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파극/신파극의 연혁

신파극의 연혁〔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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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派劇-沿革〔槪說〕 개화기 이후의 한국연극사를 보면 그 발전단계를 나타내 주는 세 가지 용어로서 신연극(新演劇)·신파극(新派劇)·신극(新劇)이란 말이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일본 근대연극사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신연극·신파극·신극으로 신극(新劇)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광의의 신극이란 용어에는 이 세 가지 용어가 다 포함된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 사용한 신연극이란 말은 다같이 신극의 초창기 용어인 것만은 사실이나 그 연극양식상으로는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의 신연극이란 용어는 그들의 초기 신파극을 지칭한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신극용어로서의 신연극이란 것은 구극(舊劇)인 판소리를 분창화(分唱化)한 창극(唱劇)과 창작창극을 일컬은 말이었다. 신연극이 서구적 양식과 어느 정도 근대정신을 담은 연극을 가리키는 용어인만큼 원각사(圓覺社) 시대의 신연극은 엄격한 의미 협의의 신극으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국신극운동은 '연극(판소리)개량(창극) 시대→신파극 시대→신극(근대극) 시대'라는 커다란 과정을 밟아온 것이 되고 본격적인 신파극, 나아가서 신연극운동의 시발은 1888년부터 출발한 일본의 신파극운동보다 23년 늦은 1911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이 <불효천벌(不孝天罰)>외 1편을 남대문 밖 어성좌(御成座)에서 공연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1911년 신극운동이 시작된 이후 우리나라에는 네 줄기의 연극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즉 신파극(新派劇)·학생극(學生劇)·신극(新劇)·프롤레타리아극 등이다. 신파극은 1911년부터 시작되어 6·25사변 직후인 1954년까지 만40년 이상 존속하다가 무대에서 사라졌고 프롤레타리아극은 1925년 11월 도쿄에서의 프로극협회 결성으로부터 정식으로 출발하여 1948년 8월 정부수립 직전까지 존립하다가 프로극인들의 월북(越北)으로 그 막을 닫았다. 그리고 학생극은 1920년 봄에 도쿄 유학생들이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란 근대극 연구단체를 발족시킴으로써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근대극인 신극은 1920년대 초 극예술협회의 공연단체인 동우회순극단(同友會巡劇團)과 형설회순극단(螢雪會巡劇團), 초기의 토월회(土月會) 등 진정한 신극을 표방하고 나선 학생극단들의 공연활동으로부터 발전되어 오늘날의 연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상의 네 가지 연극의 흐름 중에서 가장 대중에게 밀착되어 대중의 오락이 되고 또 대중에게 영향을 준 연극은 신파극이었다. 한국에서 신파극이 성행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이주하면서 그 이주민을 따라 일본 신파극단들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무명의 2·3류 지방순업극단(地方巡業劇團)이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을사조약(乙巳條約) 직후부터이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맺어진 1907년 이후에는 부쩍 늘어서 서울 한복판인 명동(明洞)에 일인 거류부락을 형성하고 그들을 위한 극장이 세워졌다. 그리고 1908년부터는 일본 신파극단이 만주와 한국을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서울에서는 <피스톨 강도 시미즈(淸水定吉)> 같은 신파극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나라의 여러 극장에서는 가무(歌舞)와 시곡예기(詩谷藝妓), 판소리 창극(唱劇) 등이 상연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임성구(林聖九)가 일본인 극장에서 신파극을 배워 이를 처음 시작한 것이다. 개화 전까지는 전통적인 연극으로서 가면극(假面劇)이나 인형극(人形劇)·판소리 등과 각종 민속놀이가 민중오락으로 성행했지만, 개화 이후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고유한 것이 쇠퇴하고 더구나 한일합방 후로는 도시문화가 압도하여 재래의 민속놀이는 대중오락으로서 그 기능을 급속히 상실해 갔다. 그러던 차에 신파극이 유입되어 유일한 대중오락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감상적이고 홍루적(紅淚的)이며, 왜색이 짙은 신파극이 처음에는 한국관객의 저항을 받았으나 차차 실국(失國)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옛부터 억눌려 내려온 데서 생긴 한(恨)의 정서, 그리고 신파극이 갖고 있는 감상성에다 신파극을 능가할 만한 오락이 없는 상황에서 저급한 대중에게 광범위한 공감을 일으켜 점차로 신파극장은 없어서는 안 될 대중오락장이 되었던 것이다. 1911년 신파극이 처음 들어와 혁신단이 생기고 이듬해에는 윤백남(尹白南)과 조일제(趙一齊)가 문수성(文秀星)이란 신파극단을 만들었으나, 역시 같은 해에 이기세(李基世)가 유일단(唯一團)을 조직한 데 이어,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이화단(以和團)·조선풍속개량성미단(朝鮮風俗改良誠美團)·기성청년단(箕城靑年團)·영신단(英新團) 등 8개 극단이 한 해에 쏟아져 나왔으며, 1910년대 말까지 정극단(正劇團)·예성좌(藝星座)·신극단(新劇團)·수양단(首陽團)·개량단(改良團)·취성좌(聚星座)·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 등 20여개 극단이 부침하면서 공연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많은 극단이 모두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고 한두번 공연으로 막을 내린 극단도 많다. 자금에 따라 극단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했고 단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1910년대의 극단계보는 임성구의 혁신단으로부터 김도산(金陶山)의 개량단·신극좌, 김소랑(金小浪)의 취성좌에 이르는 계열과 윤백남·조일제의 문수성으로부터 이기세의 유일단·예성좌·조선문예단에 이르는 계열이 그 주맥(主脈)을 형성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오래 활동한 극단은 혁신단과 이기세의 극단, 그리고 취성좌 등으로 모두 10여년씩 활동을 계속했다. 1910년대의 신파극단들은 개화기라는 시대적 요청과 신극 초창기인들의 당위성 같은 것 때문에 혁신단이 내세운 표어인 권선징악·풍속개량·민지계발(民智啓發)·진충갈력(盡忠竭力) 같은 동궤(同軌)의 주제 밑에서 연극운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진중설(陣中雪)> 같은 군사극(軍事劇)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려 했고 1912년 임성구가 번안한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이후에는 탐정극이 성행했으며 <장한몽(長恨夢)>의 공연 이후는 주로 가정비극과 의리인정극이 판을 쳤다. 이처럼 1920년이 되기 전까지 20여개 극단이 100개 이상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려 대중을 울리고 웃겼다. 그 당시 신파극은 대본을 사용하지 않는 즉흥대사(卽興臺詞)식으로 매일밤 레퍼토리를 바꾸었으며, 이로 인한 각본난(脚本難)은 연극을 더욱 타락하게 했다. 또한 여배우가 없어 여형(女形) 남배우를 썼고 완전한 스타 시스템으로 단장이 언제나 주역을 맡아 비난도 샀다. 무대도 순전히 일본식 집에다 일본의상을 입고 주로 일본적인 생활양식을 무대에서 재현했다. 따라서 1910년대 초기 신파극은 그들이 내세웠다는 개화계몽과 민족운동으로서의 신극운동이 아니었고, 도리어 일본생활양식과 일본적인 슬픔의 정서를 한국에 이식(移植)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1910년대에 한국 연극인들이 신파극을 공연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일본 극단들이 신파극을 가지고 상륙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성구가 혁신단에서 창립공연한 <불효천벌>은 수좌에서 공연한 <뱀의 집념>을 번안한 극이었으며, 나중에 공연한 <불여귀> <장한몽>(금색야차의 번안물) <육혈포강도> <무사적 교육> 역시 번안 작품들이었다. 