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동유럽 여러 국가의 현대극

폴란드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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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nd-現代劇

폴란드의 현대극은 1863년의 폭동이 실패로 끝난 뒤, 바르샤바의 지성인과 문인들이 중심이 된 '영 폴란드'(Young Poland)운동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 운동은 1890년에서 1914년까지 절정에 이르러, 모든 예술의 꽃을 피움으로써 폴란드 문화사에 가장 빛나는 시대를 가져왔다. 이 기간 중에 연극의 일반적인 경향은 사회와 인간심리를 탐구한 자폴스카(G. Zapolska, 1860-1921), 리트너(T. Rittner, 1873-1921), 페르쥔스키(W. Perzy

ski, 1878-1930) 등의 사실주의·자연주의 연극과, 19세기 낭만파의 상징주의 및 실험적인 연극이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시인이며 화가인 비스피안스키(S. Wyspia

ski, 1869-1907)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한 뒤, 연극은 자유로운 발전을 할 수 있었다. 폴란드 도처에 극장이 건립되기 시작해 바르샤바 제1의 '폴리스 극장'이 개장(1913)됐고, 여기서 버나드 쇼의 <사과 수레(The Apple Cart)>가 세계 초연되었다. 그 밖에 주목할 극장은 '레두타'(1919), '아테네움'(아방가르드 극장으로 유명), '보구슬라브스키 극장' 등인데, 특히 보구슬라브스키 극장장이며 명연출가인 실러(Leon Schiller, 1887-1954)는 고든 크레이그의 제자로서 폴란드 현대 연극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극작가들은 이제까지의 폴란드의 문제만을 다루던 국한된 범위를 벗어나, 현대 유럽 연극의 큰 조류에 가담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현상이 잘 반영된 것이 20년대와 30년대의 희곡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는 이와즈키이비츠(J. Iwaszkiewich, 1894-1980)와 자니아브스키(J. Szaniawski, 1886-)인데 전자는 19세기 예술가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 푸슈킨, 발자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후자는 주로 희극으로 뛰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빠뜨릴 수 없는 작가로는 자기 시대보다 앞서 있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비키이비치(S. I. Witkiewicz, 1885-1939)이다. 그는 양차대전 사이의 연극과 1956년 이후의 부조리 연극을 연결해 주는 선구적 전위작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 폴란드 연극은 3기(期)로 나누어 몇 개의 뚜렷한 조류로 구분된다. 그 첫기간은 대략 1945년에서 49년까지로,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극장을 복구하고 살아 남은 연극인들이 많은 극단을 조직하던 시기이다. 당시 극작가들은 주로 전쟁의 참화와 국내의 새로운 사회·정치적 상황을 다루었는데, 자니아브스키의 <두 개의 연극>(1946)과 자고르스키(J. Zag

rski, 1907-?) 및 안드르제에브스키(J. Andrzejewski, 1909-?) 합작인 정치희극 <빈켈리이드의 날>(1946)이 대표작이었다. 이 희극은 어느 의미에선 현대 폴란드 문학에서 집요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낭만적 가치 및 과거의 이상과 리얼리즘 내지 프래그머티즘을 내세우는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시기는 1949년에서 56년까지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폴란드에 이식하기 위해 문학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연극은 질식상태에 빠졌다. 따라서 연극은 정해진 패턴을 따르는 도식적(圖式的)인 것이 되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현실문제를 피하거나 역사를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 기간에 나온 대표작이 크루츠코브스키(L. Kruczkowski 1900-1962)의 <독일인>(1949)으로, 안드르제에브스키의 소설 <재(灰)와 다이아몬드>, 므로제크(S. Mro

ek, 1930- )의 희곡들, 양 코트(Jan Kott)의 <우리의 동시대인 셰익스피어>가 나오기까지 서방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되었다.

