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실달태자悉達太子: 가비라성의 왕자.

정반왕淨飯王: 부왕

파사파제부인波闍波提夫人: 태자의 이모이며 유모

야수타라비耶輸陀羅妃: 태자비

기사고-다미: 노래 잘하는 소녀

행자行者

병노인病老人

병걸인病乞人, 걸남녀乞男女, 고행자苦行者, 궁녀宮女, 전도前導, 시종, 시위갑사侍衛甲士, 갑사甲士, 가희歌姬, 무희舞姬, 나취수喇吹手, 요발수饒鈸手, 소고小鼓잡이 어릿광대, 여악사, 기타 궁속宮屬 등 다수

장소

인도 가비라

시대

상고上古 (거금 2945년 전 혹 2483년 전)

<서분序分>

편집

장場: 가비라성 북문 외

시時: 늦은 봄 정오

경景: 시원스럽게 열어 놓은 성문 안으로 왕궁과 민가, 다보탑, 기타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여다 보인다. 성문 밖 우편에는 화말花末과 노방석路傍石이 있고 좌편에는 야자와 종려수가 서있다. 성문 서측에는 무장갑사武裝甲士가 철우鐵偶와 같이 양인兩人이 대립하여 수위하고 걸인 남녀와 소아 등 7, 8인은 성벽과 노방석을 등지고 앉아서 죽은 듯 조는 듯 모두가 무상한 생의 권태를 저절로 느끼어 보이는 정경이다. 음울하고도 소조蕭條한 배광配光과 음악.

(행자行者 1인이 몸에는 칡빛의 큰 옷을 입고 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우편에서 유유하게 등장하여 졸고 있는 걸인들을 유심히 한 번 둘러보더니 무엇을 느꼈는 듯 무엇을 애상하는 듯 이윽히 섰다가 다시 고요히 점두하면서 종려나무 그늘로 조용히 들어선다)

걸인 갑 (걸인 을을 툭 치며) 이 사람 왜 이리 졸고만 앉았나. 또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동냥이라도 해야지 모진 목숨이 그래도 얻어먹고 살지 않나.

걸인 을 (졸음을 게을리 깨이는 듯) 흥 그 사람 걱정도 성화야. 그래 우리 같은 거러지들이야 무슨 생애가 그리 바빠서 경을 치게 글쎄 그놈의 부지런을 피어…… 때마침 봄철이라 사지는 노작지근하고…… (기지개를 켜며 하품) 어 참 몹시도 곤한 걸. (다시 졸기 시작)

걸인 병 그야 암 그렇지. 그렇구 말고. 하루 한때 제대로 끼니나 어떻게 얻어 먹으면 우리네 살림살이가 차라리 낫지. 안 할 말로 이 나라 상감님은 아무 걱정도 없으신 줄 아나. 아무튼 이 세상이란 천석꾼이 부자는 천석만한 걱정도 있고 만석꾼이 장자라도 만석만한 근심이 있겠지마는 우리 같은 인생이야 그야말로 만사가 천하태평이지 무얼.

걸인 갑 (보따리를 들고 벌떡 일어서며) 망할 날도적 녀석들. 뱃심이 땅두꺼비야. 그래 남의 집 개발 구유에다 밥줄을 걸어놓고 덤비는 자식들이 겨우 만사가 무슨 천하태평이야?

맹노인盲老人 아무튼 먹지 않으면 죽는 인생! 그야말로 목구녕이 원수다. 굶고야 살 수 있나. 그나마도 내 천량 없으니 남의 손에 맡겨 놓은 목숨! 집집마다 문전에 개만 짖고 구박에 천대로 죽도 사도 못하는 괴로운 팔자…… 오늘 저녁도 다행이 일수나 좋아야 손쉽게 어는 거룩한 댁 대문간에서 얻은 누룽지에 접시굽이라도 하게 될는지!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이 신세……

여걸인 갑 하기는 이런 때 마침 가락으로 어느 거룩하고 선심 있는 부자나 한분 지나갔으면, 아픈 다리품이나 좀 덜 팔게.

걸인 병 흥 그런 입에 맞는 떡이 때맞춰 있으면야 그야말로 허리띠 끌러놓고 누워 먹을 팔자이게.