그의 공연은 1910년 이전의 재경(在京) 일본 신파를 본뜬 것으로서 일인 거주지역인 남촌(南村)에서 배워 한인 주거지역인 북촌(北村)으로 널리 전파시킨 셈이다. 혁신단 초창기의 극장세(劇場稅)는 15원, 관람료는 자리등급에 따라 10전·20전·30전이었는데, 학생·소아·군인은 반액이었다. 배우에 대한 배당은 1등에 평균 80-90전, 말석 배우로 4등 배당이 15-16전으로, 당시 쌀 한 되 값은 15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당액은 평균치일 뿐, 1910년대 극단의 경기는 매우 부진하였다. 당시 극단의 조직형태는 명배우·인기배우 중심의 체제(star system)로서 배우들의 인기가 떨어지면 극단의 힘도 무력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1910년대 말에 가서는 신파극이 극도로 타락한데다가 영화의 등장으로 신파극이 대중의 관심에서 소외되자 연쇄극(連鎖劇)으로 그들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썼다. 영화와 연극을 적당히 혼합한 연쇄극을 처음 상연한 극단은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였다. 신극좌가 연쇄극인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상영하자, 이기세의 조선문예단과 임성구의 혁신단도 다투어 신파극 초기의 레퍼토리, 즉 <장한몽> <지기(知己)> <황혼(黃昏)> 등을 상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파구로 찾았던 연쇄극은 신파극의 타락을 더욱 촉진하여 그 생명이 길지 못했다. 1920년대에 들어 임성구가 죽고 이에 따라 혁신단이 해산되자 1910년대의 신파극단들은 대부분 도태되었거나 유랑극단(流浪劇團)으로 지방 촌락을 흘러다니게 되었다. 단지 이기세와 윤백남이 각각 예술협회(藝術協會)·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하여 개량신파(改良新派)로 명맥을 이어 갔다. 예술협회와 민중극단은 대사가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연극방식을 버리고 창작극을 공연했으며 왜색을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도 2·3년씩 계속하다가 해단(解團)되었다. 1920년 초부터 민족의 자각이 싹트고 도쿄 유학생들이 정통신극을 부르짖고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토월회(土月會) 등 학생극단을 조직하여 진정한 근대극을 공연함으로써 신파극단들은 무대를 상실하고 도시를 떠나 촌락과 산간벽지를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초기 신파극의 막은 내린다. 1920년대 말에 발족된 신파극단들, 이를테면 민립극단(民立劇團)·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 등과 1930년대 초에 등장한 연극시장(演劇市場)·신무대(新舞臺),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太陽劇場) 등도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단지 20년대를 지배했던 것은 정통신극을 내걸고 학생극단으로 출발한 뒤, 곧이어 중간극단의 길을 걸었던 토월회(土月會)였다. 진정한 의미의 신극을 내걸고 등장했던 토월회는 1920년대 말까지 100여 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는데 처음과는 달리 차차 중간극인 신파극으로 변모해 갔다. 이처럼 극장무대가 없이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던 신파극은 1935년 최초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설립되면서 활기를 되찾게 된다. 동양극장은 개관하자 즉시 전속극단으로 청춘좌(靑春座)를 두어 박제행(朴齊行), 심영(沈影), 황철(黃澈), 차홍녀(車紅女), 김선초(金仙草), 지경순(池京順), 김선영(金鮮英) 등 참신한 전속배우를 확보하고 첫 공연을 가졌다. 곧 이어 사극(史劇)을 주로 할 동극좌(東劇座)를 두어 이듬해 2월에 창립공연을 했고 다시 희극(喜劇)을 전문으로 할 희극좌(喜劇座)의 창단공연을 한 달 뒤에 가졌다. 그러나 희극 관객이 적어 희극좌는 곧 해산되면서 동극좌와 합병하여 전속극단 호화선(豪華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은 신파극의 두 정상으로 군림했다. 그들은 주로 사극과 가정 비극, 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을 공연하여 장안의 기생들이 관객의 주(主)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39년 가을부터 동양극장의 경영자가 바뀌고 전속배우의 일부가 극단 아랑(阿娘)을 조직하고 탈퇴함으로써 그 전성기는 지난 듯했으나 여전히 신파극은 번성해 가기만 했다. 아랑에 조금 앞서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가 청춘좌의 멤버들을 빼내서 극단 고협(高協)을 조직했는데 아랑과 고협은 청춘좌·호화선에 이어 광복전까지 가장 활약한 신파극단이다. 이 밖에도 20여개의 극단이 명멸(明滅)했는데 대표적인 극단으로는 예원좌(藝苑座)·성군(星群)·황금좌(黃金座)·태양(太陽)·중앙무대(中央舞臺)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 같다. 1940년에 접어들면서 태평양전쟁의 확대로 국내는 완전히 전시체제로 바뀌었고, 연극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가혹해졌다. 그리하여 모든 예술단체는 그들의 문화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연극도 연극협회의 산하에서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연극통제의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1941년에는 '연극 신체제 방침'이 '국민연극수립에의 적극책'으로 발표되었다. 그들 당국자들은 '국민연극'이라는 테제를 주고 연극내용을 완전히 규제, 국책연극(國策演劇)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하여 극단들은 공연때마다 반드시 짤막한 일어극(日語劇)을 하나씩 해야 했으며, 일제가 목적한 침략전쟁 완수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추종한 반동 연극을 어느 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국민연극 이후 비교적 퇴폐적이었던 신파가 많이 정화(淨化)되는 이점도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45년에 광복을 맞게 되었고 오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연극계는 판도가 달라졌다. 그동안 지하에 숨어 있던 프로연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극계(劇界)를 완전히 석권했다. 이와 같이 광복 후의 정치적 혼란과 문화정책 부재,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혼돈 속에서 오는 체관적(諦觀的) 대중심리의 발판을 딛고 악의 꽃과 같이 신파극은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신파극 운동의 스타트는 30년대의 예원좌가 변신한 청춘극장(靑春劇場)의 출범으로부터이다. 김춘광(金春光)의 청춘극장이 1945년 10월에 발족되자 황금좌가 재기하고, 극장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좌익극(左翼劇)이 탄압을 받아 위축되어 가자 신파극은 더욱 기세를 올려, 국도좌(國都座)·고향(故鄕)·청구극장(靑丘劇場)·청탑(靑塔)·예성좌(藝星座)·낭만극장(浪漫劇場)·민족극장(民族劇場) 등 50여개의 극단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많던 극단들의 계보를 보면 대부분 30년대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극단들과 그 당시 활동했던 배우들이 새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단들은 1·2회 정도의 공연을 한 뒤 자취를 감추었고 대표적인 극단은 청춘극장과 황금좌였다. 이 두 극단은 서울의 주요 극장이었던 중앙극장(中央劇場)·단성사(團成社)·국제극장(國際劇場)·국도극장(國都劇場)·수도극장(首都劇場)·제일극장(第一劇場) 등에서 한달에 1-2회씩 공연하였다. 그들의 레퍼토리는 역시 사극(史劇)과 가정비극, 괴기극(怪奇劇)이 주였고, 30년대 동양극장에서 히트한 작품들이 대부분 타락되어 나타났다. 작품은 주로 김춘광과 청초생(靑草生)의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꽃피었던 신파극도 1948년의 정부수립과 함께 사회가 정상화되면서 퇴조(退潮)했고 1950년의 6·25전쟁 이후 전쟁의 리얼리즘으로 인해 감상적이고 괴기적이며 허황된 내용의 신파극은 발붙일 곳을 잃었으며 1954년 이후로는 영화와 방송에 그 흔적을 남긴 채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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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派

