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무거무래역무왕(無去無來亦無往)
여시료지삼세사(如是了知三世事) 초제방편성십력(超諸方便成十力)

인물(人物)

법흥대왕(法興大王) 신라 23대왕, 원종(原宗), 50여 세.
왕비보도부인(王妃保刀夫人) 법흥왕비, 40여 세.
성국공주(成國公主) 법흥왕의 계녀(季女),18∼9세.
이차돈(異次頓) 내사사인(內史舍人), 한사(韓舍), 26세.
철부(哲夫) 위화부령(位和府令), 이찬(伊湌), 50여 세.
이사부(異斯夫) 조부령(調俯令), 소판(蘇判), 40여 세.
실죽(實竹) 병부령이(兵部令伊), 벌찬(伐湌), 60여 세.
공목(工目) 이방부령(理方部令), 급찬(給湌), 40여 세.
알공(謁恭) 사정부령(司正府令), 대아찬(大阿湌), 30여 세.
노선(老仙) 남무(男巫) 혹(或) 운박사(云博士), 근100세.
아도(阿道) 비구(比丘), 70여 세.
모례(毛禮) 신사(信士), 30여 세.
사시(史詩) 모례매(毛禮妹), 21∼2세.
모례모(毛禮母) 60여 세.
거칠부(居柒夫) 내사사인, 24∼5세.
예작부령(例作府令).
집사성조주(執事省祖主).
내인(內人) 10여 인.
치성(雉省) 6인.
상인도전(上引道典) 4인.
흑개감(黑鎧監) 4인.
시위대감(侍衛大監) 2인.
대두(隊頭) 수인(數人).
령(領) 수인.
옥졸(獄卒) 10여 인.
행자(行者) 수인.
촌부 3인.
시민 다수.

처소(處所) 신라국 수도.

시대 자금(自今) 1403년 전 신라 제23대왕 법흥대왕 14년으로부터 15년 8월 초5일까지.

전희(前戱)

영산회장곡(靈山會上曲)
미타찬(彌陀讚)
본사찬(本師讚)
관음찬(觀音讚)

제1막

편집

첫여름 이른 아침.

영지(靈地) 남산 여지암(南山與知巖)

오른쪽은 바위로 된 언덕, 언덕 너머는 일면의 울창한 수림, 언덕 위로 엇비슷이 험준한 암벽이 있고 벽 앞은 넓고 편편한 반석이 깔리었다. 반석대 위에는 사람이 타고 걸터앉을 만한 소암(小巖)이 두어 개 늘어 있다. 왼쪽은 비탈로 되었는데 일대가 모두 성굿한 대수풀, 대숲 너머 저쪽으로는 신라 서울의 성곽과 시가가 멀찌기 보인다. 더 그 밖으로는 먼 산의 참차(參差)한 연봉, 하원(河原), 기봉(奇峯)을 이룬 백운(白雲)이 감아 아득히 보인다.

(반석대 위에 어룡성(御龍城) 치성들, 모두 스무 살 안팎 준수한 미남자, 치성갑은 서서 거닐고 치성을은 다리 뻗고 모로 반쯤 드러눕고 병은 쪼그리고 앉았고 정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치성갑 어째 입때들 아니 오시노.

치성을 아직도 푸서리길에 이슬이 많은 터이니까.

치성병 (하품을 하고 비스듬히 드러누우며) 벌써 우리가 이게 며칠 째야. 짧은 밤에 단잠도 다─ 못자고 새벽부터…….

치성정 (기지개를 켜며) 그럼 우리의 구실이 노상 이렇지 별 수 있나.

치성을 이 사람 내려앉게. 거기는 이따 상감마마께옵서 앉으실 자리인데.

치성정 아따 제길할 자식, 나 상감님 자리에 앉았으나 저 상감님 앞에 드러누웠으나.

(일동 웃는다.)

치성갑 옛적부터 거룩하다는 이 여지(與知) 바위도 이제는 영검이 없어졌단 말인가. 무슨 놈의 의논을 벌써 며칠째 해야 밤낮 제턱 날마다 그 시늉이니. (앉으며) 일이 끝장이 나야 한다는 말이지. 이건 생으로 사람을 기름만 내리는 것이지 무어야.

치성병 하긴 이번 일이 처치하기가 어렵기는 퍽 어려울 게야. 죄 없이 사람의 피를 여간 많이 흘렸어야지. 중들도 하늘 밑에 인버러지일 터인데.

치성정 (일어나 앉으며) 그러기에 말일세. 중놈이라면 아비 죽인 원수보다도 더한지 눈에 언뜻 띄이기만 하면 이를 갈고 덤비어 미친 개 때려잡듯 하니.

치성을 오늘도 천경림(天鏡林) 근처에서 하나를 붙잡아 불에다 태워 죽인다든가.

치성정 (일어나 앉으며) 나도 요전에 귀정문(歸正門) 밖에서 날 화장 시키는 것을 한번 보았지마는 참 보기에도 너무 몸서리가 나고 지긋지긋하데. 그래도 죽는 사람은 연방 염불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죽을 때까지 눈은 딱 감고 입을 쭝긋쭝긋하며 무엇을 중얼거리는 듯하데 그려, 흥 염불 그 경칠 놈의 염불 좀 고만두고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나 말지. (다시 눕는다.)

치성갑 아닐세, 그 사람의 중얼거리더라는 것은 염불이 아니라 반드시 이 나라 사람들을 독하고 모진 소리로 원망하며 푸념을 하던 것이든가 보네.

치성병 그러나 그것도 참 이상한 노릇이야. 그렇게 몹시 붙잡는데도 구박을 하고 죽이어 없앴건마는 그래도 연방 어느 틈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죽으러만 가니…….

치성을 요사이는 성골(聖骨)의 겨레 귀한 집 자손들도 많이 그것으로 몰리어 죽나 보데.

치성갑 아무튼 이제는 하늘이 무심치 않을걸세. 생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서야 큰일이 안 나! 이번 길에 모진 죽음을 한 원악한 귀신들이 모두 떼를 지어 몰리어 다니며 무서운 소리로 부르짖고 푸른 불길을 내뿜어 이 땅을 맨잿더미가 되도록 태워 집어놓거나 무슨 짓이라도 하던지 하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일세. 어─허 생각 뒤만 하여도 가슴이 선뜩하고 머리살이 쭈뼛거리여서.

치성병 하기는 이제 그렇게 극성을 피우며 사람을 못살게 굴던 이들이 꼬리를 샅에 끼고 쥐구멍을 찾을 날도 머지 않을 게야. 더구나 요새는 인심도 달리 도는 모양이니까.

치성정 우리의 이 구실도 목숨이 아까워서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여러 해 묵은 이 체증을 얼른 쏟아버릴 무슨 용한 약이든지 한때 바삐 있기는 있어야 하겠는데…….

치성갑 될 수 있으면 요사스러운 꽃은 꺾어 없애고 거세고 독한 풀은 뿌리째 뽑아버려 어서 길을 떠나야하겠다. 행군취타(行軍吹打)를 해야겠다. (일어나 더벅더벅 두어 걸음 걷는다)

치성 정 (일어서며) 그래도 될성부른 떡잎은 고히 잘 가꾸어 주어야지.

(고요한 풍류 소리와 함께 상인도전(上引道典)의 '쉬─' 하는 전도(前導) 소리가 들린다. 치성들은 놀래 곤두박질을 해서 몰리어 얕은 자락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상인도전 네 사람이 앞을 서고 법흥대왕, 웅위한 몸에 무사의 복색을 차린 시위대감이 나란히 2인,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異次頓), 노선(老仙), 철부(哲夫), 실죽(實竹), 이사부(異斯夫), 공목(工目), 알공(謁恭), 차례로 등장. 흑 개감(黑鎧監) 4인은 대왕을 옹위해 서서 걷는다. 그러나 허리를 펴고 걷는 이는 대왕 한 사람뿐.

대왕은 바위에 걸터앉고 시위대감은 왕 뒤에 갈라서고 노선과 이차돈은 왕 앞에 마주 꿇어앉고 철부, 실죽, 이사부, 공목, 알공은 왕의 앞으로 멀찍이 벌려 앉고 흑개감은 네 모퉁이에 갈라서고 상인 도전은 왕의 앞 멀찍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왕이 앉기를 기다려 치성들은 그 자리에 일어선다. 위의(威儀)는 있어도 모두 숭엄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돈다)

(흩날리는 백발을 쓰다듬으며) 덕 없는 이 몸이 겨 속에 깊이 들어있어 밤이나 낮이나 매양 놓이지 않는 마음은 "어찌하면 이 나라를 거룩하고 가미로웁게 할까. 어찌해야 우리 백성이 평안하고 넉넉할고." 하는 애타는 걱정이 그지없으매 이리 여러 날을 두고 너희에게 간절히 묻노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나라를 위하여 충성된 뜻과 말을 아까지 말고 숨기지도 말고 모두 나에게 들릴지어라.

철부 (두 팔로 땅을 짚고 허리를 굽히었다가 다시 일어나 앉으며) 아뢰옵기 젓사오나 사람의 가장 높은 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께서 계실 줄로 믿사오며 그 덕을 쓰실 이도 임금님 밖에는 아니 계실 줄로 아옵거니와 이 서벌 나라의 기리는 이름을 빛나옵게 드날리시오매 위로는 조상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래로 머리 검은 짐승들을 다사롭게 다스리옵시사. 백성마다에게 두굿기고 그리워하며 찾고 바라는 것을 고루고루 나누어 주옵시려 하옵시니 그 거룩하옵고 크낙하옵신 덕을 어찌 무슨 입으로 적다 이르겠사오릿고.

착한 사나이여, 너의 갸륵한 말은 아름다이 들었노라. 그러나 어찌하여야 내게 그러한 거룩하고 굳세인 힘이 있을고. 그것을 한번 가르쳐 보라.

실죽 거룩하옵신 상감님께옵서 높은 자리에 계옵시와 넓게 보살피시오며 밝게 다스리시오니 젓사옵건대 작고 무딘 입으로 구태여 무슨 말씀을 사뢰오릿가마는 이 나라가 이룩하오면서부터 남달리 어려운 땅에 있사오매 북으로는 억세인 고구려가 부쩍부쩍 내리누르고 게엄을 피우며 덤비우니 변방에 수자리 사는 병마가 평안할 날이 없었사오며 서으로 양세인 백제는 날마다 투정과 앙다툼으로 또한 좋은 사이가 아니였사오며 또 동남쪽 살피로 에둘린 바위에는 해적의 등쌀에 성가시러운 걱정이 나날이 차차 늘어만 가올 적에 그 속에 쌓여 부대끼는 설움과 괴로움이 정말 어떠하였겠사오릿가.

다행히 하늘이 도우사 폐하께옵서 이 나라에 임하옵시매 너그러우시고 두터우시고 다사로우사 두루두루 미욱한 백성을 사랑 하옵시며 영검 하옵시고 거룩하오사 널리 이 나라 땅을 빛내고 미쁘게 하옵시니 보배로운 자리에 오르신지 벌써 열이요 또 네 해 째이오되 그 만히 벌 떼 일어나듯 하던 변방의 도적은 꼬리를 감추어 이제는 군사들이 병장기 쓰기를 잊을 지경이오며 비가 순하고 바람이 고요로오매 사람마다 모두 배를 두드리며 거룩한 태평 시절을 거리마다 기려 노래하오니 하늘의 덕이 이미 지극히 높으옵시매 뼈에 사무치는 사망이 위에는 더 바라올 나위도 없을까 하옵나이다.

아니로다. 그것은 아니로다. 옛날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할아버지께옵서 일찍이 고구려에 볼모가 되옵시어 가서 계옵실 적에 갖은 설움을 촉촉히 받으시옵는 중에도 날뛰는 가슴을 누르시옵고 무섭게도 아리고 쓰린 고생을 다─ 참으시오며 기어이 뒷날 국운을 새롭게 하시사 든든하고 억세인 나라를 이루시려고 여러 번 다스려 벼르옵시고 굳게 맺히옵신 마음은 및 고국에도 돌아오옵서.

높은 자리에 오르옵시며부터 이 나라에도 새 빛이 돌고 큰 숨을 쉬게 되었으니 얼마나 갸륵하옵시고 즐거운 일인고, 땅을 널리 옵시려 땅비를 이르옵실 새 뚝을 쌓으며 동을 모으게 하옵시고 소수레를 만들어서 백성에게 쓰도록 하시옵시며 가뭄과 장마에는 구호와 진휼(賑恤)을 아끼지 아니하옵시고 늙은이를 먹이시옵고 어린이를 기르시오며 놀고먹는 이를 모두 부르사 일을 하도록 시키셨구나.

어허 하늘에 닿으신 거룩하고 높으신 덕 그 큰 뜻을 어찌나 해야 이 몸이 조금이나마 잃을 길이 있을고, 못생긴 이 몸이 몸 받은 그 큰일을 조금이라도 마깝게 하지 못할까 보아 그것을 밤낮 저어하기를 마지않노라.

철부 이 나라 땅에 부접해 사는 백성은 새로 어느 푸나무나 무슨 짐승들인들 든든하고 우람스럽고 거룩한 덕화(德化)를 입지 않은 게 있사오릿고. 다스리시온지 셋째 되는 해 봄 정월의 나을 신궁(奈乙神宮)에 거동하옵실 적에는 양산(揚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나 춤을 추는 듯 상서를 드리옵고 4년 여름 4월에는 비로소 병부를 두옵시며 7년에는 율법을 지으사 펴셨사오며 또 백관(百官)의 차례와 옷을 마련하시었사오며 어진 신하를 얻으러 하오실제 귀하옵신 몸이 구중에 깊이 들어 계옵셔 대궐 밖 일을 알 길이 없으시매 여러 준걸을 모아 마음대로 놀리고 멋대로 가닥질하게 하는 곳에서 그들의 행금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어 보옵신 연후에 어진 이를 뽑으시옵고 착한 이를 들어 쓰고자 하옵심이라.

그래서 귀한 집안 자제들 가운데에 모양과 거동이 엄전하고 바른 이를 가리어 부르기를 풍월주(風月主)라 하옵고 착한 선비와 훌륭한 스승을 구하여 두레를 짜고 패를 지어 효제(孝悌)를 장려하옵시고 충신을 힘쓰도록 하옵시며 또 어여쁜 처자들을 뽑아 가꾸어 원화(原化)를 삼으옵시니 도중(徒衆)이 구름 모이듯 날마다 서로 도의(道義)로써 사괴이고 돕고 사랑하오며 또는 노래와 풍류를 이끌고 산수 좋은 곳마다 즐겁게 돌아다니며 놀아서 먼 데나 가까운 곳에나 어디든지 좋은 땅이면 마음대로 놀고 싶은 데로 발자취가 아니 닿는 데가 없도록 하시어 주셨사오니 그네가 배운 것이 무엇이겠사오릿고. 충신과 열사(烈士)도 그리로 좇아 빼날 것이오며 그네가 뜻한 것이 무엇이겠사오릿고. 양장(良將)과 맹졸(猛卒)도 거기로 말미암아 뛰어나올 것이 아니오릿고.

오히려 소신의 이 늙고 미욱한 마음이오나 밤과 낮으로 비옵는 것은 다만 뜻하지 않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라도 저절로 거룩한 행실이 나타나며 못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여지이다고 할 뿐이로소이다.

실죽 그러하올시다. 철부(哲夫) 이찬(伊湌)의 사뢰옵는 말씀을 듣사오며 끝없는 감격이 가슴에 넘치오며 옛날 황창랑(黃昌郞)의 칼춤처럼 부닺는 마음이 번개치듯 새로금 깨우쳐 느끼어 지노이다. 어허 그런 일을 생각하오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앞을 가리옵고 붉은 피가 용솟음치지 않고서 어찌하오릿고.

어린 이의 몸으로 백제왕의 억세인 목을 널름 황랑(黃郞)의 의협스러운 춤이나 치술령(鵄述嶺) 신사당(神祠堂) 치술신(鵄述神) 어미의 남편이시던 제상 어른의 굳세인 넋이여. 어허 뜨거웁게 붉은 피와 뼈가 아프게 맺힌 마음은 억새밭 억세인 떨기마다 마디마디 방울방울마다 가시지 않는 피 흔적을 지니고 있지 안사오닛고. 아무리 독한 형벌 무서운 칼날 아래에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알랑거리여 달래 임에나 간사스러히 꾀수임에도 빠지지 아니하옵고 기어이 끝끝내 씩씩하고 매운 절개를 발보였사오니 그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이오닛고.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넋이요 착한 백성 풍월주네들의 기질이다. 아무리 열흘 붉는 꽃이 없이 피었다 곧 지는 꽃송일망정 잇대여 피고 지고 피는 영원무궁한 끈덕진 꽃이 계림(鷄林) 남아(男兒)의 기개며 체면이며 우리의 얼이며 힘이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을 일하러 왔으니깐 잠깐 빌어 있는 이 세상을 깨끗하게 살고 영화스럽게만 하면 고만이지. 그때는 죽더라도 아무 섭섭함도 없을 것이니라. 아니 그때는 아마 이 땅을 곧 떠나 평안히 쉬일 만한 어머니의 옛나라로 곧 돌아가게 될른지도 몰라. 그동안의 애를 퍽 많이 썼으니깐 저 한밝산의 굳은 웅자가 우리의 기상이며 정신이요 시바랄의 넓은 회포가 우리의 마음이니라.

어허 그러나 슬프도다. 이 나라는 동방의 햇빛을 받는 땅이언마는 이때껏 어둠 속에서 잠꼬대만 하였고 해와 달을 어버이로 모신 우리 백성들 거룩한 검님에 보내신 두굿기는 자손이언마는 어찌다가 무서운 구박에 그대지 울고 주림과 쪼들림에 그토록 파리해졌는고. 어─허─ 이제는 밝은 빛 검나라에서도 내어버린 자식으로 돌보지 않으십니까. 기별도 없고 소식도 끊겼으니 찾아가 뵈올 길조차 바이 없구나.

그러니 우리는 깨우쳐야 하겠다. 남달리 부지런해야 살 것이로서 배우기에 힘들을 쓰라. 굳세인 뜻과 가미로운 힘을 내이기에 게을리 말라. 서로서로 엉기어 무너지거나 헤어지거나 또 물러서거나 하지 않는 얼과 넋으로 새로이 길하고 이로운 운명의 성문을 흠뻑 두드리어 열어 터놓잤구나. 우리의 시방 운명은 망하는 것이 아니면 흥 하는 것뿐일세. 마음을 어울리고 힘을 묻거든 굳은 데는 꿰뚫고 억센 데는 헤쳐 나아가보라. 나라 지경 밖으로 뛰어 넘어가라. 바다로도 떠나가 보아라. 어─허 아진(阿珍)깨 앞바다에 어기여차 복 실러가는 배…….

실죽 옳도소이다. 백성을 윤택하게 하옵고 국운(國運)을 왕성케 하옵는 데는 아무러한 짓이라도 사양치 않겠삽나이다.

이차돈 옛적에는 우리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이웃 나라와 겨뤄보려 하오면 지식과 문물이 매양 뒤졌음으로 어찌나 모든 일에마다 이롭지 못하옴을 겪고 느끼였사온지요. 우리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려 하오면 한때라도 바쁜 것이 미욱함을 깨우치는 일밖에 더 없을까 하옵나이다. 남의 나라에서는 옛적부터 벌써 이웃의 모든 나라와 서로 널리 교통해 문물을 바꾸며 복스러운 일을 실어 들이기에 바빴건마는 가여웁게도 우리나라만은 남의 나라 틈에 옴츠러져서 끼어 있어서 조그마한 몸이 부닺기고 지질리기에도 차마 견디기가 어렵사온데 더구나 지식과 문물이 놀라웁고 먼저 깨였다 하옵는 양(梁)나라 같은 나라와 길을 트고 뜻을 서로 통해 보고자 하오나 북으로는 고구려와 서로는 백제가 가로막아 희살을 놓으니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그나마 들어오는 복도 발길로 차버리는 셈으로 이웃 나라에서 부처의 도를 가지고 백성을 일깨워주며 가르쳐 주려고 들어오는 이는 덮어놓고 모두 무찔러 죽이기로만 하오니 무엇으로써 남의 나라 풍정(風情)이나 형편이 어찌된 것이나마를 알아볼 길이 있사오릿고.

이사부 어─허─ 이 나라 운수가 장차 어찌나 되올는지. 미욱한 백성 가운데에는 마음과 목숨이 편안치 못한 이가 어찌 없다 이르겠사오릿고, 실없는 일에도 사람의 죽음이 가비얍기가 모닥불 위에 하루살이 목숨. 복을 찾어 푸념하는 이의 입에는 모밀범벅으로 들어 처라 고도(道)를 깨달아 깨끗이 깎은 머리에는 대 테를 단단히 매어 놓으니 이럴래서야 시방 어느 곳이 그리 조용하고 편안할 땅이오며 사람 살 고장이라 이르겠사오릿고. 어─허─ 미욱하고 완악한 소견에 배우지 못함이여. 어두운 탓이여.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알공 아니올시다. 이사부 소판(異斯夫蘇判)의 말이 그르도소이다. 이 나라에는 옛날부터 거룩히 밝은 도가 있어 대대로 여러 어지신 임금님께옵서 그것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리었사옵거늘 어찌 이제 대가리 깎고 헌 누더기 입은 중놈의 괴이한 수작을 새로이 옳은 도라고 그릇 참견할 것이오며 또 본디 내게 있는 것을 내어버리고 남의 것만을 받아들이여 좋다 이르겠사오릿고.

오히려 소신의 좁은 소견인지오. 아직 것도 마땅치 못하게 여기옵는 것은 옛적부터 우리나라 임금님의 높고 거룩하옵신 이름을 마립간(麻立干)으로 일컫삽던 것을 별안간 남의 나라 글로 왕이라 고쳐 쓰옵시며 깨끗하고 좋던 옛옷을 벗기시고 이 몸에 설고 눈에 들지 않는 이 옷을 입히어 주옵시매 도무지 마음에 거북하고 마뜩치않기 짝이 없사오니 스스로 깊이 딱하고 답답만 할 뿐이로소이다.

너의 말이 너의 뜻 것은 가장 옳은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널리 알고 깊이 생각지 못하였음이 매양 큰 달이로고녀. 나의 눈이 남은 보아도 내 몸은 보지 못하매 남의 눈이 아니면 어찌 내 얼굴을 볼 수 있으며. 남의 긴 것을 보지 못하고 어찌 나에게 짧은 것을 가릴 수 있으랴. 나의 뜻도 아직 넓지는 못하나마 될 수만 있으면 조상의 거룩하옵신 뜻과 이 나라의 밝은 도를 온 땅에 끝 닿은 데 없이 널리 널리 펴보고지고.

그러나 보아라 우리 조상의 깊은 뜻을……. 헌 것은 모두 불살라 버리고 온갖 것을 새롭게만 하시려고 애쓰시던 것이 아직껏 이 눈에 선─히 밟히지 않느냐. 임금을 이름 지어 일컬으심에도 때를 따라 여러 가지로 같지 않게 하셨으니 거서간(居西干)이라 이르옵시기를 한 번이요 차차웅(次次雄)이라 이르옵시기를 한 번이요 니사금(尼師今)이라 이르옵시를 열여섯 번이요 마립간이라 이르옵시기를 네 번이었으매 나도 새로이 이름을 고치어 왕이라 일컬어 부른들 그리 무슨 허물이 있을고. 오히려 나는 더 훌륭한 도와 갸륵한 이름이 어서 이 세상에 또 있기만 기다리기를 마지않노라.

이차돈 시방 이 나라의 운수는 정히 국경을 깨트리고 테 밖으로 더 벌려 나가기만 좋을 뿐이오매 그런 일에 많이 유의하옴이 곧 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한 도리일까 하노이다.

연전(年前)에도 백제에 흉년이 들어 주림에 우는 백성들이 900여 호나 빌어먹어 우리나라 땅 폐하의 어지신 그늘로 돌아왔으며 가야국 왕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오매 비조부이찬(比助夫伊湌)의 누이를 보내시었사옵고 또 백제는 사신을 보내어 화의(和誼)를 청하였사오며 또 저번에 폐하께옵서 남녘 살피에 거동하시와 너른 땅을 개척하옵실 적에도 가야국 왕이 일부러 예로써 달려와 수종을 드렸사오며 이제도 양(梁)나라에서 사신이 이르러 다섯 가지 향과 경상(經像)을 드리였사오니 이만만 하여도 폐하께옵서 거룩하옵신 덕화가 바야흐로 널리 빛나옵심이 아니고 무엇이닛고.

그러나 다만 답답하온 것은 양(梁)나라에서 온 사신이 중 원표(元表)라 하옵거늘 이 나라에는 그를 남부끄럽지 않게 변변히 접대할 만한 사람도 없사오매 도리어 나의 더럽고 미욱하고 무식함만 드러낼 지경이오니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치성 1인 등장)

치성 (숨이 차서) 큰일 났습니다. 사뢰옵기 황송하오나 성 국 공주께옵서 환후(患候)가 매우 위독하옵십니다. (비죽비죽 울며) 약을 드리어도 효험이 없으시옵고 당굴이 푸리를 하와도 영검이 보이지 않사옵고…….

그것이 어쩐 일인고. (용안(龍顔)에 근심하는 빛이 깊이 어린다) 누구든지 그것을 고치어 줄 이가 없겠느냐. (초조하고도 근심 깊은 눈으로 여러 신하를 둘러보며) 여기에 누구든지 용하고 좋은 수를 가르쳐 내일 이가 없어. (모든 신하는 말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왕의 낙망의 빛이 깊어서) 이제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죽게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로군……. 그러나 그대로 죽는 꼴을 어찌 편안히 앉아 보고 있을 수야 있을고.

