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활인수

활인수(活人樹)

이원수(李元秀) 이감찰(李監察)은 강직(剛直)하고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녹발홍안(綠髮紅顔)의 청춘시대에 일찌기 강원도 강릉(江原道江陵)에 가서 장가를 들었으니 그 부인은 즉 누구냐 하면 당시 명사(名士)로 경향에 이름이 쟁쟁하던 진사 신명화(進士 申命和)의 귀동 따님이었다.

신부인은 그 아버지 신진사의 고결한 피를 받고 산수좋은 강릉에서 생장하니만큼 인물이 비범하고 천재가 비상하여 어려서부터 시문서화(詩文書畵)가 모두 절특하니 세상 사람들이 신녀(神女)라고 칭찬하고 자기는 또 옛날 주문왕(周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姙)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호(字號)를 사임당(師姙堂)이라 하였다.

그러한 재원(才媛)과 재자(才子)가 서로 혼인을 하게 되니 그 외모와 덕행이며 재예가 피차 막상막하한 것은 물론이고 금슬(琴瑟)이 또한 남다르게 좋으니 그야말로 녹수의 원앙(綠水鴛鴦[녹수원앙])과 단산의 봉황(丹山鳳凰[단산봉황])이 서로 짝을 만난것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그들 부부는 천정의 배필이라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의 청춘남녀 같으면 그렇게 다정스럽고 재미있는 신혼 부부가 서로 헤어짐을 싫어하여 겨울 밤과 여름 낮의 그 기나긴 시간도 지루한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한날 한시 같이 금슬의 낙(琴瑟之樂[금슬지락])으로만 만족한 생활을 하겠지만 그들 부부는 모두 인격이 상당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인 까닭에 구구하게 일시적인 환락(歡樂)에만 만족하지 않고 좀더 인격을 수양하고 좀더 학문을 연구하여서 장래 한 사회 또는 한 나라의 큰 인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혼인한지 약 일년이 지나서 어느 날 밤에 서로 의논하되

『우리 부부가 젊은 정리에 서로 떨어져 있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한집에만 그대로 같이 있게 된다면 공부에 큰 방해가 되고 따라서 장래 발전에도 영향이 퍽 많을 터이니 아무리 애정을 못 잊을지라도 서로 십년 작정을 하고 각각 떨어져서 남편된 나는 서울에 가서 글 공부를 하고 부인된 당신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되 그 기한이 되기 전까지는 서로가 단 한번이라도 내왕(來往)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신까지도 일체 하지 말자…….』

하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아침에 원수는 그 약속을 단연 실행하려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사랑하는 부인과 이별하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원수가 처음에는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공명심이 많아서 가정의 재미와 부인의 애정도 모두 돌보지 않고 그 부인과 그렇게 굳은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지마는 얼마 아니가서 평소에 그 부인과 서로 사랑하던 생각을 하고 또 앞으로 장차 십년이 되도록 피차 얼굴 한번도 못보며 편지 한장도 못할 생각을 하니 앞길이 캄캄해지고 가던 발길이 저절로 돌아서져 대관령(大關嶺) 마루턱까지 갔다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이틀 동안을 계속하다가 사흘째에는 남이 보기에 너무도 부끄러우니까 집 근처 대밭(竹林[죽림]) 속에 와서 있다가 밤중에 남이 모르게 담을 넘어서 그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부인도 처음에는 그 남편의 그러한 것을 보고 속으로 남자의 의지가 너무 박약한 것을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대하여 그렇게 사랑하는데 마음이 흔들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하는 동정만 보았으나 며칠을 계속하여 그렇게 하고 더구나 밤중에 담을 넘어서 들어오기까지 하는 것은 집안사람 보기에 창피도 하려니와 처음 약속과 너무 위반이 되므로 고정(高貞)한 그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수가 방문 밖에 와서 여러 번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여도 절대로 열어 주지 않고 최후에는 가위로 자기 머리 털을 선뜩 잘라서 문밖으로 내어주며