'신파(新派)'란 말은 원래 일본에서 처음 쓴 신극용어의 하나로서 일본의 구파극(舊派劇)인 가부키(歌舞伎) 연극에 대립하는 칭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신파란 용어도 초창기에는 소시 시바이(壯士芝居)·쇼세이 시바이(書生芝居) 또는 신연극·신극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1897년 이후 신극배우 가와카미(川上音次郞, 1864-1911) 연극을 정극(正劇)이라고 부른 일이 있다. 또 장사(壯士)는 당시 일본에서 초야에 있다가 정치운동에 투신한 청년을 일컫는 말인데 그들은 정론(政論)고취를 목적으로 연극을 이용하였다. 즉 명치 20년(1887)을 전후해서 이토(伊藤博文) 내각은 그들의 극단적인 유럽화(化) 정책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반정부측 입장에 있던 자유당 청년들의 맹렬한 비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토 정부는 안보조례(安保條例)를 공포하여 언론탄압을 하게 되고 언론을 봉쇄당한 장사들은 연극형식을 빌려 그들의 불만을 국민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박한 연극개량의 의도가 부각되었으며 생활수단으로 연극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차차 당초의 목적인 정치의식이 박약해지고 상업연극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신연극의 여러 단체는 다투어 전황보고의 연극을 상연하여 대호평을 받았고 이러한 군사극에 의하여 자리를 잡은 신연극은 1897년 전후부터 적극적으로 문단에 접근하고 소설극이나 서구의 번안극 또는 신문에 게재된 범죄소설이나 탐정실화를 각색한 탐정극을 상연하여 비로소 신연극의 예풍(藝風)이 확립되었다. 이에 신파는 구파(舊派)와 대립할 수 있게 되어, 이때부터 '신파극(新派劇)'이란 이름도 생기게 되었다. 이후 수년간 신파의 발전기가 계속되고, 처음 정치극에서 출발한 신파는 가정비극·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을 상연하기에 이르면서 그 전성기(1904-10)를 맞이하여, 신파극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레퍼토리 베스트 10, <금색야차(金色夜叉)> <불여귀(不如歸)> <하소수(夏小袖)> <상부련(想夫戀)> <고야성(高野聖)> <부자매(浮姉妹)> <여부파(女夫波)> <신생애(新生涯)> <기지죄(己之罪)> <협염록(俠艶錄)>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에서 신파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임성구(林聖九) 일행의 혁신단(革新團)이 낸 제2회 공연광고에 '신파연극 원조(新派演劇元祖)'라고 관명(冠名)한 것이 그 시초다. 요즈음 연극이나 영화의 그 연기나 드라마에 대해 '신파조(新派調)'란 말을 쓰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멜로드라마틱하고 다소 오버액트한 가정비극적 연극을 말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혁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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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新團