여걸인 을 (무심히 좌편을 바라보다가) 응 정말 저기 누가 오는데요. 정말 훌륭한 옷을 입고……

걸인 병 참! 얘 이게 어쩐 호박이냐. 정말 됐다 됐어. 저이가 이 가비라성에서는 제일가는 장자래.

걸인 갑 흥 이자식아. 괜히 서둘지 말어. 되긴 무슨 얼어 죽는 게 돼? 저게 누군 줄 알고 그래. 노랑이야. 돼지 굴돼지. 더구나 행자行者 옷을 차려입고 사냥다니는 사라문紗羅門이야.

맹노인 왜 행자옷을 입고 사냥을 다닐까.

걸인 갑 아따 수도행자들은 자비스러운 계행戒行을 지키느라고 도무지 살생을 하지 않으니까 모든 짐승들이 행자를 보고는 달아나지 않거든요.

맹노인 오라 그러렸다. 달아나지 않는 그놈을 모두 때려잡자는 말이지. 딴은 꾀가 됐어.

걸인 갑 그래 모두 그따위 수단으로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다시피 해서 긁어 모은 구두쇠야 구두쇠.

걸인 을 그러나 제가 한 번 이리만 오면야 그야말로 기어든 업이요 입에 든 떡인데. 왜 애써 놓쳐 보낼 까닭이 있나. 아무튼 모두 들이덤벼서 한바탕 좁혀 보세나 그려.

일동 그렇지. 좋다 좋아.

걸인 갑 쉬― 온다. 와.

(일동은 모두 기갈이 자심滋甚할 형용을 꾸미고 있다. 한 장자가 종복從僕 2인을 데리고 좌편에서 등장, 그 뒤에 남녀 병신 거지 6, 7인이 쫓아오며 조르고 떼를 쓴다)

병걸인 갑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 허 이거 너무도 성가시럽군. (종복을 돌아보며) 여봐라. 이놈들을 모두 휘몰아 쫓아버려라.

병걸인 을 무어 휘몰아 쫓아버려라? 이건 사람을 사뭇……

병걸인 병 아니 그래 당신 눈에는 사람이 모두 개나 돼지 새끼로만 보이오. 함부로 휘몰아 쫓게.

종복 갑,을 이놈들아 저리 가 저리 비켜.

병걸인 갑 (장자의 앞을 막아서며) 우리는 좀 못 가겠소. 하루에 죽 한 모금도 채 못 얻어먹은 병신 거지들이야요.

병걸인 여 그저 할 수 없는 병신 불쌍한 거지들이올시다. 제발 덕분 한 푼만 적선하십쇼.

일동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 한 푼만 적선? 단 한 푼! 아따 그래라. 어 참 지독한 아토餓兎들…… 어찌도 지긋지긋이 쫓아다니며 조르는지. (돈 한 푼을 꺼내 던지며) 옛다. 이만하면 적선이겠지.

병걸인 갑 (땅에 떨어진 돈을 얼른 주어 갖고 다시 손을 내어 밀며) 모두 이것뿐입니까.

장자 그럼 한 푼 주었는데 또 무슨 적선…… 이제 그저 저리들 물러가거라.

병걸인 갑 아니올시다. 여러 주린 목숨들이 그래도 거룩하신 덕분에 죽 한 모금씩이라도 얻어 넘기게 돼야 쓰지 않겠습니까. 이걸 가지고야 어떻게 무엇으로 입에 한 번 풀칠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단 한 푼을 가지고는…… 그저 제발 덕분 모두 한 푼씩만 돌려 적선하십쇼.

일동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 허 이거 오늘 실없이 나섰다 정말 봉변이로군.

병걸인 갑 그저 한 푼씩만 던져주시면 적선이십죠. 봉변이란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자 이놈들아 그래 온 적선이란 것도 분수가 있지.

병걸인 갑 장자님께서 그까짓 몇 푼 적선하시는데 무슨 분수가 있사오리까. 그저 거룩하신 선심으로 몇 푼만 더 아끼지 마시면 되실 것을……

장자 안 돼 안 돼. 난 몰라. 이놈들 사뭇 도적놈들이지…… 그래 온 참. (종복을 보며) 얘들아 어서 가자 가. 이놈들을 가리다가는 큰일 나겠다.

