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절처 봉생
- 절처봉생(絶處逢生)
숙종대왕(肅宗大王) 즉위 하신 후 십여년에 경상도 안동부원면 운학동(慶尙道安東府院面雲鶴洞)에 한 사람이 있으되 송은 정(鄭)이오 이름은 박옥(彴玉)이다. 나이 사십에 이르되 슬하에 일점 혈육 없이 부인 유씨로 더불어 자탄 왈 지금껏 자식이 없음은 선영행화 절로 끊어질 터이오니 인자된 도리에 불효 막심 하다 하고 주야로 슬퍼하더니 하늘로부터 한 선관이 백학을 타고 부인 전에 일개 옥동(玉童)을 주고 완연히 올라 가거늘 놀래어 깨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부인이 마음에 기꺼이 여기어 가군을 청하여 몽사(夢事)를 의논 하더니 과연 그날부터 태기 있어 십삭 만에 순산 생남하니 공중으로 한 선녀가 내려와 옥병(玉瓶)으로서 향수를 기우려 옥동을 씻겨 누인 후 부인 전에 이르되
『이 아이 이름은 수정(壽政)이라, 일후에 귀히 될 아기오니 잘 길러 영화 보라.』
하고 문득 간데 없거늘 부인 양위 전후 몽사와 신기함을 못내 기뻐하였다.
아기 점점 자라매 용모가 비범하여 그 양명한 골격과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인간 인물로 보이지 않더라.
호사다마(好事多魔)요 흥진비래(興盡悲來)로다. 가군(家君)이 우연 득병하여 백약이 무효로다. 인하여 세상을 버리니 부인이 수정을 안고 애통(哀痛)하여 마지 않다가 초종을 대강 예로 치른 후 다만 수정을 데리고 세월을 보내더니 수정이 나이 八[팔]세에 이르매 영민총혜(英敏聰慧)하여 청연의 문장과 두목지풍채(杜牧之風彩)를 본받어 문사간에 배운지라 나이 十六[십육]세에 이르러는 시서백가서(詩書百家書)를 무불통지하고 글씨는 이적선(李適仙) 복황씨(伏皇氏)와 소동파 적벽부(蘇東坡赤壁賦)를 압도(壓倒)하게 지었더라. 이때 나라에서 과거를 보여 문필과 인재(人材)를 간택하신다는 기별을 듣고 모친께 여짜오대 과거 보기를 청하니 부인이 가로대
『늦게야 너를 낳어 보옥(寶玉)같이 여기더니 가운이 불행하여 너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이별하니 밖에 응문지도 없고, 이제 모자 서로 의지하였다가 네가 나가서 진작 오지 못하면 내 몸이 의지할 곳이 없기로 네가 나가서 놀기만 해도 대문에 의지하여 바라더니 네 나이 어리고 길 잇수가 천리라 이 원로(遠路) 어찌가며 간 후에 늙은 어미 누구를 의지하여 세월을 보내리요. 옛말에 하였으되 인군 섬길 날이 많고 부모 섬길 날이 적다 하였으니 성취한 후 용문(龍門)에 올라 문호(門戶)를 빛냄이 늦지 아니하니 망녕된 말을 말라.』
하니 수정이 다시 꿇어앉으며
『장부 세상에 처하며 시절이 어두우면 자취를 산중에 감추어 티끌을 멀리 하고, 세상이 밝으오면 몸을 구원에 이르도록 우으로 인군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건지오면 옳을지라 좋은 때가 두 번 오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소자의 나이 이팔에 당하였아오니 군자의 입신양명할 때라 이때를 잃삽고 항상 산중에 있사오면 세상 사람이 수정이 세상에 났던 줄 뉘 아오리까. 널리 생각하시와 만류치 마옵소서.』
굳이 여쭈오니 부인이 그 말 듣고 영웅의 말이라 존이 말리지 못할 줄 알고 약간 가산을 팔아 행중노자를 쓰게하고 길을 발행하새 부인이 가로되
『일찍 주인을 얻어들고 느직히 발행하여 불측지환(不測之患)을 당치 아니케 하라. 들으니 경성선비 임협방탕(任俠放蕩)하여 임의로 사람을 상해한다 하니 부디 조심하여 주인을 진실한 사람을 정하고 수토(水土)가 다르니 부디 음식을 조심하여 먹으며, 어린 자식을 천리밖에 보내는 어미 마음 생각하여 부디 속히 돌아와 모자 서로 보게 하라.』
하고 눈에 눈물이 흐르더라.