제3기는 1956년의 '해빙'에서 1966년의 봉기까지로, 모든 예술이 상당한 자유를 누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극장수는 백개가 넘었다. 그 중에 드라마틱극장·현대극장·루도비극장이 유명하다. 작품은 권력의 본질과, 개인과 사회 역사와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주였지만, 보다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젊은 작가들에 의한 개혁과 실험이었다. 그들의 전위적인 활동은 이오네스코, 베케트, 핀터가 폴란드에서 공연됨으로써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그러한 연극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구자인 비키이비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오래 망각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짐은 물론, 그에게 영향을 받은 곰브로비츠(Witold Gombrowicz, 1904-?)와 그 두 사람을 계승한 로제비츠(Tadeusz Rozewicz, 1921-?)와 므로제크(Slawomir Mrozek, 1930- )는 다같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폴란드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경찰>(1958) <스트립쇼>(1961) <탱고(Tango)>(1965) 등의 주요 작품에서 므로제크는 자기가 선택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가망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반면, 로제비츠는 <카드 인덱스(The Card-Index)>(1960) <증언>(1962)에서 이상(理想)의 시와 평범한 인도주의는 발붙일 곳이 없고, 도덕적인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오늘의 세계에서의 정신의 파탄을 개탄하고 있다.

그 밖에 50년대와 60년대에 활약하고 있는 작가로는 헤르베르트(Z. Herbert, 1924- ), 그로초비아크(S. Grochowiak, 1934- )가 있다. 헤르베르트의 <철학자의 동굴>(1956)은 영역(英譯)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출 분야에서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며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연출자가 그로토브스키(Jerzy Grotowski)이다. 그는 폴란드에서 가장 실험적인 극단인 '폴란드 실험극단'을 창설하여, 이제까지의 연극미학을 혁명적으로 부정하고, 소위 '가난한 연극'이라는 새로운 연극론과 연출법으로 연극의 본질을 탐구하고 연극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그의 극단은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여 그곳 연극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폴란드는 인형극과 아동극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

냉전시대의 서방국가들과 동유럽간의 정치적인 긴장은 오히려 저마다 자기 나라의 문화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 폴란드의 연극은 일찍이 볼 수 없는 영향력과 존경을 누리고 있다.

이제 해가 갈수록 폴란드 연극의 특이성, 서방연극에서 받은 부채와 그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정도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으며, 한편 60년대의 로제비츠와 므로제크 이후 폴란드 연극이 추구하고 있는 과정과 아울러 유럽에서 가장 흥미 있는 연극과 극문학을 발전시킨 과거의 폴란드 연극이 근자의 많은 번역과 문화 교류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체코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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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zechoslovakia-現代劇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자유 체코정부가 수립되면서 다른 분야보다 뒤떨어졌던 체코 연극은 발전을 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극장들이 생기고, 연출과 공연술이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어, 젊은 전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미학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손색없이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전시대의 연극 가운데 상징주의 경향은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보다 강했다. 스라메크(Frana

ramek, 1877-1952)의 희곡은 서정성으로 뛰어났는데, 특히 <여름>의 주제는 투르게네프와 베데킨트의 영향을 받았다.

1918년 이후 체코연극에 영향을 미친 새로운 조류는 독일의 표현주의로서, 차페크 형제의 유명한 <R. U. R> <곤충희극>이 나왔다. 그들은 현대문명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경고를 내리고, 인류의 끝없는 야망에 적절한 한계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차페크 이외의 최고작가로는 랑게르(Frantisek Langer, 1888-1965)로서 정교한 극적 구성으로 유명했다. 그의 작품은 버나드 쇼와 영국의 풍속희극을 느끼게 하는 계열과 표현주의 계열로 나뉜다. 전자에는 희극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낙타>(1923), 후자에는 <교외>(1925)가 대표적이다.

한편 러시아의 영향하에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연극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체코연극은 급속한 쇠퇴를 보였다. 20년대의 작가들이 무대를 여전히 지배했지만, 이미 지적으로나 테크닉 면에서 쇠퇴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의 점령, 전후 스탈린 시대는 연극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했다. 특히 1948년 이후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치명적인 장애가 되었다.

1956년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몇몇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그 가운데 토폴(Josef Topol)과 하벨(Vaclav Havel)이 가장 유망하다. 토폴의 <시로브타이드의 끝>(The End of Shro­vetide)(1963)은 종래의 리얼리즘에서 떠나 체코의 민족의식을 양식화시켰다. 하벨은 이오네스코처럼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가지며, 므로제크처럼 공산주의 관료계급의 의미없는 슬로건에 위협받는 언어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가든 파티>(1963) <비망록>(1965)이 있다.

체코의 극장은 국립극장을 위시해서 전체적으로 매우 우수한 시설을 갖추고 있고, 특히 스보보다의 무대장치에서 괄목할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인형극과 아동극이 성하며, 젊은 연기자들이 운영하는 소극장운동이 매우 활발하다.

