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김역관과 운남 왕녀
- 김역관(譯官)과 운남 왕녀(雲南 王女)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明將[명장] 李如松)의 진중에는 우리나라 사람 통역(通譯)에 김모(金某)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나이 아직 이십세(二十歲) 내외(內外)에 불과하였으나 인물이 천하 미남자로 잘 생기고, 말재주가 능하여 얼마 배우지 않았건만 명나라 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 하고, 성질이 또한 기민하고 영리하니, 이여송이 특별히 사랑하고 귀여워하여 밤과 낮으로 잠시라도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밥을 먹어도 같이 먹고, 잠을 자도 같이 자니, 그의 총애는 비록 이여송의 애첩이라도 따를 수가 없고, 따라서 김통역의 말이라면 모두 언청계용(言聽計用)을 하게 되니, 그 진중에서 그의 세력이란 여간 크지 않아, 누구나 이여송에게 무슨 긴요한 중대한 일이나 청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김통역에게 먼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란이 끝이 나서 이여송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김통역도 역시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때에 여송이 유문(柳門)에까지 이르러서 군사(軍事)를 점고(點考)하니 요동도통(遼東都統) 모(某)가 군량을 전부 사용(私用)하여 없앴다.
여송은 크게 노하여 그 죄(罪)를 즉시 군법에 부치어서 장차 참형하려 하니 도통의 생명이 경각에 위태하게 되었다. 그때에 그 도통은 아들 삼형제가 있으니 맏아들은 시랑(侍郞) 벼슬로 있고 차자(次子)는 서길사(庶吉士)로 있고 셋째는 신승(神僧)이었다.
그들 삼형제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그 아버지를 구해낼 도리를 의논하였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가지고 서로 의논에 의논을 하여도 아무런 도리가 없더니 최후에 막내 아들 신승이 말하기를
『내가 들은즉 김통역이 이제독에게 가장 신임을 받는다고 하니 그 사람에게 잘 청(請)을 한다면 혹시 아버지의 생명을 구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읍니다.』
하였다. 삼형제가 김통역을 찾아보고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주길 애걸복걸하니 김통역이 역시 그들 삼형제의 효성에 감동되어 즉시 쾌락하고 이제독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하니 아무리 강폭하고 군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이제독이라도 자기가 총애하는 김통역의 말에는 차마 저버리지를 못하고 한 번 생각 두 번 생각하다가 최후에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 탄식하되
『내가 일국의 간성지장이 되어 허다한 군병을 데리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한지 수십 년에 나라에 큰 공을 많이 세웠으되 한번도 군법을 범한 일이 없더니 이제 김통역을 위하여 법을 지키지 못하고 도통의 죄를 용서한다.』
하고 말하니 김통역은 그 사실을 도통의 아들들에게 전달하고 안심케 하였다.
그들 삼형제는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이미 돌아갔던 자기 아버지가 새로 다시 살아난 듯이 크게 기뻐하여 금은 보배며 진주 비단 등속을 산더미같이 가지고 와서 김통역게 주고 백 배 사은하였다.
그러나 김통역은 원래 청렴한 사람인 까닭에 그것들을 모조리 사양하여 돌려보냈다.
그들 삼형제는 다시 김통역더러 말하되
『당신은 한 나라의 통역관이지만 우리나라 황상께 알리우고 우리 황상으로부터 귀국(貴國) 정부(政府)에 부탁하여 무슨 대관(大官)으로 추천을 하면 어떻습니까?』
하니, 김통역은 또 거절하며 말하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명분을 심하게 가리는 나라이니까 나와 같은 역관 계급의 사람은 도저히 정부의 고관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세력 관계로 고관의 자리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조롱거리만 되는 것인즉 구태어 분수에 없는 짓을 할 필요가 없읍니다.』
한다. 그들 삼형제는 또다시 말하되
『그러면 당신을 명나라의 고관을 시키면 어떻습니까.』
하니
김통역은 또다시 말하되
『나는 원래 명나라 사람이 아니요, 나의 부모 형제가 다 고국에 있어서 밤낮으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요, 나 역시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 같이 고국으로 가고 싶으니, 이제독이 허락만 한다면 오늘이라도 고국에 돌아갈 예정이라, 어느 한가로운 시절에 남의 나라 벼슬을 하고 남의 나라에 머물겠읍니까?』
하고 사양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 삼형제는 무엇으로 그의 은혜를 갚을 도리가 없어서 최후로 김통역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드리겠읍니다.』
하였다.
