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매스미디어와 미래사회/매스 커뮤니케이션/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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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機能 인간사회를 성립케 하는 기초적인 조건으로서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연계에 작용을 가해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위한 사람과 사람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이와 같은 인간사회 형식의 기초적인 조건으로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하나로 발전되어 온 형식이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 발전되어 '소리가 들리는 한, 발이 닿는 한'이라는 퍼스널 커뮤니케이션(personal communication: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반대어), 즉 個人間의 傳達, 쇼핑상담·투표상담·世論 형성의 일익을 담당하는 점에서 mini communication의 테두리에 속함)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 성립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17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 최초의 일간신문이 나타났을 때 성립된 것으로, 그 배경에 있던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던 시기의 사람들의 언론자유의 확대운동이라는 것을 허술히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즉,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특질(特質)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발전된 형태인데, 그 성립과 발전은 인간사회의 역사적인 발전의 문맥(文脈) 가운데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오늘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력은 인류가 발전시킨 가장 강력한 파괴력인 원자폭탄과 비교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면 될수록 그 힘은 긍정적인 뜻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나 원자력과 비교되는 셈이다. 흔히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기대되는 측면과 위구(危▩)되는 측면의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룬 복합체(複合體)를 가리키고 있다. 이를테면 소년범죄가 발생하면 텔레비전 기능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시비가 일고, 그와는 달리 텔레비전 덕택으로 안방에 앉아서도 국제정치에 참가할 수 있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좀더 엄밀히 살펴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능하고 있는 사회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배경이라는 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사회심리학적인 메커니즘의 측면에서부터 접근해가야 한다.봉건사회를 겪어보지 못했고 처음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서 성립해 나간 미국은 커뮤니케이션 신앙(信仰)의 사회로 알려져 있다. 각자가 서로 협력해서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경우, 그것을 가로막는 낡은 권력이나 비합리적인 인습(因習)이 없이 서로가 협의·협상하면 마침내 서로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그것으로써 합리적 사회의 건설이 가능했던 것이다.즉, 개인과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유기적(有機的)으로 맺어져 있고, 개인의 성장과 사회발전이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에 따라 병행적(竝行的)으로 영위된다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를 통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기능에 밝은 전망이 섰던 것은 당연했다.20세기 초에 유명한 제1집단과 제2집단이라는 개념을 발표한 미국의 사회학자인 쿨리(C. H. Cooley)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기능을 예측하고,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미디어에 따라 개인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각양각색의 사상이나 감정이 넓은 공간에서 교환되는 일, 또는 새로운 미디어의 기록성에 의해 사람들의 지식이나 사상이 시간을 초월해서 전달되는 점, 이러한 것을 통해 사람들의 인간성이 확장되고 사회가 점차 확대되어져 활성화(活性化)된다. 쿨리의 견해에는 정녕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이성(理性)을 향상시킬 수가 있고 그것으로써 사회의 합리적인 조직화(組織化)가 더욱 촉진된다는 아주 서슴없는 옵티미즘(낙관론)이 깃들여 있다.그런데 정작 20세기의 역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체험했고, 그 가운데서 사회주의 사회라고 하는 사회체제의 성립 및 숱하게 널려있는 식민지에 걸친 민족독립에 따른 신흥국가의 출현이라고 하는 일찍이 없던 역사적인 국면을 빚어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도 이와 같은 역사적 변동, 즉 사회체제의 양식(樣式)과의 관련 아래 두드러지게 상이(相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대체로, 대다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사기업(私企業)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고 그러한 점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 활동 자체가 이윤의 추구와 불가분(不可分)의 양태(樣態)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상업주의화이자, 거기서 센세이셔널리즘이라든가 오락과잉(娛樂過剩), 혹은 사상이나 의견 면에서의 국가권력에의 추종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가인 라자스펠드(Paul Lazarsfeld)와 머튼(Merton)은 이와 같은 현상을 통해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적으로 마취적 역기능(痲醉的易機能)을 다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쿨리의 밝은 전망이 그대로는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역기능(逆機能)은 사람들의 사고나 미적감각(美的感覺)을 저수준(低水準)에 머물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판능력을 빼앗아 부화뇌동(附和雷同)적인 동조성(同調性)을 빚어낸다는 것이다.이러한 지적이 반드시 현실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정당히 표현한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갖가지 반론도 있지만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움직이는 기업이 더욱 거대해지고 수백만, 수천만이라는 수신대중(受信大衆)을 상대로 상업주의를 밀고 나가는 한, 수신대중에게 주는 영향으로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첫째로, 대중은 매스 미디어가 대량으로 제공하는 계급의식·계층의식·성별·연령별·교육정도별 여러 요소를 초월한 만인(萬人)을 위한 전달내용을 수신하는 동안에 차츰 사상·교양·취미면에서 등질화(等質化)해 간다. 둘째로, 매스 미디어가 제공하는 내용은 시청각의 직접적 자극으로서, 활자에 의한 논리적 사고를 비롯하여 이미지에 따른 직관적인 사고의 요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어 수신측에 대해 감정적인 어필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수신측의 감수성이 고양(高揚)되고 감정화해 간다. 셋째로, 대중은 매스 미디어가 제공하는 전달내용을 주로 수동적(受動的)으로 받는 결과가 되어 이에 대한 자주적·비판적인 태도가 상실되기 쉽고 동조성이 두드러진다. 