헝가리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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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ary-現代劇

헝가리의 현대극은 19세기경에 시작된다. 1837년에 최초의 영구 극장이 개관하고, 이 극장은 40년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국립극장이 되었다. 극장장인 지글리게티(Ede Szigligeti, 1814-1878)는 극작가로 수백 편의 희곡을 썼으며, 헝가리 국민극과 뮤지컬 코미디의 창시자였다. 1860년대 초에 수많은 극작가의 등장과 더불어 두번째 헝가리어 극장인 국민극장이 세워지고 1864년에는 최초의 연극학교가 개교했다. 헝가리 오페라하우스가 설립된 것은 1884년이었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많은 새로운 극장이 부다페스트에 세워졌고, 브로디(Sandor Brody, 1863-1924), 라코시(1842-1929) 등 새로운 작가들을 배출했다. 브로디는 현대 부르주아 연극을 처음으로 시도한 작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헝가리 극문학에는 두 개의 뚜렷한 조류가 형성되었는데, 하나는 모리츠(Zsigmond Moricz, 1879-1942)에 의한 헝가리의 도시와 지방을 묘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몰나르(Ferenc Molnar, 1878-1952)와 헤르체그(Ferenc Herczeg, 1863-1954)의 보다 세계적이고 세련된 주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20세기 헝가리의 대표적인 작가인데, 몰나르의 <릴리옴(Liliom)>(1909)은 로저스-해머시타인에 의해 뮤지컬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경제공황이 닥치고 연극은 쇠퇴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수한 배우들이 속출하고 헬타이(Jeno Heltai, 1871-1957), 일례스(Gyula Illyes, 1902-?). 비로(1880-1948?), 코도라뉘(1899-?), 네메드(Laszlo Nemeth, 1901-?) 등이 등장, 50년대와 60년대까지 큰 활약을 했다. 1949년에 극장이 국유화되었으며, 극예술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각처에 국립극장과 연극센터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관객의 수가 급증하였고, 배우는 영구히 생계를 보장받게 되었다. 극예술 아카데미(1957)와 연극연구소의 설립은 극계에 자극을 주었다. 새로운 작가로는 메스테르하지(Lajos Mesterhazi, 1916- ), 다르바스(1912- ), 후베이(Miklos Hubay, 1918- ) 등이 있고, 최근에는 귀르코(Laszlo Gyurko)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나의 사랑 엘렉트라>(1968)가 있다.

헝가리에는 현재 직업극단을 제외하고, 약 3,000개의 아마추어 극단이 공장이나 지방단체의 보조를 받아 활동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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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mania-現代劇

루마니아는 터키의 정치적인 지배와 슬라브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된 국민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겨우 19세기부터였다. 새로 각성된 국민의식이 발전하면서 탄생한 것이 '연극협회'였으며, 이것은 뒤에 국립극장의 모체가 되었다. 초기 대표자의 한 사람이었던 알렉산드리(1821-1890)는 극작가로서 많은 작품을 새 극장에 제공했으며, 그와 동시대 작가였던 하스데우(1838-1907)는 루마니아 연극 사상 처음으로 사극을 썼다. 그 뒤를 이은 카라기알(Ioan Luca P. Caragiale, 1853-1912)은 루마니아 최고의 극작가로서 부르주아 계급을 신랄히 풍자했다.

'연극협회'는 2년 뒤인 1854년에 국립 극장이 되었고, 1877년 국립 오페라와 국립 극장이 '루마니아 연극 연기협회'로 통일되는 한편, 국내 작가들을 격려하고 외국의 걸작들을 공연하였다. 기카의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이 공연되어 파스칼리, 마노레스큐, 로마네스큐 등 훌륭한 배우를 배출했다. 한편 안트완과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출법이 다발리스, 엘리아드에 의해 도입되기도 했다. 다발리스는 자연주의 연극을 루마니아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식의 낭만 사극을 쓰기도 했다.

루마니아에 상징주의가 들어온 것은 에프티마(Victor Eftima, 1889-?)와 마니유(1891-?)에 의해서였는데, 이들은 메테를링크와 후기 입센의 스타일을 루마니아 민속에 결합시켰다.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연극은 사회극과 사극이 지배했다. 사회극의 대표적인 작가는 로만(1853-1908)이었고, 사극은 델라브란체아(Barbu Delavrancea, 1858-1918)였다.

