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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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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主義- socialist realism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22년 소비에트에서 혁명러시아 미술협회(革命-美術協會)가 결성됨에 즈음하여 그 기본적인 제작 원리로 채택된 이념이다. 1932년에는 스탈린에 의하여 이 이념은 더욱 명확해져 예술 전반의 원칙으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즉 그 내용은 현실을 혁명적 전개에 즉응하여 역사적·구체적으로 표현할 것, 또한 예술 제작을 사회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혁신과 노동자의 교화(敎化)라고 하는 목적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채용함으로써 혁명 전후에는 상당한 약진을 보여 준 전위적인 경향(구성주의 및 쉬프레마티슴)은 형식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널리 유럽의 현대미술도 소위 부르주아적인 퇴폐 미술이라 하여 배척하는 독선을 낳게 하였다.

소비에트의 새로운 체제가 서구(西歐)와의 대결에서 생긴 이념으로서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나 실제의 작품은 정치가와 군인의 초상화, 노동이나 전투 따위의 장면을 그린 의고전적(擬古典的)인 작품이 거의 전부이며 새로운 입장에서의 실재감(實在感)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정책으로서의 경사(傾斜)가 때때로 예술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경향도 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회화에서 게라시모프와 그레코프가 있고 조각에는 무하나, 톰스키를 들 수 있고 만화의 공동제작 그룹에는 쿠크루이니크시가 있다.

쿠크루이니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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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kyruiniksui

1924년 쿠프리아노프와 크루이로프 및 소코로프의 세 사람이 만화를 공동으로 제작하기 위하여 만든 그룹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에 입각하여 풍자화와 삽화 등을 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녀작 <젊은 시인과 작가의 우정적 만화> 이래 몇 번의 스탈린 상을 받았고 대표작으로는 <독일군 노브고로드 패주(敗走)>와 <종말> 등의 유채화가 유명하다.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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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ue Sachlichkeit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란 뜻으로 독일에 있어서 반표현주의적인 미술운동인데, 1925년 만하임 미술관에서 개최된, 할트라우프 박사가 기획한 전람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表出)에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 파악을 벗어나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향하여 가는 데에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하여 실재감의 회복을 꾀하였다. 유력한 화가로서는 게오르게 그로스와 오토 딕스의 이름을 들 수 있으며, 베를린의 다다이슴 운동을 거쳐온 이 두 사람은 사회풍자의 경향이 짙고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세상을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 밖에 주목되는 화가에는 정물 및 실내를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게오르그 시린프와 기계를 모티프로 한 게오르그 숄츠, 가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알렉산더 카놀트가 있다.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화가들은 대상 묘사만은 리얼하지만 그 배합과 구성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관련성을 구하여 재배합·재구성해 가는 경향이 짙어 그 때문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점에서는 형이상화파(形而上畵派)나 쉬르레알리슴의 의도하는 바와 가깝다.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박해를 받아 소멸되었다.

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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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Grosz (1893∼1959)

독일 출신의 미국화가.그는 베를린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어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으나 장학금을 받아 드레스덴 및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재학중에서부터 책의 장정(裝幀)과 의장(意匠) 디자인의 일을 시작하여 졸업한 뒤에는 오직 풍자적인 신문과 잡지에 캐리커처를 그렸다. 그 때에 그는 항상 현실의 사회문제에 착안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의 비참과 궁핍을, 전후에는 사회의 혼란과 부패를 뛰어난 묘사력으로 예리하게 그렸다.

1917년 베를린의 다다이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에 사상적으로 점차 좌경하여 독일 부르주아지와 군주주의의 통렬한 규탄자가 되었다. 1925년 만하임 미술관에서 개최한 노이에 자할리히카이트 전시회에 참가하였고 독특한 리얼 기법(技法)과 정치적 이념으로 그후 이 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1932년 나치스의 대두로 여지없이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자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 1937년 시민권을 획득하여 뉴욕에서 교직에 종사하면서 그의 작풍은 오히려 그 예리함이 없어졌으나 데생의 분야에서는 종래의 미적인 기성 개념을 타파하여 자유로운 기법을 도입하고 이것을 실재 파악의 새로운 무기로 활용하는 길을 개척한 공적은 크다. 그는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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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Dix (1891∼1969)

독일 화가. 오토 딕스는 라이프치히 교외의 게라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장식화가로서의 교육을 받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고,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의 초기 회화는 후기 인상파의 흐름에 따라 그 테마는 전쟁 체험에 입각하였다.

1926년 드레스덴 미술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했으며 이 무렵 다다이슴을 거쳐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진영으로 들어간 그의 그림에는 사회의 부정·퇴폐·악덕·암흑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비참, 추악을 박진(迫眞)한 묘사력으로 추구하였다. 이들이 자칫 캐리커처까지 전화(轉化)해 버릴 것만 같은 리얼한 묘사는 같은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진영에 있었던 게오르게 그로스의 기법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딕스는 이 착안점과 기법을 발전시켜 마치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서 활약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巨匠)들과 같이 윤리적 발언을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화풍(畵風)을 세워 나갔고,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크타라나하'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치스 시대가 되어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직에서 추방당하여 박해와 궁핍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지만 전후에는 표현주의에 접근한 종교화와 풍경화의 건전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1969년 보덴 호반의 콘스탄츠에서 사망하였다.