혁신단(革新團)은 한국 최초의 신극단체인 동시에 신파극단(新派劇團)으로서, 1911년 초겨울에 신파극의 비조(鼻祖)라 할 임성구(林聖九)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혁신단의 창립공연은 1911년 초겨울 남대문 밖에 있던 일본인 극장 어성좌(御成座)에서 <불효천벌(不孝天罰)> 외 1편을 갖고 막을 연 것이었는데, 이것이 한국 신극운동의 시발인 것이다. 혁신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극단일 뿐 아니라 1910년대의 신파극단 중 대표적인 극단으로서 개화 계몽의 기치를 높이 들고, 1920년대 초까지 수백 회의 중앙공연과 지방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일본 신파극을 한국에 이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혁신단이 공연한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쌍옥루(雙玉淚)> <장한몽(長恨夢)> 등이다. 창립 당시의 재정원조는 김치경(金致景)이 담당했고 단원은 임성구(林聖九), 한창렬(韓昌烈), 황치삼(黃致三), 김기호(金基鎬), 장희원(張熙元), 양성현(梁聖賢), 고병직(高炳稷), 임용구(林容九), 고수철(高秀喆), 임운서(林雲瑞), 맹종상(孟鍾相), 김순한(金順漢), 김운선(金雲善), 천한수(千漢洙), 장인환(張仁煥), 안석현(安錫鉉), 김소랑(金小浪), 김도산(金陶山), 박창한(朴昌漢), 임인구(林仁九) 등 20여명이었는데 단장은 임성구였다. 혁신단은 1921년 11월 대표인 임성구가 병사하자 창립된 지 10년 만에 흐지부지 해산되었다.