수정이 모친께 하직하고 이웃 선비와 같이 길을 떠나가니 과거 날은 七[칠], 八[팔]일이 격하였는지라 객점에 두류할새 궁금한 회포를 이기지 못하여 동행과 한가지로 장안 풍경을 두루 구경 하다가 삼청동(三淸洞)에 이르니 날이 저물거늘 주인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누각이 있고 방(榜)이 붙어 있는데 문수(問數)할 이 있거던 오량전(五兩錢)을 가지고 올라오라 하였거늘 낭중을 보니 다만 두 냥이 남었거늘 부족한 수를 동행에게 취하여 가지고 동행더러
『내 이곳에 다녀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고 주인을 부르며 들어가니 그 집이 극히 정애하고 판수 일인이 의연히 앉었으니 용모 가장 단정하고 신수 엄숙한지라, 수정이 나아가 절하고 문수하러 온 연고를 말하니, 판수 분향재배하고 산통을 흔들다가 눈을 번뜻 처 뜨며 두세 번 탄식하여 말을 아니하거늘, 수정이 수상한 모양을 보고 일어나 절하고
『소생이 점하옵기는 평생길흉(平生吉凶)을 알고저 함이라 바로 말씀하와 신수를 알고저 하옵니다.』
하니 판수 침음 양구에
『이번 과거에 장원은 하려니와 세 번 죽을 액(厄)이 있으니 비록 천만번 살랴한들 어찌 이수를 면하리오.』
한다. 수정이 이말 듣고 간담이 떨어져 얼굴이 흙빛이 되어 울며 판수에게
『소생이 안동부원면에 사옵더니 팔자가 박하여 五[오]세에 부친상고를 당하옵고 노모를 모시고 일시도 슬하를 떠나지 아니하더니 외람히 금년 참방할 마음을 두어 모친의 만류함을 듣지 아니하고 경사에 왔삽다가 다행히 존공을 만나 신수를 묻삽더니 말씀하심을 듣자오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지라 원컨데 존공(尊公)은 소동(小童)을 기특히 여기시어 도액지술(度厄之術)을 가르쳐 주시압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판수 왈
『세상 사람의 수액이 하늘에 달렸으니 만일 도액하면 어찌 신수가 길치 아니한 사람이 있으리오. 그대 정상이 가긍하여 할 일 없어 일르노라.』
하거늘 수정이 체읍 왈
『무궁하온 덕택을 베푸시옵시면 제생지은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하니 판수 슬픔을 먹음고 책상을 열고 백지 한장과 누른 책을 내어놓고 누른 대(黃竹) 하나를 그려 주며 왈
『그래 지극히 간청하기로 이것을 주거니와 첫 번 수는 아무리 하여도 면하기 어렵고, 천만요행으로 두 번 살아나서 세 번 죽을 때 당하거던 이것을 내어놓으면 혹 구할 사람이 있을까 하거니와 진소위 귀를 막고 방울을 도적함 같으니 어찌 믿으리오.』
하거늘 수정이 눈물을 거두고 판수의 존호를 물은대, 대답지 아니하고 위엄이 엄숙하거늘 수정이 다시 묻지 못하고 하직하고 문밖에 썩 나서니 이때 날이 저물어 남산에 봉화 들고 은은한 인경소리 바람을 쫓아 들리는지라 범야가 무서워 창황히 주인집으로 갈 새, 한곳에 당도하니 키 큰 창두 수십 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일변 입을 막고 일변 사지를 동여 고자에 앉히고 풍우 같이 닫더니 한곳에 다달아 교자를 놓고 내리라 하거늘 수정이 정신을 진정하여 좌우를 살펴보니, 어느 재상가 댁 문밖이라. 문 안을 살펴보니 연당 수 칸이 정쇄하고 등촉이 휘황한지라. 종놈들이 들어오라 하거늘 수정이
『이 집이 재상가 댁이라 내 본래 이집과 친척의 분에 없고 안에서 청키는 어쩐 연고요.』
말하니 종놈들이 주먹을 겨누며
『네 사생이 목전에 있거늘 우리 시키는 대로 할 것이어늘, 당돌히 방색하니 네가 죽기를 재촉하느냐.』
하거늘 수정이 할일없어 연당으로 들어가니 향취 진동하는데, 대병풍을 둘러치고 화류 서안에 비취금침을 수대로 내려놓고 모든 치장을 이루 형용하여 말로 다 못하니 마치 신방모양이더라. 방안에 혼자 앉아 곡절을 모르더니 이윽고 시비 수십인이 신부를 호위하여 방안으로 들어오거늘 수정이 마음에 창황하여 몸을 번드쳐 뒤로 앉었더니, 처자(處子) 가만히 추파를 들어 수정을 보내 용모 영풍하고 황홀한 태도 기상에 들어났으니 짐짓 세상에 기이한 남자라 마음에 애연하여 일어나 절하고 아미를 숙이고 가로되
『규중여자 되어 남자를 대하여 말씀하옴이 민망하오나, 수재(秀才) 불행히 불측한 함정에 들어오매 마음에 애연한 말씀을 먼저 하오니 너무 원치 마옵소서.』
하거늘 수정이 그제야 사지(死地)에 들어온 줄 알고 일어나 읍하고 가로되
『무삼 연고로 이곳에 인도하여 계시나이까?』
처자 가로되
『첩의 명도 기박하여 한낱 동생이 없삽고 다만 저뿐이라 부모께옵서 극히 사랑하사 문복(問卜) 하는 사람이 오면 첩의 신수길흉을 물은즉 이르되 초년에 상부할 괘라 하여 부모께서 주야로 근심하사 도액 방법을 물은즉 성례(成禮) 전의 남자를 데려다가 부부의 모양을 행한 후에 즉시 죽이면 그 수를 도액하리라 하기로 오늘 그 계교를 실시하여 노복을 사면으로 보내더니 그대 신수 불행하여 그대 같은 기남자를 환을 당하게 하니 어찌 애닲지 아니하리오.』
