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행
서편(序篇)
편집일청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그 전쟁에 이겼다고 온 백성이 기쁨에 넘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때였다. 동양에도 이름도 없는 조그만 섬나라 ― 부락과 부락의 전쟁뿐으로서 그 역사를 지어내려 오던 나라 ― 종교와, 예의와, 법칙과, 학문과, 기술을 인국(隣國) 신라, 고구려, 대당(大唐) 등에서 조금씩 꾸어다가 때움질하여 오던 ×나라, 그 나라가 통일이 되고 정돈이 된 지 삼십 년도 못 되는 이때에, 대담히도 세계에 찬란히 이름난 대청국(大淸國)에게 싸움을 걸어서 이겼다 하는 것은, 과연 당시에 온 세계를 놀라게 한 큰 사실인 동시에, 그만치 일본 국민에게는 기쁜 일에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온 일본 국민이 넘치는 기쁨을 막지 못하여, 가사를 내어던지고, 영업을 내어던지고, 춤추고 날뛸 때에, 무장야(武蔵野)의 어떤 벌판에 온전히 인간계의 그런 잡된 일을 초월한 듯이 한가히 날아다니던 범나비가 한 마리 있었다.
그 범나비는 고요하고 깨끗한 자리를 한 군데 찾아서, 거기 몇 알의 알을 쓸어 놓았다.
알은 벌레로 변하엿다.
거미와 새, ― 온갖 자기를 해하는 동물들을 피하여서, 이 풀잎에서 저 풀잎으로 몸을 숨겨서 다니던 벌레의 한 마리는, 제 형제의 대부분이 피식(被食)을 당할 때에도 몸을 온전히 하여, 수렁이로 변하게까지 되었다.
겨울이 이르렀다. 찬 서리와 눈도 그의 생활력을 해하지 못하였다. 얼음과 찬 바람도 땅속에 깊이 숨은 그를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봄에 그는, 한 개의 아름다운 범나비로 화하여 가지고 세상에 나타났다.
날개의 시험의 며칠이 지난 뒤에, 그는 방랑의 여정을 나섰다. 동에서, 서에서, 그의 아름다운 자태는 무시로 보였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이 또는, 봄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는 듯이 남으로, 북으로 꽃마다 잎마다 키스의 자리를 남기면서, 정처없이 날아다녔다.
이렇게 끝없는 방랑을 즐기던 그는 차차 차차 날아서 팔왕자(八王子)의 촌락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그만치 번화한 팔왕자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쓸쓸한 한 촌락이었었다.
이 팔왕자의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는, 어떠한 집 뜰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거기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내려갔다.
그 집 여섯 살 난 어린애는, 어머니가 저녁을 지으려 나간 틈에 방 안에서 혼자 장난을 하고 있다가 뜰로 내려오던 아름다운 범나비를 보고 그것을 잡으러 뛰어나왔다. 그러나, 위만 쳐다보고 나오던 그는 세 걸음만에 그만 불을 이럭이럭 피워 놓은 화로를 박차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려왔을 때는 어린애는 얼굴과 온몸이 불로 데어서, 참혹히 도 기절을 한 때였었다.
범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이 소여행(小旅行)은 여기에 그 첫 비극을 일으켰다.
기차의 기관수인 어린애의 아버지는, 이틀 밤낮을 꼭 자기의 죽어 가는 외아들의 곁을 떠나지를 않고 간호하였다. 그러나 운명이라 하는 커다란 힘은 사람의 손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애는, 사흘째 되는 새벽, 마침내 풍을 일으켜 죽어 버렸다.
하관(下關)가는 급행열차가 신교역(新橋驛)을 떠났다. 기관수는 죽은 어린애의 아버지.
눈을 멀거니 뜨고 있는 그의 앞에는, 죽은 애의 형용이 어릿거렸다. 사흘을 한잠을 안 잤지만, 졸음만 안 올 뿐더러 정신은 더욱 똑똑하여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러한 이해력도 없었다. 모든 일이 자기게는 무의미하다는 이해력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마땅히 정거하여야 할 정거장을 그냥 지나려다가 조수에게 주의를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급각도(急角度)에 도전속력으로 가서(차장을 통하여) 손님에게 꾸중을 들은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의 그 꾸중이 모두 두 초만 지나면 스러져 버리고 잊어버려져서, 그는 물고기의 눈과 같은 정신없는 눈으로 다만 꺼벅꺼벅 앞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었다. 기차는 한 번도 제 시간에 정거장에 들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기차가 신호(神戶)에 거진 이르러서 어떤 커브를 돌 때에, 가장 큰 비극은 일어났다.
덜걱! 소리와 함께 기관차는 선로를 벗어나서 뒤에 달린 십여 량(輛)의 객차와 함께 두어 길 되는 벼랑에서 떨어졌다.
부르짖음 신음하는 , 소리, 의미없는 고함소리, ― 일본 철도사에 공전(空前)이요 또한 절후(絶後)일 떨릴 비극은 일어났다. 당시의 신문을 보건대 즉사자 이백칠십여 명,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 백여 명, 그저 중상자 백여 명, 무상자(無傷者) 한 사람도 없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 가운데는 조선 사람 서모(徐某) 이십일 세라는 이름이 있었고, 보통 중상자 가운데 조선 여자 신함라(申咸羅) 십구 세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비극의 결과로 생겨난 부산 비극(副産悲劇)은 몹시 컸다. 일청(日淸) 교섭의 어떤 임무를 띤 대관(大官)의 즉사로 대지 문제(對支問題)의 원활히 못 된 일이며, 재계의 거두의 중상으로 바야흐로 진출하려던 일본 무역의 받은 영향 등 표면상에 나타난 문제는 둘째로 두고, 그 가운데는 무론 호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속 문제로 분규가 일어난 가정도 있었을 것이었었다. 애인의 무참한 죽음에 발광하여 폐인이 된 젊은이도 있을 것이었었다.
이 사실로 새삼스러이 인간무상을 느끼어 입도(入道)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비극, 비극, 그리고 또 비극이 낳은 또 다시 비극. 결과는 또한 그 다음 결과를 낳고, 다음 결과는 또 새로운 결과를 낳아서, 지금 일본 ― 뿐 아니라 온 세계에 그 결과의 또한 결과가 얼마나 영향되었는지 그것은 짐작도 못할 배다.
내가 무심히 강물을 향하여 돌을 하나 던진다.
그때에 그 강물에 생긴 물결이 퍼지고 퍼져서, 넓은 바다까지 이르러, 거기 일어나는 커다란 뫼와 같은 물결에 만분 일(萬分一)의 방해, 혹은 조력을 할는지 그것은 결코 예측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또한 그 돌이 강바닥까지 내려져서 강바닥의 모래를 움직여 그것이 몇 만 년 뒤에 그 강으로서 십 리쯤 동으로 혹은 서로 옮겨가게 할 동기가 될는지도 예측도 못할 일이다.
이 세상의 한끝으로 생겨 나고 한끝으로 사라지는 백 가지의 일의, 그 가장 변변치 않는 한 가지라도 그 결과의 또 한 결과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결코 숙명의 커다란 힘을 업수이 여기지 못할지니 무장야(武蔵野)의 너른 드을에서 자유로이 놀던 나비 한 마리가 우연히 아무 뜻 없이 팔 왕자(八王子)까지 날아온 것이 사흘 뒤에는 벌써 이렇듯 커다란 비극을 일으켜 놓았다. 그리고 그 비극은 결코 거기서 막을 닫치지 않았다.
나비의 여행, 벌판에서 팔왕자 촌락까지. 그것은 아무 뜻도 없는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 나비의 , 아무 뜻도 없는 소여행(小旅行)이, 삼십 년이라는 기다란 날짜를 지난 뒤에 조선에서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나? 어떠한 비극, 어떠한 희극, 어떠한 활극이 그 나비의 변변치 않은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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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너도 걱정이로다. 왜 꾸지람을 안 듣도록 좀 몸을 단정히 못 가지느냐.”
“누님 걱정 마세요. 여편네들한테 꾸지람 듣는 것은 무섭질 않으니깐.”
허세(虛勢)로도 볼 수 있고 빈정거리는 말로도 볼 수 있는 이 말에 현숙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고 일성이는 웃었다. 잘게 생긴 앞니가 전등에 반사하여 유난히 반짝였다.
“왜 눈살을 지세요? ― 대체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생각치 않아요?”
그리고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현숙이와 영옥이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영옥이는 신문 뒷면을 뒤지었다.
“네? 안 그래요?”
“듣기 싫다. 좀 철이 들어라.”
“하하하하.”
잘게 생긴 일성이의 앞니가 또 전등불에 반짝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현숙이는 머리 속에 일어나는 일종의 혼란(混亂)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손아래 동생, 자기가 책망 한 마디만 하면 머리를 긁고 얼굴을 붉힐 줄만 알았던 일성이에게서 현숙이는 어딘지 모를 일종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은 불행히 현숙이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었다. 그것은 동생이라 하는 말 아래 숨어 있는 억센 사나이의 그림자였다. 예의를 예의로써 대하고 무례를 예의로써 물리칠 줄밖에는 모르는 현숙이의 상식으로써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손위 동생.
예외도 없었다. 경우도 없었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온갖 것은 그의 앞에서는 그 존재를 잃을 것이었었다.
그 앞에 당면한 현숙이는 아직껏의 제 인생관과 사회관과 거기서 자연히 생겨 난 처세술에 아직 더 수정을 하고 개방을 하여야겠다는 필요를 느낄 유여도 없이 먼저 그 억셈을 경멸하였다. 그 경멸에는 미움도 섞였다. 똑똑히 지각은 못하였지만 공포(恐怖)조차 섞여 있었다. 일성이의 반짝이는 이빨이 현숙이에게 몹시 불유쾌하게 보였다.
참 이제 이 집에 오는 “ 길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저 앞에 수도를 고치느라고 구렁을 파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기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나무를 하나 걸쳐 논 뿐이지요? 거기까지 와서 막 건너가다 보니깐 저편 쪽에서 여학생이 하나 건너오랍디다그려. 그래서 첨에는 내가 양보를 할까 했지만 그러나 사내가 한 번 냅딘 발을 어떻게 도로 옴쳐요? 더구나 내가 그 다리 위에 발을 먼저 올려놓은 이상에야 말야요. 그래서 막 건너가는데 그 여학생은 퍽 근시안인지 혹은 자기가 건너오면 내가 도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당당히 건너옵니다그려. 가운데서 딱 만났지요. 누님, 여편네란 건 그런 게야요? 거기서 딱 버티고 서더니 나를 쳐다보겠지요. 아마 도로 물러가라는 뜻인가 봐요. 꼴이 미워서 나도 딱 마주 버티고 있었구료. 그러니깐 용서하세요 하더니 한 발을 내놓습디다그려. 그래서 어서 가시지요 하고 그냥 서 있으니깐 또 한번 용서하라고 그래요. 너무 어이없고 미워 칵 붙안아서 이편으로 옮겨놓아 주고 말았지요. 혹은 그 ― 옮겨 놓을 때에 어떻게 내 뺨이 궐의 뺨에 건드렸는지도 몰라요. 그랬더니 홱 돌아서면서 내 뺨을 딱 하고 휘갈깁디다그려. 누님 그게 예의야요?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알 테요. 아마 궐은 인제 한 달 동안은 그 이야기를 자랑하러 돌아다닐걸요.”
그런 뒤에 일성이는 또 한번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 이야기에 부러 대척치 않은 현숙이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내일 자수 강습회에 갈 테요?”
영옥이는 겨우 신문을 놓았다.
“가잖구요. 언니는?”
“나? 나는 그만둘까봐.”
“왜요?”
“사랑방도 좀 치워야겠고 ―.”
“그게야 아침에 잠깐 다녀와선들 ― 가세요.”
“글쎄.”
일성이의 이야기에 대척치 않으려 이야기를 꺼낼 뿐 특별한 목적이며 뜻이 없었던 현숙이는 이만치로 이야기를 끝을 내었다.
그 이야기의 뒤를 일성이가 받고 일어섰다.
“영옥 씨, 자수 강습에 다니세요?”
“네.”
영옥이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불란서 자수예요?”
“네.”
“누님도 다시니구요?”
“그래.”
“그럼 누님, 넥타이에 수나 하나 놓아 주시구료.”
이런 뒤에 자기의 수놓은 넥타이를 끌어내어 내려다보던 일성이는 갑자기 제 넥타이의 내력을 자랑할 생각이 난 모양이었었다.
“누님, 이 넥타이 어때요?”
현숙이는 힐끗 볼 뿐 대답치 않았다. 일성이는 이번에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영옥 씨, 어떻습니까?”
자랑하는 듯이 내어보이는 그 넥타이에 대하여 탄상자의 지위에 서지 않을 수 없은 영옥이는 좋습니다고 하였다.
“중국 모던 걸이 수놓은 게야요.”
하면서 일성이는 보아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내어밀었다. 듣고 보니 어딘지는 모를 지나 색채가 있는 듯하였다.
“조선도 모던 걸이 꽤 생겼지요? 하지만 중국 모던 걸만은 못해요. 조선서는 모던을 일본을 거쳐서 수입하는데 중국서는 직수입을 하니까요. 그만치 ― 조선보다 한층 더 앞선 만치 사내를 업수이 여기는 도수도 더하지요.