(눈물을 짓는다) 누구든지 없느냐 아무든지 좋다. 그의 목숨을 붙들어 주는 이면 아무든지 좋다. 높은 몸이나 낮은 몸이나 사릴 것 없이 내 딸을 데려가도 좋다. 내 딸의 몸뚱이는 목숨을 살리어 준 은인에게로. [小間(소간)] 어째 이리 잠잠만 할꼬. (이차돈을 보고) 보아하니 네가 무슨 실기가 좀 있음직하니 어디 너의 좋은 뜻을 한번 일러보라. [小間(소간)] 말이 없을고,

이차돈 미욱하옵고 나이 어린 소신이 입을 열어 감히 무슨 말씀을 사뢰오릿고.

아니다. 무슨 말이든지 좋으니 어서 일러 보아라.

이차돈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폐하께옵서 밝으옵신 덕에 그릇되오심이 없이 더 밝히오시면 젖사옵건대 아무러한 재앙이라고 저절로 사라질 줄로 사뢰옵나이다.

그러면 어찌 해아 옳을고.

이차돈 상감님께옵서는 거룩하옵시고 높으신 권세와 위덕이 계옵시니 마음에 드옵시는 그래도 바르게 다스리시오면 아무 탈도 없을까 하옵나이다.

그러나 이 몸은 덕이 얕고 눈이 어두워 밝히 볼 길이 없구나. 모든 것이 다─ 나의 맛갑지 못한 허물이겠으나 저 공주의 위태로운 병을 어찌 해아 빨리 건지어 줄꼬. 약과 만신도 이제는 모두 신기한 보람이 없다는구나.

이차돈 소신이 밖에서 듣사오니 지난해 봄에 일선(一善) 고을 우속(于續) 마을 모례의 집에 한 아도(阿道) 중이 왔삽는데 천지가 진동하옵고 하늘로서 보배로운 꽃이 비 내리듯 하였다 하오며 왼손에는 금환석장(金環錫杖)을 집고 오른손에는 옥발응기(玉鉢應器)를 들었으며 몸에는 하납(霞衲)을 입고 입으로는 화전(化詮)을 부르더라 하였삽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중이면 붙잡아 때려죽임으로 모례가 남에게 들킬가 저어하여 저의 집 울 안에 굴집을 짓고 모셔두었다 하오니 옛날 미추 니사금(未鄒尼叱今)님 적 일을 휘둘쳐 보옵건대 아마 이제도 그러한 이를 또 불러다 물어보오면 더러 무슨 보람이라도 있을까 하노이다.

알공 그 말을 옳지 않소이다. 중을 불러다 푸리를 하면 이 나라의 밝은 도를 깨트려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릿고. 그런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이는 이 마당에서 빨리 물리쳐 뜨거운 불에라도 집어넣어 태워 버리고지고. 이 나라의 한 가지 거룩한 내력은 옛날부터 위로는 밝은 하늘을 받드옵시고 아래로 미욱한 인간을 다스리시는 영검스러운 검님께옵서 높은 자리에 계옵시지 않았사오닛고.

그 거룩한 검님게옵서는 아무러한 모진 비바람에라도 나아가 다스리심을 게을리 아니하시었사오매 그 은덕을 갚기로써 이 나라 땅과 백성을 지니고 계옵시게 하심이어늘 미욱한 머리 검은 짐승들 사이에는 까닭 없이 빗서고 그릇치는 일이 많사와 뜻하옵건대 그것이 모두 뜬 것이나 허깨비가 아니고 무엇이오릿가. 한때라도 바삐 그러한 부질없고 지저분한 무리는 얼른 물리쳐 버리시옵소서.

이차돈 알공 대사여 그대의 갸륵히 떠드는 말은 모두 잘 알아들었노라. 그러나 부질없이 지껄이는 소리가 너무나 안타까울손.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눈먼 소경이 도리어 흰 것을 검다 이르니 그것이 애달프고야. 시방으로라도 한 발자국 밖이나마 환한 곳을 얼른 좀 보이고 싶고.

너희들은 시방이 그렇게 쓸데없이 말다툼만 할 때가 아니니라. 어떻게 하든지 얼른 내 딸의 병을 고칠 길이나 물어보자.

알공 이차돈의 눈에 굿것이 씌였사옵거늘 그것을 먼저 다스리지 않고서 도리어 무슨 영검한 일을 기다리겠사오릿고.

어─허 듣기 싫다. 이를 어찌 할고. (노선(老仙)을 보고) 밝수야. 네나 얼른 무슨 영검한 일을 설설 내리어보라.

(치성 1인 달리어 등장)

치성 공주께옵서 숨을 모으시옵고 거의 돌아가옵시게 된 줄로 아뢰옵나이다.

(일동 모두 놀라고 초조하는 빛이 보인다.)

얼른 들리어다오. 무슨 말이든지 한 마디만 용한 소리를.

(노선 일어서서 햇빛을 바라보고 한참이나 무엇을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안색이 차차 창백해지며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어른거리며 침묵. 일동 일어서서 불안에 쌓여 주시. 노선 허리를 굽히고 비슬비슬 걸어 좌편으로 내려가려 한다. 철부 그 옷소매를 잡아 막는다.)

철부 여보 거룩하고 영검스러운 밝수님. 어떡하시겠소. 그 무서운 병환에서 공주 아가씨를 얼른 건져낼 수가 없을까요. 네 왜 말씀이 없으시오. 그러면 밝수님 당신은 무엇을 그리 슬퍼하십니까. 네 한 마디만이라도 영검스러웁고 좋은 말씀을 들려주옵소서. 상감님께옵서와 궁중의 안팎 이 나라 백성들이 모두 좋아 춤을 추도록.

이차돈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노선을 주시하다가 참다못해) 여보아라. 네가 가기는 어디로 갈꼬. 가는 곳이 어디메이며 여기가 어떠한 곳이기로 그렇게 버릇없이 걸어 나가는고. 너는 대궐 안에 받들어 모신 몸으로 이 나라 땅에서는 가장 이름이 높고 거룩하고 영검스럽다 이르는 밝수로서 그렇게 버릇없는 것을 어전 지척에서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시방은 대궐 안에 근심스러운 일이 계옵시어나라의 위아래 안팎이 모두 애를 졸이며 좋은 기별만 기다리는 이때이거늘 하물며 너는 한 나라의 신직(神職)을 맡은 중대한 몸으로서 요사스러운 눈초리에 눈물을 찔끔찔끔 묻히어 볼수록 사위스러운 짓만 할까 보냐.

자─ 얼른 일러라. 무슨 말이든지 좋든 그르든 상감님께옵서 간절히 들으시려 하옵시는 이때이니 속이지 말고 다─ 사뢰이고 가고 싶거든 가거라. 만일 그래도 굳이 입을 다물고 끝끝내 버릇없는 짓만 함부로 할 것 같으면 (허리에 찬 칼자루를 잡으며) 이 이차돈의 허리에 찬 이 칼이 그리 날래지는 못할망정 너의 가는 모가지를 도리기에 그다지 무디지도 않을 것이다. 자─ 얼른 내 칼을 받겠느냐 안 받겠느냐. “(이차돈 칼을 빼니 여러 사람들이 붙들어 말린다.)

아서라. (철부를 보고) 그 움켜쥔 사매를 놓아 보내라. (이차돈을 보고) 너는 무슨 거친 소리를 그리 함부로 하느냐. 여기는 일국의 대사를 의논하는 거룩한 영지(靈地)라. 그런 칼을 함부로 빼는 데가 아니다. 그리고 밝수야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 가거라. 아무 소리도 아니 하는 것이 차라리 좋지. 너희 허옇게 세인 그 터럭 속 빛 바래인 입술에서 떨려 나올 좋지 못한 소리를 나는 듣고도 싶지 않다. 차라리 안 듣는 것이 나을 터이지. 가거라 가. 가고 싶거든 마음대로 얼른 물러가거라. 아무 소리도 듣기 싫어.

어─허 그 흉한 소리를……. 시방쯤은 벌써 내 딸의 목숨을 그만 아마 저 먼 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떠났을 것이야. 저 허공 중천에 허위 허위 높이 떠가며 시방 우리들의 이 짓을 웃음으로 내려다 볼런지도 몰라.

(하늘이 흐릿한 듯 돌아가는 떼구름장에서 빗발이 후두둑, 일동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렇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이 이것이 우리 아기의 웃으며 흩뿌리는 눈물방울이고녀. (목이 메여 옷소매로 눈물을 짓는다.)

(일동 모두 민망함과 초조함과 슬픔에 쌓여 무언(無言))

노선 (정신을 차리여 눈물에 섞인 너른 너른한 웃음으로) 아니올시다, 상감님.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철부 이찬, 이차돈 한사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내가 너무도 버릇없었음을 접어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다─ 사뢰옵지요. 흰 터럭에 뒤흡쓸리어 먹은 나이 거의 백 살이나 되어 실낱같은 이 목숨이 무엇이 섭섭하고 알뜰한 것이 있어 숨기고 감출 일이 있사오릿고.

(낙심과 설움의 반동으로) 그래 무슨 말이냐. 내 딸이 죽겠느냐. 그 병을 고칠 수가 있느냐 없느냐. 그 탈을 풀어낼 수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이 나라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나 있겠느냐. 그 계집애로 해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무슨 탈이 있느냐. 만일 그렇다 하면 나는 그 자식을 끊어버려도 관계치 않어. 이 나라를 위한 일이면 내 딸을 죽이고 또 목숨까지 바치더래도 아까울 것이 없어. 내 딸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은 다─ 내 손아귀 하나에 매었으니깐. 그까짓 것을 없애 버리기로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일고. 여러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한낱의 두굿기는 내 자식이지만 선선히 내어버리는 것이 이 서벌(西伐) 나라 밝은 겨레의 거룩한 넋이지. 밝수야. 어디 한 마디만 얼른 일러보아라.

노선 아니올시다. 공주 아가씨계옵서는 곧 회춘(回春)하실 것이올시다. 아무리 까무러쳐 숨이 떨어지셨삽더래도 곧 다시 깨어나실 것이올시다. 아무 근심도 마시옵소서. 고요히 마음 놓고 들으시옵소서. 고이 고이 들으시옵소서. (신이 내린 듯 차차 무아경에 들어간다. 푸념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도 가리키며 혼잣소리로.)

어허 좋을시고. 온 땅을 밝게 비추이시며 다사로웁게 쪼여주실 검님께옵서 황금덩을 타옵시고 새배 저쪽 본곁에서 거동해 나옵신다. (사방을 둘러보며) 깨끗하게 마전해 널은 이른 아침 고요한 휘장 밖으로 뻗어 나가려 하는 온갖 새로운 목숨의 힘을 탐탐스러웁게도 손잡아 이끌어주시는구나. (도성쪽을 내리 굽어 살피며)

골골마다 무더기 무더기로 새것을 이룩하는 거룩한 목숨이 치밀어 오르는 듯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쪼들리고 헤매이던 사람들은 새로이 밝은 빛을 힘입어 새벽 종다리처럼 재바르게 오락가락하누나.

(가슴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빛이여 빛이여. 어허 밝고 맑은 저 햇빛이여. 거룩하고도 환한 눈의 광채가 이 계림 땅 보배로운 흙의 영원하고도 속 깊은 신비를 모두 거두어 우리에게 지녀주시랴 물려주시랴 대대손손이 가슴속에 가득 쌓아 끼쳐 주시랴고 넌지시 눈짓하시고 뒷손질해 주시는 것이었마는 그러나 우리가 미욱하구나. 그 사랑 깊은 뜻을 받기는 새로 그 영검스러운 얼음짱조차 알아들을 길이 바이 없구나. (목이 메인다.)

(다시 기운을 들여) 우리의 부리가 어떠한 부리신가. 온 누리 모든 것이 모두 다 저 거룩한 동방으로부터 비롯함일세라. 하늘님의 아끼시던 씨앗으로 착한 것이 마음이 되고 흰 빛이 몸이 되어 온 누리를 비추어지라. 온 땅을 걸차고 가미로웁게 하여지라. 온갖 것을 싱싱하고 씩씩하게 하여지라고 이 나라에 보내신 거룩하고도 기림 있는 해님의 겨레언마는 흙내를 맡은 뒤부터 영검이 없어지고 미욱한데 무저져서 저절로 이르기를 불쌍한 인간들이로세.

모든 것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더럽게 게으름만 피워 닥치는 곳마다 슬픈 소리 고르지 못한 가락만이 들리어 일어나도다. 저마다 떨어져 달아나며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 몹쓸 세상 어허 어찌나 해야 좋을고.

(손을 비비어 비는 듯) 어머니 살려주옵소서. 띠알 사나운 마음과 몸의 무서운 아귀다툼을 눌러 주시옵소서. 불같이 괴로운 시새움의 화살을 뽑아주시어 방여의 칼날을 막아주시옵소서. 이제껏 맞는 온갖 궂은 일일랑 거두어 불살러 주시옵고 옹친 것은 풀어주시오며 맺힌 것은 녹이어 주시오며 굳은 것은 느꾸어 주소서. 허룩해진 이 누리를 드잡이해 주시옵소서.

(고개를 내저으며) 그러나 그러나 어허 어머니께옵서 손수 해 입히신 고운 옷을 시막스러운 우리의 심술로 가리가리 쥐어 찢어 넝마 헌 누더기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야 그것을 다시 깁고 꼬매어 입히고 거드처 주시기를 바랄 수 있으랴. 어허 이제는 여기저기 소담 스럽던 귀불주머니도 손때에 절어 끊어 떨어졌고 꽃도 놓고 새도 놓은 타리개 버선은 진창만 함부로 밟어 걸레가 되었고 오목조목 잣누비옷도 오줌똥을 못 가리어 너절해졌구나. 어머 젖에 함함이 살찐 타락 송아지가 이제는 개밥에 도토리처럼 뒤 돌리어 눈총만 맞는 불탄 강아지가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료. 이를 어찌하면 좋으료.

궂은 비 흩뿌리고 바람은 지동치듯 부는 밤길언마는 허둥지둥 갈팡질팡 헤매니는 걸음을 "그리 가면 진굴창이다 저리 가면 낭이니라." 일깨워 근심해 주실 이도 없고녀. 부루통한 젖꼭지는 내가 빨아 먹을 것만 여기어 긴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매어 달렸더니 어머니께서 일부러 발길로 박차버리었음이 아니라 그것은 눈물에 무져저 누진 꿈자리에서 구성진 잠꼬대만 하였음이었도다. (눈물을 씻으며 느낀다.)

어머니께서 피땀을 흘리시어 만드신 손 끝 이 나라를 저희에게 내어주실 제 이르신 말씀 가라사대 "이것을 맡아 지닐 제 내 얼굴을 더럽히지 마라" 가라사대 "고이 잘 지내고 어미 품으로 다시 돌아오라" 가라사대 "지내는 동안 어미 얼굴이 그리웁거든 떠날 적의 목메이던 부탁을 휘둘쳐 보아라" 하셨건마는 그러나 이제 보니 저희는 이대로 돌아가 어머니를 바로 쳐다 뵈올 낯바닥이 없소이다. 저희가 걸어오던 길섶에 고이 가꾸어 놓으셨던 수줍은 이 몸쓸 심술이 뭉틋고 망거질러 없애였으니까요.

옛 꿈터에서 흘러내리는 고요한 물결이 낡은 넋을 아프게 흐느적거리노라. 이것은 이것은 그 어느 거룩한 이의 뉘우쳐라 깨우쳐라 일부러 마음 있어 지워주시는 뼈아픈 눈물이나 아닌지.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분다. 아지랑이도 스러지노라. 끊일락말락 젊은이의 애를 부질없이 시들리던 호들기 소리여. 어허 나의 것은 마디마디 가락가락 느끼어 떤다. 눈물도 하염없어 그칠 줄이 없구나. (눈물을 씻는다.) 애졸이던 마음 날뛰던 가슴을 서로서로 얼싸안고 푸른 밤 동산에 긴 밤을 새우며 안개 서린 잔디밭에 줄달음 주어 뛰어놀던 그리운 벗 정다운 동무는 다─ 어디로 헤어져 갔느냐. 해 저문 개펄에서 시름없이 부르던 그윽한 메나리 보드라운 노래 골짜구니가 찌르렁 울리던 우렁찬 소리도 이제는 목이 쉬어 가슴만 앓는 벙어리뿐이로다.

(한숨을 쉬고) 뻗쳐 흐르는 영혼의 샘물이 끊이지 않고 새롭게 새롭게 용솟음치던 샘터는 무엇에 이 눈이 어두워 찾을 바도 없는고. 안개가 잦아진 골에 피어 흐드러진 온갖 꽃송이를 춤추던 손으로 곱게 꺾어 님에게 드릴 꽃다발을 곁던 솜씨로 옛적에는 많았섰더니라. 호박벌이 멋없이 달아날 적에 말없이 흐리어지던 이슬 머금은 눈썹은……. (한숨을 쉰다.)

아─ 그러나 시방은 이게 어쩜이뇨. 마음과 몸이 너무도 무디고 거칠어진 탓인가. 하나 두어라. 그 적에 실없는 일은 모두 그대로 내던져 두잤구나. 옛 무덤을 찾는 에누다리가 슬프기도 하다만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허튼 잔 사설이 멋쩍기도 하올세라. (빙긋 웃는다.)

거룩하신 검님이 주신 고운 철 그리운 옛날은 궂은 일에 속고 덧없는 마음에 얽매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었지마는 이제라도 우리의 넋과 우리의 피를 들이부어 고운 마디와 훌륭한 가락으로 이 나라를 어울리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며 검님의 뜻일세라. (호령하듯 한다.)

어둡던 땅에 먼동을 터주시고 환한 햇볕이 이리 내려 쪼이심은 아직도 두굿기시는 사랑이 남으사 어둠의 홑이불을 걷어치우고 안가슴을 버리어 싸안아 주고자 하심이니 거룩히 흘려주시는 흰 젖을 받아서 겨레의 씨앗이 던저 넌출 뻗는 곳마다 햇빛이 비치는 나라 땅마다 고로 고로 축이여 길고 오랠 목숨을 북돋아 기르랴 함일세. 모름지기 여기에서 힘쓰고 부지런하면 얼마나 거룩하고도 붉은 넋과 깨끗하고도 보얀 피가 깊게 깊게 제기어 디디고 간 곱고 어여뿐 발자욱마다 철철 넘게 고여 있어 어마어마하고도 영검스러운 보람과 자취가 뒷누리까지 길이길이 끼처 남아 있어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푸념을 하고 살그머니 쓰러져서 게거품을 입으로 흘리며 부르르 떨다가 여러 치성(雉省)이 덤비어 주물러준 뒤 한참만에 정신이 돌아온 듯 일어나 입맛을 다시고 한숨을 쉬며.)

폐하께옵서는 아무 근심도 마옵소서. 이번에 공주께옵서 환후가 쾌차하옵실 뿐만이 아니오라 그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거룩한 새 빛이 새로이 새로이 들이 비쳐올 것이로소이다. 서방(西方)에 금선(金仙)이 계시와 유정 인간(有情人間)을 구제하기 위하옵서 거룩하옵신 일생을 바치시었사오며 다섯 가지 욕심의 펼쳐진 넓은 들판에 부적부적 타들어가는 탐욕의 큰 불길을 대자대비의 떼구름장에서 주루룩 쏟아지는 무상정법(無上正法)의 소낙비로써 앉은 자리에서 꺼 없애시오며 미욱의 뇌옥(牢獄)에 얽매어있는 중생을 위하사 금강의 지혜로운 칼로써 번뇌의 쇠문을 두드려 부셔주셨사오며 청정 미묘의 바다에 에둘린 해탈정각(解脫正覺)의 꽃동산에서 즐거웁게 살도록 하여 주신 이의 거룩하옵신 도가 이 나라에 널리 뒤덮힐 것이로소이다.

옛날 미추 니사금님 적에 고구려 사람 아도(阿道)의 어머니 고도녕(苦道寧)이라는 이가 이르기를 지금부터 3천여 월 뒤에는 이 나라에 그 도가 퍼질 것이라고 하였다 하옵더니 아마 그 말이 이제 와서 맞는가 보오이다. 어─허 이 몸은 이 늙은 몸은 불행히 거룩한 도와 인연이 얇음인지 실낱같은 목숨이 아침 저녁을 재촉해 기다리는 애달픈 몸이오니 얼마나 복이 얇고 덕이 적은 탓이오릿고. 그렇게 거룩하올 세월을 노신(老臣)의 이 눈은 뵈옵지 못하올 것을 생각하오매 메마른 가슴의 낡은 피가 찢어질 듯이 막히어 철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옵고 저절로 버릇없는 짓만 많았사오이다.

어─허 얼마나 섭섭한 일이오릿고. 이다지 애졸이는 슬픔이 또다시 없삽나이다. 상감님 이 늙은이의 철없는 눈물을 두굿겨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노신이 맡아보던 이 밝수의 영검스러운 자리도 있을 까닭이 없을 터이올시다. 그러나 너무 근심하시지는 마시옵소서.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노상 한결같이 밝으신 덕으로만 계옵시면 길이 길이 큰 복을 누리옵시리다.

(무엇을 깨달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잠깐 잠잠이 무엇을 생각하다가) 따로 푸리할 것은 없을까.

노선 아무 것도 없삽나이다. 그저 다만 상감님께옵서 밝으신 뜻대로만 하옵시면 시방 모든 어려운 일은 실꾸리 풀리듯이 저절로 솰솰 풀리오리다. 이제는 노신의 맡은 일이 다 끝이 났사오니 아─니 이 나라의 어려운 일은 거진 다 보살폈사오매 고달프고 늙은 몸이라 물러가 편히 쉬올까 하노이다.

(노선 정신없이 허둥지둥 걷다가 몇 번이나 엎드러져 넘어지매 치성 두 사람이 부축해 퇴장)

(일어서며) 어찌해야 그렇게 거룩한 일을…… 영검스러운 일을…….

제2막

편집

왕궁 경내의 비원(祕園) 일구(一區). 정면과 우편은 몇 나무 수양(垂楊)이 성긋한 속으로 은은히 들여다 보이는 이끼 서린 궁장(宮墻) 우편 담 끝에는 본궁으로 통하는 일각대문. 담 넘어 저쪽에는 그리 멀지 않게 전각(殿閣)의 용마루와 추녀가 드러나 보인다. 중앙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석가산, 홍예(虹霓)를 틀은 조그마한 석교. 못에서 좌측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언덕 위에는 두어 나무 무궁화가 방긋이 웃고 섰는데 그중에 한 나무 쓰러질 듯 노고(老苦) 한 등걸이 반나마 허리가 구부러져서 못 속의 저 그림자를 고요히 들여다보는 듯. 좌편가으로 다가서 무궁화 나무 그늘에는 조그마한 정자 한 채. 길은 언덕 너머에서부터 정자를 앞으로 끼고 돌아 석교를 건너 연 류두전일(蓮流頭前日) 저녁 나절.

(알공(謁恭) 정자에 홀로 앉아 무슨 생각에 잠기었는 듯 일어나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로 두어 걸음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금 우뚝 서서 무엇에 주리인 듯 무엇을 찾는 듯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가 실망에 넘치는 듯한 한숨을 한 번 깊이 쉬이고 다시 정자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좌편 언덕 너머 길로 공주가 아기 內人[내인] 하나를 데리고 등장.

알공은 허둥지둥 정자 옆 무궁화 그늘에 몸을 숨긴다.

공주 소박한 편복(便服)에 간단하고도 고품(高品)한 분장, 한 속에는 태극선 한 손에는 무궁화 한 가지를 넌지시 꺾어 들고 고요한 발자욱을 게을리 옮기어 놓는다.)

공주 (꽃을 코에 대어 향내를 맡으며) 내가 앓아누웠던 그동안에 이 꽃이 이렇게 활짝 어여쁘게도 피었구나.

내인 그러믄요, 아기씨께옵서는 편치 않아 계옵신데 그 꽃만 홀로 먼저 그렇게 피었었으니 그동안에 보아 주실 임자를 그리워하는 시름은 얼마나 많이 멋없고 실없는 동풍을 탓하고 원망하였겠습니까. (소리를 내어 웃는다.)

공주 (소리 없이 방긋 웃고서) 아이 가엾어라. 철 적은 봄꽃에게 내가 너무도 많이 못할짓을 하였군. 그러나 어찌 하노. 뜻밖에 저절로 지어진 그 허물을……. 이 꽃잎이 이렇게 애처로웁게도 으스러졌으니 아마나 어느 적에 데퉁 적은 소박니 발이 아프게 후려 때리고 가버린 까닭이나 아닌가. 시름 속에 어여삐 핀 꽃이 눈물 속에 넌짓 웃다가 소낙비에 그만 으스러져 죽는다. 아으 가엾이도…….

내인 아기씨, 그래도 봄바람이 건듯 불 제 향내 맡은 범나비는 지는 꽃이 섧든 말든 제멋만 좋아라고 너울너울 춤을 추겠지요.

공주 흥 그까짓 미친 나비의 짓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니.

(알공 고개를 갸웃이 내밀고 숨어 서서 보며 빙긋빙긋 웃다가 공주의 말에 놀라운 듯 얼른 고개를 끌어들이고 서서 낙심천만인 듯 고개를 한 번 젓고 기인 한숨을 땅이 꺼질 듯 쉰다.)