하거늘 수정이 앙천탄식하여 가로되
『내 그대 낭자를 원할 바 아니라 천생 신수를 한할 터로되 내가 재상가 자제 아니라 하방의 미천한 사람이오 편모를 모시어 일시도 떠나지 못하더니 모친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외람히 국령에 참여코자 하여 경사에 왔삽다가 불의지환을 당하오니 생사간에 내 명이오나, 한편 모는 어디 의지하시리오. 죽엄을 의논할진대 요순 공맹 같으신 성인도 죽기를 면치 못하시고, 맹분 오학 같은 용력으로도 원생할 길 없거니와 생같은 팔자 기박하여 이 환을 당하거니와 낭자는 하늘이 정하신 팔자라 조만(早晩)이 없으니 원컨대 고향에 돌아가 모친께 영결하고 즉시 돌아와 죽어도 원이 없을까 하나이다.』
하거늘 처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첩의 마음대로 할 양이면 첩의 몸이 죽어 한 목숨을 도모하련마는 부모가 하시는 일이라 백번 생각하여도 할 일 없으니 마음만 답답할 다름이로소이다.』
한다. 수정이 그제야 죽기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앙천탄식하여 필묵을 청하여 영결 몇 귀를 지어 벽상에 붙이게 하였다. 그 글에 하였으되
- 한심하고 가련하다 정수정의 몸이로다
- 이팔청춘 소년으로 황천객이 웬일인고
- 천황지황인황 후로 이런 팔자 또 있는가
- 삼춘 화류 소년들아 이내 한 몸 살려다고
- 인간七十[칠십] 못 다 살고 죽은 인생 불쌍하다
- 十六[십육]년 겨우 되어 죽단 말이 웬 일인고
- 나의 신세 생각하니 불쌍하고가련하다
- 초당삼경 심심야에 나 죽는 줄 뉘 알소냐
- 춘삼월 지난 꽃이 엄동설한 당했구나
- 방울방울 무리 맺어 춘풍만나 호시절에
- 난데없는 불이 붙어 꽃봉오리 타는도다
- 이내 몸 출생 후에 이팔청춘 되어 오니
- 논어공맹 읽어내어 입신양명 하잿더니
- 조물이 시기하여 함정에 들었도다
- 밥이 없어 죽을소냐 옷이 없어 죽을소냐
- 병이 들어 죽을소냐 죄가 있어 죽을소냐
- 밥도 있고 옷도 있고 병도 없고 죄도 없네
- 무죄 인생 죽게 되니 곡절 몰라 답답하다
- 천리 왕도에 와서 남의 명에 죽기는
- 아무래도 원통하니 나를 살려 주옵소서
- 저기가는 저 마부야 그 말 잠간 빌리어라
- 이내 간장 맺힌 설음 짝을 지어 실어다가
- 청청소에 활활 풀소 여기가는 이 마부야
- 그 말 잠간 빌릴 손가 이내 혼백 실어다가
- 모친 앞에 놓아 주면 슬피 울고 잠간 보고
- 지황 세계 가련마는 목멱산은 울울하고
- 한강수는 흉흉하고 산은 첩첩 물은 충충
- 갈 길 험로 뉘 모르나 어진 동풍 어려워라
- 내 혼백 무삼 일로 어찌 갈고 애고 답답
- 우리 모친 날 생각고 하는 말씀 보고 지고
- 우리 아들 보고 지고 잘 갔는가 못 갔는가
- 소식조차 돈절하다 늙은 어미 혼자 두고
- 어이 오래 아니 오니 오날 올까 내일 올까
- 날로 앉어 바라다가 가슴 속이 답답하여
- 높은 산상 올라 서서 한양이 어디메오
- 안개는 희미하고 구름은 암암하고
- 오는 행인 가는 행인 무심히 지나간다
- 해는 일락서산하며 황혼이 다다르니
- 한숨 쉬고 돌아와서 등불이나 바라 보고
- 새벽까지 기다리어 달 밝고 서리 찬 밤
- 외기러기 울고 가니 두어 걸음 내달아서
- 사창 밖에 홀로 서서 묻노라 저 홍안아
- 아들 소식 전할 소냐 잘 가더냐 못 가더냐
- 어느 때 오마더냐 저 기러기 대답 없이
- 울고만 가 버리니 무정하다 저 홍안은
- 어찌하여 대답 없나 생각하니 허사로다.
수정이 쓰기를 다한 때 붓을 던지고 양안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니 처자 느낌을 마지 아니하더라. 어언간에 원촌(遠村)에 닭이 울고, 바람 소리 은은하니, 소저(小姐) 옥함을 열고 은자 서되(銀子三升)를 내어주거늘 수정이 사양하여 왈
『죽는 사람이 은자는 하여 무엇 하리오.』
하니 처자 능라옷보를 내어 은자를 싸서 수정의 허리에 둘러주며
『수재 세상 물정을 모르난도다. 길가다 죽은 사람이라도 몸에 재물을 지녔으면 재물을 탐하여 묻어주고 가는 일이 있으니 가저 가면 쓸데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치매 시비 등이 문밖에서 처자 나오기를 청하거늘 양인이 비록 견권지정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소저 붙들고 느껴 이별하고 나가니, 그 뒤로 노복 등 십여인이 수정을 잡아내어 사지를 동이고 입을 막고 교자에 앉히고 살같이 닫더니 층암절벽 상에 한 바위 있으되 그 아래는 천 길이나 한 청청수라 수정을 바위위에 앉히고 동인 채 물에 넣으려 하다가 그 중에 늙은 종이 이르되
『동인 것을 잠간 풀어주어라.』
하니, 여러 놈이 동인 것을 풀더라.