쩍하면 구두를 신겨 달라고 발을 앞으로 내어밉니다그려.”
“그러면 너 같은 모던 보이는 그 신을 신겨 준 뒤에는 그것을 자랑하러 돌아다니더냐?”
이것은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독한 험구였겠다. 그러나 일성이에게 대한 어떤 불유쾌한 반감은 현숙이로 하여금 아무 비판이 없이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이었었다.
영옥이가 얼른 신문을 도로 들었다. 일성이도 고소하였다.
“보구료. 누님도 남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지 않나.”
일성이는 아직껏 여자에게 하던 빈정거림은 온전히 생각도 안하는 듯 싶었다.
“그럼 네가 아직껏 여자에게 대해서 하던 말은 무에냐? 그건 여자를 모욕하는 게 아니냐?”
“나요? 그게야 사실을 예를 든 뿐이지.”
“그만둬라. 영옥 씨가 속으로 욕할라.”
“영옥 씨가요? 영옥 씨, 절 속으로 욕하세요? 그러진 않으시겠지요.”
하면서 일성이는 영옥이를 들여다보았다. 영옥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천만에.”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세요. 어딜 욕을 하신다구.”
“영옥이도 네가 흉보는 그 ‘여자’의 한 사람이다.”
“아 그렇던가? 그럼 전부 취소할까요?”
일성이는 머리를 긁었다.
일성이의 지식은 광범(廣汎)하였다. 그러나 그 지식은 조잡(粗雜)하였다.
계통과 순서와 숫자가 없었다. 그만치 어떤 편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생활과 환경과 성격이 낳은 바 결과였었다. 목숨 있는 인형과 같이 아무런 일에도 간섭치 않고 지내는 어머니의 아래서 다른 감독자는 없이 자란 일성이는 그의 인생관과 지식을 온전히 다른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 될 자리에 있었다. 그럴 때는 손쉽게 그의 사면에는 불량소년이라 하는 떼가 있었다. 그는 거기서 지식과 인생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있지만 가정의 정이라는 것이 없는 이 소년은 집을 모르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활동사진과 연극은 이 소년의 커다란 오락이요 위안처였으며 겸하여 지식의 근원이 하나이었었다. 사회와는 온전히 틈을 그어 놓은 부랑소년의 축에 섞여서 사회를 바라볼 때에 이러한 방관자(傍觀者)로서야 볼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비판도 이 소년의 지식의 하나이었었다. 그것의 부산물인 역관적 사회관(逆觀的 社會觀)도 그의 지식을 활약케 하는 한 힘이 되었다. 사회의 학대와 멸시는 이 소년의 마음을 더욱 비꼬아지게 하는 반면에 더욱 단련시키는 풀무불이 되었다.
게다가 이 소년에게는 천성에 타고난 화술(話術)과 그 변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 독특한 역관적 사회관과 거기 어울리는 아름다운 눈과 앞니 (몹시 반짝이는)가 있었다. 더구나 무기 위에는 사회의 학대의 필연적 결과로서 생겨 난 반역심과 그 반역심을 행동화(行動化)할 수 있을 만한 침착과, 그 침착을 돕는 포학성(暴虐性)이 있었다. 부드럽게도 굳게도 아름답게도 또는 무섭게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영리한 그의 마음의 깊은 속에 숨어 있어서 주인의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에 응해서 그 무기를 때때로 꺼내어 쓰면서 사회와 병행하여 헤엄쳐 나아가던 그는 문득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무기는 용서없이 여인의 위에 내렸다.
혹은 아름답게 혹은 무섭게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많은 여성을 정복하고 혹은 유혹하는 데 그를 도왔다. 여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제 미모를 이용하여 혹은 공갈로 혹은 변설로 많은 여성을 접하는 동안에 그의 고약한 지혜와 지식은 더욱 늘었다.
이러한 스무 살이라 하는 열성의 나이는 영리한 현숙이로도 능히 해석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었다. 어린애와 같은 천진한 웃음을 웃는 한편으로는 때때로 억센 그림자가 걸핏걸핏 보이는 것을 현숙이는 기괴한 마음상으로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는 예기하였던 바와 어그러지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모반함을 받은 듯한 노여움도 있었다. 웃동생으로서의 위신이 차차 사라져 가는 듯한 현상에 대한 분만(憤懣)도 있었다. 자존심을 상한 듯한 불유쾌함도 있었다.
이러한 기분 아래서 일성이의 이야기를 억누르려고 때때로 독설을 하는 현숙이는 그 독설이 여자로서는 굳게 삼갈 것이라고 아직껏 지켜 온 그 교양도 잊었다. 자기는 웃동생이라는 지위에 대한 자각까지 엷어졌다. 그리고 그는 점잖지 못하게 동생과 말다툼을 하여 이기려 하는 철없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일성이는 몹시 이야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었다. 궤변(詭辯), 능변(能辯) ― 어느 편으로라도 붙일 수 있는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일종의 사교술로까지 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이야기는 넘어갔다. 현숙이가 앨 써 누르려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에든 그는 다 그 이야기에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담화술이었었다. 현숙이에게 대한 반항도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 판단을 증명키 위하여 어떠한 예를 들기를 잊지 않았다. 그 든 바의 예는 대개가 그 독특의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억지의 예라고까지 할 수 있으나 그는 그런 것은 기탄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숙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조차 사양치 않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하여 불량소년이라는 데 미쳤을 때였다.
일성이는 문득 영옥이에게 이렇게 물었다.―영옥 씨 세상에서 “ , 저를 불량소년이라는데 영옥 씨도 그렇게 보십니까?”
“천만에.”
얼굴이 새빨갛게 되며 영옥이는 이렇게 대답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일성이는 뒤를 쫓아왔다.
“그럼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 번 속임없는 판단을 듣고 싶습니다.”
영옥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다만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으며 침을 한 번 삼킬 뿐이었었다.
“네? 아무런 말씀을 하셔도 탄하지 않겠읍니다. 말씀해 보세요.”
“그게야 ―.”
“네? 그게야 어때요?”
영옥이는 또 막혔다.
“네? 말씀해 보세요.”
이러한 추격전에 현숙이는 조정자로서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일성아, 예절을 알아라.”
“누님은 가만 계시오. 영옥 씨, 어떻습니까?”
“야 !”
현숙이는 눈으로 꾸짖으면서 다시 불렀다.
“왜 이래요. 이건 언론압박이요 뭐요? 남의 말에 가로 들어서 가지고.”
여기 대하여는 현숙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불법과 무례의 앞에 쓰는 대항책은 그는 아직 못 배운 것이었었다. 현숙이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떨렸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이 위에 웃동생으로서의 위엄을 쓰려다가는 더 창피한 꼴을 보기는 명백한 사실이었었다. 이것을 청년의 혈기라고 용서할 만한 관대한 마음과 여유를 잃은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보는 것으로 끊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대한 대책으로는 할 수 있는 대로 일성이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일의 방책을 삼으려 하였다.
그 뒤부터는 할 수 있는 대로 현숙이는 영옥이와 이야기를 하였다. 영옥이의 이야기가 끊어질 기회를 피하였다. 이리하여 일성이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기회를 엿보아 가지고 어머님이 기다리시겠다는 것을 구실삼아 가지고 영옥이를 큰댁으로 올려보내었다. 일성이도 문밖까지 쫓아나와서 영옥이를 보냈다.
영옥 씨 혹은 오늘 저녁에 “ , 제가 실례된 일이 있을지라도 그다지 나쁘게 생각치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시 제 성미가 예절이라는 건 모르니깐요― 그럼 또 ―.”
“안녕히 계세요. 응 ― 언니 내일 강습회에서.”
이렇게 영옥이를 보낸 뒤에 남매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각기 전투를 준비하면서 ―.
“누님 노하셌소?”
방 안에 들어오면서 일성이는 웃으며 이 말부터 물었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자미있는 작자인데 ― 누님, 어때요 내 교제술이?”
“용하더라. 기껏 경멸은 샀으리라.”
“경멸?”
일성이는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을 하였다.
“좌우간 작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겠읍니까? 어디 알아보세요.”
“극도로 나쁜 인상이야 주었지.”
“만세. 용하외다. 그게 내 목적이니깐.”
현숙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을 하였다.
“여자에게는 초대면에 깊은 인상을 줘야 해요. 나쁜 인상이고 좋은 인상이고 간에 초대면에 기껏 깊은 인상을 박아 놓아야 합니다그려. 여자는 인상의 심천(深淺)은 절대로 변경 안하지만 선악(善惡)은 몇 번이라도 변경합니다그려. 인제 작자 ― 영옥이 말이외다 ― 영옥이를 언제 다시 만나서 그때 좀 내가 아롱아롱해 보구료. 그러기만 하면 아직껏 박혀 있던 나쁜 인상이 확 돌아와서 좋은 인상으로 되지 않나. 아마 전번에는 내가 이 어른을 잘못 봤었나 보다 하고 오히려 제가 미안해하지 않나? 그러니깐 좋고 나쁘고 간에 첫번에 깊이는 인상을 남겨 둬야 합니다그려.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좋은 편보다 나쁜 편이 더 손쉽지 않아요? 그것도 작자들의 자존심을 꺾는다든가 수치를 준다든가 하면 모르지만….”
이 일성이의 말에 팔 분의 진리를 인정은 하였지만 ― 아니 인정하였으므로 현숙이는 더 불유쾌하여졌다.
“언제 영옥이와 다시 만날 기회를 지어만 주구료.”
현숙이는 거기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내었다.
“대체 뭘 하러 상경했느냐? 의논하겠다는 것이 뭐냐?”
“참, 너절한 계집애 때문에 귀한 일을 잊을 뻔했군. 누님, 돈 좀 취해 주시오.”
“돈은 웬 돈이냐, 얼마 말이냐?”
“대체, 이 집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일성이는 대답키 전에 다른 문제를 꺼냈다.
“이 집 재산이야 내가 알겠니? 또 알기로서니 아직 어머님이 생존해 계셔서 모두 잡고 계시고 너희 형님부터가 매달 연구소에서 받는 월급으로 집안을 지탱해 나가는데 웬 여유가 있겠냐?”
동생에게 대한 불유쾌한 감정은 그로 하여금 이 집안의 재산 상태를 필요 이상 낮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래도 필요가 있을 때는 큰댁에서 임시로 얻어올 수 있겠지요.”
“그건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 처남의 용돈까지는 안 대주리라.”
일성이는 고소하였다 ―.
“누님께도 가정을 살 비용을 얼마 맡아 둔 게 있겠지요.”
“좀야 있겠지.”
“대체 얼마나 맡아 두셨소?”
“너는 대체 얼마나 필요하냐?”
이러한 문답하에 일성이는 겨우 자기의 필요한 금액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금액은 현숙이의 생각하였던 바와는 너무 액수가 틀리는 많은 돈으로서 현숙이도 그 금액에는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십 원, 이십 원, 잘하면 삼십 원까지는 부를 테고 그만하면 거기 절반쯤 꺾어서 주리라고 생각하였던 현숙이에게 천 원이라 하는 돈은 제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는 만한 뜻밖엣 거액이었었다.
이 뜻밖엣 거액을 정신 있는 소리로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은 현숙이는,
“집을 사려느냐?”
이렇게 물을 수밖에는 없었다. 거기 대답치 않은 일성이는 다른 말을 꺼내었다 ―.
“누님, 나는 그 새 인천 있지 않았다우.”
“그럼 어디 있었냐?”
“봉천.”
현숙이의 얼굴은 한순간 변하였다.
그리고 “ 대련 ―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요. 벌써 반 년 전부터.”
“어머니는?”
“모르지요. 아마 인천 그냥 있을 테지 ― 그리고 서울 온 지도 벌써 나흘 이야요. 나흘 동안을 이 집을 찾느라고…”
“이 집은 누이한테 돈 천 원을 따내려고?”
“네.”
불유쾌에서 노여움으로 노여움에서 다시 불유쾌로 ― 이렇게 움직이는 현숙이의 마음은 여기서 다만 경멸의 생각 밖에는 남지 않았다.
“누가 주겠다디?”
“누님이 주지요.”
어떤 확신을 가진 듯이 일성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 원을?”
“네.”
현숙이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천 원은 대체 뭘 하겠느냐. 논을 사겠느냐 밭을 사겠느냐.”
“마누라를.”
“무얼?”
“그 새 대련서 어떤 중국 처녀하고 약혼을 했는데 혼례 비용이 없어서 나왔읍니다.”
“그래서 그 혼례 비용을 나한테 따내겠단 말이냐?”
“네, 말하자면 ―.”
“나는 아직 천 원이란 돈을 쥐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또 설혹 있다 해두 그런 데는 내줄 수 없다. 그만치 알아 둬라.”
“누님한테야 없다 해두, 용언 형님한테야 있겠지요?”
“얘 ― 야, 네가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너희 형님을 어린애로 아느냐?”
“아 ― 니오. 당당한 어른으로 신사로 알지요. 그러기에 처남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에는 천 원은 내줄 줄 알고 찾지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현숙이는 대척치 않았다.
“안 줄까요.”
“줄 듯싶으냐?”
“그러면 만약 누님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라면 그래도 안 내줄까요?”
