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제후와 백운
- 貞女 際厚와 白雲郞
제후(際厚)는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때 사람 백운(白雲)의 처이다. 처음에 신라에는 두 대관의 집이 한 동리에 살았는데 한날 한때에 두 집에서 같이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남자의 이름은 백운(白雲)이요 여자의 이름은 제후(際厚)였다. 그의 부모들은 그 두 남녀의 장래 혼인할 것을 예약하고 그들을 곱게 곱게 길렀으며 그 두 남녀도 비록 나이 어렸을찌라도 남 유달리 서로 사랑하며 자랐다. 백운은 차차 장성하여 국선(國仙)에까지 뽑히었으나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불행히 눈이 멀어 맹인(盲人)이 되니 제후의 부모가 전날의 혼약을 깨뜨리고 무진 태수 이교평(茂榛太守 李俊平)과 고쳐 혼인을 하게 되었다. 제후는 그것이 부모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하지 못하나 마음에 퍽은 안타까워서 장차 시집을 가게 될 때에 비밀히 백운을 찾아보고 하는 말이
『여보시요 당신과 내가 생일이 한날일 뿐 아니라 이미 약혼한 지가 오랬는데 지금에 부모께서 다른 곳으로 고쳐 시집을 가게 하시니 그 명령을 쫓지 않으면 불효가 될 것이고 무진(茂榛)으로 가면 죽고 사는 것은 내게 달린 것이니 당신이 만일 신의가 있다면 나를 찾아서……… 무진으로 오십쇼……」라고 하였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제후는 무진으로 가서 교평을 보고 말하되 혼인은 인도(人道)의 으뜸이니 좋은 날을 가려서 예를 이르는 것이 좋겠다 하니 교평도 그럴 듯이 듣고 승락하였다. 그런지 얼마 아니 하여 백운은 어둔 눈으로 길을 떠듬으며 무진 땅을 찾아가니 제후가 비밀히 따라 나와서 백운과 같이 손에 손을 잡고 백운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 그렇게 가다가 한 산꼴(山谷)을 당도하니 난데없는 부량한 협객이 달려들어 제후를 약탈하여 가지고 도망을 하였다. 그때의 백운의 친구 중에는 김천(金闡)이란 사람이 있었으니 김천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매우 좋아할 뿐 아니라 의협심이 풍부하여 남의 일이라도 의리에 틀리는 일이 있으면 비록 자기의 몸을 희생할찌라도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그 길로 달려가서 한칼로 그 협객를 죽이고 제후를 찾아오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의기를 칭찬하고 나라에서도 그 세 사람의 신의를 가상히 여겨 각각 삼급(三級)의 벼슬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