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파극/신파극의 작가와 작품
신파극의 작가와 작품〔개설〕
편집新派劇-作家-作品〔槪說〕우리나라 신파극운동의 흐름을 보면 시대적 조건과 연극여건에 따라 그 성쇠(盛衰)의 굴곡이 발생으로부터 소멸까지 40여년 동안에 세 번 나타난다. 즉 1910년대의 초·중반과 1930년대 중·후반 그리고 광복 직후 1947-48년대이다.
1910년대에는 재래에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신파극이 처음 수입되어서 일어난 붐이었고 1930년대는 '동양극장(東洋劇場)'이 건립된 때문이었으며 광복 직후는 사회적 혼돈상태와 문화정책 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 우리나라 신파극은 일본 신파극을 직수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초창기 신파극은 언어만 달랐을 뿐 연극내용에서부터 무대장치·의상·소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극양식은 일본색 그대로였다.
처음 일본 신파극이 발전한 순서처럼 우리나라 신파극도 군사극(軍事劇)이 성했다. 일본인의 신파극을 그대로 우리나라 사정에 맞추어 옮겨놓고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했던 작품으로, <진중설(陣中雪)>을 위시하여 <군인구투(軍人仇鬪)> <충의 신천리마(忠義新千里馬)> <병사 반죄(兵士反罪)> 같은 것이 있었다. 내용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일본 군사극에서 패주(敗走)하는 적인 청나라와 러시아를 한국 신파극에서는 일본으로 대체 상징하여 일본을 매도하고 나라 잃은 비분강개를 무대를 통해서 풀어보려 했다.
최초의 신극단인 '혁신단(革新團)'은 사회의 요청도 있고 해서 권선징악(勸善懲惡), 풍속개량(風俗改良), 민지개발(民智開發), 진충갈력(盡忠竭力) 등의 표어를 내세웠고 처음에는 개화계몽이라는 커다란 시대의식 아래서 연극운동을 펴나가려 했다. '문수성(文秀星)'이나 '유일단(唯一團)' 등 1910년대 극단들도 어느 정도 그와 같은 의지를 가지려 한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연극내용은 개화계몽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발전해 갔다. 군사극이 쇠퇴하면서 <육혈포강도> 같은 탐정극(探偵劇)과 <우정 3인 병사(友情三人兵士)> 등과 같은 의리인정극(義理人情劇)이 많이 나왔지만 이상의 모든 것이 한데 얽힌 가정비극이 주가 되었다.
일본소설이 한국작가들에 의해 번안되고 신문에 연재되어 널리 읽히자, 이들을 신파극단들이 다투어 무대에 올리면서 가정비극류(流)의 신파극은 더욱 성해만 갔다. 조일제(趙一齊) 작 <장한몽(長恨夢)> <불여귀(不如歸)> <쌍옥루(雙玉淚)>, 이상협(李相協) 작 <재봉춘(再逢春)> <눈물> <상부련(想夫戀)>, 이해조(李海朝) 작 <봉선화(鳳仙花)> <비파성(琵琶聲)> 같은 것은 가정비극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소설 번안극 이외에 <송죽절(松竹節)> <수전노(守錢奴)> <가련처자(可憐妻子)> 등 의리와 인정, 살인과 복수, 애정과 증오가 뒤얽힌 가정비극이 대부분이었다. 즉 1910년대 신파극은 대부분이 헌신(獻身)의 강제, 의무에의 인종(人從), 따라서 자유와 자아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인간과 인간성을 부정하는 일체의 것에 체념과 비애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최루적(催淚的) 내용의 일본신파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한 것 그대로였다. 더구나 이것들을 유교적 전통윤리의 바탕 위에서 재구성했기 때문에 주제 내용이 거의 통속미와 봉건적인 의리인정의 비극으로서 전근대적인 유교 모랄을 긍정하여,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조선소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실제로 당시의 신파극단들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정비극소설인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심청전(沈淸傳)>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같은 작품을 즐겨 공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10년대의 신파극은 사상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조선소설보다 후퇴한 듯한 감이 있고 또 저속화되어, 기괴하고도 추악한 축첩(蓄妾)이라든가 인신매매(人身賣買), 고부간(姑婦間)의 갈등, 금전을 사이에 두고 한 부자 형제간의 상극(相剋), 반상(班常)의 대립 등이 살인과 은혜와 원수로 엉성하게 뒤얽힌 가정극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초기 신파극은 '신(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소설로 복귀하여 선악(善惡)의 대립만 드러냈고, 이 선악 문제는 가족 관계에 직결되는 것이며, 그것도 새로운 풍속개량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개화의 충격에 의한 구질서와 신질서의 갈등양상을 내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질서의 긍정적 인정으로 악의 징벌을 유발하는 부정적 측면을 가졌다고 하겠다.