현숙이는 대답치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벽장을 열고 거기서 손철궤를 꺼내어 소절수책을 얻어내어 가지고 거기다가 오십 원을 써서 도장을 찍었다.
이것은 현숙이로서는 커다란 용단이었었다. 그 돈은 현숙이의 마음대로 쓰라고 맡겨 둔 돈이었었지만 그는 아직껏 남편과 의논이 없이 돈을 찾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차 불유쾌함이 더하여 온 그는 얼른 이것을 주어서 일성이를 쫓아 보내려는 마음에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다. 천 원 청구에 십 원 내외로써 물리칠 수 없은 그는 오십 원을 쓴 것이었었다.
현숙이의 내어주는 소절수를 받은 일성이는 먼저 그 금액을 보았다.
“오십 원이얘요?”
“응.”
“나머지 구백오십 원은?”
“모른다.”
현숙이는 잡아떼었다.
“몰라요?”
“몰라.”
“언제 주실 테야요?”
“몰라.”
일성이의 얼굴은 문득 험하여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헤헤 하고 웃었다.
“누님 왜 그러우?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아니오? 용언 씨로 말하더라두 최씨 집안에서 처녀를 하나 데려온 이상에야 그 집안에 다른 처녀를 데려들이는 데 반대는 없겠지요.”
누이를 팔아서 안해를 얻겠다는 말로밖에는 볼 수 없는 이 말에 현숙이의 성은 마침내 폭발하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여졌다. 입술과 손이 떨렸다.
숨이 허덕였다.
“누님, 성낸 얼굴이 제일 이쁘오. 용언 씨 앞에서도 늘 성을 내구료.”
현숙이는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른까지 셀 동안에도 그냥 성을 삭이지 못한 그는 서른하나 서른둘 또 세었다. 그리고 쉰한까지 센 뒤에 고즈너기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사관으로 가라.”
“구백오십 원은?”
“가!”
“구백오십 원은?”
행랑 아범 불러서 집어내기 “ 전에 썩 가거라. 아직 철없는 애라고 마지막에는 별 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 싫을 것 같으면 그 오십 원도 도로 두고 가라.”
일성이는 아직 쥐고 있던 소절수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
“이게요? 이게야 약조금이지요. 나머지는 언제 줄 테야요?”
“받을 재간만 있거든 받으려므나.”
“동생 하나 있는 것 너무 업수이 여기지 말우. 못쓴다우 ― 그리고 얼른 승낙해 버리는 게 당신께도 상책이겠소.”
마침내 일성이의 말에는 협박의 색채가 띠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협박을 하려고 부러 누이의 성을 돋우었는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넌 나를 협박을 하느냐?”
“협박이야 무슨 협박이겠소. 남 듣기도 흉하게.”
“그럼 그게 무슨 말이냐?”
“그저 그렇단 말이지. 사람이 추어 내자면 흠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비단 당신뿐이 그렇단 말도 아니오.”
일성이의 태도는 차차 침착하여졌다. 그 침착한 가운데 현숙이는 무서운 폭력을 보았다. 마주 앉은 사람은 현숙이의 동생 일성이가 아니요 이전 학생 시대에 활동사진에서 본 일이 있는 한 협박자이었었다. 일성이의 얼굴이 유난히 이뻐보였다.
현숙이는 입술을 떨었다 ―.
“그래 내게 무슨 흠이 있단 말이냐. 말해 봐라. 내게 그래 그래 그래―”
현숙이는 자기의 지위와 교양을 모두 잃었다. 비상한 노력으로써 일성이에게 달려들려던 마음을 누른 것이 최대의 인내였었다. 얼굴의 피가 모두 눈에 모인 듯하였다.
일성이는 또 헤헤 웃었다.
“게다가 약속도 있고 ―.”
“그래 언제! 무슨 약속!”
“말해 볼까요?”
“말해라!”
“그럼 ―.”
일성이는 점잔을 빼는 듯이 기침을 한 번 기쳤다.
그렇지만 동생의 정의로서 “ 준다면 나도 받기도 쉽겠고 받은 뒤에도 마음도 편할 걸 왜 꼭 약속을 이행한다는 형식 아래에 주랴고 그러우?”
“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없에요?”
“없어.”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말하리다. 오 년 전 ―.”
이렇게 말하고 일성이는 제 말의 효과를 기다리는 듯이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볼 뿐이었었다. 일성이는 한마디 더 보태었다 ―.
“여름.”
“그래.”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동안 현숙이의 얼굴빛이 좀 변하였다.
“봉천 송죽여관(松竹旅館)에서.”
만약 이 말을 최후의 거탄(巨彈)으로서 일성이가 던진 것이라면 일성이의 던진 탄환은 그 예상 이상으로 맞았다.
이 한 마디의 말은 명약 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현숙이는 허둥지둥 방바닥을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몸을 벽에 의지하였다. 거기도 아직 부족한 그는 머리까지 벽에 의지하였다.
“생각납니까? 생각 안 나면 끝까지 말하리까?”
일성이는 마치 쥐를 놀리는 고양이의 태도로 현숙이에게 대하였다.
그러나 현숙이는 거기도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일성이를 건너다볼 뿐이었었다. 그 눈에는 증오도 안 나타나 있었다. 무서움도 안 나타나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그 눈은 다만 눈을 감기가 귀찮아서 뜨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일성이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미소하였다. 잘게 생긴 앞니가 옥과 같이 반짝 하였다.
이삼 분의 시간이 흘렀다. 현숙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똑똑히 하는 그 말은 일성에게뿐 아니라 현숙 자기에게도 뜻밖엣 말이었었다 ―.
“자, 이게 내 대답이다. 이것은 내 오라비 최일성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협박자 부랑자에게 하는 말이다 ― 나는 역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그러니깐 물론 거절한다. 그리고 이 집은 부랑자가 발을 들여놓을 집이 아니니깐 당장에 나가라.”
순간 일성이의 얼굴은 다시 험하여졌다.
그러나 곧 헤헤 웃었다 ―.
“그럼 오 년 전 여름 송죽여관에서 생긴 일을 서용언 씨한테다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까?”
“좋다!”
“그러면 최현숙이라는 여자의 일생이 망하게 될 터인데 그래도 좋습니까?”
“좋다!”
“누님 왜 그러시오. 그게 누님의 본의가 아닐 테지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대답했지 본의는 아니지요? 난 그렇게 압니다. 그리고 구백오십원은 승낙하신 걸로 봅니다.”
현숙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구백오십 원은 여자의 손으로는 적지 않은 돈이야요. 그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니깐 오늘로 달라는 것도 아니외다. 사흘 후 ― 사흘도 부족할까― 넉넉히 잡아서 한 주일 뒤에 주세요. 어떻습니까?”
“―”
“주시겠지요? 네, 그럼 그러겠지요.”
일성이는 말을 혼자 주고 혼자 받은 뒤에 벌떡 일어나서 제 모자를 집어 가지고 나갔다.
현숙이에게는 한 가지의 비밀이 있었다.
세상의 많은 비밀이 대개 두세 사람의 관여자가 있으며 더구나 남녀의 비밀에는 반드시 상대자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현숙이의 비밀은 이 너른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현숙이는 굳게 믿고 있던 것이었었다.
용언이와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현숙이는 이 비밀을 곧 용언이에게 다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차마 그때에 자백을 하지 못한 그는 그 뒤에 다시 자백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이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른 것이었었다.
그 비밀이 ‘죄’라고 부를 성질의 것인지 어떤지는 현숙이는 몰랐다. 알고자도 아니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기의 처녀를 바치지 못한다 하는 커다란 비극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생각하며 판단을 내릴는지를 잃게 한 것이었었다.
그는 다만 자기의 잃어버린 정조 때문에 남몰래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란 일생을 통하여 비밀히 하여야 할 자기의 임무(?) 때문에 고민하였다. 그보다도 또한 더욱 큰 고통은 자기와 남편의 새에 어떤 비밀이 누워 있다는 데서 나온 마음의 아픔이었었다.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도 남편을 속인다는 것과 남편에게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불유쾌하게 생각하는 그가 여자의 생명인 정조 문제에 관하여 일생을 통하여 남편을 속인다는 것은 그에게는 과도한 짐이었다.
그때에 돌발적으로 생긴 그 사건은 현숙이에게는 책임이 없을 성질의 사건이었었다. 상대자의 이름은커녕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도 그 사건이 현숙이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단이 된다. 따라서 그 사건은 완전한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었었다. 상대자는 상대자가 혼자서, 현숙이는 현숙이 혼자서 제각기 가지고 있는 절대적의 비밀이었었다. 이제 어떠한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선다 할지라도 그때의 그 사건의 관계자로서 서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지라 따라서 현숙이 혼자만 비밀히 하면 영구히 표면에 나타날 기회가 없는 사건이었다. 현숙이는 그것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바였었다. 처음에 용언이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그 비밀을 용언이 앞에 드러내어 놓으려던 그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차차 용언이와 가까워 가면서 용언이가 자기의 처녀성을 절대로 시인하는 태도를 볼 때에 현숙이는 마침내 용언이 앞에 그 문제를 내어놓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종내 결혼식까지 거행되었다. 여기 미쳐서 현숙이는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녀간에 그 정조라는 것을 중대시하는 용언이의 성격도 현숙이로 하여금 그 방침을 바꾸는 동기에 큰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너른 세상에 자기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비밀을 일생을 저 혼자서만 알고 거기 대한 책임이며 고통을 저 혼자만 지려고 결심하였다. 남편과의 새에 어떤 비밀을 두고 그것을 일생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은 현숙이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남편에게까지 알게 하여 남편의 마음에 일생을 꺼림칙한 불유쾌한 생각의 그림자조차 띄어 주지 않으려 그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오로지 남편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사건의 속죄함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써 그 고통의 위안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었었다.
그것은 청천에 벽력과 같았다.
이 뜻하지 않은 벽력에 맞고 정신을 잃고 있던 현숙이는 문득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새암과 . 같이 눈물이 그의 눈에서 솟았다. 고요한 밤은 그의 울음을 더 도왔다. 발작적(發作的) 울음을 실컷 운 뒤에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씻은 뒤에 다시 소매에 넣고 문갑 앞에 가서 문갑을 의지하고 앉았다. 이제 운 그 울음은 얼마만치 그의 마음을 평정하게 하였다.
당연한 순서로서 현숙이는 일성이에 대한 선후책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 방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허공 같은 그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커다란 무서운 그림자가 왕래할 뿐이었었다. 어떠한 일에든 그 처결을 주저한 일이 없고 판단을 그리친 일이 없는 현숙이로는 그 문제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천 원 ― 일성이의 청구하는 바의 이 돈을 주지 않으면 일성이는 오 년 전의 그 사건을 남편 용언이에게 다 말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현숙이는 오늘 처음으로 일성이를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 때 들은 바 제 아버지의 면목을 발견한 것이었었다.
만약 그 사건이 남편의 귀에까지 가면? 현숙이는 ( )갑 위에 놓여 있는 용언이 의 사진을 끄을어당겼다. 현숙이가 만든 비단틀 속에 들어 있는 그 사진의 주인공은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대하고 온화한 가운데도 엄격함을 잃지 않는 그 사진의 얼굴은 오늘따라 무엇을 심문하는 듯이 현숙이를 바라본다. 현숙이는 그 사진의 눈을 피하면서 몸을 떨었다.
관대한 남편은 혹은 그 사건을 알고라도 안해를 용서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까지 계속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었었다. 한 걸음을 양보하여 사랑이 그냥 계속된다 할지라도 안해에게 대한 꺼림칙한 감정 뿐은 결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었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남편의 경멸에 생각이 미칠 때에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또 다시 몸을 떨었다. 그 생각의 그림자와 같이 그의 머리에는 일성이의 모양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잘게 생긴 앞니를 내어놓고 씩씩 웃었다. 거기 향하여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무슨 권리로써 네 누이의 행복을 깨뜨리느냐!”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책망하였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그냥 웃음을 계속하였다 ―.
“아녜요 아녜요. 나야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러지.”
현숙이는 보이지 않는 총을 들어서 일성이를 쏘았다. 그러나 일성이는 그냥 뻣뻣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험상지게 되었다 ―.
“여보, 나만 죽이면 당신 비밀이 없어지는 줄 압니까? 비밀은 영구히 남아 있어요.”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지워 버리려고 눈을 다시 남편의 사진 위에 부었다.
사진은 역시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숙이는 그 사진과 자신의 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방해물이 박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순전히 일성이에게 있는 것이었었다.
즉 거대한 날개와 같이 천 원이라 하는 돈이 그의 머리를 내려눌렀다. 그리고 그 천 원이라는 돈의 저편 쪽으로 희미한 서광조차 보였다.
“천 원! 천 원!”
현숙이는 그 사진틀 속에 천 원이 있는 것같이 그 사진을 흔들면서 고민하였다.
그때에 문득 그는 자기의 형 인숙이가 생각났다. 가세가 그다지 부유하달 수는 없으나 홀몸으로서 한 집안을 주관하며 지내는 형에게는 그맛 돈은 있기도 쉬울 것이었었다. 현숙이는 형을 힘입으려 하였다.