『사람이란 것은 비단 부부간이라도 한번 약속을 한 이상에는 그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까짓 구구한 애정을 이기지 못해서 신의를 지키지 못 한다면 피차에 어찌 신봉할 수가 있겠읍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의 인격보다도 나의 외모를 더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리하시는 것이니 나의 외모의 한 부분되는 머리 털을 아주 잘라서 드리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십년 동안을 최초의 약속과 같이 잘 지키셔서 성공을 하시고 다시는 우리 집에를 오시지 마십시오. 이 후에도 만일 또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신다면 그때에는 나는 아주 내 목을 베어서 최초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하고 말하니, 원수는 깜짝 놀라 후회하며 그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그날 밤으로 다시 담을 넘어서 서울로 간 후에는 처음 약속과 같이 십년 동안이나 한 번도 되돌아 다시 가지 않고 글 공부를 하고, 신씨 부인은 집에서 또 그림 공부를 하되 특히 안견의 산수도(安堅山水圖)와 포도(葡萄) 초충(草虫)등을 전공하여 그 화법이 모두 신경(神境)에 이르렀다. 원수가 그렇게 공부를 하는 동안에 빠른 세월은 어느덧 벌써 십년이 되어 서로 약속한 기한이 만기되었다. 웬만한 남자같으면 그 피가 끓고 기운이 용솟음칠듯한 청춘시절에 객지에서 십년 동안이나 홀애비 생활을 한다면 그 번화하고 유혹 많은 서울 장안에서 반드시 화류장 같은 곳에 몇번 발을 들여 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허다 못하여 남의 집 행랑방 출입이라도 더러 하였겠지마는 원수는 원래에 강직 고결한데다가 더구나 그 부인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생명같이 사랑하는 머리털까지 잘르던 일에 깊은 감동이 생겨서 십년동안을 한날 한시와 같이 그 절조를 지키고 열심으로 공부만 하였다. 그러다가 기한이 차게 되니 원수의 그 기쁨은 마치 십년간의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단 몇날도 지체하지 않고 만기가 되던 바로 그 이튿날에 서울을 떠나서 강릉(江陵)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 같으면 길도 좋고 자동차 동해선의 기차 같은 것이 있어서 소위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으로 당일에 강릉을 가겠지마는 그때만 하여도 서울에서 강릉을 걸어가자면 거리가 퍽 멀어서 날자도 여러날 걸리려니와 하늘이 잘 보이지 않도록 산림이 우거진 대산준령에 백주에도 화적(火賊) 강도 맹수(猛獸)들이 곳곳에 나타나서 여간한 사람으로는 혼자서 길을 갈 엄두도 못 내고 동행을 몇 사람씩 얻어야만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원수는 원래 대담한 남자인데다가 십년이나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랑하는 그 부인을 만나 보려는 정렬이 타오르는 까닭에 태산 준령도 평지같이 보이고 화적 맹수도 우습게 생각되어 같은 동행도 없고 또 신변에는 몸을 보호하는 칼이나 창 같은 것도 없이(총 같은 것은 그때에 이름도 몰랐다.) 그냥 한사과객(寒士過客)의 행장과같이 죽장망혜 단표자(竹杖芒鞋 短瓢子)에 괴나리 봇짐을 해 걸머지고 좌청산(左靑山) 우록수(右錄水)에 양장구곡(羊膓九曲)같이 구비구비 뚫린 길을 유람겸 탐험겸 천천히 가는데 때는 마침 양춘가절이라 곳곳마다 기암절벽에 두견 철죽이 만발하여 금수(錦繡)의 세계를 이루고 나무마다 이상한 새가 노래하고 다람쥐들은 굿을 하며 춘흥(春興)을 돋우는 중 녹의홍상 산골 처녀들이 산으로 들로 헤어져서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나물을 뜯으며 강원도의 독특한 애조로

『형님 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시집 살이 삼년만에 삼단같은 이내 머리 다복쑥이 다 되었네』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또 천장만장 되는 높은산 절벽에서 화전농부(火田農夫)가 화전을 가느라고 역시 강원도의 화전 가(耕[경])는 긴 가락 노랫조로

『어녀……어치돌니라 마, 마라 한눈팔지 말고 잘 가거라 어 ─ 이놈의 소(牛[우])』

하고 적막한 푸른 산이 울리도록 처량하게 내는 소리, 그 노래를 들을 때는 시흥(詩興)이 저절로 나서 다리 아픈 것과 몸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몇십수의 즉흥시를 지으면서 저절로 길을 걷게 되었다.