멕시코의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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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美術

멕시코에서 현대미술은 1912년의 혁명과 그후 10년에 걸친 내란의 시기를 거쳐 금세기에 이채를 띠어 극히 주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원리는 타율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고 미술가의 자각에 입각한 자율적인 활동으로 추구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 나라 젊은 미술가들이 에스파냐의 통치에 반항하여 일어선 민중의 지지자이며 개중에는 직접 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운 자(시케이로스, 프란시스코 고이티아 등)도 있다고 하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원래 멕시코에는 독자적인 고대 문화와 민중 예술의 전통이 있었으며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등의 화가는 1920년대에 미술가 조합을 결성하여 멕시코 문화의 순수성에 입각한 새로운 미술을 민중에게 접근하도록 목표를 세워 그를 향하여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먼저 착수한 것은 공공(公共)의 건조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 테마도 멕시코의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사건과 민중의 생활 등에서 취재하여 모뉴멘털한 화면으로 모든 계층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민중 예술의 탄생은 1930년대의 미국에 강렬한 영향력을 가짐과 동시에 유럽의 현대미학에 대치(對峙)하는 참신한 에너지를 공급하였다. 더욱 멕시코 인디언의 유산을 따른 서정적인 화풍으로 성공한 이 나라의 화가에는 파리에 있는 루피노 타마요(1899∼1991)가 있다.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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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go Rivera (1886∼1957)

멕시코의 화가. 과나파트 주(州)에서 출생하여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에서 배운 후에 에스파냐·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영국·포르투갈로 연구 여행을 하고 1910년 파리에 정주하였다. 그는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고 또 바토 라보알(洗濯船)의 전위 화가인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과 사귀어 1910년대의 퀴비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당시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파리의 화단에 몸을 담지 못하고 1921년 멕시코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야·아티카의 고대 문화를 탐구하였고 또 당시 멕시코에 대두한 혁명적인 정신에 공명(共鳴)하여 참다운 민중화가로서 모든 계층이 이해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결심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한때 타블로를 그만두고 민중이 모이는 장소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일에 열중하였다. 문부성(文部省)·보건성·차핑고 농업학교(農業學校)·호텔·레폴마 등의 벽화는 1920년 대의 제작이다. 그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의 증권거래소와 디트로이트 미술학교에도 벽화를 그렸다.

그의 형태와 색채는 모국의 전통과 국민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멕시코 현대회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겠다.

시케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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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

멕시코 화가. 그는 치와와시(市)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멕시코시의 국립 미술학교에서 배웠는데 일찍부터 급진적인 사상이 영향을 받아 재학중부터 교내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멕시코 혁명 때에는 혁명당의 디에게스 장군 휘하에 있었다. 1919년에 유럽으로 가서 1921년에 귀국, 대학 예비교의 벽화를 그리려고 시도하였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그 후는 리베라, 오로스코 등과 함께 벽화의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종종 투옥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미국에서 공공건물에 정치사상을 표현한 이유로 국외 추방의 처분을 받았다. 1932년에는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934년에는 브라질에서 제작을 하였다.

시케이로스의 화풍(畵風)은 강렬한 박력을 가진 다이내믹한 리얼리즘에 특색이 있다. 그는 리베라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특히 회화에 대담한 혁명정신을 담고 있는 점에 주목을 받고 있다. 벽화를 민중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그의 과격한 사상에서 연유한다. 그는 또한 새로운 공업제품인 피록실과 실리콘 등을 매개로 하는 회화의 재료를 창안하였다. 이들 새로운 화재(畵材)는 그가 주창한 리얼리즘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더 어필하게 하고 있다.

오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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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오로스코는 멕시코의 하리스코주(州) 사보트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멕시코시의 농업학교(農業學校)에 입학, 졸업 후 국립대학에서 건축을 배웠으며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면서 회화를 공부했다. 그가 화가로서 인정받은 것은 1913년 역사화(歷史畵)의 대작에 발표한 이래의 일이다.

그후 미국에 거주하며 멕시코 내란의 시대를 보냈으며, 1922년에 귀국하여서부터는 여러 곳에서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프레스코의 대작에 손을 대었다.

그는 멕시코의 현대 미술가 가운데에서 유럽 회화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고, 그리하여 멕시코의 토속적인 색채와 형태의 감각을 가장 잘 지니고 있었다. 전란의 비극적인 정경(情景)을 테마로 한 그림이 많았으며 가끔 '현대의 고야'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1949년 멕시코시에서 사망하였다.

Ben Shahn (1898∼1969)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리투아니아의 벽촌인 코보노 출신이고 양친은 가난한 유대인의 혈통이다.