수정이 여러 사람에게 청하여 가로되
『내 평생 좋아하는 담배나 한 대 먹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
하니 여러 놈들이 바쁘다 하며 허락을 아니 하나 늙은 종이 이르되 나라 죄인이라도 술을 먹이거던 이 아이가 무슨 죄로 담배도 못 먹고 죽으리오. 담배 한대 먹으라 하며 늙은 종이 굳이 담배를 담어 주니, 수정이 받아 먹을 새, 종놈 세 놈만 있고 남은 종은 다 내려가며 이르되, 남문 밖의 김부장 집에 볼 일이 있어 거기 다녀올 것이니 이 아해를 죽이고 그리 오라 하거늘, 슬프다 먹는 담배 거의 다 타는지라, 속절없다, 모친을 천리밖에 두고 천길 물속의 어복(魚腹)에 영장하니, 날마다 기다리는 바 모친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하리오. 수정이 먹던 담배 다 타거늘 문득 생각하되 아까 처자 주던 은자를 가졌다가 무엇 하리오 하고 은자를 내어 세 사람을 주어 왈
『이것이 내 집에서 노자 하라 하고 모친이 주시더니, 죽는 사람이 재물 하여 무엇에 쓰리오.』
하고 죽는 사람의 재물이라 더럽다 말고 갖다 쓰라 하고 주니, 세 사람이 받아 가지고 수정을 물에 넣으려 하다가 그 늙은 종이 두 사람더러 이르되
『사람이 세상에 착한 일을 행하면 천지신령이 응함이 있으려니와, 악한 일을 행하면 필연 앙화 있을 것이니, 이 아이 二八[이팔]청춘에 죄없이 죽음이 어찌 불쌍치 아니하리오. 하물며 그 사람의 재물을 받았으니 우리 저 아이 살리고 우리 세 사람이 입 밖에 내지 아니하면 천지신령과 우리 세 사람 밖에 뉘 알리오.』
하니 두 사람이 묵묵히 앉었다가
『장자의 말씀이 유리하외다.』
하고 수정더러
『수재 이 길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르거늘 수정이 이 말 듣고 마음이 어린 듯 취한 듯 꿈인 듯 천만번 치사하고 천지도지 달아나니 그 형상이 그물(網) 벗어난 고기요 불붙는 밖에 뛰어난 돈(豚)일러라. 동서를 분별치 못하고 가니 동방이 밝고 인적이 상종하거늘 살펴보니 동대문을 왔거늘 서서 고쳐 생각하되 내가 간밤에 사경을 지내었으나 저 성중에 들어가 왕래하면 뉘가 나의 면목을 알리오 하고 과거를 위하여 천리 원정에 왔다가 그저 가면 불가하다 하고 성중에 들어가 주인 집을 찾어가니, 본래 수정이 인물과 문필이 빼어난지라 동행이 시기하여 피하여 다른 데로 갔더라. 수정이 주인집에 침복하고 있다가 과일(科日)을 당하매 장중에 들어가 자리를 정하고 글제 나기를 기다리니 이윽고 글제를 걸거늘 보니 요조숙녀(窃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虎口)라 하였거늘 일필휘지하여 선장에 하고 주일대방하니 상(上)이 수정의 글을 보시고 칭찬하여 가라사대 문법과 필법이 준수하여 용사비등함과 같다 하시고, 봉내 뜯어 보시니 경상도 안동부원면 땅 정수정 연이 十六[십육]세라 하였거늘 상이 대열하사 무수히 칭찬하시고 장원을 빼어내실 재촉을 하시니 수정이 의복을 단정히 하고 탑전에 복지하온대 상이 그 거동을 보시매 그 용모 풍우하고 단정하며 엄숙하여 짐짓 기이한 남자라. 상이 한번 보시고 크게 기꺼워하사 무수히 진퇴를 시키시고 바로 한림을 제수하시니 수정이 천은을 배사하고 궐문 밖에 나오니 좌우에 풍악이오 전후에 무동이라, 은안백마 높이 타고 흥진자맥 대로상(大路上)에 뚜렷이 왕래하니 곳곳이 도화며 골골이 양류로다. 이때 행낙은 만호장안 화류춘풍 장원랑(壯元郞) 정수정뿐이로다. 관광하는 사람들이 칭찬 아니하는 이 없더라. 등뒤로서 「신래」부르는 소리 나거늘 나가서 현알하니 좌의정 이공이라. 무수히 진퇴하고 사랑함을 이기지 못하여
『노상에서 내 그대에게 청할 말이 있으니 들을소냐』 한림왈『대감께서 소생에게 무삼말씀 하시려하시나이까』한대, 공왈 『내 팔자 심박하여 한낱 자식이 없고 다만 여식이 있으되 위인이 총명하여 가히 군자의 건질을 받들듯 하기로 저와 같은 사위를 구하더니 그대를 만나매 자연 사랑함을 이기지 못하여 나의 동상지객이 되기를 청하니 어떠하오.』 한림이 사례하여 왈
『소생같은 미천한 사람에게 천금같은 영애를 부탁코저 하시고 청하옵시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마는 소생에게는 모친이 계시니 임의로 못하겠오이다.』
하였다. 이공이 왈 혼인은 대사라 금명간에 성례할 것이 아니오니 한림 모친께 의논하여 하라 하고 한가지로 집으로 가기를 청하더니, 저편으로서 「신래」부르는 소리 또 나거늘 한림이 현알하니 이는 우의정 김공이라. 신래를 진퇴하고 또 동상지객되기를 청하거늘 한림이 미처 대답지 못하니, 좌상이 바로 하되 정한림은 소생이 먼저 사위되고 설왕설래하되 다투지 못하여 탑전에 들어가 다시 아뢰되 『좌의정은 비록 자식이 없사오나 원근 친척이 많사와 양자라도 할 데가 많삽거니와 신은 혈무애하와 양자도 할 곳 없사오니 전하는 신을 불쌍히 여기시사 마땅한 사위나 얻어 외손 봉사나 하게하여 주옵소서.』하거늘 상이 김공의 정리를 불쌍히 여기사 김공에게 허하시니 즉시 택일하여 三[삼]월초七[칠]일로 정하고 호조(戶曹)로 하교하사 혼구를 풍부하게 하라하신대, 정한림이 탑전에 아뢰되
『신이 천은을 입사와 몸이 귀히 되옵고 하물며 성취를 시키시니 황공무지 하오되, 신이 노모가 있사오니 혼인은 인간대사라 어찌 노모를 모르게 하오리까. 복원컨대 혼인날을 물리옵고 두 달 말미를 주시면 신의 어미를 상봉하온 후에 이런 말씀이나 자세히 하옵고 돌아와 혼인을 하여도 늦지 않을듯 하외다. 신의 어미라 같이 천은을 축수하옵지 다른 말 있아오리까.』
하니 상이 가라사대
『정지는 과연 그러하나 한번 정한 혼인을 어찌 물리랴.』
하시고 즉시 한림의 모친을 정부인 직첩을 나리시고 전교하시되
『왕일 경이 과인을 극진히 교훈하여 국가도량이 되게 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경은 정부인 직첩을 나리고 경의 아들은 한림을 제수하고 우 의정 김공필의 사위를 삼었으니 그리 알라.』
하시었더라. 한림 모친이 아들을 천리 경성에 보내고 기다리다가 반가운 기별 들으매 즐겁기 측량없고 또 장가든단 기별 들으니 반가운 마음 진정치 못하더라.
