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개성명기 황진이
- 開城 名妓 黃眞伊
개성(開城)은 조선에서 명소 고적이 많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옛날부터 절대 가인이 많기로도 또한 유명한 곳이었다. 고려 때에 충렬왕(忠烈王)의 갖은 총애를 홀로 받던 적선래(謫仙來)를 위시하여 만년환(萬年歡)이란 가곡을 악부(樂符)에 전하던 충숙왕(忠肅王)의 애기(愛妓) 만년환이며 요염무쌍한 절대의 가인으로 암약(暗弱)한 신우왕(辛禑王)을 마음대로 마롱(魔弄)하여 고려조 四百七十년의 왕업을 일조에 전복시키던 연쌍비(燕雙飛) 소매향(小梅香) 칠점선(七點仙) 봉가리(鳳加里) 같은 미인도 다 이곳의 출생이었다. 국파군망(國破君亡)한지 수백년 이래에 세상일은 비록 송악산 상상봉에 뜬 구름과 같이 변환이 무상하지마는 이 경국미인들의 꽃다운 혼백은 아주 흩어지지 않고 뭉키고 또 뭉키어 이조 중종대왕 시대(李朝 中宗大王 時代)에 다시 절대 미인으로 태어 낳았으니 그는 개성삼절(徐花潭 先生과 朴渭暴布, 黃眞伊를 竝稱하여 開城의 三絶이라 한다)에 하나인 아니 조선 五百年간에 대표적 여류기인(女流奇人) 황진이(黃眞伊)였다. 그의 모친 진현금(陳玄琴)은 개성 아전의 딸로 자색이 또한 절등하였다. 十八歲 때에 일찌기 병부교(兵部橋) 다리 밑 개천으로 빨래를 하러 갔더니 풍채 좋고 의표가 화려한 어떤 묘 소년이 그 다리 위로 지나다가 현금의 어여쁜 자태를 보고 정신이 황홀하여 참아 가지를 못하고 머뭇머뭇하며 혹은 추파도 보내고 혹은 손짓도 하며 혹은 웃고 혹은 노래하여 백방으로 현금의 마음을 조발(挑發)하니 현금도 또한 자연히 마음이 동하여 그 소년을 바라보고 추파를 주게 되었다. 그러나 현금은 아직까지 순결한 처녀의 몸이요 남의 이목이 번다한 탓으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다만 침묵을 지키고 빨래만 할 뿐이었더니 그 소년도 또한 어찌하지 못하고 어디인지 종적을 살짝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한번 가슴속에 사랑의 싹이 돋기 시작한 현금은 자연히 마음이 그 소년에게 끌리어서 다른 女子들은 빨래를 다 하여 가지고 갈찌라도 자기만은 홀로 남아있어서 여전히 빨래를 하며 그 소년이 다시금 지나가기를 다기다렸다. 그럭저럭 해는 저물었다. 개천 가에는 저녁 연기가 떠돌기 시작하고 다리 위에는 황혼의 장막이 흐미하게 느리웠다. 현금은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빨래 방망이를 잡고 우두커니 혼자 앉았노라니까 다리 위로 아까 보던 그 少年의 얼굴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더니 그는 점점 가까이 와서 물을 청하였다. 현금은 속으로 반가워하며 물 한 박을 깨끗이 떠서 친절하게 주었더니 그 소년은 감사히 받아서 반쯤 먹다가 다시 현금을 주며 웃고 말하되 너도 또한 한번 먹어보라 하였다. 현금은 그 물을 받아서 먹으려고 보니까 그 물은 먼저 자기가 주던 물이 아니요 뜻밖에 향취 좋은 술이었다. 현금은 깜짝 놀라며 그 少年이 비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드디어 정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少年은 성명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대로 갔다. 그 뒤 열 달 만에 현금은 일개 미여자를 낳았으니 그가 곧 유명한 황진이다. 황진이는 낳을 때에 三日 동안이나 온 집에 향기가 가득하고 잉태할 때에도 또한 이상한 인연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 소년을 신선(神仙)이라 하고 따라서 황진이를 仙女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에 황진이가 天下 미인인 까닭에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어낸 말이지 이 세상에 어찌 신선이 있으며 또 진이 선녀일찐대 어찌 하필 황씨(黃氏)란 성을 가지게 되었으랴. 그 소년은 누구라고 이름은 세상에 전하지 않았으나 이른바 황진사(黃進士)라 하는 개성명문가 자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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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다. 