따라서 1920년대에 들어와서 근대적 자각이 우리 민족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날 때 신파극은 발붙일 곳을 잃은 것이다. 무식하고 역사의식이 결여된 신파인들의 구태의연한 신파극은 대중의 관심을 전혀 끌 수 없었다. 그래서 개량신파를 들고 나온 이기세(李基世)의 '예술협회'나 윤백남의 '민중극단'은 창작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윤백남 작의 <운명(運命)>이라든가 이기세 작 <희망의 눈물> <눈오는 밤>, 김영보 작 <정치삼매(情癡三昧)> <시인의 가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20년대 초 개량 신파극단에 의해 공연된 창작희곡은 몇 되지는 않지만 근대의식을 담은 것으로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시대상을 반영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향은 본격적인 근대극의 발생에 자극받은 것이었고 또한 극히 일시적이었다.
20년대도 1910년대의 인기 레퍼토리가 조금 개량되어 다시 무대에 올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두드러진 신파 작가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되고 몇 개의 전속극단과 기타 많은 신파극단이 조직되어 신파극이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하자 전문적인 신파극 작가가 많이 등장했다. 이서구(李瑞求)를 위시하여 박진(朴珍), 이운방(李雲芳), 송영(宋影), 임선규(林仙圭), 김건(金健), 최독견(崔獨鵑), 김영수(金永壽), 박영호(朴英鎬) 등의 작가가 대량으로 데뷔했다.
1930년대 동양극장시대의 신파극의 주제를 살펴보면 사극(史劇), 즉 시대극(時代劇)과 가정비극, 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 등이 주조(主潮)를 이루었다. 1930년대의 신파극은 창작극이 아니면 이광수, 박종화 같은 현대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왜색을 완전히 탈피하였던 것이다. 사극은 <단종애사(端宗哀史)>와 같은 소설의 각색물과 <김옥균전(金玉均傳)> <황진이(黃眞伊)> 같은 역사상의 인물을 극화(劇化)한 것이 많았고 장안의 기생층이 고정 관객이었기 때문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나 <어머니의 힘> <비련초(悲戀草)>와 같은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가정비극이 많았으며 인기도 있었다. 1930년대 신파극에서 가정비극이 많았던 것은 1910년대와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것은 신파극이 갖고 있는 속성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광복 직후는 동양극장시대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역시 사극과 가정비극이 가장 많았고 사극은 주로 시대극으로서 독립투쟁사가 많이 극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애증(愛憎)과 금전이 얽힌 의리인정과 살인·복수의 홍루적(紅淚的)인 가정비극이 대부분이었으며, 괴기적(怪奇的)이며 허무맹랑한 내용의 유치한 극이 또한 많았다.
1940년대가 되자 일제의 연극 통제는 훨씬 획일화되었고 천일연극운동이 전개되는데, 대부분의 신파극단들이 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종래의 신파극은 정치적인 선전과 목적을 위한 멜로드라마로 변하였다.
연극인 대부분이 친일적인 연극운동에 가담하였으므로 광복 이후 민족진영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에 신파극마저도 무대에서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이리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더불어 세력을 크게 떨치던 신파극은 다시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늘날 신파극 자체는 없어졌으나 신파극에서 생겨난 신파조는 연극·영화·라디오드라마·코미디 등에 널리 스며들어 대중의 취향에 어우러지고 있다.
