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미국의 현대극

미국의 현대극〔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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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現代劇〔槪說〕

미국연극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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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成長期

20세기 미국연극의 활력은 미국 연극을 지배해 오던 브로드웨이의 상업주의 연극에 반발하여 나온 젊고 실험적인 소극장들과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3)을 위시한 20년대의 높은 예술성을 지향하는 작가들에 의해서 나왔다. 1914년의 '워싱턴 플레이어스(The Washington Players)'와 1916년의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The Provinc­etown Players)'는 새로운 연극운동을 주도한 선구자들이며, '프로빈스타운'을 통해 등장한 오닐은 그 후 20세기 최고의 미국 작가로 성장했다.

그는 처음 바다를 소재로 한 사실주의적인 단막극(單幕劇)들로 출발하여 1920년부터 장막(長幕)을 쓰기 시작, 도합 4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그 동안 그의 '인간과 신(神)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추구와 연극형식에 대한 다양하고 대담한 실험은 오늘의 미국연극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

오닐과 더불어 등장한 하워드(Sindney Howard, 1891-1939), 라이스(Elmer Rice, 1892-1967), 앤더슨(Maxwell Anderson, 1888-1959), 배리(Philip Baarry, 1896-1949), 셔우드(Robert E.Sherwood, 1896-1955), 베어먼(S.N.Behrman, 1893-1973), 코프먼(George S.Kaufman, 1881-1961), 그린(Paul Green, 1894-1981) 등은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20년대는 브로드웨이에 극장 붐이 일어났고, 고든 크레이그와 아돌프 아피아의 개념이 무대를 개혁시켰으며 유럽의 연출자(자크 코포, 막스 라인하르트)와 극단(애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방문은 극계에 지대한 자극을 주었다. 당시 희곡의 일반적인 경향은 판에 박힌 유형적(類型的)인 인물만을 그려 오던 과거의 연극을 탈피, 성격 묘사에 심리적인 요소(특히 프로이트적인)를 도입한 것과 유럽의 표현주의파 작가의 소개로써 표현주의 운동(오닐, 라이스)을 일으킨 것이었다.

연극 팽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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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膨脹期

미국은 30년대에, 20년대의 호경기와는 반대로 경제공황에 부딪혀 전국에서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사회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젊고 급진적인 작가들은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말려들어, 물질주의와 사회의 부정을 규탄하고 내일의 희망을 외치는 데 몰두했는데,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었다. 좌경(左傾)작가와 극단의 등장은 한때 극계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듯도 했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 시기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오데츠(Clifford Odets, 1906-1963)를 제외하면 희곡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 거의 없다.

전 시대에 명성을 얻었던 선배 작가들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채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고, 사로얀(William Saroyan, 1908-81), 헬먼(Lillian Hellman, 1905-1984),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이 첫 희곡을 냈다.

30년대에 활약한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 1931-41)는 오데츠를 발견했고, 킹즐리(Sidney Kingsley, 1906-?), 로슨(John Howard Lawson, 1895-1977) 등의 작품을 공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극계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배출된 오손 웰스(Orson Welles, 1915-85)와 엘리아 카잔(Eliakazan, 1909-?)은 그 후 연극 영화 연출에서 대활약을 했다. 그리고 'F. T. P.'(Federal Theatre Project, 1935-39)는 연극인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정부지원 극단으로, 연극에 접하지 못한 많은 가난한 대중들에게 고전파 현대의 훌륭한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전후의 미국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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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美國演劇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연극은 주로 가벼운 오락물이나 반(反)나치극 또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연극들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 등장한 와일더(Thornton Wilder, 1897-1975)는 가장 독창적이고, 전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로서, 상당한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그의 작품은 미국 연극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44년 이후 미국연극계는 오닐의 복귀로 활기를 띠기 시작, 그의 전후 작품들이 공연되었고, 그가 죽고 난 뒤에 공연된 <밤으로의 긴 여행>은 그의 최대걸작으로 평가되었다.

44년 이후에 새로 등장한 두 명의 작가,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 1914-1985)와 밀러(Arthur Miller, 1915-)는 침체한 유럽 연극을 누르고 오히려 미국연극을 세계연극에 클로즈업시켰다. 윌리엄스는 남부를 배경으로 한 현실사회에서 좌절된 인간의 비극을 시적으로 그려갔는데, 특히 인물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밀러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에서 '평범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극을 통해 미국의 그릇된 가치와 물질문명의 실패를 고발했다.

그 밖에 50년대의 주목을 받은 작가로는 소시민의 좌절을 그린 인즈(William Inge, 1913-1973), 앤더슨(Robert Anderson, 1917- ), 맥컬러즈(Carson McCullers), 핸즈베리(Lorraine Hansberry, 1930-1965) 등인데, 핸즈베리는 흑인의 가정을 다루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새물결 속의 미국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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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

60년대를 전후해서 '브로드웨이'연극은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저조하기 이를데 없었다. 기성이건 신인이건 그들의 작품은 지루하고 피상적이며, 미국 사회의 병폐를 지적, 비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작비는 폭등하고, 그 결과 제작자는 예술과는 관계 없는 소위 '히트'할 작품만을 찾았다. 따라서, 외국의 전위작이나 재능있고 젊은 국내작가의 실험적인 작품은 전혀 외면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늦춰진 예술성을 되찾기 위해 50년대 말부터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는 불가결한 보완적(補完的) 역할과 평형추(平衡錘)적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오프 브로드웨이'가 베케트·이오네스코·주네 등을 소개하고, 고전을 새로운 각도로 부활시킨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연극에 뛰어난 역할을 담당할 독창적인 작가들과 극단들 ―― 올비(Edward Albee, 1928- ), 겔버(Jack Gelber, 1932- ), 리처드슨(Jack Richardson, 1935- ), 르로이 존스(LeRoi Jones, 1934- ), 시스게일(Murray Schisgal, 1926- ) 등과 베크 부부(Julian Beck, Judith Malina)의 '리빙 시어터'(Living Theatre), 오호간(Tom O'Horgan)의 '라 마마극단'(La Mama Experimental Theatre), 차이킨(Joseph Chaikin)의 '오픈 시어터'(Open Theatre), 셰크너(Richard Schechner)의 '퍼포먼스 그룹'(Peformance Group) 등 ―― 을 키운 것이었다. 이 중에 올비, 르로이 존스, 시스게일 등은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는데, 그로부터 '오프 브로드웨이'는 양쪽의 교량적인 역할을 넘어서서 준브로드웨이화(準 Boradway化)해 감을 면치 못했고, 이에 반발하여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가 최근에 반전통(反傳統), 반기성(反旣成) 혁명을 외치며 반이탤리(Jean-Claude van Itallie, 1936- ), 셰퍼드(Sam Shepard), 오언스(Rochelle Owens) 등을 출현시켰다. 한편, 뉴욕연극에 발랄한 신풍을 불어넣고 있는 사람은 프로듀서인 파프(Josph Papp, 1921- )이다. 그는 '뉴욕 셰익스피어 페스티벌'(New York Shakespeare Festival)을 창설, 57년부터 해마다 '센트럴파크'에서 셰익스피어극을 무료로 공연, 절찬을 받을 뿐 아니라 그의 '퍼블릭 시어터'(Public Theatre)는 신인의 등용문(登龍門)으로, 72년 '뉴욕극 평가상'을 받은 밀러(Jason Miller), '토니상'을 받은 레이브(David Rabe) 등 많은 신인 작가들을 배출했다.

