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러시아의 현대극

러시아 현대극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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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극과 10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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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演劇-十月革命

1917년의 10월혁명에 의해 성립된 러시아정권은 국민의 교화(敎化)와 계몽의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연극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의 관리와 통제에 힘을 기울였는데 1919년에는 구 제실극장(舊帝室劇場)을 포함한 전 극장의 국유화를 실시하고, 전면적으로 그 보호와 육성에 노력하게 되었다.

러시아 민족은 이미 19세기에 말르이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연극을 확립하고, 더욱이 20세기 초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체코가 이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세계의 근대극 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또 샤리야핀·파블로바 등의 천재의 출현으로 오페라와 발레의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시대를 이루는 과업을 성취했다.

국민경제 재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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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經濟再建時代

1928년 가을에 시작된 국민경제 재건의 제1차 5개년계획은 스탈린 독재확립의 초기에 해당되는데, 이 무렵 새로운 러시아 희곡의 상연으로 겨우 자신을 회복한 옛 극장인의 사상적 전환과 새로운 기간분자(基幹分子)의 성장은 러시아 연극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1930년대의 중엽에는 문학·예술의 창조방법으로 주창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론이 연극 분야에서도 지도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이 정치에서의 개인숭배와 교조주의(敎條主義)가 만연된 시기와 일치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한편 리얼리즘의 곡해로 이질적인 예술적 주장이나 실천이 모두 형식주의의 이름 밑에 매장되고, 그것이 또한 정치적 음모와 얽히고 설키어 메이에르흘리드를 비롯한 여러 연극인이나 작가가 모습을 감추는 1937년과 1938년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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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二次世界大戰-演劇

그러나 1941년에 발발한 독·소전(獨蘇戰)은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모든 극장을 국민과 일체로 묶어 조국방위, 파시즘 타도전으로 몰아세우게 된 것이다. 후방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었던 극장인은 재빨리 전선돌격대를 편성하고 간소강력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싸움터를 누비며 파르티잔 병사들의 전의를 고무해 가면서 대전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미증유의 전화(戰禍)를 입은 러시아는 이런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 전시 못지 않은 국민의 인내와 긴장을 필요로 하였고, 전후 인심의 퇴폐 및 이완(弛緩)과 싸워야만 했다. 1946년 여름의 이른바 '드라마 극장의 상연목록과 그 개선책'이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는 그간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며, 비애국적 코스모폴리터니즘·서구숭배·형식주의 비판의 선풍이 일련의 작곡가나 극장인을 엄습하고, 협량(狹量)한 민족주의 존중이란 이름 아래 예술이 획일화되고 균등화되는 전락의 위험 밑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 연극의 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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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演劇-新時代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1953)과 그 후의 스탈린 비판으로 러시아 연극은 그 혼미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의 연극은 러시아 국민연극의 좋은 전통인 리얼리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각 극장이 각기 독자성을 가진 집단으로서 자유롭게 그 특색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극장 예술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드라마인데, 오페라·발레, 뮤지컬 코미디 등의 음악극, 아동극, 인형극, 서커스 등, 여기에는 연극의 모든 장르가 있다. 이들 극장에서는 러시아연극의 이념과 정책상 당연히 관객의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거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관중의 교양을 높이는 고도한 내용을 가지며, 그러면서도 대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극작 및 연극의 제1조건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러시아 연극의 중요한 특색은 다민족성(多民族性)이다. 제정시대(帝政時代)에는 전혀 자기들의 극장을 갖지 못하였던 소수민족이 현재에는 자국어(自國語)로 된 극장을 갖게 되었고, 45개의 민족어에 의한 극장이 존재하고 있다. 소수민족문화의 발전과 성장은 특히 연극 분야에 있어서 현저히 나타나 있다.

작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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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키, 막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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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 Gorky(1868-1936)

20세기초에 <밑바닥> <별장의 사람들> <태양의 아들> <야만인> <적(敵)> 등 일련의 희곡을 썼는데, 그 중에도 <밑바닥>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되어 그 명연출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에고르 불르이초프와 다른 사람들>(1931)과 <도스티가에프와 다른 사람들>(1932)은 등장인물과 시대가 하나인 연결성을 가지며, 전자가 짜르의 전제정치를 타도한 1917년 2월의 군중의 노래소리로 막을 내리고 있는 데 반하여 후자는 정세가 어수선한 6월에서 10월에 걸쳐 전개되며 볼셰비키의 정권탈취의 소식과 함께 끝나고 있다.

마야코프스키,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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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Mayakovsky(1893-1930)

혁명 전부터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창조적인 정열이 폭발한 것은 10월혁명 이후로서 1918년 소련 극문학(劇文學)의 제일성(第一聲)이 된 <미스테리아 부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장대한 비유형식을 빌려 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미래의 사회를 엮은 것이다.

다음 희곡 <빈대>(1928)와 <목욕탕>(1929)은 몽환희곡(夢幻戱曲), 혹은 기상천외의 풍자적 수법으로 시정인(市井人)의 근성과 관료주의를 폭로한 것이다.