내인 아기씨 저런 나비 말이지요. (조약돌 하나를 알공의 숨어 있는 무궁화 나무 그늘을 향해 던지고 웃는다.)

(알공 몸을 사리며 돌을 피하는 듯)

공주 얘 이 동산은 너무도 고요하구나. (버들 숲에서 새로이 우는 매미 소리를 듣고서) 저 매미는 무엇이 그리 맵기로 매암매암 하고 늘어진 가락을 꺾어 우노.

내인 내일이면 벌써 유월 유두니 서늘한 가을도 이제 얼마 아니 남았으니까요.

공주 유두날 밖에서들은 즐겁게 놀이를 한다지.

내인 그러믄요. 백성들이 성 밖 동으로 흐르는 물가에 모여서 머리도 감고 놀음 놀이를 차리어 즐겁게들 노닌답니다.

공주 밖에서는 그렇게 늘성거리건마는 여기는 이렇게 쓸쓸만 하구나. (석교(石橋)에 올라서서 못을 들여다보며) 물도 맑기도 해라.

내인 장마가 지나갔으니까요.

공주 (무궁화 한 송이를 입으로 담싹 물어 따서 물에 떨어뜨리며) 참 가엾은 일도……. 꽃을 먹이로 알고 쫓아오는 물고기여! (물을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이 동산지기의 심청도 너무나 밉살머리스러울손. 왜 다만 한 마리의 물고기를 이 작은 못에다 저리 외짝으로 가두어 놓았을까.

내인 그런 게 아니랍니다. 전에는 금잉어 두 마리가 짝을 지어 굼실굼실 잘도 놀던 것을 그만 한 마리는 아기씨께옵서 편치 안옵실 적에 잡아서 쓰셨더랍니다.

공주 아으 애처로웁게도 나에게 어째 그것을 잡아 먹이었을까. (눈물을 지우는 듯) 더구나 어디에 물고기가 없어서 하필 저것을…….

내인 그래도 밝수의 말이 아기씨 병환에는 그것을 잡수어야…….

공주 아이 얄궂어라. 늙은 밝수의 능청맞은 수작……. 가엾이도 내가 그것을 먹고서 병이 나았다니! 저렇게 어여쁜 것을 어찌 차마 잡아먹어……. (물을 들여다보며) 이 모진 목숨은 네 짝을 잡아먹고 살았다는구나. 너는 저렇게 쓸쓸스러웁게 내던져두고. 아마 나를 원수로 여겨보겠지. (쓸쓸한 웃음을 웃으며 내인을 보고) 그것이야 아무 마음도 없어서 그런가 꼬리를 치며 굼실굼실 조아리고 혼자 잘도 노누나.

내인 (한참이나 열적어 섰다가 비로소 때를 얻었다는 듯이) 그래도 아기씨께옵서 병환이 나으셨으니까 고만이지요.

공주 (슬슬 걸어가며) 무얼 그것을 먹어서 나았을라고. 이차돈 한사의 은덕으로 아도(阿道) 중의 법력으로 내가 살았지.

내인 참 그 거룩한 아도 중이 이제는 이 서울 안 천경림에다 집을 올리고 있게 되었대요.

(공주와 내인 일각문으로 퇴장, 알공 살며시 일어나온다.)

알공 (일각문을 바라고 두어 걸음 걷다가 서서) 어허 이 나라에서는 가장 높고 귀하옵신 몸이여, 상감마마께옵서는 아드님이 없으시니 대왕 폐하의 거룩한 용상도 저 아기씨 차지. (낙심하는 듯이) 아─ 그러나 임자가 있구나. 원수의 이차돈이가…….

초가을 달 없는 밤 초저녁.

모례(毛禮)의 집 마당.

(광술 불빛에서 어머니는 삼을 메고, 사시(史侍)는 삼을 잇고 있다.)

사시 벗어라 벗어라 네가 벗어라

네가 벗지 아니하면 내가 벗겠다.

속아라 속아라 네가 속아라

네가 속지 아니하면 내가 속겠다.

어머니 이 삼이 왜 이렇게 얼크러졌을까 이것 좀 보아.

글쎄다, 어쩌면 그렇게 얼크러졌을고.

사시 이러다가는 이번 팔월 한가위에 우리가 아마 회소(會蘇) 가락을 부르게 되나 보오.

글쎄다. 이렇게 애써서 하는 길삼을 남한테 뒤떨어지지는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러나 여섯 주비에 길쌈 잘 하는 솜씨가 퍽 많으니깐.

사시 (엉크러진 삼을 들고) 어머나, 이것 좀 보아. 참 얄궂어라. 어쩌면 이리도 몹시 얼크러졌을고.

(혀를 낄낄 차며) 어쩌면 그렇게……. 하긴 그게 삼이 얼킨 것이 아니라 아마 네 마음이 무엇에 무척 얼크러진 모양이다.

사시 (부끄러워 웃는 듯) 어머니도 그런 말씀은…… 내가 무엇에 그리 마음이 어지러워졌을고.

무얼 요사이 밤마다 네 잠꼬대하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사시 이렇게 커다란 것이 어린애처럼 무슨 잠꼬대를 다 할꼬.

그럼.

사시 아이 얄궂어라. (웃음을 멈추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 하기는 요새 내 몸이 퍽 이상해지기는 했어. 밤마다 까닭 없이 무엇이 그리워서…….

무엇이 그리워.

사시 글쎄……. 무엇인지 썩 잘 아는 듯도 하면서 또 무슨 일인지도 몰라요. 그래 그럴 적마다 꼭 이차돈 한사님의 얼굴만 뵙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어머니 그러다가도 어쩌다 한 번 만나 뵈면 아무 할 말도 없고 또 이야기도 싱겁고 쑥스러워서 괜히 쓸데없는 소리만 몇 마디 지껄일 뿐이라오. 참 엄전하고도 참한 도령님. 그런 이가 이 세상에 둘이나 다시 있을까.

그것은 나도 벌써부터 짐작했어. 그래 어떻단 말이냐.

사시 어떻긴 무에 어때. 접때 아도 스님 모시러 오셔서 뵈온 뒤로부터 저절로 마음이……. (부끄러운 듯 자지러지게 아양을 떨며) 아이고 어머니 나는 무어라 말할 수도 없어.

그럼 네가 그이에게 반했단 말이지.

사시 반하기야 무얼. 그러나 아마 무엇이 어떠하기에 저절로 끌리고 그리운 생각이 나지요. 어머니 나는 그 뒤에 그이의 얼굴을 두 번밖에 못 보았다오.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

아이 망칙스러워라, 계집애가 철없이.

사시 그러나 나는 그이를 볼 적마다 수줍고 부끄러워 못 견디겠어……. 그이는 참 훌륭한 사나이지.

훌륭하면 무얼 해. 그러한 이가 너 같은 것이야 이제 다시 한 번 눈꽁댕이로나 더 거들떠볼 줄 아니. 또 사나이 속을 누가 아니. 더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데.

사시 그까짓 속은……. 그까짓 것이야 아나 모르나. (한숨을 쉬며) 내가 다만 궁금한 것은 그이도 나를 그리워하시는지 나는 그런 말을 그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그렇기에 수줍은 색시가 괜히 외기러기 짝사랑으로 헛물만 켜는 셈이면 어떻게 하니. 더구나 저렇게 나이 찬 계집애가…….

사시 그러면 어머니는 왜 접때 그이가 왔을 적에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버려 두었었오. 나는 가슴이 이렇게 답답해 죽는데.

그것은 귀중하신 손님이 이런 집엘 다 찾아오셨으니깐 좋은 낯으로 그저 잘 대접해서 보내자는 것이니까 그랬지.

사시 그래도 어머니는 그이가 세 번째 말을 타고 우리 집 울 뒤로 돌아내리었을 적에 내가 울 구멍으로 내다보아도 어머니는 빙긋 웃고 아무 말씀도 날더런 안 하시고서 무얼 그래. 그때 어머니는 아주 눈웃음을 치며 그이를 맞아들이지 안으셨오. 그때에 그이가 나를 보고 넌짓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이실 때에 어머니의 마음도 과히 그리 싫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렇게 귀중하기만 하신 몸과 또 이 딸년의 일을 생각하여서도.

(계면쩍은 듯이) 망할 것. 이제 별소리를 다해 지껄이고 있네.

사시 그래 그때 그이가 사흘을 우리 집에서 묵고 계셨지요. 그이의 돌아가시던 발길이 더디 더디 머뭇거림은 모두 나 때문인 줄 알 제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고 기꺼우시었겠오. 그이의 타신 흰 말이 먼 산모롱이로 돌아가는 것을 나는 싸리 문간에서 시름없이 쳐다볼 때에 어머니는 무엇이라 나를 달래 주셨오.

그렇지만은 그때 내 생각은 네가 오늘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구나.

사시 그렇지만 뒤 울 안 굴집 앞에서 그이와 나만이 서로 쳐다보고 있을 때에 거만한 걸음으로 우리를 놀래어 주신 이가 누구요. 나는 분명히 부엌 모퉁이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았었는데.

그렇지만 그렇게 약고 똑똑하던 네가 금방 그렇게 마음이 쏠릴 줄은 몰랐구나. (한숨을 쉬며) 모든 것은 도무지 내가 잘 보살피지 않은 허물이 크겠지마는.

사시 (힘없이) 허물이야 무슨 허물.

이러다가 만일에 그이가 훌쩍 너를 떼처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거나 데려가지 않는다면 어찌나 되겠니. 그것이 걱정이란 말이지.

사시 참 얄궂어라. 그이가 나를 왜 돌보아 주어야만 될까요. 왜 데려가야만 될 일일까…….

너는 그에게 바친 몸이고 그는 너를 맡은 사람이니깐 그렇지.

사시 그런 짓을 왜 누가 했던가요. 그런 일은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바치고 맡은 일은 없으니깐.

그러면 한때의 무슨 눈보임 사랑뿐이었단 말이냐.

사시 그것부터 모르지요. 글쎄 그이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누가 그걸 아느냐 말이지요.

참 너는 철없는 계집애다. 만일 그런 일을 네 오라비가 알아만 보아라. 어떠하겠나.

사시 왜 내가 그이를 그리워하는 걸 시새워 할 일이 있을까. 아니지요. 오빠도 이 말만을 들으면 퍽 좋아하겠지요. 더구나 그 거룩한 한사님을 깨끗한 풍월님을 누가 구태여 헐고 미워할 리가 있을까.

그야 그이를 보면 아무라도 탐탐히 하지 않고야 어떻게 하겠니. 누구에게든지 두굿김을 받는 엄전하고 씩씩한 풍채이지마는.

사시 (놀라는 웃음으로) 저것 보아 어머니도 그에게 무척 반했구려.

계집애도 내가 그이에게 반해 무엇하게.

사시 왜 무엇 할라고만 꼭 반하오. 아무튼 거룩한 우리 도령님이야. 그리고 어머니 내사(內舍) 한사(韓舍)까지 지내신 귀중하신 성골의 겨레로써 더럽다 하지 않고 이런 집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그렇게 상감님의 가까운 일가이시언마는 조금치나 교만한 빛도 보이지 않으시고 그냥 이런 사람처럼 아무 흉허물 없이 그대로 놀으시겠지. 그리고 우리 집안일도 퍽 두굿기어 걱정해 주시나 봅디다. 예전에 삼 년 굴산 두산성을 쌓을 적에 우리 아버지가 많으신 공로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퍽 많이 갸륵하다고 칭찬해 주십디다. 아무튼 그이는 퍽 좋은 어른이야. 아주 정든 동무 같애. 점잖고 엄전하면서도 상가롭고 탐탐한 것이.

하기는 요사이쯤은 그이가 오심 즉도 하다마는.

사시 어머니는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싸리문 밖에 나가 먼 산을 바라보는 걸 눈여겨 보셨오. 울 밖에서 개소리만 컹컹 나고 신발 소리만 잣잣해도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울렁거리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어떻든 나라에 일이 있어 아도 스님을 모시러 오는 길이 아니면 오실 수 없는 줄도 번연히 알면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또 꿈속에도 날구장천 이때나 오실까 저때나 오실까 애졸여 기다린다오. 나도 만일 사나이로 태어났더면 그 어른의 타신 말 구종이라도 되어 말고삐나 잡고 온 서울로 대궐 안으로 어디든지 그 어른 가시는 데까지 따라나 다녔으면 좋겠어. 만일 전장 같은 데라도 나아가서 그이의 몸 대신으로 내가 칼을 맞아 죽더라도.

너는 원체 그런 말괄량이 계집애니깐 변덕 도섭이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차며) 미처 날뛰는구나 하면 또 금방 무슨 시름에 겨워서 눈갈이 퉁퉁 붓는 짓을 하고 아무튼 이제는 좀 색시 꼴이 박이도록 안존해 버릇을 좀 해보아라.

사시 내가 왜 도섭스럽고 변덕스러워졌을까요. 이 가슴에 아무것도 솟쳐 느껴지는 것만 없으면 이년도 저절로 얌전하고 안존해진답니다. 어젯밤에도 까닭 없이 밤새도록 울었지. (부끄러운 듯 방긋 웃으며) 선머슴 꾼들의 메나리 가락이 슬퍼서……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상감님과 이차돈 한사님의 훌륭하고 좋은 이인 줄 아나 봅디다. 나는 실없는 노래 가락에도 이차돈하고 기리는 높은 마디를 여러 번 들었어. "이차돈 이차돈" 부르기 좋은 이름! 그밖에는 나는 또 무슨 소린지 아무것도 모르지.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나는 귀가 어두워서 도무지 몰라요. 아으 만일 이 좁은 가슴이 그렇게 울렁거리지만 않을 것 같으면 마음대로 한 번 그이의 이름을 소리쳐 실컷 불러나 볼 테야.

망할 계집애. 툭하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저께도 아도 스님 앞에서 이차돈 한사님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니 그게 온 무슨 꼴이란 말이냐.

사시 무얼 그때 이차돈 한사님이 오셔서 아도 스님을 모셔다 공주 아기씨의 병환을 고쳐드린 까닭에 상감님께서 주신 많은 보물을 스님께 받아다 우리에게 무슨 주셨으니깐 그렇지. 이 좋은 귀걸이도……. 이것도 얼마나 좋은 보물이요. 이 넓은 서울서도 나밖에는 가진 이가 없을 터인데…….

대궐 안에도 없어. 아무튼 너는 아직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다.

사시 그래 스님 앞에서도 그 생각이 별안간 나서 이차돈 한사 도령님 하고 부른 것이지 무어요.

오냐, 그래 잘했다.

(모는 앉아 졸고 사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쓸쓸하고 외롭게 엉킨 삼을 풀어 잇고 있다.)

천경림(天鏡林).

우편으로 아도화상의 주처(住處)인 초암(草庵)이 노삼창울(老杉蒼鬱)한 심림(深林)이 그윽한 속에 있다. 그리 높지 않은 토계(土階)에 형극(荊棘)과 잡초가 어웅하게 엉키었다. 거암과 괴석이 산재, 좌편에는 덤부사리를 껴 희미한 산경(山徑)이 통한다. 멀리 보이는 듯 연봉(蓮峯)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초암(草庵)에는 아도와 모례와 행자 몇 사람이 앉아 있다.)

모례 인연이라는 것은 참말로 이상한 것입니다.

아도 그렇지. 지난봄에 나의 지나는 발길이 너희 집에 머물러 하룻밤 드세인 신세를 짓지 않았던들 오늘날 이렇게 한솥에 밥을 같이 먹으며 지내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다.

모례 그만 해도 지난 봄일이 벌써 옛날 일같이 생각할수록 아득한 그림자만 어렴풋이 느끼여질 뿐이올시다. 저의 집이 있던 일선(一善)골 우속(于續) 마을은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가는 큰 길 나들이가 되어서 나라에서 지킴을 굳게 하시고 곳곳마다 산성을 쌓아 가만히 들어오는 도적을 막으실 세, 부처님의 도를 이 나라에서는 엄금하는 법이 되어서 스님께서 그때 저의 집에 오시기 바로 그 전에도 고구려 중 정방(正方)이란 지경(地境)을 넘어서자마자 붙들리어 죽고 또 고대 멸구자(滅垢疵)라는 이가 들어왔다가 산채로 불에 태워 버린 그러한 참혹하고도 무시무시한 때에 마침 스님께서 찾아 들어오셔서…… 그때는 어찌도 겁만 나던지요. 더구나 스님께서는 몹시 파리하셨고……. 그렇더니만 오늘은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한 땅을 얻어 있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생각하면 부처님의 도으심이 아니고 무엇이오릿가.

아도 그야 내가 들어와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이때껏 부처님의 큰 뜻을 보암직하게 널리 펴지도 못하였으니 그것이 매우 부끄럽기 그지없으며 답답한 일이로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에 깊은 인연이 있는 몸인 줄로 스스로 믿나니 내가 있을 때 마침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원표화상(元表和尙)이 오지 않았던들 어쩔 뻔하였으며 또 공주께옵서 병환이 계시다 곧 나으심도 진실로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옵신 덕이시며 이 나라의 큰 복이었도다. 이제부터는 차차 더 좋은 인연도 많이 있겠지.

모례 거기에도 또 나이는 아직 젊으시나마 이차돈 한사님이 아니시면 누가 있어 상감님의 거룩하신 뜻을 잘 받자와 이만한 일이나마 이룩할 수 있겠습니까.

아도 참 이차돈 한사님이 아까 오셨나 보더니 어디로 가셨느냐.

모례 아마 저─ 숲속에서 풍월님네들을 만나서 놀고 계신가 봅니다.

아도 그러신가. 아무튼 이 나라에 부처님 도를 거룩하게 이룰 이는 그 어른 한 분 뿐야.

모례 그렇지 않아도 아까의 말씀이 머리를 깎고 방포(方袍)를 입고 싶으시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도 (한참을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저절로 그러한 때가 돌아올른지도 몰라.

(이차돈 등장)

아도 어디를 가셨다 오시오.

이차돈 저기서 젊은이들과 놀았습니다. 풍월줄 젊은이를 만나보면은 그 굳세인 뜻과 씩씩한 거동이 저절로 마음에 가득 차 가슴이 든든해져요.

아도 그렇습니까. 나는 예전부터 아무러한 것을 보아도 모두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던데…….

이차돈 하기는 더러 그런 적도 있겠지요. 우리같이 아직 나이 젊은 몸으로도 답답한 일에나 닥칠 때나 어려운 일을 다스릴 때에는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복받칠 때도 있으니까요.

아도 그렇지……. 더구나 당신같이 그만 시절에는 든든한 일도 많고 쓸쓸한 일도 적지 않은 것이니까. (먼 산을 한참이나 건너다 보다가) 그런데 저쪽 산기슭에 부옇고 붉으스레한 아지랑이가 낀 듯한 저것은 무엇인고. 내 눈에는 무엇인지 그리 똑똑히 보이지도 않는데.

이차돈 그것이 아마 신나무인가 봅니다. 서리에 물들으신 나무요.

아도 응 신나무. 벌써 가을도 퍽 깊은 게로군. [小間(소간)] 하늘과 땅에 깊이 들은 가을빛을 우리처럼 구슬퍼 할 이도 아마 없을 것이야. 한사님 당신도 이런 것을 더러 느끼시는지.

이차돈 글쎄요. 사나이는 본디부터, 가을을 쓸쓸히 본다 하니까.

아도 신나무의 붉은 빛도 이제 잠깐이겠지. [小間(소간)] 나는 그동안 퍽 많이 여러 해 해마다 봄꽃이 피었다 지며 가을 신나무가 붉었다 떨어지는 것을 보았어.

이차돈 스님께서 이러한 산으로 도를 닦으러 다니신지는 몇 해나 되었습니까.

아도 글쎄요…….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뜨면서) 아마 퍽 오랜 예전부터이겠지요.

이차돈 그럼 젊으셔서부터 이러한 쓸쓸한 살림살이를…… [小間(소간)] 그동안에는 어느 산에 오래 많이 계셨습니까.

아도 그것도 이제는 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지요. 고구려 백제 또 이런 서울로 떠돌아다니기를 대중없이 하였으니까 또 개골산(皆骨山)이나 삼일포(三日浦) 같은 데로 휘돌아다니며 날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퍽 오랜 시절을 보내었으니까.

이차돈 그러면 스님께서 처음에는 무슨 느낌이 계셔서 이렇게 불법(佛法)을 닦는 중이 되셨습니까.

아도 그것을 저도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세상 살림살이의 어리석은 꿈자리가 아마 나에게도 퍽 시달림을 주었던 것이지요. 시방은 오히려 아주 그 사막스럽던 꿈자리와 어깨 겯기 동무가 되어서 날마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 셈이지 무척 익어져서……. 예전에는 피가 쭐쭐 흐르는 듯한 현실에만 다 닥쳐 부닺기며 쪼들려 지냈는데.

이차돈 우리가 그리 많지 못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더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좀 더 자세히 들리어 주실 수 없습니까.

아도 (침묵해 앉았다가) 아니 그 옛날 일을 시방 다시 휘둘쳐 끄집어내어 말하기도 너무 계면쩍구려.

이차돈 그렇지만 저는 그 말씀을 좀 자세히 듣고만 싶은데요.

아도 (이차돈의 얼굴을 잠깐 넌지시 건너다보다가) 왜 그 지겨운 꿈자리가 또 당신에게로……. (잠깐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힘없이 내저으면서) 아니지요. 그것을 시방 당신에게 들리어 드리는 것은 당신의 몸으로 보아서도 매우 좋지 않으니까. 실없고 변변치 못한 나의 지나간 이야기는 그대로 듣지 말고 무덤 속 깊이 파묻어 내버려 두지요. 다만 살려고만 바득바득 애를 쓰던 무겁에 쌓인 세상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그저 쓸쓸한 반생을 부처님께 바치고 지낼 뿐이지요.

이차돈 스님 저도 일생을 부처님께 바쳐 버릴 생각이 있는데요. 오늘이라도 머리를 깎고…….

아도 (무엇을 생각하다가 가여운 듯이) 아니요. 아니요. 당신의 몸은 그렇게 가볍게 쉽사리 바쳐버릴 몸이 아니요. 이제 더 거룩한 일에 거룩하게 바칠 때가 있을 터이니까. 그때는 이 몸도 아─니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이 길이길이 당신의 공덕을 기리며 거룩한 스님으로 섬기여 모실 것이요.

이차돈 이 더럽고 미욱한 인간에게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아도 아니 그것을 시방 말할 수는 없소. 다만 그것은 부처님이 점지하시고 하늘이 맡기여 주시는 일이니까.

이차돈 그것이 참 말씀이십니까.

아도 아무렴, 참말이고 말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지는 말읍시다.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다른 번뇌가 생길른지도 모르니까. (방긋 웃으며) 이제 이 세상 다른 지나가는 이야기나 해보지요. 그래 요사이는.

이차돈 별로 재미스러운 일도 못 보았습니다. 그저 철을 따라 바뀌는 마음과 새로운 느낌이…….

아도 그렇지요. 더구나 당신의 저만 시절에는……. 나도 스물 남짓해서 좋은 산수로 휘돌아다닐 적에…… (한숨을 쉰다) 그때는 시방처럼 풍월님네들도 없었지만 깊은 산에는 도 닦는 선인이 많이 있었더니다. 시방도 아무튼 그때의 일이 잊히지 않고 이따금 휘돌쳐 느끼어져요. 펄펄 뛰는 젊은이의 몸으로 들뜬 마음 부닺기는 가슴 즐거운 일도 많았고 애졸이는 일도 많았으니깐 고요한 숲속에서 밤을 새워 몸별을 쳐다보며 먼 장래를 꿈꾸어볼 일도 있었었오. 티끌 밖 구름 속에 죽지 않는 약을 찾아 헤매였음은 무릇 몇 차례였던가. 높은 산마루에 올라서서 눈 아래의 온 땅을 내리 굽어 깔보기도 하였어요. 괴로움 많은 이 누리를 어찌하면 건져 볼까 근심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였오.

이차돈 그러지만 스님께서도 젊어서는 우리와 같이 밝수의 도를 닦으셨습니까.

아도 그런 일도 있었지요. 젊었을 적에는 부질없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박이다 박이다 못하여 그 답답한 넋을 혼자 거두어 뭉치며 이 가슴 속에 깊이 파묻어 버리었소. 식은 피가 빛 없이 흐르는 무덤을 삼아서…….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세상을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을 듯하여 나는 그 땅에서 그곳에서 외롭게 지내는 법을 찾아내인 셈이요. 쓸쓸함을 얻은 셈이요. 나 혼자만 느끼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으니깐……. 인생의 그리운 것과 쓸쓸하다는 것을 한 데 묶어서 지니고 있기에 혼자 몹시 괴로웠던 것이지요.

이차돈 스님 나도 요사이에 가끔 가슴에 사무쳐 뻗치는 무엇을 느끼는데 그것이 아마나 스님께서 겪으셨다는 그 쓸쓸할 것이 아닐런지요. 어떤 때는 무엇이 씌운 듯 무엇에 붙들린 듯 얼이 빠져 우두머니 앉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두 볼을 적시기도 합니다.

아도 그렇기도 할 터이지요. 더구나 당신은 피가 많고 느낌이 빠르실 터이니깐.

이차돈 그러나 젊은이로서는 너무 그러는 것이 사위스러운 일이 아니오릿가.

