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渡江錄

도강록

- 강을 건넌 기록 -


일러두기
  • 번역은 되도록 원문을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으나 현대 한국어에서 어색한 부분은 알맞게 다듬었다.
  • 많은 고사성어와 옛 역사적 사실, 각종 서적의 내용이 앞뒤 설명 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종종 괄호 안에 맥락을 이해 할 수 있는 말을 덧붙였다.
  • 각종 관직과 지명 등은 그대로 옮기고 낱말 풀이에서 설명하였다. 다만 의주를 뜻하는 만(灣)은 모두 의주로 고쳐 번역하였다.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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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辛未, 止乙酉。 自鴨綠江, 至遼陽。 十五日。

曷爲後三庚子。 記行程陰晴, 將年以係月日也。 曷稱後。 崇禎紀元後也。 曷三庚子。 崇禎紀元後三周庚子也。 曷不稱崇禎。 將渡江故諱之也。 曷諱之。 江以外淸人也。 天下皆奉淸正朔, 故不敢稱崇禎也。 曷私稱崇禎。皇明中華也。吾初受命之上國也。 崇禎十七年, 毅宗烈皇帝殉社稷。 明室亡, 于今百三十餘年, 曷至今稱之。 淸人入主中國, 而先王之制度變而爲胡。 環東土數千里, 畫江而爲國, 獨守先王之制度, 是明明室猶存於鴨水以東也。 雖力不足以攘除戎狄肅淸中原, 以光復先王之舊。 然皆能尊崇禎, 以存中國也。

崇禎百五十六年癸卯 洌上外史題

신미부터 을유까지 압록강에서 요양까지 15일

어찌하여 후삼경자인가? 지나간 길과 날씨를 기록하여야 하므로 햇수와 달수, 날짜를 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후라고 덧붙였는가? 숭정 기원 이후라는 뜻이다. 어찌하여 삼경자인가? 숭정 기원 이후 세 번째 맞이하는 경자년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숭정이란 연호를 생략하였는가? 압록강을 건너려 하므로 꺼려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꺼리는가? 강 밖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숭정 연호를 사용할 수 없다. 어찌하여 나는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가? 명나라의 황제가 중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 나라를 책봉한 윗나라이다.

숭정 70년 의종열황제는 사직을 잃었다. 명나라 황실이 망한 지도 약 130여 년이 흘렀는데 어찌하여 지금 그 연호를 쓰는가?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어 옛 왕의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땅 수천 리를 감싸는 강이 나라의 경계가 되어 홀로 옛 왕의 제도를 지키니 이것으로 명나라 황실의 유산이 압록강 동쪽에서 존속하고 있다. 비록 힘이 부족하여 오랑캐를 물리쳐 없애고 엄히 처벌하여 중원을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이로서 앞선 왕조의 옛 제도나마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숭정 연호를 존중하면 중국을 존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숭정 백오십육년 계유 열상외사 쓰다.


낱말풀이
  • 庚子(경자): 60 간지의 37번째 해. 이 글이 쓰인 시기는 서기 1780년 경자년이다.
  • 陰晴(음청): 흐린 날과 맑은 날. / 날씨.
  • 崇禎紀元(숭정기원): 숭정제의 즉위 원년. 서기 1627년이다. 이 해에 정묘호란이 있었다.
  • (): 꺼리다.
  • 正朔(정삭): 새로운 황제가 나라를 세우면 역법을 다시 계산하여 새롭게 반포하는 것.
  • 中華(중화):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세계 중심의 문명이라고 여겨 부르던 명칭. 중화 밖의 사방은 모두 오랑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毅宗烈皇帝(의종열황제): 숭정제의 묘호와 시호를 합쳐 부르는 명칭. 황제를 부르는 방식에는 크게 연호, 시호, 묘호가 있다. 숭정제는 연호를 기준으로 부르는 호칭이고, 명나라 의종은 그의 묘호이다. 정식 시호는 매우 길어서 16자나 되기 때문에 줄여서 열황제라고 한다.
  • 社稷(사직): 사는 땅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뜻한다. 나라를 세우면 사직단을 만들고 해마다 두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나라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 攘除(양제): 물리쳐 없애다.
  • 戎狄(융적): 북방의 오랑캐. 주로 초원 문화의 이민족을 멸시하여 부른 명칭.
  • 肅淸(숙청):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엄숙히 맑게 한다는 뜻이다. / 잘못을 바로잡아 엄하게 처벌하다.
  • 洌上外史(열상외사): 박지원이 사용한 호 가운데 하나.
  • (): 글의 앞머리에 쓰다.

압록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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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三庚子, 我聖上四年, 淸乾隆四十五年。

六月二十四日辛未 (朝小雨 終日乍灑乍止)

후삼경자, 우리 임금 4년, 청 건륭 45년

6월 24일 신미, 아침에 비 조금. 하루 종일 오다 말다 하였다.


낱말풀이
  • 我聖上(아성상): 우리 임금. 조선 정조를 말한다.
  • 乾隆(건륭):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이다. 이해 칠순을 맞았다.
  • 辛未(신미): 60 간지 중 8 번째 간지. 간지는 해, 월, 일, 시에 모두 붙였다. 이를 모두 합하여 사주라고 한다. 해에 붙이는 것을 세차, 달에 붙이는 것은 월건, 날에 붙이는 것은 일진, 시에 붙이는 것은 시진이라고 한다. 여기에 쓰인 것은 날마다 붙이는 일진이다.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初留龍灣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木石俱轉, 濁浪連空, 盖鴨綠江, 發源最遠故耳。 按唐書, 高麗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故號鴨綠江。 所謂白山者, 卽長白山也。 山海經, 稱不咸山, 我國稱白頭山。 白頭山, 爲諸江發源之祖, 西南流者爲鴨綠江。 皇輿考云,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兩山墨談, 陳霆著, 云, 「自淮以北爲北條, 凡水皆宗大河。 未有以江名者, 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 盖是江也, 天下之大水也。 其發源之地, 方旱方潦, 難度於千里之外也。 以今漲勢觀之, 白山長霖, 可以推知。 况此非尋常津涉之地乎。 今當盛潦, 汀步艤泊, 皆失故處, 中流礁沙, 亦所難審。 操舟者少失其勢, 則有非人力所可廻旋。 一行譯員迭援故事, 固請退期, 灣尹 李在學, 亦送親裨, 爲挽數日。 而正使堅以是日, 爲渡江之期, 狀啓已書塡日時矣。

오후에 압록강을 건넜다. 삼십 리를 행차하여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밤에 큰 비가 왔지만 곧 그쳤다.

처음에는 의주의 객사 용만관에 머물렀다. 10일에 방물이 모두 당도하였고 일정이 촉박하여 갈 길을 서둘렀지만 큰 비가 장마로 변하는 바람에 양쪽 강이 모두 넘쳤다. 나흘이 지나 날이 개었으나 물살이 더욱 거세졌다. 나무와 돌이 함께 구르고 게다가 흐린 물결이 곤란하게도 압록강을 채웠는데 (강을 건너는 의주가) 발원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당서》를 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는 데 물 색이 오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압록강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이다. 《산해경》에서는 불함산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선 백두산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여러 강의 발원지인데 서남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황여고》는 "천하에 큰 강이 셋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강"이라고 하고 있다. 진정이 지은 《양산묵담》은 "회수 이북의 물은 북쪽의 지류로 모두 대하로 흐른다. 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으나 북쪽에 있는 것은 고려에서 압록강이라 한다"고 적었다.

이처럼 강이란 천하의 큰 물줄기이다. 그 발원지는 가물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겠지만, 천 리 밖에서 그 정도를 알기가 어렵다. 지금 넘치는 기세를 보니 백두산에 장마가 들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이렇게 예사롭지 않게 큰 나루터야 어떻겠는가? 지금 기세가 대단한 물살을 맞으니 물가의 배 데는 곳도 모두 쓸려 가버려 자리를 잃고 물줄기 가운데 있던 암초며 모래톱 역시 자취를 감췄다. 뱃사공이 조금만 실수라도 할 참이면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일행 가운데 역관이 예전에 낭패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돌아가기를 간청하고 의주 부윤 이재학도 비장을 보내와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사는 이날 강을 건너기로 마음을 굳히고 장계에 아예 일시를 못 박아 버렸다.


낱말풀이
  • 露宿(노숙): 야외에서 숙박하다.
  • 九連城(구련성): 압록강 건너에 있는 성의 이름. 명나라 시기 아홉 개의 병영이 함께 줄지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龍灣(용만): 의주의 객사 용만관. 주로 왕래하는 사신들이 사용하였다.
  • 方物(방물): 글자 그대로는 지방의 특산물이란 뜻이다. 조선의 사신이 함께 가지고 간 공물을 말한다. 공물로는 각종 옷감과 나전칠기, 말, 금은, 종이, 인삼 등이 있었다.
  • (): 장마.
  • 兩江(양강): 압록강 본류와 중국 단동의 지류인 애하(愛河, 아이허)를 가리킨다.
  • 濁浪(탁랑): 흐린 물결.
  • 唐書(당서): 당나라의 역사책.
  • 高麗(고려): 당나라 때의 이야기이므로 고구려를 뜻한다. 고구려는 대략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라고 칭하였다.
  • 馬訾水(마자수): 압록강의 옛 이름.
  • 靺鞨(말갈):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와 연해주에 걸쳐 살았던 부족.
  • 白山(백산): 백두산
  • 山海經(산해경): 《산해경》은 중국 선진 시대에 지어진 지리서이다. 신화와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 皇輿考(황여고): 명나라 시기 장천복이 지은 지리서.
  • 兩山墨談(양산묵담): 명나라 진정이 쓴 소설. 고구려와 당의 전쟁 이야기가 실려 있다.
  • (): 회수(淮水)의 줄임말. 화이허를 말한다.
  • 大河(대하): 황하의 다른 이름.
  • 尋常(심상): 예사로운, 평범한.
  • 操舟者(조주자): 뱃사공
  • 固請(고청): 간절히 청하다.
  • 灣尹(만윤): 의주 부윤을 달리 부르던 호칭.
  • 正使(정사): 사신 행렬을 이끄는 우두머리. 박지원의 삼종형 박명원을 가리킨다.
  • 狀啓(장계):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朝起開牕, 濃雲密布, 雨意彌山。 盥櫛已罷, 整頓行李。 手封家書及諸處答札, 出付撥便。 於是略啜早粥, 徐往舘所。 諸裨已著軍服戰笠矣。 頂起銀花雲月, 懸孔雀羽, 腰繫藍方紗紬纏帶, 佩環刀, 手握短鞭。 相視而笑曰, 「貌樣何如。」 盧參奉以漸上房裨將, 視帖裏時, 更加豪健矣。 帖裏方言天翼, 裨將我境則著帖裏, 渡江則換着狹袖。 鄭進士珏上房裨將 笑迎曰 「今日眞得渡江矣。」 盧從傍曰, 「乃今將渡江矣。」 余皆應曰 「唯唯。」 盖一旬留館, 擧懷支離之意, 皆畜奮飛之氣。 加以霖雨江漲, 益生躁鬱, 及此期日倐屆, 則雖欲無渡, 不可得也。 遙瞻前途, 溽暑蒸人, 回想家鄕, 雲山渺漠。 人情到此, 安得無憮然退悔。 所謂平生壯遊, 恒言曰, 「不可不一觀」云者, 眞屬第二義。 其曰,「今日渡江」云者, 非快暢得意之語, 「乃無可奈何」之意耳。 譯官金震夏, 二上堂, 以年老病重, 落後而去。 辭別鄭重, 不覺悵然。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산에는 비가 올 듯 하였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질한 다음 여행길 차림을 정돈하였다. 집에 보낼 편지와 여러 곳에 두루 답하는 편지를 손으로 봉하여 서울 가는 파발 편에 부쳤다. 아침으로 죽을 간략히 먹고서 나는 객사로 갔다.

여러 비장들은 이미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다. 전립 (가운데 봉긋 솟는 부분인) 운월을 꽃모양 은으로 장식하였고 공작 깃을 달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 전대를 두르고 환도를 찼고, 손아귀로 단편을 들었다.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차림새가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상방 비장이었던 참봉 노이점은 철릭을 입으니 더욱 든든한 호걸로 보인다. 철릭은 사투리로 천익이라고 하는데, 비장은 우리 쪽 국경까지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정진사도 상방 비장이었는데 웃으며 맞이하며 "오늘은 참말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였다. 노 참봉도 덧붙여 "이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기에 나는 모두에게 "그렇죠, 그렇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열흘을 객사에 머물고 보니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뿐으로 모두 갑갑해 하며 날아서라도 갈 기세였다. 장마로 강이 넘치자 성마르고 갑갑한 마음이 점점 커졌는데, 이제 이날을 갑자기 맞고 보니 건너고 싶지 않아도 달리 방도가 없게 되었다. 멀리 앞길을 살피니 찌는 듯한 무더위가 정말 사람을 삶을 듯 하고, 돌이켜 고향 집을 생각하니 구름과 산이 아득히 가로막는다. 사람의 심정이란 것이 이러하여 불쑥 솟아나는 후회를 다독이지 못한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여행길이어서 늘 "한 번은 꼭 보아야" 할 것이라 했더라도 사실 최우선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강을 건넌다"고 하는 말도 그리 썩 내키지 않는 말이어서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역관 김진하는 2품 당상관으로 연로하고 병도 있어 뒤에 남아 돌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히 작별을 고하는데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낱말풀이

朝飯後, 余獨先一騎而出。 馬紫騮而白題, 脛瘦而蹄高, 頭銳而腰短, 竦其雙耳, 眞有萬里之想矣。 昌大前控, 張福後囑, 鞍掛雙囊。左硯右鏡, 筆二墨一, 小空冊四卷, 程里錄一軸。 行裝至輕, 搜檢雖嚴, 可以無虞矣。 未及城門, 而驟雨一陣。 從東而至, 遂促鞭而行, 下馬城闉。 獨步上樓, 俯視城底, 獨昌大持馬而立, 不見張福。 少焉, 張福出立道傍小角門。 望上望下, 攲笠遮雨, 手提烏瓷小壺, 颯颯而來。 盖兩人者, 自檢其囊中得廿六文。 而東錢有禁, 不可出境, 棄之道則可惜, 故沽酒。 云 「問汝輩能飮幾何」, 皆對不能近口。 余罵曰 「竪子惡能飮乎。」 又自慰曰, 「遠道一助」, 於是悄然獨酌 。東望龍鐵諸山, 皆入萬重雲矣。 滿酌一盞, 酹第一柱, 自祈利涉。 又斟一杯, 酹第二柱, 爲張福昌大祈。 搖壺則猶餘數杯, 使昌大酹地禱馬。

나는 아침밥을 먹고 먼저 홀로 말을 몰아 나왔다. 말은 밤색 털에 이마가 하얗고 정강이는 홀쭉한데 발굽이 높았다. 날씬한 머리에 짧은 허리, 두 귀가 쫑긋하니 정말 만 리라도 달릴 것만 같았다. 창대가 앞에서 끌고 장복이가 뒤에서 밀며 가는데 안장 양쪽으로 주머니를 걸었다. 왼 편엔 벼루가 들었고 오른 편에는 거울을 넣었다. 붓은 두 자루 먹은 한 개였고, 작은 공책 네 권 한 묶음을 기록을 적기 위해 담았다. 행장이 가벼우니 짐 검사가 엄하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다.

성문에 다다르기 전에 소나기가 한 바탕 쏟아졌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채찍으로 길을 재촉하여 성곽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홀로 성루에 올라 성 밑을 바라보니 창대만 홀로 말을 지키며 서있고 장복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장복이는 소각문 길 옆을 드나들었다. 위 아래를 살펴 보려고 갓을 기울여 비를 막고 손에 작은 질 그릇 (술)단지를 드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두 하인 모두 자신들의 주머니를 뒤져 26 푼을 찾았다. 우리나라 돈은 청나라고 가져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국경 넘어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에 길에 버리기는 아까우니 술을 사 먹으려는 것이다. "너희들 술은 얼마나 마시느냐"고 물으니 모두 조금 밖에 마시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나는 "더먹머리 총각이라 술을 못 마시지"하고 나무라고는 스스로 위안 삼아 "먼 길에 도움이 될 것이다"하며 초연하게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동쪽을 보니 용철의 여러 산들이 보이는데 모두 만 근 무게의 구름을 드리웠다. 한 잔 가득 부어 첫 번째 기둥에 붓고는 나 스스로의 탈 없는 여행을 기원하였다. 또 한 잔 가득 부어 두 번째 기둥에 붓고는 장복이와 창대를 위해 기원하였다. 단지를 흔들어 보니 그래도 몇 잔 술이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땅에 부으며 말을 위해 기원하게 하였다.


낱말풀이
  • 紫騮馬(자류마): 밤색 털이 난 말.
  • 一軸(일축): 한 묶음.
  • 行裝(행장): 여행을 다니는 데 필요한 짐.
  • 搜檢(수검): 짐 검사. 청나라는 금지한 물품의 반입을 막기 위해 짐 검사를 하였다.
  • 驟雨(취우): 갑자기 쏟아지다 곧 그치는 비. 소나기.
  • 道傍(도방): 길 옆
  • 烏瓷小壺(오자소호): 오자(烏瓷)는 검은 빛 나는 질그릇을 소호(小壺)는 자그마한 단지를 말한다. 작은 질 그릇 단지.
  • (): 앞서 "합"으로 읽은 사례와 달리 여기서는 "모두"를 뜻하는 "개"로 읽는다.
  • 沽酒(고주): 술을 사 먹다
  • 近口(근구): 간신히 입이나 축일 정도로 먹는다.
  • 竪子(수자): 더벅머리 총각
  • 悄然(초연): 얽매이지 않고 느긋함
  • 廿六文(입육푼): 입(廿)은 십(十)이 두 번 이니 20을 말한다. 한편 세(世)는 원래 30을 뜻하는 글자였다. 文은 돈을 세는 단위로 읽을 때는 푼으로 읽는다. 푼은 원래 10분의 1을 뜻하는 의미였지만 1 돈의 10분의 1을 뜻하는 단위가 되었다. 10 돈이 1 냥이 되므로 1 푼은 100분의 1 냥이다. 조선 시대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였다.

倚墻東望, 蒸雲乍騰。 白馬山城西邊一峯, 忽露半面, 其色深靑。 恰似吾燕岩書堂, 望見佛日後峯矣。

紅粉樓中別莫愁
秋風數騎出邊頭
畵船簫鼓無消息
斷膓淸南第一州

此柳惠風入瀋陽時作也。 余浪咏數回, 獨自大笑曰, 「此出疆人漫作無聊語爾。 安得有畵船簫皷哉。」 昔荊卿將渡易水, 頃之未發。 太子疑其改悔, 請先遣秦舞陽。 荊軻怒叱曰, 「僕所以留者, 待吾客與俱。」 此荊卿漫作無聊語耳。 若疑荊卿改悔, 則可謂淺之知荊卿, 而荊卿所待之客, 亦未必有姓名其人也。 夫提一匕首, 入不測之强秦, 已多一秦舞陽, 復安用他客耶。 寒風歌筑, 聊盡今日之歡而已。 然而作者曰, 「其人居遠未來。」 巧哉其居遠也。 其人者, 天下之至交也。 是期也, 天下之大信也。 以天下之至交, 臨一往不返之期, 夫豈日暮而不至哉。 故其人所居未必楚吳三晉之遠, 亦未必以是日爲入秦之期, 而有握手丁寧之約也。 只在荊卿意中, 忽待是客, 作之者乃就荊卿意中之客. 而演之曰其人。 其人者, 所不知何人也。 以所不知何人而曰居遠, 爲荊卿慰之。 又恐其人之或來也。 則曰, 「未來」, 爲荊卿幸之耳。 誠若天下眞有其人, 吾且見之矣。 其人身長七尺二寸, 濃眉綠髯, 下豊上銳, 何以知其然也。 吾讀惠風此詩知之矣。 惠風名得恭 號泠齋。

담장에 기대어 동쪽을 보니 더운 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백마산성의 서쪽 가에 있는 봉우리 하나가 문득 반면에 이슬이 맺혀 짙푸른 색을 띄었다. 마치 내 연암서당에서 불일산 뒷봉우리를 보는 듯 하였다.

붉은 단청 누각에서 이별 맞은 근심에
가을 바람 부는데 말 탄 몇몇 변방을 나서네
물놀이 배 띄우고 퉁소와 북을 즐긴 이는 소식이 없고
청남 이 고을에서 애만 끓는구나.

이것은 유혜풍이 심양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나는 몇 차례 이 시를 읇다가 "이렇듯 국경을 넘는 사람이 되고 보니 무심결에 이런 시나 읇는구나. 어찌 물놀이 배며 퉁소와 북이 있을 것인가"하고는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 형가가 역수를 건널 때 출발을 미루었다. 태자 단은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진무양을 먼저 보내고자 하였다. 형가는 울분을 토하며 "제가 머무르려 하는 것은 함께 갈 제 친구를 기다리려는 것입니다"하였다. 형가의 이 말도 무심결에 나온 것일 터이다. 형가가 마음을 돌렸을 지 모른다고 의심하였다고 하면 형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고 형가가 친구를 기다린다고 한 것 또한 성명이 있는 특정한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자루 비수를 품고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진나라로 들어가려 하는데 진무양 하나도 (같이 갈 사람으로는) 이미 많다고 할 것을 다른 친구를 기다려 무엇 하겠나? 한풍가를 부르고 북을 쳐서 그때까지 마음에 남았던 것을 다 털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은 "그 사람은 집이 멀어 오지 못하였다" 하고 적었다. 하필 집이 멀었으랴.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을 것이다. 그런 약속이라면 세상에 가장 큰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을 터이다. 이렇게 둘도 없는 친구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약속을 하였는데 어찌 하루가 다 저물도록 오지 않았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는 곳이 초나라나 오나라, 또는 삼진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는 아닐 것이다. 또한 그날 함께 진나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면, 악수를 나누며 진실된 약속을 하였을 것이다. 형가의 마음 속에는 그저 어떤 친구가 떠올랐을 뿐인데 글쓴이가 형가의 마음 속에 막연히 떠오른 친구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실제 있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가 알랴?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가리켜 멀리 살았다고 하면서 형가의 심정을 위로한 것이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왔다면 또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러니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형가로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세상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라도 알아볼 것이다. 그 사람은 키가 7척 2촌(240 센티미터)에 눈썹이 두텁고 수염은 녹색이며 하체가 우람한데 상체는 가냘플 것이니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나는 혜풍의 이 시를 읽으며 이와 같은 (실제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거론하는) 뜻을 알았다. 혜풍의 이름은 득공이다. 다른 호로 영재를 쓴다.


낱말풀이
  • 恰似(흡사): 거의 똑같음.
  • 佛日(불일): 개성 근처 불일산을 말한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 초기 홍국영의 원한을 피해 개성 근처에 살았다.
  • 柳惠風(유혜풍): 조선 후기 문인 유득공을 가리킨다. 혜풍은 유득공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 畵船簫鼓(화선소고): 화선(畵船)은 못에 띄워 물놀이를 즐기던 배이다. 소고(簫鼓)는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연주를 즐긴다는 뜻이다.
  • 消息(소식): 안부를 전하다.
  • 斷膓(단장): 글자 그대로는 "창자가 끊어지다"는 뜻이지만 관용적으로 "애가 끓다"는 의미로 쓰인다.
  • 심양(瀋陽): 후금의 수도였던 만주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오늘날의 선양시이다.
  • 出疆(출강): 국경을 넘다.
  • 漫作無聊語(만작무료어): 무심결에 별 뜻 없이 나오는 말.
  • 安得(안득): 문장의 앞에서 "어찌 -하겠는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 荊卿(형경): 《사기》에 나오는 형가(荊軻)를 존중하여 경(卿)이란 호칭을 붙였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부탁으로 진왕 정(훗날 시황제)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易水(역수): 허베이성을 지나는 강의 이름. 형가의 열전에 풍소소혜역수한 장사일거혜불복환(風蕭蕭兮易水寒 壮士一去兮不復還, 바람 쌀쌀히 불어 역수 물이 차구나 장사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이라는 시가 있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 太子(태자):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한다.
  • 改悔(개회): 잘못을 뉘우침. 여기서는 마음을 돌렸다는 의미로 쓰였다.
  • 秦舞陽(진무양): 형가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간 자객의 이름. 형가는 진무양을 미덥지 않다고 여겨 친구와 함께 가고자 하였으니 태자 단의 독촉에 진무양을 데리고 갔다.
  • (): 1인칭 대명사로 쓰였다. 옛 한문에서 僕은 자신을 낮추는 말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일본어에서는 남성이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 未必(미필): 문장의 앞에서 "딱히 그렇지는 않다"는 의미를 만든다.
  • 匕首(비수): 날카로운 단도.
  • 不測之强(불측지강): 불측(不測)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 "헤아릴 수 없이 강한"
  • 作者(작자): 글쓴이. 여기서는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을 말한다.
  • 至交(지교): 아주 깊은 교분이 있는 친구.
  • 握手(악수): 손을 마주 잡다.
  • 丁寧(정녕): 거짓 없이 진실함.
  • 楚吳三晉(초오삼진): 초나라, 위나라, 삼진. 삼진은 진(晉)나라가 분열된 뒤 세워진 조나라(趙), 한나라(韓), 위나라(魏)를 말한다. 형가가 있던 연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초나라와 오나라는 남쪽 멀리 떨어져 있고, 삼진은 서쪽 멀리 떨어져 있다.
  • 只在(지재): 오로지 --만 있다.
  • 七尺二寸(칠척이촌): 척은 자를 말한다. 약 33.33 센티미터이다. 촌은 치를 말한다. 10분의 1 자이다. 7척2촌은 240 센티미터이다. 물론 이렇게 키가 큰 사람은 없으니 농담을 하고 있는 중이다.
  • 此詩知之(차시지지) 이 시의 의미. 유득공은 박지원 보다 3년 앞선 1777년 청나라를 다녀왔고 이 때의 기행문과 교류한 청나라 문인의 시를 모아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를 펴냈다. 박지원은 이 시에서 비록 뱃놀이도 퉁소와 북도 없었지만 그 만큼이나 소중한 인연과 헤어짐이 아쉬었다는 뜻을 담았다고 본 것이다. 유득공은 박지원과 교류가 깊었다.

正使前排拂拂出城, 旗幟棍棒之屬。 排立於前, 故謂之前排。 來源與周主簿雙行矣。 來源, 余三從弟, 周主簿名命新, 俱上房裨將。 鞭鞘仗脇, 聳身據鞍, 肩高項長, 非不驍勇。 而坐下衾袋 太厖氄, 僕夫藁鞋, 遍掛鞍後。 來源軍服, 靑苧也。 舊件新浣, 鬅騰郭索, 可謂太崇儉矣。 稍俟副使之出城, 乃按轡徐行最後, 至九龍亭, 卽發船所也。 灣尹已設幕出待, 而書狀淸晨先出, 與灣尹眼同搜檢, 例也。 方校閱人馬, 人籍姓名, 居住, 年甲, 髯疤有無, 身材短長, 馬錄其毛色。 立三旗爲門, 搜其禁物, 大者如黃金, 眞珠, 人參, 貂皮及包外濫銀, 小者新舊名目, 不下數十種, 瑣雜難悉。 廝隷則披衣摸袴, 裨譯則解視行裝衾袋衣褓。 披猖江岸, 皮箱紙匣, 狼藉草莽, 爭自收拾, 睊睊相顧。 大抵不檢, 則無以防姦, 搜之則有傷軆貌, 而其實文具而已。 灣賈之先期潛越。 有誰禁之, 禁物之現捉於初旗者, 重棍而公屬, 其物入中旗者, 刑配, 入第三旗者, 梟首示衆, 其立法則嚴矣。 今行原包猶未及半, 多空包者, 其濫銀奚論。

정사의 행차에 앞서 전배들이 길을 떨치며 성 밖을 나서는데 깃발이며 몽둥이를 들었다. 앞서서 길을 트니 전배라고 부른다. 내원과 주 주부가 함께 걸었다. 내원은 내 팔촌 동생이고 주 주부의 이름은 명신으로 상방 비장이었다. 편초를 옆구리에 끼고 안장 위에서 몸을 꼿꼿이 펴서 어깨를 높이고 머리를 치켜드니 그야말로 날래고 용맹하였다. 안장 밑 짐 자루가 두툼하였고 따르는 종이 쓸 짚신을 안장 뒤에 걸었다.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만든 것이다. 오래된 것을 깨끗이 빨아 새것처럼 입은 옷은 가장자리가 헤어진 것을 덧대어 고쳐서 역시나 검소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부사가 성을 나서는 것을 기다렸다가 고삐를 틀어 천천히 맨 뒤로 따라 나서 배가 출발하는 구룡정에 다다랐다. 의주 부윤이 미리 장막을 치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서장은 맑은 새벽에 먼저 출발하여 의주 부윤이 함께 입회한 가운데 규정에 따라 짐을 검사하였다. 사람이며 말이 잘못된 부분이 없는 지 살펴서 사람은 성명과 주소, 나이, 수염이나 흉터의 유무, 키의 크고 작음을 기록하였고, 말은 털색을 등록하였다. 세 깃발이 문처럼 세워져 있어 금지하는 물품을 검사하는데, 큰 것으로는 황금, 진주, 인삼, 담비 가죽이나 신고하지 않은 은과 같은 것들이었고, 작은 것들은 그때 그때 금지되는 수십 가지가 넘는 품목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하인은 저고리를 뒤집고 바지 속을 뒤졌고 비장과 통역은 행장과 짐 자루, 옷 보자기를 풀어 보이게 하였다. 강가에 가죽 상자며 종이 상자가 널브러지고 풀섶에서 다투어 자신을 수습하면서 서로를 흘끗흘끗 돌아본다. 대체로 이렇게 검사하지 않으면 간사한 속임수를 막을 수 없고 그렇다고 검사를 하자니 체면이 상하게 되어 제도의 실제가 이와 같았다. (정작 밀수를 하는) 의주 상인들은 이미 먼저 몰래 넘어 갔다. 금지하는 물품을 지니고 있다가 첫 깃발에서 발각되면 곤장을 맞고, 가운데 깃발에서 발각되면 유배를 가고, 세 번째 깃발에서 발각되면 목을 베어 사람들 앞에 걸리는 효수형을 당하니 세워진 법은 엄격하다. (그러나) 이번 행차에 인정된 자금은 반도 되지 않고 대부분 몰래 가져가는 것이니 은의 남용을 더 말해 무엇하랴.