트레뇨프, 콘스탄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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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in Trenyov(1878-1945)소설가로서 혁명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그 뛰어난 작가적 재능을 나타낸 것은 혁명 후 극작 분야에 있어서이다. 대표작으로는 <푸가초프시치나> <류보피 야로와야> <중학생들> <네바의 하반(河畔)에서> 등이 있다.

특히 <류보피 야로와야>(1926)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쌍의 부부의 드라마를 중심으로 내전시대의 복잡다기한 사회·풍속적인 화포(畵布)를 생생하게 무대에 재현한 최초의 러시아 희곡이다.

빌리=벨로츠에르코프스키,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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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Bily-Belotserkovsky(1885-?) 1917년에 국외에서 노동생활을 하다가 10월혁명에 참가했다. 젊은 러시아국가의 반혁명, 황폐, 기아와의 싸움을 그려 낸 <폭풍>(1925)은 혁명 직후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도식적 인물 대신에 살아 있는 인간을 무대에 등장시킨 최초의 희곡으로, 러시아 극문학 초기의 가작으로 꼽히고 있다.

불가코프, 미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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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hail Bulgakov(1891-1940)

처녀작 <투리빈가(家)의 지난날>(1926)은 그의 장편 <자위군(自衛軍)>을 토대로 하고 혁명직후의 내전시대의 키에프를 무대로 백군장교(白軍將校)의 한 집안의 이산(離散)과 붕괴를 묘사한 것인데, 애절한 서정과 노여움에 찬 풍자와 유머, 그리고 숨막힐 듯한 극적 긴장 속에서 반혁명군(反革命軍)의 파멸이라는 필연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 밖에 반혁명 진영의 정신적 퇴폐를 주제로 한 <도망>(1928), 사극 <몰리에르> <최후의 나날>(푸슈킨) 등의 작품이 있다.

파이코, 알렉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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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ei Faiko(1893- )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3년 혁명극장에서 상연된 <륄리 호(湖)>이며, 이 밖에 <부브스 선생> 외에 수편의 희곡이 있는데, 혁명 직후의 러시아 지식계급의 일면을 생생하게 그려 낸 대표작 <가방을 든 사람>이 있다.

이바노프, 브세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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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evolod Ivanov(1895-1963)혁명 당시 시베리아 전쟁에 참가, 그때의 체험을 그린 <장갑열차> <파르티잔 이야기>로써 초기의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장갑열차>의 각색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되자 그 명무대(名舞臺)와 함께 작가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러나 그 후의 극작활동은 부진하여 <장갑열차> 이외의 희곡은 오랫동안 상연목록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레브레뇨프, 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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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Levrenyov(1891-1958)소설 <41번째>, 희곡 <분쇄(粉碎)>(1927) 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후자는 순양함(巡洋艦) 오로라호(號) 출동의 삽화를 바탕으로 하여 크론시타트 군항(軍港)에서의 10월 봉기 직전의 해군 군인 사회의 이합집산(離合集散)과 구 체제의 붕괴를 그려낸 대표작이다. 독·소전(獨蘇戰) 말기부터 전후에 걸쳐서는

<바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흑해함대원(黑海艦隊員)의 노래> 등이 있다.

로마쇼프, 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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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Romashov(1853-1958)

신경제정책시대의 부자들의 풍속을 통렬히 폭로한 풍자희극 <공기(空氣)만두>(1925)가 당시의 혁명극장에서 상연되면서 일약 유명해졌고, 그 후 30년간에 <크리보르이리스크의 최후> <불꽃다리> <히어로의 교대> <큰 힘> 등 20여편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이들은 모두 말르이 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레오노프, 레오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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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id Leonov(1899- ) 오히려 산문(散文) 작가로 유명하며

희곡으로는 <포르프챤스크의 과수원> <평범한 사람> <습격> <료느시카> <황금마차> 등이 있다. 이 중 <습격>은 파시스트군이 러시아국토에 가져온 고뇌의 깊이와 적에 대한 싸움을 통해서 씩씩하게 단련되는 인간상을, 긴박한 전국(戰局)을 배경으로 그려낸 가작이다.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주제로 하고, 사회윤리의 규범으로서 인간에의 신뢰를 주장한 문제작 <눈보라>(1939)는 1963년에 와서 비로소 그 신고(新稿)가 발표되었다.

바슈네프스키, 프레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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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evolod Vishnevsky(1900-1951)

페트로그라드 10월혁명에서 20년까지의 내전에 참가. 그 후 문필활동으로 들어가 <제1기 병사단> <최후의 결전> <낙천적 비극>등 일련의 혁명적 로맨티시즘의 희곡을 발표했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내전(內戰)을 제재로 한 연극에 특유한 국면의 긴박과 격변을 나타내는 급속한 장면의 전환, 짧은 에피소드의 교대로 당시의 극단에 신풍을 가져왔다.