<韓 相 喆>

미국 현대극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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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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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way-演劇

오늘날 미국처럼 연극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도 없다. 그러니만큼 미국의 연극은 개관적으로 파악하기도 매우 곤란한 일이어서 우선 그 중심지인 브로드웨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연극을 말하려면 우선 서울의 현황을 살피면 되고, 영국의 연극은 런던을, 프랑스는 파리를 고려에 넣으면 그 대세(大勢)를 전하는 데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연극을 생각할 경우는 무엇보다도 뉴욕의 연극 센터인 브로드웨이, 그것도 42번가 부근의 극장만을 논한다면 그것은 이미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1920년대의 최성기(最盛期)에는 약 100개에 가까운 극장이 있었고, 그 중 80개쯤이 매일 밤 흥행을 했다. 뮤지컬은 아직 그 초기단계에 있어서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회화극(會話劇)이 상연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상연할 극의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극장이 비는 때를 기다렸다가, 지방의 시연(試演)을 통하여 작품을 정리하고 연기를 세련시키는 프로덕션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브로드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의 연극을 전하는 것이 되며, 이곳에서 상연되지 않으면 연극활동의 1급품으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9년의 대공황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30년대의 프로퍼갠더적(的)연극이 사회적인 사정과 연결되어 왕성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가 자유를 되찾자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물결을 타고 브로드웨이의 땅값은 무척 비싸졌다. 1925년 이후 새로운 극장이 하나도 세워지지 못한 사실도 있고, 낡은 건물을 개장(改裝)은 했지만 스페이스가 늘지는 못했으며, 같은 극장의 임대료만이 몹시 올라, 이곳을 빌어서 하여야만 하는 브로드웨이의 연극활동은 그 채산을 맞추기가 매우 힘들었다.

미국연극과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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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組合

미국에서는 연극활동이 세부(細部)에 걸쳐 조합화(組合化)되어, 장치가와 대도구(大道具) 제작, 운반인(運搬人)과 대도구계(大道具系), 의상, 소도구(小道具) 등 모든 분야에 조합과 조합원과 조합 규정이 있어, 이에 대해서 전납예약금(全納豫約金)을 지급해야 하며, 배우가 교대로 소도구 등을 치우거나 하면 규약 위반으로 중대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작가·연출가·배우에게도 물론 조합이 있으며, 아무리 간편하게 싼 공연을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미국연극의 장기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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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長期興行

풍부한 도구, 최소한의 인원, 그리고 매력적인 내용으로 관객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희곡작품이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노동법상 1주 1회의 휴일이 배우업(俳優業)에 있어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이른바 장기흥행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인데, 토요일 외에 1일의 마티네(matinee)를 붙여 일요일을 쉬고, 1주 8회의 공연을 상식으로 하는, 스트레이트 플레이라고 불리는 회화극은, 수년 전만 해도 1백회 공연이 페이 라인으로 되어 있었다. 1천명을 표준으로 한 관객석을 가진 극장의 계산을 보면 10만명의 관객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관람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에 그 프로덕션의 수지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뮤지컬 계통의 프로덕션이고 보면 그 페이 라인은 투자액 관계로 1년이라는 계산이 나오며, 그 이상 계속하지 못하면 그 공연은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준은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으며 훨씬 초과되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미국의 연극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 관객 동원수가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체관객을 동원해 보아도 별 수 없으며, 결국은 그 내용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공연으로 3년이건 4년이건 철저하게 장기흥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런던의 예를 보면, 세계 최고의 장기흥행은 12년 동안이나 계속하는 것도 있으며, 브로드웨이에서의 장기흥행 기록은 <아버지와의 생활>로서, 3천 224회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결국 어느 만큼의 공간을 두었다가 재상연(再上演)을 하는 것은 매력이 없으며, 최초의 첫날부터 관객들과 철저하게 승부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연 예정일이 미리 정해져 있는 일반적인 공연방법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전혀 다른 입장에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오프 브로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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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roadway

오프 브로드웨이를 탄생케 한 것은 연극 현실의 엄격성을 말해 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방법(消防法) 기타에 의해 3백명 이하의 집회장은 극장법(劇場法)에 의하지 않고도 개설할 수 있어 매사가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다. 호텔의 로비를 개수(改修)하여 연극을 할 수도 있고, 계단을 올라가 2층 홀에 의젓한 극장명(劇場名)을 내걸고 연극을 할 수도 있다. 뉴욕의 배우조합에 소속하고 있는 남배우와 여배우의 수는 항상 수천명에 이르고 있다. 자세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게도 그 대부분은 실업배우(失業俳優)인 것이다. 이것은 프로덕션의 수가 줄어드는 반면 배우수는 늘어나며, 더욱이 그들의 대부분이 뉴욕을 가장 중요한 무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지방에는 가지 않는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을 하며 연극무대에 설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정확한 극장수를 알 수 없듯이 오프 브로드웨이의 극장수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넘쳐흐르는 배우들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일류배우나 연출가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즉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거나 외국극을 찾아 내거나 새로운 연출법을 시험해 보고 싶거나 하는 고전(古典)에서 전위(前衛)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연극을 하는 장소가 오프 브로드웨이의 발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또 그것이 실적을 올림에 따라 전체 미국 속에서 어떤 확고한 위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뉴욕이라는 곳은 식민시대부터 끝머리의 다운타운에서 차츰 진화(進化)되어 올라왔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번화기를 남겨 놓았으며, 현재는 이미 잊혀진 간이극장이나 상설극장 등이 남아 있고, 1920년대의 연극 최성기에도 이들 극장이 활용된 일이 때때로 있었다.

유태인가(猶太人街)의 그랜드 시어터라든가 그리니치 빌리지의 워싱턴 스퀘어 극장이라든가 14번가의 극장을 이용한 에바르 갈리엔느의 시빅 레퍼토리 극장 등은 연극사상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보다도 마차를 개량한 프로빈스타운 플레이 하우스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호칭으로 말하면 마땅히 오프 브로드웨이에 해당된다. 바로 이곳에서 유진 오닐의 연극이 발생하고 미국의 신극(新劇)이 생겨난 것이며, 이 미국의 신극이 미국의 상업연극, 브로드웨이 연극의 기반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전통연극이 브로드웨이의 통상작업(通常作業)이 되었고, 파생적으로 뮤지컬 등도 정착하게 되니 더욱 진보·전진을 요구하는 작가·배우·연출가가 실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오프 브로드웨이가 여러 형태로 활발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브로드웨이의 모방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것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함께 흑인의 천재적인 연극의 표현 능력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래와 동작과 목소리와 그 맛에 독특한 표현력을 갖는 흑인배우들은 오프 브로드웨이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아주 적절한 곳을 얻는 셈이다. 그들 흑인들이 주네의 <흑인들>을 상연한 것은 이 작품을 세계 최고의 것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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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Off Broadway

오프 브로드웨이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하고 그것에의 등용문으로 변한 것에 대한 반발로서 196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진 것이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연극이다. 오프 브로드웨이의 극장이 주로 그리니치 빌리지 서쪽에 산재하여 있는 데 반해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는 빌리지의 동쪽에 있다.

서쪽 빌리지가 오늘날에는 관광 코스가 되었고 상당히 속화하였으므로, 그곳에 살던 젊은 예술가들은 히피들과 함께 동쪽 빌리지로 이동하여 커피 하우스나 교회의 홀을 빌려서 무명들의 신인작품을 무명의 배우들이 상연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 공통되는 특징은 기성의 개념이나 질서에 대한 반발이며, 종래의 연극형식을 타파함으로써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목표로 하고 있다.

