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명복 홍계관
- 명복(名卜) 홍계관(洪繼寬)
서울의 거리를 다니며 보면 돌파리 장님(盲者[맹자])들이 잔돈푼을 벌려고 앞도 못보는 두 눈을 휘번덕거리고 기다란 지팽이로 길을 더듬어 가며 있는 목청을 다내서
『문수(問數)에……응 문수에……응……』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르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돌아 다닌다. 그 몹쓸놈의 서울거리의 경박한 아이들은 장님의 그 불쌍한 것도 알지 못하고 무슨 구경이나 난듯이 장님의 뒤를 쫓아 다니며
『저 장님 보아라, 저 장님 보아라 눈알이 머루(野葡萄[야포도])알맹이 같구나!』
하고 저희끼리 낄낄대고 웃다가 그 중에도 짓궂은 아이가
『여보 장님 ── 불알이 몇쪽이요.』
하고 조롱을 하면 장님은 당장에 골을 벌컥 내며 성난 목소리로
『에 ─ 요 나를 닮을 망할 자식, 내 불알은 너의 어멈더러 물어 보아라.』
하고 악담과 욕을 팟다발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옛말이지 요새는 아이들도 약을대로 약아져서 욕도 미리 예방까지 하여 가지고
『여보 장님, 나더러 욕하면 개자식이지!』
하면 그 욕잘하기로 유명한 장님들도 그만 기가 막혀서 욕도 못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픽』 소리를 치며 웃고 간다. 그리고 여자들은 웬일인지 모르지만 자기네가 손톱만한 무슨 일이 있어도 전당질을 하여서라도 장님 집을 일부러 찾아 가고, 특별히 정초 같은 때에는 자기 친정 부모에게 세배는 못갈지언정 장님의 집에 가서 일년 신수는 꼭 보아야만 견디지마는, 이대로 나들이를 가려고 일껏 별르고 또 별러서 갖은 호사와 갖은 모양을 다 내고 문밖을 나서서 길을 걷다가도 거리에서 장님만 만나면 아주 질색을 하고 그날 재수와 신수가 좋지 못하다고 도로 집으로 간다. 그중에서 조금 지각있는 여자는 그저 속으로만 좋지 않게 생각하고 그대로 가지마는 좀 입이 빠른 여자들은
『오늘도 볼일 다 보았군 ── 재수 음 붙었는데……….』
하고 돌아서면 귀가 밝은 장님은 어느 결에 벌써 알아듣고
『에 ─ 기 망할년 나때문에 ○○질을 못하나………….』
하고 고약한 욕을 한바가지 내부친다. 궤변은 한 궤변이지마는 옛날에 공자님(孔子[공자])이 길을 가다가 장님을 보면 반드시 몸을 굽혔다 하였으니 공자도 아마 여자들 모양으로 장님을 보면 재수가 없을가 하여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굽혔는지도 알 수 없다 (사실은 공자님께서 장님을 불쌍히 여겨서 참아 눈을 바로 뜨시고는 못 보셨다는 것이다.)
장님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우리 나라에서 역대 장님중에서 제일가는 명복(名卜)은 아마 세조때(世祖時[세조시])의 홍계관(洪繼寬)일 것이다.
그 장님은 어찌나 점을 잘하였던지 무슨 일이나 백발백중으로 다 마쳤는데 특별히 사람의 신수점을 하는데는 더욱 신통하여 일생의 길흉(吉凶) 화복(禍福)을 그야말로 척척 맞춰내니 누구나 다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어떤 명재상(名宰相) 한 분이 그와 한 동리에 살았는데 일찌기 소년 시대에 그에게 평생 신수점을 청하였더니 그는 한참 묵상을 하다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하(되)
『참 이상도 하다. 그대의 신수로 말하면 장래에 이름이 천하에 떨치고 수 부귀를 겸전한 사람이나, 살인(殺人)할 액이 끼어서 남을 죽이고 그 죄로 대살이 되는지 그렇지 않으면 종신 폐고(廢錮)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게 되겠으니 그것이 매우 가석한 일이오.』
라고 하였다.
그 소년은 그말을 듣고 낙심천만하여 다시 재삼 간청하되
『그 화를 회피할 방법이 없오?』
하였더니 계관은 머리를 설설 흔들며
『내 수단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오.』
고 하였다.