2차 대전 후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다가 해빙이 되면서 극작가들은 다양한 실험으로 극적 표현의 길을 찾았다. 이 새로운 경향이 두드러진 최근의 예는 아프로이오(Ecsterina Aproiou)의 현대 영화예술을 도입한 <나는 에펠탑이 아니다>(1964), 바랑가(Aurel Baranga)의 피란델로적인 <여론>(1967)이다.

공산정권의 수립은 연극을 선전 도구로 삼음으로써 36개의 지방 극장을 세웠고, 국립극장에는 부설로 시극장, 노동자극장, 군인극장, 청년극장, 아동극장, 유태인극장 등이 추가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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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goslavia-現代劇

유고의 연극은 역사가 오래고 전통이 길다. 그러나 유고의 풍부한 현대극을 올바르게 평가하자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다가 1991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유고연방으로 남고 나머지는 독립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주로 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및 마케도니아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서, 1918년에 겨우 통합되었고, 1945년 헌법으로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유고 소수민족의 고대 연극 전통은 지정학적으로나 언어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기 때문에 유고는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단일한 연극문화 중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활동의 중심지가 언어의 단위에 따라 성장해 옴으로써, 현재의 세르비아 연극은 베오그라드와 노비사드, 크로아티아 연극은 자그레브와 듀브로브니크, 슬로바키아는 류블야나와 트리스테, 마케도니아는 스코플례와 비톨라로 정착이 되었고, 각 공화국은 2, 3개의 직업극단이나 실험 극단을 갖고 있다. 자그레브에 크로아티아 국립극장이 생긴 것은 1861년이고,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국립극장은 1869년, 류블야나의 슬로바키아 국립극장은 1892년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유고의 연극은 자금 부족에 엄격한 검열로 곤란을 겪는 가운데서도 연기와 공연의 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었고, 레퍼토리도 확대되어 쇼, 입센, 피란델로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당시의 국내 작가로 뛰어난 극작가는 포포비츠(Jovan Stevija Popovic, 1806-56), 보이노비츠(Ivo Vojnovic, 1857-1929), 누지케(Branislay Nusic 1864-1938), 캉카(Ivan Cankar, 1876-1918) 등이었다. 포포비츠는 풍자희극 <애국자>(1849)를 썼고, 그 뒤를 계승한 누지케의 <민중의 선량>(1896), <괴인물>(1887), <병자>(1936) 등의 풍속 희극은 유고 연극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캉카는 슬로바키아 현대문학 운동의 중심 인물로, 누지케와는 전혀 달리 논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악한들>(1912), <베타이노비의 왕>(1902)등을 썼다. 보이노비치는 발랄한 지중해풍의 <듀브로브니크 3부작>(1902), <파라솔을 든 여인>(1912) 등의 작품이 있다.

연출로는 스튜피카와 가벨라가 활약했고, 스튜피카는 유고의 라인하르트라 불리었다.

1941년 독일의 침략으로 연극활동은 중단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극단들이 조직되어, 1949년에는 그 수가 66개가 되면서 각 지방 도시마다 활발한 연극 활동이 전개되었지만 역시 중심지는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류블야나 정도였다. 이들은 자국의 우수한 작가가 드물기 때문에 주로 외국의 작품들을 공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유고에는 24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1962년에는 52개로 증가하여 120개의 아마추어 극장, 30개의 아동극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부의 보조를 받기 때문에 싼 요금으로 여러 계층의 관객들에게 연극을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은 거의 볼 수 없다. 유고 연극의 중요 행사는 '듀브로브니크 예술제'로, 1950년부터 해마다 개최되며, 세계각국으로부터 극단·연극인이 참가되어가고 있다.

유고는 공산권 국가 중에서 실험극이 가장 왕성하여, 이오네스코, 베케트, 페터 바이스, 올비, 하벨 등의 전위적인 작가와 유고의 신인작가의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그 중 부라토비츠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개작하여 <고도가 왔다>(1966)를 발표해서 주목을 끌었다.