혼일을 당하여 초례하러 갈제 조서리 八十[팔십]명과 한성부 서리 四十[사십]명과 장악원 서리 四十[사십]명이 뒤로 시배 서고, 금의영 수령수와 훈련감 수령수가 전배로 들어서고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지 못하더라.
예를 마치매 신방에 들어가니 날이 저물매 시비 등이 신부를 옹위하고 들어오니 그 신부 화용과 아리따운 태도 짐짓 경국일색(傾國一色)이더라. 밤이 깊으매 한림이 등촉을 물리고 신부와 취침할새, 전일 지낸 일을 생각하마 심신이 산란하여 정신이 망연한지라, 잠을 이루지 못하여 전전반측하더니 문득 밖으로 인기척이 있거늘, 몸을 번드쳐 문틈으로 엿보니 군정 한 놈이 장검(長劍)을 가지고 들어오거늘 병풍 뒤에 숨었더니, 그놈이 두리번거리다가 신부의 머리를 버히고 가거늘 한림이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하여 거꾸러졌더니, 어연지간에 동방이 새고 일광이 높았는지라 노소부인과 노복들이 신부 나오지 아니함을 괴이히 여겨 문틈으로 엿보니 신부의 머리 버히고 신랑은 병풍 뒤에 기절하여 있는지라 일가 진동하여 통곡하는 소리 위로 창천에 사모쳤더라. 일변 신랑을 결박하였느지라 겨우 정신을 차려 사세를 생각하니 실상 애매하여도 증거가 없으니 발명을 못할지라, 하늘을 우러러 팔자 탄식하니, 김공이 가로되
『혼사는 나라에서 간섭한 것이니 내 마음대로 처단 못 하리라.』
하고 바로 탑전에 들어가 괴변을 아뢰니 상이 진노하사
『정수정이 그런 마음 품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하시고 더욱 진노하사 죄인을 의금부에 나리라 하시고, 우선 좌기를 차려 국문하라 하시니 삼 당상과 뭇낭청이 좌기를 차리고 주초를 아뢰라 하고 국문하니 한림이 다만 아뢰되
『죄인의 애매하온 마음은 천지신령이 알으시나이다.』
하니 삼 당상이 의심하되 혹 가내지란(家內之亂)이 아닌가 하여 열여사에 법전하여 세 번 동초하여 국문하더라. 이러구러 칠삭이 되는지라, 김공이 조회에 들어가면 국사는 의논치 아니하고 다만 딸의 원수만 갚어 달라하니, 그 말이 일이차가 아니라 칠삭을 두고 날마다 아뢰우니 괴롭기가 측량없는지라, 상이 진노하사 백관에게 하교하여 가라사대
『금일은 좌기를 차리고 다시 죄인을 국문하되 만일 다른 말이 있거던 주달하고 전대로 아뢰거던 처참하라.』
하시니, 백관이 전교를 받들어 좌기를 차리고 한림을 올려 전교 사연을 이르며 국문하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수정이 속절 없이 오늘 절명을 당하게 되었으니 무슨 묘책으로 살기를 바라리오. 옥같은 정강이에 삼모장을 둘르며 애매히 고찰하여 수없이 정장하니 일월이 무광하고 초목이 암암하여 그 광경은 차마 볼 수 없더라. 한림이 문득 생각하되 전일 문수할 때 판수 주던 것이 세 번째 죽을 때를 당하거던 내어주면 혹 구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 뜻을 올려 보리라 하고 그 황죽을 올리니 백관이 서로 보다가 그 뜻을 모르고 한림더러 물으니 한림이 아뢰되
『죄인이 그 뜻을 알 양이면 어찌 칠삭을 옥중에 있었으리오.』
한대, 백관이 할일 없어 탑전에 아뢰오니 상이 또한 그 뜻을 모르시고 백관에게 분부하여 사면에 묻되 세상에 아는 이가 없는지라 상이 더욱 진노하여 백관에게 전교하시되
『죄인이 고이한 것을 올려 국사를 산란케 함은 행여 살기를 꾀함이라.』
하시고 어찌 요악한 놈이 아니리오 하시며 금일은 좌기를 차리고 묻되 만일 아지 못하거던 즉시 버히라 하시니, 백관이 좌기를 차리고 한림을 올려 그 뜻을 물으며 국문하니 한림이 아뢰올 말씀이 없는지라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운학동을 향하야 통곡하고 다만 죽기를 바라더니, 이 때 장안 만인이 전후좌우에서 이 광경을 구경할 새 그 거조를 보고 애연탄식하더라. 이때 좌의정이 공이 금부옥사를 공번되게 결정코자 하여 또한 좌기에 참섭하였는지라 이공의 부인이 유아를 데리고 동산에서 구경하다가 부인이 가로되
『슬프다 누가 능히 저 뜻을 알아내어 저 소년을 살리리오.』
하며 탄식하니 소저 옆에 섰다가 여쭈오되
『세상 사람들이 귀먹고 눈이 어두어 용렬하도다.』
하고 다시 부인께 여쭈오되
『이 옥사는 국가의 대사라 어찌 규중태도만 지키어 공번 된 말씀을 아니하여 국가의 정사를 손상케 하오리까.』
한대, 부인이 질색 왈
『네 어찌 흑백을 알리오.』
하시니 소저 다시 여쭈오대
『모친은 염려치 마르소서.』
하고 시비를 불러 가로되
『네가 좌기하신 백관께 나아가 전갈을 자세히 아뢰라. 첩은 규중 한 여자로 정정하고 유족한 태도와 온공인의 직분만 지킴이 직분에 옳삽거늘, 국가사를 참예하여 당돌히 의논하니 여자의 행실이 아니로되, 옛말에 하였으되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사람의 천하라 하였사오니, 나라의 법령 내기는 사람을 위하여 내였사오니 그런고로 사람을 죽이려 하오면 나라 사람이 다 옳다 하여야 죽이나니, 대저 나라의 법은 지극히 공평되게 한 것이라, 한 사람에게 실행하면 만인이 다 청원하는 고로 첩도 또한 그 신하라 어찌 신하되어 만인에게 인군을 칭원함을 듣고 책은치 아니하리오.