그 소년은 최후에 성이 벌컥 나서 소리를 지르며 말하되
『그러면 그대의 점한다는 것이 모두가 허망한 짓이 아니냐, 내가 부귀공명에 장수까지 한다고 하면서 또 살인을 하고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신폐고가 되어 죽는 것보다 못지않게 한평생 고생을 하겠다 하니 그런 모순되는 일이 어디 있오?』
하니 홍계관도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으며 다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또 말하되
『방법이 있기는 꼭 한가지가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능히 실행할지 그것이 문제요. 그 방법은 별것이 아니라 참을 인자(忍字) 한자만 꼭 주의 하면 되는 것이니 오늘부터라도 당신의 사는 집에다 안팎을 물론하고 기둥과 천정 방문 위 부엌 변소등 어떠한 곳이든지 사람의 눈이 닿을만한 곳이면 모두 참을 인 자를 써 붙혀 두고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그것을 보고 그저 참기만 하면 자연 그 화를 면하고 따라서 타고나온 복을 완전하게 누리게 될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 소년도 홍계관이 보통의 점쟁이 같으면 그 말을 심상하게 들었겠지만 계관은 원래 명복인 까닭에 그의 말을 꼭 신용하고 그 길로 집에 돌아가서 웬만한 곳이면 모두 참을 인자를 써 붙이고 출입 할때와 그의 기거동정 할 때마다 그 글자를 보고 심중히 생각을 하니 자연 그것이 한 습관이 되어서 매사를 잘 참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장성하여 장가를 든 후였다. 한번은 한참 더운 여름철에 그가 마침 외출을 하였다가 술이 얼근하게 취하여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안마당에 들어서며 은은한 달빛에 얼른 본즉 자기의 부인이 대청에서 곤히 잠이 들어 자는데 대담하게도 어떤 상투짠 젊은 남자와 같이 한 홑이불 속에서 얼굴을 나란히 맞대고 누웠다. 그는 취중에 그런 망측한 꼴을 보니 여간 분하지 않았다. 당장에 그 연놈을 한칼로 찔러 죽이겠다는 악독한 마음이 생겨서 아무말도 하지않고 즉시 사랑으로 나아가서 웃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식칼(食刀[식도])을 찾아 들었다.
그때에 그의 눈에는 부엌 벽에 써붙인 참을 인자가 얼른 보이며 다년간 행습할 참으라 하는 생각이 부지중 또 나오게 되었다.
그는 한번 멈추고 가만히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또 이렇게 생각이 났다.
『세상에 참는 것도 분수가 있지, 어떤 사내놈이 제 계집이 다른 간부놈을 끼고 한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그것까지 참는 일이야 어디 있으랴.』
하고 다시 분한 마음이 격동되어 시퍼런 칼날을 달아래 번쩍이며 마루 위로 뛰어 올랐다. 거기에 누은 두 남녀의 생명은 바람 앞에 등잔불 같이 위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루 벽과 대청 기둥에 곳곳이 써 붙인 무수한 참을인자가 또 그의 눈에 얼른 보이며 속에서 부지중 참아라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칼을 들고 머뭇머뭇 하는중에 자기의 아내가 잠을 깨어 얼른 일어나며
『아이구 어느결에 오셨읍니까? 몸이 곤해서 잠간 눕는다는 것이 아주 잠이 깊이 들었읍니다.』
하고 또 발로 거기에 누웠는 상투 짠 사람을 건드리며
『이어 그만 일어나거라, 주인 어른 오셨다.』
하자 누웠던 상투 짠 사람이 또한 얼른 일어나며
『아이구 지금 오셨읍니까!』
하는데 모두 기색과 행동이 천연스러웠다.
그는 손에 칼을 든채로 자세히 본즉 그 상투짠 사람은 다른 남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의 처제 되는 사람인데 원래 자기가 외출한 동안에 자기의 집에 다니러 왔다가 일기가 너무 덥고 머리에 땀이 나서 냄새가 나니까 목물도 하고 머리를 감아 빗은 후 그것이 마르라고 북상투를 틀고 자기 형과 같이 누워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전까지 머리끝까지 올랐던 분한 마음이 어느 결에 봄눈같이 사라져 없어지고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과 또 조금만 참지 못하였더라면 애매한 사람을 한칼에 둘씩이나 죽였을 생각을 하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잔등에 찬 땀이 흘렀다.
