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파극/한국의 신파극〔서설〕

韓國-新派劇〔序說〕 한국 신파극의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으나 1911년 임성구(林聖九)의 조선신파혁신단(朝鮮新派革新團)이 어성좌(御成座)에서 가진 <불효천벌(不孝天罰)>이 본격적인 신파극의 효시(嚆矢)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3년 전인 1908년에 '신연극(新演劇)'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이것은 이인직(李人稙)이 창시한 것이다 당시 협률사(協律社)에서는 광대와 기생들의 판소리가 연희되었는데 이것을 연극이라 불렀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 왕래를 통해 일본의 신파극과 '신연극'이란 용어에 접할 수 있었던 이인직의 눈에 이러한 '광대와 기생들의 연극'은 몹시 어색하고 잘못된 것으로 느껴졌으며, 신문화와 개화사상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대적 배경도 작용하여, 이인직은 '연극개량(演劇改良)'을 뜻하게 되었고, 그 구체적인 시도로서 자신의 소설 <은세계(銀世界)>를 각색하여 광대와 기생들로 하여금 가극화(歌劇化)하게 했으며, 이것을 '신연극(新演劇)'이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이인직의 의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통한 것은 못 되었다. 이인직의 의도나 표방이야 어찌 되었든 후세에 와서 이인직의 <은세계>로써 신연극의 기원으로 삼는 견해도 있으나 이인직의 '연극개량'이나 '신연극'은 순수연극(純粹演劇)이 아니었으므로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없으며 이 문제에 대해선 좀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파극이란 원래 일본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발생했다는 '가부키(歌舞伎)'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구파극(舊派劇)으로 호칭하고 새로운 형태의 일상생활적인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 연극을 외국에서 받아들여 꾸며낸 극을 신파극이라 불렀다. 이 신파극이 새로 등장하자 일반민중은 '가부키'가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과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데에 염증을 느끼던 터에, 현실에 가까운 '신연극'에 쏠려 일본의 연예계는 신연극 일색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때의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승리하여 온통 전승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아래 일본의 신연극 단체들은 자의적이었든 혹은 위정자의 요구에 의해서든, 전승보고(戰勝報告)와 전사자(戰死者)의 영웅화를 테마로 한 신파극을 만들어 국민들을 달래었다. 이리하여 구극인 가부키에 상대되는 '신파극'이란 이름이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한국에는 광대와 기생이 부르는 '판소리'를 '연극'이라 일컬었을 뿐 진정한 연극이 없었고, 1908년 이인직이 표방한 '신연극'도 일본의 신파극의 아류(亞流)를 억지로 이식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을사년(乙巳年:1905年)을 전후하여 일인(日人)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전국 요지를 차지하고 정착하자 그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의 4·5류되는 신파극단들이 앞을 다투어 건너왔고, 일인들의 거류지를 찾아다니며 공연하였다. 물론 일인들은 신파극을 좋아하여 극장은 언제나 가득찼다. 그러나 이 신파극단은 일인촌(日人村)에 있던 극장에서만 공연하였으므로 신파극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인들은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처럼 한국의 연극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재한 일인(在韓日人)들의 신파극은 그 이면에서 한국 신파극이 싹트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본인 극장의 하나이던 '고토부키좌(壽座)'에는 '신발지기(下足番)'를 하는 (일설에서는 무대일이었다고 한다)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임성구(林聖九)란 사람이었다. 원래 그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어려서 천자문을 배웠을 뿐 별 학력이 없었으며 종현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성당) 뒷문 근처에서 맏형인 인구(仁九)와 과일장수를 하던 중 우연한 일로 '고토부키좌'에 취직을 한 것이다. 그는 일을 보면서 일본의 신파극을 등너머로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동지를 규합, 조선신파혁신단(朝鮮新派革新團)이란 극단을 조직하고 일본극장에서 보고 배운 신파극을 번안하여 무대에 올려 놓았다. 이것이 이인직의 '신연극'이 실패로 돌아간 지 3년 후인 1911년 가을의 일이었으며, 장소는 남대문 밖에 있는 어성좌(御成座)였다. 연제(演題)는 <불효천벌(不孝天罰)>이란 것으로 일본연극 <사지집념(蛇之執念)>을 번안한 것인데 경험도 없었을 뿐 더러 혁신단의 존재나 공연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첫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첫번 공연에 실패한 임성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1월에 '연흥사(延興社)'에서 <육혈포강도>란 레퍼토리로 2회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는 실패로 끝난 1회 공연과는 달리 대성황을 이루었고 흥행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그 후부터는 성황리에 공연이 계속되었으며, 레퍼토리는 수십 가지에 이르렀는데 혁신단의 이러한 성공은 바로 한국 신파극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국 연극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 <朴 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