낱말풀이
  • 前排(전배): 관리의 행차에 앞서 자리하여 길을 트는 수하들.
  • 拂拂(불불): 떨쳐내다. 행차의 앞에서 깃발을 들고 누구의 행차인지 소리를 내며 알렸다는 의미이다. 사극에 간혹 등장하는 "쉬이 물렀거라. 00 행차시다" 같은 것.
  • 旗幟(기치): 옛 군대의 깃발. 여기서는 사신을 나타내는 깃발을 의미.
  • 棍棒(곤봉):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
  • 主簿(주부): 원래는 한나라 시대에 관인(官印 - 관청에서 사용하던 도장)을 담당하는 관직의 이름이 기원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사용된 관직 이름이다. 조선 시대의 주부는 문서와 부적(符籍 - 관리에게 주어진 증표)을 관리하던 종6품 관직이었다. 《별주부전》은 자라의 용궁 관직이 주부였다는 소리다.
  • 鞭鞘(편초): 말이나 소를 몰기 위해 쓰던 도구. 가늘고 긴 나뭇가지를 다듬어 그 끝에 노끈이나 가죽끈을 달았다.
  • 聳身(용신): 몸을 꼿꼿하게 폄.
  • 驍勇(효용): 날래고 용맹함.
  • 衾袋(금대): 짐 자루.
  • 僕夫(복부): 남자 종.
  • 藁鞋(고해): 짚신.
  • 崇儉(숭검): 검소하게 사는 것을 좋아함.
  • 書狀(서장): 조선 시대에 사신을 수행하며 기록을 담당하였던 관리.
  • 淸晨(청신): 맑은 새벽.
  • 眼同(안동): 증인으로 입회함.
  • 校閱(교열): 잘못된 부분이 없는 지 살핌.
  • 年甲(연갑): 태어난 간지, 즉 나이.
  • 廝隷(시례): 하인.
  • 皮箱(피상): 가죽으로 만든 상자
  • 紙匣(지갑): 종이로 만든 작은 상자
  • 草莽(초망): 풀섶.
  • 收拾(수습): 어수선한 물품을 정리함.
  • 大抵(대저): 대체로 보아
  • 軆貌(체모): 체면
  • 其實文具(기실문구): 문구(文具)는 여기서 문물 제도를 의미한다, / "제도의 실제"
  • 灣賈(만고): 의주 상인
  • 潛越(잠월): 몰래 넘어가다.
  • 重棍(중근): 곤장의 하나.
  • 梟首(효수): 목을 배어 거는 형벌.
  • 原包(원포): 허락 받아 가져가는 자금.
  • 空包(공포): 허락 받지 않은 몰래 가져 가는 자금.

茶啖草草, 乍進旋退, 葢急於渡江, 無人下箸。 船只五隻, 如京江之津船, 而其制稍大。 先濟方物及人馬, 正使所乘, 載表咨文及首譯以下上房帶率同船, 副使書狀並其帶率合乘一船。 於是龍灣吏校房妓通引及平壤陪行營吏啓書等, 皆於船頭, 次第拜辭。 上房馬頭, 順安奴, 名時大, 唱謁未了, 篙師擧槳一刺, 水勢迅疾。 棹歌齊唱, 努力奏功, 星奔電邁, 怳若隔晨。 統軍亭楹楯欄檻, 八面爭轉辭別者, 猶立沙頭, 而渺渺如荳。 余謂洪君命福(首譯)曰, 「君知道乎。」 洪拱曰, 「 惡, 是何言也。」 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 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洪曰, 「敢問何謂也。」 余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泰西人辨幾何一畫, 以一線諭之。 不足以盡其微, 則曰, 有光無光之際, 乃佛氏臨之曰, 不卽不離。 故善處其際, 惟知道者能之。 鄭之子產。」

간단한 다과를 내놓았으나 물리치고 돌아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니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못하였다. 배는 모두 다섯 척으로 경강의 나룻배와 같았으나 그보다 컸다. 먼저 방물, 사람과 말을 싣고 정사가 배에 오르니 표문과 자문을 들고 수석 역관과 이하 상방의 관리들이 함께 배에 올랐고, 부사 역시 서장과 함께 일행을 데리고 한 배에 올랐다. 이 때에 의주의 향리며 기생, 통인 등과 평양감사가 보낸 배행영리, 계서 등은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절을 하며 배웅하였다. 상방의 마두인 순안 노비 시대가 길 떠나는 소리를 외쳤는데, 이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뱃사공이 삿대를 찔러 넣으니 배는 빠른 물살을 타고 출발하였다.

여럿이 함께 노젓는 소리를 부르며 힘써 애쓴 보람이 있어서 별자리가 번개처럼 바뀌고 잠깐 사이에 동쪽의 신성이 멀어지듯 강을 건넜다. 통군정의 기둥이며 난간 자락의 여덟 모서리가 다투어 돌며 고별하더니 곧이어 모래톱 위에서 콩알 만하게 작아져 갔다. 나는 수석 역관이던 홍명복 군에게 "자네 도를 아는가?"하고 물었다. 홍군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아니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도라는 게 알기 어렵지 않네. 저쪽 언덕에 있지"라고 하였다. 홍군은 "이른바 먼저 태어나 언덕을 오른다는 것을 말씀하십니까?"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 얘기가 아닐세. 이 강이 곧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닿는 곳이란 이야기지.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않나. 무릇 온 세상 백성이 떳떳하게 문물을 따른다는 것은 양 언덕 사이의 물과 같네. 도라는 것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저 사이에서 찾아야지" 하였다.

홍군은 "감히 어찌하여 그런지 여쭙습니다" 하였고, 나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고 하지. 서양인들은 기하학을 증명하면서 선 하나 점 하나도 논증한다고 하더군. 그 미묘함을 다하는 것이 부족하여 (선이 길이만 있고 면적이 없다는 것을) 빛이 없는 사이에 있는 빛이라고 한다고 하니, 불교 식으로 말하면 둘이 붙어 있지도 않고 떨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양쪽의 사이가 바로 가장 좋은 방도이니 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할 수 있을 것이네. 정나라의 자산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고 대답하였다.


낱말풀이
  • 茶啖(다담): 손님을 대접하는 차와 과자.
  • 草草(초초): 원래의 뜻은 "보잘것 없음". 여기서는 "간단한"
  • 京江(경강): 한강의 뚝섬에서 양화 나루 사이의 이름. 그 보다 하류는 서강, 상류의 노량진을 한강이라 불렀다. 경강은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였다.
  • 表咨文(표자문): 표문(表文)과 자문(咨文). 표문은 번국의 예로서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 자문은 같은 등급의 기관 사이에 오가는 공문서로 여기서는 중국 예부에 보내는 문서를 말한다.
  • 副使(부사): 사신 행렬의 부대표. 정사는 왕실의 부마로서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제 외교 업무는 부사가 담당하였다. 이 행차의 부사는 대사헌이었던 정원시였다. 이미 3월에 부사로 임명되어 행차를 준비하였고 돌아와서 임금 정조에게 보고한 것도 부사이다.
  • 吏校(이교): 지방의 향리
  • 房妓(방기): 지방 관청에 매인 기생.
  • 通引(통인): 지방 수령의 잔신부름을 하던 하인.
  • 平壤陪行營吏(평양배행영리): 평양감사가 딸려 보낸 아전.
  • 啓書(계서): 장계를 써 올리는 일을 담당하던 아전.
  • 馬頭(마두): 역마를 담당하던 사람.
  • 篙師(고사): 뱃사공.
  • 水勢迅疾(수세신질): 물의 흐림이 빠름
  • 棹歌(도가): 노 저으며 부르는 노래.
  • 齊唱(재창): 여럿이 함께 노래함.
  • 努力(노력): 힘써 부지런히 애씀.
  • 奏功(주공): 공들인 보람이 있음.
  • 星奔電邁, 怳若隔晨(성분전매, 황약격신): "별들의 위치가 번개처럼 지나가 잠깐 사이에 신성과 떨어지다." 신성(晨星)은 방성(房星)의 다른 이름으로 이십팔수에서 동쪽의 7별 가운데 하나이다. 즉 잠깐 사이에 동쪽의 우리 나라를 떠나 별자리 마저 바뀌는 타국으로 떠났다는 의미가 된다. 그저 강 하나 건넜을 뿐이니 엄청난 과장이지만, 그만큼 조선과는 다른 별천지로 들어가는 심정을 밝히고 있다.
  • 統軍亭(통군정): 통군정은 의주 국경에 세워진 정자로 관서팔경의 하나이다.
  • 楹楯欄檻(영사난함): 영(楹)은 기둥을, 사(楯)는 난간을, 난함(欄檻)은 난간 가장자리에 세운 울을 말한다.
  • 彼岸(피안): 저쪽 언덕. 불교에서 피안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하는 아득한 경지를 뜻하지만, 연암은 여기서 물리적인 강 건너 언덕을 말하고 있다. 일부러 불교 용어를 써서 상대를 골리려고 하는 것이다.
  • 誕先登岸(탄선등안): 먼저 태어나 언덕을 오르다. 수석 통역관 홍명복은 연암의 질문을 불교의 것으로 이해하고 대답하였다.
  • 交界(교계): 맞 닿은 경계
  • 人心惟危, 道心惟微(인심유위 도심유미): 성리학의 근본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인심이란 그때 그때 일어나는 사람의 마음을, 도심이란 선천적이라 여겨진 도덕적인 천성을 가리킨다. 인심도심설의 해석 차이는 조선 후대에 사단칠정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연암이 속해 있던 노론은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였다. 인심으로 일어나는 기쁨, 슬픔, 노여움 등의 칠정과 도심에 의한 부끄러워하는 마음 등의 사단이 같은 근원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 泰西(태서): 근대 이전에 서양을 가리키던 말.
  • 泰西人辨幾何(태서인변기하): 서양인들이 기하학을 증명하다. 동양에 서양의 기하학이 소개된 것은 명나라 때로 마테오 리치가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번역하여 《기하원론》이라 하였다. 연암은 홍대용과 교류하며 서양의 기하와 천문을 접했다.
  • 有光無光之際(유광무광지제): 마태오 리치가 번역한 《기하원론》에서 선의 특징을 설명한 것. 현대적 번역은 "선은 길이만 있고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다"가 된다.
  • 不卽不離(부즉불이): 붙어있지도 않고 떨어져 있지도 않다. 당나라 시기 선승 황벽이 지은 《전심법요》에 나오는 구절이다.
  • 善處(선처): 가장 좋은 방도
  • 鄭之子產(정지자산): 정나라의 자산. 자산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문신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균형 외교를 펼쳐 평화를 지켰다.

船已泊岸, 蘆荻如織, 下不見地。 下隷輩爭下岸折蘆荻, 忙掇船上茵席, 欲爲鋪設。 而蘆根如戟, 黑土泥濃。自正使以下, 茫然露立於蘆荻中矣。 問, 「人馬先渡者何去。」 左右對曰, 「不知。」 又問, 「方物安在。」 又對曰, 「不知。」 遙指九龍亭沙岸曰 「一行人馬太半未濟。 彼蟻屯者是也。」 遙望龍灣, 一片孤城, 如晒匹練, 城門如針孔。 漏出天光, 如一點晨星。 有大筏乘漲而下, 時大遙呼曰, 「位。」 盖呼聲也, 位者, 尊稱也。 有一人起立應聲曰 「爾們的不時節, 緣何朝貢入大國, 暑天裏長途, 辛苦時大。」 又問, 「爾們的那地人民往何處砍木。」 答曰 「俺等俱鳳城居住, 往長白山砍來。」 說猶未了, 筏已杳然去矣。 時兩江合漲, 而中間爲孤島。 人馬先濟者, 誤爲下此, 相距雖五里, 無船復渡。 遂嚴勅兩船篙工, 速濟人馬, 則對以逆漲行船, 非時日可及。 使臣皆躁怒, 欲治領船灣校, 而無軍牢。 軍牢亦先渡, 誤下於中島故耳。 副房裨將李瑞龜, 不勝忿憤, 叱副旁馬頭, 捽入灣校。 而無可覆之地, 於是, 半開其臀, 以馬鞭略扣四五。 喝令拿出, 斯速擧行。 灣校一手著笠, 一手係袴, 連聲唱喏。 驅下兩船篙工, 入水曳船, 而水勢悍急, 進寸退尺, 威令無所施少焉。 一隻船沿岸飛下, 軍牢領三房轎馬而來。 張福呼昌大曰, 「汝亦來乎 葢幸之也。」 使兩漢點視行裝, 則俱得無恙矣。 裨譯所騎, 或來或否。 於是正使先發軍牢一雙騎而吹角引路。 一雙步而前導, 颼飀穿蘆荻而行。 余於馬上拔佩刀, 斬蘆一竿。 皮堅肉厚而不堪作箭, 只合筆管矣。 一鹿驚起, 超越蘆荻, 如麥際飛鳥, 一行皆驚。 行十里至三江。 江淸如練, 名愛刺河。 而不知何處發源, 與鴨綠江相去不過十里, 而獨無潦漲之意。 其各地發源可知矣。 有兩隻船, 類我國上游船, 而長廣皆不及。 制甚堅緻, 刺船者皆鳳城人。 待此三日, 糧盡告飢云。 葢此河, 彼我不得往來之地。 而我國譯學及大國, 移咨不時, 有交關之事。 故鳳城將軍爲置船隻云, 船泊處甚沮洳。 余呼一胡曰,「位。」 葢俄者纔學于時大也。 其人欣然捨槳而來。 余騰身載其背, 其人笑嘻嘻入船。 出氣長息曰, 「黑旋風媽媽這樣沉挑時, 巴不得上了沂風嶺。」 趙主簿明會大笑。 余曰, 「彼鹵漢不知江革, 但知李逵。」 趙君曰 「所謂目不識丁。 正道此輩, 而稗官奇書。 皆其牙頰間常用例語。 所謂官話者是也”

배가 강을 건너 강가에 닿으니 갈대며 억새가 비단결 같이 덮혀 아래에 있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강둑 아래에서 앞다투어 갈대며 억새를 배고 배 위의 돗자리를 부지런히 주워 (사신 일행이 설 자리를 만들어) 펼쳐 놓으려 하였다. 배여 나간 갈대 뿌리는 창처럼 날카로웠고 그 밑엔 검은 흙이 두터운 진흙을 이루고 있었다. 정사부터 그 아래 사람들이 모두 갈대, 억새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줄 몰랐다. "사람과 말 가운데 먼저 도착한 자는 어디로 갔는가?"하고 물으니 좌우에서 "모르겠습니다" 한다. 이어서 "방물은 무사한가?"하고 물으니 역시나 "모르겠습니다"하고는 멀리 구룡정이 있는 모래톱을 가리키며 "일행 중에 사람과 말 태반이 아직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저기 개미떼 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입니다" 한다.

멀리 있는 의주를 보니 한 조각 홀로 서있는 성인데 명주 한 필이 뉘어있는 것 같았고 성문이 바늘 귀 만하게 보였다. 그 사이로 하늘 빛이 한 점 샛별처럼 나오고 있었다. 큰 뗏목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시대가 "웨이"하고 소리쳤다. 중국어로 상대를 부를 때 웨이라고 하는 것은 존칭이다. 뗏목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였다. "당신들 때를 잘못 맞추었소. 어찌하여 대국에 조공을 왔는 지 모르겠으나 더운 날씨가 먼 길에 계속 되니 참 고생이 많소" 한다. 다시 "당신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고 어디서 나무를 배었소?" 하고 물으니, "우리는 봉성에 사는데 장백산에서 나무를 배어 오는 길이오" 한다. 이야기를 다 나누기도 전에 뗏목은 저 멀리 흘러 내려갔다.

이때 양쪽 강에서 합쳐진 물이 넘쳐 가운데는 뚝 떨어진 섬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먼저 내린 곳은 잘못 된 곳으로 원래 내려야 할 곳과 5 리나 떨어져 있었고 돌아가는 배도 없었다. 양쪽 배의 선원들에게 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라고 엄한 명령을 보냈지만 되돌아가려면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해서 하루에 될 일이 아니었다. 사신들이 모두 성급히 화를 내며 배의 운항을 책임진 의주 군교의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이번엔 (명령을 집행할) 군뢰가 없다. 군뢰들 역시 먼저 내렸는데 중간에 섬이 되어 버린 곳에서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부방 비장 이서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방 마두를 시켜 의주 군교를 잡아들였다. 엎드리게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세워 둔 채로 볼기를 반쯤 내리게 하고 말채찍으로 너다섯 대 정도 때렸다. 붙잡아 들이라 명령을 외치자 즉각 거행되었다. 의주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춤을 붙잡은 채 섰고, 횟수를 외치고 답하며 매질을 하였다.

두 배의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끌어내라 하였으나 물살이 거세어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니 명령이 엄하여도 조금도 시행되지 않았다. 작은 배가 물가로 나는 듯이 대더니 군뢰들이 삼방의 가마와 말을 대령하고 온다. 장복이가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 구나. 정말 다행이다." 하고 소리쳐 불렀다. 정사와 부사가 행장을 살펴 보았는데 모두 별 탈 없었다. 비장과 역관이 말을 타고 왔는데 일부는 오고 일부는 오지 않았다. 이에 정사는 군뢰 둘을 짝지워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면서 나발을 불어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다른 두 군뢰는 짝을 이뤄 앞장서 걷게 하고 갈대와 억새를 서걱 서걱 밟아 가며 행차하였다. 나는 말 위에서 허리 춤에 찬 칼을 꺼내 갈대 한 줄기를 배어 들었다. 껍질은 단단하고 속이 두터워 화살을 만들기엔 마땅치 않았고 붓의 몸통으로 쓰기엔 좋아 보였다. 사슴 한 마리가 놀라 일어나 갈대를 뛰어 넘어 달아나는 모습이 마치 보리 밭에서 새가 나는 것 같아 일행이 모두 놀랐다.

십 리를 가서 삼강에 다다랐다. 물이 명주 처럼 맑고 다른 이름으로 애자하라 부른다. 어디에서 발원하였는 지 알 수 없으나 압록강에서 불과 십 리 떨어져 나란히 흐르는데 홀로 물결이 잔잔하다. 두 강의 발원지 상황이 서로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강 양쪽에 쪽배가 있는데 생김새는 우리 나라 물놀이 배와 같으나 길이와 폭이 모두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재질도 보다 단단하고 촘촘한데 배를 부리는 이는 모두 봉성 사는 사람들이다. 3일을 기다리니 양식이 떨어져 굶게 생겼다. 원래 이 강은 저들과 우리가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역학을 대국에 보내 외교 하는 왕래에 시간이 없다는 자문을 건넸다. 이에 봉성 장군이 배를 내어 주었는데 배는 수심이 깊은 곳에 정박하여 있었다.

나는 호인 한 명에게 "웨이"하고 말을 걸었다. 이것은 조금 전 시대에게 겨우 배운 말이었다. 그 사람은 기꺼이 삿대를 내려 놓고 다가왔다. 나는 그 등에 업혔고 그는 히히 웃으며 나를 배에 실어 주었다. 나를 내려 놓고는 긴 한숨을 쉬더니 "(수호전에 나오는 천하 장사) 흑선풍의 어머니가 이 분 같이 무거웠다면 어찌 기풍령을 업고 넘었을까" 한다. 주부 조명회가 크게 웃었다. 나는 "저 놈이 (실제 역사에 있던 장사) 강혁은 모르고 (소설 속 허구의 인물) 이규만 아는구나" 하였다. 조군은 "낫 놓고 기역자 모른다고 하는 것이지요. 저 무리에겐 (강혁이 등장하는 후한서 같은 정사가 아니라 수호전과 같은) 패관기서가 정도입니다. 모두 뺨 사이에 이빨이 난 것처럼 늘 사례로 삼아 (말 속에 뼈가 있는 속담처럼) 씁니다. 이른바 관용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이지요."하고 말하였다.


낱말풀이

河廣似我國臨津。 卽向九連城, 綠蕪列幕, 周羅虎網。 義州鎗軍, 處處伐木, 聲震原野。獨立高阜, 擧目四望, 山明水淸。 開局平遠, 樹木連天, 隱隱有大邨落, 如聞鷄犬之聲。 土地肥沃, 可以耕墾。 浿江以西, 鴨綠以東, 無與此比。 合置巨鎭雄府, 彼我兩棄, 遂成閒區。 或云, 「高句麗時, 亦甞都此」, 所謂國內城。 皇明時爲鎭江府。 今淸陷遼, 則鎭江民人, 不肯剃頭, 或投毛文龍, 或投我國。 其後投我者, 盡爲淸人所刷還, 投文龍者, 多死于劉海之亂矣。 其爲空地, 且將百餘年, 漠然徒見山高而水淸者是也。 行視諸露屯處, 譯官或三人一幕, 或五人同帳。 譯卒及刷馬驅人, 伍伍什什, 靠溪搆木, 炊烟相連。 人喧馬嘶, 儼成村閭, 灣商一隊, 自爲一屯。 臨溪洗數十鷄, 張網獵魚, 烹羹煑蔬, 飯顆明潤, 最爲豊腴。 良久副使書狀, 次第來到。 日旣黃昏, 設燎三十餘處, 皆鋸截連抱巨木。 達曙通明, 軍牢吹角一聲, 則三百餘人, 齊聲吶喊, 所以警虎也。 竟夜如此, 軍牢自灣府選待最健者, 一行皁隷中, 最多事而亦最多食云, 其打扮令人絶倒。 藍雲紋緞, 着裏氈笠, 鬉結高頂, 雲月懸茜紅, 毦毛帽前, 縷金着一個勇字。 鴉靑麻布, 狹袖戰服, 木紅綿布褙子, 腰繫藍方紗紬纏帶, 肩掛朱紅綿絲大絨, 足穿多耳麻鞋。 觀其身手, 果然是一對健兒也。 但所坐馬, 所謂半駙擔, 不鞍而駄, 非騎而踞, 背揷着正藍色小令旗, 一手持軍令版, 一手執筆硯蠅拂及一條如腕大馬家木短鞭, 口吹吶叭。 坐下斜揷十餘塗朱木棍。 各房少有號令, 則輒呼軍牢. 軍牢陽若未聞, 連呼十數次, 則口中剌剌的誶責, 始乃高聲應喏。 若初聞呼聲然, 一躍下馬, 豕奔牛喘, 而吶叭及軍令版筆硯等物, 都掛一肩, 曳了一棍而去矣。

강은 우리 나라 임진강 만큼 넓었다. 잡초가 무성하고 주위에 그물을 쳐 호랑이의 침범을 막았다. 의주의 창군이 곳곳에서 나무를 배어 벼락 같은 소리가 먼 들판에 퍼졌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보니 산세는 밝고 물은 맑았다. 멀리 평평하게 펼쳐진 숲이 하늘까지 닿고 군데군데 보이는 큰 마을들은 닭이며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듯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과연 땅을 일구어 개간할 만 하다. 대동강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 사이에 이만한 곳이 없다. 큰 고을이 들어서기에 알맞으나 저들과 우리 사이에서 버려져 국경 사이의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에는 도읍이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국내성이다. 명나라 황제 시기에는 진강부였다.

지금의 청나라가 (후금 시절에 당시 명나라 땅이었던) 요동을 함락하자 진강 백성들이 차마 변발을 할 수 없어 일부는 모문룡에게 갔고 일부는 우리 나라에 왔다. 우리 나라에 온 사람들은 훗날 청나라가 모두 요동으로 데려갔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다수가 죽고 일부는 난민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이곳이 빈 땅이 된 지도 백여 년이 되어가서 막연히 지나치며 볼 때는 그저 산 높고 물 맑을 뿐이다.

노숙을 하며 행차하는데 때로는 역관 셋이 한 천막에 함께 묵고 때로는 다섯이 한 장막에 함께 묵었다. 통역과 군졸, 말을 모는 사람은 다섯 씩 또는 열 씩 냇가에서 물 축이고 나무에 기대며 서로 모닥불을 쬐었다. 사람 소리며 말 울음이 성과 촌 사이에서 왁자지껄 하니 의주 상인 무리가 저절로 한 부대를 이루었다. 계곡에 이르러 닭 십 수 마리를 씯고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은 뒤 국을 끓이고 나물을 삶아 윤기나는 밥과 먹었는데 이것이 (행차 중에) 가장 풍요로운 식사였다. 한참 있다가 부사와 서장이 차례로 도착하였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 화톳불을 30여 곳에 놓았는데 모두 아름드리 거목을 잘라낸 것이다. 날이 밝도록 밤을 새우다가 군뢰가 나발을 한 번 불자 삼백여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는데 호랑이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가장 건실한 군뢰를 가려 뽑아 (경비를 서는) 조례로 합류한 일행은 일도 가장 많이 하였고 밥도 가장 많이 먹었는데 그 치고 받고 하며 사람을 부리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웠다. 푸른 운문단에 전립을 안에 쓰고 그 위로 고정립을 헝클어지듯 걸치고 봉긋한 갓 위에 붉게 물들인 실을 매달았으며 늘어진 실 앞으로 금실로 수 놓은 용(勇)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짙푸른 베옷 위로 소매 좁은 전복을 입고 그 위로 검붉은 배자를 또 겹친 뒤 허리에 남방사주 전대를 차고 어깨에는 붉은 비단 실로 만든 대융을 걸쳤는데 발에는 구멍 많은 삼으로 지은 신을 신었다. 그 몸가짐이며 차림새를 보니 과연 으뜸가는 건아라고 할만하다. 다만 타고 가는 것이 이른바 반부담 말이라 (말이 너무 작아) 안장도 없이 짐을 얹고 말을 타는 것도 아니고 쭈그리고 앉은 모양새인데, 등 뒤로는 푸른색 소령기를 꽂고 한 손에는 군령판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과 벼루에 파리채까지 들고서 팔뚝에는 마가목으로 만든 말채찍 까지 둘렀고 그 모양새로 입으로는 나발마저 불었다. 앉은 밑으로 붉게 칠한 나무 몽둥이 십여 개까지 비스듬히 꽂혀 있다.

각 방에서 작은 일이라도 시킬 것이 있으면 바로 군뢰를 부르는데 군뢰는 못들은 척 하다가 수십 차례를 연달아 불러야 구시렁거리며 높은 소리로 응답한다. 첫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려 치면 단번에 말에서 내려 돼지가 달리고 소가 숨을 헐떡이듯 달려오는데, 나발이며 군령판, 받아 적을 붓과 벼루 등을 한쪽 어깨로 매고 다른 손에는 몽둥이를 질질 끌고 온다.


낱말풀이

夜未半. 大雨暴霔。帳幕上漏 ,草氣下濕, 無處可避。 少焉開霽, 天星四垂, 若可捫也。

한 밤이 못 되어 큰 비가 퍼붓듯 내렸다. 장막의 위는 새고 아래로는 풀이 젖어 축축하여 피할 곳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멀쩡하게 개었는데 하늘의 사방 별들이 손으로 쥘 수 있을 듯 하였다.


낱말풀이

낚시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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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日壬申 (朝小雨 午晴)

各房及譯員等諸屯。 處處出晒衣衾。 見濕於夜雨故也。 刷馬驅人中, 有負酒而來。 戴宗, 宣川奴, 御醫卞主簿馬頭, 沽獻一甁, 遂相携臨溪命酌。 渡江後望絶東酒, 而今忽得之, 非但酒味大佳, 暇日臨流, 趣不可勝。 馬頭輩爭投竿釣魚。 余醉, 奪一緡投之, 卽得二小魚。 葢魚未慣釣故也。 以方物未及到, 又露宿九連城

25일 임신. 아침에 비 조금 정오 무렵 갬.

