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토막 생각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는 날부터 돈 들것 꼽아보다가
손가락 못편채로 잠이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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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生命)
「네 대(代)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祝福) 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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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삼십(三十)에 해논것 없고
물려 줄것이라곤 「선인(鮮人)」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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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給仕)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月給)날도 다시는 안올상 싶다
그나마 실직(失職)하고 스무닷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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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電燈) 끊어 가던날 밤 촉(燭)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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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五官)으로 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朝鮮) 팔도(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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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화로(火爐)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내듯이
식어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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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獄中)에서 처자(妻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百貨店)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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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 한잔 내라는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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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신경(神經)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新聞)만 펴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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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百年)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

193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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