이번 옥사로 일러도 또한 그 신하라 죄인이 반드시 애매함을 알리까마는 원정을 올렸다 하오니 그 뜻을 널리 문의하여 흑백을 분명케 하오면 첫째는 성상의 높으신 덕택이오 둘째는 신하의 직분의 밝음이라, 죄인의 원정을 살피어 청원이 없을까 바라나이다하라.』
하니 시비 전갈을 모시고 의금부에 가서 나졸을 헤치고 금부대하에 들어가 소저의 전갈을 세세히 아뢰니 삼 당상과 백관이 모두 대경실색 왈
『이 같은 여자는 천고에 드문 배라.』
하고 무수히 칭찬하더라. 이때에 이공이 또한 좌기에 참예하였는지라 백관이 다 치사하되 이공이 조금도 안색이 변치 아니하고 태연히 앉었거늘, 백관이 그 연고를 물으매
『나는 비록 용렬하나 한낱 여식은 선인한 태도와 황홀한 기상이 너무 과인한 고로 두렵삽더니, 요조숙녀의 태도와 영웅호걸의 태도와 충신열녀의 태도를 겸하여 규중에서도 매양 이 같은 기특한 일을 많이 보아도 여자의 일인고로 남에게 선언을 아니하였더니 오늘날 이 일이 있으나 제가 어찌 흑백을 분별하리오.』
하더라. 백관이 의논하되 이 소저 반드시 지감(知鑑)이 있기로 전갈이 이렇듯 있으니 빨리 회답하여 옥사를 결단케 하리라 하고 즉시 화답하되
『천고의 금주하온 말씀을 듣사오니 중관의 마음 황연하옵기 측량없삽고, 새로이 국가에 일층 생광이오 고금의 드문 배라, 이옥사가 일시가 급하기로 감사하온 말씀은 증거치 못하오나 천하의 지공저정하는 바는 법이라, 한번 법을 굽히면 인군과 백관이 다 그른바 되난지라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또 소저의 말슴대로 국은을 입사옴을 감축히 알진대 어찌 규중에서 수치함을 인하여 상과 백관이 그른 데로 나감을 보시고 밝히 가르치심이 없으시리오. 이제 성상의 근심을 덜으시고 금망에 빠진 죄인으로 하여금 원악함이 없게 하옵소서. 용렬한 백관의 부끄러움을 어찌 다 아뢰오리까.』
하였으니, 시비 돌아와 그대로 고하니 소저 다시 전갈하여 가로되
『지공지정한 국법을 어찌 사가규중에서 결단 하리오마는 만일 첩으로 하여금 결단코저 하실진대 좌기하신 옆에 막을 치옵고 첩을 부르시면 공실에 나아가 결단하오리다.』
하니, 시비 그대로 백관께 아뢰매 백관이 즉시 나졸을 불러 대청 뒤에 막을 널리 짓고 장막과 병풍을 겹겹이 치고 포진(布陣)을 다 한 후 소저를 청하니 소저 三十[삼십]명 시비를 옹위하여 장막안으로 들어가 죄인의 원정을 올리라더니 이윽고 나졸을 불러 왈
『김정승댁에 가서 노안(奴案)을 달래 오라.』
하매 김정승댁에 가 노안을 달라하니 정승이 곡절을 몰라 노안을 내어주므로 순식간에 가져 왔거늘 소저 이윽히 보다가 두어 자 글을 써서 봉하여 좌기하는 데로 보내어 왈
『근실한 관원과 근실한 나졸을 정하여 봉서를 가지고 김정승댁 근처에 가서 떼어보라 하옵소서.』
백관이 그대로 관원과 나졸을 보내더라. 관원이 봉서를 가지고 승상댁 근처에 다달아 떼어보니 하였으되
『백황죽이라는 놈을 근포하여 잡아오라.』
하였거늘 김정승 문에 들어가니 한 아이가 나오거늘 이 댁 노자의 백황죽이라 하는 자 있느냐 하니 그 아이 가로되, 대감의 다리를 친다 하거늘 다시 묻되 백황죽은 이 댁 종이냐, 어찌 대감의 다리를 치냐 하니 아이 대답하되
『황죽이 근본 총명준수하기로 대감이 사랑하였나이다.』
하거늘 바로 사랑에 들어가 그 놈을 잡아 결박하여 삽시간에 대령하니 소저 가로되 그 호패를 떼어 올리라 하니 나졸이 떼어 올린다. 본즉 과연 백황죽이라 띄었거늘 그제야 소저 백관에게 전갈하되
『대저 부부지정으로 말씀을 할지라도 정한림은 하방에서 자라나고 김소저는 경사심규(京師深閨)에서 자랐으니 무슨 정험이 있사오리까. 평일에 그 댁 종놈 중에 임협방탕한 놈이 있어 전일에 간악한 정을 이기지 못하여 삼경반야(三更半夜)에 죽임이오. 또 정한림을 죽이지 아니함은 병풍 뒤에 기절한 것이오. 신부는 잠이 들고 정한림은 다행히 잠을 깨었다가 밖에 인기척이 있음을 듣고 문틈으로 엿보니 어떤 놈이 칼을 가지고 들어오매 미처 신부를 깨우지 못하고 병풍 뒤에 숨었다가 신부 죽이는 광경을 보고 인하여 기절함이 분명하고, 또 발명 아니하기는 그때 증참(證叅)한 이 없는지라 발명하여 쓸데 없는 고로 참는 것이오. 원정을 올리매 그 뜻을 모르기는 전일에 문수한즉 점치는 사람이 점이 신통하여 신수가 불길하다 하고 도액 모양으로 원정을 주며 죽을 때를 당하거던 내어노라 하고 뜻을 이르지 아니 하였으매 뜻을 모른 것이오. 그 원정으로 의논할진대, 성명으로 비하였으니 종이가 근본이 있는 것이라 게다가 누른 대를 그렸으니 사람의 성이 근본이라 성은 백가요 누른 대는 황죽이라 이름은 절로 황죽이어니, 이 어찌 이만것을 풀기가 어려우리오. 그놈을 국문하면 자연 알려니와 일후라도 다시 이런 옥사를 당하거던 내 앞을 생각하여 남의 사정을 헤아리소서.』
하더니,
『이곳이 여자가 오래 지체할 곳이 못되기로 첩은 돌아가오니 그놈을 자세히 국문하여 옥사를 밝혀 결단하옵소서』하고 시비를 명하여 교자를 타고 본집으로 돌아가니라. 백관이 이 말을 들으매 소저의 전후사 말과 전후 사단을 의논 한즉 계경이 소연하고 또 백황죽을 풀어 성명을 푸는데 가서도 백관이 머리를 두르고 칭찬함을 마지 아니하고, 백관을 경계한 말에 가서는 더욱 백관의 얼굴이 흙빛이 되더라.