넷째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내용은 수신측이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자극을 시청각을 통해 주게 되고 새로운 욕구를 개발하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게 되면 욕구불만으로서 대중 속에 잠재화한다.매스 미디어는 현대의 사회·경제기구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거대한 기업 재벌에 의존하는 결과로서 그 사회·경제기구를 유지해 나가는 데 기여(寄與)하게 된다. 그 방법은 스폰서의 제품을 위해 효과적인 광고를 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잡지기사나 라디오의 프로그램이나 신문의 칼럼 등에서는 사회구조의 현상을 긍정하고 승인하는 듯한 요소를 담아나가는 데 오히려 더욱 큰 비중(比重)을 두고 있다. 미디어는 부단히 현상의 재확인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다.물론 잡지의 논문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는 이따금 비판적인 내용의 것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것은 극히 미미한 것이어서 현상에 동조하는 기사나 프로그램의 압도적인 홍수 속으로 삼켜져 버린다.오늘날 라디오·영화·잡지 따위의 내용 가운데 가장 큰 부분, 또는 신문이나 서적의 적지 않은 부분이 '오락'을 의도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매스 미디어가 대중의 취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최근의 심각한 논의도 이런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역사적이고도 사회적인 좌표찾기만은 분명히 밝혀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상황의 정리(整理)도 않고, 올바른 이해도 없이 다만 비난하는데 그치고, 건전할지는 모르나 대부분은 핵심을 찾지 못한 비판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매스 미디어와 대중의 취미는 서로 수준을 저하시키는 악순환을 필연적으로 빚는 것인가, 혹은 매스 미디어의 경영자가 적절한 행동을 취하기만 한다면 수신측(受信側)의 취미를 차차 향상시켜가는 좋은 의미에서의 상호작용의 순환(循環)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무엇을 가지고 대중예술의 적당한 기준을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아직 연구해 볼 여지가 많다. 뛰어난 창조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된 소수의 감상자(鑑賞者)를 위해 만들어낸 예술형식의 기준을, 거대산업이 일반대중을 위해 만들어내는 예술형식에다 적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여기 지적되어 있는 경향은 갖가지 입장에서 가치판단을 달아서 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흔히 일반적으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선악(善惡)의 관념으로 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를테면 수신측 대중의 등질화라고 할 경우, 그 등질화 수준의 척도를 어디에다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혹은 사상·교양·취미 따위의 고수준(高水準)층이 사회 가운데서 극히 소수이고, 저수준층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 등질화(等質化)를 사회전체의 프레임으로 살핀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한 표준화(標準化)라고 할 수 있다.또한 욕구의 개발에 대해서도 매스 미디어를 사용해서 상품의 선전을 하는 입장에 선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며, 반대로 저소득(低所得)의 입장에 서면 매스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욕구불만을 축적시키는 원흉이 되는 셈이다. 혹은 논리적인 사고야말로 본래의 사고의 자세라고 믿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와는 달리 감정은 인간의 특성이어서 그것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인간성의 발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이와 같이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 일의적(一義的)으로 선·악의 판단을 내린다는 태도가 반드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정당히 평가하는 것은 못된다고 할 수 있다.한편 사회주의 사회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매스 케뮤니케이션의 담당자가 이윤추구의 상업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물론 수신측 대중의 등질화라든가 감정화라는 사회심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사회체제의 상이점에 관계 없이 같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등질화나 감정화 그 자체가 국가나 지도적 정당의 정책과 방침에 따라 이끌려 간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레닌이 사회주의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대해 내린 정의(定義)처럼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특히 신문은 '집단적 선동자'이고 '집단적 선전자'일 뿐, 일체의 비판이나 의사표시는 추호도 용납되지 않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즉, 선전자와 선동자(및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측)의 임무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적 관점에서만 사물을 관찰하고 사실(事實)의 전달은 당(黨)과 정부의 자의(恣意) 아래서 완전히 무시되게 마련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언론의 자유'란 한낱 공산주의 및 그 실천세력에 대한 반항을 뜻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들의 신문지면에는 뉴스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당이나, 생산성을 높이도록 기대되어 있는 공장 및 농장 노동자, 혹은 지방의 읍면(邑面)이나 학교의 이른바 학습시간을 위한 자료의 공급이면 족한 것이다.구미 자유민주주의권의 편집자는 강판(降版)을 불과 몇 분 앞두고 날아든 중요한 기사를 박아 넣기 위해 법석을 떨기도 한다. 한편 소련이나 중공 등 사회주의 내지 공산권의 편집자는 흔히 '1개월 전에 내용이며 체제' 기획을 세우고 '발행 수일 전에 그 호(號)의 반을 조판하거나 인쇄해두거나……' 한다.소련에 있어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본질적으로는 이미 정한 목적을 위해, 소수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지도자들의 지령(指令) 아래 조종되는 도구(道具)임을 상기하여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권에서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란 도구이기보다는 오히려 서비스 기관이자 또한―미리 예상된 목적에서가 아니라―미디어의 소유자나 경영자들이 관찰하고 해설하고 있듯이 유용한 상품의 판매를 위한 사회적 및 공공적인 필요·관심·기호(嗜好)나 사상을 표현하는 '소리'로서 사용된다. 여기서는 인간의 권리라든가 개인의 자유가 그 존재의의(存在意義)로 되어 있다. 소련의 프레스는 기정의 마르크스적·레닌적·스탈린적인 소위 '진리'를 전달하려고 드는 데 비해, 자본주의 내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시민들의 '알 권리'의 충족과 '비판·계도(啓導)'의 기능을 중요시한다. 전자는 대중을 감독자의 철저한 지도를 필요로 하는 '무리'로 여기는 데 비해, 후자는 대중, 즉 프레스의 수신측을 진실과 허위를 가려낼 줄 아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이 밖에 왕년의 나치스나 일제(日帝)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처럼 일부의 권력자의 일방통행적인 선전기관으로서의 기능의 양태, 그리고 또한 대전 후의 일부 신흥 독립국가 형성기에 있어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기능의 형태 등 각기 사회·경제·문화의 여러 제도와의 연관 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경험된 사실이다.