그들 삼형제가 하도 지성스러이 말을 하니 김통역은 희롱 겸해서 대답하기를
『나에게 만일 천하의 미인(美人)을 얻어준다면 소원을 이루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 삼형제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에 어려운 빛을 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지 얼마 후에 김통역은 공사(公事) 일로 궁성(宮城)엘 들어가니 그들 삼형제는 그를 반가이 맞이하여 어떤 곳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은 장소도 좋거니와 집이 새로 지은 건물로 화려하며 광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김통역을 인도하여서 그중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들어앉게 하였다. 곧 차(茶)를 드리고 이윽고 안문이 열리며 향기가 진동하고 수십 명의 미인군(美人群)이 떼를 지어 나오며 붉은 비단보로 싼 배반을 드리니 김통역이 한번 보매 도무지 정신이 황홀하여 모두들 경국의 미인(美人)들이다 하고 경탄하며 자리를 떠나려고 하니 삼형제가 급히 김통역의 소매를 잡아 한사코 말리며 말하되
『지금의 여자들은 모두들 시녀들이요 정말 진짜 천하의 제일 미인은 이 앞으로 곧 나올 터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요.』
하고 청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안문이 또다시 열리며 향기가 코를 찌르더니 십여 인의 미인들이 한 여자를 옹위하고 들어오는데 그는 참으로 김통역이 생전에 처음 보는 정말 미인(美人)이었다.
삼형제는 그 여자를 김통역의 앞으로 안내하여 절을 시키고 말하되
『이 여자는 현재 중국에서 제일가는 천하의 미인으로 당신께서 아무쪼록 잘 사랑하여 오늘 밤 이곳에서 하룻밤 아름다운 인연을 맺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통역은 갑자기 얼굴빛이 변하며 사양하여 말하되
『나는 당초에 미인을 한번 보고 싶다고, 즉 구경하겠다고만 말했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니 삼형제는 깜짝 놀라며 말하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당초에 우리 형제들이 당신에게 은혜을 갚기 위하여 천신만고하고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천하의 미인을 구하여 온 것인데 그렇게 거절하시니 그게 될 말씀입니까. 제일색의 미인은 비록 천자(天子)의 소망이라 하여도 도저히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하고 또 계속하여 말하되
『이 미인의 내력을 잠간 말씀드리자면, 이는 본래 운남국(雲南國) 왕녀였읍니다. 몇 해 전에 운남왕(雲南王)이 남과 큰 원수를 졌었는데 우리 형제가 그 원수를 갚어 주었더니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후에 당신네가 무엇이든지 나에게 요구할 것이 있다면 아무것이나 다 들어주마 한 일이 있었고, 그때에 그 왕의 딸이 천하에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기에 이번에 당신의 소망대로 그 미인을 구하여 드리기 위하여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운남왕(雲南王)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왕이 쾌히 승락하므로 당신이 오시는 날자를 맞추어서 수륙 삼만리(水陸三萬里)길에 은자 수만 량을 허비하여 천리(千里)마다 준마(駿馬) 삼필(三匹)씩을 교대하여 일부러 데려온 것인데, 당신이 만일 한번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 보낸다면 우리들 형제의 마음이 섭섭도 하거니와 저 여자도 낙심천만할 터이니 부디 청하건대 거절치 말고 잘 사랑하여 주십시요. 두 분이 만일 마음이 맞으신다면 비단 오늘 하루의 가약뿐만 아니라 아주 백년의 가약을 맺으시면 더욱 좋겠읍니다.』
하고 백방으로 간곡히 권하니 김통역도 또한 마음이 동하여 그곳에서 그 여자와 하룻밤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 삼형제는 문밖에서 미리 그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김통역을 보고 웃으며
『그래 밤새 재미가 어떠하셨읍니까.』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어떻습니까, 그 여자와 아주 영구히 같이 사시지요.』
하고 또 다시 간청한다.
김통역은 대답하여 말하되
『성의는 대단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나라 국법(國法)에 남의 나라 부인을 마음대로 데리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터인즉 아무리 마음에 있더라도 그리 할 수 없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 삼형제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하되
『당신이 이렇게 된 것도 천하의 이상한 인연이요. 또 이러한 천하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 것도 또한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니 본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으시다면 아주 이곳에다 집을 한 채 정해놓고 일년 일차 귀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당신이 역관(譯官)으로 오셔서 마치 견우직녀가 칠월칠석(七月七夕) 한 번씩 만나는 것 같이 서로 만난다면 더욱 좋지 않습니까.』
하니, 김역관 또한 좋다고 승락하였다.
그들의 주선으로 한 살림 잘 차려 두고서 중국을 갈 때마다 그 집에 유숙하여 재미있게 지내다가 늙게 이르러서 아주 그곳에 영구히 살게 되니, 그때 중국(中國)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행복스럽고 아름다운 인연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역관은 그 여자와 늙게까지 살면서 그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여럿 낳고, 그 자손들이 날로 번창하여져서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집안이 되었으며, 후에 명(明)이 청(淸)에게 멸망한 후에도 각처로 피신하여 후손들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고, 청조(淸朝)에 벼슬하여 지위가 시랑(侍郞) 벼슬까지 오른 자도 있었으며 우리나라 인조시대(仁祖時代)에는 또한 그의 후손이 중국의 사신(使臣)으로 우리나라까지 왔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