일동 그저 몇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가 앞을 서고 종복들은 쫓아오는 병걸인病乞人들을 막으며 가까스로 무대 중앙까지 이르렀을 적에 아까부터 기대고 앉았던 걸인들이 모두 일어나 장자의 앞길을 막아 죽죽 늘어선다)

걸인 갑 부자님, 장자님. 쌀이나 돈이나, 돈이나 쌀이나 그저 무엇이든 되는 대로 던져 주십쇼. 어제 오늘 밥 한 술, 죽 한 모금 못 얻어먹고 모두 거리에 쓰러져 있는 불쌍한 거지들이올시다.

장자 무어 밥도 죽도 먹지 않았어? 그럼 어서들 떡을 먹어라. 무릇한 떡을.

여걸인 갑 그저 거룩하신 덕분으로 주려 죽는 목숨들을 정말 좀 살려 줍소사.

걸인 을 그저 적선하십쇼.

일동 한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 흥 무어 여기서도 또 한 푼! 아니 그래 앞에도 거지 떼 뒤에도 거지 패. 이거 원 참 점잖은 사람은 못 나다닐 세상이로군. 골목길로 숨어다니나 큰 행길로 나서 다니나 수많은 깍쟁이 떼가 궁둥이를 주울주울 쫓아다니며 “그저 돈 한 푼만 적선하십쇼” 하며 까닭없이 적선만 하다가 성가시럽게 졸라만 대니……이거 온 이놈들 등쌀에 빚걷이 한 푼 할 수가 있나. 밥 한 술 편히 앉아 먹을 틈이 있나. 이러다가는 그예 생사람이 그만 사뭇 말라 죽겠는걸. (종복들을 돌아보며) 얘들아 바짝 다가서, 빨리 가자.

(종복 갑은 장자 뒤의 거지들을 팔로 막아 물리치고 종복 을은 장자 앞에 서서 길을 헤쳐 트인다)

종복 갑,을 이놈들아 물러서 물러서래도…… 비켜 물렀거라.

일동 (기세를 합하여 부르짖으며 지껄인다) 부자님 장자님 적선합쇼. 배고픈 거러지 적선 좀 합쇼.

장자 (어찌할 수가 없는 듯) 얘들아, 너희들은 참으로 딱하고도 미욱한 놈들이로다. 내가 아까 그렇게 한 푼을 적선까지 하였는데 종시 찰거머리 모양으로 떨어지지 아니 하고 이렇게 다니고 조르기만 하니…… 아무튼 시방은 도무지 적선할 돈이 없고…… 또 갈 길이 몹시 바쁘니 제발 덕분에 물러서 좀 다오. 정말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사정이다 애걸이다.

일동 흥 사정! 애걸! 정말 한 푼만 적선하고 어서 가십쇼.

장자 온 이거 어떡하노.

맹노인 (한 손으로는 어린 소녀의 손을 이끌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잡아 더듬어 짚고 장자 앞으로 나아가 장자의 옷소매를 잡고) 시방 장자님께옵서 “사정이다 애걸이다” 하시며 자꾸 사정의 말씀만 하시니…… 그러나 정말 그 진정으로 사정하올 말씀은 이 늙고 앞 못 보는 늙은 병신, 슬하에 다만 한낱 자식이 있다가 연전 구살난拘薩難 전쟁에 나아가 살에 맞아 죽어 없어지고 인제는 의지가지 없는 몸. 어느 곳 부칠 데 없어 떠돌아다니는 한 아비와 손주! 외롭고 굶주리며 죽지 못 해 헤매이는 불쌍한 두 목숨! 제발 덕분 몇 푼만 적선하십쇼.