매스 미디어와 전달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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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media-傳達側

대체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신문·라디오·텔레비전·영화 등의 기계적인 기술수단을 이용해서 불특정 다수(不特定多數)의 대중에게 대량으로 기호(記號)에 실어서 전달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계적인 기술수단을 통틀어 '매스 미디어(大衆媒體)'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매스 미디어를 이용해서 대량의 수신측에게 각양각색의 전달내용을 전달하는 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의 집단을 '전달측'이라 부른다.사회적 교신(交信)의 한 형식인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대상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언어화(言語化)·상징화한 인식주체(認識主體)―전달측―의 인식성과를 문자·영상·음성이라는 물질적 매체를 통해 비조직(非組織)대중인 인식주체(전달받는 측)에 전달하는 작업에 의해 간접접촉을 꾀하는 수단이다. 이는 양산(量産)되고 제도화된 전달회로(傳達回路)를 거쳐 살포된다.기술이란 본래 인간의 신체적 여러 기관(器官)의 기능적인 연장이다. 가장 단순한 기술형태로서의 도구는 손이라는 신체적 기능의 대체물(代替物)이다. 도구는 이윽고 그 조작부분(操作部分)과 원동부분(原動部分)으로 분화(分化)하고 고도의 기술형태로 발전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인 기술수단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발전의 계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미디어의 질(質)을 기준으로 해서 분류하면 몸짓이나 말(會話言語)을 미디어로 하는 인격적 커뮤니케이션과 횃불 따위의 신호 및 글(文字言語) 내지 활자를 미디어로 한 도구적(道具的) 커뮤니케이션으로 나누어진다.도구적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는 인격을 떠난 비(非)개성적인 것이다. 이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은 몸짓이나 말을 미디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전달능력과 전달범위를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확대한다. 활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문자언어가 지니는 약간의 인격성마저도 잃는 것이 되고, 커뮤니케이션의 시간적·공간적 범위를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확대한 것이다. 이리해서 활자 제작과정 및 인쇄과정의 고도의 기계기술화에 따라 최초의 매스 미디어인 신문이 인류의 커뮤니케이션사(史)에 등장한다.이러한 뜻에서 최초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 미디어의 비개성적 사용으로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기계기술의 발전은 전력(電力)의 등장으로 질적인 비약을 이룩하였다. 라디오·텔레비전은 전력에 의한 기계기술을 미디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이며 오늘날의 신문도 인쇄과정·제판과정 등이 모두 전력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흔히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전력을 이용한 기계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정의할 수도 있는 것이다.기계적 커뮤니케이션은 도구적 커뮤니케이션이 고도로 발전된 것이고, 전자(電子)이용의 발전은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하여 도구적 커뮤니케이션이 상실한 인격성을 어느 의미로는 되찾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해서 본래는 인간의 신체적 기관이었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형태와 성질이 끊임없이 변화해 가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일상화(日常化)될 것으로 보이는 전파신문(電波新聞)은 오늘의 신문과 텔레비전이라는 각 미디어의 특성을 종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는 이처럼 고도의 기계기술에 의한 것이어서, 그것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전달측은 기업으로서만이 성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영리기업(營利企業)으로서만 성립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점 대기업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오늘날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내용은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미디어의 기술적 특성, 전달측의 기본적 성격 그 집단 내부의 모순, 나아가 미디어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전체상황의 변화 등 갖가지 요인에 의해 착잡하게 규제된 가운데 그 나름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속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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速報性

근대적인 신문은 특정 독자층을 대상으로 오피니언 프레스(의견 신문)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오늘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대중 신문으로 변질하는 과정에서 의견보다는 뉴스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이렇게 해서 뉴스가 그 자체로서 상품의 가치를 지니게끔 되자 그것은 무엇보다도 재빨리 독자 손에 도달됨으로써 그 상품가치를 높이게 마련이다. 신문기업은 상업경쟁에서 승리하여 독자를 늘려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더욱더 이 속보성이 뜻을 지니며 마침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바뀐다는 본말전도(本末轉倒)까지 일으키게 된다. 화재(火災)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원인, 즉 화인(火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불명'이라든가 '화인은 현재 조사중'이란 기사가 화재 뉴스의 하나의 정형(定型)이 되기까지 하고 있다. 기자의 취재경쟁 가운데 '심야방문, 새벽기습 취재' 따위도 이 속보성에 따른 하나의 이상경쟁(異常競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또한 이 속보성의 자기 목적화(自己目的化)에 따라서 뉴스의 단편화(斷片化)가 생겨난다. 그 어떤 사건이라도 그 원인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적인 경과 속에서 얻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과를 무시한 일정시간 내의 현상만을 언급할 뿐인 뉴스가 늘어간다. 정당한 컨텍스트(context, 交脈)를 무시한 뉴스는 독자들로부터 논리적인 사고의 습관을 앗아간다. 라디오·텔레비전 따위의, 신문보다 새로운 미디어는 그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속보성 경쟁에 있어서는 신문을 제압했다.