키르숀,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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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Kirshon(1902-1938)

국민경제 부흥기의 기업의 생활을 취급한 <레일은 운다>와 바크 코뮌 지도자의 최후를 그린 <바람의 마을>, 농촌집단화 시대의 농민과 부농(富農)의 항쟁을 그린 <곡물>, 항공공업 부문 발명에 광분하는 청년의 희극 <훌륭한 합금> 등을 계속해서 발표,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37년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아피노게노프, 알렉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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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Afinogenov(1904-1941)

1926년의 처녀작 발표 이래, 1941년 10월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습으로 쓰러질 때까지, 그 짧은 생애에 20여 편의 희곡을 썼다.

과학 분야에서의 계급투쟁을 주제로 한 <공포>(1931), 소박한 사람들의 나날의 근로를 찬양한 <다료코에>(1935), 아름다운 청춘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한 소녀와 노교수의 이야기 <마셴카> 등이 그 대표작이다.

포고진, 니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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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Pogozin(1900-1962)

1930년의 처녀작 <템포>이래, <도끼의 시> <나의 벗> <귀족> 등의 희곡을 계속 발표, 새로운 인간형의 형성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총을 가진 사람>(1937-54), <크레믈린의 큰 시계(時計)>(1940-56), <제3, 비창(悲愴)>(1958)은 2월혁명부터 10월혁명 후에 있어서의 여러 사건을 선명하게 그려낸 그의 대표적 3부작이다.

비르타, 니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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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Virta(1906-?)

안토노프 일파의 농민의 반란을 그린 자작소설 <고독>을 각색한 <토지>(1937)로 극작을 시작하여, 독·소전(獨蘇戰) 후의 농촌을 그린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 <망해가는 자의 음모>(1949)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르네이추크, 알렉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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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Korneichuk(1905-1972)

전 러시아 희곡콩쿠르의 당선작인 <함대의 멸망> 이후, 극작에 전념하여, 외과의사인 한 청년을 중심으로 러시아 지식계급의 군상을 그린 <플라톤 크리체트>, 우크라이나의 내전관계의 사극 <보그단 프메리니츠키>, 독소전 당시의 새로운 군사과학의 실천가와 인습에 사로잡힌 군사사령관(軍事司令官)의 대립을 취급한 문제작 <전선(戰線)>, 전후의 우크라이나의 평화건설을 그린 <마칼 두브리바> 외에 수편의 작품이 있다.

아르부조프, 알렉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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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ei Arbuzov(1908-1986)순수한 극장인으로 출발하여, 처녀희곡 <클라스>(1930) 이래 극작으로 전환하여, 애정의 파탄을 강하게 이겨낸 하나의 여성을 그린 <타냐>(1938)는 그의 출세작으로 지목되며 오늘날에도 상연되고 있다. 독·소전 후의 희곡으로는 <청춘과의 해후> <유럽 연대기> <편력시대>가 있으나 그의 작가적 명성을 높인 것은 동부 시베리아의 수력발전소 건설을 무대로, 연애와 우정을 통해서 현대청년의 정신적 내면을 해명하고, 집단과 노동 속에서 단련되는 젊은이들의 성격과 신념을 그의 특유한 서정성을 곁들여 새로운 극형식으로 묘사한 <이르쿠츠크 이야기>(1959)이다.

그 후의 작품으로는 <23시 너머> <잃어버린 아들> <불쌍한 나의 마라트> <밤의 고백>(1967) 등이 있다.

소프로노프, 아나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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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ory Sofronov(1911- )처음에는 시인으로 출발했으나, 희곡 <어느 마을에서> <모스크바 기질(氣質)>(1948)로 극작가로 인정받았다. 이들 작품은 그 후의 작품 <돈> 등과 함께 여러 극장에서의 상연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미할코프, 세르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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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Mikhalkov(1913- )그의 문학활동은 시, 우화, 희곡 등 여러 장르에 미치며, 희곡만 해도 <톰 켄치>(1938)에서 <솜브레로>(1957)에 이르기까지 10여 편이 된다.

이들 중에는 어린이에게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아름다운 정서를 키우는 <트럼프놀이의 나라에서> <허영많은 토끼> <솜브레로> 등 일련의 아동극이 있다. 급행열차 속에서 교환되는 여객들의 세상 이야기 중에서 현대 러시아의 여러 부정적인 타입에 신랄한 풍자를 퍼부은 <어느 차(車) 안에서>가 있다. 5개의 단막으로 구성된 <어느 차 안에서> 등은 그의 재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시모노프, 콘스탄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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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in Simonov(1915-1979)산문, 극작, 비평 분야에서 활약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학자인데, 희곡으로는 <어느 사랑의 이야기>(1939)를 비롯하여, 독·소전 전야(前夜)의 전중, 전후에 걸쳐 발표한 <우리 마을의 청년> <러시아의 사람들> <프라하의 밤나무 가로수 밑에서> <러시아 문제> <타인의 그늘> <네번째 사나이> 등 10편이 있다. 이 중 가작으로 알려진 <러시아 사람들>(1942)은 독·소전 남부전선의 한 일화에서 취재하여 평화로운 근로생활에 힘을 쏟는 소박한 사람들이 조국과 국민을 위해 서슴지 않고 사지(死地)로 나가는 광경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낸 것이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시모노프의 희곡은 영화화된 것이 많다.