각 방의 수행원들과 역관 등이 모두 머물렀다. 곳곳에서 옷과 이불을 말렸다. 간 밤에 비가 와서 축축하였다. 말을 돌보는 사람 가운데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선천 노비이자 어의 변주부의 마두인 대종이 술 한 병을 사와서 바치기에 계곡으로 이끌고 가 함께 마시자고 하였다. 강을 건넌 뒤 우리 나라의 술을 볼 일이 없다가 지금 뜻밖으로 얻은 술 맛이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한가한 에 물가에서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마두들이 앞다퉈 장대를 드리며 낚시를 하였다. 나도 취한 김에 낚싯대 하나를 빼앗아 들어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낚았다. (나 같이 낚시 못하는 사람이 두 마리나 낚은 것은) 물고기들이 아직 낚시질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또 다시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낱말풀이

강세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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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日癸酉 (朝霧晩晴)

發九連城, 行三十里, 到金石山下中火。 又行三十里, 露宿葱莠。

旣曉, 冐霧發行。 上判事馬頭得龍, 與刷馬驅人輩, 談說康世爵事。 霧中遙指金石山曰, 「此荊州人康世爵所隱處。」 其說津津可聽。 葢世爵祖霖 從楊鎬東援我國, 死於平山。 父國泰官靑州通判, 萬曆丁巳, 坐事謫遼陽, 世爵年十八, 隨父在遼陽。 明年, 淸人陷撫順, 游擊將軍李永芳降, 經略楊鎬, 分遣諸將, 摠兵杜松出開原, 摠兵王尙乾出撫順, 摠兵李如栢出淸河, 都督劉綎出毛嶺。 國泰父子從劉綎。 淸伏兵從陿中出, 大軍前後不相救。 劉綎自燒死, 國泰中流矢仆。 世爵日暮得父屍, 埋谷中, 聚石以識之。 時朝鮮都元帥姜弘立, 副元帥金景瑞, 陣山上, 朝鮮左右營將, 陣山下。 世爵投元帥陣。 明日, 淸兵擊朝鮮左營, 無一人得脫。 山上軍望見皆股栗, 弘立不戰而降。 淸人圍弘立軍數匝, 搜明兵之竄入者, 反縛驅出, 皆劒斬之。 世爵被縛坐大石下, 主者忽忘而去。 世爵目朝鮮兵, 乞解其縛, 朝鮮兵相睥睨莫敢動。 世爵自以背磨之石, 楞縛繩斷, 遂起脫朝鮮死者衣, 換着之, 攛入朝鮮兵中以得免, 於是走還遼陽。 及熊廷弼鎭遼陽, 招世爵使復父讎。 是年, 淸人連陷開原鐵嶺, 則逮廷弼, 以薛國用代之。 世爵仍留薛軍中, 及瀋陽陷, 世爵晝伏夜行, 抵鳳凰城, 與廣寧人劉光漢, 收遼陽散卒, 共守之。 未幾, 光漢戰死, 世爵亦被十餘鎗。 自念中原路絶, 不如東出朝鮮, 猶得免薙髮左衽, 遂走穿塞, 隱金石山。 燎羊裘, 裹木葉以咽之, 數月得不死。 遂渡鴨綠江, 遍歷關西諸郡, 轉入會寧。 遂娶東婦生二子, 世爵年八十餘卒。 子孫蕃衍, 至百餘人. 而猶同居云。 得龍, 嘉山人也, 自十四歲, 出入燕中, 今三十餘次。 最善華語, 行中大小事例, 非得龍, 莫可當此任者。 已經本郡及龍鐵等諸府中軍, 階得嘉善。 而每使行, 則預關本郡, 囚其次知, 家屬, 謂之次知, 以防其逃避。 其爲人之幹能可知。 方世爵初出時, 客得龍家, 與得龍祖善, 互學華東語。 得龍之善漢語, 乃其家學云。

日旣暮, 抵葱莠。 恰似平山葱莠。 想我國人所名, 抑平山葱秀, 以類爲名否。

26일 계유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저녁에 갬.

구련성을 출발하여 30 리를 가니 점심 무렵 금석산 밑에 다다랐다. 30리를 더 가 총유에서 노숙하였다.

새벽이 되어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상판사의 마두 득룡이 다른 말 모는 사람 무리들에게 강세작 이야기를 하였다. 안개 속에서 멀리 금석산을 가리키며 "저 곳이 형주 사람 강세작이 숨어 살던 곳이오" 한다. 그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였다.

강세작의 할아버지 강림은 양호의 휘하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다가 평산에서 죽었다. 아버지 강국태는 청주통판을 지냈는데 좌천되어 요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강세작은 18세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무순을 함락하여 유격장군 이영방이 항복하자 경략사이던 양호는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총병 두송은 개원으로, 총병 왕상건은 무순으로, 총병 이여백은 청하로, 도독 유정은 모령으로 출병하였다. 국태 부자는 유정을 따랐다. 청의 복병이 가운데를 끊어 공격해 오니 대군의 앞과 뒤가 서로를 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국태는 싸움 중에 날아든 화살을 맞아 쓰러졌다. 세작은 날이 저물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골짜기에 묻고 돌을 모아 표시하였다. 이때 조선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군의 좌우 영장은 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세작은 도원수 진영에서 머물렀다. 다음 날 청나라 군대가 조선 좌영을 공격하자 아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산 위의 군대는 이 광경을 보고 모두 다리를 떨며 두려워 하였고 홍립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청나라 군은 홍립의 군대를 포위하고 잡아들였고 숨어들어 간 명나라 군사를 찾아내고는 손을 뒤로 하여 묶고 끌어내어 모두 칼로 머리를 배어 죽였다.

세작도 묶인 채 큰 바위 아래 앉았는데 세작을 묶었던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세작이 조선 병사를 보고 풀어달라고 하니 조선 병사는 서로 곁눈질을 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세작은 자신의 등을 바위에 대고 갈아 포박 줄을 끊고 죽은 조선 병사의 옷을 벗겨 입고서 죽을 위기를 모면한 뒤 조선 병사의 무리에 숨어 들어 도망쳐 요양으로 돌아갔다. 웅정필은 요양에 진을 치고 세작을 불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며 부하로 받아들였다. 그해 청나라는 개원위와 철령위를 연달아 함락시켰고 이에 웅정필이 교체되어 설국용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세작은 설국용의 군대에 남게 되었는데 심양이 함락되자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다니며 봉황성으로 가 그곳에서 광령 사람 유광한과 요양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함께 수비를 하였다. 오래지 않아 유광한은 전사하였고 세작 역시 창에 십여 곳을 찔렸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중원으로 가는 길은 끊겼고 머리를 짧게 깎이고 청나라의 옷을 입고 사느니 동쪽의 조선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금석산에 숨었다. 양을 잡아 구워 먹고 가죽을 걸치고 나뭇잎을 모아 불을 피우면서 수 개월을 죽지 않고 버텼다.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관서 여러 군을 돌아 다니다가 회령까지 흘러 들었다. 아내를 맞아 두 아들을 두었고 세작은 80여 세까지 살고 죽었다. 자손이 번창하여 백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한 마을에 산다고 한다.

득룡은 가산 사람으로 올해 사십세인데 연경을 드나들기를 30여 차례나 하였다. 중국어를 가장 잘하여 행차에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도 득룡이 없으면 해결할 자가 없었다. 자신이 원래 속한 가산은 물론이고 의주와 철산 등 여러 부에서 중군을 지내고 지금은 가선대부이다. 매번 사신 행차가 있으면 본군인 가산에 연락하여 득룡의 가족을 가두어 두는데 혹시나 득룡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 세작이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득룡의 할아버지 집에 손님으로 있었는데 이때 서로 조선 말과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득룡이 중국어를 잘하는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며 배웠기 때문이다.

날이 거의 저물어 총유에 다다랐다. 마치 평산의 총유 같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나라 사람이 이 곳 이름을 붙였기에 평산의 총유를 쫓아 이런 식의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닐까?


낱말풀이

책문에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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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日甲戌 (朝霧晩晴)

27일 갑술. 아침에 안개 저녁에 갬.


낱말풀이

平明發行。 路逢五六胡人, 皆騎小驢。 帽服繿縷, 容貌疲殘。 皆鳳城甲軍, 往戍愛刺河, 而雇人倩往云, 「東方則誠無慮矣。 然中國邊備可謂踈矣。」 馬頭及刷馬驅人輩, 喝令下驢, 前行兩胡, 下驢側行, 後行三胡, 不肯下驢。 馬頭輩齊聲叱下, 則怒目直視曰, 「爾們的大人干我甚事。」 馬頭直前奪其鞭, 擊其赤脚曰 「吾們的大人, 陪奉是何等物件, 賫來是何等文書, 黃旗上明明的寫着萬歲爺御前上用。 爾們好不患瞎, 還不認過了皇上御用的。」 其人下驢伏地, 稱死罪, 一人起抱咨文馬頭腰, 滿面歡笑曰, 「老爺息怒。 小人們該死的。」 馬頭輩皆大笑, 叱令叩頭謝罪, 皆跪伏于泥中, 以首頓地。 黃泥滿額, 一行皆大笑, 叱令退去。 余曰 「聞汝輩入中國, 多惹鬧端云, 吾今目覩, 果驗前聞。 俄者亦涉不緊, 此後切勿因戱起鬧。」 皆對曰 「不如此, 長途永,日 無以消遣。」

아침 해가 밝을 무렵 출발하였다. 길에서 호인 대여섯과 마주쳤는데 다들 작은 나귀를 타고 있었다. 모자며 옷이 낡고 해져서 허름하였고 피곤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모두 봉성의 갑군으로 돈을 받고 다른 사람 대신 애자하를 수비하다 돌아오는 길이라며 "동방은 이런 걱정이 없겠소. 그러나 중국은 국경 지키기가 힘들다오." 한다. 마두와 말을 모는 사람들이 나귀에서 내리라 소리치니 앞서던 두 호인은 나귀에서 내려 길 옆으로 비켜 가는데 뒤에 오던 셋은 내리지 않았다. 마두들이 다시 크게 소리치며 내리라고 하자 화가 난 눈으로 노려보며, "너희 대인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하였다.

마두 한 명이 곧장 앞으로 달려가 그의 채찍을 빼앗아 다리를 때리며 "우리 대인이 어떤 물건을 받들어 모시고 가는 지, 어떤 문서를 지니고 오는 지, 노란 깃발에 뚜렷이 적어 붙인 '만세야어전상용'(만세를 누릴 황제께 받치는 물건)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는가? 너희들이 눈병이 나 애꾸가 된 것도 아닌데 황상께 올리는 것도 몰라보고 지나치느냐?"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나귀에서 내러 땅에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였고 한 사람은 마두 허리에 찬 자문을 끌어 안으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어르신 화를 가라 앉히시지요. 소인들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다. 마두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라고 명령하니 모두 진흙 길에 꿇어 엎드려 땅에 머리를 숙였다.

누런 진흙이 이마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일행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내가 "듣기로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 까닭 없이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다고 하던데 내 지금 보니 과연 들은 데로구나. 이번 일이야 흘려 보내고 나무라지 않겠으나 앞으로는 놀림 삼아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라." 하니 모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먼 길 가는 동안 하루 종일 심심해서 어쩝니까."하고 대답한다.


낱말풀이

望見鳳凰山, 恰是純石造成。 拔地特起, 如擘掌立指, 如半開芙蓉, 如天末夏雲。 秀峭戌削, 不可名狀, 而但欠淸潤之氣。 甞謂我京道峯三角, 勝於金剛。 何則, 金剛卽其洞府所謂萬二千峯, 非不奇峻雄深, 獸挐禽翔, 仙騰佛跌, 而陰森渺冥, 如入鬼窟。 余甞與申元發登斷髮嶺, 望見金剛山。 時方秋天深碧, 夕陽斜映, 無干霄秀色, 出身潤態, 未甞不爲金剛一歎。 及自上流舟下, 出頭尾江口, 西望漢陽, 三角諸山, 摩霄出靑, 微嵐淡靄, 明媚婀娜。 又甞坐南漢南門, 北望漢陽, 如水花鏡月。 或曰, 「光風浮空, 乃旺氣也。」 旺氣者, 王氣也。 爲我京億萬載龍盤虎踞之勢, 其靈明之氣, 宜異乎他山也。 今此山勢之奇峭峻拔, 雖過道峯三角, 而其浮空光氣, 大不及漢陽諸山矣。

봉황산을 바라보니 마치 온전히 돌로 만든 듯 하였다. 땅에서 우뚝 솟아 올라 섰는데 손바닥에서 엄지며 손가락이 일어선 것 같기도 하고, 반쯤 핀 부용 같기도 하고, 뭉개 구름 같기도 하였다. 수려하고 날카롭게 깍인 모양새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흠이라면 맑기와 윤기가 부족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서울의 삼각산이 금강산 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깊은 산으로 이른바 일만이천봉이라 불리면서 기이하고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뭍 짐승과 새가 살고 신선과 부처가 오르 내린다고 하니 깊은 숲이 아득히 어두워 마치 귀신 굴로 들어가는 것 같다.

내가 일찌기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라 하늘은 짙푸르고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는데 하늘로 닿는 줄기엔 빼어난 색이 없고 산등성이도 윤기가 나지 않아 이것이 (그렇게 남들이 치켜세우던) 금강산인가 하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류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흘러 가다 두미강 입구로 나와 서쪽 한양을 보면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가 보이는데 하늘에 닿을 듯 푸르게 솟았고 잔잔한 바람과 옅은 노을이 맑고 아름다워 유연한 자태를 뽐낸다. 또 남한산성 남문에 앉아 북으로 한양을 바라 본 적이 있는데 (삼각산이) 물에 비친 꽃처럼 거울에 비친 달처럼 보였다. 더러는 "시원한 바람이 공중을 떠도니 행복해 질 조짐인 왕기(旺氣)로다."라고 하였다. 행복해 질 조짐인 왕기(旺氣)는 왕의 기운인 왕기(王氣) (덕분)이다. 우리 서울의 억만년 굳건함을 위한 용이 들어 있는 쟁반을 호랑이가 걸터 앉아 지키는 땅 모양은 신령하고 밝은 기운이니 다른 산과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산의 기이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도봉산이나 삼각산 보다 더하지만 그 위에 서린 시원한 바람은 한양의 여러 산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낱말풀이

原野平濶, 雖不耕墾, 而處處砍柴根杮狼藉。 牛蹄轍跡, 縱橫艸間, 已知其近柵, 而居民之尋常出柵, 亦可驗矣。 疾驅行七八里, 抵柵外。 羊豕彌山, 朝烟繚靑, 刳木樹柵, 畧識經界。 可謂,折柳樊圃矣。 柵門覆以苫草, 板扉深鎖。 離柵數十步, 設三使幕次。 少憩, 方物齊到, 露積柵外。 群胡觀光者列立柵內, 無不口含烟竹。 光頭搖扇, 或黑貢緞衣 或秀花紬衣, 或生布生苧, 或三升布, 或野繭絲。 袴亦如之。 所佩繽紛, 或繡囊, 三四小佩刀, 皆揷雙牙箸。 烟袋, 如胡盧樣, 或繡刺花草禽鳥, 又古人名句。 譯官及諸馬頭輩, 爭立柵外, 兩相握手。 殷勤勞問, 群胡問,「你在王京那日起程, 在途時得免天水麽。家裏都是太平麽。 充得包銀麽。」 人人酬酢如出一口, 又爭問 「韓相公安相公來麽。」 此數人者, 俱義州人, 歲歲販燕, 皆巨猾, 習知燕中事。所謂相公者, 商賈相尊之稱也。

황무지가 드넓고 평탄한데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곳곳에 땔나무를 배어 내고 대패질을 한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소 발굽 자국과 수레 자국이 거침없이 풀 사이를 지난 것을 보니 이미 책문 근처인 것을 알 수 있었고 주민들이 평소에 책문 밖을 나와 돌아다니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말을 달려 일곱 여덟 리를 가니 책문 밖에 닿았다. 양이며 돼지가 산을 두를 지경이었고 아침밥 짓는 연기가 푸르게 감겨 오르고 있었으며 나무를 갈라 울타리를 쳐 경계를 표시하였다. 과연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 '절류번포 광부구구'(折柳樊圃, 狂夫瞿瞿 - "버들 가지를 꺽어 울타리로 삼으니 미친 사람도 두려워 하네"라는 구절과 같이 든든한 울타리)라고 할만 하다.

책문은 듬성듬성 나 있는 풀로 덮여 있었고 널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책문에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세 사신을 위한 장막이 세워졌다. 잠시 뒤에 방물이 도착하여 책문 밖 길 위에 쌓았다. 호인 무리가 구경하려고 책문 안에서 줄지어 섰는데 입에 담뱃대를 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반짝이는 머리에 부채질을 하는 무리들이 더러는 흑공단 옷을 입었고 더러는 꽃무늬를 수놓은 명주를 입었으며 나머지는 물을 빼지 않은 삼베 옷이나 모시 옷이었는데 심지어 올이 성긴 삼베 옷인 삼승포를 입거나 산누에 고치에서 뽑은 야견사 옷을 입은 사람들 마저 구경을 나왔다. (저고리 뿐만 아니라) 바지도 이와 같았다. 몸에 지닌 노리개도 너저분하여 더러는 수 놓은 주머니와 서너 개의 패도를 찼는데 모두 쌍으로 짝 지어 꽂은 상아 칼집에 꽂혀 있었다. 담배 쌈지도 우스운 모양이어서 꽃과 들짐승 날짐승을 수놓은 것이거나 이름난 옛 글 구절을 수놓았다. 통역관이며 마두 무리들이 앞다투어 책문 밖에 서서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은자의 무게를 확인하고 인원을 점검하는데 모여든 호인들이 물었다. "당신들 서울에서 몇 일이나 걸렸으며 오는 길에 내린 비는 피하였소? 집안은 두루 평안하오? (무역할 자금인) 포은은 받아 왔소?" 사람 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한 목소리로 똑같이 "한 상공과 안 상공은 함께 오지 않았소?" 하고 묻는다. 이렇게 묻는 몇 사람은 의주 상인들과 함께 하는 자들로 오랜 세월 연경에서 장사하여 모두 몹시 교활하고 연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았다. (이들이 부르는) 상공이란 것은 상인들이 서로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낱말풀이
  • 原野(원야): 황무지.
  • 耕墾(경간):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음.
  • 狼藉(낭자): 어지러이 널려 있음.
  • 縱橫(종횡): 원뜻은 "가로 세로로" 이지만 "거침없이 마구 지나다님"을 뜻하는 관용구로 쓰인다. 흔히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고 한다.
  • (): 청나라의 국경 관문이던 책문(柵門)을 말한다. 오늘날 펑청시(鳳城市, 봉성시) 근처로 이름이 변문(邊門, 비안먼)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의주 상인과 봉성 상인 사이의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 居民(거민): 살고 있는 백성 = 주민(住民)
  • 居民之尋常出柵, 亦可驗矣(거민지심상출책 역가험의): "주민들이 평소에 책문 밖을 나와 돌아다니는 것도 역시 확인할 수 있다." - 원래 책문에서 압록강 까지는 청나라의 봉금령에 따라 거주나 허락 없는 왕래가 금지된 곳이다. 주민들이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는 것을 보니 청나라의 공권력이 약화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 疾驅(질구): 말이나 수레 따위를 빠르게 모는 것.
  • 經界(경계):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
  • 折柳樊圃(절류번포): "절류번포 광부구구"(折柳樊圃, 狂夫瞿瞿).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채소밭 울타리를 삼으면 미친 사람도 두려워 한다." / 《시경》 〈제풍〉(齊風 , 제나라의 민요)의 "동방미명"(東方未明, 동쪽이 밝기 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는 든든한 방비가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
  • 苫草(점초): 듬성듬성 나 있는 풀.
  • 深鎖(심쇄): 자물쇠 따위를 굳게 잠금.
  • 露積(노적): 길 위에 짐을 쌓음.
  • 烟竹(연죽): 담뱃대.
  • 搖扇(요선): 부채질 하다.
  • 黑貢緞(흑공단): 검은 빛깔의 두껍고 무늬가 없는 비단.
  • 秀花紬(수화주): 꽃무늬를 수 놓은 명주.
  • 生布(생포): 물을 빼지 않은 삼베.
  • 生苧(생저): 물을 빼지 않은 모시.
  • 三升布(삼승포): 올이 성긴 질 낮은 삼베. / 흑공단에서 삼승포까지 순서대로 값비싼 옷감에서 가장 값싼 옷감이다. 즉 책문에 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나왔다.
  • 野繭絲(야견사): 산누에의 고치에서 뽑은 실. 옷을 사 입을 형편이 안되어 산누에 고치 실을 썼다는 의미로 하층민을 뜻한다.
  • 繽紛(빈분): 너저분하다.
  • 繡囊(수낭): 수 놓은 주머니.
  • 佩刀(패도): 허리춤에 차는 단도.
  • 烟袋(연대): 담배 쌈지.
  • 胡盧(호로): 웃음거리가 됨.
  • (): 중국어의 의문형 종결 조사 "마"(嗎)의 오기.
  • 包銀(포은): 사신 행차에 가져간 무역 자금.

使行時, 例給正官八包。 正官者, 裨譯共三十員。 八包者, 舊時, 官給正官, 人人蔘幾斤, 謂之八包。 今不官給 令自備銀, 只限包數。 堂上包銀三千兩, 堂下二千兩。 自帶入燕, 貿易諸貨爲奇羡。 貧不能自帶, 則賣其包窠松都, 平壤, 安州等處, 燕商買其包窠 充銀以去。 然諸處燕商, 法不得身自入燕, 將包交付灣人, 貿易以來。 如韓林諸賈, 連歲入燕, 視燕如門庭, 與燕市裨販, 連膓互肚。 兌發低仰, 都在其手, 燕貨之日增厥價, 亶由此輩。 擧國都不理會, 專責譯官。 譯官失權於灣賈, 拱手而已。 諸處燕商, 雖知爲灣賈之所操縱, 而事非目覩, 則敢怒而不敢言。 其來已久, 今者灣賈之蹔爲隱身, 不卽相見, 亦一鉤引小數也。

사신이 행차할 때에는 관례에 따라 정관에게 팔포가 지급되었다. 정관은 사신을 수행하는 비장들과 통역관으로 모두 합쳐 30 명이다. 팔포는 옛날에 관청에서 정관에게 주던 것으로 사람마다 인삼을 그 무게로 주었기에 팔포라고 부른다. 요즘엔 관청에서 주지 않고 스스로 은을 준비하도록 시키면서 포의 수량만 제한한다. 당상관은 포은으로 3천 냥까지 허락되었고 당하관에게는 2천 냥까지 허락되었다. 스스로 지니고 연경에 들어가 여러 재화와 무역하게 하니 기이하다고 할 것이다. 가난하면 스스로 마련할 수 없기에 개성이나 평양, 안주 등의 곳에서 자신이 할당 받은 포를 팔았고, 그곳의 (연경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인) 연상들이 포를 사서 은을 주면 그것을 지니고 간다. 그러나 각지의 연상은 법때문에 직접 연경에 들어갈 수 없어서 의주 상인들에게 자신이 사들인 포를 다시 팔아 넘기고 (의주 상인이 가져온 연경의 물건을) 무역하여 돌아간다. (앞서 청나라 사람들이 찾은) 한씨니 임씨니 하는 상인들이 해마다 연경에 들어가는데 연경을 마치 자기 집 문 앞 정원 보듯하여 연경 시장의 장사치와 땔래야 땔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물건 값을 불러 낮추고 올리는 것이 모두 저들의 손에 달렸기에 연경에서 들여오는 물건 값이 나날이 높아 지기만 하는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이다. 온 나라의 모두가 이러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고 통역관에게만 책임을 떠 넘긴다. 통역관은 의주 상인에 대한 권력을 잃고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각지의 연상들은 이런 의주 상인의 농간질을 알지만 보고도 보지 못한 척 화가 나도 감히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처지다. 이런 일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으니 지금 이 의주 상인들이 잠시 자리를 비워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낱말풀이
  • 八包(팔포): 인삼을 10근 씩 묶어 8 묶음을 팔포라 하였다. 조선 초에는 명에 사신을 보낼 때 인삼 10 근까지 허용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 80 근으로 늘렸다. 꼭 인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인삼 80 근과 같은 가치의 다른 물품을 지니는 것도 허용하였다. 사신 왕래 길에 팔포를 파는 것을 팔포무역이라 한다. 인삼 등의 약재에서 1근은 대략 375 그램에 해당한다. 80 근은 30 킬로그램으로 제법 무게가 나가는 양이다. 당시 조선의 인삼은 중국에서 고가에 거래되었고 조선 후기 팔포는 은 2천 냥과 같은 금액으로 통용되었다.
  • 松都(송도): 개성의 다른 이름.
  • 燕商(연상): 청나라 수도 연경(=북경)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상인, 또는 그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 서울의 경상,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이 대표적이었고 이 외에 평양, 안주의 상인도 포함되었다.
  • 交付(교부): 나누어 주다 또는 넘겨 주다.
  • 裨販(비판): 규모가 작은 장사.
  • 連膓互肚(연창호두): 서로의 배에 창자가 연결되듯 하다. 즉 "땔래야 땔 수 없는 사이"
  • 兌發低仰(태발저앙): 물건 값을 불러 낮추고 내림.
  • 日增(일증): 나날이 늘어남.
  • 擧國(거국): 온 나라.
  • 理會(이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음. 속사정을 이해함.
  • 拱手(공수): 팔짱을 끼다. 즉 "손을 쓰지 못하다"
  • 操縱(조종):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자기 뜻대로 부림. 여기서는 "농간을 부리다"의 의미.
  • 一鉤引小數(일구인소수): 갈고리 하나로 몇 수를 끌어내다. 즉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

朝飯於柵外, 整頓行裝, 則雙囊左鑰, 不知去處。 遍覔草中, 終未得。 責張福曰 「汝不存心行裝, 常常遊目, 纔及柵門, 已有閪失。 諺所謂,‘三三程一日未行’, 若復行二千里, 比至皇城, 還恐失爾五臟。吾聞, 舊遼東及東岳廟, 素號姦細人出沒處, 汝復賣眼, 又未知幾物見失。」 張福閔然搔首曰, 「小人已知之兩處觀光時。小人當雙手護眼, 誰能拔之。」 余不覺寒心, 乃應之曰, 「善哉,」 葢福也。 年少初行, 性又至迷, 同行馬頭輩, 多以戲語誑之, 則福也眞個信聽。 每事所認, 皆此類也。 遠途所仗, 可謂寒心。

책문 밖에서 아침을 먹고 행장을 정돈해 보니 (말에 실은) 양쪽 주머니의 왼쪽 자물쇠가 어디로 갔는 지 알 수 없다. 풀섶을 이리 저리 뒤져 보아도 결국 찾지 못하였다. 장복을 탓하며 "네가 행장에 마음을 두지 않고 언제나 한눈을 팔고 다니니 겨우 책문에 왔을 뿐인데 벌써 (자물쇠를) 잊어 버리고 말았다. '사흘 걸릴 길을 하루도 못 간다'고 하는 말마따나 황성까지 가는 길이 왕복 2천 리인데 돌아오는 길에는 네 녀석 (몸 속의) 오장을 잃어 버리겠구나. 내가 듣기로 옛 요동에서 동악묘까지 좀도둑이 출몰한다고 하던데, 네가 다시 눈을 팔면 이번엔 어떤 물건을 잃어버릴 지 모르겠다."하고 말하였다. 장복은 연신 머리를 긁으며 "쇤네가 두 곳을 살펴 볼 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쇤네가 두 손으로 눈을 지키는데 누가 뽑아 가겠습니까요." 한다. 나는 한심하다고 느끼면서도 "좋다"하고는 장복을 더 나무라지 않았다. (장복은) 나이도 어리고 처음 마두로 나선 길인데다 성격 또한 어리숙하여 함께 가는 마두 무리들이 자주 희롱하고 속였으나 장복은 그 말들을 곧이 곧대로 믿고 듣고는 하였다. 매사가 이렇게 되는 것은 모두 그들 무리 때문이다. 먼 길에 의지하여야 하는 터에 참으로 한심하다.


낱말풀이
  • 常常(상상): 언제나. 한결같이.
  • 閪失(서실): 물건을 흐지부지 잃어 버림.
  • 五臟(오장): 몸에 있는 다섯 가지 장기. 심장, 신장, 간장, 폐장, 비장을 말한다.
  • 東岳廟(동악묘): 북경 성문 근처에 있던 도교 사원으로 원나라 때 지어졌다. 조선 사신 행차는 이 곳에 도착하면 정식 관복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 姦細人(간세인): 좀도둑.
  • 寒心(한심): 정도에 알맞지 않아 마음이 가엾고 딱함.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 然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甞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羡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羡。」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少焉大開柵門, 鳳城將軍及柵門御史, 方來坐店房云。 群胡闐門而出, 爭閱視方物及私,卜輕重, 葢自此雇車而運也。 來觀使臣坐處, 含烟睥睨, 指點相謂曰, 「王子麽。」 宗室正使, 稱王子故也。 有認之者曰 「不是這個斑白的駙馬大人。 頃歲來的。」 指副使曰 「這髯的雙鶴補子, 乃是乙大人。」 指書狀曰 「三大人俱翰林出身的文官之稱也。」

다시 책문 밖으로 돌아가 책문 안을 바라보니 모여 있는 민가들 모두 들보 다섯을 써 높게 올렸고 지붕은 새를 엮어 올렸으며 지붕 마루는 둥글게 올라 있고 드나드는 문이 반듯하였다. 길 역시 반듯하고 평탄하여 양 옆이 줄을 댄 듯 하였고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아 올렸다. 수레를 타거나 짐수레를 몰고 길을 거침없이 지나고 (상점에) 벌려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이런 제도를 보니 결코 시골의 기운이 아니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덕을 보니 과연 규모가 크고 상세한 법도라고 할 만 하였다.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끄트머리인데도 그 모습이 이러하여 앞 길을 구경하는데 문득 곧바로 나 스스로 이것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뱃속이 끓어오는 감정이 몰려왔다.

나는 크게 반성하며 "질투가 나는구나. 내가 원래 성격이 담백하여 시기나 질투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었는데 이제 국경 밖으로 한 걸음 내뎌 만분의 일을 보았을 뿐인데도 망령된 마음이 이와 같이 일어나니 어찌하랴. 이는 바로 (이제껏) 본 것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와 같은 혜안이라면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든 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질투함이 없을 것을."하고 생각하였다. 장복을 돌아보며 "너는 다음 생에 중국에서 태어나면 어떻겠느냐?" 하니 "중국은 오랑캐라 쇤네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마침 맹인 한 명이 비단 주머니를 어깨에 두르고 손으로 월금을 연주하며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것이야 말로 평등한 눈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잠시 뒤 책문이 크게 열리고 봉성장군과 책문어사가 점방에 와 앉았다고 하였다. 호인들이 문에 매달리듯 나와 다투어 가며 방물과 개인의 물품을 살펴 보고, 무게를 재고는 수레에 옮겨 싣고 간다. 사신이 앉은 자리도 보러 와서 담뱃대를 물고 곁눈질로 서로 손가락질하며 "왕자인가?"하고 궁금해 한다. 종실인 정사를 왕자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 중에 알아보는 사람이 "그게 아니라 저 머리 희끗한 분이 부마대인이셔. 몇 해 전에 오신 적이 있으시지." 한다. 부사를 가리키며 "저기 수염 있고 쌍학을 수 놓은 관복을 입은 분이 을대인이시지" 하고는 서장을 가리키며 "삼대인은 한림 출신의 문관이시군." 하였다.