나이 二八에 이르매 그의 아리따운 소문이 국내에 전파되니 누구나 그를 한번 만나보기를 원ㅎ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 그의 이웃집에 사는 한 청년은 그를 특별히 연모(戀慕)하여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를 한번 만나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내외법이 심히 엄할 뿐 아니라 황진은 비록 사생녀(私生女)일찌라도 상당한 가문이기 때문에 도저히 만나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다만 혼자 가슴만 태우다가 결국에 병이 들어 애달피 죽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상예가 마침 황진의 집 문 앞을 지나게 되매 이상하게도 그 상예꾼의 발이 땅에 딱 붙고 떨어지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황진을 보고 그 청년의 죽은 사정과 또 상예꾼의 발이 붙은 이야기를 하였더니 황진은 크게 감동이 되어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女子로 세상에 태어나서 남을 살리는 좋은 일은 못할찌언정 나로 인하여 남의 집 아까운 청년이 죽게 되었다면 그 아니 가여운 일이며 나의 죄악인들 어찌 없다고 하랴. 이와 같을찐대 이 뒤에도 나의 일개 미색으로 하여 병들어 죽을 사람이 또 몇 사람이 있을는지 알 수 없으니 그까진 구구한 정조(貞操)니 가벌(家閥)이니 다 볼 것 없이 차라리 내가 아주 해방적(解放) 생활을 하여 여러 사람을 위안시키는 것이 옳겠다 하고 자기 부모에게 그 사정을 자서히 말하고 소복담장(素服淡粧)으로 뛰어 나아가 그 청년의 시체(屍體)를 끌어안고 어루만지니 그제야 그 상예꾼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 무사히 장례를 하고 그날로 바로 황진이는 그 부모에게 죽기로 맹서하고 기생이 되었다. 그는 원래에 천재가 비상한 까닭에 기생이 된 지 불과 며칠에 노래와 춤이며 그외 모든 음악을 다 능달하니 일시에 그의 이름이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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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유수(留守) 송모(宋某)는 또한 풍류남자로 화류창의 백전노장이었다. 황진을 한 번 보고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절세미인이라 칭탄하고 극히 사랑하며 관대하니 그의 첩은 또한 관서명기(關西名妓)라 문틈으로 황진을 엿보고 놀라 가로되 이 세상에 어찌 저러한 미인이 있으랴 주상(主相)이 저것을 사랑하면 내 일은 다 낭패라 하고 머리를 풀고 맨발로 뛰어 나서서 야료를 치니 유수가 놀라 일어나고 좌객들도 또한 헤어져 갔다. 그 뒤에 유수는 그의 대부인 한갑 잔치를 하는데 경향의 명기명창이 다 모이고 인군 수령 방백이 모두 참석하였다. 다른 기생들은 갖은 화장과 호사를 극히 하였으되 유독 황진은 단장도 아니하고 수수하게 차리고 참가하니 천연의 아리따운 태도가 만좌를 경동하여 누구나 황진을 바라보았다. 더우기 玉을 바시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로 공중이 떠나가게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야말로 요지의 왕모(瑤地 王母)가 백운요(白雲謠)를 부르는 듯 월궁의 항아(姮娥)가 월광곡(月光曲)을 아리우는 듯 선녀인지 신인지 자못 정신이 황홀하여 마쇄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악공 중에 엄수(嚴守)라 하는 이는 七十여세의 노령으로 가야금이 일국 명수요 그 외 일반 음률도 또한 능통하였다. 처음에 황진을 보고 칭탄하여 가로되 자기가 오십여 년 간을 화류장에서 놀았으며 저러한 미인은 처음 보았다 하며 선녀라고 일컫더니 급기야 황진의 노래를 듣고는 놀라 일어나 말하되 이것은 분명히 선계(仙界)의 노래이니 어찌 인간에 이러한 곡조가 있겠느냐 하였다. 이 몇 가지의 일만 보아도 황진의 인물이 어떠한 것과 노래의 어떠한 것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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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이와 같이 조선에만 이름이 날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소문이 높아서 명나라의 사신이 와서 조선의 사정을 물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황진이 소식을 물었다. 한번은 명나라 사신이 오는 길에 개성에 들리었는데 구경하는 남녀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중에 황진이 또한 그 속에 섞이었더니 명나라 사신이 멀리 바라보고 통사더러 말하되 천하의 절색을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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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비록 기적(妓籍)에 이름을 두었으나 천성이 고결하여 속류의 기생과 같이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관부(官府) 연회석이라도 결코 옷을 갈아입거나 특별한 화장을 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평소에 입던 의복 그대로 가며 시정(市井)의 천한 사람은 비록 천만금을 준다 하여도 결코 교유ㅎ지 않고 명사고객(名士高客)과 서로 상종하기를 좋아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되 특히 당시(唐詩)를 애독하였다.