로조프,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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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Rozov(1913- )

처녀작 <그녀의 친구들>이 모스크바 중앙 아동극장에서 상연(1949)된 이후, 계속 <생활의 한 페이지> <안녕하시길!>이 같은 극장에서 각광을 받음으로써 작가적 지위를 확보했다. 그 후 <기쁨을 찾아> <영원히 사는 것> <일방적인 싸움> <결혼날에> 등 신작이 나올 때마다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 작품을 일관하는 주제는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옮겨 가는 젊은이들의 생활기(生活期)와 의견이며, 평범한 시민가정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마찰 속에서 그들의 인생에 대한 눈이 열리고, 스스로의 길을 결정해야만 된다는 것과, 자연적으로 높아지는 극적인 긴장속에 신구(新舊)세대의 낙차(落差)와 갈등의 원인을 찾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는 청년의 심정과 논리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알료신, 사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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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il Alyoshin(1913- )

1950년에 최초의 희곡 <공장장>을 쓴 이후, 계속 <엄격한 처녀> <나 홀로>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등 많은 희곡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러시아의 생활에서 제재를 취하고, 현대사회의 윤리적 규범과 사회주의적 도덕의 여러 문제에 파고들어 현실생활을 철학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들 현대극 외에 <고골리> <셰익스피어> <돈 주앙>등 일련의 전기극(傳記劇)을 쓰고 있다. 긴밀한 극적구성을 가지고 예리한 심리적 갈등이 풍부한 그의 희곡은 러시아 국내뿐만 아니라,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널리 상연(上演)되고 있다.

볼로딘, 알렉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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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Volodin(1919- )1956년에 희곡 <공장의 처녀>를 발표, 그 후 <오야(五夜)> <손님일 때, 집에 있을 때> <우리집 누님> <임명(任命) 등의 희곡을 썼다. 경묘한 회화와 줄거리, 엉뚱한 진전을 갖는 청신한 수법으로, 생활이나 교양이 그리 높지 않은 평범한 시민의 애환 속에서 낡은 인습이나 편견, 속물적(俗物的)인 사물의 관찰태도나 심리에 저항하는 청년들을 묘사하고,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범속한 성격이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분명히 하는 일이 일관된 그의 사상이다. 사회에 있어서의 평범인의 사명과 역할이라는 작자의 철학적 사색이, 풍부한 정서와 함께 섞이어 조용한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그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와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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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극장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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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劇場現況

러시아의 극장은 모두 국립 내지 공립이며, 사영극장은 없다. 또하나 말해 둘 것은 극장과 극단이 일체라는 점, 즉 극단은 항상 상설된 자기의 극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농촌이나 도시의 문화회관, 클럽 등을 순회하는 이동극단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극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극단을 포함하는 극장인 것이다. 또한 각 극장은 앙상블을 존중하기 때문에 교류나 객연(客演)의 제도는 있어도 행사는 아주 드물다. 따라서 연출자나 배우는 극장에 전속(專屬)되어, 자유로운 극장인은 매우 적다.

서커스나 이동무대를 제외한 각 극장의 상연종목은 매일 바뀐다. 예를 들어 예술극장의 경우, 오늘 <죄없는 죄인>을 상연한다면 내일은 <겨울이야기>, 그 다음날은 <안나 카레니나>를 상연하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며 일요일에는 마티네(matinee)가 있다.

현재 러시아에는 약 5백개의 극장이 있는데, 이것을 장르별로 보면, 오페라 발레 극장 33, 뮤지컬 코미디 20, 아동극장 100, 나머지 350이 드라마 및 코미디, 기타로 되어 있다. 이 중 모스크바에 약 30, 레닌그라드에는 20개의 극장이 있는데, 몇 개의 대표적인 극장을 예로 들어 본다.

볼쇼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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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shoi劇場(BolshoiTheatre of Op­era and Ballet)

구 제실극장으로서 예로부터 알려져 있으며 그 기원은 1776년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1853년 화재를 만나 그 터전에 재건된 것으로, 수도의 중심인 스벨드로프 광장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글린카, 볼로딘,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이 샤리야핀, 소비노프 등의 명가수에 의해 이 무대에서 각광을 받은 것처럼, 볼쇼이 극장은 러시아의 오페라·발레의 요람이며, 음악문화의 중심이었다. 현재의 상연목록은 <보리스 고두노프> <스페이드의 여왕> <춘희>와 같은 러시아와 서유럽의 고전뿐만 아니라, 아사피에프, 프로코피에프 등 현대작가의 작품이 그 반 이상을 차지하는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극장 출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가수로는 남성으로 페트로프, 여성으로는 비시네프스카야, 아르히포와 등이 있다. 발레리나로서는 프리세츠카야, 스토르치코바가 알려져 있다. 좌석이 2,171개인 이 극장은 해마다 늘어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없어, 근년에는 크레믈린의 대회궁전(좌석은 5,803)을 부속극장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키로프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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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ov劇場(kirov Opera and Ballet)

