때 이 대가들의 영향을 농후하게 보여 주었으나 점차로 격렬한 생명감을 묘사하기 시작하여 발광하는 듯한 터치를 특징으로 하였다. 자기의 감정표현을 위하여 '아름다운 형태'라는 이념을 타파했기 때문에 표현파의 경향에 속하지만 유년시절의 괴로웠던 인생 체험에서 죽음이 곧 붕괴임을 직감하였던 그는 토끼나 오리에서도, <성가대의 소년>과 <카뉘 풍경>에서도 모두 찢어질 듯한 형태와 짙은 색채의 콘트라스트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못견뎠던 것이다. 제작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자학적인 속죄(贖罪) 행위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