아도 무얼요. 이 세상은 근본이 쓸쓸한 것이니깐. 쓸쓸한 땅에 쓸쓸함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의 그 시름은 때를 따라서 더러 나올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의 그 시름은 때를 따라서 더러 나올 수 있는 시름이니까 그리 슬퍼할 것도 없지마는 나처럼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고쳐볼 수 없는 이 시름은 사람의 하는 수 없는 운명으로서 가지고 온 시름이니까 당신도 일생이라는 것을 다 겪어본 뒤가 아니면 아마 그것을 모를 것이야. 무덤으로 가는 길섶에서 죽음과 삶의 지름길을 못 찾아 헤매이며 그러한 시름을 겪어보지 않으면…….

이차돈 스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그것을 겪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도 그것은 나도 아직 모르지요. 그러나 곧 알 수도 있어……. 이 나라 지경을 들어오면서부터도 죽음의 고개를 네다섯 번이나 넘어왔고 또 본디 죽음이라는 그것을 짊어지고 여기를 들어왔으니깐. 시방도 아마 내가 저승길의 어느 한 구비를 넘어가는 것이나 아닌지도 모르지요.

이차돈 만일 죽음이 닥쳐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아도 죽음은 죽음 그대로 깨달어 버리는 일이 옳은 일이죠. 죽음이 반드시 한 번은 꼭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깐……. 다만 그 자리에서도 괴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또 허덕거리거나 겁할 것도 없이 한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거기에 서남을 원망하거나 또 자기의 몸을 속이지도 말고 크고도 거룩한 소원대로 충실히 붙좇아 가기만 하면 아무러한 허물도 없을 것이요. 그것이 아마 부처님께옵서 가르치시옵신 큰 뜻도 되오리다.

이차돈 스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오나 무엇인지 뜨거웁게 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힘을 느끼겠습니다.

아도 네─ 당신의 마음에는 한 줄기에 굵고도 엉기인 핏줄이 있소이다. 나는 벌써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어요. 아무쪼록 그것을 헐지 말며 잘─ 간직해두시오. 그리고 운명이라는 큰길을 곧게 가도록 힘을 쓰시요. 사람의 지혜란 곧 운명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깐…….

이차돈 이르신 말씀은 가슴 속에 깊이 삭여 두어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저녁 쇠북이 운다)

(사시 향연(香烟)을 들고 천천히 등장 정례(頂禮))

설옹금교동불개 계림춘색미전회(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가령청제다재사 선착모랑택리매(可怜靑帝多才思 先着毛郞宅裡梅)

제3막

편집

궁중 후원 신단(神檀) 앞.

달밤.

(공주는 노구메를 드리는 듯 날아갈 듯이 절을 하고 시녀 두 사람은 조금 멀찍이 서서 등롱(燈龍)을 들고 공주를 뫼시고 있다.)

공주 미욱한 인간에 답답한 일이 하도 많아서 거룩하옵신 토함산신 어머님께 이 정성을 드리옵나이다. 어찌하면 좋사오릿가. 어머니 어머님께옵서 거룩하신 영검을 설설 내리여 주옵소서. 사랑이 깊으신 너른너른한 당신의 얼굴을 굽어 보이사 이 좁은 가슴의 애 마르는 시름을 거두어 주옵소서. 어머님께옵서는 어찌 차마 이 어린 딸을 애달픔과 괴로운 설움에 그대로 시들어 죽도록 내버리어 두시겠삽나이까. 어찌 차마 이 딸의 죽는 얼굴을 견디어 보시겠삽나이까.

하늘을 우러러 목메이는 시름을 하소연할 길 없사오며 가슴에 넘치는 출렁거리는 설움은 무어라 이름을 지을 수조차 없삽나이다. 이 좁고 여린 가슴은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슬퍼하며 무엇을 바라다가 두려움에 주저앉아 그대로 우는지오. 그것을 내리 굽어살피사 시원히 풀어주실 이는 어머니 한 분뿐이올시다. 그것을 알아주실 이는 어머니 한 어른뿐이올시다. 자나 깨나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둘 곳 없는 마음을 찢어질 듯 찢어질 듯 이제는 아마나 소리도 없이 그만 찢어버리였나보외다.

깊은 곁 속에 외로운 몸이 그윽히 잠겨 있사오매 아무에게도 사뢸 길 없는 궂은 시름을 눈물에 무저져 설움에 무저져⋯⋯ 이제는 썩다 썩다 못하여 곰이 피었소이다. 이 정성을 드리려고 수풀 속의 샘물을 길어올 적에 손끝에 닿는 가을 물이 뼈가 시리게 차건마는 철없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며 세 번이나 뜬 물을 다시 엎질렀소이다.

샘터 푸서리에 물에 젖어 씻긴 조약돌도 샘물에 씻기어 동글고 희 여진 단단한 조약돌도 눈물어리인 이 눈으로 보면은 모두 다 겅성드뭇한 설움의 덩어리일 뿐이더이다.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오셔서 어설픈 창틈으로 저의 잠자리를 뒤슬러 보실 때에 저의 고달픈 얼굴에는 얼마나 보기 싫은 눈물 흔적 이 어릉졌겠사오릿가. 그때마다 새로금 수줍은 시름이여. 소우처럼 아침 분세수도 눈물에 무저져 치러버리나이다.

어─허 거룩하옵신 어머니 좋은 일일랑 도와주시고 괴로운 궂은일을랑 한때 바삐 풀어주시옵소서. 깨끗하게 건져 주시옵소서. 남이 알까 두려운 계집애의 설움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사오릿가. 거룩하시고 영검하신 손을 드리시와 이 어린 딸을 붙들어 주옵소서.

(내인 등장)

내인 아기씨 어디 계시냐.

시녀1 (얼른 한 걸음 나서서 손짓을 하며 가만한 소리로) 이 애 조용히.

내인 (무료한 듯이) 전(殿)마마께옵서 여쭈시는데⋯⋯ 아가씨 방에 들어 봅시고 밤이 늦었는데 어디 가셨느냐고.

시녀1 이 애 그래도 가만히 좀 있거라. 시방 아기씨께서 정성으로 노구메를 드리옵시는데⋯⋯. 잠깐만 계시면 이리 내려오시겠지.

내인 노구메는 왜 드리실까.

시녀1 우리도 몰라. 벌써 이레째나 되는데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시랴.

내인 그럼 나는 들어간다. 너희들이 잘 모시고 들어오너라.

(내인 퇴장)

공주 (걸음을 고이 옮기여 단에서 나려 오며) 이 애 시방 누가 왔었니. 목소리를 언뜻 듣건대 이차돈 한사님이 오신 듯하던데 아마.

시녀2 아니랍니다. 시방 전마마께옵서 아기씨를 여쭈신다고 중전 내인(中殿內人)이 왔다 갔어요.

공주 전마마께옵서 어째.

시녀1 아기씨 방에 듭셨더라나요. 그래 밤이 늦었다고 ⋯⋯ 공 주 그것은 너무나 황송하게 되었구나. 그럼 어서 들어가지.

(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내인 둘을 앞을 세우고 등장)

공주 (맞아 나서며) 어머니께옵서 제 방에를 듭시었더라는데.

왕비 (사랑이 넘치는 듯한 목소리로)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공주 노구메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왕비 노구메를 드리었어? 접때도 네가 노구메를 드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더니.

공주 ⋯⋯⋯⋯.

왕비 (사방을 한 번 눈여겨 둘러보고 넌짓한 웃음으로) 어─허 갸륵하고 신통한 우리 딸이 이 나라가 잘 되라는 너의 노구메 정성이로구나.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 그러나 이제는 네가 이 어미 품에서 벗어 나아가기도 얼마 아니 되겠지.

공주 (놀라운 듯) 왜요. (고개를 숙이며) 어떻게 설마 그건 일이 있겠습니까.

왕비 (슬픈 듯) 그래도 너는 이제 차차 나에게서 떨어져 갈 때가 되었으니까⋯⋯.

공주 어머니 저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궁 속에서만 지내고 싶어요. 아침저녁 거룩한 검님께 노구메나 드리며 사랑이 깊으신 어머니 품에 싸여 지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된 일이겠습니까.

왕비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너는 이제 시집을 가서 살아야 할 것이다.

공주 (애원하는 듯) 어머니 저는 그런 것은 싫어요. 낯설은 시집을 가서 사는 이보담은 이 궁 속에서 어머니 품에 안기어 이대로 살고 싶어요.

왕비 아직 곱고 수줍은 너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너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궁 속에만 있을 몸은 아니야. 이제는 때가 다 닥쳐왔으니까.

공주 어머니 넓으신 사랑으로 아무쪼록 저를 이 궁 안에 두어 주셔요. 토함산 신어머니께서 이 궁으로 점지해주신 제 몸이라면서 저는 어느 때까지든지 저 신단 앞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대로 살다가 여기서 죽어서 신단 곁 숲속에 어느 곳에든지 길이길이 파묻히고 싶어요.

왕비 아니 이 궁중살이는 그만큼 했으면 고만이지 너에게는 별다른 운명과 복록(福祿)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 아무튼 너는 얼른 저 신단 앞도 떠나가지 않으면 못쓸 것이다.

공주 (의아한 듯이) 어째서요.

왕비 너는 벌써 나이 찬 시악시가 된 까닭이지. 이제부터 영검스러운 신사(神事)에 몸을 바치기에는 좀 깨끗치 못해졌어.

공주 네─?

왕비 너도 이제 철모른 아기만이 아닌 줄을 내가 벌써부터 알았다. 접때 네가 자리에 누워 정신없이 몹시 앓을 제 나는 언뜻 그것을 보았다. 너의 속옷자락이 더러워진 것을.

공주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인다.)

왕비 너에게도 이제는 봄이 온 것이다. 온갖 생물이 ○○○ 절로 오는 그 봄철이.

공주 ………….

왕비 그리 놀라울 것도 없어. 그러나 이 어머 품에서는 저절로 벗어날 때가 되었으니까 그것이 좀 섭섭하다는 말이지. (눈물을 짓는다.)

공주 어머니 비옵건대 아무쪼록 제 몸을 어머니 곁에 두어 주십시오. 이 궁 속에서 저 신단 앞에서 어머니 품 안에서 저는 정말로 행복되게 살고 있는 몸이올시다. 저의 조그마한 목숨이 붙어 살기에는 여기밖에 더 좋은 곳이 어디에 다시 또 있겠습니가.

왕비 아직까지는 그러하였을 터이지. 그러나 이제부터는 여기보다도 더 행복 된 곳으로…….

공주 제 마음에는 아무 곳이라도 여기보다도 더 좋은 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것만 같애요.

왕비 아니 이제는 너의 임자는 너의 깃들이어 살 따뜻한 보금자리는 다른 곳에 따로 있어서 안가슴을 벌리고 너 오기만 고대 고대 기다릴 것이다. 이궁으로 네 몸이 태어나서 저만치 소담스럽게도 자랐구나. 이 어미 젖을 빨아 먹고 자란 너의 몸은 저만치 미끈하고 헌출해졌구나. 네가 이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거룩한 신어머니께서 너의 착한 정성을 숫시악시의 숫된 마음으로 드리는 그 정성을 잘 받드사 매양 돌보아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실 것이다. 아니 이다음에라도 너에게 많은 복록은 그이의 돌보아 주시는 거룩한 은덕이겠지. 그런데 철은 벌써 익어왔구나. 모든 준비는 다─ 차리어져 너나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너는 이제 궁 밖 세상으로 인생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주 그렇지만 저는…….

왕비 아니……. (목이 메인다)

공주 왜 꼭 그래야만. (눈물이 어리인다)

왕비 응 너는 이제 시집갈 나이가 찼으니까 올 시월 상달쯤은 너의 목숨의 은인에게로…….

공주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다)

왕비 그러나 너무 그리 걱정하지는 말아라. 무어 그리 섭섭할 것도 없지. 사람마다 크면은 다─ 저절로 어버이의 품을 떠나게 되는 것이니까……. [小間(소간)] 아직 몸도 그리 성치 않다면서……. 밤이 너무 들기 전에 일찍 자거라.

(왕비 퇴장)

공주 (왕비를 따라 두어 걸음 걷다가 발을 머물러 잠깐 시름에 쌓이는 듯하다가) 이 몸이 어찌 될 것인고, 그것은 어쩐 일일까.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러나 요사이 뒤숭숭한 꿈자리는 퍽 어지러웠다. 몸이 몹시 고달픈 까닭인가. 이 몸이 깨끗하지 못해지다니……. 아─ 무서워. 그런 알 수 없는 일이 별안간 있다니. (얼굴이 붉어진다) 그만 그 남부끄러운 꼴을 어머님께 들키였나 보지. 그렇게 조심을 하였건마는……. 나에게도 봄철이 왔다고 시집갈 철이 되었다고 아으 무서웁고 남부끄러워서 어찌하노.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모두 아마 짐작으로 눈치를 채어 알으신 것인지도 모르지. (한숨을 쉰다) 그래도 나는 여기서 살고 싶어. 이 궁에서만 살 몸이야. (무엇을 꿈꾸는 듯한 표정) 저 소리는 저 부엉이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는 (사방을 휘둘러 본다) 아 그러나 모두 쓸쓸하고 고요한 밤뿐이다. (신단 앞에 꿇어 앉는다)

(이차돈 지나간다)

(공주 얼른 일어나 몸을 숨기려는 듯하다가 이차돈과 마주쳐 고개를 넌짓 숙인다)

공주 (비슬비슬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내가 내가 이게 미친 짓이나 아닌가. 미친 것이나 아니야. 어째 이럴까. 어째 이럴까. 도무지 말할 수도 없어. 알아줄 이도 없어……. 그러나 아니로다. 신어머니께서는 알아보신 게로다. (무릎을 꿇어앉으며) 어찌하면 좋사오릿가. 저는 저는 좋은 꿈자리를 보았습니다. 어머니 앞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 보오매 까닭없이 이 가슴이 두근거리어집니다.

(시녀들은 어리둥절해 섰다.)

편전(便殿)의 일실(一室).

첫가을밤,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꾸민 실내, 사방에는 모두 고운 발을 드리었고 정면에는 내정(內廷)의 화초가 달빛에 어렴풋이 보인다. 방 가으로 네 개의 용트림한 등롱에는 옥등잔의 향유가 밝고도 고요하게 불이 붙는다. 중앙에는 대왕의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조그만한 향로에서는 향연이 소로 르 떠올라 꿈나라를 이루는 듯.

(침상에는 대왕과 왕비가 앉았고 발 밖에는 내인 두어 사람이 뫼시고 있다.)

나는 근심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매 될 수 있으면 그리 변변치않은 걱정거리는 이르지도 마시요.

왕비 그렇지만 아기의 일로 해서 허튼 걱정이 모진 잠들기 전에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습니다그려. (한숨을 쉬며) 그 애의 매양 시름에 쌓인 얼굴을 여겨 보면 아직도 앓던 몸이 그리 성하지도 못한 모양이예요. 어떤 때는 아무 풀기 없이 그저 넋을 잃고 앉아서 가슴이 답답한 듯이 가벼운 한숨도 쉬이며 두 볼에는 눈물 흘린 흔적이 가끔 보이니 그것이 어쩐 까닭인지…….

………….

왕비 아마 모진 병에 너무도 시달리어서 파리해 그러한지요. 또 그리고 그 애가 본디부터 천품이 고요하고 안존하여서 몸이 고달플수록 그것을 너무 아마 혼자만 속에 넣고 근심을 하여서 그러한지요.

글쎄요. (혼자 무슨 생각에 잠긴다)

왕비 그러니 시방 한창 꽃봉오리처럼 되어 울울 고비에 그만 모진 병에 쪼들리어서……. (한숨을 쉰다) 그 애가 벌써 열여덟이니 그만 나이면 마음이나 몸이 오죽이나 곱게 부러울 때예요. 그렇건마는…… 고은 얼굴을 다스리지도 않고 흩뜨러진 머리를 거두칠 줄도 모르고 다만 이 어미 말에 못 이기어서 되는대로 그 옷매무새나마 억지로 억지로 차리고 있나 보아요. 그러니 그 가는 허리는 가벼웁고 엷은 김치마 하나 걸치기에도 너무나 무거워서 견디기가 어려운 듯 참으로 애처로워서 못 보겠어요. [小間(소간)] 그러니 그것이 필연 몸에 탈이 난 것이 아니면 곧 마음속에 깊은 병이 들은 모양인데……. 몸의 병을 고치느라고 마음속에다 큰 병을 들리어 주었다면…….

(이상한 눈으로 왕비를 언뜻 노려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이여 잠잠하다)

왕비 그래서 이 어리석은 소견에는 무엇으로든지 그 애의 마음을 좀 즐겁게 해줄 것이나 없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다 못하여서 저번에 약고 헌출한 아기 내인들을 모야 패를 지어서 즐거운 이야기도 하며 재미스럽게 놀아보라고 그리했더니만 그러나 그것도 그 애의 시름겨운 마음을 풀어주는 데에는 아무 소용도 없던가 보아요.

(한숨을 쉬며) 그러니 흔적도 없고 자취도 없어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마음속에 든 병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겠소.

왕비 그렇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아기의 몸이 조금만 더 소복이 되거든 하루바삐 훌륭한 사위를 맞아 비둘기같이 쌍으로 알뜰하게 지내이는 꼴을 보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도 늦게 금두꺼비 같은 외손자 하나 얼른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웃던 얼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른 다시 한숨을 쉬며) 이 몸이 허물이 많은 탓인지 하늘이 주신 씨앗이 다만 딸 형제에 그 중에도 그 애기는 토함산에 빌어 얻은 막내둥이로 마음은 아들만 못지 않게 두굿기는 그것이건만…….

훌륭한 사나이 그것은 또 얻어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왕비 왜 저번에 벌써 이차돈 한사로 간택을 해두옵셨다면서……. 더구나 그 사람은 내물 마립간님의 후손이요. 습실갈문왕(習實葛文王)의 증손이니 겨레도 가까운 성골로 우리 아기의 남편이 되기에도 가장 마땅하오며 또 상감마마께옵서도 깊이 믿고 사랑하옵시는 신하라면서…….

그야 좋기야 좋지. 그러나 시방은 나라에 일이 가장 많은 때이매 이차돈은 아직 좀 더 훌륭한 일을 한 뒤에라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요.

왕비 그렇지만 아기의 몸을 보아서…….

묻건대 이차돈이가 아직 나이는 어려도 그 그릇이 우리 아기의 몸 하나만을 건져 주기에는 너무도 크니까.

왕비 그렇지만 아기는 우리의 혈육이 아닙니까.

아니요. 그런 말은 마시요. 이 나라에는 우리 아기보다도 더 애처로운 신세에서 울고 있는 우리의 아들과 딸이 퍽 많이 있소. 나는 항상 그것들이 눈에 밟히어서.

왕비 더구나 알공인가 하는 사람은 아기의 일로 말미암아 이차돈 한사를 몹시 시새워하고 미워한다는데요.

나도 그런 일은 벌써부터 짐작해 알았오.

왕비 그러면 시방이라도 곧 사정부령(司正府令)에게 분부를 하셔서 알공을 잡아 죄를 주도록 하시지요.

아니요. 그런 일은 할 수 없지요. 더구나 이 나라의 법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니까. 도리어 나는 밝은 아침만 되면 알공으로 사정부령을 시키겠소.

왕비 (놀라서) 그것은 어째서.

거기에서 내가 훌륭한 사람을 밝혀 보려구요.

왕비 (어안이 벙벙해 앉았다가) 그래도 만일 상감마마 천추만세(千秋萬歲) 뒤에는 이 나라를 이차돈 한사에게 내려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야 그보담 더한 것이라도 줄 수만 있으면 주고 말고.

(내인 우편에서 등장)

내인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들어왔습니다.

이리 곧 들어오라 해라.

(내인 우편으로 등장)

내가 아까 이차돈이를 조용히 부른 일이 있는데…….

(왕비 좌편으로 퇴장, 이차돈 우편으로 등장해 침상 앞에 부복)

일어나 편히 앉으라. 이 늙은이의 잠 아니오는 근심스러운 밤이 너무도 외로워서 이야기 동무로 너를 오늘 부른 것이다.

(이차돈 공손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는다.)

요사이 밖에는 별일이나 없는지.

이차돈 별로 큰일은 없는가 하옵나이다.

아도 화상이 천경림에 그저 잘 있는지…… 너는 더러 만나보았느냐.

이차돈 자주 만나보나이다.

이 나라의 백성들이 이제는 불법(佛法)으로 돌아가려 하는 이가 더러 있는지.

이차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미욱하고 완악한 사람이 많사와 아직도 깨달은 이가 적은 듯하오며 더구나 이 나라의 율법이 깨달은 이를 못 견디게 구오매 그로 말미암아 뜻 있는 이 가운데는 더러 눈살을 찌푸리어 걱정하기를 마지않는 이가 보오이다.

그것도 모두 나의 밝지 못한 허물이로구나.

이차돈 아니로소이다. 폐하께옵서는 지극히 거룩하옵시건마는 아래에 있는 저희들이 성지(聖志)를 도무지 받들어 받을 힘이 없사오니 그 큰 죄가 작은 몸을 둘 사이 없사옵니다.

어허 이 몸도 이제 반나마 늙었으니 얼마 아니 있어 내가 죽은 뒤에 이 나라를 맡아 다스릴 만한 이가 누구일꼬. 슬하에는 쓸만한……. (눈물을 지운다.)

이차돈 동궁은 아직 비어 계옵시지마는 입종(立宗) 같으신 가장 친근하옵신 성골(聖骨)께옵서 계옵신데요.

아니 그 사람은 내 아우이지마는 그칙하지 못하니까 이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네가 나이는 아직 어리나 나는 너 한 사람만을 깊이 믿고 또 마음에 든든히 여기고 있다. 그래서 너를 오늘도…….

이차돈 (물러앉아 자리에 엎드리며) 소신은 그저 어리석은 지아비일 뿐이로소이다. 한 나라의 크낙한 그릇을 어찌 바꿀 길이 있사오릿고.

아니다. 그러하지 말고 일어나 앉아서 내 말을 자세히 들어보라. (이차돈 일어나 앉는다)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은 아직 너에게로는 돌아가지 않고 도리어 알공 같은 사람에게로 쏠리는 모양이지. (한숨을 쉬며) 그러기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공의 말과 일에만 두둔을 하지. 너의 옳은 말에는 모두 헐며 뻗서기만 하고…….

이차돈 그것은 진실로 소신이 잘 나지 못한 탓이겠삽지요. 소신도 알공은 뜻 있고 훌륭한 사나이인 줄로 아옵나이다.

그러기에 말이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뜻한 것은 아니나…….

(이차돈의 눈치를 자세히 살피며) 저번에 공주의 병을 고치어 준 공도 너에게 큰 줄은 번연히 알겠지마는 여러 사람의 우김에 어려워서 그만…….

(멀리서 내인들의 이차돈을 찬송하는 노래 소리가 들린다.)

너, 저 소리를 들어 알겠느냐.

이차돈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저 소리도 아마 알공을 기리는 공주와 내인들의 노래 소리일 것이다.

이차돈 (놀라웁고 불안하고 또 의아한 듯이) 알공을……. (다시 불안한 빛에 싸인 얼굴을 숙인다)

(빙긋 웃으며) 왜 너도 저 소리가 듣기 싫으냐. 나만 그런 줄로 알았더니.

이차돈 네─ (얼른 힘없이) 그러나 아니올시다. 소신도 알공을 깊이 믿고 사랑하오며 또 두터히 기리고 있삽나이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터이냐. 너의 공로를 남에게 앗기었어도…….

이차돈 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변되인 일에 만일 크게 언짢거나 또는 좋은 일이 있다 하오면 소신의 가슴에는 다만 죽음과 충의만이 있고자 할 따름이로소이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너에게 그러한 훌륭한 기개가 있는 것은 나도 익히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성도 무엇에 쓸 데가 있어야 하지……. (한숨을 쉬며) 시방 우리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살피어 보아라. 남들은 모두 하늘 아래의 온 땅이 좁다고 한창 날뛰는 이 판에 우리는 그들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들고 헛발길에 뒤채어 소리도 못 지르고 엎드려만 있으니……. 가엾게도 제 몸을 파묻을 무덤 구덩이만을 후비적거리기에 가장 바쁜 셈이지. 우리가 이렇게 못난 짓만 하는 것이 그 허물이 남에게 있느냐. 우리가 매여 있다는 저─ 높은 하늘 위의 몸별에 있는 줄 아느냐. 아니로다. 그런 것이 아닌 줄은 나는 벌써부터 깨달아 알았노라. 그것은 그것은 그 몹쓸 어둠의 덩쿨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를 박아 서리고 있는 까닭이 아니냐. 흥 알공과 이차돈, 신라와 고구려, 백제 그것은 다─ 무엇이냐. 사람으로서 무엇이 다를 것이 있으며 나라로서 또 무엇이 다를 것이 있으랴. 어허 시세(時勢)여. 너는 동친 막대가 되어있구나. 어허 계림이여. 너에게는 영매(英邁) 과감한 위인의 핏줄이 이제 그만 끊어져 버리었느냐.

이차돈 상감마마 (무슨 감격에 가슴이 북받쳐 막히는 듯 눈물을 지우며) 폐하께옵서 소신을 이다지 믿고 사랑하옵심을 어찌 감히 모를 길이 있사오릿고. 폐하께옵서 감추어 두옵신 큰 뜻을 이로 듣지 않사온들 어찌 모르리잇고, 죽사와도 폐하의 거룩하옵신 그 뜻을 어김이 없겠나이다.