1950년대 이후 유고 연극의 레퍼토리의 다양성은 새로운 유고 사회가 지니고 있는 다이내미즘의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다이내미즘은 두 세계대전 사이에 유고 정부가 가한 정치적·예술적 억압에 대한 반동이며, 또한 1948년 소련연방으로부터 탈퇴한 결과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 탈퇴는 모든 예술 분야에 자유화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현대의 유고 작가들은 외국의 예술적 성과에 끊임없이 도전받음으로써 양식상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들은 신사실주의적인 르포에서 초현실주의적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의 새로운 연극은 의도적으로 논의를 추상화하고, 역사적인 마르크시즘과 실존적 변증법에 다 같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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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lgaria-演劇

터키의 압정하(壓政下)에 있던 불가리아의 연극역사는 짧다. 터키 통치하의 고립시대가 지나고 바조프(Ivan Vazov, 1850-1921)가 나타나 다면적인 예술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불가리아의 극단(劇壇)은 유럽의 영향에 한층 민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도덕극(道德劇)이나 애국적인 드라마가 진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키리로프(1878-1936)의 <종달새>나 카리마(1872-1948)의 <잠을 깨다> 등은 입센의 영향을 받고 있다. 상징주의나 니체 철학의 윤리감도 하리스토프(Kiril Khristov, 1875-1944)의 비극에 나타나고 있다. 스트라시미로프(Anton Strashimirov, 1872-1937)는 전설을 제재로 하여 <성 이반 리르스키>라는 비극을 쓰는 한편 <보리아보의 결혼식>이라고 하는 전원희극(田園喜劇)을 비롯해 <라베카> <적교(吊橋)> <흡혈귀> 등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체호프의 영향은 야보로프(Peio Yavorov<또는 Iavorov>, 1877-1914) 속에서 융합되었다. 그의 비극적인 사랑을 테마로 한 희곡 <비토샤 산의 산기슭에서>(1911)라는 작품에서는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혐오가 스며나오고 있다. 그 밖에 <천둥이 칠때> <메아리치다> 등의 작품이 있다. 토도로프(Petko Todorov, 1879-1916)도 또한 상징극을 썼다. 그는 불가리아 고대의 민요나 전승(傳承)의 세계에 입센의 후년의 극에서 보이는 무드나 테크닉을 시도했다. <벽돌직인(職人)> <요정(妖精)> <용(龍)의 결혼> 등이 그 대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불가리의 연극활동은 또다시 활발해졌다. 국립극단은 당초 배우인 사라호프(Sarafov)에 의해서 이끌어졌으나 나중에는 상징파의 시인(詩人) 밀레프(Geo Milev, 1895-1925)가 이끌어 갔다. 그래서 많은 배우가 모스크바의 예술극단에서 배우고 레퍼토리도 모스크바의 것을 모방하게 되었다. 1925년 러시아의 배우 맛살리티노프(N. O. Massalitinov)가 소피아에 와서 국립극단과 부속학교의 지도를 담당했다. 그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2개의 대전 사이에 극작상(劇作上)의 유파(流派)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헤이도크 극(불가리아의 로빈 후드에 해당하는 영웅으로 터키의 압정에 반항함)과 국민적인 영웅을 그린 사극(史劇)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그와 함께 농민의 어리석음과 욕심은 요브코프(Yordan Yovkov, 1880?-1937)의 <백만장자>(1930)라는 작품 속에서 통렬하게 풍자되었고 코스토프(St. Costov)는 <금광(金鑛)>(1925) 등의 작품에서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을 야유했다. 또한 미카일로프스키(Stoyan Mikhaylovski, 1856-1927)는 유머러스한 가정극을 가벼운 수법으로 그린 <신들이 웃을 때> <부부애(夫婦愛)의 비극> 등을 상연하고 있다.

1945년 이후의 불가리아의 극장은 크게 번영하여 배우·가수·인형조종자들이 각자의 극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리지널 각본은 탄생하지 않았다. K. 유리야노프와 라스테스베티노프(Asen Raztesvetinov, 1897-?)는 지금까지 성행한 헤이도크 극의 시추에이션을 나치즘에 저항하는 공산당원으로 바꾸어서 각본을 썼다.

그 밖의 프로퍼갠더 극에는 지다로프(Kamen Zidarov)의 <황제의 자비>와 A. 그리아스키의 <약속> 등이 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소련의 압력이 누그러짐에 따라 한 공산당원이 공산당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가는 모양을 그린 지에노프의 <공포>같은 작품을 상연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작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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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피안스키, 스타니슬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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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law Wyspianski(1869-1907)

폴란드의 시인 겸 극작가·연출가·정치가. 크라쿠프 대학에서 수학하고 파리에서 3년간 미술을 연구한 뒤 교수직에 있으면서 극작과 연출에 몰두했다.

