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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문의 민가모습과 모습고조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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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日乙亥 (朝霧晩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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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余曰 “唐太宗失目於安市 雖不可攷 葢以此城爲安市 愚以爲非也 按唐書 安市城去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志又以鳳凰城稱平壤 未知此何以名焉 又地志古安市城在葢平縣東北七十里 自葢平東至秀巖河三百里 自秀巖河東至二百里 爲鳳城 若以此爲古平壤 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 然吾東之士 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 言平壤有井田則信 言平壤有箕子墓則信 若復言鳳城爲平壤 則大驚 若曰 遼東復有平壤 則叱爲恠駭 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 肅愼濊貊東彝諸國 盡服屬衛滿朝鮮 又不知烏刺寧古塔後春等地本高勾麗疆 嗟乎 後世不詳地界 則妄把漢四郡地 盡局之於鴨綠江內 牽合事實 區區分排 乃復覔浿水於其中 或指鴨綠江爲浿水 或指淸川江爲浿水 或指大同江爲浿水 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此其故何也 定平壤於一處 而浿水前郤 常隨事跡 吾甞以爲漢四郡地 非特遼東 當入女眞 何以知其然也 漢書地理志 有玄莬樂浪 而眞番臨芚無見焉 葢昭帝始元五年 合四郡爲二府 元鳳元年 又改二府爲二郡 玄莬三縣 有高勾麗 樂浪二十五縣 有朝鮮 遼東十八縣 有安市 獨眞番 去長安七千里 臨芚 去長安六千一百里 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 當在今寧古塔等地者”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
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 「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 「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余曰 唐太宗失目於安市, 雖不可攷, 葢以此城爲安市, 愚以爲非也 按唐書, 安市城去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志又以鳳凰城稱平壤, 雖不可攷, 未知此何以名焉 又地志古安市城在葢平縣東北七十里, 自葢平東至秀巖河三百里, 自秀巖河東至二百里, 爲鳳城, 若以此爲古平壤, 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 然吾東之士, 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 言平壤有井田則信, 言平壤有箕子墓則信, 若復言鳳城爲平壤, 則大驚, 若曰, '遼東復有平壤, 則叱爲恠駭。' 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 肅愼濊貊東彝諸國, 盡服屬衛滿朝鮮, 又不知烏寧古塔後春等地本高勾麗疆, 嗟乎 後世不詳地界, 則妄把漢四郡地, 盡局之於鴨綠江內, 牽合事實, 區區分排, 乃復覔浿水於其中, 或指鴨綠江爲浿水 或指淸川江爲浿水, 或指大同江爲浿水, 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此其故何也, 定平壤於一處, 而浿水前郤, 常隨事跡 吾甞以爲漢四郡地, 非特遼東, 當入女眞 何以知其然也, 漢書地理志, 有玄莬樂浪, 而眞番臨芚無見焉 葢昭帝始元五年, 合四郡爲二府, 元鳳元年, 又改二府爲二郡 玄莬三縣, 有高勾麗, 樂浪二十五縣, 有朝鮮, 遼東十八縣, 有安市, 獨眞番, 去長安七千里, 臨芚, 去長安六千一百里, 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 當在今寧古塔等地者”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
 
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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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ackground-color: #FAFAFA; border: 1px solid #808080; padding: 5px; ">
봉황성은 이제 새로 쌓고 있다. 누군가 여기가 옛 안시성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말로 큰 새를 "안시"라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종종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뱀을 "백암"(배암)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의 나랏말로 고쳐 부르면 봉황성이 안시성이고 사성은 백암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황제가 병사를 성벽 아래에서 물리면서 비단 백필을 하사하여 안시성주의 견고한 수비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은 동생 노가재 김창업이 연경에 가게 되자 시를 지어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규염(당태종)을 쏘아 눈동자를 맞추었지"라고 하였고, 목은 이색은 〈정관음〉에서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흰 깃털에 검은 꽃이 떨어질 줄이야"라고 하였다. 검은 꽃은 눈동자를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두 어르신이 노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태종은 천하의 병사를 움직였는데 작은 성곽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김부식은 이 역사를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어찌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역사만 참고하여 글을 가려 뽑아 사실로 삼았겠는가. (당나라의 문인인)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여 (당태종이) 포위 당하였다가 물러간 일의 증거로 삼았는데, 《당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모두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중국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실을) 피한 것이라 의심된다. 그러나 본토의 옛 이야기와 같은 것에 이르면 한 구절을 실으려고 하여도 어떤 것은 믿을만하고 어떤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은 것을 고증하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서》에서는 안시성이 평양에서 오백리였다고 하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지》는 또한 봉황성의 옛 이름이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고증할 수 없어 (《동국여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동국여지지》는 옛 안시성이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평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에 수암하가 있고 수암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에 봉황성이 있으니 (지금의 개평이 안시성이고) 봉황성이 옛 평양이라면 《당서》에서 말하는 오백 리와 서로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합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고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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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巖城(백암성): 고구려-당 전쟁 초기 함락된 성. 당태종은 백암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 楊萬春(양만춘): 고구려-당 전쟁에서 안시성을 방어하였다는 장수.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16세기 중국의 소설 속에서 창작된 것으로 실제 이름이 아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안시성주라고만 불렸다.
* 三淵金公昌翕(삼연김공창흡): 삼연 김창흡. 조선 현종 시대의 학자이다.
* 老稼齋昌業(노가재창업): 노가재 김창업. 김창흡의 동생으로 1712년 북경에 다녀와 《노가재연행록》을 썼다.
* 虬髯(규염): 용처럼 구불구불한 수염. 당태종의 별명이다.