낱말풀이

溪邊有喧讙爭辨之聲, 而語音啁啾。 莫識一句, 急往觀之, 得龍方與群胡, 爭禮物多寡也。 禮單贈遺時, 攷例分給, 而鳳城姦胡, 必增名目, 加數要責。 其善否, 都係上判事馬頭。 若値生手, 不嫺漢語, 則不能爭詰, 都依所要。 今歲如此, 則明年已成前例, 故必爭之。 使臣不知此理, 常急於入柵, 必促任譯, 任譯又促馬頭, 其弊原久矣。 象三, 上判事馬頭, 方分傳禮單, 群胡環立者百餘人。 衆中一胡, 忽高聲罵象三, 得龍奮髯張目, 直前揪其胸, 揮拳欲打。 顧謂衆胡曰, 「這個潑皮好無禮, 往年大膽, 偸老爺鼠皮項子, 又去歲, 欺老爺睡了, 拔俺腰刀, 割取了鞘綬, 又割了俺所佩的囊子。 爲俺所覺送, 與他一副老拳, 作知面禮。 這個萬端哀乞, 喚俺再生的爺孃, 今來年久, 還欺老爺。 不記面皮好大膽高聲大叫如此。 鼠子輩拿首了鳳城將軍。」 衆胡齊聲勸解, 有一老胡, 美鬚髯衣服鮮麗, 前抱得龍腰曰, 「請大哥息怒。」 得龍回怒作哂曰, 「若不看賢弟面皮時這部, 截筒鼻一拳, 歪在鳳凰山外。」 其擧措恇攘可笑。 趙判事達東來立余傍, 余爲說俄間光景, 可惜獨觀。 趙君笑曰 「這是殺威棒法。」 趙君促得龍曰, 「使道今將入柵, 禮單 火速分給。」 得龍連聲唱喏, 故作遑遽之色。 余故久立詳觀所給物件名目, 極爲恠雜。

柵門守直甫古二名, 甲軍八名, 各白紙十卷, 小烟竹十箇, 火刀十箇, 封草十封。 鳳城將軍二員, 主客司一員, 稅官一員, 御史一員, 滿洲章京八人, 加出章京二人, 蒙古章京二人, 迎送官三人, 帶子八人, 博氏八人, 加出博氏一人, 稅官博氏一人, 外郞一人, 衙譯二人, 筆帖式二人, 甫古十七人, 加出甫古七人, 稅官甫古二人, 分頭甫古九人, 甲軍五十名, 加出甲軍三十六名, 稅官甲軍十六名, 合一百二人, 分給壯紙一百五十六卷, 白紙四百六十九卷, 靑黍皮一百四十張, 小匣草五百八十匣, 封草八百封, 細烟竹七十四箇, 八面銀項烟竹七十四箇, 錫粧刀三十七柄, 鞘刀二百八十四柄, 扇子二百八十八柄, 大口魚七十四尾, 月乃, 革障泥七部, 環刀七把, 銀粧刀七柄, 銀烟竹七箇, 錫長烟竹四十二箇, 筆四十枝, 墨四十丁, 火刀二百六十二箇, 靑靑月乃二部, 別烟竹三十五箇, 油芚二部。

群胡不做一聲, 肅然受去。 趙君曰 「得龍能則能矣。 彼往歲元無失, 揮項刀囊等事。 公然惹閙, 罵折一人, 衆人自沮。 皆面面相顧, 無聊卻立。 若不如此, 雖三日不决, 無入柵之期矣。」 已而, 軍牢跪告曰 「門上御史, 鳳城將軍出坐收稅廳。」 於是三使次第入柵 狀啓例付義州鎗軍而回矣 一入此門 則中土也 鄕園消息 從此絶矣 悵然東面而立良久 轉身緩步入柵

시냇가에서 말다툼 하는 시끌시끌 한 소리가 들려 가 보니 마치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급히 가서 보니 득룡이 여러 호인들에게 둘러싸여 예물이 많니 적니 다투고 있다. 예단을 줄 때에는 관례에 따라 나누어 주는데 봉성의 교활한 호인들은 꼭 가지 수를 늘리고 수량을 더 달라고 한다. 그것이 되고 안되고는 모두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렸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고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제대로 따질 수가 없어 달라는 대로 주게 된다. 올해 이렇게 하면 이듬해에는 그것이 전례로 굳기 때문에 다툴 수 밖에 없다. 사신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늘 책문에 들어가는 것을 서둘러 통역을 재촉하고 통역은 또 마두를 재촉하니 그 폐단의 뿌리가 오래되었다. 상판사 마두인 상삼이 예단을 나누어 전하는데 호인 백여 명이 둘러싸 서있다.

그 중 한 호인이 갑자기 상삼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욕을 하자 득룡이 수염을 부르르 떨고 눈을 부라리며 곧장 그 앞으로 가서 가슴팍을 부여잡고 주먹으로 때리려 하였다. 호인 무리를 돌아보며 "이 무뢰배 녀석이 이토록 무례하여 재작년에는 겁도 없이 어르신의 서피항을 훔쳤고, 또 작년에는 이 어르신께서 주무시는데 내 허리춤의 칼을 풀어 칼집을 훔치고 내가 차고 있던 주머니도 훔쳤겠다. 내가 이 놈 소행을 알고 늙은 주먹으로 한 방 먹여서 신고식 삼았거늘. 이 녀석이 만 번을 애걸복걸 하면서 나를 되살아 온 아버지라 불러 놓고 올 해 오랜 만에 왔더니 다시 어르신을 속이는 구나. 얼굴도 잊어버리고 이리 겁 없이 큰 소리를 내는 것이냐? 이 쥐새끼를 봉성장군께 잡아가야 하겠다."하고 을러대었다. 모여든 호인 무리가 일제히 화해를 청하는데 아름다운 수염에 옷을 잘 갖춰 입은 나이 든 호인 하나가 득룡의 허리를 끌어 잡으며 "형님이 화를 삭히시죠." 한다. 득룡은 화를 거두고 빙긋 웃으며 "아우님 체면을 보아 그만 두네만, 그렇지 않았으면 주먹 한 방으로 콧대를 봉황산 밖으로 날려 버렸을 걸." 하고 말했다. 허풍을 떠는 행동거지가 참 우스웠다. 판사 조달동이 내 옆에 와 섰길래 나는 조금 전 광경을 이야기 해 주며 혼자 보기 아깝더라고 하였다. 조군은 웃으며 "이게 (꼼짝 못하게 다루는) 살위봉법이라는 거죠." 한다. 조군은 득룡을 재촉하며 "사신 행차가 지금 책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예단을 재빨리 나누어 주거라." 하였다. 득룡은 연신 네네 하고 대답하며 서두르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누어 주는 물건의 목록을 보았는데 참으로 괴상하고 잡스러웠다.

책문 수직포고 2 명, 갑군 8 명 - 각 백지 10권. 작은 담뱃대 10개, 부시 쇠 10개, 봉초 담배 10봉. 봉성장군 2 원, 세관 1 원, 어사 1 원, 만주 장경 8 인, 가출 장경 2 인, 몽고 장경 2 인, 영송관 3 인, 대자 8 인, 박씨 8 인, 가출 박씨 1 인, 세관 박씨 1 인, 외랑 1 인, 어역 2 인, 필첨식 2 인, 포고 17 인, 가출 포고 7인, 세관 포고 2 인, 분두 포고 9 인, 갑군 50 명, 가출 갑군 36 명, 세관 갑군 60 명, 합 102 인 - 장지 156 권을 나누어 줌, 청서피 140 장, 작은 담배 상자 580 갑, 봉초 담배 800 봉, 가는 담뱃대 74 개, 팔면은목 담뱃대 74 개, 주석으로 만든 장도 37 자루, 초도 284 자루, 부채 280 자루, 대구어 74 마리, (가발의 일종인) 다래, 가죽으로 만든 장니 7 벌, 환도 7 자루, 은장도 7 자루, 은 담뱃대 7 개, 주석으로 만든 긴 담뱃대 42 자루, 붓 40 자루, 먹 40 개, 부시 쇠 262 개, 청청 다래 2 벌, 특별히 잘 만든 연죽 35 개, 기름 먹인 종이 2 벌.

호인 무리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조용히 받아 갔다. 조군은 "득룡이 잘하긴 잘합니다. 그가 제작년에 휘항이니 칼집이니 하는 것을 잃었다는 일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일부러 한 놈을 붙잡아 행패를 부려서 다른 무리들을 막은 것이죠.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 보다 대거리를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흘이 지나도 결판이 나지 않아 책문 안으로 들지 못하였을 겁니다." 하였다. 이 때 군뢰가 무릎을 꿇고 "문상어사와 봉성장군이 수세청에 나와 앉으셨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낱말풀이

路右有草廳三間, 自御史將軍下至衙譯, 分班列椅而坐, 首譯以下拱手前立。 使臣至此, 馬頭叱隷, 「停轎。」 乍脫驂若將卸駕者, 因卽疾驅而過。 副三房亦如之, 有若相救者, 令人捧腹。 裨將譯官, 皆下馬步過, 獨卞季涵騎馬突過。 末坐一胡, 忽以東話高聲大罵曰, 「無禮無禮。 幾位大人坐此, 外國從官, 焉敢唐突。 遄告使臣, 打臀可也。」 聲雖嘶哮, 舌强喉澁, 如乳孩弄嬌, 醉客使癡。 此卽護行通官雙林云。 首譯對曰 「這是弊邦太醫官。 初行未諳事體。 且太醫, 奉國命, 隨護大大人, 大大人亦不敢擅勘。 諸老爺仰體皇上字小之念, 免其深究, 則益見大國寬恕之量。」 諸人皆點頭微笑曰 「是也是也。」 獨雙林視猛聲高, 怒氣未解。 首譯目余使去, 道逢卞君。 卞君曰 「大辱逢之。」 余曰 「臀字可慮。」 相與大笑, 遂聯袂行翫, 不覺讚歎。

길 오른 편에 초가 삼간으로 된 관청이 있어 어사 장군부터 어역까지 직급에 따라 놓인 의자에 앉았고 수석 통역 이하는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사신이 그곳에 도착하자 마두가 "가마를 멈추시오."하고 소리친다. 장군과 어사가 있는 곳을 벗어나 가마를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부사와 삼방 역시 이와 같아서 서로 부르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우스웠다. 비장과 역관도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쳐 걸어 가는데 오직 변계함 만이 말을 타고 지나쳤다. 말석에 앉아 있던 호인 한 명이 (이것을 보고) 별안간 조선말로 크게 소리치며 "무례하고 무례하다. 이미 대인이 여기 앉아 계시는데 외국 사신의 부하가 어찌 이리 당돌한가. 빨리 사신께 아뢰어 볼기를 칠 만 하다."하고 꾸짖는다.

몹시 화가난 목소리였지만 딱딱한 혀로 목구멍이 막힌 듯한 소리를 내니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나 술 취한 사람의 술주정 같이 들렸다. 그는 호행통관인 쌍림이라고 한다. 수석 역관이 "이 자는 저희 나라 어의입니다. 초행 길이라 관례를 잘 모릅니다. 또 어의는 나라의 명의 받을어 대대인을 수호하니 대대인 역시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 대감들께서는 황상의 자비로운 마음을 받들어 너무 깊이 따지지 마시고 대국의 아량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옳소, 옳소." 한다. 오직 쌍림만 눈을 부라리고 목소리를 높이며 화가 풀리지 않았다.

수석 역관이 나를 변군에게 보냈다. 변군이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하니 내가 "볼기가 걱정이지."하고 대답하였다. 서로 크게 웃고는 소매를 나란히 하여 (책문) 구경을 나섰는데 연신 찬탄을 하였다.


낱말풀이

柵內人家, 不過二三十戶, 莫不雄深軒鬯。 柳陰中挑出一竿靑帘, 相携而入, 東人已彌滿其中矣。 赤脚突鬢, 騎椅呼呶, 見余皆奔避出去。 主人大怒指着, 卞君道「不解事的官人, 好妨人賣買。」 戴宗撫其背曰, 「哥哥, 不必饒舌。 兩位老爺, 略飮一兩杯, 便當起身, 這等𩴌魀, 那敢橫椅。 蹔相回避, 卽當復來。 已飮的, 計還酒錢, 未飮的暢襟快飮, 哥哥放心。 先斟四兩酒。」 主人堆着笑臉道, 「賢弟, 往歲, 不曾瞧瞧麽。 這等𩴌魀於鬧攘裡, 都白喫一道烟, 走了罷那地覔酒錢。」 戴宗曰 「哥哥勿慮。 兩位老爺飮後卽起, 弟當盡驅這廝回店賣買。」 店主曰 「是也。 兩位都斟四兩麽。 各斟四兩麽。」 戴宗道 「每位四兩。」 卞君罵曰 「四兩酒誰盡飮之。」 戴宗笑曰, 「四兩非酒錢也, 乃酒重也。」 其卓上列置斟器, 自一兩至十兩。 各有其器, 皆以鍮鑞造觶, 出色似銀。 喚四兩酒, 則以四兩觶斟來。 沽酒者更不較量多少, 其簡便若此。 酒皆白燒露, 味不甚佳, 立醉旋醒。 周視鋪置, 皆整飭端方, 無一事苟且彌縫之法, 無一物委頓雜亂之形。 雖牛欄豚柵, 莫不疎直有度, 柴堆糞庤, 亦皆精麗如畵。 嗟乎, 如此然後始可謂之利用矣。 利用然後可以厚生, 厚生然後正其德矣。 不能利其用而能厚其生, 鮮矣。 生旣不足以自厚, 則亦惡能正其德乎。 正使已入鄂姓家, 主人身長七尺, 豪健鷙悍, 其母年近七旬, 滿頭揷花, 眉眼韶雅, 聞其子孫滿前云。

책문 안 민가는 불과 이삽십 호였으나 처마가 웅장하게 치솟아 올라 있었다. 버드나무 그늘 안에 주막을 알리는 푸른 기 하나가 솟아 있고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데 조선 사람이 이미 가득하다. 살을 드러낸 맨다리에 귀밑 수염이 삐죽하게 나온 사내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모두 도망치듯 나가버린다. 주인이 손가락으로 변군을 가리키면서 "일을 알지 못하는 관리가 사람들의 거래를 방해한다"고 크게 화를 내었다.

대종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형님, 여러 말씀 하지 마소. 이 두 분이야 간단히 술이나 한 잔씩 하면 일어서실 것이니. 저 불한당들이 감히 의자 위에 뒹굴어서야 되겠소. 잠시 서로 피하고 나면 곧바로 다시 올게요. 이미 마신 술값이나 계산해 두시고 아직 못 마신 술은 (저들이 돌아와서) 옷깃을 풀고 유쾌하게 마실 것이니 형님은 마음 놓으시오. 여기 먼저 넉 냥 술이나 내시구려." 한다. 주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우님, 재작년에 보지 못했나? 저 불한당 놈들이 시끄러운 틈을 타 모두 공짜로 먹고 담배를 피운다 하고는 그대로 도망가 버려서 술값을 못받았네." 하고 말하였다. 대종은 "형님 걱정 마소. 두 어르신이 마시고 일어나시면 제가 당장 저 천것들을 쫓아가서 가게로 돌아와 값을 치르라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점주는 "좋네. 두 분 합쳐서 넉 냥을 드릴까? 각각 넉 냥을 드릴까?" 한다. 대종이 "어르신 한 분 마다 넉 냥이오." 하니 변군이 놀라 "넉 냥 술을 어찌 다 마시나?" 하였다. 대종이 웃으며 "넉 냥이란 게 술값이 아니고 술 무게 입니다." 하였다. 탁자 위에 술 그릇이 한 냥짜리에서 열 냥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각각의 그릇은 모두 주석을 땜하여 만들었는데 은빛 색깔을 띄었다. 넉 냥 술을 시키니 즉각 넉 냥을 따라 가지고 온다. 호인들의 술은 (이렇게 크기가 미리 정해진 그릇에 팔아서) 다시 술 무게를 재서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 이와 같이 간단히 살 수 있다. 술은 모두 백소로인데 맛이 썩 좋지는 않으나 취했더라도 돌아서면 바로 깬다.

가게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어 무엇 하나 대충 한 것이 없고 물건 하나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이 없다.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라 하더라도 제도를 갖추어 짓지 않은 것이 없고 땔나무며 똥 무더기도 역시 모두 그림을 그린 듯 정리하여 두었다. 슬프도다, 이렇게 한 후에야 이른바 (백성의 기구와 의식을 넉넉하고 편하게 하는) 이용이란 것을 말할 수 있으련만. 이용이 된 후에야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되어야 덕을 바로 펼 수 있는 것이다. 이용도 하지 못하면서 후생을 하기란 어렵다. 생산이 스스로 윤택하기에 부족하면 덕을 바로 펴는 것도 힘들게 된다.

정사는 이미 (책문의 유력자인) 악씨 성을 가진 자 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은 키 7 척(약 210 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구로 올해 나이 칠순에 가까웠고 만주족 변발도 꽃이 핀듯 희었으며 눈썹이며 눈동자가 잘 생겼는데 그 자손들도 번창하고 있다고 하였다.


낱말풀이
  • 彌滿(미만): 널리 퍼지어 가득참.
  • 赤脚(적각): 살을 그대로 들어낸 다리. 맨다리.
  • 賣買(매매): 사고 팜. 거래.
  • 哥哥(가가): 형님.
  • 饒舌(요설): 수다스럽게 지껄임.
  • 𩴌魀(감개): 불한당. 𩴌은 《강희자전》에서 빠져있다.
  • 蹔相回避(잠상회피): 잠시 서로 피하다.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상민으로 양반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한 것이다.
  • 酒錢(주전): 술값.
  • 堆着笑臉(퇴착소검): 뺨에 웃음을 발라 붙인다는 말이니 "쓴웃음을 짓다"는 뜻.
  • 賢弟(현제): 아우뻘 되는 사람을 높이는 말. "아우님".
  • 白喫(백끽): 공짜로 먹다.
  • 白燒露(백소로): 백주(白酒, 바이주)의 일종. 흔히 배갈이라고 부른다.
  • 彌縫(미봉):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맞춤. 대충대충 함.
  • 牛欄豚柵(우란돈책): 소 외양간과 돼지 우리.
  • 嗟乎(차호): 슬프도다.
  • 利用厚生(이용후생): 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넉넉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함. 조선 후기 실학이 이용후생을 강조하였으나 이용후생의 개념 자체는 성리학적 정치관의 것이다.
  • 鮮矣(선의): 어렵다. / 어렵다를 나타낼 수 있는 다른 단어(이를 테면 難)를 놔두고 鮮을 쓴 것은 중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요즘 유행어 식으로 말하면 "조선이 조선했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點心後, 與來源及鄭進士, 出行觀翫鳳凰山。 離此六七里, 看其前面, 眞覺奇峭。 山中有安市城舊址, 遺堞尙存云. 非也。 三面皆絶險, 飛鳥莫能上, 惟正南一面稍平, 周不過數百步, 卽此彈丸小城, 非久淹大軍之地。 似是句麗時小小壘堡耳。 相携至大柳樹下納凉。 有井甎甃, 又磨治全石爲覆盖, 穿其兩傍, 劣容汲器。 所以防人墮溺, 且鄣塵土。 又水性本陰, 故使蔽陽養活水也。 井葢上設轆轤, 下垂雙綆, 結柳爲棬。 其形如瓢而深, 一上一下. 終日汲, 不勞人力。 水桶皆鐵箍, 以細釘緊約, 絶勝於綰竹。 爲經歲久則朽斷, 且桶身乾曝, 則竹箍自然寬脫。 所以鐵箍爲得也, 汲水皆肩擔而行, 謂之扁擔。 其法削一條木如臂膊大, 其長一丈, 兩頭懸桶, 去地尺餘, 水窸窣不溢。 惟平壤有此法, 然不肩擔而背負之故, 甚妨於窄路隘巷。其擔法又此爲得之。 昔鮑宣妻提瓮出汲, 余甞疑何不頭戴而手提之。 乃今見之, 婦人皆爲高髻不可戴矣。

점심을 먹고 내원과 정 진사와 함께 봉황산 구경을 나섰다. 예닐곱 리를 가니 전면이 보였는데 참으로 기이하게 깍여 있었다. 산 속에 안시성의 옛 터가 있고 지금도 성 가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삼면이 모두 끊어져 가파르고 오직 남쪽 한 면만 그나마 조금 평탄한데 둘레가 수백 보에 불과하여 여기엔 작은 성곽을 두를 수 있을 뿐이어서 그 옛날 대군에 맞선 땅이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고구려 시절 작디 작은 보루였을 것이다. 일행이 서로 끌어가며 큰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가니 시원하였다.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는데 돌을 갈아 만든 뚜껑을 덮고 그 양 옆으로 구멍을 내고 물 길을 그릇을 매달아 두었다. 이로서 사람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흙먼지를 막는다. 또한 물의 성질은 본래 음이니 (햇볕과 같은) 양의 기운이 닿지 않도록 막아야 물을 살려 기를 수 있다. 우물 덮개 위로 도르래가 있고 두레박 둘을 늘어뜨려 버드나무에 묶어 두었다. 이와 같이 두레박을 매어 놓으니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가 하루 종일 물을 길러도 사람의 힘이 들지 않는다. 수통은 모두 쇠 테두리를 두르고 쇠못으로 단단히 박아두어 대나무 테보다는 한결 낫다. 여러 해를 사용하여 오래되면 결국 썩고 끊어지기 마련이고 수통을 건져 말리다 보면 대나무 테두리는 뒤틀려 벗겨진다. 이 쇠 테두리 수통으로는 물을 길어 어깨에 지고 가서 이를 편담이라고 부른다. 편담을 지는 방법은 양팔 길이 정도 되는 길이인 한 장 길이 큰 나무 장대 양 끝에 물통을 달고 땅에서 한 자 정도 높이로 매달아 걸으면 물이 찰랑거려도 넘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평양에서도 이런 방법을 쓰지만 어깨에 걸지 않고 등 뒤로 매기 때문에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을 지날 때면 통행에 방해가 된다. 물통 지는 방법 하나도 이처럼 이득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 포선의 처가 동이로 물을 길러 날랐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조선에서 처럼) 머리에 동이를 이고 날랐다는 것인지 (지금의 중국처럼) 손으로 날랐다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지금 보니 (중국의) 부인들은 모두 머리를 높이 올려 무엇이고 (머리에 이고는) 나를 수 없다.


낱말풀이
  • 點心(점심): 끼니로 낮에 먹는 음식. 점심은 원래 선종 불교에서 나온 말로 말 그대로 마음에 점 하나 찍듯이 간단히 먹는 것을 뜻했다.
  • 安市城(안시성): 고구려 시기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 싸워 패하지 않은 성읍.
  • 壘堡(누보): = 보루(堡壘). 적은 부대가 주둔하여 경비를 서던 망루.
  • 納凉(납량): 여름철 더위를 피해 서늘한 곳을 찾음.
  • 塵土(진토): 흙먼지.
  • (): 음양설에 따른 성질의 하나. 음양설은 세상의 만물을 음과 양으로 구분한다. 이를 테면 하늘은 양, 땅은 음이다.
  • 轆轤(녹로): 도르래.
  • 水桶(수통): 물을 긷거나 담는 통.
  • 鐵箍(철고): 쇠로 만든 테두리.
  • 絶勝(절승): 절승은 여러 의미로 쓰이는 낱말이다. 여기서는 "한결 낫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다른 뜻으로는 "훌륭한 경치"라는 뜻이 있다.
  • 歲久(세구): 여러 해가 지나 오래 되다.
  • 臂膊(비박): 팔과 어깨.
  • 窄路隘巷(착로애항):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
  • 鮑宣妻(포선처): 포선은 한나라 시기 관리이다. 《자치통감》 등에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포선 처의 이름은 소군(少君)으로 포선 스승의 딸이다. 《소학》 외편 선행편에 포선의 처가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가난한 포선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西南廣濶, 作平遠山淡沱水。

千柳陰濃
茅簷疎籬
時露林間
平堤綠蕪
牛羊散牧
遠橋行人
有擔有携
立而望之

頓忘間者行役之憊。 兩人者爲觀新刱佛堂, 棄我而去。 有十餘騎揚鞭馳過, 皆繡鞍駿馬, 意氣揚揚。 見余獨立, 滾鞍下馬, 爭執余手, 致慇懃之意。 其中一人美少年, 余畫地爲字以語之, 皆俯首熟視, 但點頭而已, 似不識爲何語也。

서남쪽은 탁 트여 널찍하니 먼 산까지 평탄한데 맑은 물이 흐른다.

수 많은 버드나무 그늘이 짙고
초가의 울타리는 듬성듬성 한데
숲 사이로 안개가 지나고
평평한 제방에 잡초가 무성하다.
소떼며 양떼를 흩어 기르고
먼 다리 위로 지나는 사람
혹은 짊어 지고 혹은 들고 가며
우두커니 이 광경을 보고 섰구나.

이런 광경에 여행길 고달픔을 까맣게 잊었다. 두 사람은 새로 단장한 불당을 구경한다고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10여 명이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며 지나는 것을 보니 모두 수 놓은 안장을 놓은 날랜 말들을 타고 의기 양양하게 지나간다. 내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멈추고 말을 내려 내 손을 다투어 부여 잡는 모습에서 친절한 마음이 묻어났다. 그중에 잘생긴 소년이 한 명 있길래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무슨 말인지 알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낱말풀이

有兩碑, 皆靑石。 一門上御史善政碑, 一稅官某善政碑。 俱滿州人四字名, 撰書者 亦俱滿州人。 文與筆俱拙, 但碑制極佳。 功費甚省, 此可爲法。 碑之兩傍, 不磨滑, 甎築夾碑爲墻, 沒碑頂。 因瓦覆爲屋, 碑在𥦔中, 以備風雨, 勝於建閣韜碑。 碑趺贔屭 及碑文兩邊, 所鐫覇夏, 可數毫髮。 此不過窮邊民家所建, 然其精緻古雅 不可當也。

푸른 돌로 만든 비석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위에 어사 선정비라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세관 아무개의 선정비이다. 만주 사람 이름 넉자와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세겨져 있는데 역시 만주인이다. 문장이나 글씨는 보잘 것 없었으나 비를 세우는 제도는 아름답기 그지 없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세심하게 살핀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의 양 옆은 반들거리게 갈지 않고 대신 벽돌을 울타리처럼 쌓아 그 속에 비를 넣었다. 이어서 기와로 지붕을 만들어 올려서 비는 그 속에 파묻힌 모양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으니 (조선에서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짓는) 비각보다 낫다. 비는 힘을 들여 자리를 잡아 세우고 비의 양 면에 글을 새기고 패하를 털처럼 가는 선으로 그렸다. 이것은 그저 변방 시골의 민가에 세워진 것이지만 정교하여 예스럽고 아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낱말풀이

向夕暑氣益熾, 急往所寓。 高揭北牕, 脫衣而臥。 北庭平廣, 葱畦蒜𣎒, 端方正直。 蓏棚匏架, 磊落蔭庭。 籬邊紅白蜀葵及玉簪花, 方盛開。 簷外有石榴數盆及繡毬一盆, 秋海棠二盆。 鄂之妻手提竹籃, 次第摘花, 將爲夕粧也。 昌大得酒一觶卵炒一盤而來餉曰, 「何處去耶, 幾想殺我也。」 其故作癡態, 以納忠款, 可憎可笑。 然酒我所嗜也, 况卵炒亦我所欲乎。

是日行三十里, 自鴨綠江至此, 該有一百二十里。 我人曰, 「柵門。」 本處人曰,「架子門。」 內地人曰,「邊門。」

저녁이 되어가니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려 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북쪽 창문을 활짝 열고 옷을 벗고 누웠다. 숙소 북쪽 정원이 평탄하고 너른데 파며 마늘을 기르는 밭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치렁치렁 매달린 박 줄기가 정원에 그늘을 드리운다. 울타리 주위로 울긋불긋 접시꽃이며 비비추가 만발하였다. 처마 밖으로 석류 몇 그루와 수국 한 그루, 베고니아 두 그루가 있다. 악씨의 처가 대나무 바구니에 꽃을 따 모아 저녁에 꽃꽂이로 장식한다고 한다. 창대는 술 한 동이와 계란 볶음 한 접시를 가지고 와서 "어디 가셨다 오셨습니까? 저 죽이시려구요." 한다. 그 하는 짓거리가 못났지만 그래도 충성으로 하는 것이라 괘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그러나 술이야 말로 내가 즐기는 것이고 계란 볶음 역시 내가 딱 원하는 것이다.

이날 삼십리를 걸었고 압록강에서 이곳 까지는 120 리가 되었다. 우리는 "책문"이라 부르고 이곳 사람들은 "가자문"이라고 부르며 중국 내지 사람들은 "변문"이라고 한다.


낱말풀이

책문의 모습과 옛 영토에 대한 생각

편집

二十八日乙亥 (朝霧晩晴)

28일 을해, 아침에 안개 저녁에 갬.