그의 희곡은 4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첫번째 그룹은 희랍고전을 주제로 한 것이며 두번째 그룹은 폴란드의 전설과 역사를 다룬 비극 <전설 Ⅰ, Ⅱ>, 세번째는 당시 폴란드의 농촌생활을 다룬 비극 <저주>(1899), <재판관>(1907) 등이다. 끝으로 그의 대표작들로서는 1830년 11월 폴란드 폭동을 다룬 낭만주의 걸작들로서 <결혼>(1901), <아크로폴리스>(1903), <11월 밤>(1904) 등이 있다.

작품의 특징은 신화와 환상과 상징적 언어의 최대의 활용이라 하겠는데, <결혼>과 <11월 밤>에서 운문(韻文)을 즐기는 낭만적 기질, 전통적인 삼일치(三一致)의 무시, 빠른 장면 전환, 현실과 초자연적인 것의 혼합, 신화적 인물과 민속적 인물의 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편 미키이비치의 계승자로서 그의 방대한 <선조들의 날>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무대상의 많은 개혁을 이룩해 놓았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잘 만들어진 극'에 반발하고 희곡, 미술, 음악이 종합된 '전체연극'(全體演劇)을 예기시켜 주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후계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레온 실러였다.

미키이비치,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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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Mickiewicz(1798-1855)

폴란드의 시인이며 극작가로, 그곳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비르노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829년 반소정치운동을 한 죄로 추방당했다가 석방되자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그의 최고 걸작은 <선조들의 밤>이라는 시극으로서 2부·4부가 먼저 나오고(1823), 3부가 10년 뒤에 나왔으나 1부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작품은 이교도의 조상숭배 의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 각 부가 일관된 이야기가 아니고, 다만 3부는 그의 투옥과 추방의 경험을 젊은 시인을 빌려 표현했다.

비키비이치, 스타니슬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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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law Ignacy Witkiewicz(1885-1939)

폴란드 극작가. 그가 처음 작품을 발표했을 때 조롱받고, 정신병자로 취급을 받아오다가 자살해 죽음으로써 그의 작품은 영영 빛을 못 보았다. 그러나 1956년 이후 서구의 '부조리 연극'이 들어오면서 그는 재발견되었고, 더욱이 50년대 베케트와 이오네스코 등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희곡과 같은 류의 희곡을 쓴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약 30편의 희곡 가운데서 대표적인 작품으론 <프래그마티스트>(1918), <그들>(1920), <작은 토지 위에> <쇠물닭>(1921) <재단사> <광인과 간호원>(1923) 등이 있다.

그는 미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순수형식이론(純粹形式理論)'을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 논문이 <연극의 순수형식론>(1918)이며, 그의 희곡은 그 이론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고독과 사회와의 고립, 현대문명의 획일화에서 오는 비인간화를 다루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의곡(歪曲)과 변형으로 차 있다.

슬로바키, 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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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usz Slowacki(1809-1848)폴란드의 시인이며 극작가로 19세기 폴란드 문학의 지도적인 인물, 아담 미키이비츠의 <선조들의 밤>에 대항하는 걸작 <코르디안>(Kordian)(1832)을 썼다. 낭만적 구조를 갖고 삼일치를 무시하며 셰익스피어 영향을 받은 <코르디안>은 러시아 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폴란드의 애국자 코르디안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선조들의 밤>이 폴란드를 구할 예언자적 시인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찬양하고 있는 데 반해 한 개인의 국가적 사명과 그 성과에 대해 회의를 표하고 있다.

그 후 4년간 슬로바키는 낭만적인 작품을 써오다가 35년 사실적인 사극 <호르즈틴스키(Horszty

ski)>를 썼다. 미완성 작품으로서 <햄릿>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다음 <릴리 베네다(Lilla Weneda)>(1940)는 폴란드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암시하고 있는 바는 당시의 국내적 정치적 갈등으로, 69년에 초연된 이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사극으로는 그외에 여러 편이 있다.

그가 사망하고 난 뒤 상당히 많은 미완성 작품과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팬터지>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유일한 희극으로, 낭만적인 사랑과 신화 조작의 우스운 면을 풍자하고 있다.