임성구
편집林聖九 (1887-1921)
한국 신파극 내지 신극운동을 처음 시작한 선구자. 188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별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청소년시대에는 형과 함께 과일상을 했으며 을사조약 이후 일본 이주민을 따라 들어온 일본 신파극단의 연극장에서 무대일 등을 거들면서 신파극을 배웠다. 1911년 초겨울에 김도산(金陶山), 김소랑(金小浪), 박창한(朴昌漢) 등과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였다. 임성구를 대표로 한 혁신단은 만 10년동안 수백회의 중앙공연과 지방공연을 했다. 남자를 여역(女役)에 대신시킨 이른바 여형(女形)도 그가 처음 시작했으며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눈물> <장한몽(長恨夢)> <불여귀(不如歸)> 등은 임성구의 혁신단이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 작품들이다. 임성구는 주색과 무절제한 생활로 인한 폐환(肺患)으로 1921년 11월 20일 34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이기세
편집李基世
신파극의 선구자. 개성 출신. 임성구(林聖九), 윤백남(尹白南), 이기세(李基世) 등은 신파극 초창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도쿄 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신연극을 실행할 목적으로 교토(京都)로 내려가서 당시 일본 신파극계의 9간부의 한 사람이며 교토 신파극의 거두(巨頭)였던 시즈마(靜間小次郞)의 문하에서 2년간 주로 남의 연극을 산기(算記)하여 오는 일을 맡아보며 연극공부를 하고 귀국했다. 1912년 안광익(安光翊), 김영근(金永根), 고수철(高秀喆) 등과 함께 신파극단인 유일단(唯一團)을 조직하였다. 한국사극의 세번째 극단인 유일단은 1914년까지 <처(妻)> <자기의 죄(罪)> 등 인기 레퍼토리를 상연했다. 유일단이 해산된 후 이기세는 1916년에 윤백남, 이범구(李範龜) 등과 함께 예성좌(藝星座)를 조직, 그 해 말 해산될 때까지 <카추샤> <쌍옥루(雙玉淚)> 등을 공연했다. 1919년에는 다시 조선문예단을 발족시켜 연쇄극(連鎖劇)을 상연했고 잠시 연극을 떠나 <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에 근무하다가, 1922년부터는 개량 신파극단인 예술협회(藝術協會)를 창단하여 <운명> <희망의 눈물> <눈오는 밤> 등 개량신파극을 공연했다. 이처럼 그는 1910년대 초부터 1920년대 말까지 많은 신파극단을 조직하여 이끈 신파운동의 큰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윤백남
편집尹白南 (1888-1954)
본명은 교중(敎重). 충남 공주(公州) 출신. 1904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1911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를 거쳐 1912년에 일재(一齋) 조중환(趙重桓)과 함께 한국에서 두번째로 신파극단 문수성(文秀星)을 조직, 1916년 해산될 때까지 임성구의 혁신단 신파보다 수준 높은 신파극을 하려고 노력했다. 문수성이 해체된 후 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창립하여 월간지 <예원(藝苑)>을 발간하는 한편, 이기세, 이범구 등과 극단 예성좌를 조직했다. 1917년에는 백남(白南) 프로덕션을 창립,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감독하여 영화계에 선구적인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또 한때는 경남 김해에 내려가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입사하여 <수호지>를 번역·연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大盜傳)>을 발표하였다. 1922년에는 개량신파극단인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주재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창립동인으로서 신극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편 야담사(野談社)를 경영하여 월간지 <野談>을 발간하는 동시에 직업적 야담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연극인·언론인·영화인·작가·야담가 등의 다면적인 마스크를 지닌 인물로서 근세에 드문 개화 계몽가였다.