손에 들었던 칼을 그만 땅에다 던지고 크게 찬탄하여 말하되
『홍계관은 참으로 천하 명복이다.』
하였다.
그 뒤 그는 과연 부귀영화를 하고 수가 또한 고령에 달하여 죽을 때까지도 자손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에 훈신(勳臣)으로 영의정까지 한 홍윤성(洪允成)은 본래 호서사람(湖西人[호서인])으로 소시때에 낙척불우하여 서울로 구사를 하러 왔다가 홍계관이 천하의 명복관이란 말을 듣고 찾아가서 점을 하였더니 계관은 한참동안 점을 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하고 꿇어 앉아서 말하되
『당신은 참으로 행복스러운 양반이올시다. 불과 십년 이내에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되는 일국의 영의정을 할것이요, 따라서 부자가 될것은 물론이고 수도 또한 상수를 하겠읍니다. 그런데 내가 한가지 복청할 것이 있으니 부디 잊지 말으시고 잘 기억하셨다가 뒷날에 그대로 들어 주십시요. 모년 모월 모일에 당신이 형판(刑判)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때에 내 자식이 큰 죄를 짓고 당신의 손에 사형을 받게 될터이니 나를 생각 하시고 부디 살려 주십시요.』
하고 금시 그 아들을 불러서 윤성에게 인사를 시키고 말하되
『모년 모월 모일에 네가 죽을 죄를 지고 이 양반에게 형문(刑問)을 당하게 되거던 아무말도 말고 그저 저는 홍모의 아들이라고 하여라.』
하니 윤성이 그때에 듣기에는 하도 허망한 것 같아서 그냥 실 없은 말로만 듣고 웃고만 있었다.
그 뒤 과연 십년이 못되어 윤성은 세조를 추대한 공으로 훈신(勳臣)이 되어 형조판서를 하였는데 하루는 죄수를 문초하는 중에 그중 한 죄수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되
『저는 명복 홍계관의 아들이 올시다.』
라고 하니 윤성이 지난날에 홍계관의 부탁하던 말이 생각이 나서 홍계관의 점이 귀신 같이 맞추는 것을 크게 칭찬하며 그만 그 아들을 놓아 주었다.
홍계관은 어느 날 자기의 신수점을 친즉 모년 모월 모일에 형사(刑死)하게 되겠는데 만일 토색성을 가진 사람으로 형관이 될 사람에게 미리 불망수기(不忘手記)를 받아 두게 되면 살아날 수 있겠다는 점단(占斷)을 얻고 또 토색성이면 즉 중앙색 성으로 바로 황씨(黃氏)인것 까지도 해득하여 그날부터 황씨 중에 장래 형조판서가 될만한 인물을 널리 물색하였다. 혹은 자기 집에 점 하러 오는 사람중에 황씨가 있으면 특별히 주의하여 점도 하여보고 또는 자진하여 남북촌으로 돌아다니며 황씨의 집은 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도무지 장래에 형조판서할 인물이 없어서 퍽 걱정을 하고 있었더니 하루는 황희 황정승(黃喜黃政丞)이 여러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서 그의 여러 아들의 명수(命數)를 점쳐 보았다. 그의 맏아들 보신(保身)으로부터 둘째 아들 치신(致身)까지 보고 셋째 아들 수신(守身)을 보다가 별안간 희색이 만면하며 속으로 혼자 생각하되 인제는 내가 살았구나 하고 다시 꿇어 앉아서 수신에게 청하되
『당신이 모년 모월에 반드시 형조판서를 하실 터이니 그때에 소맹(小盲)이 무슨 죄를 짓더라도 살려 주겠다는 각서(覺書) 한 장을 이 자리에서 써 주십시요.』
하며 지성껏 간청하였다.