흑인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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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人演劇

미국 연극의 초기에 있어서 흑인은 희극적 역할로 등장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1830년대에 백인 코미디언 토머스 더트머스 라이스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들의 노래와 춤을 연기하는 '에티오피아 오페라'라고 이름붙인 예능을 고안해냈다. 백인 예능인에 의한 이런 종류의 연예가 발전하여서 니그로 민스트렐 쇼가 되었다. 니그로 민스트렐은 바이올린·밴조·캐스터네츠·탬버린을 사용하며, 익살스런 대사를 외고, 흑인의 노래와 춤, 촌극을 연기하는 쇼인데, 1850년에서 80년에 걸쳐 성행했다. 초기에는 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여 출연했으나 65년경부터 흑인들도 참가하게 되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과 같은 노예해방극, <그리피스 다베포오트 목사>(1899)와 같은 남북전쟁극은 흑인을 성실하게 다룬 최초의 연극이었다. 에드워드 쉘든의 <검둥이>(1910)는 현대사회에서의 흑인문제를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1910년 이후 버트 윌리엄스와 같은 특수한 재능을 가진 예능인이 개인적으로 지그펠드 포리즈의 뮤지컬에 출연한 적은 있으나 흑인·백인 혼합배역에 의해 뮤지컬이 상연된 것은 4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그 뒤 본격적인 연극에서도 흑인배우들이 인정받기 시작하여, <황제 존스>(1920)의 찰스 길빈, <녹색의 목장>(1930)의 리처드 해리슨, <흑인의 아들>(1941)의 캐너다 리, <오셀로>(1943)의 보올 로브슨, <위대한 백인의 희망>(1968)의 제임스 알 존스 등은 유명하다. 흑인극작가는 1959년 로런스 한즈베리의 <햇빛 속의 건포도>가 나오기까지는 브로드웨이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60년대에 와서 첨예화한 인종문제의 폭풍 속에서 르로이 존스의 <더치맨>(1965), 제임스 볼드윈의 <찰리를 위한 블루스>(1964), <아멘 코너>등이 발표되었다. 마틴 듀버맨의 <백색의 아메리카에서>(1964)는 흑인 300년의 슬픔의 역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뮤지컬이다.

미국의 지방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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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地方演劇

넓은 미국대륙에는 각 지방에 각기 대학이 산재(散在)하고, 거기에는 연극의 실제적인 행동을 체험하고 연구하며 창조해 나가려는 연극과가 있다. 이것은 미국의 최대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극장을 갖고 브로드웨이의 배우도 끼인 공연이 행해지는 경우도 가끔 있다. 전에 브로드웨이의 히트작(作)은 제2, 제3의 멤버를 갖추어 지방 순회 공연이 행하여지고 있었는데, 현재는 각 도시가 문화적 생활에 대한 의욕으로 극장을 갖고 있어서, 자신들 중에서 연극하는 사람들이 뛰어나와, 지방극단적인 색채가 짙은 실제적 연극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커뮤니티 시어터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지방도시의 자금원조도 왕성하고, 각 도시에 새롭고 특색 있는 극장이 마련되었으며, 작가와 연출가와 배우를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어 내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극이념을 세워 독자적인 연극활동으로 유명해진 곳도 매우 많다.

이들 커뮤니티 시어터를 제외하고는 미국연극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나라의 특질이며, 또 독자적인 생태라고 할 수 있다. 포드라든가 록펠러 재단은 이들 지방 문화활동에 대해 커다란 지원을 하고 있다. 설비에 대한 원조 등은 현저하며 가장 새로운 카드 시스템에 의한 조명효과의 조절설비, 즉 일단 장면 결정이 되면 적시(適時)에 조명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자동장치의 설비를 지방 커뮤니티 시어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극장 그 자체를 프로세니엄 아치 속에서 끌어내어 오픈 스테이지라든가 원형극장(圓形劇場)의 실제화가 활발히 행하여져, 연극형태 그 자체의 개혁에 도전하고 있는 것도 이 지방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형태에 순응하여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의 창작 또한 시도되고 있다.

미국의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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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닐,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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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O'Neill(1883-1953)

극작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대중의 우상이 되었던 배우 제임스 오닐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을 1년 다니다 선원이 되었고, 그 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폐결핵으로 반년 동안 요양을 하게 되자 독서에 열중하는 한편 극작을 시작했는데(1913) 그리스 비극과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았다. 요양원에서 나와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베이커 교수에게 극작을 배우고(1914-1915) 다음해인 1916년에 프로빈스타운에 있는 전위적인 극단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에 가담, 일막물(一幕物)을 발표하기 시작했다(1916-18). 이 작품들이 한데 묶여 출판된 것이 바로 유명한 (또는 <긴 귀향 항로>)로서 바다와 선원의 비정한 운명을 취급한 것들이다.

그의 최초의 장막희곡이며 극작가로서의 진정한 재능을 인정 받게 된 것은 <지평선 너머>(1920)로, 그 해 퓰리처 희곡상을 받았다. 오닐은 그 후에도 3회의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지평선 너머> 이후 오닐은 1934년까지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황제존스>(1920)―자기과신(自己過信)에 빠진 서인도의 한 섬의 황제가 흑인 원주민의 반란을 피해 도망가는 과정을 표현주의 수법으로 전개한 낭만적인 드라마, <안나 크리스티>(1921)―창녀라는 과거 때문에 버림받은 여인을 동정적으로 묘사한 자연주의 극. <털보 원숭이>(1922)―표현주의 계열의 상징극으로 동물적인 세계에도 정신적인 세계에도 다같이 소속될 수 없는 증기선 화부의 비극을 다루었다. <모든 신의 자식들은 날개를 가졌다>(1924)―흑인과 백인 여자와의 결혼을 다룬 심리적 사실극,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1924)―늙은 농부의 세번째 아내와 전처의 아들 간의 숙명적인 욕정(欲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극으로 긴박감이 넘치는 오닐의 원숙성을 보인 작품. <위대한 신(神) 브라운>(1926)―가면을 활용, 인간심리의 이중성을 탐구한 상징적인 실험극. <기이한 막간극(幕間劇)>(1928)―방백(傍白)과 독백(獨白)을 고도로 활용하여 인간의 미묘한 정신 과정을 파헤쳐 본 9막의 방대한 작품. <상복(喪服)이 어울리는 엘렉트라>(1931)―그리스의 오레스테아 비극을 모델로 한 야심적 3부작으로, 무대를 남북전쟁 후 뉴잉글랜드 지방의 구가(舊家)로 바꾸고 인과응보라는 개념을 현대의 생물학적·정신분석학 이론으로 풀이한 작품으로서, <오 황야>(1933)―<백만장자 마르코>(1928)가 거대한 부(富)에 대한 풍자희극이라면 이 작품은 그의 오랜 동안의 음울한 인생관으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가볍게 옛날을 회상하는 명랑한 희극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유일한 희극이다.

그 뒤 오닐은 극계를 떠났는데 그 12년 동안 그는 방대한 양의희곡을 썼다. 1946년 <빙상(氷商) 오다>(1939년 완성)가 공연되어 비평가의 주목을 받으면서 오닐의 붐은 다시 일기 시작했다. 이 극은, 인생에 패배한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파이프 드림(pipe dream)'이라는 내용을 담은, 매우 철학적인 작품이다. <사생아(私生兒)의 달>(1943년 완성, 1947년 공연)을 끝으로 오닐의 새 작품은 그가 죽고 난 뒤인 1956년 <밤으로의 긴 여로>(1941년 완성)가 공연될 때까지 한 편도 없었다. 이 희곡은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이지만 문학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희곡으로서 오닐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리바이벌 되는 작품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과거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는 주인공의 비극을 그린 <시인 기질>(1957년 공연)과 <더욱 장대한 맨션>(1963년 공연) 및 단막극 <후이>(Hughie)(1959년 출판)가 있다.

라이스, 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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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mer Rice(1892-1967)

본명은 Reizen­stein.

처녀작 <재판정(裁判廷)>은 영화의 플래시 백의 기교를 써서 흥행에 성공했지만, 기계문명에 시달린 제로씨(氏)의 생애를 표현주의적인 수법으로 쓴 <계산기>(1923)를 내놓을 때까지는 그리 뛰어난 작가가 아니었다. <거리의 정경(情景)>(1929), <변호사>(1931) 등은 리얼리스틱한 작품으로 뛰어나며, 전자는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다. 그 후에도 많은 작품을 썼는데, <꿈꾸는 처녀>(1945)는 크게 히트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환상극(幻想劇)이다. 1937년에 '극작가 극단'의 창설과 활동에 참여했고, 1960년에는 연극론집 를, 1964년에는 자서전 를 썼다.