므로제크, 슬라보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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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womir Mrozek(1930- )현대 폴란드의 젊은 작가 중 제1인자인 풍자작가. 그의 작품들은 인물의 추상화, 부조리한 상황,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장치를 통해 현대의 도덕적,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작품의 무대를 대개 폴란드 이외의 곳에 두어, 보다더 큰 보편성을 획득해보려고 하지만 그 작품이 성장한 상황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경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한 <경찰>(1958)은 시대나 사회나 형태에 관계없이 전체주의가 갖는 특성을 파헤치고 있는데, 40년대, 50년대 폴란드의 정치 사회적인 배경을 두고 볼 때 더욱 의미 심장해졌다. <바다로>(1961)는 도덕적 문제를, <스트립 쇼>(1961)는 자유화 의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탱고>(1965)는 통치자로서의 이상주의자의 부적격성을 논한 것으로, 폴란드의 정치적 성격을 개조해 보려던 지성인들의 투쟁을 반영하고 있다.

므로제크는 비록 서구 '부조리 연극'의 수법을 쓰고 있지만 그의 희곡들의 본질은 서구 작가들이 관심 갖는 소외나 순응주의나 언어 한계 등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므로제크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재능과 창의성을 가진 극작가로 보아야만 한다.

로제비치, 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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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deusz Rozewicz(1921- )

므로제크에 이어 젊은 작가로서 가장 촉망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이상주의를 상실한 현 폴란드의 무감각한 자기만족을 신랄히 공격하고 있다. 그도 역시 서구 부조리 연극에 힘입은 바 큰데 대표작 <카드 인덱스(The Card-Index)>(1960)는 막과 장의 구분이 없고 코러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자기 세대의 정신적인 백치 현상을 통렬히 풍자한 작품이다. <증언>은 <카드 인덱스>보다 구조가 단순하며,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정상이 되리>와 <그는 고향을 떠났다>가 있다.

차페크, 카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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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el

apek(1890-1938)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로, 외국에서 널리 번역 공연된 소수 작가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의 일부는 동생 요셉(Josef)과의 합작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R.U.R>(Rossum's Uni­versal Roberts)과 <곤충희극>(1921)이다. <R.U.R>은 유토피아적인 희곡으로서, 로봇을 등장시켜 로봇이란 말을 최초로 세상에 알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로봇은 현대 기술 문명의 비인간화 위협을 상징한 것으로 독일의 표현주의 연극에서 영향을 받았다.

로봇은 권력을 잡고 인간을 말살한다. 그러나 로봇은 생식이 불가능하였는데, 기적이 일어나서 두 로봇이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기계문명의 위협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낙관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곤충희극>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룬 것으로 곤충의 탈을 쓴 인간성을 아이러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외에 장수(長壽)의 욕망을 다룬 <마크로폴로스 비밀>과 <R.U.R>의 속편으로 로봇이 파괴해 놓은 세계를 제거하는 인간을 그린 <창조자 아담>(1927), 최후 작품으로 독재정치와 전쟁의 참화를 다룬 <어머니>(1938)가 있다.

랑게르, 프란티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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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tisek Langer(1888-1965)

체코의 소설가 겸 극작가. 프라하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 1차대전 직전에 <성자 벤세스라스>와 <밤>을 썼는데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다. 랑게르의 최초의 사실극 <백만장자>(1915)는 현대 자본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비극이다. 군에서 돌아온 후 매우 대중적인 희극을 발표했다.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낙타> <유한책임 결혼>(1934) 등에서 고전 희극의 구성을 좇아 코믹한 상황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유머와 발랄한 생명감에 넘쳐 있는 소시민과 중산층의 생활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랑게르의 명성은 실험적극 <교외>(1925)로 해외에까지 전해졌다. 죄와 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의를 찾는다는 것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카르바스, 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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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Karvas(1920- )

체코의 극작가. 대학을 나온 후 슬로바키아 국립방송국에서 근무했고 한때 외교관 생활도 했으며 정부 고위직에도 있었다. 2차대전 후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중요한 극작가인 카르바스는 처음에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문제를 우화식으로 표현했지만 후엔 사실주의 희곡을 썼다. 그의 대표작 <심야의 미사>(1969)는 우화와 리얼리즘을 결합하여 2차전후 슬로바키아 사회를 분석했다. 사회주의계열의 작품으로 <안티고네와 그외 사람들>(1962) <상처>(1963)가 있다. 그는 또한 풍자희극에도 뛰어나 <다섯 P의 사회> 등이 있고 그 중에 <가발>이 가장 중요한데, 대머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상호 박해를 풍자함으로써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심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는 사회제도를 우롱했다.