그때 개성에는 이름 높은 학자와 도승이 있었으나 학자는 곧 서화담(徐花潭) 선생이요 도승은 지족암(知足庵)이란 절에서 三十년 동안을 참선공부한 만석중(萬錫禪師— 或은 妄釋이라고 함)인데 그 중은 평소에 도학이 서화담 이상이라고 자칭하는 터이었다. 황진은 평소에 두 사람을 다 사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어떠한 것을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 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꺼리끼는 빛이 없이 승락하였다. 황진은 선생에게 얼마 동안 공부를 하다가 한번은 밤에도 집으로 가지 않고 선생의 방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수년 동안을 같이 있는 중에 황진은 별 수단을 다하여 선생을 친압ㅎ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조금도 동심을 하지 않고 담연자약하니 황진이 크게 경복하고 절하여 가로되 선생은 참 성인(聖人)이라 하고 그 뒤에는 다시 딴 뜻을 두지 않고 더우기 선생을 경모하며 항상 선생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개성에는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선생과 자기— 그 셋이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황진은 또 만석중을 시험하여 보려고 지족암을 찾아가서 자기가 여승(女僧)이 되어 같이 수도하기를 청하니 만석은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은 그 중의 태도가 너무 냉정하여 말도 부치기가 어려운 것을 보고 혼자 말로 『오냐 진소위 새침덕이 골로 빠진다고 네가 아무리 도고(道高)한 척 하나 나의 묘계에는 한번 빠지고야 말 것이다……』 하고 돌아와서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담장으로 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중이 있는 옆방에다 침방을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불공을 한다고 칭언하고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 청아한 그 목소리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도 같고 선녀의 음률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돌부처 금부처까지라도 녹아 살아질만 하거던 하물며 감각성이 있는 사람으로서야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있으랴. 이와 같이 하루 이틀 며칠 동안을 지내고 보니 그 중이 처음에는 심상히 들었으나 점점 들을쑤록 자연 마음이 감동되어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있던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떴다. 황진을 한 번 보고 두 번 볼쑤록 선계(禪界)의 깨끗한 생각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과 말을 먼저 통하게 되니 예의 황진은 그 능난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단으로 그 중을 마음대로 놀리어서 그만 파계(破戒)를 하게 하니 지금까지 세상에서 「만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十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은 이것을 일러서 하는 말이요 속간에서 흥행하는 만석중 놀음이라 하는 것도 이 황진이가 만석중 놀려내던 것을 실연(實演)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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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山水의 유람하기를 또한 좋아하였는데 강원도의 금강산(金剛山)이 천하의 명산이란 말을 듣고 한번 유람하기로 생각하였으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마음대로 가지를 못 하더니 때마침 서울에서 온 손님 중에 李氏란 청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원래 재상의 아들로서 위인이 청초하고 호탕하며 또한 山水의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황진이 그 사람을 보고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중국의 사람들도 원생 고려국(願生 高麗國)하여 일견 금강산(一見 金剛山)이라 하고 누구나 금강산 구경하기를 원한다 하니 우리 조선사람으로서 자기 나라에 있는 금강산 구경을 못 한다면 그 어찌 수치가 아니리요 내가 우연히 당신을 만나보니 족히 동무를 하여 유람을 갈 만하다 하고 남녀가 서로 의논한 다음에 하인과 일체의 행장은 다 없이 해버리고 황진은 죽장망혜로 벼 치마를 떨쳐입고 李氏도 또한 페포파립으로 양식을 친히 짊어지고 산정수로(山程水路) 몇백 리를 도보하여 내외 금강의 일만 이천봉이며 그 외 여러 명승 고찰을 낱낱이 찾아 구경하며 혹은 詩도 서로 짓고 혹은 노래도 서로 부르니 그 운치야말로 범용한 사람으로서는 맛도 볼 수 없는 일이어니와 고생인들 또한 어찌 없었으랴. 