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형에게
H 형[1]
형의 글 반가이 읽었습니다. 저의 못난 여편네[2]를 위하여 귀중한 하룻밤을 부인으로 하여금 허비하시게 하였더니 어떻게 감사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인께도 이 말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형의 〈명상〉을 잘 읽었습니다. 타기할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의 저로서 계발받은 바 많았습니다. 이것은 찬사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저에게 주신 형의 충고의 가지가지가 저의 골수에 맺혀 고마웠습니다. 돌아와서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옳은 도리를 가지고 선처하라 하신 말씀은 참 등에서 땀이 날 만치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 노릇을 못 하고 있습니다. 계집은 가두(街頭)에다 방매하고 부모로 하여금 기갈케 하고 있으니 어찌 족히 사람이라 일컬으리까. 그러나 저는 지식의 걸인은 아닙니다. 칠 개 국어 운운도 원래가 허풍이었습니다. 살아야겠어서,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당분간은 모든 제 죄와 악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도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친구, 가정, 소주, 그리고 치사스러운 의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전연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라도 싸우면서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비틀어져서 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조광〉 2월호의 〈동해〉는 작년 유월경에 쓴 냉한삼곡(冷汗三斛)의 열작(劣作)입니다. 그 작품을 가지고 지금의 이상을 촌탁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회한(悔恨)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속여왔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아왔거니 하던 제 생활이 지금 와보니 비겁한 회피의 생활이었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입니다. 빈자떡, 수정과, 약주, 너비아니, 이 모든 기갈의 향수가 저를 못살게 굽니다. 생리적입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가끔 글을 주시기 바랍니다. 고독합니다. 이곳에는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서울의 흙을 밟아볼는지 아직은 망연합니다. 저는 건강치 못합니다. 건강하신 형이 부럽습니다. 그러면 과세(過歲) 안녕히 하십시오. 부인께도 인사 여쭈어주시기 바랍니다.
우제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