(장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아무 말 없이 팔을 들어 휘뿌리니 노인과 소아小兒는 땅에 엎어져 소아는 노인을 껴안고 운다. 일동은 격분하여 뒤떠든다)

일동 저런 나쁜 놈…… 무지한 놈…… 사람을 막 때린다…… 병신 노인을 막 친다…… 그 자식 짓모아라…… 때려 죽이자…… (장자에게로 들이덤빈다)

전도 갑,을 (일동의 야료함을 보고 급히 덤비어 떼어 헤치며) 왜 이래…… 이게 무슨 짓들이야.

여걸인 갑 저 무지한 이가 앞 못보는 노인을 막 쳐요.

걸인 갑 동냥은 안 주고 쪽박만 깨트린다고…… 나 온 참 별꽃 다 보겠네.

일동 그래, 부자놈은 인정도 없나.

전도 갑 (일동을 제지하며) 쉬― 떠들지 말어. (장자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보아하니 점잖은 체통에 이게 온 무슨 꼴이요. 어서 있는 대로 몇 푼씩 보시布施하고 가시요.

장자 (얼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시며) 흥 시속 인심이 그만 나날이 달라져서…… 도적놈들…… 온 언뜻하면 이런 봉변이야. (돈을 한 움큼 꺼내어 흩뿌린다.)

일동 으아―. (소리를 치며 줍는다)

(장자 종복을 데리고 쫓기듯이 우편으로 바삐 퇴장)

걸인 갑 모두들 몇 푼씩이나 주었나?

병걸인 갑 (손바닥의 돈을 헤이며) 잘 해야 한 사람 앞에 너더댓닢 꼴이니……

걸인 병 (장자가 달아나던 곳을 바라보며) 그놈의 자식이 돈 유세만 하고 함부로 버르장이를 피우고 다시는 모양인데…… 기왕이면 흠뻑 더 짜줄 걸 그랬지.

일동 하하하. 그것도 그래…… 그것 좋지…… 그럴걸 그랬지…… 그럼 시방이라도 쫓아가서…… 아주 요절을 내세……

전도 갑 쉬― 떠들지 말고 이제 그만 저리 딴 데로들 가거라. 오늘은 우리 동궁 마마께옵서 4대문 밖으로 유산행차遊散行次를 나옵시는 날이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조용조용히 물러가거라. 상감마마께옵서 특별 분부도 계옵셨고 또 이렇게 모처럼 나옵시는 행차역략行次歷略에 혹시나 이런 거러지 병신들이 길을 범하면 못쓸 터이니까…… 어서어서. (걸인들의 행구行具를 모두 집어준다)

걸인 갑 (놀라면서도 또 기쁜 듯이) 네―? 동궁마마께옵서요! 그러면 저희들도 거동구경이나 좀 합지요. 저리 한 옆에 가만히 숨어 서서……

전도 을 (일동을 향하여 고개를 험하게 내저으며) 안 돼 안 돼. (걸인을 발로 툭툭 차며) 어서어서 빨리빨리.

걸인 병 (일동을 돌아보며) 이 사람들 가세 가. (전도前導 갑과 을을 노려보며) 가라면 가지요. 그래 우리같이 천한 놈들은 거동 구경도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요. (그러면서도 두려운 듯이 뒤를 슬금슬금 돌아보며 우편으로 퇴장)

전도 갑 옳지, 어서들 가거라.

(걸인 일동 우편으로 퇴장)

전도 갑 (걸인들이 퇴장하는 것을 보고 사방을 다시 휘둘러 살피며) 인제는 더러운 것들을 거진 다 치워놓은 셈이지.

전도 을 그럼 이제 아마 행차가 이리로 납실 때도 거의 되었으니 그만 저리로 또 가보세.

(전도 갑과 을은 우편으로 퇴장. 행자가 조용히 종려수 그늘에서 나온다)

행자 (탄식이 섞인 웃음) 허허허. 이것이 이른바 수라도修羅道며 축생도畜生道며 아토餓兎며 지옥의 현출이로다. 생업에 쪼들리며 아무 여념이 없는 인간도人間道! 탐욕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삼독三毒의 그 뿌리가 이미 짙었거니 백팔의 그 번뇌를 어찌나 다― 사를고. (우편으로 천천히 퇴장하면서 “삼계열뇌 유여화택 기인엄류 감애장고 욕면윤회 막약구불” (三界熱惱 猶如火宅 基忍淹留 甘愛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구求 읊조리는 소리가 차차로 멀어진다)

―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며 천천히 막幕. ―

막간 1분 후 막이 열린다. 그동안 객석 조명은 어두운 채 고요한 음악에 싸이여 범패梵唄 소리가 멀리서 은은히 들릴 뿐. 배광配光이 점차로 밝아지는데 신비스럽고도 황홀한 정경, 무대는 잠깐 공허.