기갈도 자심한 데다가 도독까지 겸발하여 그 파리한 얼굴은 마치 폭풍우를 한번 치른 봄꽃과 같이 가련하여 참아 볼 수가 없었다. 그중에도 호사다마라고 중도에서 두 사람은 서로 종적을 잃게 되니 황진은 천신만고를 하여 李氏를 찾았으나 마침내 종적이 묘연하므로 할 수 없이 밥을 빌어먹으며 내친걸음에 전라도의 지이산(全羅道 智異山)까지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羅州)에 이르니 그때는 마침 나주 목사(牧使)가 연회를 하는데 인읍 각군의 명기 명창이 만좌하게 모였는지라 황진은 낡고도 떨어진 의복으로 행색이 초초함도 불고하고 회석으로 돌입하니 만좌가 다 경괴하였다. 그러나 황진은 비록 거지의 행색을 하고 갔을찌라도 원래 골상이 비범한 까닭에 목사도 또한 범연히 보지 않고 좌석을 허락하니 황진이 한손으로 이(虱)을 잡으며 노래를 부르매 옥같이 고운 목소리가 능히 하늘을 통철하고 고저와 장단이 모두 절조에 들어맞아 시속 사람의 노래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으니 만좌가 모두 괄목경탄하여 특히 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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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선전관 이사종(宣傳官 李士宗)은 풍류호객으로 황진의 꽃다운 이름을 듣고 한번 같이 놀고 싶어서 개성(開城)까지 갔었는데 직접으로 황진의 집에는 가지 않고 황진이 사는 근처 천수원(天壽院) 개천가에 가서 수양버들에 말을 매어두고 모래사장에 그냥 누워 두어 곡조 노래를 부르니 황진이 풍편에 듣고 말하기를 이 노래의 곡조가 매우 비상하니 이것은 심상한 촌사람의 노래가 아니요 필경 어떠한 절창의 노래라 내가 듣건대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風流客 李士宗)이 당대의 절창이라 하더니 아마 그 사람이 온가보다 하고 사람을 보내 탐문하니 과연 이사종이었다. 황진은 즉시 이씨를 자기의 집으로 맞아들여 수일 동안을 같이 놀다가 자연 지기가 상합하여 피차에 六年간을 같이 살기로 약속하고 자기의 가정집물을 모두 팔아 가지고 이씨의 집에 가서 三年을 사는데 李氏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자기의 돈으로 李氏까지 살리더니 三年 뒤에 李氏는 다시 한 집을 설치하여 황진을 살리되 또한 황진이 자기에게 한 것과 똑같이 하니 다른 사람이 모두 행복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三年을 살다가 六年의 만기가 되니 황진은 李氏에게 말하되 우리의 약속한 년한이 만기되었으니 그만 헤여지자 하고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李氏는 비록 마음에 창결하나 또한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참 황진이 같은 여류 기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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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쉬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明月 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의 지은 시조로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에 흔히 유행하는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이면에는 또한 자미스러운 이야기가 하나 감추어 있다. 그때에 왕족 중(王族 中)에 벽계수(碧溪守)라 하는 李모는 위인이 원래에 조행이 방정하여 자칭 천하정남(天下貞男)이라 하는 이였다. 항상 장담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황진을 한 번만 보면 모두가 침혹한다고 하나 그것은 다 의지가 박약한 까닭이다. 만일에 내가 당한다면 다만 유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장에 그것을 축출하고 말겠다고 하였다. 