황씨의 여러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고 껄껄 크게 웃으며 말하되
『세상에서 너를 명복이라 하더니 지금 본즉 한 미친 사람이 분명하구나, 우리 삼형제가 모두 재질이 둔한 탓으로 노 대감께서 우리 삼형제에게 모두 과거를 보지 말라고 명하셔서 과거를 보지 않게 되었으니 폐과한 사람으로 어찌 높은 조관벼슬을 할 수 있으랴, 또 만약에 그런 고관이 될지라도 재주와 인품이 내 자신에 형판은 될 수 없고 또 형판이 된다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을 무법하게 죽일 수 없을 것인즉 죄가 있다면 상감께서도 국법을 굽혀서 억지로 살리실 수 없거든 일개 형판이 어찌 제멋대로 죽일 죄인을 살릴 수가 있겠느냐, 네 말은 그저 일종의 광언(狂言)에 불과 한것이니 다시는 아예 그런 말을 하지 말어라.』
고 하였다.
그래도 계관은 재삼 간청을 하니 황정승까지 그 말을 듣고 수신(守身)을 책망하며 말하되
『그것이 맞고 아니 맞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서 그처럼 간청을 하는데 아니 들어 준다는 것은 덕(德)있는 사람의 할일이 아니니 헛일삼아 표를 한장 써 주어라.』
하니 수신도 그 아버지 말씀에는 어찌 거역할 수가 없어서 기어코 각서를 한장 써 주었다.
그 뒤에 계관의 명성이 전국에 퍼져서 경향을 물론하고 남녀노소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씩 그 집의 문이 메이도록 머리들을 싸고 달려드니 그 소문이 궁중에까지 자자하게 들려서 최후에는 세조대왕까지 아시게 되었다. 세조께서는 원래 무당이나 복술이라면 좋아 아니하셔서 그 소문을 들으시고 당장에 명령을 내리셔서 어전으로 잡아 들이게 하셨다.
보통의 점쟁이같으면 불문곡직하고 당장에 물고를 올리게 하셨겠지만 그래도 일반이 홍계관은 천하 명복이라고 떠드니 한번 시험을 하여 보아서 과연 신통하게 맞추면 용서하여 놓아 주고 여의치 않으면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계관이 어전으로 불려오자 세조께서는 미리 주머니 속에다 쥐 한마리를 잡아 넣어 두셨다가 그 주머니를 내어 놓으시며 홍계관에게 물으시되
『이 주머니 속에 무슨 물건이 들어 있고 또 그 수효는 몇이나 되는지 알아 맞춰라.』
고 하명하셨다. 계관은 산통을 꺼내들고 두 눈을 휘번덕거리며
『복이 축왈 천하 언재시며 지하 인재시리요마는 고지즉 응하니 부대 인자는 이천지로 합기덕 하고 여일월로 합기명 하고 여귀신으로 합기 길흉 하나니……….』
하고 한참 축원을 한후 점을 치더니 공손히 여쭈옵되
『그 물건은 새도 아니옵고 버러지도 아니온데 항상 구멍으로만 출입을 하고 도적질을 잘 하는 것인즉 쥐(鼠[서])가 분명 하옵고 수효는 세 마리 올시다.』
라 하였다.
세조께서는 계관이 쥐를 알아 맞춘 것은 용하게 생각 하셨으나 그 수효가 맞지 않는 것을 보시고 일부러 트집을 잡으셔서 계관을 죽이시려고
『네 이놈, 분명히 쥐가 세 마리란 말이냐, 만일 그 수효가 맞지 않는다면 비록 죽여도 원망하지 않지…….』
하셨더니 계관은 장담하고 여쭈어 가로되
『그것이 만일 맞지 않사오면 목을 베신다 하옵셔도 후회치는 않겠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세조께서는 여러 신하들이 보는데서 주머니를 열어 보게 하시니 쥐(鼠[서])는 틀림없는 주나 수효가 세 마리가 아니고 단 한 마리였다. 세조께서는 당장에 책상을 치시며 계관을 꾸짖으시되
『요망 허탄한 놈이 공연히 백성들을 속이고 또 여러 대신(大臣)까지 속이는구나, 천하 고약한 놈 같으니…….』
하시며 즉각에 형조(刑曹)로 내려서 처참(處斬)하라 하셨다.