(걸인 갑 우편에서 가만히 등장)

걸인 갑 (중얼거리며 좌편으로 가서 두리번 두리번 기웃거리다가 도로 중앙에 가 서며) 그래 거지는 거동 구경도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담. 흥 저희들이 암만 그렇게 못 보게 해도 난 그예 좀 보고야 말 걸. (우편을 향하여 어서 오라는 듯이 손짓)

(걸인 을과 병 조심스러이 우편에서 등장)

걸인 을 그런데 태자님께서 어떻게 잘 나셨기에 그렇게 거룩하시고 놀라우실까.

걸인 병 하기는 소문에도 열여덟 해 전엔가 사월 팔일에 태자께서 탄생하셨을 제 상相 잘 보기로 유명한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태자님의 상을 보고 무선 유성왕輸聖王이라던가 하는 어른의 상호相好를 갖추었으니 석가왕실과 우리 가비라 나를 위하여 크게 경사로운 일이라고 무수히 치하를 하더라는데.

걸인 갑 그래 아사타 선인이 너무 기뻐서 눈물을 다 흘리더라고 하지 않던가.

걸인 병 글쎄 그러니 우리들은 비록 팔자가 기박하여 이렇게 거지꼴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마 그래도 그렇게 훌륭하시다는 태자님의 얼굴을 눈결에라도 한 번 뵙기나 해야 그래 그야말로 세상에 났었더란 보람도 있고…… 또 죽어서 저승에 가서라도 한 마디 자랑삼아 얘기해 볼 것이나 있지. 아무튼 시방 요행으로 뵈올 수 있으면 좋고 또 저엉 그렇지도 못하다면 이 자리에서 금방 맞아 죽기밖에 더 할라고.

걸인 갑 (주먹을 쥐고) 암만해 봐라. 내 그예 좀 보고야 말걸.

걸인 을 (걸인 갑과 동시에 주먹을 쥐고) 아무렴 그렇구 말구. 그렇다 뿐인가.

(우편에서 사람들이 오는 자취)

걸인 병 (우편을 쳐다보다가) 에크 그 자식들이 또 오네. 제기자 제겨. 괜히 거동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생목숨만 구치면 무얼 하나. 어서 제기세. 제겨. (허둥지둥 좌편으로 퇴장)

(걸인 갑과 을은 어리둥절해서 걸인 병을 따라 퇴장. 전도 갑과 을, 우편에서 등장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 이상도 없다는 듯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성문 안으로 퇴장. 병노인이 좌편에서 등장. 그의 용태는 너무도 늙음에 압박이 되어 극도로 쇠약하였다. 팔다리는 병고에 시달리어 참새 다리 같이 시꺼멓게 몹시도 파리해 말랐는데 허리는 굽어 땅에 닿을 듯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 배우는 아이처럼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자욱을 어렵게 떼어 놓되 죽을 힘을 다 쓰는 듯 걸음마다 헐떡거리고 한숨을 쉬다가 힘없이 쓰러진다. 머리털은 모자라서 재몽당비 같고 얼굴은 주름살이 잡혀 우굴쭈굴하고 가는 모가지 힘없이 뼈만 남은 가슴에 숙여져 있다. 전도갑과 을이 성문 안에서 황급히 등장)

전도 갑 이건 뭐야.

전도 을 어디를 가?

노인 (멍 하니 좌편을 바라보며 그리로 가려는 듯)

전도 갑 (노인을 잡아 일으키며) 어디로 가요.

전도 을 어서 가요. 어서 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시방 존엄하옵신 행차가 이리로 납시니 어서 빨리 저리로 가요.

노인 (간신히 일어나 한 걸음 걷다가 힘없이 쓰러진다)

전도 갑,을 (몹시 조급한 듯) 이거 온 큰일 났군.