원수는 그렇게 길을 가는 것이 며칠이나 걸었던지 이럭 저럭 강릉 땅의 대화(大和 ─ 지금은 평창(平昌) 땅이 되었다)란 곳까지 갔었다. 이 대화라는 곳은 비록 산협(山狹)이나마 옛부터 큰 주막(酒幕) 거리로 유명하여 인가가 즐비하고 비교적 물색이 좋았었다. 원수가 급히 그 부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으로 말하면 단 한시간이라도 더가고 싶었지만 그곳에 당도하고 보니 벌써 해가 다 저물었을 뿐아니라 여러 날 행로에 몸도 피곤하고 중로에는 대관령(大關嶺)이란 유명한 큰 령이 앞을 막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불가불 하룻밤을 쉬어 가야만 되게 되었다. 주막거리로 들어가서 아무 집이나 깨끗한 집이 있으면 하룻밤을 자려고 한집 건느고 두집을 건너서 두루두루 정한 집을 찾는 중에 한 집 문앞을 지나려니까 소복을 입은 한 여자가 나오며

『저 손님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신지 날씨도 저물고 하였으니 우리 집에서 하룻밤 쉬어 가십시오. 집은 비록 적으나마 과히 누추하지도 않고 또 식구도 단출하여 조용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원수는 그 여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니 나이는 약 이십 오륙세 가량 되어 보이는데 비록 산촌 주막에 있는 여자이나마 얼굴도 제법 숭굴숭굴하고 때벗게 잘 생기고 의복도 소복을 입은 것이 수수해 보이며 말씨도 또한 정다웠다. 원수는 주인만 보아도 그 집이 과히 흉하지 않는 주막으로 짐작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고 이왕이면 주인 여자가 좋은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 주인 여자를 따라서 그 집으로 들어 갔었다. 그 여자는 원수를 언제 친하였다는 듯이 특별히 친절하게 대접하여 방도 보통의 보행객을 재우는 길가 방을 주지 않고 안 건넌방으로 정해 주고 이부자리도 새것으로 갈아 주며 음식 범절도 특별히 지성껏 잘 하여주었다.

원수는 시장한 판에 저녁밥을 잘 먹고 피곤한 다리를 쉬며 한잠을 잘 잤다.

시간으로 치면 자정이 훨씬 지나 새로 한 시쯤이나 될가 말가 할 때에 목이 말라서 머리 맡에 있는 물을 먹고 다시 누워 있으려니까 별안간 안방문이 바시시 열리며 주인 여자가 소복단장에다 주안상을 차려 가지고 자기 방으로 들어오며

『손님 주무십니까? 곤하게 주무시는데 여자가 이렇게 방에까지 들어오는 것은 미안하고 황송합니다만 집에 마침 변변치 않은 술과 안주가 있기에 잡수시고 먼 나그네길의 피로를 푸시라고 가져 왔읍니다.』

한다. 원수도 초저녁에 몸이 곤해서 정신을 모르고 잤지마는 한잠 자고 나니 잠이 잘 아니 와서 갑갑하던 차에 그렇게 주인이 그중에도 밉지 않은 안주인이 친절하게 손수 술상까지 가지고 와서 술을 먹으라고 하니 여간 고맙게 생각되지를 않고 평소에는 잘 못 먹는 술이나마 열서너 잔을 받어 먹고 그 주인 여자에게도 원수가 또 한 몇잔을 권해서 남녀주객이 모두 허물없이 말하기를 좋을 정도로 얼근히 취했다. 주인 여자는 원래에 마음 속에 간직한 일이 있기 때문에 먼저 원수에게 말을 건네었다.

『손님이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지금 상중이올시다. 본래는 정선(旌善) 사람으로 이 집에 출가하여 집이 가난한 탓으로 부부가 주막 영업을 하며 그 날 그날을 지냈더니 박명(薄命)한 탓으로 금년 봄에 불행히 남편을 여의고 지금 독신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아무리 청상과부로 있어서 날마다 여러 남자 손님을 대하면서도 이때까지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더니 오늘 우연히 손님을 뵈오니 처음부터 호감이 생겨서 여자로서의 체면과 염치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어온 것이오니 과히 추하게 생각지 마시고 하룻밤의 가연(佳緣)을 맺어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남자 같으면 그런 경우를 당해서 누구나 그 여자의 소청을 들어 줄뿐 아니라 먼저 자신하여서도 수작을 걸겄지마는 이원수는 원래 고결하기로 유명한 사람인 까닭에 처음에 그 여자가 그렇게 고맙게 구는 것을 보고는 퍽 감사하게 생각하였으나 다시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가 모두 더럽게 생각되고 더군다나 그 여자가 막중한 자기 남편의 몽상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보니 너무도 괘씸하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처음 그런 말을 할적에는 그냥 온순한 말로 거절하다가 재삼 재차 간청을 할 때에는 아주 정색을 하여 꾸짖어 말하고 최후에는 그런 말을 또 한다면 밤중에라도 그 집에 있지 않고 길을 떠나 가겠다고까지 하니 주인 여자도 그제서는 하는 수 없이 크게 긴 한숨을 한번 쉬며 탄식하고 말하되