동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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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時性

라디오·텔레비전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동시성에 있다. 뉴스의 동시중계(同時中繼)는 무엇보다도 수신측에 대해 현실에 살고 있다는 감정을 환기하고 그에 따라 그 사건에의 심리적인 참가를 야기한다. 방송위성(放送衛星)에 의한 우주중계(宇宙中繼)는 인간이 물리적 공간을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경험을 안겨주었다.이 우주 방송위성, 즉 텔스타(Telstar)는 미국의 통신위성으로 그 제1호는 1962년 7월 10일에 쏘아 올려졌고, 그때 이미 대서양 횡단 텔레비전 중계를 비롯하여 숱한 기초실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증폭기(增幅器)를 포함한 저고도(低高度)위성으로 원지점(遠地點) 5,638㎞, 근지점(近地點) 954㎞인 위성이었다.. 제2호는 1963년 5월 7일에 쏘아 올렸다. 방사능 방호대책(防護對策)을 강구하고 원지점 고도를 1만㎞로 끌어올려 이용가능의 시기와 범위를 확대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발사가 거듭되었다. 아폴로 우주선의 달탐험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낯선 것이 이미 아닌 이 텔스타 위성의 중계를 우리나라는 금산(錦山) 통신위성 우주국에서 캐치하고 있다.이와 같이 동시성은 수신측에게 미치는 현실성(actuality)에 다시 미래에의 심리적 참가를 불러 일으킨다. 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가 잘 만들어지지 못한 텔레비전 드라마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다음 순간에 취해야 할 주역(主役)의 행동에 관해 수신자의 사고(思考)를 유도해내기 때문이다. 플롯(plot)이 없는 드라마를 보는 관객들은 다음의 줄거리를 추리하고 창조한다는 의식에 있어서 심리적으로 객석에서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기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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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錄性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로서의 문자언어의 등장은 커뮤니케이션의 시간적·공간적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미디어의 기록성 없이는 사람은 과거와의 대화(對話)를 문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하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활자와 인쇄기술의 개발은 이 커뮤니케이션의 범위를 더욱 넓히고 시간적으로는 미래와의 대화도 가능케 한 것이다.전파 미디어는 당초에 이 기록성을 지니지 못하고 등장했으나 녹음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의 발명이 이 미디어에게도 기록성을 지니게 해 주었다. 미디어가 기록성을 지니면 수신측의 수신형식이 달라진다. 신문·잡지는 수신자가 언제 어디서 또 어디서부터 읽어도 그것은 수신자의 개성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정용 비디오 테이프 설비가 일반화되면 텔레비전의 수신형식은 개인적·개성적인 것이 될 것이다.수신형식의 변화는 거꾸로 전달내용에 변화를 준다. 라디오가 '여러분'이라는 호칭에서 '당신'으로 바뀐 것도 이러한 미디어의 특성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리하여 미디어의 특성의 변화가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퍼스널 커뮤니케이션(面接的·直接的인 커뮤니케이션, 會話는 그 典型)의 성질을 가하는 결과가 된다.수신기(受信機)에 녹화장치(錄畵裝置)를 담은 퍼스널 텔레비전 따위의 출현은 가까운 장래에 매스 퍼스널 커뮤니케이션이란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킬 것이다.

매스 커뮤케이션의 일방통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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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一方通行性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측은 수신측인 대중 개개인의 반응을 체크해가며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계속할 수는 없다.퍼스널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는 자는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서 내용·표현을 조정하고 그것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를 높일 수가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일방통행성은 이를테면 미디어의 기술적인 숙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일방통행성의 마이너스면을 보완키 위해 한편으로는 시청률 조사·기호조사(嗜好調査) 혹은 독자조사(讀者調査)라는 수신자조사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달내용(송신내용)에 수신자 자체를 등장시키는 노력이 기울어진다. 투서란·시청자 참가 프로 등의 형식이 그것이다.일방통행성의 결함을 메우려고 하는 피드 백(feed back:出力된 정보를 다시 입력측에 되돌려 이용하는 것. 현재는 각 부서에서 모은 데이터에 따라 얻어진 결론을 다시 당해부서로 되돌려 주어 삼고자료로서 제공하는 경우에도 이 용어를 쓰고 있음)론은 독자에 대한 지면(紙面)의 전면적 개방, 혹은 시청자에 의한 프로그램 제작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예상케 하는데, 그러한 형태는 영리기업으로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활동에서는 거의 바랄 수 없는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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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 制度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은 사회체제의 양태(樣態)에 따라 상이한 시현(示顯)형태를 보이는데 그 제도적 양식에 따라서도 달라진다.전형적인 예를 들면 매스 미디어가 모두 사기업(私企業)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경우(미국 등), 그와는 달리 그것이 모두 국유(國有) 또는 그에 준하는 기관의 손으로 운영되는 경우(공산권), 그리고 그 중간형태로서 상업(商業) 미디어와 비(非)상업 미디어가 공존(共存)하는 경우(한국·일본·영국 등)가 있다.물론 상업 미디어의 경우도 언론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헌법에 따라 보장되나,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경우처럼 허가제 아래서 그 활동이 보장되는 경우, 거꾸로 그와 같은 허가제도를 통해서 사기업의 미디어에 대한 국가권력의 직접·간접의 개입이 가능하므로 그 점이 미디어의 공공성(公共性)과 영리적 존재를 둘러싼 논란으로서 나타나고 있다.한편 시버트(F. S. Siebert)는 영국의 튜더 왕조(House of Tudor, 1509-1603),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스페인의 합스부르그 왕조의 이른바 권위주의(權威主義)의 연혁(沿革)을 플라톤·마키아벨리·홉스·헤겔·트라이주케 등의 권위주의 이론의 배경으로서 부연하면서, 인쇄인이나 발행인의 이익은 왕관(王冠)의 이익과 합치되는 한에서만 용인되었고 사적(私的) 미디어에 대한 효과적인 제한과 통제를 확립하기 위한 단일(單一)의 통제방법은 파시즘적 권위주의 원리로 계승되었으며, 독재·통제·우중(愚衆)의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을 모토로 하는 이 매스컴 제도가 오늘날에 와서는―르네상스기(期) 이래 기본적인 프레스 이론이 권위주의 이론·자유주의 이론·사회적 책임이론·소비에트 공산주의 이론의 4가지로 분류된다는 전제 아래―이것들의 연속형태가 하나의 둥근 환형(環形)을 이루며, 이 환을 한바퀴 돌고 나면 처음의 권위주의 이론의 바로 옆의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론이 회귀(回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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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達內容