이서구
편집李瑞求 (1899-1981)
언론인·극작가. 호는 고범(孤帆), 서울 출신.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중퇴한 그는 1920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사원으로 입사한 초창기 기자(記者)로서 훗날에는 <매일신보(每日申報)> 사회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연극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2년 토월회(土月會)가 발족될 당시에 동인으로 활약했고 1925년 토월회가 2기에 접어들면서 광무대(光武臺)를 전속극장으로 하여 전성기를 이룰 때 전무가 되었다. 그가 신파극을 처음 창작한 것은 1933년 태양극장(太陽劇場)에서 공연한 희극 <그는 왜 기절했는가>(1막)이다. 이후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전속극작가로서 많은 신파각본을 썼는데 대표작으로는 <어머니의 힘> <아들의 심판> <서광 삼천리(曙光三千里)> <익모초(益母草)> <장희빈> 등이 있고 각색극으로는 <눈물> <춘향전> 등이 전한다. 1940년 일제의 예술통제정책 아래서 결성된 조선연극협회의 회장과 극작가협회 회장을 지냈고, 광복 직후에는 한국 무대 예술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도산
편집金陶山 (1891-1922)
초창기 신파연극인. 본명은 진학(鎭學). 서울 출신.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졸업하고 1911년 혁신단이 발족될 당시 20세로 신파극계에 투신했다. 주로 신파배우로서 악역(惡役)으로 인기가 있었던 그는 1919년에 직접 신극좌(新劇座)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단성사(團成社)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연쇄극(連鎖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의적(義賊)> 등을 상연하였다. 이와 같이 20년대 초까지 신파극단을 이끌던 김도산은 1922년 자동차 사고로 불의에 목숨을 잃었다.
김소랑
편집金小浪
본명은 현(顯). 1911년 임성구, 김도산 등과 더불어 혁신단에 참가함으로써 처음으로 신극운동에 발을 들여 놓았다. 별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주로 연기자로서 활약이 컸고, 1918년에는 그의 주도 하에 경성구파배우조합내의 신파부개량단 배우 십여명이 중심이 되어 수십명의 배우를 규합하여 극단 취성좌(聚星座)를 조직하였다. 취성좌의 좌장(座長)이 된 김소랑은 부좌장격(副座長格)이었던 그의 아내 마호정(馬豪政)을 무대에 내세워서 우리나라 두번째의 여배우로 만들기도 했다. 김소랑은 그가 이끌던 취성좌가 해체된 1929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면서 1910년대 신파극을 20년대까지 계승하였다. 김소랑은 임성구, 윤백남, 이기세, 김도산 등과 더불어 1910년 신파극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다. 취성좌의 인기 레퍼토리는 <추월색(秋月色)> <사람의 원수> <선처(善妻)와 양녀(良女)> 등이다.
김춘광
편집金春光 (1901-1950)
본명은 조성(肇盛).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 무성영화시대(無聲映畵時代)에 우미관(優美館)의 주임 변사(主任辯士)로 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계에 투신한 김춘광은 <흥부전(興夫傳)> <춘향전(春香傳)> <비련(悲戀)의 곡(曲)> 등의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1937년에 신파극단 예원좌(藝苑座)를 조직하여 부민관(府民館)을 중심으로 <아리랑> <촌색시> <미륵왕자> 등을 공연했고, 부민관 연극경연대회에서 사극(史劇)으로 단체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해방 직후에 눈부셨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김춘광은 예원좌를 개편하여 청춘극장(靑春劇場)으로 개칭하고, 황금좌(黃金座)와 더불어 광복 후의 가장 대표적인 신파극단으로 군림하면서 1954년 해산될 때까지 70여회의 중앙공연을 하였다. 그는 신파극계에서 박승희(朴勝喜)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약 70여편의 창작극과 번안극을 썼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검사와 여선생> <3·1 운동과 김상옥(金相玉)사건> <안중근 사기(安重根史記)> <대원군> 등이다. 그 중에서도 <검사와 여선생>은 신파극의 명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장한몽
편집長恨夢
일재(一齋) 조중환(趙重桓) 작. 1913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혁신단에 의해 1913년에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오자키(尾崎紅葉)의 원작 <금색야차((金色夜叉)>를 조중환이 한국식으로 번안한 것이다. <금색야차>는 1898년 일본 신파극단에 의해 상연되어 신파 베스트 10의 제1위에 든 작품이었고, 우리나라에서 공연되었을 때도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남녀 주인공인 이수일(李守一), 심순애(沈順愛)의 이름은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으로 시작되는 주제가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많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장한몽>은 최근까지 수십번이나 연극과 영화대본으로 값지게 사용되었다.