『사람의 운명이란 할 수 없다. 원래에 내 팔자가 기박하니 어디 할 수 있으랴.』

하고 다시 원수에게 너무 실례하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초연한 안색으로 안방으로 들어갔었다. 원수는 그 여자를 들여보낸 뒤에 혼자 생각에 그 여자가 보복으로 또 무슨 흉계나 꾸미지 않나 하고 무서운 생각이 나서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말뚱말뚱하여 밤을 새우고 그 이튿날 첫 새벽에 무슨 죄나 짓고 달아나듯이 그 집을 떠나서 자기 처가로 갔었다. 사랑하는 부부가 햇수로 꼭 십년 만에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이야말로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더구나 두 부부가 그간에 모두 독실한 공부를 하여 피차를 괄목상대를 하게 되니 보통의 다른 부부가 여러해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보다 더 한층 반가웠다.

그럭저럭 며칠을 지내는 중에 하루밤에는 그 부인이 꿈을 꾼즉 큰 대들보 같은 흑용(黑龍)이 자기 방으로 들어 오더니 어린 아이를 품 속에다 안겨 주었다.

그 부인은 그 꿈을 꾸고는 그날부터 태기(胎氣)가 있었다. 그 뒤 얼마 아니 하여 원수는 과거(科擧)를 보려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다. 대화 근처에 또 이르니 전날에 자던 주막 생각이 문득 났었다. 원수는 전날에 그 집 여자에게 너무나 인정없이 대한 것이 후회되었다. 혼자서 다시 뒤미쳐 생각하기를

『소위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의 그만한 소청도 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몰인정하고 졸장부의 일이니 이번에는 일부러 그 집에 가서 그 여자에게 지난 날에 있어서의 미안한 점을 사과하고 한번 소원을 풀어 주어야만 되겠다.』

하고 다시 그 집을 찾아 갔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친절하게 원수에게 대해 주었다. 그날 밤에는 원수가 먼저 그 여자를 자기 방으로 청하여 오게 하고 지난날의 미안하였다는 말을 한 다음에 그날 밤에 같이 재미 있게 지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전날과 아주 태도가 달라지며 엄연히 정색을 하고 말하되

『내가 비록 삼로 가상에서 주막질을 해먹을 망정 그런 말분(末分)의 여자는 아닙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길가에서 오고 가는 사람을 많이 보는 관계로 남의 기색을 대강 살필 줄 알아서 전날에 당신의 얼굴을 살펴 본 즉 천하의 큰 명인(名人)을 낳을 기상이 있어서 그런 귀한 사람을 한번 낳아볼까 하는 욕심에서 요전에는 여자로서 부끄러움과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그런 말씀을 하였으나 지금은 벌써 당신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잉태되어 있사온데 내가 공연히 당신에게 정조만 더럽힐 필요가 있겠읍니까.』

하고 딱 잘라서 거절하면서 또 말하되

『그러나 한 가지 아까운 일은 그 아이가 앞으로 출생할 때에 반듯이 인신(寅時)에 낳게 되므로 다섯살 밖에 안 되어서 호환(虎患)에 죽게 될 터이니 그것이 걱정이 올시다.』

하니 원수는 그제야 그 여자가 보통의 여자가 아닌줄 알고 깜짝 놀라며 오늘날까지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고 다시 그 아들이 어떻게 하면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처음에 아무 말도 없더니 원수가 하도 지성스럽게 물으니까 그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면서