그가 8세 때 일가(一家)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는 브루클린의 슬럼가(街)에서 성장하였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그는 어떤 석판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면서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에 야학을 다녔다. 그후 뉴욕대학에서 생물학의 강좌를 수강한 적도 있었다. 1925년에서 1929년까지 그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 방면으로 여행하였고, 이 여행을 통하여 그는 현대미술의 여러 가지 동향에 대한 이해를 깊이 심화시켰다. 가령 파리에서 그는 뒤피와 루오에 깊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1929년의 대공황에 그는 사회적 사건에 눈을 돌려 '드레퓌스 사건'과 '사코와 반제티 사건' 등을 테마로 극명(克明)한 사실적(寫實的) 회화를 발표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30년대가 되어 미국에서는 그랜트 우드(1892∼1942)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사회정경파(社會情景派)가 리얼한 현실 파악으로써 활약하는데 샨도 사진작가인 워커 에반스와 협력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을 제작하였고, 또 이 사진을 기법으로 도입하여 타블로와 벽화의 제작을 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특징은 외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점에 그치지 않고 리얼한 대상 파악을 통하여 고독하고 비애에 넘친 인간상의 내면을 상징화하여 가는 점에 있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환각과 잠재의식까지도 암시하는 것과 같은 특이한 표현을 낳고 있다.

더욱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산업자본가회의(産業資本家會議)의 디자이너가 되어 전후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제작에도 공적을 올렸으며 뉴욕에서 사망했다.

베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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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eckmann (1884∼1950)

독일의 화가.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여 바이마르·파리·피렌체 및 베를린에서 수업하고 1905년 베를린 분리파(分離派)에 가맹하였다. 당시 베를린 분리파의 주류는 인상주의인데 베크만도 독일 인상파의 화가 막스 리베르만과 로비스 코린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인상파의 외적 리얼리티의 추구에 만족하지 않은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무렵부터 판화를 가지고 양식 전환의 모색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실(寫實)에서 상징으로, 현실에서 그 배후에 숨은 이념의 표현으로 향하는 모색이었으며, 이것이 달성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위생병으로 종군했을 때의 전쟁체험이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버리고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화풍(畵風)은 억센 선에 의한 대상 파악과 단순한 화면 구성을 특색으로 하는 그의 독자적인 것이다. 테마는 대도회(大道會)의 인간을 위협하는 고독과 파국(破局)의 불안을 다룬 것이 많고 창부(娼婦)와 서커스의 무희 등이 빈번하게 캔버스에 올려져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는 발자크의 <인간 희극>과 같이 세기의 전형적인 인간상의 시리즈를 그리기를 염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러한 연유로 상징적 리얼리즘이란 말로 개념지어지는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와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와도 하나의 선을 구획하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1932년 그는 나치스의 압력으로 1915년부터 근무한 직장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의 교수 직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37년 암스테르담으로 탈출,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기다려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전쟁 중에 구상하였으며 그의 걸작이 된 삼폭대(三幅對)의 대작 <아르고호(號) 원정대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한 작품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공동체의 이념과 인간의 연대(連帶)에 대하여 시사한 그의 예술의 절정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서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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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therland Graham (1903∼1980)

영국의 화가, 판화가. 런던 출신이며 그는 처음 에칭으로 명성을 얻어 주로 풍경과 여러 삽화를 환상적인 표현으로 그렸다.

그의 화풍은 윌리엄 블레이크 일파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쉬르레알리슴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부터 전쟁 중에 걸쳐 구아슈 및 수채로써 대단히 특이한 풍경화의 연작(連作)을 만들었다. 그것을 구태여 예증(例證)한다면 칸딘스키의 1910년대의 콤퍼지션에 유사한 것인데, 서덜랜드 자신은 그것을 '패러프레이즈의 수법'이라 불렀다. 당시 그는 '나는 마음에서 느끼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패러프레이즈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그는 더욱더 새로운 수법을 개척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강렬한 색채와 예각적(銳角的)인 포름에 의한 표현이며, 1945년 그는 이 새로운 수법을 구사하여 노잔프톤의 성(聖) 마다이 교회의 <그리스도 책형도>를 그렸다. 이것이 때때로 독일 16세기 화가인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비견할 만하다는 평을 받는 그의 대표작이다. 전후에 그는 정기적으로 지중해에 여행하였고 그 곳에서 그는 환상의 원천이 되는 갖가지 대상을 발견하였다. 이국적인 식민지와 토속(土俗), 이들의 대상을 그는 독특하게 패러프레이즈하여 기호화(記號化)해 버린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워즈워스와 홉킨스, 그리고 하디와 같은 내면의 눈을 가진 예술가인 동시에 1930년대에 환상적인 풍경화와 전쟁화를 그린 그 나라의 화가 폴 내시(1889∼1946)와 더불어 새로운 실재 파악의 길을 개척한 화가로서 그들의 영향은 크다. 또한 서덜랜드에게는 초상화의 작품도 많아서 <서머싯 몸상(像)>과 <윈스턴 처칠상>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