위기(危機)일발에 임한 계관은 잡혀가는 도중에 가만히 생각한즉 그날이 바로 전날에 점쳐 알았던 자기의 형사일(刑死日)이므로 형졸에게
『지금 형판 대감이 누구시냐?』
고 물었더니 형졸은
『황수신(黃受身)입니다.』고 대답을 하므로 혼자 묵상을 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내 점이 조금이라도 틀릴 까닭이 있나!』
하고 주머니 속에 있는 부시쌈지(煫石[수석]을 넣어두는 것)를 부스럭 부스럭 뒤져서 지난날 황수신에게 받아 두었던 각서(覺書)를 꺼내 들고 있다가 황수신이 문초할 때에 내 보이며
『전날에 써 주신 각서와 같이 모든 것을 이행하여 주십시요.』
하니 황수진도 그 일이 벌써 오랜 일이었기 때문에 전연 잊어 버리고 있었다가 그 각서를 보고는 크게 놀라며 탄식하되
『계관은 과연 명복이로구나!』
하고 즉시 대궐에 들어가 상감님을 뵈옵고 홍계관을 못 죽이는 이유를 여쭙고 난 뒤에
『그 쥐를 다시 한번 해부하여 그 쥐 뱃속에 새끼가 있나 없나 조사하여 보시길 바라옵나이다.』
하고 청하니 세조께서도 그럴듯이 생각하시고 즉시
『그 쥐를 해부하여 보아라.』
하시니 과연 그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두 마리가 있었다.
세조도 그것을 보시고는 도리어 신복(神卜)이라 칭찬하시고 계관을 무사히 석방케 하시며 그때부터 황수신이 모든 일에 주밀하고 경솔치 않은 것을 알으시고 오량오량 그를 중용(重用)하여 그후 정승까지 시키셨다. (일설(一說)에는 계관이 그때 잡혀 죽어서 당현(堂峴)을 아차(呀嗟) 고개로 개칭(改稱)한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계관은 또 상진상정승(尙震尙政丞)의 신수점을 하였는데 일생의 길흉 화복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맞았으나 오직 죽는다던 년월이 맞지 않으므로 상정승이 뒷날에 홍계관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계관은 대답하되
『옛날에도 적덕(積德)을 하여 수명을 더 연장하는 일이 있었은즉 대감께서도 아마 무슨 적덕을 하신 것이올시다.』
라고 하였다.
상정승은 다시 말하되
『내가 무슨 큰 적덕을 한 것은 없으나 일찌기 수찬(修撰)벼슬로 있을 때에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본즉 노상에 웬 붉은 보재기가 하나 떨어저 있으므로 그것을 집어 펴서 본즉 그안에는 광채가 찬란한 순금 술잔이 한 쌍 있으므로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하고 나무 가지에다 걸어 두고 주인이 찾아 오기를 기다렸더니 마침 별감(別監)하나가 얼굴이 죽을 상이 되어 가지고 헐레 벌덕거리며 찾아와서 말하되
『저는 대전수라간별감(大殿水刺間別監)이온데 마침 자식의 혼사가 있어서 황송한 일이나마 어배(御盃) 한쌍을 비밀히 갖다가 쓰고 도로 갔다 둘려고 가던 차에 마침 부주의하여 아주 잃어 버렸사온즉 그것이 발각되면 저는 별 수 없이 사형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슬피 우므로 내가 그것을 주어서 무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하니 홍계관이 말하되
『그것이 능히 수명을 연장시킬만한 은덕이 올시다.』
고 하니 상정승은 그후 과연 십오년을 더 살다가 칠십 이세(七十二歲)의 고령으로 돌아가고 홍계관은 원체 명복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그가 살던 동명(洞名)까지도 홍계관리(洪繼寬里)라고 불러 내려왔었다 한다.
상진은 성종 이십사년 계축(成宗二十四年癸丑)에 나서 명종십구년 갑자(明宗十九年甲子)에 돌아가니 홍계관이 만일 세조 때에 잡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상정승(尙政丞)의 어렸을 때에 홍계관이 그를 볼 수가 있었으나 죽기 전 십오년까지 홍계관이 있었다는 것은 좀 의문일 것이다. 그런데 상진과 홍계관에 관한 일은 그의 행장(行狀)에 명기(明記) 되었으므로 아직 그대로 이야기를 쓰고 뒷날 다시 널리 참고(參考)를 하여 그 의제(疑題)을 풀어 볼가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