제정 러시아 당시의 마린스키(mariinski) 극장으로서 볼쇼이 극장에 다음가는 오페라 발레극장이다. 레닌그라드의 극장광장(劇場廣場)에 있으며 현재의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60년이다. 좌석은 5층으로 되어 있으며 좌석수는 1,774개라고 하는데 청색과 백은색(白銀色)의 빛을 기조로 한 내부장식은 그 고아(高雅)한 취미로 관객을 매혹한다. 이같은 관객석의 색채와 분위기는 그대로 무대에까지 반영되어, 호화 찬란한 볼쇼이 극장과 구도(舊都)다운 기품에 넘친 키로프 극장의 우아한 무대는 매우 대조적이다. 특히 이 극장에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2백여년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발레단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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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kva 藝術劇場(Moskva Art Theatre)1898년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에 의해 창립. 그 탄생이 세계의 근대극운동에 끼친 영향은 연극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극장이라면 우선 <세 자매>나 <밑바닥>의 무대가 생각나는 것처럼, 그것은 체호프와 고리키에 의해 성장한 극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극장의 상연목록은 그러한 제정시대의 고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연극사에 한 시기를 이룬 이바노프의 <장갑열차>, 포고진의 <크레믈린의 큰 시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현대극이 상연되고 있다. 이것은 무대의 진실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을 향한 이 극장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이 극장은 시가의 북쪽, 일반 주택지가 있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며 내부도 요란스런 장식이 전혀 없는 간소한 것으로 객석수는 1,183개, 3층 좌석의 제일 뒤 객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여서 드라마 극장으로서는 아주 이상적인 규모이다.

말르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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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y劇場(Maly Opera Theatre)1824년에 개장된 러시아 최고(最古)의 극장. 이것을 말르이(maly, little) 극장이라고 부른 것은 볼쇼이(Bolshoi, great) 극장에 대해서 칭한 것으로, 이른바 실내극 용(用)의 소극장과는 달리 좌석, 1,099개의 황색의 벽과 백색 원주(圓柱)로 된 당당한 건물이다. 러시아 문학사상(文學史上) 불멸의 빛을 발하는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이나 고골리의 <검찰관>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었고,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로프스키라는 위대한 극작가의 출현으로 그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무대에 오른 이 극장은 러시아 국민연극의 리얼리즘의 기초를 쌓는 중심이 되었다. 이같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이 극장의 고전극은 다른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말르이극장은 고전을 즐겨 상연하는 박물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대작가의 희곡을 계속 채택하여, 현대극이 고전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바흐탄고프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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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khtangov劇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제자이며 그 시스템의 협력자였던 바흐탄고프를 지도자로 하여 1921년에 창립된 극장. 옛날엔 예술극장 제3연구극장(The Third Studio)으로 불리고 있었다. 창설자가 남긴 명연출 <투란도트 공주>에 의해 이 극장은 러시아 제1선의 극장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재능있는 제자들의 단결과 협력으로 훌륭한 성장을 이루어, 오늘날엔 말르이 극장이나 예술극장에 뒤지지 않는 애호가와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진실을 엄하게 추구하는 반면, 연극의 축제성(祝祭性)이나 외면적 형식을 소홀히 하지 않는 창립자의 이념을 최상의 모토로 삼고 있다. 현재의 상연목록으로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고전과 함께 많은 현대작가의 작품도 채택되고 있으며, 그 무대도 원숙성을 보이고 있다. 건물은 독·소전 때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다. 좌석은 1,057석이다.

레닌그라드 푸슈킨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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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ingrad Pushkin劇場

옛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모스크바 말르이 극장 다음가는 옛 극장으로서 1832년에 창립되었으며, 시의 중심인 네프스키가(街)의 남쪽, 오스트로프스키 광장의 정면에 서 있고, 건축가 로시의 설계로 이루어진 암필식(式) 건물(좌석 1,365)은 세계 유수의 아름다운 극장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제정시대에는 주로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등의 서구 고전과 고골리, 오스트로프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것을 상연, 그 무대에서 많은 명배우를 낳았고, 사실적인 예풍(藝風)과 레퍼토리를 갖는 드라마 극장으로서, 19세기 러시아 국민연극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혁명 후에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여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의 하나로 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아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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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ingrad 兒童劇場

아동을 위한 극장을 보통 츄즈라고 약칭한다. 어린 관객을 대상으로 하여 어른 배우가 연기를 하는 직업적인 전문극장이며, 전국 주요도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1922년에 창립된 레닌그라드 아동극장은 연극인과 교육자의 결합과 협력으로 뛰어난 조직을 가지며 전국의 츄즈 운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극장은 피오넬 광장에 있으며, 무대와 객석은 반원형(좌석 998)으로 되어 있고, 상연목록은 고·중·저학년의 3종류이며, 저학년에게는 환상적인 민화(民話)나 동화, 고학년에게는 현대 청소년이 나아갈 길이나 생활을 그린 드라마를 상연하는 등, 연령과 지력(知力)에 적합한 것이 선택되어 매일 단체입장으로 붐비고 있다.