전도 갑 행계行啓하옵시는 통로에 수상한 잡인은 얼신대지도 못하도록 엄중히 신칙申勅하랍시는 대전랍 분부가 계셨는데……

(태자가 종자從者들에게 시위되어 성 중앙 정문으로 등장)

시종 갑,을 (엄숙한 경필 소리) 쉬―.

(전도 갑과 을은 움찔하여 몸으로 노인을 가리며 애쓰며 국궁鞠躬한다)

태자 (노인을 주시한다. 너무도 유심하게)

(전도 갑과 을은 몹시 전율한다)

노인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일어나 국궁하는 듯 무엇을 애원하는 듯 손을 들어 합장한 채로 우편을 가리키며 입은 움직여도 말을 들리지 않고 고개짓만 억지로 하고 있다)

태자 이것이 어찌 된 일인고. 무슨 뜻인지 빨리 이르렀다.

시종 중中 빨리 아뢰어라.

(노인은 여전히 그 모양뿐 전도 갑과 을은 황공 초조하다 못하여 복지돈수伏地頓首 한다)

전도 갑 네 그저 황공하옵나이다. 저희들이 그만 그저 죽을 때라 잘못되었소이다. 저희들이 미욱하고 불회하와 이렇게 늙고 더러운 것으로 행계하옵시는 통로에 범예犯穢케 되었사오니 그저 저희들을 죽여주옵소서.

(무수돈수無數頓首)

시종 갑 고얀지고. 옥가玉駕가 지척에 계옵신데 누추한 저것이 무슨 꼴인고.

시종 을 (무서운 눈초리로 전도를 노려보며) 저 더러운 것을 빨리 물리치렸다.

태자 아니 아서라. 그런데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매우 의아한 듯)

전도 갑,을 (노인을 끌어내며) 이놈의 늙은이 어서 어서 가……

태자 (손을 들어 만류하며) 아니 아서라. 그대로 두라. (노인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측은한 듯이 한참이나 유심히 보다가) 너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되었는고.

노인 (가슴을 진정하는 듯 침묵, 잠깐 고요히 신음하는 소리로) 네 그저 이 늙은 놈도 옛날 젊었을 때에는…… (가엾은 한숨)

태자 (넌지시 점두點頭) 너도 나와 같이 젊었을 때가 있었던가.

노인 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놈도 옛날에는 든든하고도 향기로운 청춘이…… 꽃답게 산다는 기쁨이…… 있었더랍니다. (괴로운 한숨)

태자 그런데?

노인 그렇더니만 이제는 그만 그 모든 것이 꿈과 같이 다 사라지고…… (헐떡거리며 다리가 떨려 넘어지려 한다)

태자 (동정에 넘치는 듯 노인의 팔을 얼른 잡아준다)

(전도 갑과 을이 황급히 노인을 부축해 준다. 시종 일동도 모두 황급한 동작)

노인 (근근히 다시 정신을 차려서) 그러나 그러나 시방은 그만 늙고 병들어서……죽……죽어가는 인생이올시다 (잠깐 신음하다가) 응…… 응…… 그런데 당신께옵서는 어느 댁 존귀하신 서방님이시온지…… 오.

시종 갑 황공하옵게도 여기 계옵신 이 어른은 우리 가비라국의 동궁마마이신 줄로 알라.

노인 네―? (너무도 감격해하는 음성으로) 오― 우리 태자님…… 태자님……

(운다)

태자 어―너무도 가령참혹假令慘酷한 정상情相이로다. 여보라. 그러면 나의 힘으로써도 너의 저렇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것을 구해낼 수가 없을까? 혼돈이 조화된 아름다운 생활을 다시 할 수가 없을까? (구슬 목도리를 끌러주며) 이것을 받으라.

노인 태자님……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도로 사양하며) 아니올시다. 황공하오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 백골에게 그렇게 좋은 보물인들 무슨 소용이 있사오니까. 그저…… 감격하옵신 은택으로…… 한 마디 말씀을…… 죽어가는 이 늙은 놈의 마지막 사뢰는 한 마디 말씀이나 들어주옵소서. (합장하고 애원하는 듯)

태자 무슨 말인지 자세히 들을 터이니 아무쪼록 다 이르라.