황진은 그 말을 듣고 한번 시험하여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滿月臺)까지 구경을 오게 하니 그때는 마침 시월 망간이라 유릿장 같이 맑은 하늘에 씻은 거울 같은 달이 밝고 만산에 낙엽이 우수수하게 떨어져서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은 담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있다가 언연히 나와서 李氏의 말고삐를 휘어잡고 위에 쓴 노래를 한 곡조 부르니 李氏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청아한 노래를 들으매 스사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 모르는 동안에 말에서 떨어지니 황진이 웃으며 말하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쫓지 못하고 도리어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하느냐 하니 李氏가 크게 부끄러워 하였다. 원래에 그 노래 속에 벽계수라는 말은 물의 벽계수(碧溪水)이지마는 실상은 벽계수(碧溪守) 즉 사람의 벽계수를 가리킴이요 명월(明月)은 황진이의 자(字)인 까닭에 황씨가 그때에 즉경을 취하여 그렇게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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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비록 몸을 화류장에 던지었으나 항상 비분강개한 뜻이 있고 척당불기(倜儻不羈)의 기개가 있어서 항상 달 밝고 고요한 밤이나 잎 떨어지는 구슬픈 가을날 같은 때를 당하면 남모르게 선죽교(善竹橋)나 만월대(滿月臺)에 가서 일장의 통곡도 하고 몇 곡조의 노래도 불러서 고려조의 옛일을 조상하고 슬퍼하였다. 한번은 꿈을 꾼즉 어떤 백마(白馬)를 탄 장수가 옛적 고려 때에 쓰던 연무장(練武場)으로 와서 한참 돌아다니다가 말머리를 멈추고 연연하여 참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깨었다. 황진은 꿈에 보이던 그 장수는 분명히 고려 때의 어떤 장군이라고 생각하고 창연히 눈물을 흘리며 이러한 노래를 지었다.
오백년 도읍지(五百年 都邑地)에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山川은 의구커늘 인걸(人傑)은 어디 간 두어라 고국 흥망을 물어 무삼
이것이 지금껏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송도회고(松都懷古)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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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이와 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四十 내외에 불행히 병이 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집안사람을 불러 유언하되 내가 평생에 남과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였은즉 죽은 뒤에도 고적한 山中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이 많이 내왕하는 큰길 가에다 묻어주고 또 음률을 좋아하는 터인즉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히어서 장례를 지내 달라 하니 집의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수백 년 전까지도 그의 무덤이 송도(松都) 큰길 가에 있어서 천하호객 임백호(林白湖)는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을 하는 길에 친히 제문까지 지어서 황진의 무덤에 조상하다가 조정의 탄핵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
꽃이 떨어지고 잎이 이우는 동안에 무정한 세월은 벌써 三百여 년을 지났다. 그의 옥골을 매몰한 개성역로(開城驛路)에는 이제 와서 그의 무덤조차 찾아볼 길이 없고 무정한 방초만 의구히 푸를 뿐이다. 진봉산(進鳳山)의 철죽꽃이 만발하고 송악산에 두견새 슬피 울 때에 아무리 강장의 남아인들 이 만고가인을 생각하면 어찌 단장곡(斷腸曲)을 부르지 아니하랴. 나는 최후에 그의 시조 두 편을 더 소개하고 그만 붓을 던진다.
靑山은 내 뜻이요 綠水는 님의 情이라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변할 소냐 綠水도 靑山을 못 잊어 울어 여어 가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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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은 옛 山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흘러가니 옛 물이 있을 소냐 人傑도 물과 같아여 가고 아니 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