백황죽을 형틀에 올려매고 고찰하여 국문하니 백황죽이 매를 한개도 맞지 아니하고 바로 은익(隱匿)치 아니하고 낱낱이 토설직고하되
『일이 탈로하였으니 어찌 일호인들 기망하오리까. 자연 소인이 나이 二十八[이십팔]세라 춘삼월의 밤을 당하여 삼경반야에 명월이 조요하오매 춘흥을 이기지 못하여 동원도리화(東園桃李花)는 만발하온대 두견새 슬피 울어 소인의 마음을 돕는지라 방탕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격담을 솟아 넘어 연당 앞을 당하오니 등촉이 휘황하고 사창이 반개하였는데 한 처자 거문고를 타되 탁문군의 지음상서하던 곡조를 타다가 거문고를 밀치고 또 시전(詩傳)을 가리어 내려외이되 군자를 생각하옴이 있거던 글한 선비의 말배움이 되리로다 하거늘 소인의 마음에 곧 춘정을 생각하는 줄 알고 사창을 밀치고 들어가니 소저 처음에는 놀래어 짐짓 부끄러하여 마지못하여 대하는 태도를 하옵다가 그 거문고와 심정을 베풀었더니 또한 낙종하옵기로 그날 밤에 양인이 운우지정을 맺어 낮이면 나오고 밤이면 정이 많사오매 서로 언약하기를 모월 모일로 경보를 가지고 도망하여 백년해로 하자더니 언약한 날을 당하오매 차탈피탈하옵고 혼사를 정하와 혼인이 당하매 소인이 밤을 당하와 신방에 침입하온즉 신랑은 간데없고 신부만 있압기에 죽였사오니 소인을 바삐 죽여 국법을 정하게 하옵소서.』
하거늘 백관과 장안 만인이 다 상쾌히 여기고 그 소저를 만고 명인이라 하더라. 백관이 초사 받은 것을 가지고 탑전에 들어가 전후사연을 아뢰니 상이 대경대희하사
『이 소저는 만고의 드믄 인재라.』
하시며 천만번 칭찬하시고 이정승을 부르시며 무수히 사하시며 호조에 하교하사 비단 백 필과 황금 천 량을 상사하시고 정수정으로 형조참판을 제수하시고 백황죽은 처참하고 김공필은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라 하시다. 상이 정한림을 입시하사 인견하시고 가라사대
『과인이 밝지 못하여 무죄한 경으로 하여금 七[칠]삭을 옥중에서 근고함을 받게 하여 참으로 경을 볼 낯이 없노라.』
하시니 참판이 아뢰되
『이는 다 신의 팔자오니 누구를 한하오리까.』
하더라. 이때 장안에 동요 있으며
- 시원하고 상쾌하니 정수정의 일이로다
- 신통하고 기의하니 소저의 밝음이여
- 만 번 죽어 마땅하다 김공 처자 간특이여
- 능지처참 면할 손가 백황죽의 방탕이여
- 부끄럽고 무안하다 김공필의 얼굴이여
- 조정백관 무엇 할꼬 이소저 일인 당할손가
- 함곡관의 맹상군의 닭의 소리 한 마디로
- 생환고국 하였으니 그에서 더할 손가
- 계명산 추야월에 장자방의 통소 소리
- 십만대병 헤쳤으니 이에서 더할 손가
- 능주 용안 한고조는 삼척장검 이끌고
- 초패왕을 죽였으니 이에서 더할 손가
- 낙양변사 소진이는 산동제왕 달래여
- 능국 상인 둘러차고 금의환향 하였으니
- 이에서 더할 손가
- 한광무 칼을 빌어 역신왕매 베혀 놓고
- 대한복조 회복한들 이에서 더할 손가
내인 거인 서로 화답하여 경향에 낭자하더라. 이때 옥사를 결단한 후 국가에 일이 없는지라. 상이 이공을 인견하시고
『과인이 혼인 중매하기가 부끄러우되 경의 여아는 정수정과 천정배필이니 혼인을 정하면 어떠하오.』
이공이 아뢰되
『신도 마음이 간절하오나 정혼치 못하옴은 이번 옥사의 혐의 겨워 못하였삽니다.』
한다. 상이 웃으며 왈
『그러할수록 천정배필이야 어찌 그런 혐의를 하리오.』
하시고 즉시 택일하니 二[이]월초四[사]일이 양신이라, 상이 혼수에 간섭하사 혼인날을 당하여 정참판이 예를 마치매 외당에 나와 이공과 한가지로 七[칠]삭이나 고생하던 일을 새로이 말하며 신기히 여기더라. 날이 저물매 신방에 들어가니 시비 신부를 옹위하여 들어오는 태도를 잠간 보내 짐짓 인자한 덕과 요요하고 유정한 태도 더욱 엄숙하더라.