중앙인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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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人形劇場

1931년 오브라스초프라는, 음악, 미술, 연기, 연출 등에 다재다능한 연출가의 지도 밑에 모스크바에서 탄생하여, 오늘날 인형극이라면 곧 그 이름이 연상될 만큼 세계적인 극장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러시아의 옛 인형극 페트르시카의 전통을 밟으며, 아름다운 환상과 예리한 풍자를 뒤섞어 새로운 인형극을 만들어 낸 것으로 오늘날에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애호하는 극장이 되고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네미로비치 단첸코 기념음악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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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lavsky·Nemirovich Danchenko 紀念音樂劇場 1919년에 발족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오페라 연구극장과 네미로비치의 음악연구극장이 1941년에 합동한 것이다. 음악극장에는 단순한 가수나 무용가가 아니라, 악보가 명하는 그대로 인물의 심리·성격·환경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연기자가 있어야 한다는 두 창설자의 이상(理想)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 상연목록은 오페라, 뮤지컬, 발레 등 음악극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고 있으며, 러시아 오페라의 실험실이라는 말 그대로 현대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 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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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슬라프스키, 콘스탄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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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in Stanislavsky(1863-1938)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네미로비치 단첸코,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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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Nemirovich Danchenko(1858-1943)

그의 예술의 특색은 가열성(苛烈性)과 준엄성(峻嚴性)에 있으며, 그 연출의 필치는 힘의 집중과 간결성에 넘쳐 있었다. 그의 연출법은 자연주의나 형식주의와도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희곡의 이념에 따라, 극에서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가면서 가장 풍부한 표현과 필요 불가결한 세부(細部)를 찾아 나갔다. 그는 거짓말투성이의 '연극성'에 대적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단순성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를 온순한 사진가로서 이해하는 일을 단연 거부하고, 동시에 정신빠진 형식주의·유미주의(唯美主義)와 싸웠다. 그의 예술적 입장, 원칙, 미학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동일하며, 이 두 사람의 연극개혁자가 지향하는 길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에르홀리드, 프세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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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evolod Meierhold(1874-1942)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주재하는 필하모니 음악연극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과 함께 배우로서 예술극장의 창립에 가담하였으나, 그 자연주의·심리주의적인 경향에 만족하지 못하여 이곳을 떠나, 제정 말기에는 페테르부르그에서 연출가로서의 신선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10월혁명이 이루어지자 그는 재빨리, 자기를 소비에트 정권의 편이라고 선언하고, 1920년에는 새로운 극장을 조직하여, 연극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에의 참가, 정치사회문제를 취급한 아지프로 극(劇)의 창조, 극장인의 정치적 무관심의 타도를 호소했다. 그의 슬로건인 '연극의 10월'은 소련 전토에 퍼져 벨하렌의 <여명(黎明)>을 비롯한 일련의 연출은 세계의 극단을 놀라게 했다. 그의 명연출은 메이에르홀리드 극장의 <산림> <검찰관> 등이 있다. 그러나 30년대 중엽부터 메이에르홀리드의 예술적 파탄이 나타나 극장 운영이 곤경에 빠져, 1938년에는 정부명령으로 극장이 폐쇄되고, 그 자신의 소식도 묘연해졌다. 그 후 18년간, 그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어 실각되었다가 1953년에 그 명예가 다시 회복되었다.

타이로프, 알렉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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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Tairov(1885-1950)페테르스부르그 대학시대에 명여우 코미사르제프스카야의 극단에 참가한 것이 그의 연극생활의 제1보이며, 배우 및 연출가로서 각지의 극단에서 일을 한 후, 1914년 모스크바에 카메르느이 극장(Kamerny Theatre)을 창립했다. 카메르느이는 실내를 뜻하는 것인데, 사실 이 극장은 1931년 개축할 때까지는 좌석 750여개의 작은 극장이었다. 문학과 회화로부터 해방된 극장, 율동적인 배우의 동작과 연기, 무대의 입체적 구성과 새로운 의상의 고안, 극과 음악과 무용의 유기적 결합, 이것이 카메르느이 극장이 내건 슬로건이었다. 초기의 카메르느이 극장은 오페레타, 비극, 소극(笑劇) 등 여러 장르의 각본을 취급했으나 그 레퍼토리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그 하나는 타이로프의 아내이며 수석여우(首席女優)인 아리사 코넨을 주역으로 하는 <안티고네> <살로메> 등의 비극이나 드라마, 다른 하나는 <싸구려 오페라> <낮과 밤>으로 대표되는 오페레타이다. 그리고 이 양자에 공통되는 것은 새로운 형식과 기교의 끊임없는 탐구에 있었다. 그러나 30년대의 러시아예술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의 풍조는 이 극장을 형식주의로부터 탈피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933년의 비시네프스키의 <낙천적 비극>의 상연은 새로운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이 극장의 하나의 도표가 되었다. 무대의 요소를 모두 작품의 이념 해명과 표현에 종속시키고, 올바른 현대인의 형상(形象)을 창조하려는 타이로프의 노력은 전후의 여러 작품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하는데, 그는 최후까지 모더니즘과 유미주의의 무거운 짐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이른바 지다노프 비판 후, 1950년 카메르느이 극장은 36년간의 역사의 막을 내렸다.