<내용>
이수일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돌아간 아버지의 친구 심택(沈澤)의 집에서 그집 딸 심순애와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어버이들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은 약혼한다. 어느날 두 남녀는 서울 다방골의 부호인 김씨집으로 초대받아 갔다가 그곳에서 도쿄유학생인 그 집 아들 김중배(金重培)를 알게 되고 심순애는 김중배의 보석에 유혹된다. 심순애의 부모도 이수일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김중배와 결혼시킨다. 실연한 이수일은 그 집을 나와 금력에의 원한으로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심순애의 결혼생활도 죄책감과 이수일에 대한 애정 때문에 불행해지지만 이수일은 냉담하다. 고민하던 심순애는 비관하고 대동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우연히 이수일의 친구 백낙관에 의해 구출된다. 백낙관은 이수일에게 재회를 권하지만 이수일은 금전에만 몰두할 뿐 듣지 않는다. 그와 같은 이수일도 신경쇠약으로 휴양차 청량암에 머무는 동안 자살하려는 어느 남녀를 구출해주고 심경이 변한다. 한편 심순애는 친정으로 돌아와 이수일에 대한 연모의 정이 지나쳐 광증을 일으킨다. 백낙관의 중재로 이수일과 심순애는 결국 서로 과거를 뉘우치고 재회한다.
육혈포강도
편집六穴砲强盜
<육혈포강도>는 1912년 혁신단의 제2회 공연 레퍼토리로 무대에 올려졌던 1910년대의 대표적인 탐정신파극이다. 혁신단 대표 임성구의 작으로 되어 있으나 이 작품도 실은 1908년 8월 일본 신파극단이 경성의 가부키좌(歌舞伎座)와 경성좌(京城座)에서 공연한 바 있는 <피스톨 강도 시미즈(淸水定吉)>를 임성구가 번안한 것이다. 1910년대 탐정극의 주제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바탕으로 한 임무수행과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용>
어느날 대낮에 권총을 든 강도가 민가에 침입하여 많은 물품을 탈취해 간다. 그런데 그 권총강도는 변장술이 뛰어나고 신출귀몰하여 관내 서(署)의 노련한 형사들도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차에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한 신입순사가 목숨을 내걸고 강도 체포에 나서겠다고 경부에게 간청한다. 경부로부터는 물론 형사들의 조소를 받으면서 신입순사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권총강도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한 번은 권총강도를 만나 잡으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한 손에 총상만 입고 놓친다. 그러나 어느 달 밝은 밤 다리 밑에 숨어 지키던 신입순사는 장님으로 변장한 강도를 올가미로 묶는다. 두 사람은 격투를 벌이게 되고 신입순사는 강도의 권총 두 발을 맞고 죽는다. 곧이어 달려온 형사들에게 강도는 잡히게 된다. 이처럼 신입순사는 주민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권총강도를 잡아서 민폐를 덜고 순사의 책임을 다한다는 이야기이다.
검사와 여선생
편집檢事-女先生
<검사와 여선생>은 예원좌(藝苑座)와 청춘극장(靑春劇場)을 조직하고 수십편의 신파극본을 쓴 김춘광(金春光)의 대표작이다. 광복 전의 동양극장에서 공연하여 절찬을 받았고 광복 후에도 청춘극장에 의해 여러 번 상연되었으며 상연할 적마다 인기를 모았던 작품으로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내용>
어느날 밤중에 살인죄수가 형무소를 탈옥하여 주부 혼자만 있는 집에 피신한다. 탈옥수는 혼자 있는 주인 여자에게 외동딸 때문에 탈옥했다고 숨겨주기를 간청한다.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여인은 탈옥수를 그가 덮고 있던 이불에 숨겨준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체포된다. 나중에 출장갔던 남편이 돌아와 아내가 외간남자인 탈옥수와 간통했다고 아내를 구타하고 권총으로 위협하다가 오발되어 남편이 즉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살인과 간통죄로 구속당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담당검사가 그녀의 옛날 소학교 교원생활 때의 제자였다. 더구나 소학교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담당검사인 민장손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즉 민검사가 어렸을 적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병석에 있는 늙은 할머니를 돌보면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궁핍한 생활을 할 때 남달리 동정심이 많았던 여교사 양춘은 민장손을 딱하게 여겨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민장손은 그런 역경을 이길 수 있었고 후일 검사까지 될 수 있었다. 재판정에서 이와 같은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렇게 선량한 양춘이 살인을 할 수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받게 되어 모든 혐의가 풀리고 옛 스승과 옛날의 가난한 제자였던 검사는 눈물로 재회한다.
<柳 敏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