개량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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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良新派

종래에 있었던 저속한 신파극을 높은 수준으로 개량한 신파를 일컫는 말이다. 개량 신파는 1921년 이기세(李基世)가 조직한 예술협회(藝術協會)와 1922년 윤백남(尹白南) 조직의 민중극단(民衆劇團) 등으로부터 시작되어, 1930년대 후기 동양극장(東洋劇場)을 중심으로 한 신파극에서 완전히 이룩된 새로운 신파극으로 고등신파(高等新派)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개량신파는 일본의 3류 지방극단에서 배운 일본색 그대로 대본(臺本)도 없는 즉흥대사(臺詞)식으로 하던 것을 대본도 사용할 뿐 아니라, 오버액트한 이른바 신파조의 억양에서 벗어나 리얼한 화법(話法)으로 고치게 되었으며,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소도구들을 사용하게 되었고 극의 내용에 있어서도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것에서 현실적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파연극인들이 1920년대 이후 학생극과 정통적인 근대극의 수법에서 자극받아 스스로 체질개선을 해간 것으로, 1930년대 후기 신파극의 본산인 동양극장에서는 더욱 개량하여 그들의 신파를 고등신파(高等新派)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치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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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建, 口立

구치다데(口建, 口立)란 일본과 한국의 초기 신파극에서 취하던 공연방식으로서 소위 각본(脚本) 없이 하는 연극을 구치다데식 연극이라고 했다. 즉 일정한 각본이 없이 연출자(단장)가 배우들에게 좌담식으로 연극의 내용과 막수(幕數)를 이야기해 주고 배역을 정해준 다음 줄거리 전개에 따라 설명과 중요한 대사까지를 일러준다. 그러면 배우들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자기들의 연기플랜과 무대에서 할 대사를 생각해 낸다. 위치·동작·디테일에 가서는 그때그때 무대에서 적당히 알아서 하는 연극을 말한다.