현숙이에게도 그만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용언이가 현숙이에게 자유로 쓸 권리를 주어서 맡긴 금액은 일성이가 청구한 금액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었었다. 그리고 용언이는 거기 대하여는 절대로 간섭치 않았다. 그런지라 거기서 일성이의 청구하는 바를 주어도 이후에 나타날 근심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한 가지의 할 수 없는 비밀은 가졌을지언정 또 다시 남편을 추호만치라도 속인다는 것은 현숙이의 도덕감과 교양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바였다.
이리하여 그는 시재 당한 급한 일을 끄기 위하여 제 형 인숙이를 힘입으려 하였다.
이 생각은 순간에 그의 머리에 일어나서 순간에 결정되었다. 순간에 결정되니만치 그의 뇌리에서 근심의 자취를 쫓아내는 속도도 빨랐다. 그는 제 머리 속에서 가속도로 스러져 가는 근심의 자취를 관찰하는 흥미에 끄을리어서 그것이 성공될까 안 될까를 생각하여 볼 비판력조차 잃었다.
그리고 사진틀을 양손으로 잡고 호소하듯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남편이 괴로울 때에는 그 피난처를 안해의 품안에서 구할 것이요 안해가 괴로울 때에는 그 피난처를 남편의 품안에서 구할 것이라는 것이 현숙이의 부부관이었었다 그리고 . 아직껏 그것을 지켜 왔다. 그러나 이번의 이 괴로움을 만나서 피난처로 남편의 품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른 그는 거기 따르는 일종의 불만조차 느꼈다. 남편을 속이는 듯한 불유쾌함조차 그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양손으로 잡은 사진틀을 차차 가까이 끄을어당겼다.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안해들이 남편에게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을 나는 당신께 바칩니다. 나는 당신 이전에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읍니다. 나는 내 부모조차 사랑해 본 일이 없읍니다. 처녀의 첫사랑을 곱게 당신께 바쳤읍니다. 그리고 장래에도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을 굳게 믿습니다. 내 일생에 내 사랑의 전부를 다만 혼자서 점령하실 당신이외다. 그 대신 내가 당신께 사랑하는 다만 한 가지의 요구는 역시 사랑이외다.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장래에 허다한 착오와 방해가 생길지라도 당신의 사랑이 그냥 계속되겠읍니까? 나는 이것을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할 때에 그 인형에게서 사랑의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의 인형을 사랑하는 마음뿐으로 만족치 못하겠읍니다. 내 사랑의 보수로서 꼭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사랑의 보수로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다지 비싼 보수가 아닐 줄 압니다. 이 욕심꾸러기의 여인을 사랑해 주세요. 아니 당신이 사랑하고 싶지 않더라도 나는 꼭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야 말도록 만들겠읍니다. 이것이 내 의무이요, 또한 권리외다.”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현숙이는 몸을 고민하듯이 떨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그 눈물을 씻으려도 아니하고 겹지 않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의 주인은 현숙이의 호소를 알아 듣겠다는 듯이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사진을 쓸어안았다.
이때에 그의 머리에는 사 년 전 용언이를 처음 볼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사 년 전 어떤 봄날이었었다.
친구 몇 사람(일본 여학생)과 작반을 하여 무꼬지마의 사꾸라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었다. 그 가운데서 누구가 오늘 T대학과 W대학의 새에 정구시합 이 (庭球試合) K그라운드에 있는데 구경을 가자는 의논을 꺼내었다. 그 날은 일요일로서 제각기 마음으로 인제 남은 날을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하고 주저하던 중이므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라운드에서 순서지를 받아서 허리춤에 넣은 뒤에 현숙이가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을 때는 벌써 제일회와 제이회의 예선은 끝난 다음이었었다.
그리고 삼회전의 첫머리로 시작된 경기도 그들이 어느 편이 T대요 어느 편이 W대인지 눈치가 뜨일 때쯤 끝이 낫다. 곁사람들의 비평으로써 현숙이는 이긴 편이 T대학의 부장조(副將組)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에 시작된 것이 T대학의 대장조(大將組)와 W대학의 부장조의 경기였었다. 한편은 대장조이요 한편은 부장조인지라 그 기술에 있어서 T대학이 우세한 것은 아무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예상과 틀리게 T 대학의 대장조가 한 게임을 먼저 졌다. 그 뒤부터는 아직껏의 형세가 거꾸로 되었다. 한 게임을 먼저 얻은 W의 부장조는 침착한 태도로 볼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먼저 잃은 T대학조는 좀 덤비기 시작하였다. 대장조가 부장조에 졌다는 면목 없는 사실이 낳은 T대학 대장조의 낭패는 더욱 더 그들로 하여금 실수를 거듭하게 하였다. 더블까지 하였다. 당연히 후위(後衛)가 받을 볼을 전위가 받으려다가 실수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사나이가 저런 볼에 아께루(開ける ― 구멍을 내다)하다니.”
현숙에게는 벌써 그 승부가 보였다. T대학의 대장조에 대하여 경멸감조차 일어났다.
넘어졌다. 그리고 남은 경기는 W대학의 대장조와 부장조 T대학의 부장조― 이러하였다. 이리하여 준결승전에 들어가렬 때에 W대학의 부장조는 기권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준결승전은 없어지고 T대학의 부장과 W대학의 대장으로 결승전의 막이 열렸다.
승리가 W대학으로 갈 것은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대장을 꺾인 T대학의 부장이(부장으로 T의 대장을 꺾은) W의 대장을 대항하리라고는 생각 못할 바였었다. 두 대학에서 다 응원의 소리조차 없었다. T대학에서는 할 기운이 없었다. W대학에서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치 승부는 확정적의 것이었었다.
어느덧 3대 0이라는 심판의 부름과 함께 그들은 또 자리를 바꾸었다.
자리를 바꾼 뒤에도 역시 형세는 불리하였다. 잠깐 새에 쓰리 제로라는 심판의 선언과 함께 하나 더로써 게임이 끝난다는 주의가 들렸다. 그때에 T 대학의 후위가 전위에게로 가서 한참 무슨 의논을 하였다. 다시 경기는 시작되었다. 구경꾼들은 차차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열린 경기는 기괴한 경기였었다. T의 전위는 죽은 듯이 가만 있었다. 그리고 오는 볼은 모두 후위가 받았다. 당연히 전위가 받을 볼이라도 전위는 몸을 피하고 후위가 받았다. 그리고 후위는 그 볼을 고즈너기 높이 넘겨서 적의 전위를 패스하여 후위에게 주었다. 무서운 전위의 공격을 피하여 볼은 천천히 높이 떠서 적의 후위에게로만 갔다. 이리하여 그 둘은 적을 ‘먹이려’하지 않고 다만 적의 우연한 실수를 기다리는 것으로서 전략을 고쳤다. 그리고 자기네만 실수를 안하는 것으로 유일의 전략을 삼으려 하였다.
곧 한 점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응원의 소리조차 없었다. 한 점이 무슨 쓸 데가 있을까.
좀 뒤에 마침내 한 게임을 회복하였다. T대학에서는 차차 응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W대학에서도 ‘네버 마인드(never mind)’ 소리가 연하여 나기 시작하였다. 돌아가려던 구경꾼도 도로 발을 돌이켰다.
이상한 동정심은 차차 관중으로 하여금 아직껏 경멸하던 T대학에게로 쏠리게 하였다. T대학의 후위는 침착하였다. 낭패하여 자포가 된 듯한 전위를 밀어 버리고 오는 볼은 모두 저 혼자서 맡아서 가장 침착한 태도로써 기공을 희롱치 않고 저편 쪽으로 높이 넘겨 보내는 후위의 모양은 침통하달 수도 있었다. 그는 승부라 하는 것은 온전히 도외시(度外視)하는 듯하였다.
적이 실수를 할지라도 기뻐하는 듯하지도 않았다. 자기네에게 실수가 있어도 그것을 탄하는 듯하지 않았다.
또 한 게임을 회복하였다. 3대 2가 되었다. T대학 측에서는 경기장까지 뛰어나오면서 기쁘냐고 하였다. W대학 측에서는 ‘네버 마인드’소리가 더 커졌다. 관중의 호기심은 차차 더하여 갔다. W대학의 대장조는 T대학의 부장조의 기괴한 전략에 낭패하였다. 이 낭패는 그들로 하여금 뜻 아니한 실수를 거듭케 하였다. 형세는 온전히 X였었다. 어느 편이 이기겠다고 아무도 단언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아직껏 후위의 제지로 말미암아 가만히 있던 T대학의 전위가 활약을 하기 시작하였다. 얼마간의 형세의 회복이 더하는 것은 전위로 하여금 좀 안심케 한 모양이었었다. 그리고 이 안심은 그로 하여금 활약할 야심이 생기게 한 모양이었었다. 그러나 그 활약은 결코 이로운 활약이 아니었다.
마침내 승부는 났다 . 첫 번 예상같이 W대학이 이기기는 하였다. 그러나 관중의 칭찬은 오히려 진 T대학에게로 몰렸다. 아니 오히려 T대학 부대장 조의 후위에게로 몰렸다.
T대학의 전위는 래킷을 상에 던지며 분개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잘 싸운 후위는 씩 한 번 웃고 들어갈 뿐이었다.
구경을 끝내고 돌아온 현숙이는 그날 밤 노곤한 몸을 자리에 누웠다. 처녀에 적당한 몇 가지의 공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뒤에 곧 단잠에 떨어지려던 그에게는 문득 뜻하지 않고 아까 그라운드의 광경이 눈앞에 다시 보였다.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싸운 그 후위 ― 승부가 끝이 난 뒤에도 다만 미소로써 자기네의 패배를 조상한 그 후위의 모양이 눈앞에 어릿거렸다.
현숙이도 미소하였다. 그러나 그 미소 가운데는 처녀로서의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다.
“당신은 사내다운 사람이외다.”
그는 그 그림자에게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좀 뒤에 그는 곤한 잠에 빠졌다.
이튿날 학교에 가려고 하까마(치마)를 입은 현숙이는 하까마에서 무슨 종이조각이 하나 내려지는 것을 보고 주워서 펴보았다. 그것은 어저께 그라운드에서 받아 넣었던 선수멤버이었었다. 처음에는 뜻없이 그것을 구겨서 내어던지려 하였으나 T대학의 부장조의 후위의 생각이 문득 나면서 현숙이는 그 종이를 펴보았다. 멤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서(徐), 기무라(木村)’ 멤버에 후위의 이름을 먼저 쓴다는 것쯤은 현숙이도 아는 바였다. 그러면 그 T대학 부장조의 후위는 ‘서’라 하는 성을 가진 사람이었었다.
그 사람과 자기는 같은 조선 사람이라 하는 점은 이상히도 현숙이의 마음을 힘있게 두드렸다. 이리하여 현숙이의 생활에는 ‘서’라 하는 똑똑치 않은 이름이 어떤 진전을 가지기 비롯하였다.
어떠한 사내를 보든 ‘사람’으로밖에는 보지 못하던 현숙이는 여기서 처음으로 ‘사내’를 보았다. ‘동경서 유학하는 같은 조선 사람’이라 하는 공통점은 현숙이로 하여금 막연히 좀더 친근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몇 가지의 의혹이 그에게 안 일어난 바는 아니었었다. 중국 사람의 성에도 서씨 가 있다는 ‘ ’ 것이 생각났다. 대만 사람에게도 ‘서씨’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일단 가깝게 된 그 서씨는 다시 멀리 할 수가 없었다.
서씨 ― 혹은 서씨와 같은 사람. 이러한 막연한 허수아비를 공중에 그려 놓고 현숙이는 학업을 닦았다. 품성을 쌓았다. 서씨가 아닌 사내 혹은 서씨와 같지 않은 사내들에게는 한낱 ‘사람’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 서씨를 좀 구체적으로 알아볼 용기까지는 못 내었다. 다만 동경 조선 사람의 회합에 부지런히 출석하는 것으로 그는 행여나 그 서씨를 종내 알게 될까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현숙이는 서씨라 하는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은 채로 학업을 끝냈다.
그의 형 인숙이는 몇 해 전의 약속에 의지하여 현숙이에게 좋은 짝을 얻어 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적당한 짝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동생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은 형은 따라서 가장 동생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었다. 그는 제 사랑하는 동생의 짝으로서는 어떠한 사람이 가장 적당할지 잘 알았다. 그러나 고르면 고를수록 부박한 사람만 눈에 띄었다. ‘무게가 있는 사람’― 이것이 그의 고르는 첫째 조건이었었다. 학교에서는 넉넉히 학업을 쌓았지만 현숙이는 귀국한 뒤에도 온갖 방면으로 지식을 넓히기를 게으르지 않았다. 여자의 대상으로는 반드시 ‘남편’이라는 사람을 세기를 잊지 않는 현숙이는 자기에게도 같은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씨 혹은 서씨와 같은 사람 ― 이러한 막연한 형상을 가진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의 머리 속에 박혀 있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의 주위라 하는 것은 온전히 X였었다. 혹은 회사원일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혹은 기술자일지도 모를 것이었 었다. 혹은 장사하는 사람일지도 모를 것이다. 교원, 변호사, 관리, 부랑자― 어떠한 배경을 가진 사람일지 예상을 허락지 않는 이 문제 앞에 현숙이는 그 가운데 아무 것에 속한다 할지라도 덜컥 만나는 날에 결코 낭패치 않을 만한 지식을 얻어 두려 하였다. 이것은 장래의 남편에게 대한 안해 된 사람의 친절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 어느 편으로 보든 장래의 남편을 맞을 처녀로서는 가장 유리한 방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견해와 자각 아래서 온갖 방면에 지식의 발을 넓히던 그는 어떤 때 어느 신문사 주최의 화학연구소 견학단에 따라갔다가 그 연구소 제2부 연구실에서 우연히 ‘서’를 보았다.