소저 등화를 향하야 앉으니 참판이 잠간 은헤를 생각하고 일어나 사례하여 가로대
『소저의 명감 아니면 정생이 어찌 세상에 있으리오.』
하니 소저 변색 왈
『상공은 어찌 이 말씀 하시나이까. 외처에 있으나 두려운 욕됨을 면치 못할지라 첩이 대대국은을 입사와 감축하옵기로 큰 옥사에 국법이 손상할까 하여 규중에 수규함을 무릅쓰고 어린 소견으로 망녕된 말을 하였으나 타면 부지 외색 남자를 위하였다 하면 첩의 마음에 욕될까 싶읍니다.』
하거늘 참판이 그 말을 들으매 황감케 알고 도리어 사과하고 방중을 둘러보니 벽상에 당초에 불측지환 당하였을 때 영결시 지은 것이 붙었거늘 놀랍고 슬픈지라 눈물이 종행하여 금치 못하니, 소저 그 거동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어 가로되
『상공은 무삼 연고로 슬퍼하시나이까.』
하거늘 참판이
『벽상에 글을 보니 나의 심회 그러하오다.』
하니 소저 대왈
『대장부 심지 저렇게 약하와 남의 글을 보고 저렇듯 하시니 첩이 수괴하여이다.』
한다. 참판이
『천생이 비천한 중 표박히 지낸 고로 그러하거니와, 저 글을 어디서 얻어 붙였읍니까?』
하니 소저 가로되
『세상 사람이 다 외오난 고로 얻어 붙였거니와 상공이 이글 내력을 그다지 물으시나이까?』
한다. 참판이 저 글 사연을 외우니 처자 질색하여 물어 왈
『그때 처자와 이별할 때 표적이 있읍니까.』
한다. 참판이
『처자와 이별시에 은자 서 되를 능라옷보에 싸서 주기로 받아갔더니 그 은으로 목숨을 도모하여 살았읍니다.』
대답하니, 소저 그제야 달려들어 참판의 손을 잡고
『군자는 첩의 설움을 생각하실까. 천지 신령이 도우신가. 상공이 첩의 방에 다시 오실 줄 알었으리오.』
한대, 참판이 소저의 말을 들으매 흉격이 막히어 어음이 막막하여 다만 꿈인가 생시인가 분별치 못하는 중
『이별 후로 그대를 다시 만나 보기를 주야 바랐더니 평연이 두 번 합하여 낙창의 운이 다시 뵈었으니 슬프고 즐겁도다.』
밤이 깊도록 상사하던 정회와 신기하게 맞은 연분을 의논하다가 동침하니 피차 정의가 더욱 두텁더라.
그 세세한 정회와 은은한 마음은 이로 기록치 못하더라. 전후사적을 펼쳐 의논하니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고 전후에 없는 일이라 하더라. 전일에 불측한 활을 당할 때 참판을 교자에 메고 다니던 종놈들을 불러
『나를 메고 다닐 때 수고를 많이 하였기로 너희는 은자 열량씩 주노라.』
하고 여러 놈 중에 참판 살리던 놈을 불러서는
『너희들 아니더면 내 어찌 살었으리오.』
하고 우선 이것으로 갚노라 하며 은자 五十[오십]량씩 주고
『네 상전 속인 죄로 이것을 주노라.』
하더라. 일삭이 지나매 참판이 탑전에 아뢰되 어미 보기를 청하매 상이 가라사대
『경이 고향에 돌아가매 영화를 떼이고 가나 그러나 경은 과인의 수족이라 일시를 떠나지 못할 것이니 즉시 올라오라.』
하시고 경상감사를 제수하시니 참판이 황공감사하여 전은을 무수히 묵수하고 이정승 집에 가서 이공 내외께 하직하고 정부인을 치행하여 길을 발행할새 노문을 감영에 보내고 영문 하인들이 올라와 모시고 갈새 안동 운학동으로 먼저 행하여 감사 아는 사람들이 무수히 칭찬왈 운학동서 자라난 아이로 과거 보러 갔더니 본도방백이 되어 오니 이런 영화는 고금에 없다 하더라.
감사가 집에 다달아 모친께 뵈오니 모자 만나 그리던 말과 귀히 된 말과 고생하던 사적을 일일히 말씀하니 모친께서 들으시기를 다하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시더라.
감사가 선영에 소분하고 三[삼]일지연을 배설하고 즐기다 모친과 부인을 모시고 도임하니 三[삼]월지내에 도내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르고 도불승유하여 농부들은 격양가를 부르더라.
정수정 전후에 고생한 것으로 볼진대 인간만사 다 순전히 길하고 순전히 흉한 것이 없고 길흉이 상반이라 이 정승의 여자로 볼진대 당초에 정수정을 은자 주어 죽엄을 면하게 하고 그 후에 옥사로 거의 죽게된 사람을 규중처자로 외람히 인군 섬길 마음 간절함은 누대신록지신 태도요, 옥사를 공결하기는 국법을 공결하여 흑백을 가리어 불쌍하고 무죄한 사람을 구함은 어진 덕이나, 전후에 정수정을 구원하였으니 천정연분이 분명한즉 어찌 사람이 인력으로 하리오. 백황죽은 제가 죄를 지은 즉 어찌 발명하리오, 죽기를 청하였으니 당연할지라. 착한 일과 악한 일에 보응이 빠르기가 그림자와 소리가 응함 같으니 어찌 살피지 아니하리오. 수정이와 부인이 한번 착한 마음 먹음을 끝끝내 변치 아니하였기로 부귀를 겸전하고 자손이 계계승승하여 지금까지 번성하기로 전후사적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을 본받게 함이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