바흐탄고프, 에프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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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geny Vakhtangov(1883-1922)혁명전부터 예술극장 및 그 연구극장에서 연출가·배우로서 일하는 한편, 젊은 학생들의 연극 서클의 지도자가 되었고 또한 몇 개의 연극학교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가르침을 넓히는 배우 교육자가 되었다. 1920년 그가 이끄는 집단은 예술극장 제3연구극장의 명칭을 받고, 이듬해 11월 그가 연출한 메테를링크의 <성 안토니의 기적>으로 새로운 극장이 공식적으로 발족하였으며, 이것이 바흐탄고프 극장의 창립일이 되었다. 이 밖에 그가 연출한 작품은 예술극장 제1연구극장에서의 스트린드베리의 <에릭크 14세>, 유태극장 가비마에서의 안스키의 <가디부크>, 고치 원작의 <투란도트 공주>뿐이다. 이들 4개의 작품은 혁명 전 그가 연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20년대에 있어서의 혁명연극은 무대에서의 내면적 체험을 부정하고, 배우술을 단순한 외면적 기술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의 연기는 그 기교의 다채로움으로 해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는 했으나, 등장인물의 행동은 내면의 심리적 필연성이 결여(缺如)된 것이었다. 바흐탄고프의 길은 이와는 달리, 자연주의나 심리주의 연극에서 가치있는 것, 즉 인간감정의 살아 있는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것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메이에르홀리드의 연극 시스템의 유기적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흘로프코프, 니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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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Okhlopkov(1900-?)소년시대의 고향인 이르쿠츠크에서 연극에 손을 댄 것이 인연이 되어, 20세 전후에는 그곳에서 연출을 하게 되었고 1923년 메이에르홀리드 극장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쌓아, 그 지도자에게서 큰 감화와 영향을 받았다. 30년대에는 사실극장(寫實劇場)을 주재, 그 후 바흐탄고프 극장을 거쳐, 1943년부터는 당시의 혁명극장, 현재의 마야코프스키 극장의 수석 연출가가 되었다. 그의 연출의 특징은 연극의 조건적인 표현수단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극에 장대한 사회비판적인 울림을 주는 일인데, 그 장대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리얼한 생활적인 것이다. 연극에서 허용되는 모든 수단, 음향이나 조명에 의한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작용을 주기 위해 음악을 담뿍 집어 넣어, 이로써 배우의 연기를 보충하고, 더욱이 관객의 마음을 끌며, 고무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때때로 극을 관객석으로 옮기고 배우는 통로나 좌석 위에 만든 발판 위에 나타나곤 한다. 이런 수법은 옛날의 메이에르홀리드와 똑같다. 그의 대표적인 연출은 파제에프 장편의 각색물인 <젊은 친위대>와 <햄릿> 등이다.

토프스토노고프, 게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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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y Tovstonogov(1915-?)젊은 시절부터 토비린, 모스크바의 여러 극장의 배우, 연출가로 일하고 1949년 레닌그라드의 콤소몰 극장의 예술지도자가 되었으며 1956년부터는 볼쇼이 드라마 극장의 수석연출가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8년의 푸슈킨 극장에서의 <낙천적 비극>의 연출을 맡고 난 뒤부터인데, 이같은 비창(悲愴)한 드라마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내면적으로 밝고 맑은 색채를 띤, 장대한 극이 되는 것이다. 근년의 <지혜의 슬픔> <세 자매> 등의 고전에서 보인 그의 새로운 연출 수완은 이 연출자를 현대에서도 가장 대형적인 연출가 대열에 끼워 놓았다.

아키모프, 니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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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Povovich Akimov(1901-?)1920년대부터 예리한 무대미술가로서 알려져 있으나 1935년부터 레닌그라드 코미디 극장의 지도자가 되어 연출과 무대미술의 양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등장인물의 우둔, 위선, 시정인의 근성, 그릇된 정열, 돈키호테성(性)을 통렬하게 조소하고, 익살스런 의상이나 분장으로 배우를 가면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가끔 이러한 가면이 배우를 속박하고, 배우는 가면적 형상 속에서 스스로의 개성을 몰각해야만 할 경우가 생긴다. 무대미술가가 연출가의 영역으로 들어가, 배우의 창조적 의욕을 제약하고 감쇄(減殺)해 버리는 예이다. 그러나 기지에 뛰어난 그의 예리한 연출은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자적인 무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플루체크, 발렌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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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 Pluchek(1909-?)