똑똑히 말하면 ‘서’를 본 바가 아니었었다면 예전에 몽롱한 기억에 남아 있던 그 얼굴을 연구소 안에 있는 ‘서’에다 갖다가 비길 공통점조차 현숙이는 몰랐다 그러나 . 현숙이는 그를 보는 순간 그를 ‘서’로서 인정하였다.
오랫동안 벼르던 꿈은 마침내 실현될 가능성을 현숙이에게 보여 주었다.
현숙이는 주저치 않고 그 뜻을 자기의 보호자이요 형인 인숙에게 말하였다.
인숙이도 용언이를 보았다. 그리고 제 동생의 눈이 높음을 만족히 여겼다.
이리하여 현숙이의 삼 년 동안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첫 회견에 서로 그 인격과 교양을 인정하였다. 약혼은 성립되었다. 즐거운 약혼 시기의 반 년도 지나갔다.
현숙에게 있어서는 남편을 맞을 만한 ― 그리고 용언에게 있어서는 안해를 맞을 만한 준비가 충분히 완전히 되기를 기다려서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 뒤에는 지금의 이곳에 집을 하나 사 가지고 따로 나온 것이었었다. 행랑방에 행랑 사람 부처를 둔 뿐 현숙이는 안잠자기며 침모여 식모며 어떠한 병색을 띤 사람이든 다른 보조자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즐거운 신혼 시기를 부처 단 두 사람에서 즐기려는 현숙이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었다. 그러나 급기 그 일이 실현된 뒤에는 그것은 현숙에게도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신혼의 즐거운 시기를 부처 단 두 사람에서 즐기겠다는 뜻에서 출발한 ‘간단한 부처생활’은 그 일이 실현되면서부터는 가정의 전 책임을 혼자 졌다는 커다란 책임감을 현숙이에게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가정상의 온 권리를 자기 혼자서 잡았다는 커다란 자랑에 다름없었다.
세상에 대하여 그다지 허영심이 없는 현숙이는 그만치 또한 남편에게 대하여서는 허영심이 많은 여인이었었다. 남편과 가정 ― 이 두 가지의 커다란 짐을 조금이라도 그 취급함에 실수를 남편에게 보이는 것을 현숙이는 죽기보다도 더 싫어하였다. 완전한 안해로서 완전한 주부로서 남편에게 대하여는 손톱눈만치의 흠이라도 안 잡히려고 현숙이는 자기의 가지고 있는 지혜와 지식의 전부를 거기다 부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앞에는 행복된 가정이 전개될 것이었었다.
남편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이런 공상에 잠겨 있던 현숙이는 시계가 반 시를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열한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숙이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제자리에 도로 갖다가 놓은 뒤에 그 방을 정리하고 침실로 건너갔다. 침실에서 남편의 돌아옴을 맞을 화장을 하려고 경대 앞에 마주 앉은 그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아까 우느라고 쓰러졌을 때에 앞 머리카락이 모두 흩어지고 몇 올은 이마를 걸치고 뺨을 걸쳐서 옷섶에까지 내려온 것조차 있었다. 아무리 그때에 그의 받은 바 충동이 컸은들 이 꼴이 평소에 단아함을 자랑하던 자기의 꼴이냐고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것이었었다.
만약 사오 분 전에 남편이 덜컥 돌아왔으면 자기는 어떻게 변명하였을까?
설혹 남편이 안 돌아온다 할지라도 이 꼴을 하고 이삼십 분 동안을 그냥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한 것은 그에게는 확실히 경멸할 만한 일이었었다.
그는 서랍에서 빗을 꺼내어 가지고 머리를 빗었다. 이제 머리를 풀어서 다시 빗을 시간을 가지지 못한 현숙이는 늘어진 머리털을 빗어올리고 손으로 두어 번 톡톡 두드린 뒤에 그물을 씌우는 것으로 만족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뒤에 얼굴에 엷게 화장을 하고 아래 떨어진 머리털이며 분가루를 비로 쓸어서 종이에 담아 가지고 내어버리려고 그가 일어설 때에 대문에서 남편의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그는 안심과 함께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남편을 맞으러 대청으로 나갔다.
“늦었지?”
남편은 들어와서 자리에 앉으며 안해에게서 나는 화장의 내음새를 상쾌한 듯이 맡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아뇨.”
이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현숙이는 남편의 돌아오는 것이 늦었는지 빨랐는지는 생각도 안하였던 바였었다.
“영옥인 곧 갔소?”
“네 ― 아니, 일성이, 저 우리 동생이 온 뒤에도 좀더 앉았다가 갔으니깐 아마 아홉시 반쯤 갔지요.”
“행랑 어멈보고 바래다 주랬소?”
이 뜻밖의 질문에 현숙이는 놀랐다. 마음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한 사소한 일은 생각지 않을 남편으로서도 넉넉히 주의하는 일을 안해 된 자로서 못하였다 하는 것은 현숙이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었다. 낮과도 달라서 밤에 과년한 처녀를 혼자 보냈다 하는 것은 현숙이의 커다란 실책에 다름없었다.
통상시 같으면 그런 일을 잊을 현숙이가 아니었지만 그때 일성이와의 다툼으로 불유쾌하였던 그는 그만 잊어버렸던 것이었었다. 현숙이는 변명키 전에 솔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남편 앞에 내어놓았다.
“미처 생각이 및질 못해서 그만.”
“그럼 안 바래다 주었소?”
남편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힐문에 가까웠다. 그 앞에 현숙이는 조용히 복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이렇게 대답하고 눈에 온 광채를 모아 가지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그냥 보냈더니 ― 어디 큰댁까지 잠깐 다녀오리까?”
“아니 무슨 일이 있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껏 그렇게 해왔기에 말이오. 게다가 혼자 보내면 어머니께서 좀 부족히 생각하실지두 모르겠구나.”
이 말의 앞에 현숙이는 부끄러움을 느끼기 전에 먼저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그 주의는 남편 자기의 주의라기보다 오히려 어머니와 안해의 새에 어떻게 하면 생길지도 모르는 불만과 부족감을 미전에 방지하려는 그 주의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해 된 자가 먼저 깨달아 가지고 일일이 세심한 주의로써 행하여야 할 종류의 일이었었다.
“게까지 미처 생각이 돌질 못해서 그만 ― 게다가 일성이도 와 있고―.”
“참 그 사람이 왔어. 다시 왜 왔읍디까?”
“공연히 왔겠지요.”
“영옥이도 봤소?”
“네.”
“그 사람 뭐? 일성이?”
“네, 일성이요.”
“일성이와 영옥이와 봤나 말이오.”
“한 삼십 분 가량 같이 앉았었지요.”
남편은 다시 그 말에는 응치 않고 담배를 꺼내어서 붙이려 할 적에 행랑어멈이 세숫물 떠다가 놓는 소리가 대청에서 났다. 현숙이는 일어나서 양치기구와 비누와 세수 수건을 남편의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자 남편이 세수를 하러 나가는 것을 기다려서 자기도 자리를 펴려 침실로 건너갔다.
삼십 년 전에 무장야의 너른 벌판에 아름다운 범나비가 한 마리 떠다니고 있었다 그 범나비가 . 아무 뜻 없이 어떤 동리까지 날아왔다. 그 때문에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그 범나비를 잡으려다가 그만 참혹히도 죽는 경우에 이르렀다.
그 어린아이가 참혹히 죽기 때문에 나흘 뒤에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운전하던 기차가 탈선을 하여 여기서 세계철도사에 다시 볼 수 없는 참극을 이루어 놓았다.
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여행은 여기서 무서운 비극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온전히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었었다. 그때의 그 기차에 조선 대학생 서인준(徐仁俊)이라는 사내와 그의 약혼자 신함라(申咸羅)라는 여자가 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인준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전니쇼우라는 이름으로서 세계 자연과학계의 상당한 이름까지 얻은 학자가 되었다.
그의 약혼자이던 신함라는 그의 고향 인천서 최모(崔某)라는 의사에게 시집을 갔다.
함라는 왜 인준이를 버리고 최모에게 시집을 갔나. 범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여행은 이 서로 사랑하던 두 남녀로 하여금 뜻에 없는 파경의 설움에 울게 하였다.
세상의 온갖 군잡스런 문제를 집어치운 인준이는 오로지 학업에 힘써서 오늘날 서 박사라 하는 명예있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그의 약혼자이던 신함라는 뜻에 없는 시집을 가서 그 뒤 삼십 년이라는 기다란 세월을 불평과 불만의 가운데서 보냈다. 목숨 있는 인형 ― 천하의 많고 많은 일을 아불관언의 태도로써 그저 죽어지지 않으니 살아간다는 가련한 생활을 계속하는 함라와 ― 아직 독신으로 지내며 세상의 온갖 일을 생각치 않고 오로지 자기의 연구에만 온 힘을 쓰고 있는 인준이의 두 사람 가슴에는(그들의 태도로 미루어) 아직 많은 미련이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괴한 운명은 삼십 년 뒤에 그 서인준의 조카 되는 서용언이와 신함라의 딸 되는 최현숙이를 부부라는 명색 아래 연결시켜 놓았다. 젊은 두 남녀는 자기네의 온 존경과 사랑을 상대자에게 주었다. 삼십 년 전에 한 사람에게는 제 삼촌이요 한 사람에겐 제 어머니 되는 사람이 오늘날의 자기네들과 같이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신혼인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음식삼아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태평행’의 첫째날은 막이 열렸다.
삼십 년 동안을 고국에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서 박사에게서 갑자기 귀국한다는 기별이 온 것도 이 날이었었다. 그리고 그 날에 등장한 광대 네 명(용언과 현숙의 부처, 용언의 누이, 현숙의 오라비 일성이)에 대한 생활과 성격과 교양에 대한 윤곽은 비교적 명료히 독자의 머리에 그려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특수한 성격을 가진 네 명 밖에 아직도 현숙의 형 인숙이와 어머니 신함라, 용언의 삼촌 서 박사의 세 사람의 중요한 광대는 등장치를 못하였다. 그러면 작자는 이제 장차 전개할 사건을 붓하기 전에 인제 그 세 사람의 생활과 성격의 윤곽을 보여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평범한 속에서 전개되어 나아가는 뜻하지 않은 비극의 씨를 보여 둘 필요가 있다.
이튿날 아침 깬 뒤에는 현숙이는 어젯밤 자기에게 생겼던 불유쾌한 일을 거의 잊었다. 머리 한편 구석에 좀 불유쾌한 감정이 성가시게 붙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생활 상태에 변동을 줄 만치 그를 지배치를 못하였다. ‘일성이’라 하는 불유쾌한 기억과 ‘천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때때로 그의 마음에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것뿐이었었다. 충분한 잠을 자고 난 ― 남성적 매력으로서 빛나는 남편이 얼굴은 현숙이로 하여금 온갖 다른 군잡스런 일을 잊게 하는 것이었었다. 예에 의지하여 부처 단 두 사람 새에 간단한 조반을 끝낸 뒤에 남편이 연구소로 가려 할 때에 현숙이는 남편에게 자기는 오늘 언니한테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자기의 이전의 비밀을 일성이의 입에서 봉하기 위하여 돈을 마련하러 가는 그 인사라 이런 일을 남편의 앞에 천연히 하지 못할 것이었었지만 받았던 커다란 격동은 그로 하여금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이 말을 하게 한 것이었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에는 형용키 어려운 쓸쓸함이 있었다.
‘당신은 모르시지요? 나는 마음속에 커다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외다. 이 비밀을 일생을 품고 있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내 마음은 여간 절통치 않습니다. 이 비밀을 당신의 앞에 모두 풀어헤쳐 놓으면 내 마음은 얼마나 시원하겠는지요. 그러나 이 비밀을 당신이 아신 뒤에 당신의 마음속에 당연히 일어날 불유쾌함을 생각할 때는 나는 차마 이것을 당신께 이야기할 수가 없읍니다 . 모든 것을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나는 당신을 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온갖 것을 모두 용서해 주세요.’
“언니한테?”
“네.”
“언니란 저 창선(昌善)이 언니 말요?”
“네.”
“갔다 오구료.”
남편은 별일을 다 의논하잔다는 듯이 선선히 승낙을 한 뒤에 연구소로 갔다.
남편을 보낸 뒤에 현숙이는 간단히 설거질을 하고 들어와서 화장대 앞에 마주 앉았다. 열시에서 열두시까지는 자수 강습회, 오후 세시까지는 언니의 집, 그 나머지의 시간을 장보는 것과 가정 안에서의 일로 ― 현숙이의 오늘의 프로그램은 이러하였다.