대체로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은 기호(記號)로써 표현되는데 이 기호의 복잡한 조성(組成)을 메시지라고도 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내용은 전달측이 의도한 바를 표현하는 메시지이며 그것이 전파라든가 인쇄물이라는 기계화된 운반수단에 의해 운반되는 것이다. 메시지 그 자체는 전달측의 정신적·육체적 노동이 산출한 객체(客體)인데, 그것은 수신측에 의해 각양각색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흔히 전달측, 즉 송신자와 수신측 사이의 일상적인 양해 아래 이 전달내용은 4가지 장르로 나뉜다. 보도(報道)·의견·오락·광고가 그것이다. 미국에 있어서의 연방통신법(聯邦通信法, Federal Communications Act, 1934)에 따라 방송은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 공공의 편의(convenience), 공공의 필요성(necessity)의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이 '보도·의견·오락·광고'는 동시에 'somthing for everybody' 즉,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의 것을 고루 나눠 주지만 누구도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는 않는다고 하는 비판도 따르고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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報道

근대사회의 발전은 사람들을 혈연적(血緣的)·지연적(地緣的)인 연관에서 해방하고 적어도 형식면에서는 각기 평등한 개인으로서 사회과정(社會過程)에 등장시켰다. 이와 같은 개인이 사회에 참가해 가려면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인지(認知)에 그치지 말고 사회전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보도활동은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해서 등장하고 개인이 직접 체험을 통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환경을 시시각각 카피(copy)해서 제공하도록 되었다. 이를 '카피의 세계' 혹은 '준환경(準環境)'이라고 한다.오늘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안방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서도 직접체험의 밖에 있는 세계를 체험한다. 혹자에 따르면 현대에서는 사람들의 경험을 실상(實相)이 바뀌었다고 한다. 주체(主體)로서의 인간이 객체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본래의 경험의 논리인 것인데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확인이 불가능한 세계상(世界像)을 형성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분명히 뉴스의 선택권은 전달측에 있고 더구나 기업으로서의 전달측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뉴스의 중립성(中立性)이라든가 객관성(客觀性)이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텔레비전 카메라가 찍어내는 영상(映像)조차도 카메라맨이 보는 앵글을 통한 현실단면인만큼 결코 객관 그 자체일 수가 없다. 이런 뜻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보도는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기자의 두뇌, 카메라맨의 눈, 편집자의 사고 등을 통해 잘라낸 세계가 대량으로 복제되고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동일한 자극으로 작용하는 데서 많은 사람들 속에 그 어떤 공통적인 의사적 환경(擬似的環境)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지면의 획일화(劃一化)라는 현상이 나타난다.그러나 뉴스의 선택권이나 현실을 취재하는 그 결정권이 전달측에 있듯이 송달되어져 오는 뉴스의 해석권(解釋權)은 수신측에 있다. 동일한 자극이 반드시 동일한 반응으로서 동일한 세계상을 수신측 가운데에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이리하여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보도는 한편으로는 전달측의 현실 취재의 자세와, 한편으로는 수신측의 해석능력에 따라 실상(實像)에 가까운 세계상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특히 3가지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첫째는 뉴스의 단편화(斷片化)이다. 한편으로는 뉴스 보도의 경쟁에 따라, 한편으로는 지면 혹은 시간제약에 의해서 사건의 전체상(全體像)이 있는 그대로 100% 전달되는 예는 거의 없다(( 速達性). 대개의 경우, 사건의 존재는 전달되지만 그것이 원인과의 관련 아래 바르게 해결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건을 기억하기는 하나, 그것의 결말이 어찌 되었는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둘째는 상업주의가 이끄는 센세이셔널리즘의 문제이며 사건의 사회적인 중요성보다도 수신자에게 주는 일시적·감각적인 자극의 강도(强度)에 따라서 뉴스가 선택되는 점이다. 혹은 사건의 감각이나 자극적인 측면만이 클로즈업 되어 인과(因果)의 논리, 혹은 사건 뒤에 있는 사회적 맥락(社會的脈絡)이 거두절미(去頭截尾) 또는 단편화(斷片化)되는 보도 태도이다.셋째는 센세이셔널리즘과 관련하여서 뉴스 가운데의 가치의 혼돈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낱 배우(俳優)의 사생활에 관한 기사나 연예계(演藝界) 스캔들 따위가 대학총장의 성명과 같은 양(量), 혹은 그것들의 사회적 가치와 역비례의 양으로 보도된다. 거기에 더하여 전달측의 가치판단은 대개의 경우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대해 다분히 영합적(迎合的)이며, 새로운 가치, 혁신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지면(紙面)과 시간을 할애하지를 않는다.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이란 기자는 핫 뉴스(hot news) 우선주의로 말미암아 '오늘의 사건'만으로 지면을 채우려드는 습성이 미국의 편집자들에게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른바 불편부당(不偏不黨)은 본래의 적극적인 의의를 떠나 오늘의 획일성·몰개성(沒個性)·나열성(羅列性)의 인자(因子)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로 나가는듯 하다가도 그 개개의 사건을 종합한 전체상황에 대해서는 결코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도피구를 마련한다. 아니면 이해(利害)와 견해를 달리하는 두 세력의 주장을 겹쳐놓고 이를 두 토막으로 나누어 놓고는 그 최대 공약수를 공정한 신문의 견해로 제시하려고 든다. 이런 투의 중간성(中間性)은 어피니언 리더로서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갖는 오늘의 자세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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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見