고마웁다. (눈물에 어린 기꺼운 얼굴로) 너는 참으로 착한 신하이다. 다만 한사람뿐인 나의 신하이다. [小間(소간)] 그런데 이 나라를 잘 다스리자 하면 어찌하여야 좋을고. 나의 생각 같아서는 하루바삐 부처님의 거룩한 도를 모시어 들이고 싶은데…….

이차돈 (다시 자리를 잡아 앉으며) 그러하올시다. 이웃의 먼저 깨어 억세인 나라와 사귀려 하와도 그것이라야 하겠삽고 미욱한 백성들을 일깨워주려 함에도 그것이라야 하겠삽고 마음을 밝게 깨우쳐 사람을 어질도록 가르침에나 모든 것을 가미로웁게 하고자 하옴에는 모두가 시방에 있어서는 첫째로 그 거룩한 것이 아니면 아니 될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또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영검스러운 일이나 고마운 신세나 간절한 소원으로 보아서도 내가 몸소 나아가 그 거룩한 일을 이룩해야 하겠다마는 내 앞에는 완악한 신하들이 많아서 모두 나의 뜻을 못 알아주고 제 욕심껏 제 고집껏 제 심술껏 뻗서고 헤살만 놓으니 어찌하면 좋을고.

이차돈 소신이 때로 근심 빛에 어리인 용안을 쳐다뵈옵고 또 이 나라의 가리 잡을 수 없이 어지러워진 정사를 그윽히 생각하오매 저절로 북받히는 핏줄이 좁은 가슴을 막사오며 나닿는 주먹이 둘 곳이 없사와 하염없이 솟치는 뜨거운 눈물에 앞일이 캄캄해 보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이 철없고 미욱하온 소견에도 보고 깨우친 것이 있사오매 다만 한 옆으로 든든하옵고 반가운 느낌이 가득하와 스스로 옹친 마음이 풀리옵고 넌지시 조바심하던 가슴이 늣구어지옵는 것은 황송하오나 크게 거룩하옵시고 지극히 거룩하옵신 상감 마마께옵서 높은 자리에 계옵시니 "계림에 성군이 나옵셔서 크게 불교를 이룩하리라" 하옵던 고도녕(高道寧)의 이른 말이 이제 와 바로 맞는 줄로 깊이 믿사옵고 또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뜻은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까웁지 아니하냐.

이차돈 옳소이다. 그러하옵기에 소신의 어리고 못난 소견에도 매양 저어하옵는 바는 황송하오나 폐하의 마음 두심이 너무나 인자하옵신 데만 흐르심이 아닐까 하옵나이다. 너무도 아끼시는 게 많으시와 작은 것을 아끼시옵다가 크게 아끼시옵는 것까지 잃기 쉬웁사오며 너무도 사랑하심이 지나치시와 적은 일을 사랑하옵시는 동안에 많은 일을 그르치시올까 두려하옵나이다. 손싸게 부싯불 치듯이 하셔야 하옵실 일에도 인정에 끌리시와 내어놓은 걸음을 도로 물리어 머뭇거리옵시니 크옵신 뜻과 거룩하옵신 마련은 비록 많으옵시나 그것을 이룩할 만한 억세인 힘과 모질으옵신 마음이 적으옵심을 그윽히 슬퍼하옵나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좋을고.

이차돈 첫째로 이룩해야만 할 일에는 하루 바삐 이룩하옵시고 끊어내 버려야만 될 마디에는 얼른 쉽사리 끊어버리시옵소서. 이 나라 백성들의 암치뇌옥(闇癡牢獄) 얽매인 쇠사슬을 풀어 주옵시려거든 먼저 폐하의 애린(愛隣)에서 헤매이시옵는 번뇌의 철성(鐵城)부터 무너버리시옵소서. 사랑하옵시는 공주 아기씨에게라도 못 끊을 정 끊을 것이옵거든 얼른 끊어버리시옵고 깊이 미워하시는 알공도 긴히 불러 쓰실 일이옵거든 고대 불러쓰시옵고 이 나라에서는 그리 영검하옵다는 밝수의 무리들도 이제는 쓸데없어 흩어버릴 것이면은 곧 흩어 버리시옵소서. 모든 것을 굳세이게 끊어 맺으시옵는 본보기로 소신의 이 모가지라도 버혀 버리시어야만 되올 일이옵거든 시방이라도 냉큼 잘라주시옵소서. (열에 띤 눈물을 씻으며) 그리고 밝는 아침이라도 폐하의 거룩하옵신 뜻대로 천경 수풀을 치고서 큰 절을 이룩하시옵소서. 폐하의 뜻대로 고도녕의 말대로 백성의 마음대로 검님의 알음짱대로…….

(잠잠히 생각하는 듯) 그러나 신하들이 또 벌떼 일어나 듯하여 어근 목을 쓰며 잔소리들을 하면 어찌하노.

이차돈 폐하께옵서 옳게 보옵신 일이오면 못하올 것이 어디 있사오릿고. 만일 누가 무어라 지껄이오면 그때는 소신이 목숨을 놓고 싸우더라도 반드시 옳고 바른말로 겨루고 대답하여 위로는 폐하의 거룩하옵신 뜻을 이루도록 하오며 아래로는 일만 사람이 다─ 돌아와 항복(降服)하도록 하겠삽나이다.

아니다. 더구나 네 몸은 시방 그러한 짓을 할 때가 아니다. 그들은 본디가 완악하고 미욱한 짐승들이거든 너를 도리어 죽이어 없애일지언정 어찌 그리 쉬이 감화될 리가 있겠느냐.

이차돈 폐하께옵서 두굿기시옵는 거룩하옵신 사랑으로 소신에게 큰 믿음을 주옵시며 끝까지 굳세인 힘을 주옵시며 바르고 착한 슬기를 주옵시면 모르옵건대 소신의 이 몸과 목숨은 나라 일에 바친 지 이미 오래 오매 반드시 삶이 있지 아니하면 죽음이 남아 있어 기다릴 따름이로소이다.

그러나 까닥 잘못하면 너의 목숨만 공연히 잃어버리는 일이니 [小間(소간)] 안될 말이지. 더구나 나의 뜻은 본디 여러 사람에게 이익하게 하고자 함이어늘 도리어 어찌 아무 허물 없는 너만을 죽이는 일을 일부러 할까 보냐. 더러는 네가 비록 큰 공덕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름지기 죽음을 피하는 이만 같지 못하니라.

이차돈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대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이른바 목과 목숨이라 하옵지요. 그러하오나 시방 소신의 몸이 저녁의 죽음으로서 거룩한 도가 이튿날 아침에 행한다 하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사오릿가. 그때는 밝은 빛이 온 나라 땅에 뻗칠 것이오며 폐하께옵서도 길이길이 만복을 누리시올 일이 아니겠사오릿고. 그 적이 비록 소신이 죽는 날이라 이르오나 도리어 영생으로 다시 살아나는 때라고 반기겠삽나이다.

(침묵에 쌓였다가 별안간 감격과 환열에 띠어 상에 내려 이차돈의 손을 잡으며) 어허 갸륵한 넋이여. 나는 너와 같이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이제 죽더라도 유한(遺恨)이 없겠다.

(왕과 이차돈 기쁨과 눈물 속에 어른어른 침침하던 등잔불은 새로이 밝게 붙는다.)

황혼 수풀 곁 영천(靈泉).

우물 둔덕에는 깨끗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사시와 촌부 둘은 물을 긷고 있고 늙은 과부 한 사람은 돌무더기를 향하여 절을 하고 있다.)

과부 (손을 비비며) 정성이 지극하면 죽었던 낭군도 다시 살아온다 하옵기로……. (일어나 절을 한 번 하고 공손히 돌 하나를 집어 돌무더기 위에 올리어 놓고 퇴장)

촌부1 아이 망측스러워라. 늙은이가 그게 무슨 짓이야.

촌부2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사철 젊어서……. (일동 웃는다)

촌부3 그래도 젊은 가시내가 한창 놀아나 너털웃음에 엉덩이짓만 하고 다니는 이보다는 퍽 낫지요 무얼…….

촌부1 (웃음 띤 눈으로 사시를 여기어 보며) 참 저 색시 얼굴은 퍽도 어여뻐. 좀 더 곱게 다스려 몸꼴만 냈으면 나라님께서 원화(原花) 아가씨로 모시어 가겠어.

사시 에그 그 지겨운 원화 나는 싫어요. 그 극성인 풍월(風月)님네들 등쌀에 어떻게 베기게요.

촌부2 참 우리집 골목 안 막다른 집 시악시의 이야기 더러 들어보았소.

촌부3 (고개를 저으며) 못 들었어…….

촌부1 왜 어느 풍월님을 따라서 고을 살러 갔다면서요.

촌부2 글쎄 말이오. 그 풍월님이 몹쓸 사람이던 게야. 아마 그이에게 속아서 갔다나 보던가. 처음에는 너무도 곱다고 칭찬하고 추어주는 바람에 시악시가 그만 반해 따라간 것이…… 풍월님은 고만 중이 된 까닭에 고을 사람들한테 맞아 죽었대요. 그리고 그 색시는 중놈하고 산 계집이라고 얼굴에도 똥칠을 해 이 고을 저 고을로 끌고 다니었다던가 그만 아침 이슬에 피었던 꽃이 하루 밤 된서리를 맞아 스러진 셈이지.

사시 아이 가엾어라.

촌부3 가엾어요? 가엾기는 무엇이 가여워. 도리어 재미있게 고소하지. 한창은 너무도 미쳐서 저녁마다 삼을 잇다가도 저의 어머니의 조는 틈을 타서 울을 넘어 도망질을 해가지고……. 그럴수록 저의 어머니는 더 기강을 부리며 딸을 붙들어 가두느라고 애를 쓰겠지. 그 계집애는 건달에게 넘어져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허덕지덕 야단인데. 그래 울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뒷곁 엎주거리에다 날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노구메 정성을 들이더라나. 아이참 우스워서……. 그러더니만 그─예 중놈 서방을 해 간 셈이야. 그나마라도 끝이나 좋았더면.

사시 왜 중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요. 이 서울에는 나라에서도 절을 다─ 짓도록 마련을 하신다는데요.

촌부1 여기는 그래도 서울이니깐 그렇지요. 시골서는 아직도 그런 것을 보면은 이를 갈고 길쌈 싸 가지고 쫓아다니며 못살게 군답디다.

사시 아이 밉살머리스러운 사람들도 다─ 많지. 그게 온 무슨 짓이야.

촌부2 저 아기는 중놈한테로나 시집을 보내야 하겠군.

사시 (부끄러운 듯 얼른 고개를 숙인다)

촌부3 (촌부2에게 얼른 눈짓을 하며) 그러기에 세상이 낭이라 이르지요.

(촌부들은 물동이를 이고 퇴장)

사시 (한숨을 가볍게 한 번 쉬며) 몹쓸 사람들도……. 남의 궂은일에 그리 고소할 것이 무엇인고. (돌무더기 앞으로 가서 사방을 한 번 휘휘 둘러본 뒤에 돌 하나를 집어 돌무더기 위에 올리어 놓고 공손히 절을 하고 엎드려 빈다) 그이의 몸에 온갖 궂은 일일랑 물리쳐 주시옵고 시방이라도 한 번만 만나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차돈 수풀 뒤의 길로 등장)

'사시’ 한 번이라도 좋사오니 다만 꿈결에라도.

이차돈 (돌무더기 뒤에 가만히 서서 보다가 빙긋 웃으며) 그래라 너를 만나보게 하여 주마.

사시 (깜짝 놀라 일어나며) 어메나.

이차돈 (웃고 나서며) 누구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서 애를 쓰노. (사시 부끄러운 듯 반가운 듯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인다.)

이차돈 그래 여기에서 무얼 하누. 외따르고 후미진 이런 곳에서. (물동이를 보고) 물을 긷나.

사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덱끄덱하며 치마끈을 입에다 문다)

이차돈 너를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사시 저는 퍽 그리웠어요.

이차돈 벌써 닷새 전부터 대궐 안에 바쁜 일이 있어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이제서야 아도 스님을 뵈오려 가는 길이야. 저 달이 반달 적에 너와 헤어졌더니 벌써 그동안에 온달이 되도록 둥그렀구나.

사시 그러믄요. 벌써 가을이 들었는데요. 요사이는 밤새도록 뜰 앞에 귀뚜라미 소리가 사람마다의 얕은 꿈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이차돈 나도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던고. 그러나 나라에 바친 몸이매 바쁜 일에 쌓여 밤낮 눈코 뜰 새도 없었으니.

사시 저도 뵈옵기는 싶으면서도 그런 줄을 알고 공연히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제는 기다리지도 않는답니다. 아무쪼록 나라 다스리시는 데 거룩한 일을 많이 하셔요.

이차돈 너의 부탁은 고맙다마는 나에겐 그만한 힘이 이로 미치지 못할까 보아 두렵구나.

사시 저는 요사이 아무 생각도 아니하고 지낸답니다. 아따금 바람결의 쓰르라미 소리를 좇아서 버들숲 속 길로 멋없이 돌아다니어 보기도 하고 축동 저쪽에 흰 말 그림자가 눈에 번득 띠일 때마다 저는 한사님인가만 여겨 몇 번이나 가슴이 울렁거리었는지요.

이차돈 그것은 너무나 고마웁고도 가엾구나. 그러면 이제 들어가지. 또 스님도 뵈어야 하겠으니깐.

사시 그러면 어떻게 하게 또 오랫동안 못 뵈올 것을.

이차돈 (잠깐 머뭇거리다가 돌무더기 앞에 앉으며) 그럼 여기서 잠깐 놀다가 갈까.

사시 지나가는 사람이 보지나 않을까요.

이차돈 무어 없겠지. 또 누가 본들 어떠할라고.

사시 달도 참 밝기도 하지. 나는 그동안에 얼마나 그리워하였을까. (안는다)

이차돈 어─ 바람도 시원코야. 거칠은 겨울 벌판과 같이 쓸쓸하였던 가슴에 금방 거룩한 샘물을 들이붓는 듯하구나.

사시 어─허─ 무엇이라 말을 하면 좋아요. (저의 가슴을 껴안는다)

이차돈 (혼잣말처럼) 아무 소리나 되는대로 지껄이어도 다─ 좋지. 거칠어 빠진 돌무더기 언덕에도 한 줄기의 거룩하고 좋은 샘물이 있어 목마른 목을 축이어 주니 아무러한 소리라도 가슴이 터져 나오도록 마음껏 질러보아도 좋지. (다리를 뻗고 앉는다)

사시 여보셔요. 거기 그렇게 앉지는 마셔요. 그 고운 옷에 흙물이 들면 어찌합니까.

이차돈 아무려면 어때. 너와 이렇게 앉아 즐겁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더러 더럽히는 옷이라면…… 또 더러워졌으면……. 만일 이 옷이 더러워 못입게 되걸랑 네가 저 샘물을 떠 깨끗하게 빨아나 주렴.

사시 빨아드리기는 어렵지 않으나 그 옷이 헤지면 어떻게 하게요.

이차돈 그것까지야 걱정할 것은 없다. 나는 도리어 너의 그 어여쁘고 고운 손이 헤어지지 않을까 저어할 뿐이다. (사시의 얼굴을 건너다 보며 빙긋 웃는다)

사시 왜 그렇게 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셔요. (아양을 부리어 손짓을 하며) 그렇게 보지 마셔요. 저는 오늘 머리도 빗지 않았는데요. 그 귀걸이도 시방은 물길러 나오느라고 집에 떼어 두었는데…….

이차돈 그래도 너는 어여쁜 각시다. 이 나라에서는 제일 곱다고 이르는 원화들보다도 더 고운 선녀이다. 골안개에 피어난 무궁화 너는 우리의 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이 가꾸어 준 어여쁜 꽃이다. 아가씨야 왜 이렇게 고개를 넌지시 숙이기만 하니. (사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사시 점잖은 한사님게서도 이렇게 손잡손을 다 하시나요.

이차돈 손잡손이 아니라 삼단 같은 너의 머리가 퍽 소담스럽구나. 이 귀밑머리까지 내 손으로 다 풀어줄까.

사시 (몸을 모로 피하는 듯) 아스셔요. 아스셔요. 그것은 아스셔요. 귀밑머리는 풀지 마셔요.

이차돈 (열적은 듯이 멀쑥해 앉으며) 왜 내가 너의 그 머리를 풀어줄 만한 임자가 못될까 보아 그러니. 시방이라도 너의 집에 가 너의 어머니와 오라버니께 말씀을 여쭈며 그들도 아마 나의 말을 뻗서지는 않으실 터이지. 그래 네가 이 한사 이차돈의 아내가 된다 하기로 무엇이 그리 언짢을 것이 있을까. 설사 너의 집에서는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시 ………….

이차돈 왜 아무 말도 아니 하니. 나의 지껄이는 소리가 듣기 싫으냐.

사시 아니요. 당신의 말씀이 고마웁기는 하지만.

이차돈 그래 어떻단 말이냐.

사시 저는 어느 때까지 이대로 있고 싶어요.

이차돈 어째서 나는 그래도 네가 나의 이 뜻을 들으면 무척 반가워할 줄만 알았었구나.

사시 반가웁기야 너무도 반가웁지요마는……. 그러나 저는 어느 때까지든지 허락지 않은 시악시의 몸 이대로 그냥 있고 싶어요.

이차돈 그것은 너무나 꽃다웁다 못해 안타까운 일인데.

사시 ………….

이차돈 네가 만약 좋다고만 하면 저 달재에 대궐터를 빌어 비둘기장같이 새집을 짓고 서른 새의 고운 깃으로 너를 입히고 좋은 구실 좋은 노리개를 모두 장만해주마. 온갖 좋은 보물을 얻어 너를 차리어 주고 너를 꾸미어 주마. 뒷곁에는 업죽가리 하나 만들고 그 앞에는 꽃도 심고 그 꽃이 필 적에는 네가 노상 잘 부르는 그 길쌈 노래도 불러 보잤구나. 네가 즐기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만들어주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신세도 끼치지 말고 참견을 받지도 말고 홀가분하게 우리 단둘이만 즐겁게 지내잤구나.

사시 저 같은 것을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이차돈 그러면 나하고 시방 같이 가면 어떨고. 이 나라에서는 처음 될 만한 크낙하고도 훌륭한 혼인 잔치를 차리고서 너를 맞이해 가지.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처럼 삼월 삼짓날 꽃말이처럼. 어─허─ 그때 너는 얼마나 어여쁜 새색시가 될꼬. 나는 그것이 보고 싶구나. 너의 집이 그 무명옷이 싫거든 이 나라에서 제일 호사하는 원화(原花)의 옷을 입히어 주마.

사시 그처럼 저를 생각해주시는 것은 도무지 어떻다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기쁘지마는…….

이차돈 그것은 또 무슨 소리야.

사시 아니야요. 저도 한사님을 모시고 그런 살림살이를 하고 싶기는 퍽 하지만은 그렇지만 저는 어떻든 이대로 그냥 이 천경(天鏡) 수풀 속에서 살다가 스러질 목숨일 줄만 여기어요.

이차돈 어째서.

사시 글쎄 어째 그럴까……. (고개를 숙이며) 그것은 저도 모르겠어요.

이차돈 (답답한 듯이) 이 애 그것은 네가 나를 골리려고만 하는 소리로구나.

사시 제가 이렇게 그런 훌륭한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 몸이겠어요. 시방 말씀은 모르건대 실없는 희롱으로 저를 놀리어 보고자 하시는 게지요.

이차돈 허─ 허 이것은 또 무슨 소리야.

사시 무얼 그렇지요. 이리저리 속이시다가 저를 모르는 곁에 떠다밀어 진창에 빠져 우는 것을 보고 웃으시려구.

이차돈 (무의식하게) 그럴 리야 있나.

사시 무얼 요사이 풍월님네들이 거진 다─ 그렇다는데요. 귀여워하고 추어만 주니깐 계집애들은 금방 반해 덤비지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만 모르는 결에……. (한숨을 쉰다)

이차돈 아무튼 너는 똑똑한 시악시이다. 그러나 어느 몹쓸 풍월님이 그리 거짓말을 잘 하는 실없고 사나이였던고.

사시 귀밑머리가 다─ 이렇게 풀어졌으니 어떻게 해요. 어머니가 보시면 또 꾸지람하시겠네. (방긋 웃는다)

이차돈 그것은 참 매우 안되었구나.

사시 괜찮아요. 도섭스럽게 온 별말씀을.

이차돈 가뜩이나 믿지 못하는 사나이가 그런 짓을 해놓아서.

사시 (이차돈의 침울한 마음을 농치어 주려는 듯이 아양성 있는 웃음의 얼굴로) 그렇지만 안 뵈을 동안에는 그리웁고 믿음직한 어른은 한사님뿐이야요. 노상 너그러웁고 탐탐하신 우리 한사님. 한사님은 아마 나밖에도 더 좋은 동무가 퍽 많으시지요. 나보다는 무척 재미도 있고 또 어여쁜 가시내들이.

이차돈 그런 말은 또 어째 별안간…… 까닭 없는 시새움. 그것이 널로 하여금 이 세상에 약은 아가씨를 만드는 것이로구나.

사시 (어린 애처럼) 그럼 그런 말은 묻지 않는 것입니까.

이차돈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만……. [小間(소간)] 아무튼 묻고 싶으면 묻는 것이지 어떻든 그따위 이야기는 재미없으니 이제 고만 두자.

(딴 말을 하려고 일부러) 그래 내가 먼 발치로 올 때에 네가 먼저 나를 알았을까 내가 먼저 너를 보았을까.

사시 (한숨을 쉬며 힘없이) 그것은 자세히 모르지만 저는 말 타고 다니는 이만 보면 모두 한사님만 여기어 가끔 속으니까요.

이차돈 아까는.

사시 저는 모르게 오시고도……. (원망하는 듯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이차돈 그렇게 그리워하는 너에게 내가 여러 날 보이지 아니해서 너무 안되었다. 더구나 접때 내가 갈 때에도 아무 말도 없이 섭섭히 고만 달아나 버려서.

사시 무얼요. 그때도 한사님 가시는 것을 일부러 숨어 지켜 보았답니다. 다─ 가셔서 안 보이시도록……. (김의 풀을 뜯어 치맛자락에 감아 쥐고 입안의 소리로 무슨 푸념을 하는 듯)

이차돈 그것은 무엇을 그러니.

사시 아니야요. 손잡손이지요.

이차돈 손잡손.

사시 아니예요. 보시지 마셔요. 또 놀리며 웃으시려고.

이차돈 무엇을 그리 입으로 중얼거리니 무슨 푸념이야.

사시 여보셔요. 제가 정말 이뻐요 미워요.

이차돈 이쁘고 말고. 이슬 머금은 무궁화 송이 같이 이쁘다는 밖에.

사시 (혼자 푸념으로) 이뻐 미워 이뻐 미워. (이차돈을 웃으며 돌아보고) 저 나도 당신이 퍽 이뻐요.

이차돈 그렇지. 그 영검스러운 김의 풀을 빌어 나는 네가 그리웁고 너는 내가 그리운 것을 하소연한다. 우리 둘의 목숨을 그 가느다란 한 오리 김의 풀에다 매어 달고.

사시 (가슴에 손을 대고 힘없는 소리로) 저는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려져요.

이차돈 (놀라운 듯) 왜 그럴까. 괜히 쓸데없는 말을 오래 해서 아마 그러한감.

사시 (고개를 가벼히 저으며) 아녜요. (잠잠하다가 고개를 넌짓 들며) 한사님 저를 꼭 이뻐하시지요.

이차돈 그렇고 말고.

사시 한사님께서 중을 어떻게 생각하셔요.

이차돈 이애 그까짓 말은 이제 고만 두잤구나. 내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밖에 더 무엇 있니.

사시 그렇지만.

이차돈 네가 나를 그리워하고 내가 너를 그리워하니 우리 둘의 것은 무엇이든지 벌써 예전에 거룩한 이의 뜻대로 다─ 바치어 버린 것이지 무어야. (우는 사시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왜 우니. 울지 말어. 울기는 왜 울어.

사시 그냥 놓아주셔요. 얼른 저 달이 넘어가 버리었으면 저는 손발이 싸느랗게 질리어 저절로 떨리어집니다. 이 좁은 가슴은 이렇게 기쁨에 울렁거리는 것인데 이것도 이때 뿐이나 아마 아닐지.

이차돈 어─ 가엾은지고. 가시내 마음이 이다지도 여린 것인가. 이 철없는 아가씨야 사시 아가씨야. 이제 그런 쓸데없는 이삭다니는 고만 두잤구나.

사시 (무엇을 동경하는 듯 열없이 혼잣소리처럼) 어─ 저─ 아가씨야 부르시는 그 음성이 맨 처음 제 가슴에 그리움의 화살을 박던 활시위의 소리였어요. 한사님께서는 아마 잊으셨겠지요. 벌써 그게 저지난 달에 사시 아가씨야 부르시던 당신의 음성이 나의 가슴을 얼마나 뛰놀게 하였던지요. 아무도 그처럼 고운 목소리로 제 가슴이 찌르렁하고 무너지도록 불러주는 이는 다시 또 없을 것이야요. 그 목청에는 영검스러운 그 무엇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저는 시방도 맨 처음 뵈옵던 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 이름을 처음 부르던 그 날부터 저의 마음에는 수줍음이 생겼으니까요.

이차돈 수줍음이.