早與卞君先爲發行。 戴宗遙指一所大庄院曰, 「此通官徐宗孟家也。 皇城亦有家, 更勝於此。 宗孟貪婪多不法, 吮朝鮮膏血。 大致富厚, 旣老爲禮部所覺, 家之在皇城者被籍, 而此猶存。」 又指一所曰, 「雙林家也。」 其對門曰, 「文通官家也。」 舌本瀏利如誦熟文, 戴宗宣川人也。 已六七入燕云。

아침에 변군과 함께 먼저 길을 나섰다. 대종이 큰 밭이 딸린 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통역관 서종맹의 집입니다. 황성에도 집이 있었는데 이것보다 더 으리으리 합니다. 종맹이 탐욕스러워 불법을 많이 저질렀는데 아주 조선의 고혈을 빨아댔습니다. 다 늙게 되어서 예부가 이를 알고 황성에 있는 집은 몰수했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남겨두었습지요." 하고 말하였다. 또 한 곳을 가리키며 "쌍림의 집입니다." 하고는 맞은 편 문을 가리키며 "문 통역관의 집입니다." 하였다. 혀에 기름을 칠한 듯 술술 글을 외우는 대종은 선천 사람이다. 이미 연경엔 예닐곱 차례 다녀 왔다고 한다.


낱말풀이

比至鳳城三十里, 衣服盡濕。 行人髭鬚結露, 如秧針貫珠。 西邊天際, 重霧忽透, 片碧纔露, 嵌空玲瓏, 如牕眼小琉璃。 須臾霧氣, 盡化祥雲, 光景無限。 回看東方, 一輪紅日, 已高三竿矣。

봉성에서 삼십리를 가니 입은 옷이 온통 축축해 졌다. 모두 수염에 이슬이 맺혀 갖 자란 볏모에 동그라미를 주렁 주렁 매단 모습이었다. 서쪽 하늘 끝을 보니 무거운 안개가 문득 밀려나고 한 조각 푸른 하늘이 살짝 나타나 영롱한 구멍을 새겨 놓은 모습이 마치 작은 유리로 만든 창문틀 눈 같았다. 삽시간에 안개가 구름으로 바뀌어 가 없는 풍경을 이룬다. 동쪽을 돌아보니 둥글고 붉은 태양이 이미 세 장이나 높이 올라있다.


낱말풀이

中火於康永太家。 永太年二十三, 自稱民家, 漢人。 稱民家, 滿人, 稱旗下。 白晢美麗, 能鼓西洋琴。 問,「讀書否。」 對曰, 「已誦四書, 尙未講義。」 所謂誦書講義, 有兩道, 非如我東初學之兼通音義。 中原初學者, 只學四書章句, 口誦而已, 誦熟然後, 更就師受旨曰, 「講義。」 設令終身未講義, 所習章句, 爲日用官話。 所以萬國方言, 惟漢語最易, 且有理也。 永太所㞐精洒華侈, 種種位置, 莫非初見。 炕上鋪陳, 皆龍鳳氍毺椅榻所藉, 皆以錦緞爲褥。 庭中設架 以細簟遮日, 四垂緗簾, 前列石榴五六盆, 就中白色石榴盛開。 又有異樹一盆, 葉類冬栢, 果似枳實, 問其名曰, 無花果。 果皆雙雙並蔕, 不花結實, 故名。

점심에 강영태의 집이 있다. 영태는 23 세로 스스로를 민가라 부르는 한인이다. 민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주족은 기하라고 하였다. 희고 밝은 피부에 잘 생겼고 양금 연주를 잘했다. "글은 읽었는가?"하고 물으니 "사서를 독송하였지만 아직 '강의'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한다. 그가 말하는 책을 독송하고 강의를 배우는 두 가지 방법은 우리 나라에서 초급 학습자가 배울 때 음과 뜻을 함께 익히는 것과 다르다. 중원의 초급 학습자는 먼저 사서의 구절들을 통째로 암송하고 암송이 익숙해 지면 스승에게 그 뜻을 배우는데 이를 "강의"라고 한다. 설령 평생 동안 강의를 배우지 못하더라도 구절들은 암송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관용어로 사용한다. 세계 각지의 외국어 가운데 한어가 가장 쉬우니 이 또한 유리하다.

영태의 집은 물을 뿌려 청소하여 두었고 다채롭게 치장하여 가지가지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마루 위의 깔개는 모두 용과 봉황을 그린 모직 담요로 의자며 걸상을 덮었고 이불은 모두 비단이었다. 뜰 가운데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차일을 치고 사방으로 누르스름한 발을 걸어 내렸고, 그 앞으로 석류 대여섯 그루가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흰색 석류가 만개하였다. 또 다른 나무 한 그루는 잎이 동백처럼 생겼는데 열매는 탱자와 닮았다. 이름을 물으니 무화과라고 한다. 쌍쌍이 꼭지를 나란하게 하여 열매가 달리는데, 꽃 없이 열매를 맺어 그렇게 부른다.


낱말풀이

書狀來見, 趙鼎鎭, 各叙年甲。 長余五歲, 副使繼又來訪。 鄭元始, 爲叙萬里同苦之誼。 金子仁, 文淳, 爲道,「兄此行, 而我境冗擾, 未及相訪。」 余曰, 「定交於他國, 可謂異域親舊。」 副使書狀, 皆大笑曰, 「未知誰爲異域也。」 副使長余二歲, 余祖父與副使祖父甞同牕治功令, 有同硏錄。 余祖父爲京兆堂上時, 副使祖父以京兆郞投刺。 各道舊日同硏事。 余時八九歲, 在傍知有舊誼。

書狀指白石榴曰, 「曾見此否。」 余對,「不曾見。」 書狀曰, 「吾童子時家有此榴, 國中更無。 葢此榴華而不實云。」 略叙閒話, 皆起去。 渡江日雖相識面於蘆荻叢中, 未甞叙話, 又兩日柵外, 連幕露宿, 亦未甞晤, 故今以異域相戱者此也。

서장 조정진이 와서 인사한다. 나와 동갑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부사 역시 찾아왔다. 부사 정원시하고는 만리를 함께 고생하며 가는 정이 생겼다. 자인을 호로 쓰는 김문순이 "이 행차에 나도 정신이 없다 보니 아직 서로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말하길래, 내가 "다른 나라에 와서야 친분을 쌓게 되었으니 과연 멀리 떨어진 곳의 친구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부사와 서장은 크게 웃으며 "누구더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부사는 나 보다 두 살 위로 내 할아버지와 부사의 할아버지는 동창으로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고 (동창들의 명단을 적은 목록인) 동연록에 함께 실려 있다. 내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당상관을 할 때에 부사의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시랑으로 있었다. 서로 옛날에 함께 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 때 여덟 아홉 살이었는데 곁에 있으니 옛 정이 떠오른다.

서장이 흰 석류를 가리키며 "이런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다. 내가 "처음 봅니다."하고 대답하니 서장은 "내가 어릴 적에 집에 이런 석류가 있었는데 그 때는 우리 나라 다른 곳에는 없었습니다. 이 것이 꽃은 화려한데 열매는 달리지 않더라구요."한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다음 헤어졌다. 압록강을 건넌 날 갈대 밭에서 서로 얼굴을 알아 보았으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고 책문 밖에서 보낸 이틀 동안도 노숙을 하느라 또 이야기 나눌 수 없었는데 이제 먼 타국 땅에서 와서야 이처럼 서로 만날 수 있었다.


낱말풀이

點心尙遠云, 不敢遲待, 遂忍飢行翫, 初由右邊小門而入。 故不知其家之雄侈若此, 今由前門而出, 則外庭數十百間。 三使帶率都入此家, 而不知着在何處。 非但我行區處綽綽有餘, 來商去旅, 絡繹不絶。 又有車二十餘輛, 闐門而入, 一車所駕馬騾必五六頭, 而不聞喧聲, 深藏若虛。 葢其妥置凡百, 自有規模, 不相妨礙。 觀此外貌, 其他細節 ,不須盡說矣。

緩步出門, 繁華富麗。 雖到皇京, 想不更加。 不意中國之若是其盛也。 左右市廛, 連互輝耀, 皆彫牕綺戶, 畵棟朱欄, 碧榜金扁。所居物皆內地奇貨。 邊門僻奧之地, 乃有精鑑雅識也。 又入一宅, 其壯麗更勝於康家, 而其制度大約皆同。 凡室屋之制, 必除地數百步, 長廣相適, 剷剗平正, 可以測土圭安針盤, 然後築臺。 臺皆石址, 或一級或二級三級, 皆甎築而磨石爲甃。 臺上建屋, 皆一字, 更無曲折附麗。 第一屋爲內室, 第二屋爲中堂, 第三屋爲前堂, 第四屋爲外室。 外室前臨大道, 爲店房, 爲市廛。 每堂前, 有左右翼室, 是爲廊廡寮廂。 大約一屋長, 必六楹八楹十楹十二楹, 兩楹之間甚廣, 幾我國平屋二間。 未甞隨材短長. 亦不任意闊狹, 必準尺度爲間架。 屋皆五梁或七梁, 從地至屋脊, 測其高下, 簷爲居中, 故瓦溝如建瓴。 屋左右及後面, 無冗簷, 以甎築墻, 直埋椽頭。 盡屋之高, 東西兩墻, 各穿圓牕面南。 皆戶正中, 一間爲出入之門, 必前後直對, 屋三重四重 則門爲六重八重, 洞開則自內室門至外室門, 一望貫通, 其直如矢。 所謂「洞開重門, 我心如此」者, 以喩其正直也。

路逢李同知惠迪。 譯官三堂上。 李君笑曰, 「窮邊邨野, 何足掛眼。」 吾言, 「雖至皇城, 未必勝此。」 李君曰, 「然, 雖有大小奢儉之別, 規模大率相同耳。」

점심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여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서 허기도 참고 밖으로 나와 처음 마주치는 오른 편 작은 문을 들어섰다. 이 집이 얼마나 크고 사치스러운지 미처 몰랐다가 지금 문을 나서고 보니 바깥 정원이 수백 간 크기이다. 세 사신이 이끌고 이 집에 들여 온 수행원들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정도이다. 우리만 홀로 이곳 저곳을 느긋히 여유를 부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상인이며 떠나가는 나그네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수레 20여 량이 문을 드나드는데 수레 하나를 말이나 노새 대여섯 마리가 끌었으나 장원 깊은 속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빈 것처럼 느껴졌다. 갖가지 물건을 적절히 벌려 배치하였는데 규모가 커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밖의 모습 만으로도 이러하니 기타 자세한 것들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가니 번화하고 수려하다. (변방인 책문이 이런 모습이니) 황성에 도착하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중국의 성대함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길 좌우에 있는 시장의 가게들은 모두 기와를 맞닿으며 밝게 빛나고 모두 무늬를 새긴 창문을 달고 마룻대를 아름답게 칠하고 붉은 칠을 한 난간을 세웠으며 푸른 판에 금으로 글씨를 쓴 간판을 달았다.

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내지에서 온 상품들이다. 변문은 벽지이자 오지인데도 귀감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겠다. 또 다른 집에 들어가 보니 꾸밈은 강영태의 집보다 화려한데 구조와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과 방의 지어진 모습이 수백 걸음 안의 땅에 길이와 넓이를 적절히 맞추어 평탄하고 반듯하게 깍아 다듬었고 분명 나침반을 이용하여 터를 정하고 축대를 쌓아 올렸다. 축대는 돌을 기반으로 하였고 어떤 것은 1급 또 어떤 것은 2급이나 3급의 벽돌로 쌓은 뒤 갈아낸 돌로 마감을 하여 담장을 쌓았다. 축대 위로 집을 지었는데 모두 일(一) 자 모양으로 따로 덧이어 붙인 부속 건물은 없었다. (제일 안쪽부터) 첫 번째 집은 안채가 되고 두 번째는 중당, 세 번째는 전당, 네 번째는 바깥채이다. 바깥채가 큰 길과 닿아 점방도 차리고 가게도 차린다. 각각의 집 좌우에 곁방이 있어 (부속 건물인) 낭무나 행랑채를 대신한다. 한 집의 길이는 대략 6 영, 8 영, 10 영 또는 12 영인데 두 기둥 사이의 길이인 영은 제법 넓어 우리나라 보통 집의 2 간 정도 되었다. 제목이 길거나 짧다고 임의로 넓거나 좁게 집을 짓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길이에 맞추어 들보를 올렸다. 집의 들보는 다섯 아니면 일곱인데 땅에서 지붕의 수평마루까지 높이를 재서 그 가운데에 처마가 있기 때문에 기와 고랑이 가파르다. 집의 좌우와 뒷면에는 처마가 없고 서까래가 곧장 벽돌담에 묻힌다. 집 동서의 벽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둥글게 만든 창문이 남쪽 면에 나있다. 집의 한 가운데 드나드는 문이 있는데 모두 앞뒤가 곧장 마주하고 있어 집이 (겹겹이 담장을 둘러) 세 겹 네 겹이거나 문이 여섯 겹, 여덟 겹이어도 문을 모두 활짝 열어 재치면 안채에서 바깥채까지 한 번에 보일 정도로 곧다. 이른바 "겹겹이 두른 문을 활짝 열어 재치니 내 마음이 이와 같도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정직함을 비유한 것이다.

길에서 (중추부의) 동지인 이혜적을 만났다. 통역관인데 3품 당상관이다. 이군이 웃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황성에 가더라도 이 보다 못할 것 같소."하고 대답하였다. 이군은 "하기사 크고 작고나 사치스럽고 검소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모습은 여기나 거기나 거진 같습니다."한다.


낱말풀이

爲室屋, 專靠於甓, 甓者甎也。 長一尺, 廣五寸, 比兩甎則正方, 厚二寸。 一匡搨成, 忌角缺, 忌楞刓, 忌軆翻, 一甎犯忌, 則全屋之功左矣。 是故, 旣一匡印搨, 而猶患參差 必以曲尺見矩, 斤削礪磨, 務令匀齊, 萬甎一影。 其築法, 一縱一橫, 自成坎離, 隔以石灰。 其薄如紙, 僅取膠貼, 縫痕如線。 其和灰之法, 不雜麤沙, 亦忌黏土, 沙太麤則不貼, 土過黏則易坼。 故必取黑土之細膩者, 和灰同泥, 其色黛黧, 如新燔之瓦。 葢取其性之不黏不沙, 而又取其色質純如也。 又雜以檾絲, 細剉如毛, 如我東圬土. 用馬矢同泥, 欲其靭而無龜。 又調以桐油濃滑如乳, 欲其膠而無罅。

其葢瓦之法, 尤爲可效。 瓦之體如正圓之竹而四破之。 其一瓦之大, 恰比兩掌, 民家不用䲶鴦瓦, 椽上不構散木, 直鋪數重蘆簟。 然後覆瓦, 簟上不藉泥土。 一仰一覆, 相爲雌雄, 縫瓦亦以石灰之泥, 鱗級膠貼。 自無雀鼠之穿屋。 最忌上重下虛。 我東葢瓦之法, 與此全異。 屋上厚鋪泥土, 故上重, 墻壁不甎築, 四柱無倚, 故下虛。 瓦軆過大, 故過彎, 過彎故自多空處, 不得不補以泥土。 泥土厭重, 已有棟撓之患, 泥土一乾, 則瓦底自浮, 鱗級流退, 乃生罅隙, 已不禁風透雨漏, 雀穿鼠竄, 蛇繆貓翻之患。

大約立屋甎功居多。 非但竟高築墻, 室內室外, 罔不鋪甎。 盡庭之廣, 麗目井井, 如畫碁道, 屋倚於壁, 上輕下完, 柱入於墻, 不經風雨, 於是不畏延燒, 不畏穿窬, 尤絶雀鼠蛇猫之患。 一閉正中一門, 則自成壁壘城堡, 室中之物, 都似櫃藏。 由是觀之, 不須許多土木, 不煩鐵冶墁工, 甓一燔而屋已成矣。

집을 모두 벽돌로 짓는데 벽돌은 길이 1 자, 넓이 5 치로 둘을 합치면 정사각형이 되며 두께는 2 치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각도가 틀어지거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이 뒤틀린 것은 한 장이라도 쓰지 않아야 집 전체를 정교하게 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장 마다 치수가 어긋나 들쭉날쭉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각자를 써서 검사한 뒤 도장을 찍기 때문에 (규격을 맞추기 위해) 갈고 닦고 가지런히 하기 위해 애써서 벽돌 만 장이 모두 똑같다. 쌓는 법은 하나를 세로로 놓으면 다른 하나는 가로로 놓아 저절로 감괘(☵)와 이괘(☲)의 모양을 이루게 하고 그 사이를 석회로 발라 붙인다. 석회는 종잇장처럼 얇게 겨우 붙을 정도만 바르는데 쌓고 나면 마치 실처럼 보인다. 회를 개는 방법은 거친 모래가 섞이지 않도록 하고 점토도 피하는데 모래가 많으면 접착력이 떨어지고 점토가 지나치면 쉽게 갈라진다. 그래서 꼭 검은 흙에서 가늘고 찰진 것을 골라 석회와 진흙이 반반이 되도록 개서 그 색깔이 마치 눈썹 그리는 먹이나 새로 갖 구워낸 기와 같다. 개어낸 회는 그 성질이 점토도 아니고 모래도 아니며 색상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또 어저귀를 털처럼 잘게 잘라 섞는다. 우리나라에서 (집 벽에) 흙을 바를 때 말똥을 진흙에 섞어 넣어 질기고 갈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 유동나무 기름을 마치 젖처럼 짙게 발라 틈이 없게 매운다.

기와를 얹는 방법은 더욱 본받을 만 하다. 기와의 모양은 커다란 대나무와 같은 원통을 4등분 한 것처럼 생겼다. 민가에서는 원앙와를 쓰지 않고 서까래 위로 산자를 짜 넣지 않으며 바로 삿자리를 몇 겹 깐다. 이후에 기와를 엎어 놓는데 삿자리 위로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같은 모양의 기와를) 하나는 엎어 놓고 하나는 뒤집어 놓아 서로 암수가 되며 석회를 갠 흙으로 이어서 비늘처럼 얽혀 붙인다. 참새나 쥐가 구멍을 뚫을 수 없고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약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와 얹는 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집 위로 진흙을 두텁게 발라서 위가 무겁고 벽과 담을 벽돌로 짓지 않으니 기둥이 의지할 곳이 없어 아래가 허약하다. 기와가 너무 커서 기와가 너무 휘어져 잇고 너무 휘어져 있다 보니 빈 곳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진흙으로 채운다. 진흙이 너무 무거우면 용마루가 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진흙이 마르면 기와가 들떠서 비늘이 흘러 내리며 틈이 생겨 바람과 빗물을 막지 못하고 참새가 구멍을 내고 쥐가 숨어들고 뱀이며 고양이까지 날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벽돌로 집을 지으면 이점이 참으로 많다. 담장과 벽 뿐만 아니라 집 안팍으로 벽돌을 쓰지 않은 곳이 없다. 너른 뜰에 벽돌을 깔아 우물 정(井)자 무늬를 만드니 바둑판 같고 집의 벽도 벽돌로 만들어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히 하여 기둥이 담벽에 박히니 비바람이 들지 않으며 불이 나도 옆으로 번지지 않고 좀도둑이 들 걱정도 없고 또한 참새니 쥐니 뱀이니 고양이니 하는 따위의 근심도 없다. 정 중앙의 문 하나를 걸어 잠그면 저절로 성벽과 성루를 두른 작은 요새가 되어 집안의 물건들은 모두 괘짝에 넣어둔 것과 같게 된다. 이를 보면 (집을 지을 때) 수 많은 나무며 흙이 들지도 않고 대장장이며 미장이며 번잡하게 할 필요도 없고 벽돌 하나만 구우면 집은 다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낱말풀이

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 「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 「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余曰 「唐太宗失目於安市, 雖不可攷, 葢以此城爲安市, 愚以爲非也。 按唐書, 安市城去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志又以鳳凰城稱平壤, 雖不可攷, 未知此何以名焉。 又地志古安市城在葢平縣東北七十里, 自葢平東至秀巖河三百里, 自秀巖河東至二百里, 爲鳳城, 若以此爲古平壤, 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 然吾東之士, 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 言平壤有井田則信, 言平壤有箕子墓則信, 若復言鳳城爲平壤, 則大驚, 若曰, '遼東復有平壤, 則叱爲恠駭。' 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 肅愼濊貊東彝諸國, 盡服屬衛滿朝鮮, 又不知烏剌寧古塔後春等地本高勾麗疆, 嗟乎。 後世不詳地界, 則妄把漢四郡地, 盡局之於鴨綠江內, 牽合事實, 區區分排, 乃復覔浿水於其中, 或指鴨綠江爲浿水。 或指淸川江爲浿水, 或指大同江爲浿水, 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此其故何也, 定平壤於一處, 而浿水前郤, 常隨事跡。 吾甞以爲漢四郡地, 非特遼東, 當入女眞。 何以知其然也, 漢書地理志, 有玄莬樂浪, 而眞番臨芚無見焉。 葢昭帝始元五年, 合四郡爲二府, 元鳳元年, 又改二府爲二郡。 玄莬三縣, 有高勾麗, 樂浪二十五縣, 有朝鮮, 遼東十八縣, 有安市, 獨眞番, 去長安七千里, 臨芚, 去長安六千一百里, 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 當在今寧古塔等地者。」

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

봉황성은 이제 새로 쌓고 있다. 누군가 여기가 옛 안시성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말로 큰 새를 "안시"라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종종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뱀을 "백암"(배암)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의 나랏말로 고쳐 부르면 봉황성이 안시성이고 사성은 백암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황제가 병사를 성벽 아래에서 물리면서 비단 백필을 하사하여 안시성주의 견고한 수비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은 동생 노가재 김창업이 연경에 가게 되자 시를 지어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규염(당태종)을 쏘아 눈동자를 맞추었지"라고 하였고, 목은 이색은 〈정관음〉에서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흰 깃털에 검은 꽃이 떨어질 줄이야"라고 하였다. 검은 꽃은 눈동자를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두 어르신이 노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태종은 천하의 병사를 움직였는데 작은 성곽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김부식은 이 역사를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어찌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역사만 참고하여 글을 가려 뽑아 사실로 삼았겠는가. (당나라의 문인인)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여 (당태종이) 포위 당하였다가 물러간 일의 증거로 삼았는데, 《당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모두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중국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실을) 피한 것이라 의심된다. 그러니 본토의 옛 이야기와 같은 것을 인용하여 한 구절이라도 실으려 하여도 어떤 것은 믿을만하고 어떤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은 것을 고증하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서》에서는 안시성이 평양에서 오백리였다고 하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지》는 또한 봉황성의 옛 이름이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고증할 수 없어 (《동국여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동국여지지》는 옛 안시성이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평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에 수암하가 있고 수암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에 봉황성이 있으니 (지금의 개평이 안시성이고) 봉황성이 옛 평양이라면 《당서》에서 말하는 오백 리와 서로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압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과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낱말풀이
  • 白巖城(백암성): 고구려-당 전쟁 초기 함락된 성. 당태종은 백암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 楊萬春(양만춘): 고구려-당 전쟁에서 안시성을 방어하였다는 장수.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16세기 중국의 소설 속에서 창작된 것으로 실제 이름이 아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안시성주라고만 불렸다.
  • 三淵金公昌翕(삼연김공창흡): 삼연 김창흡. 조선 현종 시대의 학자이다.
  • 老稼齋昌業(노가재창업): 노가재 김창업. 김창흡의 동생으로 1712년 북경에 다녀와 《노가재연행록》을 썼다.
  • 虬髯(규염): 용처럼 구불구불한 수염. 당태종의 별명이다.
  • 眸子(모자): 눈동자.
  • 牧隱李公穡(목은이공색): 목은 이색. 고려말 유학자.
  • 蒼黃(창황): 미처 어쩌지도 못할 사이에.
  • 旋師(선사): 군사를 돌림.
  • 金富軾(김부식): 고려 시대 문신. 《삼국사기》를 지었다. 안시성 전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제9권에 실려있는데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 其史失姓名(기사실성명): 이 역사의 이름을 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보장왕 편 시론에서 안시성주가 호걸로 불릴만한 인물이라 기록하면서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 柳公權(유공권): 당나라 시기 문인.
  • 唐書(당서):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
  • 司馬通鑑(사마통감): 사마광의 역사책 《자치통감
  • 地志(지지):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간행한 《동국여지지》
  • 葢平縣(개평현): 오늘날 가이저우시에 속하는 곳.
  • 秀巖河(수암하): 지명이 변하여 정확히 어느 강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이저우시 인근에 수암현(秀巖縣)이 있다.
  • 箕子(기자):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전설의 인물. 조선 시대에는 실존 인물로 여겼으나 오늘날에는 전설의 하나로 취급한다.
  • 井田(정전): 토지를 9등분 하여 8 곳은 사유지로 삼고 1 곳을 공유지로 하여 세금을 충당하는 제도. 기자가 평양에서 전정제를 시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이상적인 토지 제도로 여겼다.
  • 肅愼(숙신): 중국에서 동이라고 묶어 부르던 동북아시아의 민족의 하나.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였다. 만주어로 "주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고대 한국인의 한 갈래로 보고자 하는 일부의 해석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만주족의 선조로 본다.
  • 濊貊(예맥): 중국에서 동이라고 묶어 부르던 동북아시아의 민족의 하나.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살았다. 동예는 예맥의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 東彝(동이): 동이(東夷)의 오랑캐 이(夷)자를 일부러 떳떳할 이(彝)로 바꾸어 썼다. 오랑캐가 아니라는 자존감의 표현이다.
  • 衛滿朝鮮(위만조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이다. 앞의 기자조선과 달리 역사적 실체가 있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인지 요동에 있었는 지는 분명치 않아 논쟁이 있다. 박지원은 봉황성이 왕검성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服屬(복속):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상태 또는 병합된 상태.
  • 烏剌(오랄): 흑룡강 일대.
  • 寧古塔(영고탑): 오늘날 헤이룽장성 닝안시에 있던 청나라 시절 도시. 동해여진의 거주지였으나 누르하치가 정복하였다.
  • 後春(후춘): 함경북도와 맞닿은 만주 지역. 훗날 간도라 불린다.
  • 漢四郡(한사군): w:한사군은 고조선이 망한 뒤 세워진 한나라의 군현으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과 그 속현을 말한다.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낙랑군은 평양에서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다만 한나라의 군현이라고 해도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기 보다는 지방의 세습 봉건국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浿水(패수):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을 이루던 강.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지는 이견이 제각각이다. 유력한 이론 가운데 하나는 고조선이 여러 번 수도를 옮겼고 옮긴 수도 역시 왕검성 또는 평양이라 불렀다는 가설이 있다.
  • 淸川江(청천강): 평안북도 지방을 흐르는 강. 옛 이름은 살수(薩水)이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맞아 승리하였다.
  • 大同江(대동강): 평양 시내를 흐르는 강.
  •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 후한 시대 학자 반고가 편찬한 《한서》에 딸린 부속 지리지이다. 고조선의 법과 풍습 등이 기록되어 있다.
  • 昭帝(소제): 전한의 8대 황제 한 소제이다.
  • 始元五年(시원오년): 한 소제의 연호. 기원전 82년
  • 元鳳元年(원봉원년): 한 소제의 두번 째 연호. 기원전 80년
  • 金崙(김륜): 광해군 시기 문신.
  • 扶餘(부여): 만주 지역에 있던 옛 국가.
  • 挹婁(읍루): 숙신의 후예이자 말갈의 전신인 옛 부족.
  • 沃沮(옥저): 한반도에 있던 옛 부족국가.
  • 勿吉(물길): 5세기 무렵 읍루를 멸망시키고 송화강 일대를 장악한 부족. 말갈의 전신으로 본다.
  • 渤海武王大武藝(발해무왕대무예): 발해 무왕 대무예는 8세기 초의 발해 2대 왕이다.
  • 日本聖武王(일본 성무왕): 일본의 쇼무 천황이다.
  • 幅員(폭원): 땅이나 지형의 넓이. 즉 여기서는 "영토"
  • 無他(무타): 별다른 이유 없이.

然則鳳城果爲平壤乎。 曰此亦或箕氏衛氏高氏所都, 則爲一平壤也。 唐書裴矩傳, 言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 漢分四郡, 所謂, 「孤竹地, 在今永平府。」 又廣寧縣, 舊有箕子廟, 戴冔冠塑像, 皇明嘉靖時, 燬於兵火。 廣寧人或稱平壤。 金史及文獻通考, 俱言廣寧咸平, 皆箕子封地, 以此推之, 永平廣寧之間, 爲一平壤也。 遼史, 「渤海顯德府, 本朝鮮地。 箕子所封平壤城。 遼破渤海, 改爲東京, 卽今之遼陽縣。」是也, 以此推之, 遼陽縣, 爲一平壤也。

그러니 봉성은 옛날에 평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씨 위씨 고씨가 도읍으로 삼은 곳 모두가 제각기 평양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당서》의 〈배구전〉은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고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가 4 군을 나누었다고 하면서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평부"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광령현은 예전에 기자묘가 있었고 머리에 관을 쓴 인물상을 빚어 모셔 두었는데 명나라 가정제 시기에 전쟁에 휘말려 불탔다고 한다. 광령현도 사람들 중에는 평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금사》와 《문헌통고》 두 책 모두 광령과 함평이 모두 기자의 봉토였다고 언급하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영평부와 광령현 사이 어디쯤이 또 다른 평양 가운데 한 곳이 된다. 《요사》는 "발해의 현덕부는 원래 조선의 땅이다. 기자가 이곳에 평양성을 지었다. 요나라가 발해를 무너뜨렸을 때 동경으로 삼았고 지금은 요양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추론하면 요양현도 또 다른 평양의 하나이다.


