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진주기 논개
- 晋州 名妓 論介
진주(晋州)를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촉석루(矗石樓)를 말하고 촉석루를 말하는 사람은 또한 반드시 계사란(癸巳亂=임진란 나던 다음 해) 때에 절사한 의기 논개(義妓 論介)를 말할 것이다. 논개의 성은 주씨(周氏)니 전라도 장수(全羅道 長水 玉女峰下 出生)의 양가 여자로 재색이 절특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윤락하여 기생이 되었다가 삼장사(三壯士) 중에 한 장사인 황진 황병사(黃進 黃兵使)를 따라서 진주로 왔다. (其時 進이 爲長水縣監) 진주는 원래 영남의 웅주 거부(雄州 巨府)로 북에는 비봉산이 우뚝 솟아 있고 남에는 남강이 권권히 흐르며 그 강상에는 천하 험지요 절경인 적벽(赤壁)이 깎은 듯이 둘러있고 겸하여 서남으로 곤양, 사천, 남해(昆陽, 泗川, 南海) 등 여러 항만이 둘러있어서 수륙의 중요지지인 까닭에 옛날로부터 국가에서 중요한 땅으로 생각하여 감사령과 병영을 두고 성지(城池)도 다른 곳보다 특별히 견고하게 쌓았으며 성을 지키는 괂ㄴ도 주요한 무장으로 지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임진란 당시에도 일병이 수차 진주성을 침입하다가 병사 김시민(兵使 金時敏)에게 참패를 당하여 죽은 자가 수만에 달하였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진주는 영남의 중요지인 까닭에 일군으로도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경남 일대와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을 할 수 없고 또 조선에 와서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과 같이 승첩을 하고 점령을 하다가 유독 진주에서 참패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상한 수치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군은 언제나 전주를 다시 쳐서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계사년 六月에 와서 경상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일군들은 일시에 진주성으로 몰려와서 수십만의 무리가 진주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니 그때에 진주성을 지키고 있는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등 세 장사는 가진 힘과 가진 전술(戰術)을 다 써서 일군과 여러 날을 상지하고 있었으나 원래에 일군의 세력이 커서 방어하기 대단히 어려운 중 뜻밖에 六月 二十八日에는 장마로 큰 홍수가 나서 남강물이 성벽을 넘치게 되니 일군은 그것을 이용하여 성중으로 홍수를 드려 대고 뒤를 이어서 수십만의 일군이 성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니 아무리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三장사라도 최후까지 싸우다가 세궁역진하여 어찌하지 못하고 남강수에 떨어져 순절을 하니 진주성은 그만 일군에게 함락을 당하고 당시에 우리 조선사람으로 죽은 사람이 六萬여 명에 달하여 남강의 물이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일군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그 이튿날 바루 六日 二十九日에 촉석루 위에서 성대한 승첩연을 열고 술과 고기의 갖은 음식을 차려 취ㅎ도록 잔뜩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뛰놀았다. 그중에는 물론 조선의 기생 광대 같은 것도 다 데려다 놓고 마음대로 놀았다. 논개도 또한 여러 기생과 같이 불려 가서 그 연회에서 놀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 기생의 노래와 춤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중에 일장 모곡촌 육조(毛俗村 六助=淸의 牙將)란 자는 가장 용맹한 장수로 진주성을 함락시킬 때에 선봉으로 먼저 쳐들어온 사람이었다. 취흥이 도도한 중에 논개의 어여쁜 태도와 고운 노래에 정신이 황홀하여 일어나 춤을 추며 논개와 같이 춤을 추기를 청하였다. 논개는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나 전날 함성될 때에 삼장사와 같이 죽지 못하고 일군에게 잡혀 온 것을 큰 수치로 생각하고 기회만 있으면 죽으려고 하던 차에 일장이 술이 취하고 같이 춤추기를 청하니 이것은 천재에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쾌연히 승락하고 일장을 마주 안고 춤을 추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아 춤은 점점 얼리게 되었다. 논개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 두 사람의 춤추는 것을 보고 그저 좋다고 박수를 하며 「고랴 고랴」를 불렀다. 춤이 이와 같이 무르녹아가는 판에 논개는 죽을 힘을 다하여 일장의 허리를 꽉 끼어 안고 다락에서 떨어져서 강물로 들어갔다. 일장이 아무리 몸을 솟아 뛰어나오려고 하였으나 원래에 술이 취하고 논개는 죽기를 결심하고 일장의 허리를 끼어 안았기 때문에 어찌하지 못하고 물속으로 여러 번을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최후에 촉석루 동편 바위 지금의 의암 바위라 하는 바위 아래 깊은 속으로 몰려와서 그만 같이 죽어버렸다. 그 뒤의 사람들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의암(義岩)이라 하고 그 바위 옆에는 돌비를 해 세워서 그의 절개를 기념하고 진주의 기생들은 또 의암사(義岩祠)란 사당을 지어놓고 해마다 六月 二十九日이면 성대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수년 전에는 특히 일반 시민의 발기로 六月 二十八日에 창렬사(彰烈祠)에서 三장사의 기념제를 지내고 그 이튿날 二十九日에는 진주 기생을 위시하여 일반 시민이 모여 또한 의암사에서 논개의 기념제를 지냈었는데 내참한 사람이 수만 여에 달하여 공전의 성왕을 이루었다고 한다.
- —義巖 事蹟 碑銘—
義巖 「事蹟」의 碑文은 不得已한 事情으로 여기에 略하고 其碑銘만 揭하기로 하다.
獨峭其巖 特立其女.
女非斯巖 焉得死所.
巖非斯女 烏帶義聲.
一江孤巖 萬古芳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