사시 당신은 아마 잊으신 것이지요. 그때 우속(于續) 마을 집에 있을 적에 당신이 흰 말을 타시고 늦은 벗을 띄워 우리 집을 찾아오셨지요. 그리고 그담에는 울 안 굴집 앞에서 물끄러미 서로 건너다보다가 우리 어머니에게 들키였지요. 또 저에게 처음 말씀을 건네어 주실 때를 생각했어요. 당신은 아마 그 때에는 모르셨겠지만 무엇 당신을 처음 뵐 때부터 제 마음은 엉크러져 당신의 얼굴만 그리기에 이었던 삼실도 쓰지 못하게 엉크러 버려서 어머니에게 꾸중을 퍽 많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당신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나를 여기어 찾으 시는 당신의 눈치를 나는 살피어 잘 압니다. 접때 아도 스님하고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도 저는 향불을 가지고 올라가다가 당신이 언뜻 눈에 띄이기에 나무 그늘에 서서 당신의 얼굴만 올려다 보느라고 얼이 빠졌었습니다. 나는 당신만 뵈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요. 내가 당신을 넋을 잃고 서서 쳐다볼 때에 당신께서도 말씀을 하시다 모르는 결에 힐끗 나를 보고는 다시 큰 눈을 떠 나를 쏘아내려다 보셨지요.

당신의 눈과 제 눈이 서로 마주칠 때에 어찌도 남부끄럽던지 낯이 붉어 얼른 고개를 숙였었지요. 그래 제가 하는 수 없이 향을 들고가려다 보니까 그만 향로는 땅에 떨어졌고 제 치마 앞이 커다랗게 구멍이 나도록 탔겠지요. 아마 그것을 당시는 못 보셨을 게야. 그때는 고개를 돌리셨을 적이니깐. 그래 온 어떻게도 열쩍던지 참 혼자 우스워 죽을 뻔했어. 부끄럽기도 하고 남이 볼까 보아서…….

이차돈 챔 재미있고도 우스운 일이었었구나.

사시 참 나 보게. 이야기에 팔리여 달이 높도록 있어서 앉았으니.

이차돈 그럼 이제 들어 가지.

사시 한사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철 가는 줄도 모르겠어요.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조금 나중 들어오셔요.

이차돈 그러지.

사시 그러고 있다 가실 적에 휘파람을 한 번 부셔요. 그러면 제가……. (사시 퇴장)

이차돈 어─ 저 달은 밝기도 하고녀. 뜨거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답답한 가슴을 식혀주는 듯.

제4막

편집

초추(初秋) 어느 날.

이차돈의 거처.

정면에서 좌편까지는 사랑 대청(舍廊大廳) 누(樓)마루. 뒤에는 동산, 우편은 화단, 화단을 꿰뚫어 통로.

(누마루 위에는 이차돈과 거칠부가 앉았다.)

이차돈 중전마마께옵서 하치 않은 이 몸을 그처럼 하념(下念)하옵신다 하니 도리어 황송하옵기 그지없네. 그러나 이 몸은 불행히 그렇게 편안한 자리에서 복스러웁고 즐거운 살림살이를 하고 있지는 못할 것일세. 나는 시방 위태스러운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길일세. 자칫하면 떨어져 죽는 외나무다리를 일부러 건너고 있어……. 다리 건너 저쪽에는 불쌍한 동무들이 부르짖고 있으니까 나는 내 힘과 희망과 용맹이 닿는 데까지는 부지런히 또 바삐 그 다리를 건너가야만 되겠지.

거칠부 그렇지만 나라 일을 자네 혼자만은 못할 것이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야 할 것인데 보아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은 자네에게 그리 붙좇지 않는 것 같고 더구나 상감마마께옵서는 천성이 인약(仁弱)하셔서 과단(果斷)하지 못하시고 주저하시는 일이 하도 많은데 자네 혼자 그렇게 날뛰기만 하면 무얼 하나.

이차돈 그럼 이 나라의 어려운 일을 맡은 이 몸으로써 이 몸이 나아가 일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나.

거칠부 아닐세. 시방이 어떠한 때인가. 더구나 자네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자네의 일이면 모두 쫓아다니며 희살을 놓으려 드는 이가 있지 아니한가. 그럼 또 자네는 자네의 손으로 무덤 구덩이를 파고 있는 짓만 하니……. 그래서 중전마마께옵서도 그것을 염려하심이 아닌가. 자네의 몸을 위하여 또 당신 따님의 장래를 위하여…….

이차돈 그러나 우리의 목숨을 결단코 우리의 것만이 아니니까. 수많은 여러 사람을 위하여서는 이 몸을 버리는 것이라도 좋지. 제가 스스로 깨달아 아는 길은 서슴지 않고 더벅더벅 걸어 나아갈 것이 아닌가.

거칠부 하지만 사람으로서 번연히 죽는 곳인 줄도 알면서 잠깐만 피하면 살 수 있는 것을 일부러 그곳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간다 하면 그것을 그리 현명하고 용감스러운 짓이라고 이를 수도 없겠지.

이차돈 그야 그것을 누가 현명한 짓이라고야 이르겠나마는 나는 나의 눈앞에 오도 가도 못하는 낭떠러지를 보고 있네. 그리고 그 낭떠러지 밑에서는 수많은 생령(生靈)이 손을 들어 부르짖으며 내가 얼른 내려가서 붙들어 올리기만 기다리고……. 더구나 상감마마의 망극하옵신 성은이 무거웁게 뒷덜미를 내려 누름에이겠나.

거칠부 자네는 그렇게 성은을 일컬어 말씀하지마는 나는 첫째로 황송한 말씀이지마는 상감마마께옵서 요사이 처분하시는 일이 모두 무슨 뜻으로 어찌하심인지 의심하기를 마지않네.

이차돈 천만에……. 우리의 입으로 그러한 소리를 어찌 함부로 하겠나. 자네나 내나 다─ 같이 신자(臣子)의 몸으로 더구나 우리 임금님께옵서…….

거칠부 그야 아무 나라 임금이라도 언짢은 짓을 일부러 하려 들지는 아니하겠지. 그러나 임금님으로서 착한 신하들을 애써 어려운 곳에만 몰아넣어 둔다면.

이차돈 나는 용기만 있으면 죽을 땅이라도 가기를 그리 사양치 않겠네.

거칠부 자네는 내가 하는 말에 골이 났나.

이차돈 골나고 말고도 없네. 나는 나의 일을 나의 뜻대로만 행할 뿐이니까.

거칠부 내 마음 같아서는 제발 이번 일은 자네의 뜻대로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아무튼 모든 일을 돌보아서도 자네의 몸을 고이 갖도록 하게. (일어서며) 그러면 나는 이대로 들어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중전마마께 여쭙겠네. 아마 매우 자네의 일을 근심하시며 기다리실 터이니까……. 따로이 여쭐 말씀은 없나.

이차돈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아무 말씀도 없네. 다만 이 이차돈이는 상감마마의 거룩하옵신 분부를 받자와 여러 사람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을 결단하였다고 그 한 말씀만 잘 여쭈어주게.

거칠부 (이차돈의 손을 힘있게 잡으며) 그래 자네는 나의 충고(忠告)를 아니 중전마마의 간절하옵신 분부를 참으로 들어줄 수 없나.

이차돈 이 사람 자네는 왜 이리 눈물은?

거칠부 (목이 메어서) 내가 친구로서 자네에게 이 안타까운 충고도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나 아닐까 하는…….

이차돈 (일부러 웃으며) 온 별일도 다─.

거칠부 자네 요사이 알공의 마음이 어쩐 줄을 아나?

거칠부 그따위 일은 일부러 알고 싶지도 아니하이.

거칠부 아무튼 이따 저녁에라도 또 만나세.

(거칠부 퇴장)

이차돈 (홀로 우두커니 섰다가) 이상한 일이다. 그의 말이 야릇하게도 마디마다…… 나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찌르는 듯하구나. (오뇌가 심한 듯) 이래야 좋을까 저래야 좋을까. 한 사람에게 붙들리어 있는 호화스러운 죄수가 될까 여러 사람을 건네어 주는 구찬한 뱃사공이 될까. (동안을 떼어 고개를 힘없이 내저으며) 아니 그럴 수가 있나. 그러한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어찌하여서 나는 내 뜻대로 행하기를 그리 주저하게 되나. 내 마음속에 거짓이 있었던가. 내가 똑똑히 보았던 그 진리가 봄 아지랑이처럼 헛되어 어리인 다만 한 마당의 옅은 꿈자리뿐이었던가. 아니다. 그러할 리도 없다. 나는 분명히 한 훌륭한 영체(靈體)를 붙잡아 보았다. 그러면 이따금 마음의 성안으로 번개가 치튀어 나닿는 그 황금빛의 번쩍거리는 꼭두각시는 어쩐 일인고, 삶이냐 죽음이냐. 어허 자비하옵신 검의 힘이여. 이 어려운 길을 가리여 주옵소서. 나의 갈 만한 길을 터놓아 주옵소서.

(잠깐 무슨 생각에 고개를 숙이었다가 다시 들며) 그게 다─ 무엇이냐. 그따위 것으로 나를 놀리어. 흥 내가 그렇게 못난 천치인가.(주먹을 힘있게 쥐며) 그냥 하여버리자. 그따위 것은 내가 돌아볼 겨를도 없어. (무슨 공포에 쌓이는 듯)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 나라 따위 독한 안개를 뿜어놓으려고…… (잠깐 동안을 띄어 목메인 어조로) 아니다. 그것은 몹쓸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고 어찌하랴.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상감 마마께옵서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옵셨고 또 나도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인 그밖에 다른 말이 왜 있으랴. (결심한 듯이) 하자. 그대로 하자. 중전마마의 아끼어 주시는 마음보다도 상감마마의 일부러 떼치시려는 그 깊고도 거룩한 뜻을 받들어 드리자. (뒷짐을 지고 몇 걸음 왔다 갔다 한다.)

팔월 초하룻날 저녁 때.

관아(官衙), 사정부령(司正府令)의 처소.

전면이 대청(大廳), 대청 앞은 뜰, 뜰 아래 좌우편은 행랑이 있을 듯, 숙엄한 관가(官家).

(청 위에는 위화부령(位和府令) 철부(哲夫)와 사정부령(司正府令) 알공(謁恭)이 마주 앉았다. 뜰에는 부리(府吏) 몇 사람이 시립(侍立). 뜰 아래 ○○○ 마당에는 부리(府吏) 한두 사람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한다. 무슨 큰일이 있은 듯.)

철부 자네의 벼슬이 이제 사정부령으로 올랐으니 위가 높을 수록 몸과 마음을 조심하여 상감마마의 거룩하옵신 은덕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일세.

알공 (근심에 쌓인 얼굴로) 벼슬이 높아 기쁜 것보다도 이 몸이 법을 맡은 관원이 되오매 어지러웁고 처리하기 어려운 이 나라 모든 일을 생각하오면 조바심하듯 하는 마음이 가라앉을 겨를이 없소이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어 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사오매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은 모두 사철 그 시늉이 싫음이 올 뿐더러 더구나 외국에서 들어오는 중놈들은 날마다 버릇없는 짓만 점점 늘어서 이 나라의 거룩한 신단을 무너버리랴 도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꼬드기어 그것을 속이고 놀아나게 합니다. 그려. 멋도 모르는 백성들은 공연히 미친 듯이 손에 손목을 서로 이끌고 떼로 몰리어 다니면서 서낭당을 부시고 검줄을 끊어버리고 짐때를 쓰러 뜨리고 거룩한 성단에는 똥오줌을 함부로 깔기려 들거늘 도리어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맞아들이려고만 합니다 그려. 어허 이 몸은 그것을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쳐져서. (일부러 몸서리를 친다) 철부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자꾸 불법을 순을 치고 망기질러 없애라고만 드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불법은 거룩하고 또 새로운 도라고 이르니 한때 바삐 반가이 맞아들이여 절도 지어주고 백성들 마음대로 믿음을 터놓아 주면은 백성들은 울근불근 원망하여 일어나지도 않을것이요 도리어 든든한 마음에 온건만 해질 것이 아닌가. 질래 그렇게 자네의 심술과 고집 그대로만 하다가는 백성을 들레이고 나라를 어지러히 하는 것뿐일 것일세.

알공 그렇지마는 사도(邪道)에 빠져서 미쳐 날뛰는 이 나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두들켜 누르지 않고 어찌하오릿가.

철부 그러나 태평한 성대를 이루려 하다가 도리이 인심을 소동시키며 이 나라 땅 방방곡곡 어디든지 이르는 곳마다 불법이 있는 곳이면 함부로 병화를 번뜩이며 병장기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려 드는가. 시방 벌써 이 나라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감 마마께옵서나 대궐 안팎까지도 모두 그리로 마음이 돌아 쏠리옵신 모양이던데 쓸데없이 자네만 그리 완악히 고집만 세우다가는 그것이 무엇이 될꼬.

(하늘을 우러러) 어─ 거룩한 검님이여. 철없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주옵소서. 저희끼리 서로 뻗서고 시새우고 옥갈리는 이보다 차라리 밝게 나라를 다스리는 명관이 되도록 해주옵소서.

알공 (철부를 붙들어 만류하며) 너무 이렇게 저만을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사람이올시다.

철부 (울듯이 목이 메어서) 내가 자네를 일부러 무어 헐어 말 하랴는 것은 아닐세.

알공 그야 저도 이찬 어른의 갸륵하신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올시다. 당신의 나라에 충의로운 정성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성과 마음을 가진 현명한 사나이도 시방 이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제일 좋은 방침을 모두 부서뜨리려고 만드니까……. 그것을 칭찬해 주는 이가 있을는지도 모르지요마는 이 몸으로서는 단속을 해주지 않으면 못 살겠으니까요. 요사이도 이차돈 한사의 조심없는 일을 보면 너무도 섭섭만 해 보입디다. 일상과 같이 어제도 대궐 안에서 함께 나올 적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보고 염불을 하며 날뛰겠지요. 그 광경을 보는 나는 기가 막히다 못해 눈물이 다 쏟아졌어요. 그래 한사를 보면서 그대가 공주의 병환에 중을 불러들인 까닭으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으니까 그이의 대답 좀 보셔요. 아주 귀치않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듯이 눈살을 찌프리며 이제는 저 백성들은 아무쪼록 부처님의 거룩한 법으로 인도를 해야 되리라고 한 마디 퉁명스럽게 해버리겠지요.

철부 (손으로 무릎을 치며) 옳─아 참. 그러려니 옳은 말이야. 그것이 정말 착하고 슬기 있는 이의 솔직한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말로 그것이 좋은 말이지. 나라의 태평을 도모하고 백성의 넋을 건져 주기에 힘을 쓰지는 않고 다만 물욕과 권세에만 눈이 어두워서 저의 사복만 채우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배짱에서야 그렇게 훌륭한 말이 한마디나 나올 리가 있겠나. (알공의 참괴고민(慚愧苦憫)하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시방이 나라의 묵은 도인들 잃은 밝수들은 더운 옷에 배불리 먹고 호강만 하기에 얼이 빠져 무슨 그리 백성을 근심하는 정성이 조금인들 있겠나. 다만 부른 배때기에 기름만 써서 유들스럽기만 하지. 그래도 시방 이 나라를 건져내랴 애를 쓰고 다니는 이들은 딴 나라에서 새로이 들어온 중들뿐이야.

알공 그러면 이찬 어른께서도 중놈들을 두둔하십니다그려.

철부 아니지. 그런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을 말할 뿐일세.

알공 이찬 어른께서마저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이 몸은 시방으로라도 쓰지 못하는 법관의 직분을 내어버리는 수밖에 없지요. 더구나 이차돈 같은 이는 가까운 성골로 또 장래에는 공주 아가씨의 남편이 되실 이요 국민의 신망이 시방 한창 그 일신(一身)에만 들이 쪼아 누구나 다─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 모양이니까…….

철부 (엄연한 어조로) 눈으로 보아서 시방 조정에서 있는 신하들 중에 그처럼 충성되고 의기 있는 사나이는 그 한 사람밖에 없을 줄로 아네.

알공 그야 상감마마께옵서 아끼며 사랑하옵시는 근관(近官)으로 대궐 안의 은총을 저 몸에만 받아 휘감고 있으니까 무엇으로 보든지 그러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그 대신 자기 몸에는 아무러한 소독도 없는 것만을 일부러 자꾸 하니 그것이 큰 탈이 아닙니까.

철부 그것이 그의 칭찬할 만한 충의로운 기질이란 말이지 무엇인가.

알공 무어 그렇기만 하면 오히려 좋게요. 시방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도 이롭지 못하고 자기에게도 또한 이롭지 못한 짓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또 우리에게 이롭고 실(實)다운 큰일에도 모두 기롱지거리 웃음소리로 만들어버리니 우리는 그렇게 실없는 이하고는 한자리에 앉았기도 싫으니까.

철부 나 보기에는 그의 하는 모든 일이 다─ 자기의 참 마음으로 말하는 것 같던데.

알공 옳지요. 그 참 마음이라고 떠드는 그것이 곧 녹두밭에 정업이처럼 사람의 눈에는 잘 띄일 만한 훌륭한 깃발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남의 눈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그러나 그의 태도는 너무나 사람들을 모두 깔보는 것같지 않습니까. 시방 우리도 정다웁게 지내는 듯하기는 하지마는 그것이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이 조정에서 잡아 내리어 내쫓으려고 드는 음흉한 수단이나 아닐른지 누가 압니까.

철부 하느님 맙소사. 여보게 그런 몹쓸 소리는 아─ 예 입에도 올리지도 말게. 어허 그 사람에게 어찌 그런 말이 될 뻔이나 한 소리인가. 도리어 자네의 그 모질은 소리야말로 정말 자네에게도 또 그 사람에게도 조금도 이롭지 못할 것일세.

알공 그러나 이 몸이 일부러 그를 모함하거나 방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얼마 아니 있어서 곧 하는 수 없이 그러한 몹쓸 일이 생길 줄로 믿으니까요. 이 몸은 그가 어떠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감님의 근시(近侍)하는 신하이니까 요사이도 무슨 일을 또 꼬두기어 여쭈어 무슨 짓을 끄집어 일으킬른지 누가 압니까. 여보시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요사이로 중놈들이 버쩍 기세를 부리는 것도 모두 그의 허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접때 아도 중을 불러들이어 공주의 병을 고친 까닭이 아니오니까. 이 몸이 까닭 없이 남의 일을 헐어 말하려는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아무튼지 제가 지나 내가 지나 저도 가다가 가다가 막마침으로 어느 막다른 곳에서 내 손에 경을 좀 쳐볼 때도 있을 터이지요.

철부 (벌떡 일어서며 손을 내젓고) 어허 무서운 소리. 어허 독한 내를 품기는 무서운 소리. 그러한 소리를 나는 더 듣지 않겠네. (허둥지둥 퇴장)

(부리(府吏) 1인 급한 걸음으로 등장)

알공 잘 조사해보았느냐.

부리 (굽실하며) 네─ 자세자세 염탐하였사옵니다. 오늘부터 천 경림에다 큰 절을 이룩하옵시는데 동독(董督)은 이차돈 한사께옵서 하옵시며 상감마마께옵서 시키시와 나라의 천량을 대어 짓는다 하옵더이다.

알공 (한참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럼 너는 시방으로 곧 이방부령(理方府令)을 잠깐 여쭈어 오너라. 조용히 의논할 말이 있으니…….

부리 (굽실하며) 이방부의 공목급찬(工目級湌) 말씀입니까.

알공 그래.

부리 (머리를 긁적이며) 이방부 거기는 어찌도 무섭사온지요. 문간에 걸어 놓은 싯뻘건 오랏줄만 보아도…….

알공 어─ 고약한지고 무슨 주둥이를 그리 놀리고 섰노. (부리 비실비실 퇴장)

알공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암만 해도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일어서며) 그렇다. 이제는 없애버릴 수가 있는 때가 돌아왔다. 상감마마께서는 그 천성이 이번에도 또 모든 일을 이차돈에게만 미루어 버리실 터이니까…… 어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늘이 시키시는 일이로군. (매우 유쾌한 듯이 한 번 소리쳐 웃는다.)

대전(大殿)

전면이 장엄 광대한 전각(殿閣).

(정면 중앙 용상에는 법흥대왕이 앉았고 문무백관이 위의 있게 왕을 시위해 있다)

알공 폐하께옵서는 도무지 모르옵시는 일이오면 이차돈 호올로 어명을 거짓 꾸미어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짓을 함부로 저질로 놓았 사오니 저를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예작부령 근자에는 풍년도 그리 들지 못하였사오매 하늘만 쳐다보옵고 살던 백성들이 모두 유리걸식할 지경이오며 더구나 이웃 나라 군사가 지경 안을 침범해 노략질하오매 군사들이 병장기 쓰기에도 쉬일 겨를이 없사옵거늘 무슨 일로 애매하고 파리한 백성들을 부리어 쓸데없는 절집을 일부러 수고로이 짓게사오릿고.

조부령 국고에는 천량이 떨어져 다─ 하였사오니 무엇으로 절을 짓겠사오릿고.

공목 이차돈은 회군능상(悔君凌上)하옵고 어명을 위조한 대역 죄인이오니 시방으로 곧 금부(金府)에 내려 죄대로 다스리겠나이다.

(번뇌에 쌓여 침묵)

알공 만일 이차돈의 죄를 밝혀 다스리지 못하오면 소신이 먼저 법관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죄로 목을 버혀 바치겠나이다.

공목 황송하오나 이차돈에게는 폐하의 은총이 너무도 크셨사와 이러한 변고가 일어난가 하옵나이다.

(침통한 어조로) 이번 일은 모두 나의 허물이다.

알공 그러하오면 이차돈에게라도 다 있는 것이지.

그만한 허물은 아무에게라도 다 있는 것이지.

알공 아니로소이다. 이 나라의 밝은 도를 무너뜨리려 드옵고 또한 어명을 거짓 꾸미어 도량 방자한 짓을 함부로 한 그 대역범죄가 어찌 아무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 이르겠사오릿고, 만일에 소신의 사뢰온 말씀이 망년된 게 있사오면 시방으로라도 이 혀를 빼어버리는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고민만 할 뿐 침묵)

공목 그러하오면 저 알공을 망녕된 말을 한 죄로 곧 다스리오릿가.

(천천한 어조로) 아니다. 알공은 저 맡은 직분에 충실한 사람인 줄로 내가 안다.

공목 그러하오면 이차돈의 죄는 곧 다스리어도 좋겠사오릿가.

알공 그거야 으례히…….

안 된다. 이차돈에게도 죄를 줄 수는 없다.

(중신은 어이가 없는 듯 어안이 벙벙해 왕의 얼굴만 쳐다본다. 왕은 몹시 고민. 갑사(甲士)의 복장을 한 이방부리 4인은 이차돈을 죄인으로 오라를 지어 가지고 등장. 왕과 이차돈 무언히 눈물 어리인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로 한참이나 건너다보다가 서로 묵연히 고개를 숙인다. 서로 몹시 고민에 쌓인 듯. 이방부리 이차돈을 뜰 아래에 꿇리어 놓는다.)

알공 너는 폐하의 은총을 가장 두터웁게 입은 근신(近臣)의 몸으로 무엇이 부족하여 감히 어명까지 위조하는 대역의 죄를 범하였는가.

이차돈 (놀라운 듯 고개를 들어 대왕의 얼굴을 한 번 이윽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힘없이 숙인다)

공목 너는 죽을 죄를 지은 줄 아느냐.

알공 어째 말이 없는고. 들으니 천경림에다 큰 절을 이룩한다고 하더니 그동안에 벌써 성불(成佛)을 하였느냐.

이방부리들 알공 (거친 목소리로) 빨리 아뢰어라. 너무도 어마어마하게 크낙한 죄를 지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느냐.

이차돈 (무거웁고 천천한 어조로) 너희들이 그따위 소리를 하려고 일부러 나를 여기에까지 잡어 들이어 이렇게 지겨웁고도 황송한 꼴을 상감마마 앞에 보려 드리려 하느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

알공 그밖에 다른 말은 또 없느냐.

이차돈 없다. 이것도 상감마마께옵서 시키옵시는 일이라 하면 내 직분은 그것을 다─ 받들어 행할 뿐이니 이제는 내 발 앞에 죽음만 있어 기다릴 뿐이다.

공목 (이방부리를 보고) 그러면 곧 금부로 내려가두라.

(이방부리 이차돈을 이끌고 천천히 걷는다. 대왕은 몹시 고민, 전각(殿閣) 내외가 모두 침울한 빛.)

제5막

편집

편전(便殿).

경(景)은 제3막 2장과 같으나 모두가 근심스러운 빛.

(대왕 홀로 앉아 근심하는 빛에 깊이 쌓여 있다)

어찌하면 좋을꼬. (한숨을 쉰다) (왕비 눈물을 지으며)

왕비 이차돈을 정말 죽이시렵니까.

(귀치않은 듯이 눈살을 찌푸릴 뿐)

왕비 어찌 죄없는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여편네들의 알 바가 아니오.

왕비 (원망하는 듯) 그렇겠지요. 제 속으로 낳은 딸자식의 일이지마는 어미된 이는 걱정할 까닭도 없겠지요.

………….

왕비 그렇지만 (훌쩍이며 울면서) 딸자식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탄식 섞어 혼자 소리로) 어허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지경이로구나.

왕비 무얼 상감마마께옵서 일부러 만드신 일이면서…….