앤더슨, 맥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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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well Anderson(1888-1959)

현대 시극(詩劇)의 주창자이며 그 실천가이다. 1924년 L. 스터링즈와의 공동작(共同作)으로 발표하여 히트한 제1차 세계대전을 취급한 희극 <영광이란 무엇인가>로 기자생활에서 극작가로 전환했다. <토요일의 어린이>(1927) 등의 사회극을 썼고, <엘리자베스 여왕>(1930) <스코틀랜드의 메리>(1933)부터 시극(詩劇)을 쓰기 시작, 역사적인 사건을 현대사회에 옮겨 겨우 강력한 무드를 조성시켜 갔는데 그 대표작품이 <윈터세트>(1935)이며, (1936), (1938), (1938) 등도 특색 있는 작품이다. 후기 작품 <별 속에 사라지다>(1950)는 패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쿠르트 바일의 음악을 빌어 뮤지컬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시극에의 노력과 결정(結晶)은 높이 평가되지만, 그것이 고전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남기지 못한 점은, 심각한 문제들을 단지 선과 악의 투쟁으로 단순화시킬 뿐 위대한 작품들이 갖는 복합성과 풍부함은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워드,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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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ney Howard(1891-1936)

캘리포니아 대학을 나온 후 하버드의 베이커 교수에게서 극작을 공부했다. 그의 첫 성공작은 희극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다>(1924)로서 영화화(映畵化)·뮤지컬화되기도 했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실버 코드>(1926)는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모성(母性) 콤플렉스'를 다루고 있는 문제극이다. 그 외 대표작으로 황열병(黃熱病) 퇴치를 묘사한 <옐로 잭>(1934)이 있다.

그린,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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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reen(1894-1981)

극작가인 동시에 교수로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노스캐롤라이나에 정주하고 있던 관계로 흑인 문제를 취급한 초기의 1막물에서 장막물(長幕物)로, 그리고 일반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브로드웨이 작품을, 그리고 후기에는 '심포닉 플레이'를 제창하여 미국의 역사적 사건을 그 현지에서 야외극(野外劇)으로 상연, 다수의 관객과 함께 다이내믹한 감명을 체험하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그의 대표작은 흑인 자녀의 교육문제를 다룬 <아브라함의 가슴에>(1926) 남부의 농촌을 소재로 한 <코넬리의 집>(1931), '심포닉 플레이'의 선구작 <조니 존슨>(1936)이다.

코넬리,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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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onnelly(1890-1980)

신문기자에서 작가로 전환하여 코프먼과의 공동희극 7편을 썼으며, 이 밖에도 여러 공동작이 있으나, 퓰리처상을 받은 <푸른 목장>(1930), 흑인의 민화적(民話的) 감각으로 성서(聖書)의 여러 사건을 취급한 민족희극의 작가로 유명하다.

배리,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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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Barry(1896-1949)

예일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의 연극과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상을 받은 처녀작 <당신과 나>(1923)가 그대로 브로드웨이의 히트작이 되어, 일약 당시의 문제작가로 등장했다. 그 후 인생희극·풍속희극 등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어 유행작가가 되었고, 철학적인 종교극도 몇 개 남겼으나 연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휴일>(1928), <필라델피아 이야기>(1939)가 대표적인 희극이며, <호텔 유니버스>(1930)가 그의 사상극을 대표하는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독자적인 연극기교에는 배울 만한 것이 많다.

베어먼, S.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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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N Behrman(1893-1973)

미국을 대표하는 희극작가로 특히 소피스티케이트한 터치의 가벼운 인생희극을 특색으로 한다. 1920년에서 1930년에 걸쳐 시어터 길드 극단의 행동이 활발해져, 이 나라의 무대표현이 확립되었을 때 가끔 이 작가의 작품이 활용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유성(流星)>(1929)에서 시작되어 <한순간>(1931), <자전(自傳)>(1932), <즐겨하는 술>(1936), <희극적인 때가 아니다>(1939) 등이며, 지로두의 <앙피트리옹 38>의 각색이나 조슈아 로간과의 공동작으로 파뇰 작품을 뮤지컬화(化)한 <화니>등의 명작도 남기고 있다. 엘리아 카잔이 링컨센터에서 활약해 줄 것을 요청받았을 때 창작을 의뢰받은 것은 아서 밀러와 그였다. 그 때의 작품은 <찰리, 누구를 위해서>(1964)였다.

셔우드, 로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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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Emmet Sherwood(1896-1955)저널리스트·영화비평가·극작가·시나리오 라이터 그리고 전시(戰時)에는 대통령실 정보관 등으로 다채로운 활약을 하였다. 사회역사에 대한 문명비평을 지닌 풍자극의 극작가인데, 어딘가 로맨티시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그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백치의 기쁨>(1936), <일리노이의 링컨>(1938), <밤은 없으리라>(1940) 세 작품은 모두 퓰리처상 수상작품이며, 그의 원숙한 기교와 사상을 남긴 대표작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는 그의 대본에 의한 것으로 이 밖에 영화 명작도 많다.

휴즈, 랭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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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ston Hughes(1902-1967)

그는 30년대의 사회의식에 눈뜬 경향적 운동 속에서 <스코츠보로 직행>(1932)을 남긴 극작가이다.

로슨, 존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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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Howard Lawson(1895-1977)재즈음악을 배경으로 탄갱의 파업을 표현주의적인 형식으로 그린 <행진>(1925)을 당시 융성기에 있었던 시어터 길드가 상연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미국의 경향적 극작가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30년대의 '그룹 극단'은 <성공 미담(成功美談)>(1932), <상류부인>(1934) 및 시어터 유니온이 상연된 <행진의 노래>(1937) 등이 있다. 그는 영화작가이기도 하여 이론서(理論書)도 많고, 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말츠,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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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Malz(1908-?)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 또다시 예일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에바 르 갈리엔의 시빅 극단에 참가하였고, 후에는 시어터 유니온의 창설자가 되어 사회적 선동극(煽動劇)을 개척했다. <지상의 평화>(1933)는 스클러와의 공동작인데, 극장 운동의 최초의 연출물이 되었다. 이 밖에 <블랙 피트>(1935) 등이 있다. 또한 소설도 쓰고 있는데, 근작(近作)으로는 <어느 정월의 이야기>(1964)가 있다.

웩슬리,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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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xley(1902-?)

유태 극단 출신으로, 30년대 사형수를 취급한 <최후의 발걸음>이나 스코츠보로 사건을 취급한 <그들을 죽게 하지 말라>(1933) 등의 강렬한 극작을 남기고 있다.

스클러,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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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klar(1908-?)

예일 대학 출신. 1936-41년에 극작가 조합의 임원(任員)·부회장을 역임했다. <미국인의 생과 사>(1939), 앨버트 말츠와의 공동작 <지상의 평화>가 있는데, 후에는 영화회사의 작가가 되었고, 그 후에는 소설을 썼다.

오데츠, 클리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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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fford Odets(1906-1963)

그의 생애에서 가장 화려하였던 시기는 초기의 그룹 시어터와 교류하고 있을 때였다. 30년대를 특질(特質)짓는 사회주의적 혹은 비판적인 작품태도는 택시의 파업을 신선한 영화적 수법으로 그려 낸 그의 처녀작 <레프티를 기다리며>(1935)란 단막물과, 유태인 노동자의 가족을 체호프를 연상케 하는 훌륭한 수법으로 그려낸 <술 깬 다음에 노래하라>(1925)란 장막물(長幕物)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작품 등은 하나의 에폭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골든 보이>(1937)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한 청년이 사랑과 음악가에의 야망을 버리고 권투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엮은 것인데, 후일 60년대에 뮤지컬화되어 흑인이 주역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에는 상업주의 연극 속에서 활약하여 <큰 나이프>(1949), <시골 여인>(1950) 등이 있고, 런던에서 상연된 일도 있으나 초기와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하였다. 한때 영화계에 있었던 실적을 남기고 있다.