그러나 화장대에 마주 앉는 순간 그는 어느덧 생각에 잠겨 버렸다. 좀 있다가 당연히 있어야 할 인숙이와 자기와의 문답이며 그 문답에서 또 다시 생겨 날 뒷 문답들을 이리저리 생각하는 동안에 그는 어느덧 화장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영리함과 솔직함을 자기의 가장 큰 무기로 삼고 자랑으로 삼던 그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언니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천원이라는 돈을 꾸어올는지 그 교묘한 거짓말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궁리를 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연구하는 데 대하여 아무 부끄러움이며 미안스럼을 느끼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고 오히려 놀랐다.
분병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열시가 지났다. 화장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때는 벌써 열한시도 지났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프로그램을 고쳤다. 그리고 자수 강습회는 그만두고 곧 형의 집으로 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가 사랑방을 한 번 검분한 뒤에 도배지의 예산을 세우고 어멈에게 부탁을 한 뒤에 형의 집으로 향한 때는 벌써 열두시도 거의 된 때였었다.
현숙이 형 인숙이는 서른한 살이었었다. 스무 살에 어떤 학교 교원에게 시집을 가서 그 이듬해로 한 아들을 보았다. 그 이듬해로는 남편을 잃었다.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아직 그 맛과 자미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전에 벌써 어머니가 된 그는 안해의 지위에서 어머니의 지위에 올라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지위에 . 올라선 지 며칠이 지나지 못하여 남편을 잃은 그는 또 일전하여 가장의 지위에까지 올라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의 청춘은 애처로이도 깨어져 버렸다. 아름다운 꿈과 자기자미한 새는 그를 건너뛰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커다란 짐은 어느덧 그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용감히도 이 쓰고 찬 세상과 싸우려 하였다.
아름다운 꿈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전에 벌써 현실의 쓰라림에 부대낀 그는 여기서 자기의 성격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 그것은 꿈이로다.’ ‘현실? 그것은 분투로다.’ ‘분투? 그것은 즐거움이다.’ 비교적 냉정한 이지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어느덧 이러한 생각이 움 돋기 시작하였다. 현실은 어디까지든지 분투이며 그 분투에서야만 인생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이 주의는 어떻게 보면 할 수 없는 그의 경우에서 생겨 난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의 분(分)을 잘 지키고 결코 그 ‘분’ 이상에 올라서 보려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의 남겨놓은 적은 유산으로 자그마한 화장품점을 차려 놓고 시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분투의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이러한 십 년 동안에 그의 성격에서는 여자다운 온화함은 없어져 버리고 그 대신에 사내로서의 굳셈과 가장으로서의 능함이 생겨 났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에 한 사람 땅에 두 사람 합하여 세 사람이라 하였다. 하늘에 있다는 것은 무론 자기의 없은 남편을 가리킴이었었다. 비록 부부생활을 오랫동안은 못하였을망정 그 짧은 동안에 남편에게 바쳤던 그의 사랑은 몹시도 컸었던 것이었었다. 더구나 남편이 없는 이튿날부터 자기와 자기 식구의 입을 위하여 괴로운 세상과 분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은 그는 남편의 죽음을 고요히 조상할 기회도 못 가졌더니만치 그에게 대한 애연한 생각은 더욱 컸던 것이었었다.
땅에 두 사람이란 것은 하나는 제 보배이요 남편의 복사라고 할 만한 외아들 창선이를 가리킴이요 또 하나는 동생인 현숙이를 가리킴이었었다.
그는 자기의 부모에게는 아무런 애착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부모가 처음 만난 지 아홉 달 만에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 자식이 아니라 하였다. 무슨 귀찮고 성가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풀이는 인숙이의 위에 내렸다. 아버지가 갑갑할 때는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하여 인숙이를 구박하였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어머니뿐은 그를 몹시도 예뻐하였지만 왜 그런지 인숙이는 제 어머니에게 대하여조차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외로운 어머니, 세상의 아무런 일에도 감동이 없는 산송장과 같은 어머니 ― 이러한 제 어머니에게 대하여 스스로 동정하여 보려고 마음도 먹어 보고 애착을 가져 보려고도 하였지만 억지로 일으키려는 사랑과 동정이 나올 리가 없었다.
‘마음에 없는 일을 어떻게 하나?’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그 생각조차 내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숙이는 열두 살 때부터 제 형의 집에서 자랐다. 사람의 정과 성격이 조성되려는 가장 귀한 시절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서 형의 품안으로 온 현숙이는 따라서 어머니에게 대하여는 아무 애착도 못 가진 대신 제 형을 어머니로 알았다.
열두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 그것은 인생이 바야흐로 세상이라는 커다란 바다에 떠나려는 준비를 시작하는 때로부터 그 준비가 완전히 끝나는 시기를 가리킴이었었다. 따라서 그 시기가 인생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시기에 다름없다. 그리고 또한 그만치 그 시기의 경고와 수양으로써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과 모든 성격이 결정되는 시기였었다. 그러한 귀중한 시기를 형에게서 보내고 형의 훈도 아래서 자란 현숙이는 비록 피와 살은 어버이에게서 받았다 할망정 오히려 ‘형의 자식’이었었다. 정애도 형에게밖에는 없었다. 존경도 형에게밖에는 못 가졌다. 신뢰도 형에게밖에는 못 가졌다.
겨우 한 아들을 본 뿐 곧 남편을 잃어버린 인숙이는 자기가 장차 가질 수 없는 딸자식에게 대한 애정과 그 교육이며 훈도에 대한 희망과 촉망을 제 동생 현숙이에게 붙였다. 그리고 그러한 뜻 아래서 제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현숙이를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한 개의 인격은 이렇게 하여서 어머니를 떠나서 형의 아래서 길러나기 시작한 것이었었다.
‘여자는 절반.’ ‘남자는 그 나머지의 절반.’ 일찌기 홀몸이 된 인숙이는 홀몸이 됨으로 받은 고통과 불만과 불평과 부족을 통절히 느끼느니만치 여자와 남자가 이 세상을 차지할 각각 그 ‘절반’이라는 것을 절실히 알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한 그의 교육방침은 현숙이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먼저 여인이 되게 하려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신경쇠약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이만치 남자를 경계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남자를 알게 하려 하였다.
‘사내는 남편.’ ‘여인은 안해.’ 첫째 방침에서 출발한 인숙이의 둘째 방침은 당연한 결과로서 여기까지 및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현숙에게 부어넣은 부부 문제는 어떻게 보면 지당하다고 비평할 종류의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는 ‘지나쳤다’는 혹평을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었다. 인숙 자기의 성격에서 출발한 그의 부부관은 그가 여인인만치, 그리고 또한 너무 일찌기 홀몸이 된 만치 ― 좋게 말하자면 이상적이요 나쁘게 말하자면 ‘공상이 낳은 바 지나치는 친절’이었었다. 그는 복잡한 성격보다 단순한 성격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몰랐다. 복잡한 성격이 낳은 치밀한 친절보다도 단순한 성격이 낳은 불용의의 실수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몰랐다. 복잡한 성격의 주인공이 행한 행동은 모든 책임을 당자가 질 것이로되 단순한 성격의 주인의 행동에는 책임이 없고 따라서 얼마라도 용서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남편에게 대한 세밀한 친절은 안 해 되는 사람이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남편에게 바칠 필요조건으로 알았다. 요컨대 비교적 복잡한 성격을 타고난 인숙이는 자기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마땅히 남편에게 바칠 가장 큰 친절과 주의의 방법을 가장 잘 알았다. 다만 이 세상에는 자기와 다른 생활의 ‘단순한 성격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른 뿐이었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이 행한 행동에 대하여는 생각하여 본 일조차 없었다.
이 형 아래서 현숙이의 오늘날을 일군 것이었었다.
현숙이가 자기의 형 인숙이의 집에까지 이른 때는 벌써 열두시도 지난 때였었다.
시집가기 전까지의 몇몇 해를 그 집에서 자란 현숙이는 기분이며 감정상 자기 집과 다름이 없는 그 집에 이르면서 거릿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샛골로 들어서면서 대문으로 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뜰에서 빨래를 하고 잇던 시어머니(인숙의)가 현숙이를 처음 맞아 준 사람이었었다.
“에구머니, 이게 뉘냐, 소문 없이 나들이를 왜?”
노파는 빨래방망이를 집어던지며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직까지 현숙이의 마음에 있던 어떤 주저는 노파의 첫번 태도에 온전히 사라져 버렸다 자기는 . 그 집에 대하여 손님일까 혹은 한집안 사람일까. 이제 자기는 그 집에 손님의 태도로써 들어설까, 혹은 몇 해를 그 집에서 자란 그 집 딸의 태도로 들어설까. 비록 자기의 친정이라 할지라도 일단 출가하였던 딸이 돌아올 때는 그 집의 한 손님에 다름없을 것이었었다. 이것은 자기는 인젠 남편의 사람이지 결코 이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는 표적을 나타낸 필요상 당연히 딸 된 자가 취하여야 할 태도일 것이었었다. 남편에게 대한 친절, 남편에게 대한 대접은 당연히 옳은 안해로 하여금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하여야 할 것이었었다.
‘출가한 여자가 마음을 풀어헤치고 마주 설 수 있는 유일의 사람은 남편.’ 의식적으로 이러한 관념을 비교적 강렬히 가지고 있는 현숙이는 제 집을 떠날 때는 비록 제 형 인숙에게 만나러 가는 집에 있어서도 이제 형과 대할 태도가 이전의 처녀 시절의 태도와는 달라야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었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로는 그에게 한 자랑도 되는 대신 그 반면으로는 쓸쓸함이 또한 섞여 있다 아니할 수 없었다.
“다들 안녕하세요?”
역시 어떤 갈피를 푼 듯한 태도로써 이렇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에는 그 ‘갈피’가 어느덧 저절로 없어져 들어가는 것을 속으로 느끼면서 오히려 기뻐하였다.
“우리야 안녕하지 않구. 자 들어가라. 바빠서 가 보지도 못했지만 너의 지아비도 잘 있냐?”
“네.”
“너두 ― 참, 참 시집을 가면 모두들 조금씩 상하는데 너는 상한 줄을 모르겠구나. 재미가 어떠냐?”
현숙이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웃는구나. 재미가 있더냐? 기쁘냐? 그럴 게지. 사람 좋다, 점잖다, 돈 있다, 군 인간 없다, 인물 잘났것다 그런 사람이 재미 없어서야 재미 있는 곳이 있을라구.”
그렇습니다. 나는 행복이외다. 내 남편 되는 이는 아무 불만이며 부족이 없읍니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왜 그리 마음대로 안 되는 점이 많습니까. 행복 속에 왜 반드시 불행의 씨가 베어 있읍니까. 이 수수께끼는 어디서 풀어야 하겠읍니까 누가 풀어 . 주겠읍니까. 누구의 눈으로 보든 아무 불평도 없을 내게도 뜻안한 불행이 마치 커다란 날개와 같이 머리 위에 내려덮히니 세상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까? 현숙이는 적적히 웃었다.
“언니 계세요?”
“음 있다. 찾아 주랴?”
하면서 인숙이를 찾아서 가가로 향한 작은 문으로 나가려는 노파를 현숙이는 말렸다.
“내가 나가 보지요.”
그는 그 샛문으로 하여 언니를 만나러 가가로 나갔다.
현숙이가 가가로 나온 때는 인숙이는 마침 어떤 부인 손님에게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인숙이는 현숙이를 보았다. 때때로 부부생활의 얼마의 도움이라도 주고자 현숙이의 가정을 찾아오고 하던 인숙이는 현숙이에게는 비록 친정언니라 하나 친정 사람과 같이 보이지 않았다. 현숙이는 방긋이 한 번 웃은 뒤에 언니의 가까이로 가서 부인 손님이 고르고 있는 화장품에 눈을 던졌다.
“집을 비우고?”
형제의 새에 아무 인사도 있기 전에 인숙이는 이 말부터 물었다.
“그럼.”
“그럼? ― 값으로 말하면 이편 것이 비싸지만 써 보니깐 품질은 이 편 것이나 은 것 같습디다 ― 주부가 집을 비워 두고 다니면 되나?”
농인지 힐문인지 구별키가 힘든 이 말에 현숙이도 다만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이편 교자에 와서 앉았다.
손님을 보낸 뒤에 인숙이도 왔다. 형제에서 몇 마디의 잡담을 할 동안에 인숙이의 시어머니도 나왔다.
“너 현숙이 데리고 안방에 들어가렴. 내 방 좀 볼게.”
“참 어머님한테 그렇지 않아도 부탁을 하려고 그랬는걸요.”
“내 좀 봐 주지.”
어린 상속인 하나를 데리고 그것뿐을 유일의 촉망으로 세상을 살아 가는 과부 시어머니와 과부 며느리의 새는 세상의 말하는 바 보통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새와는 달랐다. 친어머니와 친딸 ― 그 가운데도 특별히 의가 좋은 모녀와 같았다. 둘이 다 같이 청춘 과부라 하는 점에서 생겨난 동정도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바의 고부간의 반목이라는 것을 없이 한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큰 원인은 두 사람의 성격상의 유사점이었었다. 활달하고 아무런 일에든 기탄과 갈피가 없으며 마음에 없는 일이면 말을 하든가 마음에 있는 일을 안하든가 할 줄을 모르는 그들은 그 서로 공통되는 솔직하고도 활발함에 자연히 신애함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하여 비록 고부간이라 하나 아무 거리낌이 없는 모녀와 같은 새가 된 것이었었다.