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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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形 일본말로 온나가다(女形)라고 하는데, 연극을 하는 데 있어 여역(女役)을 여자가 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로 분장해서 맡는 것을 일컫는다. 일본의 구극(舊劇)인 가부키(歌舞伎)로부터 일본 신파극이 이어받은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우리나라의 가면극이나 판소리 등에도 남자광대(男子廣大)뿐이었고, 무동(舞童)이나 남사당(男寺黨)패도 그런 성격의 것이어서 봉건사회의 형편은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고 하겠다.

여배우 지망생이 나오기 전까지 1910년대의 여형배우로는 혁신단 이래로 고수철(高秀喆)과 안석현(安錫鉉)이 유명하여 일세를 풍미했다. 특히 <장한몽>에서의 고수철의 심순애(沈順愛)역은 장안인사의 눈물을 자아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는 1917년 신극좌(新劇座)의 김소진(金小珍)이며, 이어서 마호정(馬豪政)이 등장했으나 여형 남배우를 능가할만큼 뛰어나지 못했고, 1920년대에 토월회(土月會)의 복혜숙(卜惠淑), 이월화(李月華) 등이 명성을 떨치기까지 최여환(崔汝煥), 김영덕(金泳德), 이응수(李應洙) 등의 여형이 경연하였으며, 토월회 이후 여형은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무대에서 사라졌다.

신파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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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派-

신파극에는 눈물이 흔하다. 이것은 일본신파극의 경우를 모방한 것이다. 시초에 자유민권운동의 정치선전극으로 출발한 신파극이 가족제도의 압박 아래 의리와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전근대적인 윤리가 자아내는 눈물의 신파비극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질은 일본 부르주아지의 특수성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은 절대주의 천황제의 힘 ―― 일본과 한국농촌에 남은 봉건적 유제(遺制)와 그것을 이용한 노동자의 저임금, 천황의 군대와 경찰 등 ―― 을 빌려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은 서구 민주주의 제국처럼 주체성있는 시민사회를 성립시키지는 못하였다. 거기에는 천황제에 의하여 유지된 사회안정을 연장하려는 소극성이 지배할 뿐이었다. 서구의 근대극(시민극)의

전형인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인간(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서 일어나는 적극성의 비극(권리의 형상화)이었다면, 신파비극은 그 대표작이라고 하는 <불여귀(不如歸)>의 여주인공 낭자(浪子)가 비인간적인 의무에의 인종과 절망에서 오는 비극(의무의 형상화)을 보여준다는 정반대의 대비가 일어났다. 가정비극에서 흘리는 눈물은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성의 암흑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며, 그것은 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 위안이 된다는 것 외에 아무 의미도 없는 눈물, 말하자면 인간적 무력감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한 감상의 눈물이었다. 1910년에 나라를 잃은 이 나라 민중들에게 소개되어 뿌리를 내린 신파비극은 테마 자체가 대부분 그러한 감상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일 뿐더러, 혹은 사대주의, 혹은 슬픔을 즐기는 취미, 혹은 웃음보다 눈물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상 등을 반영하여, 만남의 기쁨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삶보다는 죽음을, 사랑보다는 희생을, 저항보다는 인종을 집요하게 표현하고 찬미하였던 것이다. 천황의 군대로 한국을 강점하고 탄압한 일본인들이 한국민중의 인간적 무력감을 신파의 눈물로 달랬다는 것은 실로 병주고 약주는 격의 시니컬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동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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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劇場