킹즐리,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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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ney Kingsley(1906- ) 그는 30년대의 총아(寵兒)였다. 의사(醫師)라는 직업과 사생활과의 갈등을 취급한 처녀작 <백의(白衣)의 사람들>(1933), 뉴욕 슬럼가(街) 어린이들의 불량화의 필연성을 사회적 견지에서 묘출한 <데드 엔드>(1935)는 당시의 대표적 작품이다.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경찰 그 자체를 무대로 하여 신분을 다면적(多面的)으로 처리한 작품 <탐정이야기>(1949)나 케스트너의 소설을 각색한 <대낮의 암흑> 등의 작품이 있다. 최근작으로는 <밤의 생활>(1962)이 있지만 실패작이었다.

샤로얀,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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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iam Saroyan(1908-1981)

아르메니아계(系)의 미국 소설가·극작가. 소설로써 성공을 거둔 뒤 1939년 <내 마음은 고지(高地)에>로 극작을 시작했다. 물질적인 세상에서 시적(詩的) 정신을 노래한 긴 1막극이다. 사랑과 광명이 역경을 극복한다는 낙관적인 주제의 <생애의 한 시절>로 극작가로서 최고 명성을 얻었다. 그 밖에 낙관주의와 새로운 극작술을 훌륭히 종합한 <거기 누구 없소?>(1943), <동굴 속의 사람들>(1957)이 유명하다.

헬먼, 릴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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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ian Hellman(1905-1984)

남부 태생으로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인 아서 코바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오늘날의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처녀작은 <어린이의 시간>(1934)으로, 이상한 여아(女兒)의 성격, 여교원의 사생활에까지 손을 대어 여자학교의 내부를 그렸고, 그 후 남부의 가정을 무대로 한 대표작 <새끼 여우들>(1939) <숲 저 너머>(1946) <골방의 완구>(1960)는 그 강렬성과, 특히 여주인공의 성격묘사로 작가의 특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1941년 나치즘을 증오하는 프로퍼갠더적인 가정극 <라인강의 감시>도 유명하며, <가을의 정원>도 상류가정의 갭을 묘사하고, 미국인의 약점을 찌른 훌륭한 작품이다. 또한 프랑스의 아누이의 작품을 번안한 <종달새>도 유명하다.

윌리엄스, 테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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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nessee Williams(1914-1983)전후(戰後)를 대표하는 미국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적(詩的)인 대사 표현력은 극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무대상에 풍기는 데 있어 발군(拔群)의 힘을 갖는 작품이다. 한때는 모든 희곡이 윌리엄스조(調)로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할 정도였다. 여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절묘한 맛을 풍기고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감춰진 잔혹성과 같은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려내는 여성의 운명은 비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청년시대의 그는 학생, 방랑생활, 구두 세일즈맨 등 어수선한 생활을 했는데, 최초의 장편희곡 <천사들의 싸움>(1940)은 그룹 시어터가 채택하여 보스턴에서 시연(試演)까지 했으나 브로드웨이에서의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일에 손을 대어 지방극단을 위해 1막물 등을 쓴 후, 1945년에 상연된 <유리 동물원>의 대성공으로 일약 유명해졌다.남부를 배경으로 과거의 추억을 고수하는 어머니와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 불구의 처녀, 그리고 생활의욕에 불타는 청년의 꿈과 좌절을 그린 매우 시적(詩的)인 극이다.

대표작으로 유명한 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 <여름과 연기>(1948) <장미의 문신>(1951)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5) <하늘에서 내려온 오르페우스>(1957) <청춘의 달콤한 새>(1959) <이구아나의 밤>(1962) 등이 있고, 양상과 형태가 다른 작품으로는 <카미노 레알>(1953) <지난 여름 갑자기>(1958)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로테스크한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 근작으로는 <밀크 열차는 이제 이곳에 서지 않는다> <작은 배의 위험신호>(1972) 등이 있지만 과거의 빛은 사라진 듯하다.

밀러,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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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Miller(1915- )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로서 세계 펜클럽 회장을 지냈다. 사회악과 인간악과의 대결이 그로 하여금 희곡작품을 쓰게 하고 있으나, 인간성이 의존하는 곳과 죄의 자기발견이 철저하게 추구되고 있다. 그의 극작의 근저(根底)는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가 불타오를 때 그는 이를 철학적(哲學的)으로 처리하여 밀고 나가는 성격과 필력(筆力)을 갖고 있다. <행운을 잡은 사나이>(1944) <모두 내 아들>(1947) <세일즈맨의 죽음>(1948) <도가니(The Crucible)> <다리에서의 조망(眺望)>(1955) 등의 일련의 작품은 모두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후 잠시 쉰 다음 링컨 센터의 연극활동이 개시되자, 이곳에서 1964년 1월과 가을에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락(轉落) 이후>와 <비시에서 생긴 일>(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의 잔혹상을 묘사한 극)을 상연했다. 1968년 봄에는 <프라이스>가, 1972년 가을에는 <천지창조와 기타>가 상연되었지만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인즈,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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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am Inge(1913-1973)

텍사스주의 캔저스에서 태어난 그는, 시종

이 작은 마을의 인생을 온건한 터치로, 마치 미풍이 살랑거리듯이 그려내고 있다. 댈라스의 유명한 지방극단 '마고 존즈'를 위해서 쓴 <천국보다 더 저편>(1947)이 최초의 극작이며 그 이전에는 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50년의 <그리운 시바여, 돌아오라>가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과거에 사는 중년 여인과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남편의 가정생활을 온건하면서도 공포 분위기로 그려내어 그의 독특한 맛을 만끽하게 하였다. 다음 작품 <피크닉>(1953)은 시골 마을의 피크닉을 배경으로 젊은 처녀와 방랑자의 로맨스를 그려 퓰리처상을 받았다. 눈(雪)으로 막힌 시골 마을의 술집에서 무희(舞姬)와 카우보이가 서로 만나는 광경을 그린 <버스 정류장>(1955)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 후는 약간 슬럼프에 빠진 감이 있는데, 중견작가로서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이후의 작품으로 (1963)이 있다.

앤더슨, 로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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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Anderson(1917- )

하버드 출신으로 <레뷔>지(誌)의 스케치 등을 쓰고, 동성애의 학생을 취급한 <차(茶)와 동정(同情)>(1953)이 대표작이다. 그는 각 지방을 다니며 희곡작법을 강의한 교사적 역할로 유명한 사람이다. 4개의 1막물을 하나의 연출물로 만든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1967)로 호평을 얻었다.

와일더, 손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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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nton Wilder(1897-1975)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는 극작가로서도 독특한 지위를 굳히고 있다. <우리 마을>(1938), <위기일발>(1942)은 모두 퓰리처상을 수상한 희곡인데, 전자는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으며, 현재의 생(生)을 사후(死後)의 세계로 연결시키고 있다. 더욱이 무대장치가 없는 벌거벗은 무대에서 이를 연출하였고, 후자는 인류가 유사 이전(有史以前)부터 몇 차례의 위기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며 살아 나가는 장대한 내용을 코믹한 작가 특유의 필치로 밀고 나가는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 밖에 <결혼 중매>(1954) (뮤지컬의 걸작 <핼로 돌리>의 원본),에든버러 축제를 위해서 쓴 <태양 아래의 인생>(1955), 1막물을 모은 <브리카 가로(街路)를 위한 3개의 희곡>(1962) 등이 있다. 그 밖에 오베이의 <루크리스>의 번역 등도 있다.

해머스타인, 오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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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 Hammerstein(1895-1960)극장 지배인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그는 미국이 잊을 수 없는 극작가이며 작시가(作詩家)가 되었다. 즉 그는 미국의 독특한 뮤지컬이란 장르를 세운 사람이다.

초기에는 오페레타, 혹은 레뷔풍(風)의 작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몸부림쳤으나 당시의 <로즈 마리>(1924)라든가 제롬 컨의 <서니>(1925), <쇼 보트>(1927) 등의 공동작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의 공동작자로서 리처드 로저스와 손을 잡고, 비로소 미국의 민속 오페라를 발전시킨 연극적인 음악극 <오클라호마!>(1943)를 만들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뮤지컬이라는 것이 확립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바탕으로 삼은 희곡은 린 리그스의 <짙은 녹색의 라일락>인데, 원작의 잔잔한 양질(良質)의 향토극이 음악과 댄스를 얻어 다이내믹한 무대극이 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콤비는 꺾이지 않고 계속 명작을 엮어 놓았다. 그 외에 <회전목마>(1945), <남태평양>(1949), <왕과 나>(1951), <플라워 드럼 송>(1958),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이 있다.