(말없이 왕비를 힐끗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왕비 이차돈 한사를 살리어 주셔요. 네 상감마마 제발 덕분 비 옵나니……. (느끼여 운다)

(한숨을 쉬고 천천히 힘없는 말로)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구려. 그전에는 모든 일을 억세인 이차돈이가 옆에 있어서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을 지우며) 그 애가 약한 남은 잘 붙들어 주었어도 억세인 제 몸은 붙들어 건져 내지를 못하는 모양이야. 시방이라도 이차돈이가 내 곁에만 있으면 내가 그를 넉넉히 건져 내렸마는……. 그러나 나의 팔이요 나의 다리이던 이차돈이는 내가 건져 주어야 할 사람으로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구렁에 떨어져 있구려. 그러니 그를 건질 이가 누구야. 그를 건져 줄 이가 누구야. (눈물을 흘린다.)

왕비 상감마마입지요. 상감마마뿐입지요.

(능력이 있고 없음을 염려하는 듯이 자기의 손을 들어 이리저리 뒤슬러 보다가 낙심하는 듯이 풀이 죽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든다) 없어. 없어. 나에게는 그만한 힘도 없는 모양이야.

왕비 그러면 이차돈은 꼭 죽고야 맙니까.

(한참이나 민연(憫然)히 앉았다가 디시 용기를 내이는 듯) 염려 마시오. 시방으로 곧 나에게 큰 용기를 줄 사람이 올 터이니까.

왕비 오기는 누가 와요.

아도 화상……. 아도 화상을 아까 불렀으니까 이제 곧 들어올 것이요. (답답한 듯) 그러니 그러니 부인은 아무 걱정도 말고 저리 딴데로 가서 계시오. 나는 시방 이 어려운 일을 풀어 놓을 방법을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터이니까……. 어서 좀 조용히…….

왕비 아무튼 우리 아기를 불쌍히 보셔서도 꼭 이차돈 한사를 살리어 놓으셔야지요.

(몸을 일으켜 천천히 퇴장)

어허 거룩하고 억세인 힘이여. 이 늙은 몸을 붙들어다오. 이차돈을 건져 내일 만한 큰 힘을 나의 몸에 들이부어다오. 내 몸을 내 딸을 내 착한 신하를 건지어 내일 만한…….

(치성(稚省)의 인도를 받아 아도 고요히 등장. 정례(頂禮))

(일어나 반기어 맞으며) 부질없는 일로 늙은 몸을 이렇게 수고로웁게 해서 대단히 미안하오.

아도 (차수정례(叉手頂禮)를 하며) 아미타불.

(자리에 앉으며) 오늘 저녁은 너무도 쓸쓸하고 구슬픈 밤이로구려.

아도 (앉으며) 네─ 너무 마음 맑은 가을밤이로소이다.

모든 일은 벌써 다─ 들어 알았겠지마는 이차돈이가 죽게 되었으니 저를 어찌하면 좋겠소. 대사가 나를 위하여 좋은 법을 한번 들리어 주오.

아도 (잠깐 무언히 앉았다가) 폐하께옵서 이 늙은 걸식사문(乞食沙門)을 들없다 아니 하시옵고 이렇게 구중지밀(九重至密)에까지 불러 드리시오니 행자(行者)의 몸으로는 너무도 지나치는 영광이오매 황송하옵고 감사하온 말씀을 무어라 사뢰올 길이 있사오릿고, 더구나 부처님의 거룩하옵신 도를 위하여 사랑하옵시던 근신(近臣) 이차돈을 몸째로 공양을 하옵시니 너무도 감격하옴이 그지없삽나이다. (정례(頂禮)) 상감마마 폐하께옵서는 자세히 살피어 보시옵소서. 먼저 오욕(五慾)의 환락 속에다 위태로이 몸을 던져버리는 이 세상의 가엾은 참상을 두루 살피어 보옵소서. 그들은 탐애(貪愛)의 횃불을 잡고 번뇌의 어두운 길에서 헤매일 적에 뜨거운 불은 부적부적 손까지 타들어 가건마는 그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무리들이로소이다. 한 번 오욕의 구렁에 빠진 뒤에는 초열지옥(焦熱地獄)의 무서운 참고(慘苦)를 받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지요. 그러니 어쩌나 하면 그 오욕 탐애의 구렁에서 벗어 나올 수가 있사오릿가. 사람들은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제 눈으로 보건마는 보지도 못하고 제 귀로 듣건마는 듣지도 못하옵니다그려. 전변무상(轉變無常)의 핍박이 들이 씌워지 옴에 어디 메에 노소귀천의 다를 것이 있사오릿고.

보옵소서. 높은 왕자의 권세나 만승(萬乘)의 부귀라도 늙고 병들고 죽으며 사랑하는 님도 이별하고 미운 원수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며 얻고 싶은 것도 얻지 못하고 눌러도 누를 수 없는 것은 물욕……. 극격(劇激)한 사고팔난(四苦八難)의 협박 아래에는 누구나 다─ 같이 한 사람이나마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지 않는 이가 있겠사오릿고.

아무리 자부(慈父)와 효자의 사이나 현군(賢君)과 충신의 사이나 애부(愛夫)나 연처(戀妻)의 사이라도 한번 늙음이 오고 병이 들고 장차 죽음이 앞에 닥쳐올 때에 누가 그것을 대신할 리가 있사오릿고, 일가권속이 서로 모여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리며 울더라도 그 하소연을 받아줄 이가 없사옵거늘 탐애의 그물에 걸리인 중생들은 어쩐 까닭도 모르고 저절로 영영자자(嶺營孜孜)히 제 손으로 그 그물 코를 조르느라고 애쓸 뿐이옵지요.

악착한 진세(塵世)의 거리에서는 약한 놈은 억센 놈의 밥이 되옵고 미욱한 놈은 약은 놈의 고랑때를 만나 선지피를 비리게 흘리는 악전고투의 참담한 굿이 한창 어우러져 있지 않사오닛고. 여기에서 어찌하오면 모든 사람들의 게으른 꿈을 깨어주며 고통줄거리를 뿌리 채 뽑아 버리려는 대광명을 얻을까 하는 일념자민(一念慈愍)의 큰 원력(願力)이 이차돈의 한 목숨으로서 거룩하고도 깨끗한 공양을 드림이오매 폐하께옵서도 모든 탐애를 끊어버리시옵소서. 모든 번뇌를 불살라 버리시옵소서. 진리를 위하여 성자(聖者)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하여 인신공양으로 바치는 이차돈을 위하여……. 아미타불. (차수 정례를 한다) (대왕의 얼굴에는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내전(內殿) 공주의 거처.

좌편은 방과 누마루, 그 앞과 뒤는 정원, 우편은 드나드는 길이 있다.

공주는 누마루 뒤에 앉았고, 시녀 2인은 공주를 모시고 있다.

내전 일실(一室)

공주 (일없이 혼자 청승스러운 소리로) 나는 그 부끄러운 그 말을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또 그 하소연을 무섭고 거룩한 아버님에게도 슬피 부르짖어 보았다. 그러나 아버님께옵서도 눈물을 흘리시면서도 될 수 없다고만 하시는구나. 한 나라의 임금의 힘으로도 그를 살리어 낼 수가 없다고 하시는구나. 아─ 무서운 일도 모두지 밉살머리스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몹쓸 마음이다. 그렇게 엄전하고 거룩한 이를 백죄 어명을 거짓 꾸민 역적이라고.

어─ 얼마나 무서운 기별인고, 그이를 시새워 죽이려드는 이들이 도리어 모두 불한당들이다. 역적의 아들놈들이다. 높이 기리는 소리가 이 나라 땅에 가득히 쌓인 그이를 별안간 잡아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고 그런 참혹하고 지독하고 몹쓸 일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그러나 그것이 정말이라고 한다. 아버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그이가 그런 짓을 하였다고 하시더라. 오 이차돈 한사님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아요. 내 마음은 이 몸을 살피시는 토함산신(吐含山神) 어머니는 그이가 깨끗한 이인 줄로 깊이 믿도록 가르쳐 주셨다. 애매하고도 가엾은 줄을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있나. 밝으신 하늘님 내리 굽어 살피소사. 착한 한사 이차돈이가 죽는다 하옵니다. 이차돈 한사님 당신은 이 몸의 아픈 가슴을 알아주십니까. 당신은 모르셔.

이몸은 당신께 바친 몸이올시다.

그런데 나는 시방 무엇을 합니까. 당신을 잡아 죽이는 이에게 구슬픈 하소연을 몇만 번 하여 보아도 쓸 데가 없습니다그려. 당신의 목숨을 살리어 내지는 못하면서도 이 몸은 이렇게 평안하게 있습니다. 아무 성가심 없이 내 방에 사람을 들이거나 내쫓거나 모두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그려. 아무쪼록 이 몸도 거친 오랏줄로 굳게 묶어 당신 계신 그 옥 속에 가두어 주십시오. 나도 눈물에 무저진 흙벽에 대가리를 부딪혀 실컷 울어나 보게요. 마음대로 부르짖어나 보게요. 어찌하면 당신을 살리어 낼까. 꿈이라도 꾸어보지. 그러나 이 방 가운데에서는 나에게는 아무 힘도 없구려. 한 나라의 가장 높다는 임금의 딸이라면서도 그이를 끌어내려면 살리어 내려면 이 몸에는 아무 힘도 없구나. 가엾어라. 어찌하면 좋을까. 거기 누가 오나. 누가 나를 찾아오나. 밖에 가만가만한 발자취 소리…….

(시녀 등장)

공주 오─ 너냐. 너는 바깥 소문을 들었겠구나. 그래 이차돈 한사님이 어디 계시냐. 어떻게 되시겠다디. 그래 정말 역적에 몰리어 옥 속에 들어 계시다더냐.

시녀 밖에서 모두 그렇다고 합니다.

공주 그러면 아직까지 살아 계시기는 하시겠지.

시녀 그럼요. 아직 목숨은 붙어 계시겠지요.

공주 그렇지만 누가 또 아니. 그 몹쓸 사람들이 오늘 밤 안으로 그를 죽여 없애려 하지나 않을른지. 아─ 그이의 피는 나도 보지 못 하는 곳에서 흘러가 버리겠지. 시방쯤 아무 뜻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미욱한 잠만 쿨쿨 자고 있겠지. 어떤 이는 더러 건져내려고 애도 쓰고 가엾다 불쌍하다 눈물에 젖은 꿈자리에 누워 있는 이도 있겠지. 그 동안에 그이의 넋은 우리들에게 이 나라 사람에게 뼈아픈 한을 남기어 두고 저─ 먼 나라로 먼─ 나라로 돌아가기에 길 신발 꾸미기가 바쁠 것이다. 어─ 우리 거룩한 님아 벌써 이 세상에 계시지는 않구나. 제발 나를 저버리지 말아 주셔요. 애 졸이는이 뜻을 보아서.

시녀 아니올시다. 아직 돌아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외다.

(왕비 등장)

왕비 아기야. 너는 이때껏 그리 울고만 있느냐. 어린 넋이 가엾게도……. 그러나 그리 너무 애태우지는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공주 어머니 살려주셔요. 그러나 쓸데없구려. 추녀 밖만 나가도 하늘에 가득한 별이 내리 굽어보건마는 그러나 어쩌다 시새움하는 눈초리로 이 몸을 비꼬아 보기만 하는구려.

왕비 아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단다. 아니 장차도 길이길이 살아 있을 것이지. 너에게 거룩한 복이 닥쳐온 것을 기뻐하여라. 그리고 그 옷을 시방으로 벗고 사나이 옷 한 벌을 갈아입어라. 이것은 거룩하옵신 상감님께옵서 너의 아버지께옵서 눈물에 싸서 넌지시 나에게 주신 것이다. 너에게 갖다 주라고.

(종이에 싼 기다란 것을 내어 놓는다)

공주 그것이 무엇이야요.

왕비 아버지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너의 복을 열어 놓을 거룩한 열쇠란다. 너의 그리운 님을 살려낼 옥문 열쇠다.

공주 아이고 어머니. 이것이 어쩐 일입니까. 하늘이 도우셨나 토함산 신어머니가 돌보아주셨나. (좋아서 춤을 추는 듯)

왕비 (사랑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이 애 너무 그리 기쁨에 날뛰지만 말고 설움에 보채이던 대신 얼른 그를 건져 내올 차비나 차리어라. 때도 아마 밤중이 기울었으니 그대로 두면 그의 목숨이 끊일 때가 얼마나 남았겠니. 시방으로 가 그이를 건져내오면 모든 근심이 있을 게 있으랴. 그동안의 슬프던 온갖 시름도 양달쪽 따신 별에 봄눈이 스러지듯 너희들도……. (시녀에게) 두 사람만 사내옷을 갈아입고 아기씨를 모시고 갔다 오너라. 밝기 전에 갔다 와야 또다시 먼길을 떠나가지.

(실내에는 기쁜 것이 가득하여 한창 부산하다.)

밤, 모례(毛禮)의 집.

질박한 방 담백한 가구. 방에는 쌍창을 열어놓았는데 희미한 등잔불이 근심스러이 꺼물거린다.

(모(母)는 누워 자고 사시 호올로 일어나 앉아 시름에 쌓인 듯) 사시 아직도 밝을랑은 멀었나 보지. 을씨년스러운 밤이 길기도 퍽은 길어……. 어쩐 일인가. 잠이 세상 와야지. 이 생각 저 생각 고생 고생하기만 하니……. (창백한 울음을 기웃이 내어다 보며) 하늘에는 별만 총총. (하늘에는 큰 별똥이 하나 떨어져 가로 지나간다) 얼싸 퍽도 큰 별이 떨어지네.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 귀를 기울여 무슨 소리를 듣는 듯) 도둑 각시? 오─ 참 밤잠 아니자는 귀뚜라미가 저리 청성스러이……. (잠잠이 앉았다가 고개를 들며) 그래도 아닌데…… 두두 곽쥐? (소리를 질러서) 두─ 두─.

(놀라 잠이 깨인 듯 부스스 반쯤 일어나며) 무얼 그러니. 왜 입때 잠도 안 자고…….

사시 (부끄러운 듯 열적은듯 어리광 비슷이) 어머니 저는 잠이 당최 아니 와서…….

왜.

사시 모르겠어요. 어쩐 일인지 무서운 생각만 자꾸 나고…….

(사시를 이윽히 보다가) 왜 그럴까. (하품을 한 번 하며) 하기는 나도 어째 꿈자리가 몹시 뒤숭숭해서……. 송장 다─ 된 늙은이가 무슨 청승으로 잠귀만 점점 밝아지고……. 그런데 네 오라범은 입때 안 들어왔니.

사시 글쎄 어째 안 들어왔어요. 아까 무슨 신발 소리가 나는 듯하기는 했어도 입때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누가 아마 왔다 갔남.

사시 글쎄요. (무엇을 생각하는 듯) 그래도 그이가 오셨으면 반드시 들어오셨을 터인데.

아마 네가 자는 줄 알고 그대로 가신 게지.

사시 그래도 아녜요. 그이가 오셨으면 반드시 울 밖에서 휘바람을 부르실 터인데…… 오는 듯 오는 듯 너무나 마음만 졸여서…… 사람이 아주 죽겠어.

(눈이 휘둥그레지며) 절 짓다 사람이 죽었어? 언제.

사시 (고소(苦笑)를 하며) 어머니는 장 저게 병이야. 툭 하면 딴 것을……. 왜 누가 죽었댔어요. 제가 마음이 졸여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지.

응 그래. (쓸쓸한 웃음을 웃는 듯) 원수의 귀가 먹어서…….(하품을 하며) 그럼 이제 고만 누워 자자. (누으며) 그 등잔걸이도 저─ 윗목으로 올리여 놓고…….

사시 (일어서며) 잠을 그만 덜 들어놓아서……. (등잔걸이를 웃목으로 옮기어 놓고 불을 꺼버린다) 어머니는 편안히 누워 주무셔요. 저는 눈물에 누지인 그 베개를 또 베고 눕기는 참으로 싫은데요. 안타까운 가슴으로 혼자 실컷 울거나 하다가 이 기나긴 밤을 새워나 볼까……. (흑흑 느끼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무대 암전, 안개 속, 보얀 꿈나라, 조금 높은 듯한 언덕, 나란히 서 있는 선돌, 그 앞에 고임돌, 기타 쓸쓸하고 고요한 경이다. 이차돈 호올로 고임돌에 걸터앉아서 허리를 구부리고 몹시 고민하는 모양이다.)

이차돈 (허리를 펴고 일어나 앉으며) 이 바위는 상사바위, 그리움에 병들은 이가 치성을 드리면 영검이 있다고 이르건마는……. (게을리 일어서서 사면을 둘러보며) 우리 아기는 어째 입때 아니 오노. (한숨을 쉬인다)

(사시 힘없이 게을리 걸어 등장, 이차돈 팔을 들어 안가슴을 벌리고 무언히 두어 걸음 걸어 맞는다. 인물의 동작은 모두 현실보다는 매우 느리다.)

사시 (한숨을 쉬고 고개 숙인 채 무언히 서 있다)

이차돈 (한숨을 쉬고 무언히 사시의 어깨를 한 팔로 껴안는다)

사시 (고개를 숙인 채로 외로 꼰다) [小間(소간)]

이차돈 사시 아가씨야.

사시 ………….

이차돈 (떨리는 목소리로) 사시 아가씨야.

사시 (고개를 들어 이차돈의 얼굴을 한 번 넌지시 보고 한숨을 쉬며 다시 수그린다)

이차돈 나는 네가 얼마나 그리웠을가. 여기에 앉아서 너를 얼마나 애졸이며 기다렸을까.

사시 그럼 이제 그만 댁으로 돌아가셔요. (목이 메이는 듯)

이차돈 너를 버리고 어떻게…….

사시 ………….

이차돈 아직도 이 밤이 새일랑은 멀었다.

사시 여기를 무엇하러 오셨어요.

이차돈 나는 너를 만나러 아무도 몰래 도망을 해서…….

사시 (꾸짖는 듯이) 그런 일이…….

이차돈 이 밤이 새기 전에 다만 한 마디만…….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사시 (훌쩍이며 운다)

이차돈 그동안 벌써 두 해 동안이나 네가 나를 참 마음으로 믿고 그리워했다면…….

사시 저는…… 저는 어느 때까지든지 오라버니 모시고 싶어요.

이차돈 ………….

사시 네 한사님께서도 저를 그렇게만 보아주셔요. 어리인 누이동생으로…….

이차돈 (떨리는 소리로) 어째서?

사시 ………….

이차돈 너에게는 아마 살매가 들리었지?

사시 저의 마음을 접어 보아주셔요. 모─두 제가 그른 짓만을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바라도 바라도 될 수 없는 일을 꿈꾸고 있었어요. 어─ 무서웁습니다. 저는 생각만 하여도 무서워 죽겠습니다. (울며) 저는 공주 아기씨에게 차마 못할 노릇을 끼치어 드릴 뻔하였습니다.

이차돈 (정열적으로)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쌓아놓은 한바탕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리 둘의 목숨의 불꽃을 후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사시 아닙니다. 못할 노릇입니다. 생초목(生草木)에 불을 지르는 차마 못할 노릇입니다.

이차돈 ………….

사시 되지 못할 욕심일랑 끊어버리지요. 그리고 우리 두 몸의 사이를 곱고 깨끗하게 하십시다. 우리가 그 될 수 없는 소원을 기다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이 이 나라 또 당신의 몸에 궂은 일만 생기였습니까. 그동안의 미움과 시새움으로써 괴롭던 것을 자비와 극락으로 마음을 갈아 넣도록 하십시오. (올빼미의 울음이 처량히 들린다.) 아으 그동안에는 얼마나 남못할 짓만 꿈꾸었던고.

이차돈 너의 마음은 너무도 여리어졌구나. 그까진 공주의 일이 우리에게 아랑곳이 무엇이기로…….

사시 아니요. 저는 그렇게 지겹고 궂은 일에서 벗어 나와 깨끗하고 거룩한 길을 찾아놓았습니다.

이차돈 그러나 어떻게 우리들의 맺힌 그 마음을 굳은 그 뜻을 죽이어 없애일 수야…

사시 아니요. 우리의 그것이 참으로 깨끗하고 굳은 뜻이었으면은 그것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평생토록 길이길이 살리어 놓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소원도 고이고이 더럽히지도 말고 남의 목숨도 구치지 않고 곱고 성하게 치뤄 나아갈 길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둘의 사랑을 가장 높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도록 하십시다. 우리 몸에 더러운 때가 묻지 않도록……. 이 세상에서 뒤떠들어 부르던 사랑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는 너무도 뜻이 좁고 값이 싸서 도무지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의 더럽고 무딘 입으로는 감히 형용해 불러보기도 어려운…… 관세음보살과 같이…… 그렇게 거룩한 것으로…….

이차돈 (무슨 힘에 느끼어 부딪힌 듯 잠깐 잠잠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우리 사시 아기씨야 나를 좀 가엾이 여기어 주렴.

사시 (눈물 어린 눈으로 이차돈의 얼굴을 넌지시 본다)

이차돈 나는 너의 사랑에…… 내 넋은 구정물처럼 풀어져 버리었다. 나를 좀 건져다오. 나를 좀 살리어다오.

사시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운 듯이)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넋을 망가뜨릴 수는 없습니다. 저를 누이동생으로 불러주셔요. 그리고 시방으로 곧 얼른 댁으로 돌아가 주셔요.

이차돈 그러나 그러나 시방은…….

사시 (부르르 떤다) 이차돈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이기고 나아가지 못하면 무엇으로 사랑의 힘이 억세이다고 이르겠니. 우리 아가씨야 어서 마음을…….

사시 (마음의 괴로움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합장 묵례)

이차돈 네가 나를 알뜰히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안다. 아무쪼록 나로 말미암아 아무리 궂은 일이라도 둘이 함께 치뤄 나아가자.

사시 (몹시 고만하다가 쓰러질 듯이) 아으, 우리 한사님.

이차돈 (사시를 껴안을 듯이) 아무러한 무간지옥(無間地獄)에라도 우리 둘이 같이…….

사시 저는…… 저는 저 세상까지 갈지라도…….

이차돈 (사시를 껴안는다.)

사시 (몸을 빼어 달아나며) 저를 누이동생으로 보아주셔요. (퇴장)

이차돈 (정신없이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엎드러진다)


(무대 암전, 침침한 옥 속, 높다란 창으로 하늘이 조금 보일 뿐. 옥 바닥에는 이차돈 칼을 쓴 채로 엎드러져서 구물거린다.)

이차돈 (꿈을 깨어 일어나는 듯) 어─허 그것이 꿈이었던가. 꿈─ 꿈─ 나에게 이상한 그림자를 어른거리어 보여주었다. 그러나 천 병만마(千兵萬馬)가 뒤끌고 뇌정벽력(雷霆霹靂)을 하는 곳에서도 꼼짝도 아니하던 나의 마음인데…… 그것을 허잘 것 없게 흔들어 놓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굳은 충의의 굳은 마음을 흔들어 보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 어허 성가시러운 시름이여─ 너의 함부로 사랑을 건드려 보느냐. 그러나 이 이차돈이는 억세이고도 외로운 다만 한 사람뿐이다. 다만 외로운 한 몸뚱이가 어지러운 이 세상에 쓸쓸히 왔다가 아무 섭섭함도 없이 그저 돌아갈 뿐이다. 나의 마음을 겹겹이 에 둘러싸는 온갖 괴악한 굿이여 너희는 빨리 바삐 물러가라. 시방이라도 저─ 높은 하늘에서 산 동아줄이 스르르 내려와 이 몸을 붙들어 올릴 때에 너희들은 또 무슨 얄궂은 눈초리로 나를 흘기어 보겠느냐 시새워 보겠느냐. 보기 싫다. 성가시럽다. 너희들은 얼른 바삐 나에게서 떠나가다오. (몸부림하듯 엎드러진다)


(창밖에 어두운 하늘에서는 몇 개의 푸른 별이 깜박깜박)

옥에서 머지 아니한 성문 밖, 좌편에 다가서 큰 성문이 굳게 닫혀 있다.

성문의 우편으로부터 조금 앞으로 내어 밀은 곱성(城).

팔월 초다샛날 여명(黎明), 성 뒤의 샛별이 반짝인다.

(무대는 잠깐 비었다가 진흥대왕이 철부를 데리고 천천히 등장)

(사방을 휘휘 돌아보며) 아직 사람들은 다니는 기척이 없지.

철부 네, 없습니다. 아직 새벽 샛별이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요.

네가 이렇게 차리고 여기에 와서 이차돈이를 마지막 보내었다는 것을 다른 신하들이 알면 또 아마 무슨 듣기 싫은 소리로 나에게 싸우려 들이 덤벼들 터이지.

철부 하기는 공목이나 알공 같은 이는 상감님께옵서 이차돈이를 어제 밤 안으로 죽이지 못한 것만 탓하고 있을 터이니까요.

(한숨을 쉬며) 그 착한 것이 무엇으로 그리 그들에게 뼈에 맺히는 원수가 되었던고. 아직 자식 같은 그 어린 것을.

철부 아마 그들은 자식도 없고 눈물도 없는가 뵈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아끼는 이보다도 한때의 심술과 고집이 그들에게는 더 모질고 억세인 모양이니까.

철부 큰 의로 말미암아 은혜를 끊고 사랑하시는 어진 신하를 일부러 저승으로 좇아 보내옵시는 상감마마의 아프옵실 마음을 헤아리오매 너무도 황송하옵기 둘 데가 없삽나이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고) 저 샛별이여. 이상도 하고녀. 저 별이 시방 이차돈이의 목숨과 같이 차차 푸른 빛이 사라져 가는구나.

철부 아마 이차돈이도 시방쯤은 저 별을 쳐다보고 제 몸만 여기어 울고 있을는지도 모르옵지요.

아니 억세인 그의 마음이 그렇지도 않을 거야. 어젯밤에도 공주가 옥으로 찾아가 본 이야기를 들어도…….