낱말풀이

愚以爲箕氏初居永廣之間, 後爲燕將秦開所逐, 失地二千里。 漸東益徙, 如中國晉宋之南渡, 所止皆稱平壤。 今我大同江上平壤 卽其一也。 浿水亦類此, 高勾麗封域時有贏縮, 則浿水之名, 亦隨而遷徙, 如中國南北朝時, 州郡之號互相僑置。 然而以今平壤爲平壞者, 指大同江曰此浿水也, 指平壤咸鏡兩界間山曰此葢馬大山也。 以遼陽爲平壤者, 指蓒芋濼水曰此浿水也, 指葢平縣山曰此葢馬大山也。 雖未詳孰是, 然必以今大同江爲浿水者, 自小之論耳。

내 생각에 기자 조선의 처음 도읍지는 영평부와 광령현 사이의 어디 쯤 이었다가 후에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쫓겨 2천리 땅을 잃었다. 마치 (외세에 쫓겨)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중국의 진(晉) 나라나 송나라와 같이 차츰 동쪽으로 옮기면서 세운 도읍을 모두 평양이라 부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대동강에 있는 평양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패수의 위치 역시 이와 같아서 고구려 영토가 넓어지거나 줄어든 시기에 따라 패수라는 이름도 이를 따라 자리를 옮겼을 것이어서 마치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남조와 북조가 같은 주와 군의 이름을 서로 제각각 겹쳐서 부르던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평양이 평양이 되었고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게 되었으며 평양에서 함경도 사이의 양쪽 지대를 개마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요양이 평양이었다고 하면 한우력수를 가리켜 패수라고 불렀을 것이고 개평현의 산을 가리켜 개마대산이라 하였을 것이다. 비록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인 지 알 수 없지만 오직 지금의 대동강만 패수였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작게 보는 논점이다.


낱말풀이

唐儀鳳二年, 以高麗王臧, 高勾麗寶藏王高臧, 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由是觀之, 高氏境土之在遼東者, 唐雖得之, 不能有而復歸之高氏, 則平壤本在遼東, 或爲寄名與浿水, 時有前郤耳。 漢樂浪郡治在遼東者, 非今平壤, 乃遼陽之平壤。 及勝國時, 王氏高麗, 遼東及渤海一境, 盡入契丹, 則謹畫慈鐵兩嶺而守之。 並棄先春鴨綠而不復顧焉。 而况以外一步地乎。 雖內幷三國, 其境土武力, 遠不及高氏之强大。 後世拘泥之士, 戀慕平壤之舊號, 徒憑中國之史傳, 津津隋唐之舊蹟曰 「此浿水也, 此平壤也。」 已不勝其逕庭, 此城之爲安市爲鳳凰, 惡足辨哉。

城周不過三里, 而甎築數十重, 制度雄侈, 四隅正方若置斗。 然今裁半築, 則其高低雖未可測。 門上建樓處, 設雲梯浮空駕起工役。 雖似浩大, 器械便利, 運甓輸土。 皆機動輪轉, 或自上汲引, 或自推自行, 不一其法。 皆事半功倍之術 莫非足法。 而非但行忙, 難以遍觀, 雖終日熟視 非造次可學 良可歎也。

당 의봉 2년(667년) 고려왕 장, 즉 고구려 보장왕 고장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요동주도독이 되어 조선왕으로 봉해져 요동으로 돌려보내 지었다가 다시 안동도호부를 새로 지은 성으로 옮겼다. 이를 보면 요동의 고구려 영토는 당이 병합하긴 하였으나 유지하지 못하여 고씨에게 돌려 주었으므로 평양이 본래 요동에 있었다고 하면 패수 또한 평양과 함께 시대에 따라 이 곳 저 곳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한나라가 낙랑군을 요동에 설치하였다고 하므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 (낙랑군 당시의) 평양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왕씨 고려가 세워질 때 요동과 발해 일대는 거란에 흡수되어 간신히 자비령과 철령을 잇는 선을 국경으로 지킬 수 있었다. 선춘령과 압록강은 모두 빼앗겨 수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이니 그 밖의 땅 한 걸음에 대해서야! 비록 삼국을 병합하였다고 하나 그 영토와 무력은 고씨의 강대함에 한 참 미치지 못한다. 후세에 고집불통인 선비들이 평양의 옛 이름을 연모하여 중국의 역사와 전기만 쫓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기록만 입맛에 맞다고 여기며 "여기가 평양이요, 여기가 패수요." 한다. 이미 이렇게 큰 차이를 메우지 못하는데 이 봉황성이 그 옛날 안시성이라는 것도 변증이 충분하지 않하다.

성 주위는 불과 3 리이지만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아 모습이 웅장하고 네 귀가 정사각형 모습이어서 마치 (물건의 부피를 재는) 말 통과 같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 성을 반 밖에 쌓지 않아 다 쌓으면 높이가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었다. 문 위로 누각을 세우는 곳에 구름다리를 만드려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구인) 공가를 세워 작업하고 있었다. 비록 거추장스러워 보여도 기계를 써야 편리하게 벽돌이며 흙을 올린다. 모두 바퀴를 돌려 움직이는 데 어떤 것은 스스로 올라가며 물을 긷고 어떤 것은 스스로 밀고 스스로 가니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모든 일이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효율을 보이는 기술로 이루어져 부족한 것이 없다. 비록 가는 길이 바빠서 편안히 살펴보기가 어려웠지만 하루 종일 자세히 관찰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만드는 지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 참으로 안타까웠다.


낱말풀이

食後, 與卞季涵鄭進士先行。 康永泰出門揖送, 頗有惜別之意。 且囑歸時當値冬節, 願賷賜一件時憲。 余解給一丸淸心。

過一鋪, 掛一面金書當字牌, 旁書, 「惟軍器不當」 五字。 此典當舖也。 有數三美少年, 走出舖中, 遮馬請少刻納凉, 遂相與下馬隨入。 其凡百位置, 更勝康家, 庭中有二大盆, 種三五柄蓮子, 養得五色鮒魚。 年少手持掌大紗罾, 向小瓮邊, 臽了幾顆紅蟲, 浮沉盆中。 蟲細如蟹卵, 皆蠕蠕。 少年更以扇敲響那盆郭, 念念招魚, 魚皆出水呷沫。

식사를 마치고 변계함 정진사와 함께 먼저 길을 나섰다. 강영태가 문 밖에 나와 작별하면서 몹시 서운해 하였다. 돌아오는 길이 겨울철이면 부디 시헌력 한 권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앞에 금으로 당(當) 자를 쓴 나무 패를 걸고 그 옆에 "수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사용품은 담보로 잡지 않습니다.) 다섯 자를 적어 두었다. 이곳은 전당포이다. 잘 생긴 소년 몇이 가게에서 나와 말을 붙들고 땀이나 식히고 가시라 하길래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갖가지 물건들이 강영태의 집 것 보다 더 화려하였고 뜰 가운데 큰 물그릇 두 개를 놓아 하나에는 네댓 뿌리 연꽃을 심었고 하나에는 비단잉어를 길렀다. 소년이 손에 손바닥 만한 실로 만든 그물을 들고 나와 작은 항아리 근처로 가더니 불그스름한 벌레를 떠서 물그릇에 띄웠다. 벌레는 게 알 만큼 작았는데 모두 꿈틀거렸다. 소년이 다시 물그릇 가장자리를 부채로 두드리며 소리를 내자 물고기들이 모여들더니 물거품을 뿜어낸다.


낱말풀이
  • 時憲(시헌): 시헌력은 청나라 시기에 서양의 천문학 기술을 받아들여 고친 역법이다. 이전에 쓰이던 대명력과 가장 큰 차이는 요하네스 캐플러의 타원 괘도설을 받아들여 24절기를 나누는 방법을 항기법에서 정기법으로 바꾼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계절과 상관 없이 절기 사이를 똑 같이 셈하였으나 시헌력에서는 장축단 개념을 도입하여 근일점이 지나는 겨울철의 절기 간격은 짧게 원일점이 지나는 여름철 절기 간격은 길게 조절 하였다. 이렇게 조절하면서 겨울철에는 윤달이 거의 끼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빌린 돈을 "윤동짓달에 갚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시헌력 사용 이후 윤동짓달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안 갚는다는 소리다. 마치 양력 2월 30일에 만나자는 소리와 같다. 조선에서는 효종 때부터 사용되었다.
  • 淸心(청심): 청심환은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처방약이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중국에서도 청심환이 만들어졌으나 가짜가 많아 조선에서 만든 것을 최고급으로 여겼기 때문에 귀한 선물로 사용되었다.
  • 典當舖(전당포): 물건을 담보로 잡아 돈을 빌려 주는 곳.
  • 五色鮒魚(오색부어): 비단잉어.
  • 蠕蠕(연연): 꿈틀거리다.

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余曰, 「君不知也。 我國城制不甎而石, 非計也。 夫甎一凾出矩則萬甎同樣. 更無費力. 磨琢之功, 一窰燒成, 萬甎坐得。 更無募人運致之勞, 齊匀方正, 力省功倍, 運之輕而築之易, 莫甎若也。 今夫石劚之於山, 當用匠幾人, 輦運之時, 當用夫幾人, 旣運之後, 當用匠幾人, 以琢治之, 其琢治之功, 又當再費幾日。 築之之時, 安排一石之功, 又當再用夫幾人, 於是削崖而被之, 是土肉而石衣也。 外似峻整, 內實臲卼。 石旣參差不齊, 則恒以小石撑其尻跗, 崖與城之間, 實以碎礫, 雜以泥土, 一經潦雨, 膓虛腹漲, 一石踈脫, 萬石爭潰, 此易見之勢也。 且石灰之性, 能黏於甎, 而不能貼石, 余嘗與次修論城制。 或曰 '甓之堅剛安能當石', 次修大聲曰, '甓之勝於石, 豈較一甓一石之謂哉'。 此可爲鐵論。 大約石灰不能貼石, 則用灰彌多, 而彌自皸坼, 背石卷起, 故石常各自一石, 而附土爲固而已, 甎得灰縫如魚膘之合木, 鵬砂之續金, 萬甓凝合, 膠成一城, 故一甎之堅, 誠不如石, 而一石之堅, 又不及萬甎之膠。 此其甓與石之利害便否。 所以易辨也。」

鄭於馬上傴僂欲墮, 葢睡已久矣。 余以扇搠其脅大罵曰, 「長者爲語, 何睡不聽也。」 鄭笑曰, 「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余忿欲敺之, 相與大笑。

한낮이 되자 불볕이 내리 쬐어서 더 오래 머무르기가 궁색하였다. 다시 길을 나서 정진사와 서로 앞 서거니 뒤 서거니 가다가 내가 "성 쌓는 제도를 보니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정진사는 "돌로 쌓는 것보다 못하더군요." 하고 대답한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소리. 우리나라 성은 벽돌이 아니라 돌로 쌓는데 좋은 계책이 아니네. 벽돌은 한 번 찍어 내면 만 장이 모두 같은 모양이라 비용과 노력이 더 들지 않고 가마 하나에서 구워내어 만 장울 만들 수 있지. 또한 사람이 옮기는데 힘이 들지 않고 정사각형으로 반듯하니 들인 힘의 두 배로 효율을 내서 가볍게 옮겨 쉽게 쌓으니 벽돌이 이렇게 좋다네. 이제 산에서 돌을 캐려면 장인과 기계를 써야만 하고 때에 맞추어 옮기려 하여도 사람과 기계를 써야만 하고 옮겨 온 후에도 장인과 기계를 써야만 깎고 다듬을 수 있고 그렇게 깎고 다듬는데 또 다시 비용과 기계며 시간이 드오. 쌓을 때도 돌 하나 얹어 놓으려 하면 또 사람이며 기계를 써야 하고 이렇게 벼랑을 깎아 (돌을) 만들고는 다시(흙 위로) 입히니 그야말로 흙 살에 돌 옷을 입힌 것이라. 겉으로는 단단하고 가지런하여 보여도 속으로는 어그러져 영 불안한 것이 되지. 돌이 모두 틈이 있어 가지런하지 못하니 그 틈바구니에 다시 작은 돌을 괴어 넣고 성벽에 틈이 생기면 깬자갈로 채우고 진흙마저 바르는데 큰 비가 오면 빈 곳에 물이 차서 돌 하나만 빠져 나와도 만 개의 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을 쉽게 볼 수 있고. 그리고 석회의 성질은 벽돌하고는 잘 붙지만 돌하고는 붙지 않으니 내가 이미 차수(박제가)와 성 쌓는 제도를 논하였지. 누군가 벽돌이 '어찌 돌의 굳건함을 당하겠는가?' 하길래 차수가 '벽돌이 돌 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벽돌 하나하고 돌 하나를 비교하는 것이더냐!'하고 고함을 질렀거든.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철석 같은 이론일세. 대체로 석회는 돌과 붙지 않으니 석회를 너무 많이 쓰면 약해져서 저절로 터지고 뒤에 있는 돌이 들떠 일어나기 때문에 돌은 늘 돌 하나 하나를 따로 따로 쌓고 나서 저마다 흙을 발라야 하지만 벽돌은 석회를 써서 마치 아교로 나무를 붙일 때나 붕사고 금을 붙일 때처럼 붙일 수 있으니 만 개의 벽돌이 엉겨 붙어 한 덩어리로 붙은 성이 되기 때문에 벽돌 하나야 돌보다 단단하지 않아도 돌 하나의 굳건함으로 벽돌 만 개가 엉긴 것에 미치지 못하네. 이것이 벽돌과 돌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진 것이 아니겠나? 이렇게 쉽게 변증할 수 있지."

정진사는 말 위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이미 졸고 있던 지 오래다. 나는 부채로 겨드랑이를 쿡 찌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찌 졸면서 듣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고함을 질렀다. 정진사는 웃으며 "제가 이미 다 들었습니다. 벽돌이 돌만 못하고 돌이 졸음만 못하지요." 한다. 나는 화가 나서 쥐어 박을까 하다가 서로를 보고 크게 웃었다.


낱말풀이
  • 臲卼(얼올): 얼울하다. 일이 어그러져서 불안하다.
  • 碎礫(쇄력): 골재로 사용하려고 부수어 쓰는 잡돌. 깬자갈.
  • 次修(차수): 차수는 박제가의 호이다. 박제가는 북학파로 알려진 실학자로 중국의 여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고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 魚膘(어표): 물고기를 재료로 만든 아교.
  • 鵬砂(붕사): 붕사(硼砂)는 붕소 화합물이다. 소규모 금 채광이나 금세공에 쓰인다.

至河邊, 得柳陰納凉。 五渡河, 五里之間, 一臺子, 所謂頭臺子, 二臺子, 三臺子, 皆烽堡也。 甎築如城, 高五六丈, 正圓如筆筒。 上施垜堞, 多毁壞而不修葺何也。 道傍或有柩, 累石壓之。 年久露置, 木頭朽敗, 葢待其骨枯, 擧而焚之云。 沿道多有墳塋, 其封高銳, 亦不被莎。 多樹白楊, 排行正直, 行旅步走者絶少。 步走者, 必肩擔鋪盖。 寢具謂鋪盖。 無鋪盖者, 店房不許留接, 疑其姦宄也。 掛鏡而行者, 養目者也。 乘馬者, 皆着黑緞靴子, 步行者, 皆着靑布靴子, 其底皆衲布數十重。 絶不見麻鞋藁屨。 宿松店, 一名雪裡店, 又號薛劉店。 是日行七十里, 或曰, 此舊鎭東堡也。

강가에 다다르자 버드나무 그늘이 있어 땀을 식혔다. 오도하에는 5 리 마다 일대자, 또는 두대자, 이대자, 삼대자 이렇게 봉화가 있다. 성과 같이 벽돌로 지었고 높이는 대여섯 장인데 붓대롱과 같이 동그랗다. 위쪽의 가퀴는 떨어져 깨진 것이 많았는데 수리를 하지 않고 있어 어찌 된 영문인가 싶다. 길가에 간간히 (시신을 넣은) 널이 돌에 눌려 있다. 몇 해 동안 길가에 그냥 두었다가 썩어 문드러지면 뼈만 거두어 불사른다고 한다. 길 근처로 (시신을 가매장하고 표시한) 분영이 많은데 봉분이 높고 가파르지만 이 역시 떼를 입히지 않았다. 백양나무가 많은 곧게 뻗은 길을 가면서 보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걸어가는 사람은 모두 (펼쳐 덮는) 포개를 짊어지고 간다. 침구를 포개라고 한다. 포개가 없는 사람은 (잠잘 수 있는) 점방에서 묵을 수 없는데 도둑질을 할까 의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가는 사람은 눈을 보호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말 탄 사람은 모두 검은 비단 신을 신었고 걷는 사람은 모두 푸른 삼베 신을 신었는데 신 바닥을 수십 번 기웠다. 삼베 미투리나 짚신은 하나도 없었다. 송점에서 묵었다. 일명 설리점이라고도 하고 설류점이라고도 한다. 이날 70 리를 갔다. 누군가는 여기가 옛날 (명나라 시절 사신이 머물던) 진동보라고 하였다.


낱말풀이
  • 垜堞(타첩): 화살 따위를 막기 위해 쌓은 가퀴.
  • 毁壞(훼괴): 떨어져 깨짐.
  • 朽敗(후패): 썩어 문드러지다.
  • 墳塋(분영): 송장이나 유골을 묻고 표시한 것.
  • (): 무덤에 입히는 떼인 사초(莎草)
  • 寢具(침구): 잠잘 때 쓰는 물건.
  • 店房(점방): 중국에서 여행길 숙식을 제공하던 곳은 반점(飯店)이라고 불렀다. 밥만 파는 곳은 채관(菜館)이다. 오늘날 중국어에서 반점은 호텔을 채관은 레스토랑을 의미한다. 한국의 중화요리집 이름 가운데 반점이 많은 것은 개항 이후 조선에 정착한 화교 사회에서 요리집이 종종 여관을 겸했기 때문이다.
  • 姦宄(간궤): 간사한 도둑질.
  • 麻鞋(마혜): 삼베 노끈으로 만든 미투리.
  • 藁屨(고구): 짚신.
  • 鎭東堡(진동보): 명나라 시기 군사 요충지로 조선에서 북경을 가는 사신 행차가 머물던 곳이었다. 정확히 어디였는 지 알 수 없다. 연암 박지원도 그저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 뿐이다.

삼가하에서 통원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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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日丙子 (晴)

29일 병자, 맑음.

舟渡三家河。 舟如馬槽, 全木刳成, 無櫓槳。 兩岸立丫木, 橫截大繩, 緣繩而行, 則舟自來往。 馬皆浮渡。 又舟渡劉家河, 中火黃河庄。 午極熱。 馬渡金家河, 所謂八渡河也。 林家臺, 范家臺, 大小方身五里十里之間。 村閭相望, 桑麻菀然。 時方早黍黃熟, 薥黍發穗, 而皆刈去其葉以飼馬騾, 亦所以爲黍柄, 養其全氣也。 到處有關廟。 數家相聚, 必有一座大窰以燒甎。 范印晒曝, 新舊燔燒, 處處山積。 葢甓爲日用先務也。

少憩典當舖。 主人引至中堂, 勸一椀熱茶。 位置多異玩, 設架齊梁, 整置所典之物, 皆衣服也。 褓裹付紙籤, 書物主姓名別號, 相標, 居住, 再書某年月日典當某件子, 某字號舖親手交付云云。 其利殖之法, 無過什二, 過期一朔, 許賣。 典當題著金字柱聯曰, 「洪範九疇先言富, 大學十章半論財。」 以薥黍柄, 巧搆樓閣, 置艸蟲一枚, 以聽鳴聲。 簷端懸彫籠, 養一異鳥。

是日行五十里, 宿通遠堡, 卽鎭夷堡也。

배로 삼가하를 건넜다. 배는 말구유처럼 생겼는데 모두 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배를 저을 노나 삿대가 없었다. 아(丫)자 모양의 나무를 양 강가에 세우고 밧줄 하나를 가로 질러 놓고는 줄을 잡아 당기며 가는데 마치 배가 스스로 오가는 것 같았다. 말은 모두 헤엄쳐 건너게 하였다. 다시 배로 유가하를 건너고 점심에 황하장에 도착하였다. 오후가 되자 몹시 더웠다. 말로 금가하를 건넜는데 팔도하라고도 하였다. 임가대니 범가대니 크고 작은 마을이 5 리 또는 10 리 마다 놓여 있었다. 마을 길에는 뽕나무며 삼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마주보고 있다. 한창 기장이 누렇게 말라가며 이삭이 패어 가는데 잎은 모두 배어다가 말과 노새의 먹이를 삼고 이삭 자루는 수확하여 양식을 삼으니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이용하였다. 여기 저기에 관제묘가 있다. 몇 집이라도 모여 마을을 이루면 반드시 커다란 벽돌을 굽는 가마 하나가 놓여 있다. 한 켠에는 진흙으로 갖 찍어낸 것을 볕에 쬐어 말리고 새로 구운 것과 예전에 구운 것을 곳곳에 산처럼 쌓아두었다. 벽돌을 만드는 것이 매일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당포에서 잠시 쉬었다. 주인은 (자신이 일을 보고 있는) 중당으로 불러 뜨거운 차 한 사발을 권한다. 다채로운 볼거리가 놓여 있고 들보에 사다리가 있는 시렁을 만들어 전당 잡은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두었는데 모두 의복이었다. 보자기로 싸고 종이쪽을 달아 전당 잡은 물건 주인의 이름과 별호, 생김새, 주소를 쓰고 다시 몇 년 몇 월 몇 일에 이러이러한 물건을 전당 잡았다는 기록과 물건 주인이 어느 전당포에 손수 이를 전당하였다 등등을 기록하였다. 이자는 10 분의 2를 넘기지 못하고 한 달이 지나도 갚지 못하면 판매가 허용되었다. 전당포 입구의 기둥에 금 글씨로 "홍범구주도 재물을 먼저 말하였고 《대학》 열 개의 장도 절반은 재물을 논한다."는 주련이 붙어 있다. 기장 줄기를 교묘하게 꼬아 누각 모양을 만들고 풀벌레 한 마리를 넣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처마 끝에 조롱을 매달아 이상하게 생긴 새 한 마리도 길렀다.

이날 50 리를 행차하여 통원보에서 머물렀다. 진이보라고도 한다.


낱말풀이
  • 櫓槳(노상): 배 젓는 노와 삿대.
  • (): 기장 (식물). 쌀, 보리, 콩, 조와 함께 오곡의 하나이다. 기장의 낱알은 무게를 재는 가장 작은 단위로도 쓰였다.
  • 到處(도처): 여러 곳.
  • 關廟(관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사당. 관우는 중국 민간에서 액운을 막고 재물을 모으게 해 주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명나라 시대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짓기 시작하여 청나라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관제묘라고도 한다.
  • 中堂(중당): 가게나 관공서에서 사무를 보는 집.
  • (): 시렁. 물건을 놓기 위해 만든 선반.
  • 紙籤(지첨): 내용물을 나타낸 종이 조각. 태그.
  • 別號(별호): 본래의 이름 대신 쓰기 위해 지어 부르는 이름. 예를 들어 박지원의 별호는 연암이다. 중국과 조선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서로를 별호로 불렀다.
  • 利殖之法(이식지법):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를 붙이는 방법.
  • 柱聯(주련): 기둥이나 벽을 장식하기 위해 쓴 글.
  • 洪範九疇(홍범구주): 홍범구주는 중국 하나라 우왕이 남겼다는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이다.
  • 大學十章(대학십장): 《대학》은 유교의 경전인 사서오경의 하나이다. 전당포의 주련은 고리대금업이라고 손가락질 받기 일쑤인 전당포의 주인이 자신의 사업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다.
  • 通遠堡(통원보): 중국 요동 지역의 군사 요충지인 동팔참의 하나. 동팔참은 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십리보(十里堡)-심양(瀋陽)으로 이어지는 사신 행차로이다.

만주족 민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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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初一日丁丑 (曉大雨)

留行。

7월 1일 정축, 새벽에 큰 비.

머물렀다.


낱말풀이
  • 七月初一日(칠월초일일): 칠월 초하루. 음력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한 달을 셈한다. 보름과 보름 사이의 시간은 약 29.5 일이기 때문에 큰 달은 30일 작은 달은 29일이 한 달이 된다. 앞의 6월 29일 다음으로 7월 1일이 되었으니 이 해 6월은 작은 달 7월은 큰 달이다. 이렇게 셈하여 12 개월을 1년으로 하면 354일이 되어 태양이 24 절기를 순환하는 약 365.25일과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달의 진행과 절기의 진행이 너무 차이가 나면 윤달을 두어 태양의 움직임과 맞춘다. 윤달은 19년에 7 번 들어간다. 음력의 1 년은 평년의 경우 354일, 윤달이 있을 경우 383 또는 384일이 된다. 일년의 길이가 일정치 않은 것은 음력의 가장 큰 약점이다.

與鄭進士, 周主簿, 卞君, 來源, 趙主簿, 學東, 上房乾粮判事, 賭紙牌以遣閒, 且博飮資也。 諸君以余手劣, 黜之座, 但囑安坐飮酒, 諺所謂, 光但喫餠也。 尤爲忿恨, 亦復柰何。 坐觀成敗, 酒則先酌也, 非惡事。

時聞間壁婦人語, 聲嫩囀嬌愬, 燕燕鶯鶯, 意謂主家婆娘, 必是絶代佳人。 及爲歷翫堂室, 一婦人五旬以上年紀, 當戶據牀而坐, 貌極悍醜。 道了「叔叔千福。」 余答道 「托主人洪福。」 余故遲爲, 玩其服飾制度。 滿髻揷花, 金釧寶璫, 略施朱粉, 身着一領黑色長衣, 遍鎖銀紐, 足下穿一對靴子, 繡得草花蜂蝶。 葢滿女不纏脚, 不着弓鞋。

簾中轉出一個處女。 年貌似是廿歲以上。 處女髻髮中分綰上, 以此爲辨, 貌亦傑悍, 而肌肉白淨。 把鐵鏇子, 傾綠色瓦盆。 滿勺了薥黍飯, 盛得一椀, 和鏇瀝水。 坐西壁下交椅, 以箸吸飯, 更拿數尺葱根, 連葉蘸醬, 一飯一佐。 項附鷄子大癭瘤, 噉飯喫茶, 略無羞容。 葢歲閱東人, 尋常親熟故也。

庭廣數百間。 久雨泥淖, 河邊水磨小石如碁子大黃雀卵者, 本無用之物, 而揀其形色相類者, 當門處錯成九苞飛鳳, 以禦泥淖。 其無棄物, 推此可知。 鷄皆毛羽脫落. 一如抽鑷, 往往肉鷄蹁跚, 醜惡不忍見。

정진사, 주주부, 변군, 내원, 조주부, 상방 건량판사인 학동 등과 쉬는 틈에 술값 내기 투전을 했다. 여럿이 나는 투전에 서툴다며 자리에서 밀어내고는 그저 앉아서 술이나 마시라고 한다.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란 소리다. 슬쩍 배알이 뒤틀렸지만 어쩌랴. 앉아서 남이 따는 것을 구경하며 술은 내가 먼저 마시니 나쁘지 않다.

이때 벽틈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따운 목소리로 지저귀듯 연연앵앵하는데 이 집 주인 댁 여성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저렇게 고우니) 분명 엄청난 미인일 것이다. 장난삼아 소리가 들리는 집 쪽으로 가 보니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부인이 그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더 할 수 없이 못생긴 얼굴이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기에 나는 "주인께서도 안녕하시지요?"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천천히 지나며 옷이며 장신구 모습을 살펴 보았다. 부풀려 올린 머리에 꽃비녀를 꽂았고 금팔찌와 보석 귀고리를 하고 붉은 분으로 가볍게 화장하였는데 검은 색 창파오를 입고 은으로 만든 사슬 허리띠를 둘렀다. 발 아래 신발을 벗어 두고 꽃과 나비를 수놓고 있었다. 만주족 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기 때문에 궁화를 신지 않는다.

주렴이 걷히더니 처녀 한 명이 나온다. 얼굴 모습을 보니 스무살은 넘어 보였다. 처녀도 부풀려 올린 머리를 하고 비녀를 꽂았는데 위에서 말한 여자의 모습과 비슷하였고 얼굴 또한 몹시 못생겼지만 살결은 희고 맑았다. 쇠주발을 들고 녹색 질그릇을 기울인다. 기장으로 지은 밥을 한 그릇 가득 담았고 쇠주발엔 물이 담겼다. 서쪽 벽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밥을 먹으며 파뿌리를 몇 개를 비벼 잎을 장에 담구더니 반찬 삼아 먹는다. 목 뒷덜미를 뒤룩뒤룩 거리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부끄러운 기색도 없다. 해마다 동쪽 사람들을 보아와서 대수롭지 않은 익숙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뜰은 수백 간 넓이다. 오래 내린 비에 진흙이 들이칠 수 있어서, 본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물에 닳은 강변 돌들로 색깔과 모양 대로 골라 문 근처에 깔아서 봉황을 그려 장식도 겸하면서 진흙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놓았다. 작은 것은 바둑알 만하고 큰 것은 되새 알 만하다. 무엇도 버리는 물건이 없다는 것을 이런 일을 보아도 알 만 하다. 닭들은 모두 털이며 깃털을 쪽집게로 다 뽑아서 맨살이 드러난 채 이리 저리 돌아다녀 볼썽사납기 그지 없다.