시스게일, 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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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ray Schisgal(1926- )

1막물인 <타이피스트> <호랑이>(1964) 등에 이어, 현대인의 사랑과 생명을 꼬집은 장편 <사랑>을 썼다. 1963년 런던에서 초연(初演)했고, 1964년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올비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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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Albee(1928- ) 출생한 지 2주 뒤 올비가(家)에 입양되어 그의 이름을 얻었다. 트리니티 대학에 잠깐 다닌 후(1946-1947) 집을 떠나 여러 가지 생업에 종사하면서 시와 소설을 써 보았다. 최초의 단막극 <동물원 이야기>가 독일(1959)과 오프 브로드웨이(1960)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폭력이 커뮤니케이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이 작품은 베케트와 부조리 연극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한데 감동적인 우화(寓話)와 신랄한 대사는 올비 특유의 것임이 분명하다. 이어서 교통사고로 죽은 흑인 블루스 가수 베시 스미스를 다룬 <베시 스미스의 죽음>(1960), 미국인의 생활을 통렬하게 풍자한 <미국의 꿈>(1961), 그 밖에 <모래상자>(1960) 등이 계속 나왔다.

올비의 명성을 확고부동하게 해 준 작품은 그의 첫 장막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로서, 전후 미국연극의 최대 수확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교수 부부의 애증(愛憎)의 심리를 묘사하여 현대 미국의 중년 부부 생활의 허위와 진실을 파헤치고 있는데 특히 대사의 박진성과 통렬함이 놀랍다. 그 후 <작은 앨리스>(1964), <맬콤> 등 전만 못한 작품을 내놓다가 <미묘한 균형>(1966)으로써 어느 정도 명성도 회복했다.

두 친구의 뜻밖의 방문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한 가정을 그린 작품이다. 최근작으로는 <상자> 등이 있는데 매우 실험적인 단막극이다. 그 외 카즌 맥컬러즈의 소설을 각색한 <슬픈 카페의 노래>가 있다.

겔버,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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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Gelber(1932- ) 1950-1960년대 오프 브로드웨이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의 한 사람으로, 일리노이 대학을 졸업한 뒤 첫 희곡 <코넥션>(1959)이 '리빙 시어터'에 의해 공연됨으로써 작가와 극단이 다같이 유명해졌다. 약을 기다리는 마약환자 집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주제의 부조리성과 디테일에 있어 무지비할 정도의 자연주의 스타일로 관객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사과>(1961)는 좌절과 폭력으로 물든 혼란되고 부조리한 세상을 그렸으며, <겉으로는 스퀘어(Square)>(1965)는 화가가 되고 싶은 학교 선생의 좌절을 다루고 있다.

반 이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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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Claude van Itallie(1936- ) 벨기에에서 태어나 4세 때 미국으로 이주,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 조셉 차이킨의 '오픈 시어터'의 상임 극작가로 있으면서 주로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했다. 그의 최초의 뉴욕 공연은 <전쟁>(1965)이었고 두번째는 <아메리카 만세>(1966)인데 이 공연으로 반 이탤리는 일약 새로운 극작가의 기수가 되었다. 3개의 단막(<인터뷰> <TV> <모텔>)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TV와 인체인형(人體人形)을 사용한 특수한 형식으로, 오늘의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의 최근 히트작은 역시 차이킨의 연출에 의해 미국 전위극의 최상이라는 평을 받은 <뱀>(1969)으로서 새로운 연극이 지향하는 종교의식으로서의 복귀를 보여 주고 있다.

코피트,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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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Kopit(1938- )

하버드 대학을 다니며 많은 작품을 썼고, 그 중의 하나가 <오오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엄마가 아버지를 골방에 매달아 놓아 나는 슬퍼요>(1961)로서,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지나치게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와, 그 때문에 억눌린 아들이 반항을 하지만 실패하는 이야기로, 이오네스코의 영향을 받은 부조리극이다. 코피트의 명성을 더해 준 <인디언>(1971)은 미국인의 건망증과 전설의 내용이 사실과 다를 때 오는 위험성을 탐구했다.

사이먼,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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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l Simon(1927- ) 뉴욕 대학을 나온 후 TV작가로 활약하다가 최초의 브로드웨이극 <나팔을 불어라>(1961)로 데뷔하면서부터 현재 미국 상업극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히트 작품들은 모두 미국인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희극들로서 한 시즌에 4개의 작품이 동시에 히트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그는 미국연극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가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기이한 부부>(1965), <공원에서 맨발로>(1963), <성조기를 두른 소녀>(1966), <프라자 호텔>(1968), <최후의 불같은 연인>(1970), <선샤인 보이스>(1972) 등이 있다.

핸즈베리, 로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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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raine Hansberry(1930-1965)위스콘신 대학을 다니다 1950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주한 후 <햇볕 속의 건포도>(1958)로 '뉴욕극평가상'을 받았다. 흑인 가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대표작이다. 다음 <시드니 블루스틴 상점 유리창의 표지>(1964)는 유태인 지식인을 다루었다.

레이브, 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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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Rabe(1940- )

빌라노라 대학의 극작교수로 있으면서 <파블로 허믈의 기초훈련>(1970), <뼈다귀와 시체들>(1971)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조셉 파프의 '퍼블릭 시어터'의 공연인데 <파블로 허믈>은 표현주의의 환상적 터치로 군대사회를 공격한 작품이며 후자는 월남전에 종군한 한 군인의 눈에 비친 미국사회를 파헤친 작품이다.

존즈, 르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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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oy Jones(1934- )

훌륭한 문장가로서 (1964) <노예선>(1964) 등의 작품이 있다.

볼드윈,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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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aldwin(1924-1987)

<백인에의 블루스>(1964) 등의 작품이 있다.

보크, 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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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ry Bock(1928- )

하닉 셸던(Harnick Sheldon, 1924- )과의 콤비가 가장 유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피오렐로>(1959) <저 처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1963), <지붕 위의 바이올린 주자>(1964) 등이 있다.

미국의 극단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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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연극의 프로듀서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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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producer system현재 미국 연극활동의 주체는 프로듀서 시스템이며, 60년대 후반부터 지방의 극단활동과 함께 중앙의 브로드웨이 부근에서도 극단조직에 의한 연극활동, 그리고 레퍼토리 시스템에 의한 활동도 점차로 많아지고 있다.

프로듀서 시스템이란 하나의 연극흥행을 한 개인의 프로듀서의 책임 밑에 행하는 것으로, 상연 각본의 선정으로부터 극작가·연출가·배우 그 밖의 스탭을 계약할 뿐만 아니라 연습과 극장 사용비용을 책임지며, 선전광고와 표의 대리점과의 처리 등 일체의 일을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배우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오디션도 행하며, 뮤지컬의 경우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일단 만들어진 음악과 노래등을 클럽에서 공개하여 들려준 다음에, 그곳에 모인 투자 기능자들에게 돈을 출자하게 하는 교섭까지도 맡는다. 개장(開場) 전에 최저비용이 6만 달러는 있어야 한다는 흥행의 조직체는 아무래도 일종의 도박적인 성질을 띠기 쉬우므로 좋은 작품을 상연한다는 것은 정해져 있으나 그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듀서는 한 사람이 원칙인데, 물론 극작가의 모임인 'Playwrights Company'와 같은 조직체도 많다. 그러나 프로듀서가 해야 할 최대의 일은 어떻게 해서 질 좋고 신선(新鮮)하며 기호에 맞는 상연각본을 발굴하느냐 하는 데 있다. 사무실을 두고, 각본을 읽어 줄 사람들을 채용하여, 국내는 물론 에이전트나 작가의 대행기관에서 인쇄된 대본을 보내어 오면 이것을 검토할 뿐 아니라, 지방연극의 실체(實體)를 파악하여 뉴스의 실체를 잡고, 해외에도 눈길을 돌려, 국제전화를 쉴새 없이 활용하는 것이 프로듀서의 일상적인 일이다.

