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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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은 이제 새로 쌓고 있다. 누군가 여기가 옛 안시성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말로 큰 새를 "안시"라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종종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뱀을 "백암"(배암)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의 나랏말로 고쳐 부르면 봉황성이 안시성이고 사성은 백암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황제가 병사를 성벽 아래에서 물리면서 비단 백필을 하사하여 안시성주의 견고한 수비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은 동생 노가재 김창업이 연경에 가게 되자 시를 지어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규염(당태종)을 쏘아 눈동자를 맞추었지"라고 하였고, 목은 이색은 〈정관음〉에서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흰 깃털에 검은 꽃이 떨어질 줄이야"라고 하였다. 검은 꽃은 눈동자를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두 어르신이 노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태종은 천하의 병사를 움직였는데 작은 성곽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김부식은 이 역사를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어찌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역사만 참고하여 글을 가려 뽑아 사실로 삼았겠는가. (당나라의 문인인)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여 (당태종이) 포위 당하였다가 물러간 일의 증거로 삼았는데, 《당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모두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중국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실을) 피한 것이라 의심된다. 그러나 본토의 옛 이야기와 같은 것에 이르면 한 구절을 실으려고 하여도 어떤 것은 믿을만하고 어떤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은 것을 고증하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서》에서는 안시성이 평양에서 오백리였다고 하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지》는 또한 봉황성의 옛 이름이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고증할 수 없어 (《동국여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동국여지지》는 옛 안시성이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평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에 수암하가 있고 수암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에 봉황성이 있으니 (지금의 개평이 안시성이고) 봉황성이 옛 평양이라면 《당서》에서 말하는 오백 리와 서로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합록강압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