1935년 10월에 준공된 극장. 서대문구 충정로 소재. 배구자 악극단(裵龜子樂劇團)을 이끌던 배구자(裵龜子:배정자의 조카)와 그의 남편 홍순언(洪淳彦)이 19만 5천원을 출자하고 작가인 독견 최상덕(獨鵑崔象德) 등이 협력하여 세운 명실공히 한국인의 극장이었으며, 600여 객석에 회전무대, 호리존트 등을 갖춘 당시 국내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이었다. 동양극장(東洋劇場)이란 명칭은 작가 윤백남(尹白南)이 지었고 1935년 11월 1일 개관했다. 신축개관 프로는 배구자 악극단 공연으로 최독견 작(作) <피리의 기적> <쌍동의 결혼>과 촌극(寸劇), 소녀관 현악 연주, 무용 등이었다. 서투른 서양극에 자기도취한 이른바 신극단체를 불러들인다면 흥행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아, 참신한 젊은 세대를 모집하여 신극은 못할망정 신파로는 좀 청신하고 매력적인 연극을 하려고 했다. 박제행(朴齊行), 서월영(徐月影), 심영(沈影), 황철(黃澈) 등과 여배우로는 김선초(金仙草), 차홍녀(車紅女), 지경순(池京順), 김선영(金鮮英), 한은진(韓銀珍), 유계선(劉桂仙) 등을 주요 멤버로 하여, 동년 12월 15일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를 발족시켰다. 이어서 사극(시대극)을 주로 하는 전속극단 동극좌(東劇座)를 두고, 변기종(卞基鍾), 송해천(宋海天), 하지만(河之滿) 등을 중심으로 이듬해(1936) 2월 14일 창립공연을 가졌다. 3월에는 다시 전경희(全景希), 석와불(石臥不), 손일평(孫一平), 김원호(金元浩), 최영순(崔英順) 등을 중심으로 한 희극 전문의 희극좌(喜劇座)를 두었다. 그러나 희극만을 보러 오는 관객은 적고 눈물을 짜야 재미있다고 하는 관객의 습성에 연유했음인지 희극좌는 수명이 짧았고 같은 해 9월 말에 사극 전문의 동극좌와 병합하여 전속극단으로 호화선(豪華船)을 두기에 이르렀다. 이후는 청춘좌와 호화선 두 전속극단이 중앙과 지방공연을 번갈아 가면서 계속하였고 멀리 북만주 지방까지 순회하였다.

동양극장은 그 레퍼토리로 중앙공연에 매달 여섯 개의 주각본(主脚本)이 필요하였고 개막과 폐막에 쓸 단막각본과 재극(才劇) 각본도 필요하였다. 연극에서 돈을 벌려면 덮어놓고 눈물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흥행계에선 상식화되어 있어, 청춘좌·호화선 두 극단의 전속 극작가는 눈물을 짜내기 위하여 극한의 노력을 하였다. 박진(朴珍), 이서구(李瑞求), 이운방(李雲芳), 송영(宋影), 임선규(林仙圭), 김건(金建), 최독견(崔獨鵑), 김영수(金永壽) 등의 전속 극작가들은 관객층의 분석과 연기자의 성격 등을 재고하여 써야 했고, 특히 여인의 비위에 잘 맞추어 쓴다는 것은 신파극의 요체(要諦)였다. 종로(鍾路), 한성(漢城) 두 권번(券番)의 500여명의 기생들이 고정관객으로서 연극비평가인 동시에 선전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양극장에서 인기를 독점한 작품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林仙圭 作)나 <어머니의 힘>(李瑞求 作)과 같은 주로 기생을 여주인공으로 한 화류비련(花柳悲戀)과 가정비극의 멜로드라마였다. 홍해성(洪海星), 박진(朴珍), 안종화(安鍾和) 등이 주로 연출을 담당한 동양극장 레퍼토리에서 주요한 몇 작품을 들면 다음과 같다. 최독견 작 <승방비곡(僧房悲曲)> <여인애사> <춘향전> <단종애사>, 이서구 작 <어머니의 힘>과 <눈물>, 김건 작 <장화홍련전> <김옥균전>,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애원의 십자로>, 박진 각색의 <황진이> 등이 그것이다. 동양극장은 경영자인 홍순언이 죽고 미망인인 배구자가 운영하다가 경제난으로 1939년에는 최독견에게 운영권이 넘어가고 연기자의 일부도 탈퇴하여 아랑(阿娘)을 조직함으로써 동양극장의 전성기도 지났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광복 직전까지 상업극단의 아성이었으며, 연극전문극장의 존재 가능성과 연극의 기업화를 입증한 것, 월급제를 실시하여 배우들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심어준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연극연구소를 설치하여 신인을 양성,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베테랑을 극계와 영화계에서 활약하게 한 것 등은 동양극장의 공적이라 하겠다. 이처럼 동양극장은 1930-40년대 대중연극의 메카였으며 그 뒤 영화관으로 바뀌어 존속하다가 현재는 폐관되었다.

<柳 敏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