철부 (말없이 근심스러운 눈으로 대왕을 쳐다본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점점 더 아깝고 애처로운 생각만 간절해서 어제 밤도 고스란히 뜬눈으로 새우고. (눈물을 짓는다)

철부 참 가엾고도 딱한 일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상감마마께옵서는 옥체를 돌보옵시어도…….

그러나 이제는 그리 한탄만 할 때도 아니야. 이차돈이는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이렇게 목숨을 바치는 이때이니깐. 살아 있는 이들도 이제는 정신을 차리어 오늘이라도 거룩한 일을 이룩해 놓지 않으면 못쓸 것이다.

철부 그러나 이제는 한 나라의 가장 보배로운 사람을 잃어버림과 함께 상감마마 얼굴에 기꺼운 빛은 길이길이 잃어버리셨사오니.

이 애 누가 아마 오나 보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 못써. 얼른 몸을 어디로 숨기지.

철부 벌써 동살이 훤합니다. 아마 이차돈이의 저승길을 떠남도 이때이겠지요.

(왕과 철부 몸을 사리어 급히 퇴장)

(사시와 모와 시민들이 몰리어 온다)

너는 어쩌려고 이러느냐.

사시 어머니는 시방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어떻게 악에 옳은지를 모르시우. 우리들은 무슨 짓을 하던지 이차돈 한사님을 살려내고야 말 터이니깐. 누구든지 그이의 거룩한 목숨을 건져내려고 벼르고 있지 않겠소. 자─ 이리들 오셔요.

이 철모르는 것아. 너는 나라님의 억세인 힘이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니.

사시 그까짓 힘이야 아무리 억세기로 우리가 그까짓 것한테 질 까닭이 있소. 어머니는 멋없이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여러 사람을 보며) 자─ 이리들 오시오. 이리 와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한 데 묶어 기다리고 섰다가 그이가 오시거든 빼내어 갑시다. 어─허 참 기막힌 일도 다 많지. 이차돈 한사님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다니. 여러분을 왜 이리 풀 죽고 넋이 풀려 이러슈. 시방 이따가 정 말 살 판인데. 얼른 손을 나누어 이 나라의 힘꼬리나 쓰는 이는 모두 불러서 이따 한바탕 해봅시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낫이나 도끼나 온갖 연장을 있는 대로 죄 가지고 올 테니. 여기서 한꺼번에 숨을 모아 우쩍 덤비어서 에둘러 싸고 그이를 날래게 빼내어 우리가 휘몰아 달아나지.

시민1 이 색시는 어째 이럴까.

사시 우리 이차돈 한사님을 죽으러 가는 목숨을 이따 우리가 들이 덤비어 빼내잔 말이지 무엇이요.

시민2 쉬─ 그런 소리를 함부로.

사시 왜 그런 소릴 함부로 못해. 죽으러 가는 이가 죄없이 애매히 죽으러 가는데. 우리의 알뜰한 이차돈 한사님한테 어째 못쓸까. 어째 그런 소릴 함부로 못해. 그거 함 기가 콱 막혀. 그래 당신들은 그이가 죽어야 옳겠소. 마음에 시원하겠소.

시민3 이거 이러다가는 큰일 저지르겠군.

사시 큰일은 난 지가 벌써 예전인데 무슨 소리야. (성문이 열린다) 아이고 벌써 이차돈 한사가 나오시네. 에그 어쩌면 좋아요. 자…… 이리들 모입시다. (혼자만 서둘다가) 이런 몹쓸 인심들 이 모양들이야.

이 애 너무 이리 서둘지 말고 저승길을 떠나시는 그이에게 마지막 인사나 고이 드리고 가자.

(군중이 문 앞으로 오며 엉기일 제 문 안으로 무장한 군사가 나와 군중을 해치며 길을 터놓는다. 군중은 이리 물리고 저리 물리고 하며 문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쓴다)

사시 우리 한사님을 뵈오랴고.

시민1 지나가는 사람을 서서 좀 보기로서니.

군중 안 된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어서는.

사시 애매한 우리 님을 살려냅시다.

(군중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 통에 사시는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미치어질 듯 쫓기어 뛰다가 모가 엎드러진다)

이 년아. 애미 좀 보아라.

사시 (모는 엎드러진 채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가슴을 벌리고 군사에게로 덤비며) 자─ 나부텀 죽이어라. 그 창으로 내 가슴부텀 얼른 찔러 죽이어.

(사시와 군중은 군사에게 쫓기고 밀리고 꺼들리어 좌우편으로 퇴장. 잠깐 고요한 뒤에 다─ 꺼진 횃불이 앞을 서고 이차돈은 죄인의 결박을 지고 10여명 군사에게 이끌리어 천천한 걸음으로 등장. 거칠부 좌편에서 달음박질로 등장.)

거칠부 (급한 목소리로) 거기 잠깐 기다려.

(군사 일동 돌아보며 걷는다)

거칠부 어명을 받자 왔다. 잠깐 머물러라.

(일행 걸음을 멈춘다)

거칠부 자네의 이 길을 나는 차라리 안 와보려고 하였었네마는 중전마마의 전갈을 모시어서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나와 만나보네. 자네의 마지막 얼굴을……. (목이 메인다)

이차돈 (가슴이 아픈 듯한 깊은 한숨을 쉬며) 너무나 고마우이.

거칠부 중전마마께옵서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소원이나 아무 부탁도 없느냐고…….

이차돈 (무엇을 잠잠이 생각하다가 침착하게)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네.

거칠부 그래도 다만 한 마디나마…….

이차돈 사람이란 없음으로부터 나서 없음에서 살다가 그래도 없음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임을 깨닫고 보니 아득한 이 세상일에 무슨 소원이 남아 있겠나마는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내가 죽은 뒤이면 천경림에 닦아놓은 절터가 어찌나 될른지…….

거칠부 그것은 엊그제 벌써 모다 허물어 버렸으니까.

이차돈 사람의 몹쓸 심술들도……. 애쓰고 힘들어 닦아놓은 터를 일부러 허물어 버릴 까닭이야 무엇 있을까. 그러면 거기서 일하던 일꾼들은?

거칠부 그것도 모두…….

이차돈 그러면 목아비로 있던 모례(毛禮)라는 이도 죽이었겠군.

거칠부 (말없이 고개만 끄덱 끄덱) 이차돈 그 사람도 가엾게 되었군. 애매한 목숨들이 모두 나 까닭에…….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있다가 다시 들면서) 그러면 모례의 누이동생은?

거칠부 계집애들은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의 누이동생이면 아마 성히 살아 있겠네.

이차돈 그것은 정말 다행한 일일세. 그 시악시는 나와 매우 그리워하던 사람인데……. 그러면 자네가 한 번 그 시악시를 찾아서 돌보아 주게나. 그이도 나 까닭에 오라비도 죽고 부칠 데 없는 불쌍한 몸이니 이렇게 나처럼 여린 가슴을 태워주는 일만은 하지 말고……. 내가 더지고 가는 시름을 자네가 즐거운 웃음으로 바꾸어 주게나. 죽으러 가는 이 몸이 다른 부탁이 더 있겠나. 다만 한 가지 그것을 자네에게 든든히 믿고 맡기어 가벼운 마음으로 저승길을 떠나가겠네. 그러면 이제 영결일세. (걸음을 움직이려 한다)

거칠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설음이 복받혀서 쩔쩔매다가 그대로 획 돌아서 퇴장)

이차돈 (무언(無言)히 고개를 숙인다)

(사시 좌편에서 미친 사람처럼 비실비실 걸어 등장. 군사가 쫓으려고 창을 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차돈과 사시는 한참이나 서로 아무 말도 없어 건너다만 볼 뿐.)

사시 (힘없이) 한사님 어디를 가시렵니까. 시방 가시는 길이 무슨 길입니까.

이차돈 사시 아가씨야 무엇하러 여기까지 다 나와 섰니. 아무쪼록 마음을 진정하고.

사시 당신이 정말 돌아가시면 저는 어떻게 살게요. 저는 무엇하러 살아요. 저도 시방 같이 죽지.

군사1 이건 옛날만 여겨 순장을 내려다 따라 죽기는 왜. (사시를 떠다 밀며) 이제 그만 저리 가거라.

이차돈 (애처로워하는 눈으로 군사와 사시를 이윽히 보다가) 하기는 나는 어제 이 저승길이 그리 바빠서 그리운 너를 마지막 만나볼 겨를도 없었구나. 더구나 너의 오라버니는……. (목이 메어 고개를 숙인다)

사시 그까진 말씀은 저도 어저께 그 지겨운 꼴을 보고……. 밤새도록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눈물도 나중엔 피 뿐이예요. 그래 암만 해도 살길이 없어. 오늘도 한사님을 따라 죽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아무튼 한사님은 이 길을 가시지는 못하셔요. (이차돈에게로 들이덤비며) 저리로 우리 둘이 달아납시다.

(사시를 붙잡으며) 이게 무슨 짓이냐.

이차돈 어여쁜 아가씨야 나는 이 길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몸이란다.

사시 아니요. 그게 무슨 사위스런 말씀이예요. 이 길을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돌아가시려거든 나하고 같이 가시지요. 한사님 이 가엾은 몸도 돌보아 생각해주셔요. (이차돈의 팔에 매어 달린다)

이차돈 사시 아가씨야 너의 그 꽃답고 가엾은 마음을 애처롭고 안타까운 가슴을 이 몸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네가 얼마나 나를 두조기어 주고 그리워하던가를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 막혀 너는 나에게 맨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씨앗을 던져준 어여쁜 임자이니깐 나도 너와 같고 너와 나와 같고 미어지는 가슴을 언제야 더 할 말 있겠느냐. 너의 오라버니와 나는 한 거룩하고 참된 이치 속에서 너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모진 죽음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오─ 어여쁜 아가씨. 너와 내가 시방 이렇게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서로 떠나는 것도 모두 그 사랑 까닭이다. 나는 그 사랑의 가장 거룩하고 훌륭한 부름을 몸받아 맡아 가지고 길을 떠나가는 것이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저승이나 너와 나와 떨어져 있기가 싫은 까닭에 아직 여기서 손을 갈린다. 다음날 이별 없는 저 나라에서 다시 만나보자. 거기서 마음껏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이별 없이 지내잤구나 이제 내 팔을 고만 놓아다오.

사시 그렇지만 저는 싫어요. 다만 한때나마 어떻게 떨어져 살아요. 더구나 알뜰한 님 당신을 이승 사람이 아니라 저승 사람을 어떻게 만들라구요. 이 어린 년의 썩는 간장을 애써 당신 무덤에 제물로 바쳐야 옳사오릿가. 못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아─ 저는 못하겠어요.

이차돈 아가씨야 아무쪼록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나마 이리 너무 흔들어 못 견디게 말아다오.

사시 (한참이나 느끼어 울다가 힘없이 고개를 돌며) 저는 당신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울며불며 보내드리지만 이렇게 한 번 돌아가신 당신이야 이 목숨이 끊어질 때에는 무슨 느낌인들 있겠사오릿가. 아무도 한 마디 가엾다 이를 사람도 없는 시들푼 목숨을 그러나 이 목숨이 마지막 끊일 때까지 입술이 떨려 떨리는 것은 당신의 이름뿐일 것이야요. 이차돈 한사님.

이차돈 시방이 너무도 바쁜 때이니 너무 그리 설워 울지는 마라. 그리고 내가 일부러 가는 이 큰길을 애써 막으려 들지 마라.

사시 어─ 나는 어쩌면 좋아. (땅에 엎어진다)

이차돈 ………….


("이차돈 한사님 가지 마시오" 하는 군중의 여러 소리)

이차돈 (군사에게 끄을리며 걸음을 옮기어 놓으며) 그럼 나는 간다. 사시 아가씨야. 부디 잘 지내다가 오너라.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운 생각이 정히 간절하거든 그 모든 설움을 한데 묶어서 나를 위해 염불이나 정성되이 불러다오. (사방을 돌러보며) 여러 동포들이여 아무쪼록 태평한 성대에 만복을 누리시오. (사방에서 울음 소리 터져 일어난다.)

사시 (일어나며) 나무아미타불.

이차돈 관세음보살 이 어린 넋을 고이 고이 도아주소서. (눈물에 무저져 게으른 걸음은 머뭇머뭇 여러 번 휘돌쳐 선다.) (사시 비실비실 쫓아가다가 땅에 엎어져 운다.)

순의경생기족경 천화백유갱다정(徇義輕生己足驚 天花白乳更多情)
아연일도신망후 원원종성동제경(俄然一釖身亡後 院院鐘聲動帝京)

경(景)은 2장과 같다. 촉(燭)불이 너무도 고요하고 구슬픈 빛이 떠돌 뿐, 팔월 초오일 밤.

(공주는 깨끗한 소복에 머리를 풀고 침석에 누워 있다. 이따금 가만히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녀갑은 약을 다리고 있다.)

(시녀을 등장)

시녀을 이제 좀 어떠하시냐.

(공주의 신음하는 소리)

시녀갑 (근심스러운 어조로) 글쎄…… 아마 또 큰일이 나나 보아.

시녀을 그럼 어떻게 하나. (무엇을 생각하는 듯)

시녀갑 암만 해도 중전마마를 곧 모시어 와야 할까 보아. 아까 그렇게 몹시 까무러치셨으니…….

(시녀을 근심스러이 섰다가 퇴장)

공주 거기 누구 있니.

시녀갑 소인네올시다.

공주 무얼 하노.

시녀갑 약을 대리고 있습니다.

공주 (잠꼬대처럼) 약을 누가 먹기에……. (혼몽(昏懜)에 잠기는 듯) [小間(소간)] (대왕과 왕비와 시녀을과 내인 두 사람 등장)

왕비 (공주의 몸을 만지며) 아가 이제 좀 어떠냐.

공주 (가만한 신음 뿐)

아가!

공주 ………….

왕비 (조급해서) 그러면 아도 화상을 또 좀 불러오지요.

(한숨을 쉬며 침울한 어조로) 아도도 죽었답니다.

왕비 (놀라며) 언제요.

(눈물을 지으며) 그전에 벌……써 무덤을 하나 지어 두었다가 오늘 낮에 그만 스스로……. (목이 메인다.)

왕비 저런…… 그러면 이를 어찌해야 좋습니까.

(대답 없이 앉아 공주의 귀에 가까이) 아가…….

공주 (눈을 떠서 왕의 얼굴을 이윽히 보다가 감는다)

(떨리는 소리로) 아가……

공주 (눈을 뜨며 정신이 돌아온 듯) 아버지…….

왕비 (눈물을 지으며) 아가 이제 정신이 들었니. 내가 누구…….

공주 (눈을 크게 뜨며) 어머니…….

네가 어째 이렇게 죽으려느냐.

공주 상감마마.

왕비 그래도 우리 아기가 살아나야지 죽어서야 어떻게 하게.

공주 아니요. 저는 이제 죽어요. 저의 혼은 벌써 아까 그이를 따라갔어요.

왕비 죽기는 왜…….

죽지 말아라. 제발 너 하나만이라도 살아 있어다오. 너마저 죽으면……. (목이 메인다)

공주 암 만해도 제 목숨이 살아 있을 수는…….

아니다. 너 하나는 꼭 살아 있어야…….

공주 저는 죽어서…….

처음에 너 하나를 살리어 내자고 이차돈이가 애를 쓰던 노릇이 그만…….

공주 그러니까 저는 꼭 죽어야만.

………….

공주 아버지 어머니 이 자식은 이제 길이길이 잊어주세요.

(일동이 눈물에 잠긴다)

아무쪼록 살아다오.

공주 ………….

왕비 죽어서는 안 된다. 네가 죽으면 내가 어찌 살게.

공주 저는 죽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 몸이 얼른 죽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나 또 죽은 이들에게 신세를 갚지…….

그러지 말고 아무쪼록 살아만 다오. 그러면 너의 소원대로 무엇이든지 내가 다─ 해주지.

공주 그런 것도 살아 있으면 모두 남에게 신세뿐이니까.

………….

왕비 그러면 네 어미 가슴에다 이렇게 모진 못을 박고 가야…….

공주 아─ㄴ 이……. (차차 숨이 잦아지는 듯)

왕비 (어쩔 줄을 몰라서 조급하게) 아가 아가.

(왕비를 보며 울음 섞인 어조로) 가만히 놓아 두오. 이제 죽나 본데……. 숨이나 편안히 편안히 모으도록…….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가슴에서 북받치는 소리없는 울음을 운다)

왕비 죽어서 어떡하게 죽어서 어쩌게. (가슴을 두드린다)

(공주를 들여다보며) 아기 편안히 잘─ 가거라.

공주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억지로 끄덕거리어 대답하는 듯)

왕비 아아 무슨 말이든지 소원을 다─ 말해보……. (목이 메인다)

공주 ………….

(들여다 보다 못해서) 이제 숨이 지는 게로군. 이런 참. (소리없는 울음)

공주 (눈을 크게 뜨며) 어머니 어디…….

왕비 여기 있다.

공주 아버지.

오냐.

공주 나 물 좀.

(시녀 약그릇을 드린다)

공주 (한 모금을 받아 마시다가 다시 게우며) 아이 비려─ 그것은 또 누구의 피인구.

(침묵 속에도 긴장)

공주 그동안에 신세를 많이 끼치고 갑니다.

(일동 설움이 넘친다)

공주 이제 저승으로 그이를 따라서……. (웃는 듯) 보입니다. 그이가 저기 저─기 부처님 앞에…….

오냐. 평안히 돌아가거라. 아무 거리낌 없이 이차돈에게로 부처님에게로…… 그것이 너의 소원이거든……. 이차돈을 만나거든 내 말도 반가이 전해나 주렴. 그의 죽음은 나에게 끝없는 심령의 굳세인 힘을 들이부어 주어서 영원한 청춘이 다시 돌아와 거룩한 이의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룩하겠노라고……. 그리고 너의 이 죽음도 하잘것 없는 헛된 죽음이 아니도록 내가 거룩한 일을 하여 주마. 너의 이 깨끗하고 거룩한 희생이 늙고 주변 없는 내 넋에다 영원한 청춘을 다시 돌려 보내주며 살아지지 않는 힘의 샘물을 들이 부어 주노나. 아무쪼록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없어지지 않을 거룩한 사업을 많이 이루어 너희들의 신세를 갚으마. 꽃다운 넋을 위로해 주마. 우리 아가 편안히 편안히 잘─ 가거라.

공주 (넌짓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듯 숨이 끊어진다)

(왕비 이하 울음소리가 일어난다)

(눈물을 씻고 일어서며) 가시성을 높게 쌓아도 못다 막는 저승길을…… 아니다 가만히 두어라. 너희들의 요란스러운 그 울음으로 편안히 돌아가는 우리 아기의 고운 넋을 부질없이 붙들고 멈추어 성가시럽게 나 말아라. 섭섭하게나 말아라.

(여러 사람의 울음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차차 설움이 짙어간다.)

제6막

편집

궁중 후원, 정면에는 혼전(魂殿), 넘어가는 갈구리 달은 달무리 가는듯, 노목(老木) 삭정이에 걸리어 담담한 빛을 드리울 뿐. 혼전 뜰 앞에는 좌우로 내인 두 사람이 침침한 횃불을 들고 지키고 섰고, 혼전에는 푸른 잔불이 근심스럽게 조을고 있는 듯. 소장(素帳) 밖 향탁(香卓)에는 한 쌍 향로(雙香爐)에 향연(香煙)이 서리어 있다. 그 앞에 흰옷 입은 왕비 엎디어 소리 없이 느끼어 우는 듯.

내인갑 저 흐릿하게 무리슨 달을 좀 보아.

내인을 글쎄 아이 얄궂어라. 무슨 달빛이 저래.

내인갑 어슴프레한 것이 똑 무슨 시름에 쌓인 거나 같지.

내인갑 아마 아까 한사 이차돈 도령님이 돌아가신 까닭에 너무 슬퍼서 그런감. 옛날부터 성인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다 하더니.

내인갑 그러게 말이야. 아까 그 이야기 왜 못 들었소. 이차돈 도령님의 목을 베자마자 베어진 목에서 흰 젖이 대줄기처럼 뻗히어 두어 길이나 솟치고 또 머리는 뛰어가 금강산 마루터기에 떨어졌더라도, 아마 그때가 이제 한나절에 하늘이 별안간 캄캄해지며 쨍쨍히 볕나던 대낮이 그믐밤처럼 되고 지동을 하며 뇌성벽력을 하고 소낙비가 쇠우쳐 쏟아지던 땐가 보아.

내인을 해와 달이 다─ 빛이 없고 산천초목이 다 서러워하는 듯 맑은 샘물이 별안간 뒤집혀 말으며 어별(魚鼈)이 어지러이 뛰놀며 대부동 나무가 먼첨 꺾어지며 원노(猿猱)가 때로 우짖으니 거룩하신 상감님께옵서 몹내 슬퍼하사 피눈물이 용포 앞 섶자락을 적시우시며 문무백관이 모두 시름에 쌓여 진땀이 선만(蟬晩)이 내솟아 배이며 춘궁(春宮)에 어깨 겯고 놀던 동무가 모두 피눈물에 어리었으며 월정(月庭)에 고름 맺은 벗이 함께 애를 쪼이는 듯 슬퍼하니 관(棺)을 모시는 상두꾼의 구슬픈 소리가 들리자마자 거리거리 백성들이 어미 아비를 잃은 듯이들 슬퍼하더라니. 그 매운 절개(節槪)와 정렬한 혼백을 누가 기리며 부러워하지 않을까. 더구나 우리 아기씨께서는 그렇게 그만…….

내인갑 야 저기 상감마마께서 나옵시나보다.

(진흥대왕이 문문백관과 상인도병(上引道兵) 2인, 흑종감(黑種監) 2인, 치성(稚省) 6인과 함께 등장)

너희들은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거룩한 이차돈의 넋은 벌써 하늘에 돌아가 어머니 품에 그윽히 안기어 시방 우리를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아까 흘린 그 흰 피는 어머니의 거룩한 젖을 가져다 이 나라 사람에게 먹이려고 고루고루 끼얹은 것이다. 이제는 이차돈이가 우리 모든 사람의 위에 계신 거룩한 어머니가 되셨다. 이제는 너희들은 그다지 깨우치지 못하겠느냐.

("옳습니다. 그는 저희 어머니올시다." "거룩한 신(神)어머니올시다."라는 여러 사람의 떨리는 대답이 이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간 그이를 위하여 먼저 슬퍼하고 거기에 흐르는 눈물로 우리의 깨끗하지 못한 온갖 허물을 말끔하게 씻어버리자.

(모든 이의 울음이 한데 북겨대어 일어난다.)

공목 이차돈 스승이여. 당신은 우리의 미욱함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셨습니다그려. 당신은 죽음으로써 우리의 목숨을 살리어 주시고 우리의 미욱함을 깨우쳐 주셨으니 당신과의 이 세상 인연은 얇았지마는 당신은 어느 때까지든지 하늘에 높이 계셔서 길이길이 이 나라를 돌보아 주시고 모든 허물을 깨우쳐 주소서.

알공 (엎드려 빌며) 오─ 우리 이차돈 한사여, 잘못하였습니다. 공주 아기씨여, 이놈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눈물을 씻으며) 어허 우리의 스승이여 당신은 죽음으로써 우리의 눈에 참말로 영검스러운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일찍이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마 당신의 그 거룩하신 몸이 아마 더러운 이 땅 위에 반갑지 않으셨던 게지요. 그렇지. 하늘에 계신 거룩한 선관이 잠깐 이 나라에 나타나 미욱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왕비 이것이 어쩐 일이냐. 너희 둘의 혼수(婚需)로 마련해 두었던 고운 옷감이 일곱 매 지친 벼에 뒤섞여 송장용으로 씌일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꽃 덩이를 꾸밀 철에 상두 소리가 웬일인고. (한참이나 느끼어 울고 일어나며) 상감마마 이 몸은 이제 왕비가 아니옵니다. 번화스러운 옷은 모두 벗어버리고 칡 벼 장삼에 염주를 세는 중이나 되어 가엾이 죽은 우리 애들의 명복이나 빌겠어요. (목이 메인다)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거든 그 뜻을 허락해주시옵고 어디든지 좋은 땅에 조그마한 초막이라도 하나 지어 주시옵소서.

나도 이제 머리를 깎고 중이나 되어 이 영화스럽다는 자리를 모두 헌 실같이 내어버리고 이차돈을 위해 복이나 빌겠다. 하늘님. 이 나라 땅위에 거룩하고 거룩한 복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이차돈이의 흰 피는 벼려 서천(西天)의 법우(法雨)를 끼얹어 주심 과같이……. 오─ 이차돈아. 나의 사랑하던 아들아. 두굿기던 딸아.

나는 너희들을 잃어 버리고 얼마나 구슬프며 쓸쓸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이때에 다만 실없는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랴. 이제부터 뒷날의 나의 늙은 여생은 돌아간 너희들을 사모하기에 더 한층 쓸쓸하고 끝없이 고요할 뿐일 것이다. 너희들의 너의 충의를 기록한 무덤은 길이길이 이 나라 뒷동산에 간직해두어 주마. 길이길이 뒷세상 어느 때까지든지 너희들의 꽃다웁고 놀라운 그 이름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눈물을 짓는다. 향로에 불이 별안간 성하게 붙어 오른다.)

성지종래만세모 구구여의만추호(聖智從來萬世謨 區區與議謾秋豪)
법륜해축금륜전 순일방장불일고(法輪解逐金輪轉 舜日方將佛日高)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