상연작품이 결정되면 연출가를 정하고 계약을 끝내어 실제활동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인데, 거기에는 일정한 약속과 계약의 형식이 있어, 대개 그 연극이 히트가 되어, 1년을 넘을 경우에는 재계약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의 시즌이 7월말쯤 해서 끝나기 때문에 캐스트가 그 무렵에 바뀌는 경우가 많으며, 9월부터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어, 하계 상연이 있게 되면 대체로 출연자의 교체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유럽식(式) 극단 조직에서는 1주일에 몇 개의 작품을 교대로 상연하며, 평이 좋은 작품은 남겨 두고, 또한 상연이 예정되어 있는 작품으로 공백을 메워 나가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한 시즌에 어떤 작품을 몇 개 상연할 것인가의 예정표를 만들고, 이 시즌에 출연할 배우도 미리 정해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조직에 있어서도 그 대부분의 사람은 1년 계약이며, 그 운영을 맡는 이사(理事) 이외에는 모두 이동되거나 재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미국 최대의 프로듀서로 지목되는 사람은 데이빗 메리크인데, 그는 영국의 연극을 계속 브로드웨이로 수입하여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연극은 일종의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의 요구로 그의 경력은 발표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한 데이터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극단과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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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劇團-劇場

미국의 극단조직은 지방의 커뮤니티 시어터로 시작하는데 그 역사는 오래 되었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학 안에서의 실험연극이 1912년 하버드 대학의 베이커 교수의 '워크 숍 47'에서 행하여진 것에 자극되어, 유진 오닐과 같은 작가가 나와 소극장 운동(小劇場運動)이 전개되게 된 것이다.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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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vincetown Players

1916년 여름 북부 프로빈스타운에서 처음 시작하여 뉴욕의 아랫마을인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마차간을 개수(改修)하여 극장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옮긴 후,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미국의 극작가, 특히 유진 오닐의 작품을 계속 상연하여 큰 공적을 남긴 것이 바로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즈이다. 여기에서 히트한 작품은 보다 큰 극장으로 옮겨져서,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과 같이 브로드웨이의 한복판에서 공연되고, 몇 년 동안 장기흥행을 계속한 실적을 보인 것들은 미국연극 그 자체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워싱턴 스퀘어 플레이어즈(시어터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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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Square Players(Theatre Guild)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와 병행하여, 역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1915년에 미국 작가를 주체(主體)로 해서 탄생한 워싱턴 스퀘어 플레이어스가 있으며, 이것이 영국 작가인 버나드 쇼와 맺어져, <메듀셀러로 돌아가라>라든가, <성녀 존>의 초연을 행하여 세계적인 뜻을 갖는 작업을 성취한 것이다. 1918년에는 이것이 시어터 길드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어 특히 20년대에 큰 활약을 하였다.

영국이 영어라는 언어를 가진 것이 미국에서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영국극은 당시의 첨단을 달리는 1급품이었다. 그러한 좋은 작품을 번역이라는 그야말로 귀찮고 불가해하고 불유쾌한 작업을 통하지 않고, 직접 무대에 무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빠른 진보를 가져오고, 연극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별로 전통이 오래지 않은 미국의 연극이 착실하게 일반연극 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번역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아일랜드계(系)의 배우가 이 나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실도 그 요인으로

생각해야 하겠지만, 신극운동 즉 근대극이 지난날의 이른바 '웰 메이드'극(劇)을 대신하여 재빨리 연극의 주류(主流)가 된 사실에는 정말 놀라운 것이 있다. 길드 시어터의 활동을 보면 당시의 선진문화국의 진보적인 연극활동의 흡수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표현파에서 시작, 모르나르극으로, 그리고 웰펠을 상연하는 등 그 활약이 대단했는데, 다만 흠이 있었다면 지나치게 연극의 표현기술에만 중점을 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20년대의 말기에 길드가 당시 미국 최대의 극작가인 유진 오닐의 신작을 상연함에 이르러, 작품과 실제행동이 밀착하여 미국 연극은 완성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30년대의 사상적 변동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 때의 길드는 내부 청년들의 요망에 응하고, 이를 지원하여 그룹 시어터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그룹 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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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Theatre

이 극단에는 길드가 아끼는 청년배우 프란초트 톤이 있었다. 그들은 여름철에 합숙을 해 가며 프랑스에 있었던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서 배웠다. 이 시스템을 기본으로 하여 배우술(俳優術)의 재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극단활동의 기금을 만들기 위해 프란초트 톤은 할리우드의 영화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오프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룹 시어터는 미국의 새로운 의욕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배우집단이었으나 그 중에서 작가로는 오데츠가 나오고, 연출가로는 해럴드 클러먼, 그 제자로 엘리아 카잔, 더욱이 연기교사로서 유능한 리 스트라스버그 등, 그 후의 미국 연극에 있어 중요한 뜻을 갖는 인물들이 여기에서 그 실전(實戰)의 터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어터 길드에는 비록 늙기는 했으나 무대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지니고, 특색있는 최고급의 연기를 보인 알프렛 런트와 린 폰테인 부처가 출연하였다. 그리고 길드 그 자체는 프로듀서적인 일을 주체로 하게 되었다. 그룹 시어터는 오늘날의 연출가들을 많이 배출한 셈이다.

1929년의 페닉스 이후로는 사회주의를 근간(根幹)으로 한 조합연극의 활약이 눈에 띄고, 시어터 유니온, 페드럴 시어터와 같은 극단 활동이 당시의 특질을 보여 주었다.

리빙 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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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ving Theatre

줄리안 베크와 그의 부인이며 여배우인 주디스 마리너에 의해 1947년 오프 브로드웨이 레퍼토리 극단으로 창단되어 새롭고 실험적인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1951년 그들의 극장에서 겔버의 <코넥션>을 공연(1959), 큰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대표적인 공연으로는 <영창>(케네디 브라운 작), <프랑켄시타인> <파라다이스 나무> 등인데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과 철학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물의를 일으켰다. 현재는 재정난과 부부의 감금(남미 공연 때)으로 활동을 못하고 있다.

미국연극의 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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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新時代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 태세로 들어가면서부터 프로듀서의 움직임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정세 밑에서 통제적인 정책이 이 세계에도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장기체류하게 된 군인들에 대한 위문을 하였고, 미국의 문화활동을 세계에 침투시킨다는 뜻도 있고 해서, 연극 관계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여러 곳에서 연극행동을 체험할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전후의 한 시기는 엘리아 카잔, 아서 밀러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미국 연극의 정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면에 있어서도 이 세 작가의 활동 앞에서는 다른 소설가들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1940년대에서 50년대에 걸쳐, 특히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연극의 초점이 뮤지컬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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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musical

뮤지컬은 미국 연극이 낳은 산물이다. 그 전까지도 대사(臺詞)를 통해 연극을 파악해야 했으므로 선택된 관객을 필요로 했는데, 연극 그 자체를 일반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게 한 뮤지컬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취급되는 기본적인 재료는 그 대부분이 과거의 희곡작품이었다. 즉 20년대나 30년대에 쓰여진 희곡작품이 뮤지컬 형식으로 재상연되는 것이다.

그 시초는 시어터 길드가 20년대에 프란초트 주연으로 상연한 린 리그스의 <짙은 녹색의 라일락>을 <오클라호마!>라는 작품으로 만들어 길드 자신이 프로듀서가 되어 상연한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도 길드의 역할은 매우 중요성을 띠게 되는데, 미국의 연극 전체를 고려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는 매우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였다.