메이에르홀리드 극장의 부속연극학교 출신으로서, 동(同) 극장의 배우를 거쳐 극작가 알브조프와 연구극장을 일으켰으나, 독·소전의 발발로 중단되었으며, 전후에 다시 활동을 개시하여 1957년 모스크바 풍자극장의 수석연출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목욕탕> <빈대> <미스테리아 부프>를 계속 연출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연출에 있어서는 예리한 풍자정신과 밝은 시정(詩情)이 훌륭히 결합되어, 독특한 축제적 활기와 신선한 호흡이 넘쳐 있다는 점 등에서 옛날의 메이에르홀리드의 연출과는 다른 감흥을 주고 있다.

케드로프, 미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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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hail Kedrov(1893-?)

예술극장의 배우·연출가. 1946년부터 그곳의 주임 무대감독을 맡고, 현재 러시아극단의 최고 스태프의 한 사람이다.

스타니츤,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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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Stanitzn(1897-?)

예술극장의 배우로 시작하여 1934년 이후 연출가가 되었고, 예술극장 예술부장을 역임하였다.

라예프스키, 이오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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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sif Raevskii(1900-?)

예술극장의 연출가의 한 사람. 예술극장의 연출의 특질은 관객이 극장에 있다는 것을 잊고, 등장인물의 심리체험에 몰입하여, 그들의 생활과 친숙해지고,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기뻐하는 그러한 경지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점에 있다.

자바드스키,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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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i Zavadskii(1894-?)

바흐탄고프 연구극장에서 1924년 예술극장으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하는 한편 자기의 연구극장도 일으켜서 이를 지도하였고, 1940년부터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극장의 수석연출가로 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전시(戰時)중의 <내습(來襲)>, 전후의 <가면무도회> 외에 몇 개의 셰익스피어극이 있다.

시모노프, 루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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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 Simonov(1899-?)

바흐탄고프 극장의 주역으로서 1939년 이래 이 극장의 수석 연출가였다. 자바드스키와 함께 그의 연출의 특색은 우아한 연극성, 섬세한 유머, 경쾌한 연극형식에 있다.

크네벨리, 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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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ya Knebel(1898-?)

예술극장의 여배우. 1935년부터 연출가가 되어 엘모로와 극장, 예술극장 등에서 연출 담당, 56년에서 60년까지 중앙아동 극장의 수석 연출가로 일했다. 대표작품으로는 푸슈킨 극장의 <이바노프>가 있다.

류비모프,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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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y Lyubimov(1917- )

바흐탄고프 극장 부속연극학교 출신으로 47년 동 극장의 배우가 되었고, 동시에 연극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63년에는 자기가 맡고 있던 클라스의 졸업기념 공연으로 브레히트 작 <세츄안의 선인(善人)>을 상연하였는데, 이의 성공으로 클로즈업되었다. 이듬해의 시즌부터는 이들 졸업생을 이끌고 타간카 광장의 드라마 코미디 극장의 수석 연출가로 취임했다. 여기서 그가 연출한 <세계를 뒤흔든 10일간>(존 리드 원작)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극장이 연극성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극작 그 자체를 경시하여 스스로의 상연 대본에 의지하는 경향에는 위험성이 있다.

예프레모프, 올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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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eg Efremov(1927- )

예술극장 부속연극학교 졸업과 함께 중앙아동극장으로 들어가 배우 및 연출가가 되었으나 1957년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청년배우 연구극장을 결성, 이듬해 이것이 연구극장 '현대인'으로 개칭되어 이곳의 수석 연출가를 지냈다.

예리한 사회비평을 곁들인 시민적 감정, 적절한 서정성과 잘 융화된 신선한 현대적 감각, 충만한 젊은 에너지 등이 그의 특색있는 연출이며, 짦은 시일 안에 많은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모노프, 예프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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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geny Simonov(1925- )

바흐탄고프 극장 출신으로 1962년부터 말르이 극장의 수석 연출가로 있었다.

리보프=아노힌, 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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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Lvov-Anokhin(1926- )레닌그라드 연극대학 출신. 연극학자로서도 유명하다. 중앙 소련군 극장의 연출가를 거쳐 1963년부터는 스타니슬라프스키 기념드라마 극장 수석 연출가가 되었다.

코미사르제프스키,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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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Komissarzhevsky(1912- )

1934년부터 배우로 프메료프 연구극장에 속하였고, 41년부터는 연출가로서 활동했다. 현재 엘모로바 극장 수석 연출가이며 연극 평론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라벤스키흐, 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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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Ravenskikh(1914- )

레닌

그라드 연극대학을 졸업한 후, 1938년까지 메이에르흘리드 극장의 연출조수로 일하였고, 스타니슬라프스키 기념극장과 말르이 극장의 연출가를 거쳐, 1960년 모스크바 푸슈킨 극장의 수석 연출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