신문에는 사설(社說)·단평(短評)·칼럼·기명평론(記名評論)·투고·캠페인 등의 형식으로, 또 방송 미디어에는 저명인사의 평론·대담(對談)·토론·시청자 참가·뉴스 해설 따위의 형태로 의견, 즉 어피니언을 중심으로 한 논평활동이 있다. 본래 근대적인 신문은 의견의 신문으로서 출발했고,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통의 견해를 마련해내는 것으로써 민주주의의 합의로서의 세론(世論)을 형성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의주장의 일관성을 지킨다는 것은 독자층의 한정(限定)을 뜻하는 바가 되고, 또한 권력에 의한 줄기찬 탄압도 있었으므로 오늘에 와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은 형식 속에 의견의 활동이 남아 있는 꼴이 되었다.전파 미디어의 경우는 당초에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하나의 당파적인 주장을 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보도와 오락의 미디어로서 성장한 것이다. 전파의 공공성(公共性)이라는 성격은 각 방송국의 사적(私的) 의견을 국(局)의 사설(社說)이라는 형식으로 방송하기를 주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뉴스가 수신대중에게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넘어선 환경을 제시하고 인지(認知)의 레벨에서 세계상을 확대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인지된 세계에 관해 스스로의 행동할 방향을 설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뉴스가 늘면 늘수록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행동을 포함한 가치판단의 필요가 늘어나게 마련이다.이렇게 해서 뉴스의 소재(素材)에 대해 일정한 가치판단을 부여하고 또 사람들이 뉴스를 해석할 때의 일정한 판단기준을 주는 논평활동의 필요성은 더욱더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미디어간의 점유율(占有率) 싸움에도 반영된다. 뉴스의 속보성·박진성(迫眞性)을 텔레비전에 빼앗긴 신문은 깊이 파헤친 뉴스(depth repthing), 의견을 곁들인 뉴스, 뉴스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로, 전체적으로는 해설형(解說型)의 뉴스가 늘어간다. 이른바 코멘타리(commentary)의 증가이다.사람들의 환경상(環境像)의 형성이 거의가 뉴스에 의존하며 또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과 행동의 방향설정 역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의견활동에 크게 의존할 경우, 세론의 결정에서 차지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커진다. 세론이 본래대로 국민의 아래로부터의 의견집성(集成)인가, 아니면 미리 주어진 판단의 테두리라고 하는, 이를테면 위로부터 주조(鑄造)된 의견인가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의견활동의 자세에 좌우되는 면이 강하다.지면의 메이크 업에 있어서의 방향성(方向性)이 바로 이 측면인 것이다. 신문제작에 있어서의 행동이 반드시 실사회(實社會)의 모습을 공정하게 다룬 것만이 아닌 이상, 독자의 판단은 신문에 의해 제공된 실제의 현실과는 사뭇 다른 상(像)에 따라 형성되게 마련이다. 이는 신문이 캠페인을 벌이는 경우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이 경우 신문은 캠페인용(用)의 기획기사(企劃記事)의 연재(連載)는 물론이고, 일반 뉴스의 면에서도 캠페인 방향에 따른 뉴스를 집중적으로 게재한다.이와 같이 그 어떤 방향성을 지니는 뉴스의 선택은 독자의 판단을 부지불식간에 일정한 방향으로 경사(傾斜)시켜갈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위험한 뜻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오락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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娛樂 communication