* 眸子(모자): 눈동자.
* 牧隱李公穡(목은이공색): 목은 이색. 고려말 유학자.
* 蒼黃(창황): 미처 어쩌지도 못할 사이에.
* 旋師(선사): 군사를 돌림.
* 金富軾(김부식): 고려 시대 문신. 《[[삼국사기]]》를 지었다. 안시성 전투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제9권에 실려있는데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 其史失姓名(기사실성명): 이 역사의 이름을 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보장왕 편 시론에서 안시성주가 호걸로 불릴만한 인물이라 기록하면서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 柳公權(유공권): 당나라 시기 문인.
* 唐書(당서):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
* 司馬通鑑(사마통감): [[:w:사마광|사마광]]의 역사책 《[[:w:자치통감|자치통감]]》
* 地志(지지):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간행한 《동국여지지》
* 葢平縣(개평현): 오늘날 [[:w:가이저우시|가이저우시]]에 속하는 곳.
* 秀巖河(수암하): 지명이 변하여 정확히 어느 강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이저우시 인근에 수암현(秀巖縣)이 있다.
* 箕子(기자): [[:w:기자조선|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전설의 인물. 조선 시대에는 실존 인물로 여겼으나 오늘날에는 전설의 하나로 취급한다.
* 井田(정전): 토지를 9등분 하여 8 곳은 사유지로 삼고 1 곳을 공유지로 하여 세금을 충당하는 제도. 기자가 평양에서 전정제를 시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이상적인 토지 제도로 여겼다.
* 肅愼(숙신): 중국에서 동이라고 묶어 부르던 동북아시아의 민족의 하나.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였다. 만주어로 "주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고대 한국인의 한 갈래로 보고자 하는 일부의 해석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만주족의 선조로 본다.
* 濊貊(예맥): 중국에서 동이라고 묶어 부르던 동북아시아의 민족의 하나.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살았다. [[:w:동예|동예]]는 예맥의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 東彝(동이): 동이(東夷)의 오랑캐 이(夷)자를 일부러 떳떳할 이(彝)로 바꾸어 썼다. 오랑캐가 아니라는 자존감의 표현이다.
* 衛滿朝鮮(위만조선): [[:w:위만조선|위만조선]]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이다. 앞의 기자조선과 달리 역사적 실체가 있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인지 요동에 있었는 지는 분명치 않아 논쟁이 있다. 박지원은 봉황성이 왕검성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 服屬(복속):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상태 또는 병합된 상태.
* 烏剌(오랄): [[:w:아무르강|흑룡강]] 일대.
* 寧古塔(영고탑): 오늘날 헤이룽장성 [[:w:닝안시|닝안시]]에 있던 청나라 시절 도시. 동해여진의 거주지였으나 누르하치가 정복하였다.
* 後春(후춘): 함경북도와 맞닿은 만주 지역. 훗날 간도라 불린다.
* 漢四郡(한사군): [[:w:한사군]]은 고조선이 망한 뒤 세워진 한나라의 군현으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과 그 속현을 말한다.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w:낙랑군|낙랑군]]은 평양에서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다만 한나라의 군현이라고 해도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기 보다는 지방의 세습 봉건국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浿水(패수):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을 이루던 강.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지는 이견이 제각각이다. 유력한 이론 가운데 하나는 고조선이 여러 번 수도를 옮겼고 옮긴 수도 역시 왕검성 또는 평양이라 불렀다는 가설이 있다.
* 淸川江(청천강): 평안북도 지방을 흐르는 강. 옛 이름은 살수(薩水)이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맞아 승리하였다.
* 大同江(대동강): 평양 시내를 흐르는 강.
*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 후한 시대 학자 반고가 편찬한 《[[:w:한서|한서]]》에 딸린 부속 지리지이다. 고조선의 법과 풍습 등이 기록되어 있다.
* 昭帝(소제): [[:w:전한|전한]]의 8대 황제 [[:w:전한 소제 (8대)|한 소제]]이다.
* 始元五年(시원오년): 한 소제의 연호. 기원전 82년
* 元鳳元年(원봉원년): 한 소제의 두번 째 연호. 기원전 80년
* 金崙(김륜): 광해군 시기 문신.
* 扶餘(부여): 만주 지역에 있던 옛 국가.
* 挹婁(읍루): 숙신의 후예이자 말갈의 전신인 옛 부족.
* 沃沮(옥저): 한반도에 있던 옛 부족국가.
* 勿吉(물길): 5세기 무렵 읍루를 멸망시키고 송화강 일대를 장악한 부족. 말갈의 전신으로 본다.
* 渤海武王大武藝(발해무왕대무예): [[:w:발해 무왕|발해 무왕 대무예]]는 8세기 초의 발해 2대 왕이다.
* 日本聖武王(일본 성무왕): 일본의 [[:w:쇼무 천황|쇼무 천황]]이다.
* 幅員(폭원): 땅이나 지형의 넓이. 즉 여기서는 "영토"
* 無他(무타): 별다른 이유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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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則鳳城果爲平壤乎 曰此亦或箕氏衛氏高氏所都 則爲一平壤也 唐書裴矩傳 言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 漢分四郡 所謂‘孤竹地 在今永平府’ 又廣寧縣 舊有箕子廟 戴冔冠塑像 皇明嘉靖時 燬於兵火 廣寧人或稱平壤 金史及文獻通考 俱言廣寧咸平 皆箕子封地 以此推之 永平廣寧之間 爲一平壤也 遼史 “渤海顯德府 本朝鮮地 箕子所封平壤城 遼破渤海 改爲東京 卽今之遼陽縣”是也 以此推之 遼陽縣 爲一平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