하벨, 바클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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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lav Havel(1939- )

체코 극작가로 공과 대학을 나와 극장에서 전기 기사겸 비서로 일했다. 그 후 연극학교를 나와 연극에 관한 많은 논문을 썼다. <가든 파티>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공적인 생활과 개인 생활의 기계적인 관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가하고 있다. 체코의 부조리 연극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작품은 부조리한 기계적 조직에 휩쓸려든 인간을 다룬 <비망록>이다.

토폴, 요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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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Topol(1935- )

연극 학교를 나온 후 극작에 전념, 체코의 전설을 소재로 <한밤의 바람>(1955)을 썼다. 그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은 <그들의 날>로서, 체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노한' 세대를 대변하여 기성세대를 공격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슈로우비타이드의 끝>(1963)은 전통적 사육제를 극화한 것으로, 즐거운 가정 무도회가 뜻밖의 비극으로 끝나는 내용으로, 생과 사의 영원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몰나르, 페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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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enc Molnar(1878-1952)

헝가리의 극작가. 처음엔 가벼운 파르스로써 헝가리 도시생활의 유머를 발굴했다. <파우스트>의 현대판 <악마>가 그의 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외국에서 공연되었다. <릴리옴>(1909)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리얼리즘과 환상이 혼합되어 있는데, 나중에 미국에서 <카로젤(Carousel)>이라는 뮤지컬이 되었다. 그는 상당한 양의 희곡을 썼고 그 중 가장 매력있는 작품은 <유리구두>로서, 캐비넷 제조공을 주인공으로 한 신데렐라 이야기이다. 그는 견실한 테크닉과 뛰어난 대사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영역되었다. 그 중에 <근위병>은 가장 유명하다. 1940년에 미국시민이 되었고, 남편이 죽은 뒤 부인은 미국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계속 일였다.

하이, 기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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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ula Hay(1900-?)

헝가리 작가 중 최고의 작가. 헝가리 연극 아카데미의 극작 교수로 있다가 반동작가로 투옥된 바 있다. 출옥 후 스위스에 거주하였다.

주요 작품은 <신과 황제와 농부>(1932), <생명의 다리>(1950), <가스포 바로에 대한 페어플레이> <말>(1961) <마틸다의 밤>(1963)이 있다.

일례스, 기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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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ula Illyes(1902-?)

헝가리의 시인. 극작가. 문학잡지를 편집했고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1966년 미국을 방문.

주요작품으로는 <오조라의 예> <횃불> <앞잡이>(1963) <기인(奇人)>(1963)이 있다.

네메드, 라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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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zlo Nemeth(1901-?)

헝가리 극작가이며 비평가. 부다페스트에서 철학과 의학을 연구. 1945년에 9년간의 작품활동을 중단당하고 교사로서 지냈다. 1957년, 문학상을 받은 후로 헝가리에서 가장 활동적인 비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갈릴레이> <요셉 2세>(1954) <여행>(1962) 등이 있다.

코소르, 요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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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ip Kosor(1879-1961)

유고슬라비아의 극작가. 처녀작 <정열의 불>(1910)은 표현주의 수법의 실험극으로서 먼저 독일과 영국에서 공연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 밖에 농민이나 대도시 생활을 그린 <평온>(1914), <여자>(1920), <인류>, <벙어리>(1926) 등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세기말적인 에로티시즘과 한편 두 개의 주제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에는 부조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거인적 기질을 지닌 코소르는 예술적 절제가 부족한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상상력과 대사에 있어서는 매우 독창적이다.

오프로이우, 에카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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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aterina Oproiu(1935- )루마니아의 새로운 연극을 주도하는 유일한 극작가로 <나는 에펠탑이 아니다>로 각광을 받았다. 그녀는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영화잡지의 편집자이며 영화대본도 쓰고 있다. 남편은 경제학자이다.

<에펠탑>은 평범한 이야기를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쓴 작품으로, 버스를 놓친 소년, 소녀가 시골길을 떠돌아다니며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