오늘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내용'에서 차지하는 오락의 비중은 매우 크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기업은 곧 오락산업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본래 오락은 사람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참가하던 것이었으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이것이 '해보이는 전문가'와 그것을 '구경하는 일반인'으로 오락의 형태에 기능분화(機能分化)가 일어났다. 오락이 매스 미디어의 물결을 타게 되자 이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하는 오락'의 대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오락'이 찾아가 보는 오락과 오락 쪽에서 찾아드는 것으로 분화를 이룩하였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은 이 '찾아드는 오락'이며 사람들은 안방에 앉아서 찾아드는 오락을 향수하면 되는 것이다.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오락의 등질성이다. 전달측은 되도록 만인을 위한 오락을 보내려고 하는 만큼 그 내용은 연령·성별·계층별 혹은 교육정도별의 차이를 넘어 아무에게나 환영받는 것이 되며 그 결과 중간적이고 등질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오락을 함께 향수(享受)하는 수신측 사이에서는 어린이의 취미가 어른의 취향으로 바뀌거나 어른이 어린이의 만화를 즐기거나 또 남녀의 복장에 대한 취미가 비슷해지거나 예술감상 의식의 대중적 등질화가 일어난다.둘째는 매스 미디어의 물결을 탄 오락의 사상성(思想性) 문제가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활동은 교육과는 달라서 직접 수신측에게 사상이라든가 사물에 대한 견해 내지 사고방식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그러나 대량의 오락이 일상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드라마나 유행가 가사 가운데 숨어 있는 일정한 사고방식과 도덕적 가치를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는 결과를 빚는다. 매스 미디어를 타는 오락은 말하자면 무저항적인 채로 광범위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대중이 지닌 사회의식이나 인생관에 널리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셋째는 표준성(標準性)이라는 문제이다. 매스 미디어가 상업이윤의 목적 아래 운영되는 한, 사회체제의 변혁이라든가 현상의 사회질서에 대한 반역 따위 사상성을 지닌 내용은 매양 경원(敬遠)되게 마련이고 직접·간접으로 금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락은 유해(有害)하지 않은 표준적·중립적인 내용이 되기 쉽고 문제의식이 희박한 판에 박은 투의 작품이 증가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것이 '하는 오락'에의 욕구를 사람들에게 촉발하는 측면도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는 오락'―이른바 매스 레저의 능동적 형태―도 또한 매스 미디어의 물결을 타게 되어 등질화·표준화되는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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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內容分析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송신내용을 객관적·조직적·수량적으로 기술하는 조사기술을 말한다.즉, 어느 기간에 취급된 기사의 분량·취급방법, 혹은 그 기사에 쓰인 용어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신문에 어떻게 쓰였는가를 조사함으로써 기사의 경향·내용을 검토·판단할 수 있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주인공의 사회적 속성을 장기간에 걸쳐 조사하면 거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을 모은 직업의 변천이 나타난다. 내용분석의 결과는 단순히 송신내용의 제경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수신측의 관심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대응적(對應的)으로 고찰하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내용분석의 기술이 흔히 평면적인 수량화로 끝나 버리고 다만 동일한 양적단위로서 측정될 경우, 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잘못된 결과를 유도한다. 또 내용분석의 결과가 역사나 사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단순히 수량화를 위한 것에 그쳐, 결과가 갖는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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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傳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람들의 태도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변용시키는 것이 선전이며, 교육은 같은 과정이면서도 시종일관한 합리적 성격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선전은 그 과정에 비합리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교육의 경우 수신측의 태도의 변용(變容)은 논리적인 납득에 입각한, 매우 지속적인 효과로서 남지만, 선전의 경우는 심리적인 강제에 의한 변용이며 그 효과는 반드시 지속적이 되지 못한다. 파시즘체제 하에서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권력의 정치선전적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독일민족의 우수성'이라는 말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 신문의 표어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심리적 영합을 노렸는가는 제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인식을 하게 되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광고활동은 선전의 일종이며 오늘날 그 방법·내용은 매우 정밀화되었다.

수신측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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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信側-mass co­mmunication-效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매스'에는 '대량'이라는 뜻과 함께 '예술'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따라서 문자 그대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수신자는 대중이다. 그러나 이 대중이 갑자기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신문이 탄생한 당시, 신문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보고 들을 수 없는 세계의 사정을 알게 되고 개개인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사람들로서 성립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단으로서 퍼블릭(public, 公衆)이라는 개념이 생각되기에 이른 것이다.퍼블릭 오피니언, 즉 여론(輿論)이란 문자 그대로 이와 같은 공중의 의견이어서 민주주의 사회의 부산물(副産物)로서 존중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사회에 등장한 사람들의 집단은 그 개개인이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지녔고, 민주주의적 권리를 주장할 만한 사람들로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사람들은 서로 고립되고 특정의 조직도 없이 제각기 다른 계층에 속하며 의견이나 감정이 명확한 형태를 빌어 표현되지가 않고 때에 따라서는 권력이 조종하는 대로 비합리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무릇 공중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다만 이들 대중에게 공통되는 것은 같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접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수신자 대중은 결국 회색적 성격으로 규정받게 되었다. 개략적(槪略的)으로 말해서 비조직적이고, 분산되고, 상호 고립하여 있고, 수동적이고 무력화되어 있을 뿐더러 감각적 자극을 찾아 매스 미디어에 의존하며 마침내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마취적 역작용(痲醉的逆作用)의 포로가 되고 마는 존재라는 것이다.그러나 수신자 대중을 이와 같은 존재로서 파악하면 그것에 대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매우 강렬한 것이 되고, 그것이 사람들의 사회의식의 변화에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견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의 수신자 대중은 반드시 그처럼 비조직적이거나 무력화되어 있지도 않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인류로서의 평화의식이나 스스로가 속하는 사회의식을 버리지 않는, 사회의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의 소유자로 보는 견해도 성립된다. 이와 같은 수신자 대중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역기능(逆機能)을 거꾸로 컨트롤할 줄 하는 존재로도 생각된다. 이와 같이 생각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라는 것을 그다지 중요시하지는 않는 입장도 생긴다.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그 논자의 입장, 혹은 그 효과의 장(場)인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의 존재양식(存在樣式)에 따라 매우 달라져 있는 것이 현상이다. 따라서 여하튼 효과라고 하는 것을 단기적인 효과와 장기적인 그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토론의 정밀화(精密化)를 꾀하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전자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접촉하고 있는 사이에 일어나는 반응, 접촉 후의 반응, 그리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재생(再生)되는 반응을 통틀어, 아무튼 접촉 전과 접촉 후에 볼 수 있는 수신측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가리킨다.어린이들은 텔레비전의 괴수(怪獸) 드라마 따위를 보면서 공포나 경이(驚異)의 반응을 나타낸다. 그것이 시청 후에까지 남아서 만화의 주인공을 흉내내거나 한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도 아동끼리 간밤의 텔레비전 만화를 본딴 장난을 즐긴다. 이 일련의 반응의 계열이 단기효과(短期效果)이다. 이와 같은 단기효과의 누적이 어린이 문화, 혹은 사회생활 일반에 걸쳐 일정한 변화를 빚어낸다. 이것이 장기효과(長期效果)이다.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에 성인(成人)이 된 어른과 텔레비전이 일상화 된 후에 태어난 어린이 사이에는 인지(認知)·사고·감정 등에 걸쳐 상이한 인간상(人間像)이 발견되지 않느냐 하는 논의는 후자에 대한 문제이다.그러나 어느 경우이거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그 기능의 결과이므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기능하는 장의 역사적·사회적 맥락과의 연관 아래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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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效果分析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분석은 종래에는 주로 미국의 연구가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그리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효과가 극히 일의적(一義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우선 절차로서, 매스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효과가 아니고, 특정의 미디어 혹은 특정의 전달내용 혹은 특정의 수신자측이라는 식으로 조건을 한정시켜 그것에 대한 효과를 조사한다는 방식이 채택되고 있다. 예컨대 설득적(說得的) 커뮤니케이션의 효과, 도피적(逃避的) 미디어 내용의 효과, 미디어 내용에 나타나는 범죄와 폭력이 지닌 효과, 성인을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어린이에게 주는 효과 등이 그것이다.클러퍼는 이와 같은 일련의 효과분석의 결과를 일반화해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일정한 효과를 갖는 것은 그것이 각양각색의 매개적(媒介的)인 요인과 얽혀 기능하는 결과이다. 예컨대 폭력프로가 소년범죄를 유발시켰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그램 접촉 이전에 소년 마음에 축적되어 있던 비행성향(非行性向)이라든가 그 소년의 일상적 생활환경 등 여러 요인의 복합적인 기능의 결과인 것이다.다음,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일반적으로 그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매개적인 여러 요인을 그 작용에 있어서 보강(補强)하는 방향에서 작용한다. 예컨대 사람들은 투표행동에 있어서, 특정 정당에 투표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정당을 지지하는 뉴스나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쉽고, 그에 따라 매스 커뮤니케이션 일반이 그 사람의 특정 정당에의 투표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음이 증명된다는 것이다.그러나 결론으로서 클리퍼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효과의 기여적(寄與的)인 작용인(作用因)으로서 작용하는 경우에도 미디어의 성질, 전달내용의 여러 성질, 수신측을 에워싼 커뮤니케이션 상황 등에 의해서 영향 받는다는 한정성을 부여하고, 매스 커뮤니케이션 효과의 일반화는 아직 가설적(假說的)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선유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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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有傾向