모르나르의 <릴리옴>이 <커라우젤>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키스 미 케이트>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변하고, 버나드 쇼 작품은 어느 사이에 <마이 페어 레이디>로, 손턴 와일더의 작품은 <핼로 돌리>로, 그리고 오데츠, 릴리언 헬먼, 유진 오닐의 일련의 작품들은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여 상연되었던 것이다. 즉 지난날의 무대극이 영화화된 것과 마찬가지 뜻에서 뮤지컬화(化)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상연 횟수는 2천 717회이다. 그러나 최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전전·전후에 걸쳐 획기적인 장기흥행을 계속한 린제이와 클라우스의 가정 코미디 <아버지와의 생활>로서, 3천 224회로 되어 있다. 500회 이상의 공연기록을 세운 작품은 약 250개 정도이다.

세계의 장기흥행 기록을 보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런던의 <쥐덫>(크리스티 작품)으로, 1952년 초연 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연극의 상연 횟수로 보면 <햄릿>을 따를 수는 없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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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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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俳優

미국의 배우는 특질을 갖고 있으나, 엄청나게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배우는 없다. 그것은 수준이 고르다는 반증도 된다. 또한 프로듀서 시스템의 활동이 활발하고 장기흥행이 이루어지는 여건 밑에 있기 때문에 배우가 다각적인 배우술을 익혀야 하며, 유럽의 레퍼토리 시스템에 의한 극단행동과 같은 기회를 얻기가 힘들어 좀처럼 개인적이고 두드러진 연기를 보일 수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다.

어떤 프로덕션에 출연 기회를 얻어, 다행히 그 배역을 맡게 되고, 게다가 그 공연이 히트하여 장기흥행에 들어가게 되면, 그 배우는 배역된 역만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리 유망한 배우라 해도 한 공연에서 3-4마디의 대사를 말하는 역을 맡는다면 생활에 곤란을 받지는 않는다 해도, 배우로서의 생활에는 일종의 갭이 생길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헤이스, 헬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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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 Hayes(1900-1976)

1909년 <늙은 네덜란드인(Old Dutch)>이라는 뮤지컬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그녀는 1918년 제임스 베리 경의 <디어 브르터스>에서 비평가의 주목을 끌었으며, 그 후 많은 연극에 쉬지 않고 출연하였다. 1920년경부터 어른 역을 맡기 시작하여 1922년 <부인들에게(To the Ladies)>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의 대표적 여배우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그녀에게 최대의 성공을 안겨다 준 것은 1935년 로렌스 하우즈만 작 <빅토리아 여왕>에서의 여왕역이었다. 그 후 길거드 연출의 <유리동물원>, 장 아누이의 <기억되는 시절>, 유진 오닐의 <시인기질> 등 세계적인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에 출연했다.

액터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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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ors Studio

배우의 부진을 염려하여 유망한 배우를 모아 자기훈련과 어드바이스를 주려고 하는 구상이 안출(案出)되었는데 이것이 액터스 스튜디오이다. 엘리아 카잔과 리 스트라스버그가 주최하고 어느 재단(財團)이 스폰서로 되어 있는데, 한때는 매우 활발하여 줄리 해리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그리고 영화나 무대에서 이렇다 할 만한 배우는 모두 이곳을 거친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주최자의 한 사람이었던 카잔이 영화사업에 바빠지고, 게다가 링컨 센터에 관계하게 되자 양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고, 요즈음은 스트라스버그가 혼자서 책임을 지고 이 명칭을 그대로 극단으로 하여 연극의 실제적인 활동에 임하고 있다.

링컨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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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coln Center

링컨 센터란 뉴욕의 링컨 광장에 록펠러 재단의 주최로 기금을 마련, 오페라·음악·뮤지컬·연극 등의 각 극장을 한 곳에 모아 공연예술(公演藝術)의 센터로 기획한 것이다. 현재로는 모든 건물이 완전히 세워져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1962년 이 무렵에 연극 부문을 맡은 것이 프로듀서인 화이트 헤드와 연출가인 카잔이었다. 그 당시 이 두 사람은 극장건물의 건립이 부진한 것을 기다릴 수가 없어 뉴욕 대학의 부지(敷地)에 ANTA(American national Theatre and Academy, 全美國演劇協會)의 지원을 얻어 간이 극장을 만들고, 배우를 모아 훈련을 시킨 다음, 1963년부터 연습으로 들어가, 1964년 1월부터는 레퍼토리를 정하여 실제적인 행동으로 들어갔다. 1964년 가을 제2기 시즌에 들어간 후에 이사진과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생겨, 두 사람은 파면되고 말았다. 전 미국의 열렬한 박수갈채와 기대 속에 막을 올렸던 이 장거(壯擧)도 이리하여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던 중에 본거지인 센터에 보먼트 시어터가 건립되어, 1층의 본극장(本劇場)과 지하의 시연극장(試演劇場)을 활용하기 위해서 이사진은 샌프란시스코의 소극장에서 실험연극으로 주목을 끌고 있던 하버트 블라우와 줄즈 어빙을 끌어 들여 자유로운 연극을 실험하게 하였다. 유럽의 고전작품 및 롤카 등도 상연해 보았으나 뉴욕의 메이저 리그에서는 통용되지 못하였다. 그 후로는 방침을 바꾸어 뛰어난 미국의 작품을 자유배역(自由配役)으로 상연하고, 릴리언 헬먼의 <새끼 여우들>을 안 밴크로프트 주연으로 공연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 앞으로 이 극장의 운영이 어찌될 것인지의

결과는 미국 연극을 좌우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APA와 미국연극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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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演劇-現況

현재 미국에 있어 중요시되는 것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 대학에서 매년 천명 가까운 수의 연극과 졸업생들이 불타는 의욕을 가지고 배출되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학생시대부터 브로드웨이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좋은 극장을 갖고, 중앙의 직업배우들과도 교류를 가지며 실기(實技)를 익혀온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선생이 되는 자, 영화나 텔레비전계(系)로 진출하는 자, 직업극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중앙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배우, 그리고 기술자 또는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는 일이다.

이러한 요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마련된 조직이 바로 APA(Association of Producing Artists)로서, 오프 브로드웨이의 페닉스 시어터의 프로듀서인 T. E. 함블톤과 노리스 호톤이 손을 잡고 중앙의 직업인과 대학을 연결시킨 것이다. 오늘날 'APA-Phoenix'라고 불리게 된 것은 1966년 브로드웨이의 한복판, 45번가의 라이삼 극장에 근거를 두고 공연을 시작한 후부터이다. 1주에 3일, 20년대의 작품인 조지 케리의 <자랑거리>가 미국 최대의 여배우 헬렌 헤이즈의 주연으로 상연되어 놀라운 호평을 얻었고, 그 낡았다고 생각되었던 작품이 오늘날 다시 부활되어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이 극장의 질(質)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국적인 활동을 지원하고 실행을 용이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은 전미국연극협회(ANTA)와 배우조합의 조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유능한 연출가인 엘리스 랩(Ellis Rabb) 등이 배출되었다.

영국의 경우 극계의 현황이 매우 활발하여 배우·연출가·작가가 점차 젊은 세대로 옮겨지고 있는 것은 대학출신자와 지방극단출신자를 중앙으로 연결시키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며, 한편 이곳으로 정부자금이 투입되는데, 미국에서는 민간자금을 모아 이것이 실행에 옮겨지고, 특히 지방연극의 직업적 활동이 활발해지는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타이론 거들리극장, 워싱턴의 아리나(원형)극장, 댈러스의 댈러스 시어터 센터, 시카고의 굿맨 메모리얼 시어터, 보스턴의 시어터 컴퍼니, 클리블랜드의 유클릿 77극장, 휴스턴의 알리 시어터, 로스앤젤레스의 센터 시어터 그룹, 프린스턴의 맥카터 시어터, 샌프란시스코의 아메리칸 콘서버토리 시어터, 시애틀의 시애틀 레퍼토리 시어터 등 시즌마다 많은 작품을 상연해 그 활동이 매우 현저한 여러 극장이 있으며, 한편 직업배우들의 연간 계약출연으로 레벨이 아주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