그럼 좀 “ 봐 주세요. 그렇지만 요전에같이 ― 현숙아 하하하하.”
인숙이는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웃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도 웃었다.
“요전에 아 ―.”
“얘, 요전에 어디 잠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어머니께 방을 부탁하고 나갔다가 돌아오니깐 웬 부인네가 성이 독같이 나서 찾아오더니 아 욕을들이 하겠지, 내야 영문을 알 수가 있겠니. 좌우간 후에 알아보니깐 내가 풀을 쑤어서 크림병 속에 넣어 두었더니 어머니께서 그것을 모르고 팔았다나. 그래서 그 손님이 속여먹었다고 와서 야단을 한바탕 치고 갔구나. 응 바로 이게로다.”
하면서 인숙이는 풀을 담은 크림병을 가리켰다. 현숙이도 웃었다.
“내야 네가 거기다가 풀을 담았는지 밥을 담았는지 어떻게 알겠니, 크림병이 하나 놓여 있기에 그걸 종이에 싸 주었지.”
“어머니도, 그뿐인가요? 파리제 구 원짜리 향수를 기름이라고 기껏 비싸게 받느라고 팔십 전을 받으신 일도 있지요. 십오 전짜리 분을 칠십전 받으신 일도 있지요?”
“모르는 걸 어떻게 파니? 오늘은 손님이 오기만 하면 너한테 들어가서 알게 하마.”
“참 우스워서 ―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인숙이는 아직도 우습다는 듯이 웃으면서 일어섰다. 현숙이도 따라 일어섰다.
형제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지 십오 분도 못 되지만 처음에는 ‘남의 집’이라는 일종의 가림이 있는 듯한 마음으로 들어섰던 현숙에게는 어느덧 차차 그 마음이 사라졌다. 안방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현숙이의 마음에는 어느덧 시집간 지 반 년과 동경 학창생활을 사오 년을 건너뛰어서 이전의 소녀 시대의 자기를 발견한 듯한 애연하고도 쾌활한 마음을 가슴속에 느꼈다. 그는 담벽을 기대고 미끄러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기다랗게 팔과 다리를 버티었다.
“언니. 흐 ―.”
그의 입에서는 여러 해 전에 부리던 어리광의 소리까지 나왔다.
형은 동생을 보았다. 형의 눈에도 웃음이 있었다.
“살림하기가 곤하지?”
“곤하기야.”
“곤하느니라. 몸이 곤하다는 것보다 마음이 곤하느니라. 마음을 꼭 결박한 것같이.”
현숙이는 그 말을 수고하였다. 동시에 아직껏 그다지 느껴 본 적이 없던 ‘살림살이’에 대한 자기의 것이 뜻밖에 어렵고 컸었던 것을 깨달았다. 바늘방석 ― 관대한 남편과 간단한 살림과 가정에 대한 전권을 잡고 있던 현숙이가 이론상으로 보자면 당연히 안 느낄 바의 ‘조심’이 뜻밖에 컸던 것을 현숙이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것은 바늘방석에 앉는 것과 같은 종류의 ‘조심’이었었다. 마음의 무장(武裝)을 잠시도 끌러 놓을 새가 없을이만치 조마조마하고 조심성스럽던 살림이었었다. 하루의 스물네 시간을 늘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하고 그 무장을 잠시도 풀어 본 적이 없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비평에 대하여는 끝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현숙이는 자기의 온갖 지혜를 다하여 이 이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였다. 그것은 극도로 긴장된 마음이었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이 긴장에서 즐거움과 유쾌함을 발견하는 것이었었다.
오늘 갑자기 형에게서 ‘마음이 곤하겠다’는 위로를 받을 적에 현숙이는 아직껏 느껴 보지 않았던 그 ‘곤함’이 뜻밖에 컸던 데 오히려 뜻밖이라는 생각까지 난 것이었었다.
인숙이는 웃음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게 자미느니라. 그 자미가 없으면 누가 시집을 간다디. 서로 경쟁 ― 이라면 말이 좀 변하지만 ― 좌우간 서로 마음을 잔뜩 결박을 해가지고 말하자면 그것도 투쟁이지. 그 투쟁의 재미가 없으면 시집살이란 그런 싱거운 일이 없으리라. 하기는 형은 몇 달을 해보지는 못했다만 ― 하하하하.”
사람의 생활의 가장 엄숙한 순간에 받는 생겨 나는 감정을 현숙이는 문득 느꼈다. 하하하 쾌활하게 웃는 형의 그 반면에는 몹시도 적적함을 발견치 않을 수가 없은 현숙이는 형을 따라서 웃기는커녕 아직 입가에 흐르던 웃음의 그림자조차 거두어 버렸다. 그리고 버티고 있던 다리를 가드러뜨리고 양 손을 맥없이 무릎 위에 던지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가운데는 행복된 부부생활을 하는 동생이 과부 언니에게 가지는 동정이 섞여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행복된 동생이 불행한 언니에게 대하여 장차 동정을 구하며 구원을 청하여야지 않을 수 없는 자기의 딱한 사정에 대한 근심도 섞여 있었다.
“아 ― 아.”
한 마디 쾌활하게 웃은 언니는 그 웃음의 끝을 막으려는 듯이 역시 쾌활히 한숨을 쉬었다.
현숙이는 점심도 그 집에서 먹었다.
자기의 처녀 시절을 보낸 그 집은 온갖 정리로 보아서 현숙에게는 정다운 집이었었다. 자기가 그 집을 떠난 지 반 년이 지난 지금도 가구들의 놓임놓임이며 머리맡 영창 위에 걸어 둔 사진틀이며 그 아래 자기가 손수 만들어 걸어 둔 꽃이며 장판 방에 두어 곳에 자기가 쏟았던 잉크의 자국가지 그냥 있었다.
현숙이는 거기서 풍부히 나는 자기의 처녀시절의 내음새를 맡았다. 즐겁던 약혼시절의 내음새를 맡았다.
‘서(徐)’ 이러한 허수아비가 마침내 한 개의 사람으로서 ― 더구나 그의 약혼자로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동안의 그 아름답고도 즐겁던 처녀 시절의 내음새를 풍부히 맡았다. 온몸을 녹이는 듯한 달콤한 공상에 잠겨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장래의 즐거운 결혼생활을 머리에 그리며 있던 그 시절 내음새를 풍부히 맡았다. 그 내음새는 장판 바닥에도 그냥 남아 있었다. 담벽에도 그냥 남아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문갑에는 풍부히 그냥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공상이 오늘날 마침내 현실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었다.
그것은 즐거운 가정이었었다. 남편은 안해를 사랑하였다. 안해는 남편을 사랑하였다. 그 사랑을 방해할 만한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금전의 부자유는 없었다. 군잡스런 사람도 없었다.
시집간 뒤로 그 공상과 현실의 새에 얼마의 차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었다.
그러나 처녀시절에 앉아서 모든 아름다운 공상에 잠기던 그 찰나에도 그것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리라고는 믿지 않고 거기다가 얼마의 에누리를 하더니만치 이지적인 인숙에게는 부부생활이 비록 그래도 그 공상과는 얼마의 틀림이 있다 하나 거기 대하여는 아무 불만도 품지 않았다.
‘공상을 포기하라.’ ‘현실을 끄을어올리라.’ 당연히 일어날 이러한 생각조차 그에게 생겨 보지를 않고 그 현실에 만족하였다. 그리고 그 현실을 잃지 않으려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다하여 노력하였다.
그렇거늘 오늘날 일성이라 하는 뜻하지 않은 방해물이 나타나서 현숙이의 행복된 현실에 한 점의 콤마를 찍어 놓은 것이었었다.
점심 뒤에 가벼운 기분에 잠겨서 공상에서 공상으로 뛰어다니던 현숙이는 문득 일성이를 생각하고 펄떡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약한 한숨조차 새었다.
“언니, 무슨 이야길 하세요.”
“?”
“갑갑해 견디겠소? 이야기라두 하세요.”
“한참 덤비어 댔더니 이야기 주머니가 그만 말라 버렸구나.”
그런 뒤에는 인숙이는 쾌활히 웃었다.
“그럼 내 할까?”
“하렴.”
“내니 할 이야기가 있어야지 ― 참 언니, 일성이 보셌소?”
현숙이의 입에서는 마침내 일성이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나온 방법이 몹시도 서툴렀다. 다른 이야기 같으면 이렇듯 서툴게 말을 끄을어낼 그가 아니었었지만 그의 마음의 한편 구석을 커다랗게 점령하고 있는 오늘의 이 일에 대하여뿐은 그로서도 늘 사용하는 온갖 기교를 전부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성이가 왔더냐?”
“네….”
“너희 집에?”
“네 ―.”
“그러고도 우리 집에는 오지를 않아?”
“언니한테는 안 오겠답디다.”
“왜?”
“늘 꾸지람만 한다나?”
하하하하 그 애에게도 “ . 꾸지람은 싫은 모양이군. 그렇거든 왜 꾸지람을 안 듣도록 안해.”
현숙이는 힐끗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 나타나 있는 커다란 인격 앞에 뜻하지 않고 머리를 숙였다. 같은 손위 누이라 하나 현숙이에게는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던 일성이가 이 맏누이 되는 인숙이에게는 저픔을 가지고 감히 찾아오기까지 꺼리던 것도 이 인격에 위압된 때문일 것이었 었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이 폭풍우와 같이 그의 마음을 습격하였다. 약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인숙이는 동생을 보았다.
“와서 무슨 이야길 하디?”
“무얼, 별 이야긴 없어요.”
“그럼 공연히 왔단 말인가?”
“글쎄.”
이제 인숙이가 물은 바 ‘공연히 상경을 했느냐’던 말은 또한 현숙이가 어제 저녁에 제 동생에게 향해서 묻던 그 질문이었었다. 현숙이는 일성이에게 그 질문을 하고 대답으로서는 돈 천 원의 청구를 받은 것이었었다. 그 천 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늘 형을 찾아온 현숙이는 형에게서 ‘일성이가 왜 상경을 하였느냐’는 질문에 글쎄 하는 똑똑치 않은 대답을 할 뿐이었었다.
“어머님은 안녕히 계시다디?”
“글쎄.”
“글쎄란? 그럼 물어도 안 보았니?”
“그 애는 그 새 집에 있지도 않았답디다.”
“그럼 어디 있었다디?”
봉천이라고 대답하려던 현숙이는 그만 ‘만주’라고 대답하여 버렸다.
봉천이라는 것은 현숙이에게는 입에도 내기 싫은 땅이었었다.
“만주? 만주서 ― 마적의 부하라도 됐다디?”
“….”
“그래 어머니 혼자 버려 두고 돌아다닌 것을 좀 꾸중이라도 안했니?”
현숙이는 머리를 들어서 천천히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숙이의 눈에는 원망의 기색이 있었다.
인숙이가 현숙이의 마음을 알아채었다.
“그런데, 네가 꾸지람을 한 대야 들을 애는 아니야. 참 딱한 애로군.”
형은 이만치 비평을 한 뒤에 천천히 그 문제를 집어치웠다. 그러나 현숙이는 형의 그 말을 결코 듣고 있던 바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차차 긴장되어 왔다. 인제 장차 자기 입에서 나와야 할 말 때문에 그의 마음은 마치 죽 끓듯 끓고 있었다. 천하가 태평한 듯이 쾌활히 이야기하는 형의 앞에 그 문제를 끄을어내면 형은 어떻게 대답할까. 그리고 어떻게 처리할까. 대답보다도 처리, 처리보다도 ― 그 이야기를 끄을어낼 실마리에 현숙이는 더욱 애를 썼다. 수그리고 있는 머리는 차차 더 내려왔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현숙이는 머리를 들었다 ―.
“언니.”
“왜.”
“돈 천 원만 취해 주구료.”
인숙이는 눈을 딱 바로 떴다. 그의 얼굴에도 경악의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다.
“천 원?”
“네.”
현숙이의 소리는 듣기가 힘들었다.
“무엇에 쓰려느냐?”
“좀….”
“남편의 승낙은 있느냐?”
현숙이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못 주겠다.”
그럼 못 주겠다고 한 마디로 거절한 인숙이의 말에는 동정도 침착도 없었다. 거기는 간단한 거절이 있을 따름이었었다.
세상의 만사가 이론대로 진행되는 것이라 하면 여기서 현숙이는 당연히 비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적어도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빛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시집간 동생이 처음으로 나들이를 와서 청구하는 그 돈을 사정도 알아보기도 전에 너무도 냉담하게 잡아떼는 형의 태도에 그는 당연히 반감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유린 당한 자기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라도 적어도 그는 원망의 눈초리라도 형에게 던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안하였다. 그리고 ― 머리를 깊이 가슴에 묻은 뒤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못써 안해가 남편에게 “ . 의논 없이 돈을 쓴다는 것은 못써. 그맛 지각은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럼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모양이구나.”
현숙이는 역시 대답치를 못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바를 자기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었다. 아직껏 자기는 추호만한 일일지라도 남편에게 감춘다든가 남편이 모르게 행한 일이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이 일뿐에는 예외가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결코 자기를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라 남편의 마음에 불유쾌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 그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행하는 최후의 수단이요 최선의 수단에 다름 없었다. 이윽고 현숙이는 머리를 들었다. 조금 눈물기가 있는 그의 눈은 마치 수정과 같았다.