수신측이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받는 경우, 우선 그것에의 접촉행동, 다음 그 의미에서 행동, 그리고 어떠한 효과를 받는가 하는 3가지 차원에서 작용하는 요인으로서, 수신측이 접촉에 앞서 터득한 지식·관심·의견·태도 등을 통틀어 선유경향이라고 한다. 이 선유경향은 사람들의 과거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그 사람들이 소속하는 집단규범(集團規範)에 합당한 것이며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도 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선유경향이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행동에 있어서 그와 상응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이질적인 내용은 거부하는 프레임워크로 작용한다고 여겨지고 있다.요컨대 선유경향이란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특정의 효과를 갖는 경우에 그것을 매개하는 여러 요인이 개인 가운데에 통합적으로 내화(內化)한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며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 또는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매개적인 개념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2단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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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二段-

매스 커뮤니케이션 영향은 사람들에게 직접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퍼스널한 커뮤니케이션을 매개로 해서 주어진다는 견해이다.미국인 베렐슨과 카츠가 발견한 것으로, 투표행동에 미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을 분석해 나가는 가운데 투표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퍼스널한 접촉이 매스 미디어보다도 효과적인 것임을 확인한 바에 따라 추론(推論)된 것이다.이와 같은 영향력을 미치는 자를 어피니언 리더라고 하며, 그는 그와 같은 집단에 소속한 딴 사람들보다도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화제 영역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하긴 이 어피니언 리더라고 하는 사람도 모든 사항에 걸쳐 영향력을 지닌 것은 아니며 화제가 바뀔 때마다 어피니언 리더도 바꿔지기 마련이다. 유행에 대해서는 패션 화제에 관한 어피니언 리더가 있고, 가정용품의 구매에 대해서는 그것대로의 리더가 있다는 것이다.아무튼 이 견해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이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견해이다.

대리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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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理經驗

사람들이 실제의 참가적인 오락 대신에 매양 매스 미디어에서 얻어지는 '보는 오락'에 의해 오락욕구를 채우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리의 경험에 의해 욕구가 채워진다는 것이며, 이를 가리켜 대리경험이라고 한다. 직접적 경험에 의해 욕구가 채워지는 것과 대리경험으로서 그것이 충족된다는 것은 동질(同質)의 심리과정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만 그 어느 쪽이 보다 나은 충족감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이 본래적으로 욕구 해결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반대로 더욱 욕구불만을 누적시키는 것인지도 문제로서 남겨진다. 다만 오늘날처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활동이 활발해지자 사람들은 대리적인 욕구만족의 기회를 늘려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도 새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락의 질적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겠다.

미디어의 입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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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立體化

현재와 같이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제활동이 활발해지자 각 활동의 영역에서 미디어간의 중복, 혹은 연결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TV드라마로 히트한 것이 영화화되거나, 소설이 잘 팔리자 TV드라마, 영화화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많으며 한 매스 미디어에서 인기를 모으면 그것이 다른 미디어로 파급된다. 이 현상을 미디어의 입체화라고 부른다. 개인이 녹음한 노래가 라디오·레코드·텔레비전·영화의 순으로 유행될 때 그 이면에는 신문·잡지 등의 활자 미디어의 역할이 큰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매스 미디어가 상호보완관계를 이루며 우리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