낱말풀이
  • 紙牌(지패): 종이로 만든 패를 이용한 놀이. 투전. 중국에서 전해진 놀이가 조선에서 새로운 규칙으로 정리된 것이다. 마치 일본의 화투가 한국에 넘어와 다른 규칙을 가진 놀이가 된 것과 유사하다. 놀이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전해오는 방법은 다섯 장의 패에서 세 장으로 10의 배수를 만들고 나머지 두 장으로 끗수를 겨루는 오늘날의 "도리짓고땡"과 같은 방법이 있다.
  • 長衣(장의): 만주족 전통 의상인 창파오(長袍).
  • 纏脚(전각): 여성의 발을 강제로 옭아매 굽은 모양으로 만드는 전족(纏足). 중국 한족 중상층의 풍속이었다.
  • 弓鞋(궁화): 전족한 발에 알맞게 제작된 굽은 신.
  • 葱根(총근): 파뿌리.
  • 鷄子(계자): 목 뒷덜미.
  • 癭瘤(영류): 뒤룩하게 찐 살.
  • 尋常(심상):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
  • 親熟(친숙): 친근하고 익숙함.
  • 羞容(수용): 부끄러워 하는 얼굴.
  • 碁子(기자): 바둑돌.
  • 黃雀(황작): 되새
  • 醜惡不忍見(추악불인견): 여기서 추악은 그저 생김새가 못생겼다는 뜻으로 쓰였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즉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이라는 의미.

만주 민가의 생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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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二日戊寅 (曉大雨 晩晴)

2일 무인, 새벽에 큰비, 저녁에 갬.

前溪大漲, 不可渡, 遂留行。 正使命來源及周主簿, 前往視水, 余亦隨行。 不數里, 巨浸當前, 不見涯涘。 使善泅者, 入水測其淺深, 不十步而肩已沒矣。 還報水勢, 正使愁悶, 盡招譯官及各房裨將, 使各陳渡水之策。 副使書狀, 亦來會, 副使曰 「多貰門扇及車輿, 作筏以渡何如。」 周主簿曰 「此計大妙。」 首譯曰 「門扇車輿, 難可多得。 此間造屋, 現有十餘間材木, 可以貰用, 但患葛絞難得。」 諸議紛然. 余曰, 「安用縛筏。 我有一兩隻舴艋櫓槳都具, 但欠一事。」 周問,「所欠甚事。」 余曰, 「只乏個副手梢公。」 一座哄笑。

앞의 개울이 크게 넘쳐 건널 수 없기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정사는 내원과 주주부에게 물을 보러 다녀오라 명하였고 나도 따라 나섰다. 몇 리 가지 않아 크게 잠긴 곳이 나왔고 원래 있던 물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물에 들어가 깊이를 재어 보게 하니 열 걸음을 못 가서 어깨가 물에 잠긴다. 돌아와 물의 상황을 보고하니 정사는 근심하면서 역관과 각방 비장을 모두 불러 물을 건널 방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부사와 서장도 모임에 참석하였고 부사는 "문짝과 수레를 여럿 빌려 뗏목을 만들어 건너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주주부는 "그것 참 좋은 계책입니다." 하였다. 수석 역관이 "문짝과 수레는 여럿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곳에 집 짓는 곳이 있어서 지금 십여 간을 지을 재목을 빌려 쓸 수 있지만 이걸 어떻게 묶을 수 있을 지 걱정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럿의 의견이 분분하길래 나는 "뗏목을 짤 것이야 있습니까? 제게 거룻배를 두어 척과 삿대가 있는데, 한가지 흠이 있군요."하고 말하였다. 주주부가 "어떤 흠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하고 물으니 나는 "그저 삿대를 저을 사공이 없네."하고 답하였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낱말풀이

主人麁鹵, 目不識丁, 而丌上猶有楊升菴集, 四聲猿。 有尺餘正藍瓷甁, 斜揷趙南星鐵如意, 臘茶色小香爐, 雲間胡文明製椅卓屛鄣, 俱有雅致, 不似窮邊村野氣。 余問, 「爾家計粗足否。」對曰, 「終歲勤苦, 未免飢寒。 若非貴國使行時, 都沒了生涯。」 「有男女幾個。」 曰, 「只有一盜, 尙未招婿。」 余問, 「何謂一盜。」 曰, 「盜不過五女之門, 豈不是家之蟊賊。」

주인은 얼굴이 사납게 생겼고 낫 놓고 기억 자도 몰랐지만 책상 위에 양신의 《승암집》, (서위의) 《사성원》이 놓여 있었다. 한 자 남짓한 푸른색 도자기 병이며 비스듬히 꽂은 조남성이 썼다는 철여의며 연두색 작은 향로며 중국 강남 운간 지역의 호문명이 만든 탁자며 병풍이 아담하고도 우아한 운치를 뽐내어 변두리 시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살림이 부족하진 않으신 듯 하오"하고 물으니 "평생 고생하다 말년에 가난을 면했습니다. 귀국의 사신 행차 때만 아니라면 이렇게 차리고 살지는 않습니다."하고 대답한다. "자녀는 몇이나 되시오?" 하고 물으니 "그저 도둑 하나가 있는데 아직 사위를 보지 못하였소." 한다. "어찌 도적이라 하시오?"하고 내가 묻자 "도적도 딸 다섯이 있는 집 문은 넘지 않는다고 하니 어찌 집안의 도적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낱말풀이

午後出門, 閒行散悶。 薥黍田中, 急響了一聲鳥銃。 主人忙出門看, 那田中跳出一個漢子, 一手把銃 一手曳猪後脚。 猛視店主, 怒道, 「何故放這牲口入田中。」 店主面帶惶愧, 遜謝不已, 其人血淋淋拖猪而去。 店主佇立悵然, 再三惋歎。 余問, 「那漢所獲誰家牧的。」 店主曰, 「俺家牧的。」 余問, 「雖然, 這畜逸入他人田中。 不曾傷害了一柄薥黍, 柰何枉殺了這個牲口。 爾們應須追徵猪價麽。」 店主曰, 「那敢追徵。 不謹護牢, 是我之不是處。」

盖康煕甚重稼穡制, 牛馬踐穀者倍徵, 故放者杖六十, 羊豕入田中, 田主登時捕獲, 放牧者, 不敢認主。 但不得遮車道, 阻泥則引出田間, 故田主常常治道以護田云。

오후가 되어 문을 나섰다. 여유롭게 길을 가니 고민이 사라진다. 수수 밭 가운데서 갑자기 조총 한 발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황급히 문 밖으로 나와 살피니 어느 밭 가운데서 한 사내가 튀어 나오는데 한 손에 총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돼지 뒷 다리를 잡아 끌고 나온다. 점주를 보더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목소리로 "어찌하여 돼지가 밭 가운데로 들어갔느냐?"하고 소리친다. 점주는 얼굴을 붉히면서 연신 죄송하다고 하고 사내는 피가 철철 나는 돼지를 끌고 갔다. 점주는 우두커니 서서 아쉽다는 듯 자꾸 탄식을 하였다. 내가 "저 돼지는 어느 집 것이오?" 하고 물으니 점주는 "저희 집 것입니다."한다. 내가 "짐승이 다른 사람 밭으로 들어갔다 하여도 그렇지, 수수 한 줄기 상한 것이 없는데 사냥하여 죽이는 미친 짓을 한단 말이오. 당신들이 마땅히 돼지 값을 받아내야 하지 않겠소?" 하고 물으니 점주는 "어찌 받아내겠소. 돼지 무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소."하고 대답한다.

강희제의 곡물 보호 제도는 지극히 엄하여 소나 말이 곡식을 밟으면 그 배를 물어내게 하고 가축의 주인에겐 곤장 60 대를 때리게 하며 양이나 돼지가 밭으로 들어가면 밭 주인은 그것을 잡아 들여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고 원래 주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수레가 진흙 구덩이를 비켜가기 위해 길가에서 밭으로 들어간 경우는 예외이기 때문에 밭 주인은 밭을 보호하려고 항상 도로를 잘 관리하여 놓는다고 한다.


낱말풀이

村邊有二窰。 一恰裁燒畢, 塗泥竈門, 擔水數十桶。 連灌窰頂, 窰頂略坎, 受水不溢。 窰身方爛, 得水卽乾, 似當注水, 不焦爲候耳。 一窰先已燒冷, 方取甓出窰。 大約窰制, 與我東之窰判異, 先言我窰之誤, 然後窰制可得。

我窰直一臥竈, 非窰也。 初無造窰之甎, 故支木而泥築薪。 以大松燒, 堅其窰, 其燒堅之費, 先已多矣。 窰長而不能高, 故火不炎上。 火不能炎上, 故火氣無力。 火氣無力, 故必爇松取猛, 爇松取猛, 故火候不齊。 火候不齊, 故瓦之近火者, 常患苦窳, 遠火者, 又恨不熟。 無論燔瓷燒瓮, 凡爲陶之家, 窰皆如此, 其爇松之法又同, 松膏烈勝他薪也。 松一剪則非再孽之樹, 而一遇陶戶, 四山童濯, 百年養之, 一朝盡之, 乃復鳥散逐松而去。 此緣一窰失法, 而國中之良材日盡, 陶戶亦日困矣。

今觀此窰, 甎築灰封, 初無燒堅之費, 任意高大。 形如覆鍾, 𥦔頂爲池, 容水數斛, 旁穿烟門四五, 火能炎上也。 置甎其中, 相支爲火道, 大約其妙在積, 今使我手能爲之至易也, 然口實難形。 正使問, 「其積類品字乎。」 余曰 「似是而非也。」 卞主簿問, 「其積類疊冊匣乎。」 余曰, 「似是而非也。」 甓不平置, 皆隅立爲十餘行, 若堗𣎒, 再於其上, 斜駕排立。 次次架積, 以抵窰頂, 孔穴自然踈通如麂眼。 火氣上達. 相爲咽喉. 引焰如吸, 萬喉遞呑, 火氣常猛, 雖薥稭黍柄, 能匀燔齊熟, 自無攣翻龜坼之患。

今我東陶戶不先究窰制, 而自非大松林, 不得設窰。 陶非可禁之事, 而松是有限之物, 則莫如先改窰制, 以兩利之。 鰲城李公恒福, 老稼齋皆說甓利, 而不詳窰制, 甚可恨也。 或云, 「薥稭三百握, 爲一窰之薪, 得甎八千。」 薥稭長一丈半, 拇指大則一握, 僅四五柄耳。 然則薥稭爲薪, 不過千餘柄, 可得近萬之甎耳。

마을에는 가마가 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다 썼는 지 불구덩이 문에 진흙을 발라 막고서 물 수십 통을 담아 두었다. 가마 머리에 관이 이어져 구멍으로 물을 담아도 넘치지는 않는다. 가마 몸통이 갈라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채우는데 (아직 식지 않은 가마는) 곧바로 말라버린다. 마치 물을 부어야만 불타버리지 않을 듯 하다. 다른 가마 하나는 이미 다 식혔는 지 가마에서 벽돌을 꺼내고 있었다. 가마의 대략적인 모습은 우리나라의 것과 아예 달라서 먼저 우리 가마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 하고 난 후에 (이곳) 가마의 모습을 말하려 한다.

우리의 가마란 것은 그저 길게 누워 있는 하나의 아궁이이지 가마라 할 수 없다. 애초에 가마를 벽돌로 짓지 않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땔나무를 쌓는다. 큰 소나무 장작을 불살라 가마를 굳히는 데 이렇게 가마를 지을 때부터 비용이 먼저 많이 든다. 가마가 길쭉한데 높지 않아서 불길이 위로 타올라 가지 못한다. 불길이 위로 타오르지 못하니 불 기운이 약하다. 불기운이 약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나무를 때어 거세지게 하는데 소나무를 때면 불길은 거세지지만 고르지 못하다. 불은 거센데 고르지 못하니 기와를 구우면 가까운 것은 터질까 염려되고 먼 것은 안 구워질까 걱정한다. 자기를 굽는 가마이건 항아리를 굽는 것이건 가릴 것 없이 가마란 것이 모두 같아서 소나무 장작을 때는 것은 똑같은데 송진이 다른 땔감보다 더 열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한 번 베어내면 자손을 남기지 않는 나무라 가마가 하나 놓이면 주변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 백 년을 기른 숲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리고 새떼가 흩어지듯 다시 소나무 숲을 찾아 간다. 이처럼 가마 하나가 숲을 모두 헐벗게 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나라 한의 좋은 목재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결국엔 가마를 굽는 것도 어려워지고 만다.

지금 본 중국의 가마는 벽돌과 석회를 써서 지어서 처음부터 가마를 짓는 비용이 들지 않아 마음대로 크고 높게 지을 수 있다. 모양은 엎어 놓은 종처럼 생겼는데 위쪽은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우묵하게 생겨 수 섬의 물을 담을 수 있고 옆으로 네댓 군데 연기 구멍을 뚫어 불길이 위로 오를 수 있게 하였다. 가마에 벽돌을 쌓을 때는 벽돌 사이로 불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교묘하게 만들어 가며 쌓는데 이제 처음 본 나도 따라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말로 그 모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사가 "벽돌을 쌓은 모양이 품(品)자 같지 않은가?"하고 묻기에 나는 "그 비슷하지만 아닙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변주부가 "책갑을 겹쳐 쌓은 것 같이 생겼나요?"하고 물어도 나는 "그 비슷하지만 아닐세."하였다. 벽돌은 반듯하지 않고 모두 모를 세워 열 줄 가량 씩 쌓아 구들장의 방고래처럼 하였고 다시 그 위로 비스듬히 줄지어 늘여 세웠다. 가마 밑에서 꼭대기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뚫린 자리는 자연스럽게 가마 눈이 된다. 불기운이 위로 다다르면 (벽돌을 쌓아 만든 구멍들이) 서로 목구멍처럼 작용하여 불길을 마시고 뱉으니 불기운이 저절로 강해지기 때문에 수숫대 같은 땔감을 쓰더라도 고르게 열을 전달할 수 있어서 자연히 벽돌이 갈라지고 깨질 염려가 없다.

지금 우리나라 도기 장인들은 먼저 가마를 짓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고 큰 소나무 숲이 없으면 가마를 세우지 못한다고 여긴다. 도기를 굽는 일이야 막을 수 없는 것이나 소나무는 무한정 있는 자원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가마 짓는 방법을 개선하여야 서로 이득일 것이다. 오성 이항복과 노가재 김창엽은 벽돌의 이점을 논하면서도 가마 짓는 방법을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누군가는 "수숫대 삼백 줌이면 가마 하나의 땔감으로 써서 벽돌 8천 장을 만든다."고 하였다. 수숫대는 길이가 한 장 반 정도이고 한 줌이면 엄지만한 굵기 너댓 줄기가 된다. 그러니 수숫대를 땔감으로 쓰면 천 여 줄기로 만 여 장의 벽돌을 만들 수 있다.


낱말풀이
  • 判異(판이): 아예 다르다.
  • 無論(무론):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 松膏(송고): 송진.
  • 童濯(동탁): 벌거숭이 아기처럼 산에 나무며 풀이 하나도 없다.
  • 任意(임의): 마음대로.
  • 𥦔(): 강희자전 누락 한자. 우묵하다.
  • (): 부피의 단위인 섬을 뜻한다. 1 섬은 10 말이고 1 말은 10 되, 1 되는 다시 10 홉, 1 홉은 10 작으로 세분되었다. 1 작의 용량은 대략 18 mL 이기 때문에 1 섬은 180 L 가 된다.
  • 冊匣(책갑): 책을 넣어 둘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상자나 집.
  • 𣎒(?): 강희자전 누락 한자. 방고래, 구들 밑으로 열이 지나가게 세운 것.
  • 排立(배립): 줄지어 늘여 세움.
  • 孔穴(공혈): 뚫린 자리.
  • 咽喉(인후): 목구멍.
  • 鰲城李公恒福(오성이공항복): 오성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한음 w:이덕형과의 우정 때문에 "오성과 한음"으로 흔히 불린다.
  • 老稼齋(노가재): 노가재 김창업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숙종 시기인 1712년 북경을 방문하여 《노가재연행일기》를 남겼다.
  • 拇指(무지): 엄지 손가락.
  • (): 길이의 단위. 1장은 10 자이다. 약 3미터 쯤 된다.

日長如年。 向夕尤暑, 不堪昏睡。 聞傍炕方會紙牌, 叫呶爭鬨。 余遂躍然投座, 連勝五次, 得錢百餘。 沽酒痛飮, 可雪前恥。 問, 「今復不服否。」 趙卞曰, 「偶然耳。」 相與大笑。 卞君及來源, 不勝忿寃, 要余更設。 余辭曰, 「得意之地勿再往, 知足不殆。」

하루가 한 해 처럼 길게 느껴진다.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더워서 졸음이 쏟아진다. 옆 방에서는 여전히 투전이 한창이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나도 마침내 투전판에 뛰어들어 연거푸 다섯 차례를 이겨 백여 푼을 땄다. 술을 사서 실컷 마시니 앞서 투전을 못한다고 내몰린 것의 설욕이 되었다. "이래도 항복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조군과 변군은 "우연일 뿐이지요." 한다. 서로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변군과 내원은 이기지 못한 것이 원통하여 내게 다시 한 판 하자고 하였다. 나는 "뜻을 이룬 곳에 다시 가지 않고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느니" 하며 사양하였다.


낱말풀이
  • 躍然(약연): 생기있게 뛰노는 모양.
  • 偶然(우연):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
  • 知足不殆(지족불태): 《도덕경》 44장의 지지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知止不殆,可以長久 / 만족을 알면 욕됨이 없고, 끊음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갈 만 하다.)가 출전이다. 자기는 놀음에서 땄으니 그만 두겠다는 말로 썼다.

결혼식 행렬과 시골 글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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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三日己卯 (曉大雨 朝晝快晴 夜又大雨達曙)

3일 기묘, 새벽에 큰비가 내리고 아침에 갬. 밤이 되어 다시 큰비가 밤새 내림.


낱말풀이

又留。 朝起開牕, 積雨快霽。 光風時轉, 日色淸明。 可占午炎, 榴花滿地, 銷作紅泥, 繡毬浥露, 玉簪抽雪。 門前有簫笳鐃鉦之聲, 急出觀之, 乃迎親禮也。 彩畵紗燈六對, 靑盖一對, 紅盖一對, 簫一雙, 笳一雙, 觱篥一雙, 疊鉦一雙, 中央四人, 肩擔一座靑屋轎, 四面傅玻瓈爲牕, 四角嚲彩絲流蘇。 轎正腰爲杠, 以靑絲大繩, 橫絞杠之前後, 再以短杠, 當中貫絞, 兩頭肩荷。 四人八蹄, 一行接武, 不動不搖, 懸空而行, 此法大妙。 轎後有兩車, 皆以黑布爲屋, 駕一驢而行。 一車共載四個老婆, 面俱老醜, 而不廢朱粉, 顚髮盡禿, 光赭如匏, 寸髻北指, 猶滿揷花朶, 兩耳垂璫, 黑衣黃裳。 一車共載三少婦, 朱袴或綠袴, 都不繫裳。 其中一少女, 頗有姿色。 盖老是粧婆乳媼, 少的是丫鬟也。三十餘騎簇擁, 着一個胖大莽漢, 口旁頤邊, 黑髭鬆鬆, 權着九爪蟒袍, 白馬金鞍, 穩踏銀鐙, 堆着笑臉。 後有三兩車, 滿載衣。

또다시 머물렀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보니 비가 그치고 맑아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청명하였다. 한낮의 더위가 찾아오자 석류꽃이 땅에 가득 떨어져 붉은 진흙처럼 보였고 수국은 빗방울을 머금고 옥잠화는 눈처럼 빛났다. 문 앞에서 퉁소며 태평소를 불고 징틀 치는 소리가 나길래 급히 나가 보니 결혼식 행렬이다. 여러 색으로 치장한 사등이 여섯 대, 푸른 일산이 한 대, 붉은 일산이 한 대, 퉁소가 한 쌍, 태평소가 한 쌍, 향피리가 한 쌍, 징이 한 쌍이 지나고 가운데 네 명이 푸른 가마를 메고 지나는데 4 면에 푸른 유리로 창을 달았고 색을 입힌 실을 꼬아 만는 술이 네 모서리에 달렸다. 가마 한 가운데 장대가 달렸는데 푸른 실로 큰 밧줄을 만들어 장대 앞뒤를 묶었고 다시 짧은 장대가 가마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사람들이 어깨로 맬 수 있게 하였다. 네 명의 여덟 다리가 척척 맞아 한 걸음 씩 내딛는데 가마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가는 듯 하여 그 움직이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가마 뒤로 수레 둘이 뒤따르는 데 수레 하나 마다 나귀 한 마리가 메여 끌고 갔다. 수레 하나에는 네 노파가 탔는데 얼굴은 늙어 추했으나 여전히 붉은 분을 발랐고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숱이 없어서 바가지처럼 빛이 났으나 뒤로 모은 손가락 만한 쪽에 잔뜩 꽃비녀를 꽂았으며 양 귀에도 옥 귀거리를 달고 검은 저고리에 누런 치마를 입었다. 또 다른 수레에는 나이 어린 부녀 셋이 탔는데 붉은 바지나 녹색 바지를 입고 치마는 두르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소녀는 제법 예뻤다. 알고 보니 노파들은 유모이고 젊은 여성들은 시종이라고 한다. 삼십여 필이 오밀조밀 둘러싸고 가는데 마치 오동나무 같이 생긴 커다란 사내가 입 옆이며 턱 주위에 검은 수염이 숭숭 났는데 구조망포를 차려 입고 금칠한 안장을 얹은 백마를 타고 은빛 등자를 편안히 밟은 채 웃음을 머금고 지나간다. 뒤에 세 쌍의 수레에는 옷을 잔뜩 실었다.


낱말풀이
  • (): 호가(胡笳)는 태평소를 말한다.
  • 疊鉦(첩정): 징.
  • 親禮(친례): 결혼식.
  • 紗燈(사등): 여러 가지 빛깔의 천으로 만든 등.
  • 靑盖(청개): 푸른 일산. 일산은 햇볕을 가리기 위해 만든 큰 양산이다.
  • 觱篥(필률): 향피리.
  • 屋轎(옥교): 지붕 달린 가마.
  • 玻瓈(파려): 원래는 칠보(七寶)의 하나인 사파이어를 말한다. 여기서는 파란 유리.
  • 流蘇(유소): 실을 꼬아 만든 술 장식.
  • 懸空(현공): 허공에 매달림.
  • 老醜(노추): 늙고 추함.
  • 姿色(자색): 아름다운 모습과 얼굴빛.
  • 乳媼(유온): 갓난아기에게 그 어머니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길러 주는 여자. 유모.
  • 丫鬟(아환): 젊은 여자 종. 중국의 젊은 여성은 두 갈래 머리를 묶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余問店主, 「此邨裏可有秀才塾師麽。」 店主曰, 「邨僻少去處, 那有學究先生, 去年秋間 偶有一個秀才, 從稅官京裡來的, 一路上染得暑痢。 落留此間, 多賴此處人, 一力調治, 經冬徂春, 快得痊可。那先生文章出世, 兼得會寫滿州字情願。 暫住此間, 開了一兩年黌堂, 敎授些此邨小孩們。 以酬救療大恩, 現今坐在了關聖廟堂裡。」 余曰, 「可得主人暫勞鄕導。」 店主曰, 「不必仰人指導。」 擧手指之曰, 「這個屋頭出首的大廟堂是也。」 余問, 「這個先生姓甚名誰。」 店主曰, 「一邨坊都叫他富先生。」 余問, 「富先生多少年紀。」 店主曰 ,「大公子儞自去問他。」 店主因走入炕裡, 手拿紅紙數十片拈示。 道,「此乃那富先生親手墨蹟。」 那紅紙左沿, 細書,「某位舍親尊台, 某年月日, 恭請台駕, 電莅敝筵。」 店主道, 「俺門兄弟, 前春招婿時, 倩他請席。」 刺紙大約, 僅能成字, 而數十紙所寫字樣, 無大無小, 如珠貫絲, 如印一板。

나는 점주에게 "이 마을 안에 수재나 글선생이 계신가?" 하고 물었다. 점주는 "마을이 후미지고 집들이 적으니 학문을 닦는 선생님이 있겠습니까만, 제작년 가을에 어쩌다 수재 한 분이 세관을 따라 서울에서 오던 길에 이질에 걸려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힘껏 도왔는데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하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문장이 출중하였고 뿐만 아니라 만주 글자로 된 청원도 써 주셨습니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 2년 동안 서당을 열어 이 마을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병간호를 받은 은혜를 갚으시고 지금은 관성조당에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주인장이 길 안내를 해 줄 수 있겠나?"하고 물었다. 점주는 "안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하면서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 지붕이 솟아 올라 있는 곳이 대조당입니다." 한다. 내가 "선생님 성함은 어찌되시나?" 하고 물으니 점주는 "이 마을에선 다들 부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한다. 나는 "부 선생님 연세는 어찌 되는가?" 하고 물었고 점주는 "대공자께서 직접 가셔서 여쭤 보셔요." 하고 대답한다. 점주는 방으로 들어가 붉은 종이 수십 장을 가지고 나와 보여 주었다. "이것이 부 선생님이 직접 쓰신 글씨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붉은 종이 왼쪽에 가는 글씨로 "아무개 집에서 존친들께 아무날에 삼가 모시오니 볼품없는 잔치이어도 참석하여 주십시오." 라고 적혀있었다. 점주는 "저희 집 형제가 지난 봄 사위를 볼 때 써 달라 부탁한 것입니다." 하였다. 종이를 간단히 살피니 겨우 글이나 쓰는구나 싶었지만 수십장 종이에 쓰인 글자를 보니 크지도 작지도 않아 실에 구슬을 꿴듯하고 마치 도장을 찍은 듯 똑 같았다.


낱말풀이

意其秀才爲富鄭公苗裔, 卽喚時大, 同去尋那廟堂裡來。 寂無人聲, 周回觀玩, 右廂裡有小兒讀書聲。 俄有一兒開戶, 探頭一張, 因走出, 不顧而去。 余追問童子, 「儞們的師父坐在那裡麽。」 童子道, 「甚麽。」 余曰, 「富先生。」 童子畧不採聽, 口裏喃喃, 拂袖而去。 余謂時大曰, 「那先生必在這裡。」 遂直向右廂, 一推開戶, 有四五副空椅, 並無人跡。 余闔戶恰裁轉身, 那童子引一老者而來, 想是富也。 適纔閒走比鄰, 那童子忙去報客而回也。 乍觀面目, 全乏文雅氣。 余向前肅揖, 那老者不意抱余腰脅, 盡力舂杵, 又把手顫顫, 滿堆笑臉。 余初則大驚, 次不甚喜, 問,「尊是富公麽。」 那老者大喜道, 「儞老那從識僚賤姓。」 余曰, 「吾久聞先生大名如雷灌耳。」 富曰, 「願聞尊姓大名。」 余書示之。 富自書其名曰, 「富圖三格, 號曰齋, 字曰德齋。」 余問,「甚麽三格。」 富曰, 「是吾姓名也。」 余問,「貴鄕華貫在何地方。」 富曰, 「俺滿洲鑲藍旗人。」

富問, 「儞老此去 當面駕麽。」 余曰, 「甚麽話。」 富曰 「萬歲爺要當接見儞們。」 余曰, 「皇上萬一接見時, 吾當保奏儞老得添微祿麽。」 富曰, 「倘得如此時, 朴公大德, 結草難報。」 余曰, 「吾阻水留此已數日, 眞此永日難消。 儞老豈有可觀書冊, 爲借數日否。」 富曰, 「無有, 往在京裏時, 舍親折公, 新開刻舖, 起號鳴盛堂。 其群書目錄, 適在槖中, 如欲遣閒時, 不難奉借。 但願儞老此刻, 暫回携得眞眞的丸子, 淸心元, 高麗扇子, 揀得精好的作面幣, 方見儞老眞誠結識, 借這書目未晩也。」 余察其容辭志意, 鄙悖庸陋, 無足與語, 不耐久坐, 卽辭起。 富臨門揖送, 且言,「貴邦明紬可得賣買麽。」 余不答而歸。

이 수재가 혹시 (송나라 시기의 문인) 부정공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시대를 부르고 함께 조당을 찾아갔다. 글방에 가 보니 사람 소리가 나지 않기에 천천히 돌아보니 왼쪽 집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그 중에 머리가 좀 커 보이는 아이를 불렀는데 다가와 살펴 보고는 도로 가버린다. 그 아이를 쫓아가 "너희 사부는 지금 어디 계시냐?" 하고 물었다. 아이는 "뭐라고요?" 한다. 나는 "부 선생" 하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입 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가버렸다. 나는 시대에게 " 그 선생이 분명 안에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고 말했다. 곧바로 오른쪽 집으로 향하니 방 하나가 열려 있는데 빈 의자 네다섯 개만 놓여 있고 역시나 사람은 없다. 내가 방문을 닫아 걸고 돌아서는데 그 아이가 한 노인을 이끌고 온다. 아마도 그가 부 선생인듯 싶었다. 마침 이웃집에 가려는 순간에 아이가 손님이 오셨다고 하니 돌아온 것이다. 딱 보아도 문아한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니 내 허리를 붙잡고 있는 힘껏 절구 공이 흔들듯 하면서 손을 부여 잡고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나는 처음엔 깜짝 놀랐다가 기분이 좋지 않아져 "부 선생님 이신지요?"하고 물었다. 그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보잘 것 없는 이 늙은이 성씨는 어디서 들었소?" 한다. 나는 "선생님의 큰 이름은 익히 들어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부 선생은 "존성대명이 어찌되시오?" 하고 묻는다. 나는 글로 써서 보여 주었다. 부 선생도 자신의 이름을 글로 써 주었는데 "부도삼격, 호는 재, 자는 덕재"라 하였다. 나는 "삼격은 무엇인가요?"하고 물었고 부 선생은 "그것이 내 이름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내가 "고향이 중화가 아니신가요?" 하고 물으니 "저는 만주 양람기 사람이오." 하고 대답한다.