『속담에 말하기를 적덕(積德)한 사람의 자손은 담장(墻[장]) 밑에도 서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당신도 오늘부터라도 덕만 많이 쌓아 올린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런데 덕을 쌓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남의 생명을 천 명 가량 살려야 하겠는데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사람의 대신으로 즉 남의 집 신주(神主)가 되어 대대로 자손계승(子孫繼承)을 시키는 밤나무를 천 주(千株)만 심으면 그 화를 면할 수 있는데 그것도 특별히 주의하여 그 아이가 다섯 살 되는 ○월 ○일에 그 아이를 절대로 밖에 내보내지 말고 방속에다 깊이 숨기고, 또 늙은 중이 와서 그 아이를 보자 하거던 또 절대로 면회를 시키지 말고, 나도 많은 덕을 쌓은 사람인즉 내 아들은 함부로 잡아 가지 못한다고 그 밤나무를 보이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니 원수는 그의 말에 다시금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서울 가던 일도 중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부인에게 전후 사연을 말하고 그때부터 그 집 근처에다 밤나무를 심기를 힘써서 불과 일년에 약 천주가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십이월 이십 육일 인시(中宗三十年丙申[중종삼십년병신])에 과연 신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곧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대학자요 대 정치가인 이율곡 선생(李栗谷先生)이었다. 원수는 그의 낳은 때가 그 여자의 말과 같이 호랑이 때(寅時[인시])인데 더욱 놀라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밤나무를 키우는데 주의를 하였다. 율곡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모월 모일이었다.

원수 부부는 그 여자의 말과 같이 그날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여 첫 새벽부터 율곡을 안방 한 구석에다 깊이 깊이 가두어 두고 방문까지 잔뜩 걸어닫은 뒤에 그 동네에 있는 젊은 청년들을 모아다가 특별히 지키게 하고 원수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사랑에 앉아서 향을 피우고 주역(周易)을 낭독하면서 그 시간이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아니 있었더니 과연 백발이 성성한 늙은 중(僧[승]) 하나가 갈포장삼에 굴갓을 쓰고 대문 밖에 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 마하살 무상심심 미묘법 백천만 겁난재위………』

하고 염불을 하며 동냥을 청하였다.

대문을 지미고 있던 하인은

『안에는 아무도 안 계시니 사랑으로 가보시오.』

하고 말하였더니 그 노승은 다시 사랑으로 와서 원수에게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며 자기는 금강산 유점사(金剛山楡站寺) 중으로 시주를 받으러 왔다 하며 또

『주인 아기는 어디 갔읍니까?』

하고 묻는다.

원수는 그 중의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치며 호령을 하되

『네가 어찌 나를 속이느냐. 나도 적덕을 많이 하였는데 어찌하여 내 자식을 해치려고 하느냐. 내 자식은 감히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니 그 노승은 조금도 무서워 하는 기색이 없이 또 말하되

『댁에서 무슨 적덕을 하였오?』

하고 반문을 하였다.

원수는 밤나무 천주 심은 것을 말하였더니 노승은 조금도 곧이 듣지 아니 하므로 최후에는 원수가 그 노승을 데리고 집 뒷산으로 가서 그 밤 나무를 보였더니 노승은 또 수효가 과연 맞었는가 하나하나 세어 보자고 하면서 원수와 같이 다시 그 나무를 세게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마흔………백 이백 삼백 사백…… 이렇게 세어서 구백 아흔 아홉까지는 수가 틀림없이 맞았으나 천째 되는 한 나무가 마침 소(牛[우])를 매었던 까닭으로 소에게 촉상(觸傷)이 되어 말라 죽고 수에 차지 못하였다.

그 노승은 돌연 변색을 하고 원수를 돌아보며 책망을 하되 당신같은 정직한 사람도 거짓말을 하여 천명(天命)을 거역하려느냐 하고 아이를 또 급히 내놓으라고 하니 그 때에는 아무리 대담한 원수라도 용기가 없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상하게도 별안간에 어떤 나무 하나가 말을 하며

『나도 밤나무!』

하며 나서서 천주를 채우니 노승도 그제서는 어찌 할 수 없었던지 크게 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다시 큰 호랑이로 화해서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율곡 선생도 그 화를 면하고 잘 자라서 유명한 분이 되었다.

강릉에는 지금도 밤나무와 비슷한 『나도 밤나무』란 나무가 있는데 그때에 그 나무가 이율곡 선생을 살려냈기 때문에 일명을 활인수(活人樹)라고도 하고, 지금 강릉에 있는 율곡 선생의 구기(舊基)인 오죽헌(烏竹軒) 뒤에 있는 수많은 밤나무들은 그때 심근 것이라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