“언니.”
“?”
“대체 그 지아버니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남편은 남편.”
인숙이의 결론은 간단하였다.
“안해라는 사람은?”
“안해는 안해.”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 관계.”
인숙이의 결론은 더욱 간단하였다. 성격의 하나기보다 오히려 환경과 성장의 차이에서 생겨 난 이 결론은 이론으로서는 당연하였지만 현숙이는 그냥 그대로 머리를 끄덕이지 못할 점이 없지 않았다. 현숙이는 다시 머리를 수그렸다.
― 언니, 당신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실언 같을지는 모르지만 부부 관계라 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 아닙니다. 일찌기 과수가 된 당신은 경험하였을 수가 없는 허다한 델리케이트한 문제가 그 안에 수없이 있읍니다. 나도 처녀 시절에는 일찌기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었읍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문제보다도 가장 델리케이트한 부부 문제는 공상과 이론뿐으로는 도저히 판단을 허락지 않는 뜻밖에 어려운 일이 많이 있읍니다. 당신이 사랑하던 이 동생도 지긋지긋한 그 문제에 부딪쳐서 고민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당신에게 얻으려고 온 것입니다.
“너 부부싸움이라도 한 모양이구나.”
현숙이는 잠자코 얼굴을 쳐다볼 뿐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안했어? 안했으면 새삼스럽게 부부 관계를 물어 볼 게 웬 일이냐?”
“언니.”
“왜?”
“부부의 화합은 어디서 생겨 날까요?”
“서로 숨김이 없는 데서.”
현숙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면 그뿐일까요?”
“그럼.”
그것은 지금부터 오 년 전 현숙이는 열여덟 일성이는 열다섯 살 난 해의 여름이었었다. 그 해의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마침 인천 어머니의 집에 현숙이는 가 있었다.
그 어느 날 그의 집에는 한 장의 전보가 왔다.
전보는커녕 보통 편지라는 것조차 인숙에게서나 오지 그 밖에서는 올 일이 없는 이 집에는 전보는 과연 뜻밖엣 것이었었다.
그 전보는 열 몇 해를 음신 불통으로 있던 현숙이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 전보에는 자기의 병의 위태함과 돈을 좀 보내라는 두 가지의 사연이 있고 발신(發信)한 곳은 봉천 송죽 여관이라 하였다.
세상의 온갖 군잡스러운 일을 초월한 듯이 아무런 일도 무심히 지내는 어머니는 역시 이 전보에도 대척치 않았다.
“봉천 있었나?”
어머니는 이 한 마디로 모든 일은 다 해결된 셈을 쳤다. 그러나 현숙이는 그렇게 무심히 지나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설혹 아버지의 얼굴조차 똑똑히 기억 못하며 아무런 정애도 가지지 않았다 하나 그래도 자기가 피를 받은 아버지에게 너무 무심히 지나는 것은 마음에 켕기었다. 더구나 객지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는 의리상 어떻게든 가 보아야 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달래어서 얼마의 돈을 준비하여 가지고 일성이와 같이 봉천을 향하여 떠났다. 그러나 그들 남매가 급기 봉천까지 도착하여 송죽 여관을 찾아갔을 때는 그의 아버지는 송죽 여관에 있지 않았다. 그는 절도라는 죄목으로 영사관 경찰의 신세를 지고 있던 것이었었다.
거기서 현숙이의 남매가 안 바는 그들의 아버지라 하는 사람은 다시 사람이 될 가망이 절대로 없는 아편장이며 그 아편의 비용을 구하기 위하여 절도 협박 공갈 구걸 , , , , 온갖 일을 다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람이며 이번에도 여관 곁방에 든 사람의 행장을 도적하고 그것이 발각되어 경찰의 손에 잡혔다 하는 것이었었다. 그런지라 짐작컨대 그가 인천 본집에 자기의 병이 위독하다고 전보를 놓은 것도 돈을 좀 어떻게 구하여 보려던 최후의 수단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여관 주인의 말로 듣더라도 그는 아무 병도 앓은 일이 없다 한다.
그 말 때문에 몹시 수치를 느낀 현숙이는 그 날 밤차로 귀국할까 하였다.
그러나 인정상 자기가 피를 받은 아버지가 이 낯선 땅에 영어의 인(囹圄人) 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여니와 알고 ― 더구나 그를 위하여 가지고 왔던 돈도 있는 이상에야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무심한 듯하였다.
그래서 우선 그날 저녁 차입을 부탁하고 이튿날 면회라도 한 번 하고 갈 양으로 그 송죽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아무리 집안을 모르고 인정을 모르고 의리를 모르고 자식조차 모르는 아버질지라도 현숙이는 자기의 심리로써 짜아내어 내일 아버지를 면회할 때에는 아버지의 눈에서도 마땅히 흐를 몇 줄기의 눈물을 예상하였다. 그리고 그 극적(劇的) 씬 때문에 현숙이의 마음에로 일종의 외로운 듯한 정애가 일어났다.
“일성아, 우리 오늘 여기서 묵고 내일 아버지나 한 번 만나 보고 가자.”
어린 동생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때에는 감격키 쉬운 시절의 처녀인 현숙이는 코까지 메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며 미음이며 이런 문제를 제외하고 어버이와 자식 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와 의리와 한 걸음 더 나가서 신뢰까지 느꼈다.
이리하여 이 남매는 봉천 송죽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가 되었다.
그날 밤 현숙이는 잘 잠이 들지 못하였다.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그 송죽 여관은 조선식의 집이었었다. 대문을 들어서서 사무실이 있고 가운데 네모난 뜰을 둘러서 조그마큼씩한 객실이 마치 진(陣)과 같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 객실에는 끝방과 첫방의 구별이 없지만 현숙이의 남매가 묵어 있는 방은 모퉁이 방이었었다.
여관에는 손님이 많았다. 옷뿐으로는 그 국적조차 분간키 힘들도록 조선옷 청복 일복 양복 등의 가지각색 옷이 다 있었으며 현숙이와 같은 여자에게는 그들의 직업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역, 밀수입, ‘만슈고로(滿州 浮浪者)’― 그들을 바라보고 현숙이는 어렴풋이 이렇게 느꼈을 뿐이었었다.
저녁 뒤에는 잠시 조용하였던 여관이 밤 열한시경부터는 다시 소요하기 시작하였다 방출입을 하였던 . 손들이 돌아들 오는 모양이었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차차 뜰에는 사람의 수효가 늘어 가고 그 가운데는 술취한 사람도 몇이 있는 모양으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거친 만주에서는 보기가 힘든 고국의 여학생이 한 명 자기네와 같은 여관에 묵어 있다는 것을 통절히 느낀 모양으로써 부러운 소리로 지껄이며 어떤 때는 현숙이의 방 앞에까지 와서 소요스럽게 굴었다. 돈을 많이 뿌려 본 자랑이며 자기의 호협한 행동이며 여자를 후리던 경험담이며 어떤 때는 정면으로 도저히 듣지를 못할 음탕스러운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런 뒤에는 우습지도 않은 일에 큰 소리로 웃고 하였다.
‘야비스럽다.’ 현숙이의 호기심을 일으키고자 지껄이는 그들의 이야기는 현숙이에게는 이 한 마디로써 비평이 끝나는 행동이었었다. 현숙이는 몇 번을 혀를 차며 속으로 성을 연거푸 내며 이리로 돌아누웠다 저리로 돌아누웠다 하였다. 이런 야만의 곳을 저녁차로 달아나 버리지 않은 후회까지 하였다.
한시가 지난 뒤에는 여관도 조용하여졌다. 때때로 멀리서 놀란 듯한 기적 소리가 들리고 저편 길 모퉁이에서 밤손님의 구루마 부르는 소리가 간간 들릴 뿐이었었다. 그러나 아까의 성가심 때문에 몹시 신경이 날카롭게 된 현숙이는 그냥 잠을 못 들었다. 아까 낮에는 몹시도 느끼던 피곤함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머리는 더욱 똑똑하여졌다. 잠이라는 것은 사람이 과연 자야 되는 것인지, 자기도 장차 언제 잠이 올 때가 있을는지 이런 생각조차 나게 되었다. 두시를 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 두시를 들은지 얼마하지 않아서 세시를 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현숙이도 마침내 잠이 들었다. 세시를 치는 소리를 들은 뒤에 좀 있다가 길에 지나가는 사람의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꿈결같이 들은 뒤에 그도 잠이 든 것이었었다.
이렇게 겨우 잠이 들게 되었던 그는 무슨 괴상한 압박을 느끼면서 화닥닥 깨었다. 정신이 들면서 보니까 무슨 천 근 같은 무게가 그의 가슴을 내려 누르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몸버둥이를 쳐 보았다. 그러나 소란스럽게 굴어서 당연히 생겨 날 창피스럼이 휙 머리의 한편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그는 다만 몸을 힘껏 트는 것으로써 그 힘을 대항하려 하였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와 같이 떨렸다.
좀 뒤에 정신을 수습하고 현숙이가 제일 첫 번으로 눈을 던진 것은 저 편에 누워 있는 동생 일성이의 위에였었다. 일성이는 숨소리 고요히 잠이 들어 있었다.
거기 얼마만치 안심을 느낀 그는 그 안심과 함께 갑자기 일어나는 공포와 설움 때문에 그 자리에 엎딘 채로 몸을 고민하듯이 떨면서 느껴울다가 새벽 아직 어두워서 일성이를 깨워 가지고 그 여관에 세음을 치르고 빠져나와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것이 현숙이의 비밀이었었다.
생각도 안하였을 때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그의 처녀는 깨어져 나갔다.
그 뒤 오 년간 현숙이는 늘 그것 때문에 남 모르게 고민하였다. 말하자면 이 너른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는 알 사람이 없는 비밀로서 자기만 발설치 않으면 세상에 뉘라서 알 길이 없는 일이로되 그렇다고 자기까지는 속일 수가 없었다. 처녀의 정조라 하는 것은 결코 그것으로써 남에게 대항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남에게 존경을 받는 무기에 쓸 것이 아니고 남편이라는 사람이 생기기까지의 시기를 자기 혼자서 감추어 가지고 혼자서 만족히 여길 것이라는 것이 현숙이의 생각이었었다. 따라서 아무리 처녀의 정조는 잃었을망정 남만 감쪽같이 속이고 남에게만 처녀로 보였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현숙이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용언에게로 시집을 간 이래로 그 생각은 나날이 더하여 갔다. 그리고 그 고민 때문에 도저히 더 참지 못하도록 어려울 때마다 탁 이 비밀을 남편의 앞에 자백하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늘 하여보았다.
그것을 자백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말하기가 힘들기는 하나 그것을 감추어 두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받을 고민을 생각하면 손쉽게 털어 내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을 한 번 자백을 하여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로되 그 뒤에 생겨 날 남편의 번민에 생각이 미칠 때에는 현숙이는 도저히 그것을 자백할 용기가 안 생겼다. 처녀로만 굳게 믿고 있던 자기의 안해가 비록 그 마음에 있어는 한 점의 티도 없는 맑은 처녀로되 몸으로써 자기이외의 다른 사내와 접한 일이 있다 하는 것은 남편 된 자의 결코 유쾌할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일생 가운데 한 번 밖에는 경험할 수가 없는 ‘상대자의 동정(童貞’)이라는 것이 벌써 다른 사람에게 밟힌 바가 되었으며 당연히 그 동정을 소유할 자기는 다만 한낱 몸집을 소유한 데 지나지 못한다 하는 것은 결코 남편 된 자의 유쾌할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삼십 년 동안을 고이고이 지켜 두었던 자기의 동정을 그대로 안해에게 바친 남편이 안해에게서 그 보수로서 동정의 제공을 받지 못하였다 하는 것은 결코 남편 된 자의 유쾌할 사실이 아닐 것이다. 만약 자기의 안해가(비록 마음에는 없었다 하나) 일찌기 다른 사내와 접한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알면은 남편 된 자의 마음은 결코 유쾌하지를 못할 것이다. 거기는 커다란 불만과 분노와 번민이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불만은 일생에 한 번 밖에는 없을 동정(童貞)에 관한 것이니만치 일생을 통하여 계속될 불만이며 또한 일생을 통하여 도저히 위로하거나 만족을 줄 수가 없는 불만일 것이다. 여기서 몇 번을 거의 입밖까지 나왔던 자백을 현숙이는 그 대번 도로 움쳐들인 것이었었다.
‘벌(罰)은 죄인에게.’ ‘비밀을 가진 여인’이라는 가장 불유쾌하고 창피하고 더럽고 따라서 불쾌한 이름을 스스로 제 위에 올려놓기로 마침내 결심치 않을 수 없은 그는 그 때문에 생겨 나는 고통도 또한 감쪽같이 감추어 가지고 자기 혼자서 괴로워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한 가지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또 한가지의 고통을 자진하여 산 현숙이는 이 두 가지의 고통 아래서 피곤한 몸과 마음을 남편의 지극한 사랑 안에 쉬며 자기도 또한 그 속죄를 겸하여 정성에 정성을 다하여 남편을 섬기던 것이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