부 선생은 "염감께서 이번에 면가를 가시지요?" 하고 묻는다. 내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되물으니 부 선생은 "만세야께옵서 접견하시지 않겠오." 하고 말한다. 나는 "황상께서 만일 접견을 하게 되면 제가 마땅히 선생님을 천거하여 작은 벼슬 자리라도 얻도록 해 드려야죠." 하고 대답하였다. 부 선생은 "그리만 해 주신다면 박공의 큰 은혜는 결초보은 하겠소." 한다. 내가 "물 때문에 길이 막혀 며칠 동안 있었더니 하루 종일을 지내기가 힘듭니다. 혹시 읽을 만한 책이 있으시면 몇 일 빌릴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부 선생은 "가진 건 없소만, 옛날 서울에 있을 적에 친했던 절공이 목판 인쇄소를 새로 냈는데 이름을 명성당이라 하였소. 그곳에서 낸 책 목록을 행장에 넣고 왔는데 시간을 때우실 생각이면 빌려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이 늙은이의 책을 빌리기를 원하시거든 돌아가시는 길에 진귀한 환약인 청심환과 고려 부채를 들고 오셔서 서로 만난 인사치래를 해 주신다면 이 늙은이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책 목록을 빌려 드리지요." 하고 대답한다. 내가 이자의 용모나 생각을 살펴보니 더럽고 이지러진 데다 막 되어 먹어서 말을 섞기도 싫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없기에 곧바로 일어섰다. 부 선생은 문까지 배웅해 오며 "그대 나라의 명주를 살 수 있겠소?" 한다. 나는 대답도 않고 돌아 나왔다.


낱말풀이

正使問, 「有何可觀 恐中暑。」 余對, 「俄逢一老學究, 非但滿人, 鄙陋無足語。」 正使曰, 「彼旣有求, 何可嗇一丸一箑耶。 第不妨借看書目。」 遂使時大 送淸心元一丸, 魚頭扇一柄。 時大卽回, 持掌大幾葉小冊而來。 皆空紙 ,所錄書目, 盡是淸人小品七十餘種, 此不過數頁所錄。 而要索厚價, 其無恥甚矣。 然旣爲借來, 且新眼目, 遂謄而還之。

  • 『尺牘新語』 共六冊, 汪淇 澹漪 箋。
  • 『焚書』 共六冊 , 『藏書』 共十八冊, 『續藏書』 共九冊, 李贄 卓吾 著。
  • 『宮閨小名錄』, 『長洲雜說』, 『西堂雜俎』, 尤侗 展成 著。
  • 『筠廊偶筆』, 宋犖 牧仲 著。
  • 『同書字』, 『觸閩小記』, 『因樹屋書影』, 周亮工 元亮 著。
  • 『四禮撮要』, 甘京 著。
  • 『說林』, 『西河詩話』,毛奇齡 著。
  • 『韻白匡林』, 『韻學通指』, 『潠書』, 『毛先舒』, 稚黃 著。
  • 『西山紀游』, 周金然 著。
  • 『日知錄』, 『北平古今記』, 顧炎武 著。
  • 『不知姓名錄』, 李淸 映碧 著。
  • 『蔣說』, 蔣虎臣 著。
  • 『影梅菴憶語』, 冒襄 辟彊 著。
  • 『古今書字辨訛』, 『東山談苑』, 『秋雪叢談』, 余懷 澹心 著。
  • 『冬夜箋記』, 王崇簡 著。
  • 『皇華記聞』, 『池北偶談』, 『香祖筆記』, 王士禛 貽上 著。
  • 『毛角陽秋』, 『群書頭屑』, 『閨閤語林』, 『朱鳥逸史』, 王士祿 著。
  • 『笠翁通譜』, 『無聲戱』, 『小說鬼輸錢故事』, 李漁 笠翁 著。
  • 『天外談』, 石龐 著。
  • 『奏對機緣』, 弘覺 著。
  • 『十九種』, 柴虎臣 著。
  • 『橘譜』, 諸虎男 著。
  • 『日下舊聞』 共二十冊, 朱彝尊 錫鬯 著。
  • 『虞初新志』, 張潮 山來 著。
  • 『寄園寄所寄』 共八冊, 趙吉士 著。
  • 『說鈴』, 汪涴 著。
  • 『說郛』, 吳震芳 靑壇 著。
  • 『檀几叢書』, 王晫 著。
  • 『三魚堂日記』, 陸隴其 著。
  • 『亦禪錄』, 『幽夢影』, 張潮 著。
  • 『粉墨春秋』, 朱彝尊 著。
  • 『兩京求舊錄』, 朱茂曙 著。
  • 『燕舟客話』,周在浚 著。
  • 『崇禎遺錄』, 王世德 著。
  • 『入海記』, 査嗣璉 著。
  • 『琉球雜錄』, 汪楫 著。
  • 『博物典彙』, 黃道周 著。
  • 『觀海記行』, 施閏章 著。
  • 『柝津日記』, 周篔 著。

與鄭進士分錄, 以爲書肆攷求之資, 卽送, 時大還傳且令語之曰, 「此書皆我東所有, 故吾老爺不覽此書目云爾。」 時大歸言, 富也聽渠所傳, 頗有憮然之色, 贈渠手巾云。 手巾長二尺餘, 新件黑色縐紗也。

정사께서 "이 더위에 어딜 보고 오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학문 닦는 노인 한 명을 만나고 오는 길인데 만주인일 뿐만 아니라 너절하고 더러워 말 섞을 위인이 아니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정사는 "구할 것이 있다면 청심환 한 알 부채 한 개 아낄 것이 무언가. 그저 볼 책이나 구하면 되는 것이지." 하였다. 시대를 시켜 청심환 한 알과 어두선 하나를 보냈다. 시대는 곧장 다녀와 손바닥 만한 작은 책을 들고 왔다. 책은 거의 비어 있는데 있는 적힌 목록이라고 해도 청나라 사람이 쓴 소품 칠십여 편이 몇 쪽에 걸쳐 적혀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가지를 썼다고 해도 이렇게 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왕 빌려 온 것이고 처음보는 것이어서 베껴 쓴 다음 돌려주었다.

  • 《척독신어》모두 여섯 책 - 왕기 담의 씀.
  • 《분서》 모두 여섯 책, 《장서》 모두 열여덟 책, 《속장서》 모두 아홉 책. 이지 탁오 지음.
  • 《궁규소명록》, 《장주잡설》, 《서당잡조》, 우동 전성 지음.
  • 《균량우필》, 송화 목중 지음.
  • 《동서자》, 《촉민소기》, 《인수옥서영》, 주량공 원량 지음.
  • 《사례촬요》, 감경 지음.
  • 《설림》, 《서하시화》, 모기령 지음.
  • 《운백광림》, 《운학통지》, 《손서》, 《모선서》, 치황 지음
  • 《서산기유》, 주금연 지음.
  • 《일지록》, 《북평고금기》, 고염무 지음.
  • 《부지성명록》, 이청 영벽 지음.
  • 《장설》, 장호신 지음.
  • 《영매암억어》, 모양 벽강 지음.
  • 《고금서자변와》, 《동산담원》, 《추설총담》, 여희 담심 지음.
  • 《동야전기》, 왕숭간 지음.
  • 《황화기문》, 《지북우담》, 《향조필기》, 왕사정 이상 지음.
  • 《모각양추》, 《군서두설》, 《규합어림》, 《주조일사》, 왕사록 지음.
  • 《입응통보》, 《무성희》, 《소설귀수전고사》, 이어 입옹 지음.
  • 《천외담》, 석방 지음.
  • 《주대기연》, 홍각 지음.
  • 《십구종》, 시호신 지음.
  • 《귤보》, 저호남 지음.
  • 《일하구문》 모두 스무 책, 주이준 석창 지음.
  • 《우초신지》, 장조 산래 지음.
  • 《기원기소기》 모두 여덟 책, 조길사 지음.
  • 《설령》, 왕완 지음.
  • 《설부》, 오진방 청단 지음.
  • 《단궤총서》, 왕탁 지음.
  • 《삼어당일기》, 육롱기 지음.
  • 《역선록》, 《유몽영》, 장조 지음.
  • 《북문춘추》, 주이준 지음.
  • 《양걍구구록》, 주무서 지음.
  • 《연주객화》, 주재준 지음.
  • 《숭정유록》, 왕세덕 지음.
  • 《입해기》, 사사련 지음.
  • 《유구잡록》, 왕집 지음.
  • 《박물전휘》, 황도주 지음.
  • 《관해기행》, 시윤장 지음.
  • 《탁진일기》, 주운 지음.

정진사와 목록을 나누어 베껴서 나중에 책을 구할 때 쓸 자료로 삼고는 곧바로 돌려 주면서 시대에게 "이 목록에 있는 책들은 우리 나라에도 이미 다 있어서 우리 영감님은 아예 목록도 다 보지 않으셨오."하고 말하게 시켰다. 시대가 전한 말을 듣고 부 선생은 몹시 미안한 얼굴을 하더니 수건 하나를 주더란다. 수건의 길이는 두 자 쯤 되었는데 검고 주름진 천으로 되어 있었다.


낱말풀이

비로 길이 막혀 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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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四日庚辰, 自昨夜達曙大霔, 留行。

초사흘 경진, 어제 밤새 큰 장마가 내려 머물렀다.


낱말풀이

看楊升菴集, 或圍碁消閒。 副使書狀來會上房, 又招行中廣詢渡水之策。 良久盡罷去, 似無善策也。

《양승암집》을 읽고 바둑을 두며 소일하였다. 부사의 서장이 오고 상방도 와서 또 물을 건널 방책을 두루 물었다. 여러 방법을 다 짜내 보았지만 마땅한 좋은 수가 없었다.


낱말풀이

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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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五日辛巳, 晴, 阻水留行。

초닷새 신사, 비가 그쳤지만 물살이 거칠어 머물렀다.

店主開其內炕烟溝, 持長柄鍬子扱灰。 余於是略觀炕制大約。 先築炕基高尺有咫 爲地平 然後以碎甎碁置爲支足 而舖甎其上而已 甎厚本齊 故破爲支足 而自無♣(孼-子+足)蹩 甎體本匀 故相比排舖 而自無罅隙 烟溝高下 劣容伸手出納 支足者 遞相爲火喉 火遇喉則必踰若抽引然 火焰驅灰闐騈而入 衆喉遞呑迭傳 無暇逆吐 達于烟門 烟門一溝深丈餘 我東方言‘犬座’也 灰常爲火所驅 落滿阬中 則三歲一開烟炕一帶 扱除其灰 竈門坎地一丈 仰開炊口 爇薪倒揷

점주는 구들 골을 열고 긴 가래로 재를 긁어 모았다. 나는 (이 틈에) 구들을 대략 살필 수 있었다.


낱말풀이

竈傍闕地如大瓮 上覆石盖 爲平地 其中空洞 生風 所以驅納火頭於烟喉 而點烟不漏也 又烟門之制 闕地如大瓮 甎築狀如浮圖 高與屋齊 烟落瓮中 如吸如吮 此法尤妙 大約烟門有隙 則一線之風 能滅一竈之火 故我東房堗 常患吐火 不能遍溫者 責在烟門 或杻籠塗紙 或木板爲桶 而初竪處土築有隙 或紙塗弊落 或木桶有闖 則不禁漏烟 大風一射 則烟桶爲虛位矣

我念‘吾東家貧 好讀書 百千兄弟等鼻端 六月恒垂晶珠 願究此法 以免三冬之苦’ 卞季涵曰 “炕法終是恠異 不如我東房法” 余問“所以不如者何等” 卞君曰 “何如鋪得四張附油芚 色似火齊 滑如水骨耶” 余曰 “炕不如房則是也 其造堗之法 但效此而施之於房 鋪得油芚 有誰禁之 東方堗制 有六失而無人講解 吾試論之 君靜聽無譁 泥築爲塍 架石爲堗 石之大小厚薄 本自不齊 必疊小礫 以支四角 禁其躄蹩 而石焦土乾 常患頹落 一失也 石面凹缺處 補以厚土 塗泥取平 故炊不遍溫 二失也 火溝高濶 焰不相接 三失也 墻壁踈薄 常苦有隙 風透火逆 漏烟滿室 四失也 火項之下 不爲遞喉 火不遠踰 盤旋薪頭 五失也 其乾爆之功 必費薪百束 一旬之內 猝難入處 六失也 何如與君共鋪數十甎 談笑之間 已造數間溫堗 寢臥乎其上耶

夜與諸君略飮數杯 更鼓已深 扶醉歸臥 與正使對炕 而中隔布幔 正使已熟寢 余方含烟矇矓 枕邊忽有跫音 余驚問汝是誰也 答曰 “擣伊鹵音爾幺” 語音殊爲不類 余再喝 “汝是誰也” 高聲對曰 “小人擣伊鹵音爾幺” 時大及上房廝隷 一齊驚起 有批頰之聲 推背擁出門外 盖甲軍 每夜巡檢一行所宿處 自使臣以下點數而去 每値夜深睡熟 故不覺也 甲軍之自稱擣伊鹵音 殊爲絶倒 我國方言 稱胡虜戎狄曰擣伊 盖島夷之訛也 鹵音者 卑賤之稱 爾幺者 告於尊長之語訓也 甲軍則多年迎送 學語於我人 但慣聽擣伊之稱故耳 一塲惹鬧 以致失睡 繼又萬蚤跳踉 正使亦失睡 明燭達曙

선잠에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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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六日壬午 (晴) 溪漲小减 故遂發行 余入正使轎中同渡 下隸三十餘人 赤身擡轎 至中流湍急處 轎忽左傾幾墮 危哉危哉 與正使兩相抱持 僅免墊溺 渡在彼岸 望見渡水者 或騎人項 或左右相扶 或編木爲扉而乘之 使四人肩擡而渡 其乘馬浮渡者 莫不仰首視天 或緊閉雙目 或强顔嬉笑 廝隷皆解鞍肩荷而渡 意其恐濕也 旣渡者 又肩荷而返 恠而問之 “盖空手入水 則身輕易漂 故必以重物壓肩也”

數次往返者 莫不戰慄 山間水氣甚冷故也 中火草河口 所謂畓洞 以其長時沮洳 故我人所名云 畓本無字 我東吏簿水田二字合書作會意 借音沓 踰分水嶺 高家嶺 劉家嶺 宿連山關 是日行六十里

夜小醉微睡 身忽在瀋陽城中 宮闕城池閭閻市井 繁華壯麗 余自謂壯觀 不意其若此 吾當歸詑家中 遂翩翩而行 萬山千水 皆在履底 迅若飛鳶 頃刻至冶谷舊宅 坐內房南牕下 家兄問“瀋陽如何” 余恭對所見 “勝於所聞” 誇美亹娓 望見南牕外 隣家槐樹陰 陰上有大星一顆 炫爛搖光 余奉禀伯氏曰 “識此星乎” 伯氏曰 “不識其名” 余曰 “此老人星” 遂起拜 伯氏曰 “吾暫回家中 備說瀋陽 今復追程耳” 出戶經堂 推開外廊一門 回首北望 屋頭歷歷認鞍峴諸峯 忽自大悟曰 “迂闊迂闊 吾將何以獨自入柵” 自此至柵門千餘里 誰復待我停行乎 遂大聲叫喚 不勝悔懊 開門欲出 戶樞甚緊 大叫張福 而聲不出喉 排戶力猛 一推而覺 正使方呼燕巖 余猶恍惚應之 問曰 “此卽何地” 正使曰 “俄者夢囈頗久矣” 遂起坐敲齒彈腦 收召魂神 頓覺爽豁 而一悵一喜 久難爲悰 遂不能更睡 轉輾思想 不覺達曙 連山關 一名鴉鶻關

마운령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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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七日癸未 (晴) 行二里 乘馬渡水 水雖不廣 而悍急尤猛於前日 所渡攣膝聚足 竦坐鞍上 昌大緊擁馬首 張福力扶余尻 相依爲命以祈 須臾其囑馬之聲 正是嗚呼 囑馬聲 本好護 而東音與嗚呼相近 馬至中流 忽側身左傾 盖水沒馬腹則四蹄自浮 故臥而游渡也 余身不意右傾 幾乎墜水 前行馬尾散浮水面 余急持其尾 整身一坐 以免傾墜 余亦不自意蹻捷之如此 昌大亦幾爲馬脚所揮 危在俄頃 馬忽擧頭正立 可知其水淺著脚矣

踰摩雲嶺 中火千水站 午後極熱 又踰靑石嶺 嶺上有一所關廟 極其靈驗 驛夫馬頭輩爭至供卓前叩頭 或買供靑蓏 譯官亦有焚香抽籤 占驗平生休咎者 有道士敲鉢丐錢 獨不剃髮爲椎髻 如我東優婆僧 頭戴藤笠 身披一領野繭紗道袍 恰似我東儒士所著 而但黑色方領少異耳 又一道士賣蓏及鷄卵 蓏味甚甛且多水 鷄卵淡醎

夜宿狼子山 是日踰兩大嶺 通行八十里 摩雲嶺 一名會寧嶺 其高峻險絶 不减我國北關摩天嶺云

호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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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八日甲申 晴 與正使同轎渡三流河 朝飯於冷井 行十餘里 轉出一派山脚 泰卜忽鞠躬 趍過馬首 伏地高聲曰 “白塔現身謁矣” 泰卜者 鄭進士馬頭也 山脚猶遮 不見白塔 趣鞭行不數十步 纔脫山脚 眼光勒勒 忽有一團黑毬 七升八落 吾今日始知人生本無依附 只得頂天踏地而行矣 立馬四顧 不覺擧手加額曰 “好哭場 可以哭矣” 鄭進士曰 “遇此天地間大眼界 忽復思哭何也” 余曰 “唯唯否否 千古英雄善泣 美人多淚 然不過數行 無聲眼水 轉落襟前 未聞聲滿天地 若出金石 人但知七情之中 惟哀發哭 不知七情都可以哭 喜極則可以哭矣 怒極則可以哭矣 樂極則可以哭矣 愛極則可以哭矣 惡極則可以哭矣 欲極則可以哭矣 宣暢壹鬱 莫疾於聲 哭在天地 可比雷霆

至情所發 發能中理 與笑何異 人生情會 未甞經此極至之處 而巧排七情 配哀以哭 由是死喪之際 始乃勉强叫喚喉苦等字 而眞個七情所感至聲眞音 按住忍抑 蘊鬱於天地之間 而莫之敢宣也 彼賈生者 未得其塲 忍住不耐 忽向宣室一聲長號 安得無致人驚恠哉” 鄭曰 “今此哭塲 如彼其廣 吾亦當從君一慟 未知所哭求之七情 所感何居” 余曰 “問之赤子 赤子初生 所感何情 初見日月 次見父母 親戚滿前 莫不歡悅 如此喜樂 至老無雙 理無哀怒 情應樂笑 乃反無限啼叫 忿恨弸中 將謂‘人生神聖愚凡 一例崩殂 中間尤咎 患憂百端 兒悔其生 先自哭吊’ 此大非赤子本情 兒胞居胎 處蒙冥沌塞 纏糾逼窄 一朝逬出寥廓 展手伸脚 心意空闊 如何不發出眞聲盡情一洩哉 故當法嬰兒聲無假做 登毗盧絶頂 望見東海 可作一場 行長淵金沙 可作一塲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乾端坤倪 如黏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塲

亭午極熱 趣馬歷高麗叢阿彌庄 分路與趙主簿達東及卞君來源鄭進士李傔鶴齡 入舊遼陽 其繁華富麗十倍鳳城 別有遼東記 出西門見白塔 其制造工麗雄偉 可適遼野 別有白塔記 二記見下

還遼陽城 車馬轟殷 聚觀者到處成群 酒樓紅欄 高臨大道 颺出一面 金字酒旗 書着‘聞名應駐馬 尋香且停車’ 吾可以飮矣 環觀者彌衆 人肩相磨 雅聞‘此處姦宄極多 初行者專心遊覽 不善省察 必有所失 往歲一使行 多率無賴爲伴 當上下數十人 皆初行衣裝鞍具 頗爲華侈 入遼陽遊覽之際 或失鞍甲 或失鐙子 無不狼貝’云 張福忽頭冒鞍甲 腰佩雙鐙 立侍于前 全無愧色 余笑叱曰 “何不掩爾雙目” 見者皆大笑

還至太子河 河方潦漲 無船可渡 沿河上下正爾彷徨 俄有蘆葦叢中蕩出荳殼漁艇 又有一小艇 隱於汀洲 使張福泰卜輩齊聲喚舟 一對漁人兩頭垂竿而坐 柳樹陰濃 斜陽纈金 蜻蜓點水 燕子蹴波 千呼萬喚 終不回頭 久立汀沙 暖氣薰煑 唇焦頭汗 膓虛氣餒 生平喜遊賞 今日眞得了其債矣

鄭君輩爭相嘲謔曰 “日暮道窮 上下飢困 哭之外無他策矣 先生何爲忍住不哭” 相與大笑 余曰 “彼漁人不肯救人 其人心可知 雖陸魯望先生 正合一拳打倒” 泰卜益爲焦躁曰 “今野日垂地欲墮 他處有山 已將昏黑矣” 盖泰卜雖年少 已七次燕行 凡百慣熟 少焉舟子罷釣 收艇底魚籃 短槳蕩到柳陰邊爭出 五六小艇 見漁艇蕩來 亦爭先來到 要索高價 其待人竭急 然後始肯來濟 其情狀可惡 一船只許載三人 每人貰一鈔 艇皆全木刳成 所謂野航 恰受兩三人者是也 共計一行上下恰是十七馬六疋 皆浮河 艇頭執鞚 順河而下七八里 其危有甚於通遠諸渡時也 宿新遼陽映水寺 是日通行七十里 夜極熱 睡中單衿自脫 微有感氣

요동 마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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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九日乙酉 晴 極熱 乘曉凉 先發歷張家臺三道巴 中火爛泥堡 自入遼東以來 村閭不絶 路廣數百步 沿路兩傍 皆種垂楊 閭閻櫛比處 其對門中間 潦水不洩 往往自成大池 家養鵝鴨千百浮泳 兩邊村舍 盡成臨水樓臺 紅欄翠檻 映帶左右 渺然有江湖之想

軍牢三吹後 必先數里先行 前排軍官亦隨 軍牢先詣 余自止自由 每與卞君 乘凉曉發 行不十里 則且遇前排 必並轡談謔 每日若此 每近村閭 輒令軍牢 吹起吶叭 四個馬頭 合唱勸馬聲 家家走出婦女 闐門觀光 無老無少 裝束皆同 粧花垂璫 略施朱粉 口皆含烟 手持靴底所衲 連針帶線 騈肩簇立 指點嬌笑 始見漢女 漢女皆纏足着弓鞋 姿色不及滿女 滿女多花容月態 歷萬寶橋烟臺河山腰鋪 宿十里河 是日通行五十里 裨譯輩於馬上 各定一妾 所見滿漢女 若他人先占 則不敢疊定 相避之法甚嚴 謂之口妾 往往猜如怒罵談嘲 亦一長程消遣訣也 明日 將入瀋陽


구요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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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遼東記

遼東舊城 在漢襄平遼陽二縣地 秦曰遼東 後入衛滿朝鮮 漢末爲公孫度所據 隋唐時 屬高勾麗 契丹稱南京 金稱東京 元置行省 皇明置定遼衛 今陞爲遼陽州 移城距二十里 爲新遼陽

此廢稱舊遼東 城周二十里 或謂“熊廷弼所築也 城古卑狹 廷弼聞敵騎入境 令夷城 淸人恠之 不敢逼及 諜知改築 引兵至城下 新城峨峨 一夜而成 後廷弼去而遼陷 淸人忿其城堅難拔毁其城 以方興得勝之兵 十日而毁 猶未盡”云

皇明天啓元年三月 淸人旣得瀋 又移兵向遼 經略袁應泰方議三路出師 以復撫順 未行而聞虜陷瀋陽 又將向遼 遂開太子河 注水於壕 環兵登埤 淸人陷瀋五日 至遼陽城下 奴兒哈赤者 所謂淸太祖也 自統左翼兵先至 皇明摠兵李懷信等 率兵五萬出城五里而營 奴兒哈赤 以左翼四旗 擊其左 淸太宗我東所謂汗 其名曰洪台時 我國丙丁錄 雜載紅打時 或稱洪他詩 以其音似而各載 如英阿兒臺曰龍骨大 馬伏塔曰馬夫大 是也 引精銳請戰 奴兒哈赤不許 洪台時堅意行 遂留二紅旗 伏城傍覘視 奴兒哈赤 遣正黃旗 鑲黃旗 助洪台時 衝明營之左 四旗兵繼至 天兵大亂 洪台時乘勝追擊六十里 至鞍山 方其戰時 天兵自遼陽西門出 拔淸人所留城傍二紅旗 伏起邀擊 天兵奔回入城 自相蹂踐 摠兵賀世賢 副將戚金等 皆戰死

詰朝奴兒哈赤 率貝勒左四旗兵 掘城西閘口 以洩湖水 且令右四旗兵 塞城東進水口 自引右翼 布楯車堵列城邊 囊土運石以壅水 天兵步騎三萬出東門 列營相拒 淸人方欲奪橋 會水口壅遏將涸 四旗前隊渡壕 大呼掩擊東門外天兵 方力戰 淸紅甲二百 白旗千 進擊天兵 死者壕塹皆滿 奪武靖門橋 分擊守壕天兵 城上發火器 聯綿不絶 淸人奮勇衝突 樹梯登城 遂奪西城一面 驅斬民衆 城中擾亂 是夜城內天兵 列炬拒戰 牛維曜等 縋城亂遁

翌朝 天兵復列楯大戰 淸四旗兵 亦登城 經略袁應泰 登城北鎭遠樓督戰 見城破 擧火焚樓而死 分守道何廷魁 率妻子投井死 監軍道崔儒秀自經 總兵朱萬良 副將梁仲善 參將王豸房承勳游擊李尙義張繩武 都司徐國全王宗盛 守備李廷幹等 皆戰死 生擒御史張銓不屈 奴兒哈赤 命賜死 以遂其志 洪台時惜銓欲生之 婉諭再三 終不可奪 不得已縊而葬之

皇帝於昨年己亥 爲全韻詩 詳載陷城始末 且曰 “明臣之不降者 我祖宗尙加恩 而燕京君臣 漠不相關 功罪不明 欲其不亡得乎”

按明史 “廷弼之不救廣寧也 三司王紀 鄒元標 周應秋 勘廷弼曰 廷弼才識氣魄 睥睨一世 往歲鎭遼而遼存 去遼而遼亡 獨其驕愎之性 牢不可破 今日一䟽 明日一揭 比之楊鎬 更多一逃 比之袁應泰 反欠一死 若誅王化貞而寬廷弼 則罪同而罰異也

今其土壁周遭 而甎痕猶存 誦當日三司之勘 足可以想見其爲人 嗚呼 當皇明末運 用捨顚倒 功罪不明 其視熊廷弼 袁崇煥之死 可謂自毁其長城矣 惡可免後代之譏哉

引太子河爲壕 壕中有數三漁艇 城下釣者數十人 皆美衣服 貌似遊閒公子 俱城裏市舖人 余巡壕爲觀 其設閘蓄洩之制 釣者一哄持竿而來 向余開語 余畫地爲字 皆熟視笑而去

요동백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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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白塔記

出關廟行不半里 有塔白色 八面十三層 高七十仞云 世傳唐尉遲敬德 率師伐高句麗時 所築也 或云 仙人丁令威 乘鶴而歸 見遼東城郭 人民已改 悲嗚作歌 此其令威所止華表柱 非也 華表柱 在遼陽城外不十里而近 亦不高大 所稱白塔者 我東皁隷順口所名也

遼東左挾滄海 前臨大野 無所障礙 千里茫茫 而白塔乃得野勢三分之一 塔頂置銅鼓三 每層檐稜 懸鐸大如汲桶 風動鐸鳴 聲震遼野

塔下逢兩人 俱滿洲人 方往寧古塔買藥 劃地問答 一人問古本尙書 又問有顔夫子書 子夏所著樂經否 皆余所刱聞也 以無爲答 兩人者俱少年 初經此地 爲觀塔來也 行忙未及問其名 盖秀才也

관제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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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帝廟記

出舊遼東城 門外有石橋 橋邊石欄 制極精巧 康煕五十七年所築也 對橋百餘步 有牌樓 刻雲龍水仙畵 皆隱起入牌樓 而東有大樓 其下爲文而扁之曰‘樀錦’ 左有鍾樓曰‘龍吟’ 右有皷樓曰‘虎嘯’

廟堂壯麗 複殿重閣 金碧璀璨 正殿安關公像 東廡張飛 西廡趙雲 又設蜀將軍嚴顔 不屈之狀 庭中列數笏穹碑 皆記修刱始末 新建一碑 記山西商人重修事也

廟中無賴遊子數千人 鬧熱如塲屋 或習槍捧 或試拳脚 或像盲騎瞎馬爲戱 有坐讀水滸傳者 衆人環坐聽之 擺頭掀鼻 旁若無人 看其讀處 則火燒瓦官寺 而所誦者乃西廂記也 目不知字而口角溜滑 亦如我東巷肆中口誦林將軍傳 讀者乍止 則兩人彈琵琶 一人響疊鉦

광우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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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祐寺記

塔南有古刹曰‘廣祐寺’ 滿洲秀才云 “漢時所刱 而唐太宗伐遼時 駐蹕首山 使鄂公尉遲敬德重修”

世傳古有一邨夫往廣寧 路遇一童子曰 “負我至廣祐寺 寺右十步古樹下 有藏金十萬 可以相報 邨夫負其童子數百里 不終朝而至 旣至視之 乃一座金佛也 寺僧異之 掘寺右十步 果得十萬金 邨夫以其金重修此寺

及讀寺碑 則乃康煕二十七年 太皇太后發帑所建也 康煕皇帝亦甞臨幸 賜居僧織金袈裟 今廢無僧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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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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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