노인 (정신을 가다듬는 듯) 다른 말씀이 아니오라…… 사람이란 것은 제 비록 아무러한 생활을 할지라도 결국에는 늙음이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올시다.

태자 그러면 나도 그대처럼 저렇게 늙을 것인가.

노인 (점점 숨찬 호흡) 아무렴…… 누구든지 이 세상으로…… 육체의 몸을 받아 난 이는 존비와 귀천이 없이 모두 늙음의 고통을 면할 수 없삽나이다. 건전한 자에게나…… 병들은 자에게나…… 다 같이 한 시각이 지나갈 적마다 늙음의 나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차차 올가미 지워가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이른바 사람의 말로올시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누워 잘 때나 깨었을 때나 행복스러울 때나 또 불행할 때나 시시가각으로 간단없이 늙음의 짐은 더욱더욱 무거워만 가는 것이올시다. (괴로운 호흡)

태자 늙으면 저렇게 괴로운가.

노인 (점두點頭) 네―그저…… 병들기 전에 또 죽음에 붙들리어 가는 목숨을 빼앗기기 전에는 제 아무리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늙음의 괴로운 비애를 맛보지 않을 수 없삽나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면 오래 살수록 그 사람은 오래 산 그 벌로 말미암아서 허리가 땅으로 차차 가까이 구부러져 필경에 땅 위에 꾸물거리는 버러지와 같이 되고 마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그 늙음 뒤에는 병이…… 병 뒤에는 죽음이 그만 닥쳐와서…… 으응…… (기절하다가 다시 살아나서) 응…… 인간의 육체는…… 그만 더럽게도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올시다. (비실거리며 떨고 섰다가 힘없이 쓰러져 가벼운 경련(痙攣)을 일으키며 게거품을 흘린다)

태자 이는 또 어쩐 일인고.

시종 갑 아마 병으로 저리 괴로워하는가 합니다.

태자 병으로도? 그럼 나도 필경에는 저와 같이 병이 들고 말 것이냐.

시종 갑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화합하였던 인연을 한 번 잃게 되오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병고에 걸리어 아픈 신음을 많이 하지 못할 줄로 아뢰옵나이다.

(노인이 죽는다. 일동은 놀라는 듯 시선을 모두 시체 위에 집중한다)

태자 (회의적 우울과 경이에 쌓여 긴장한 표정으로 시체를 응시하고 있다가) 또 이것은?

시종 갑 젓사오나 이것이 이른바 죽음이로소이다.

태자 죽음! 죽음! (외면을 하고 한참이나 먼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어 시체를 주시한다

(장면의 공기는 점차로 엄숙하게 긴장)

태자 (애련해 하는 표정으로 노인의 우수右手를 만져 보며) 이것이 정말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일까.

시종 갑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세상에 목숨을 받아 태어난 자는 우리 사람뿐만이 아니오라 일체 생물은 모두 났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것이오매 남자나 여자나 제 아무리 지혜롭고 존귀하고 감미롭고 아름다운 이일지라도 짧으나마 꽃다웁다는 그 청춘이 한 번 지나만 가오면 반드시 기력은 쇠약해지고 육체는 무되게 늙어 병이 드는 것이 이치라 하오며 온 세계에서 제일 최상의 큰 힘을 가지고도 여기에는 항거할 수 없사와 필경에는 무서운 죽음에게 생명이란 그것을 받치지 아니치 못하나이다.

태자 죽음! 그럼 죽는 인간은 어찌나 되는 것인고.

시종 갑 사람의 몸뚱이가 한 번 죽어 쓰러지오면 흙과 재로 변하여 버린다 하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모든 생물은 하나도 빠지지 못하고 모두 죽음의 나라로 들어가 버리오며 또 전하께옵서 시방 친히 보옵시는 이 천지간의 일체 만물은 도구 멸해버리고 마는 것이올시다. 천하만고에 신神 잘하고도 장엄하다는 저기 저 히말라야 설산雪山까지라도요…… (객석 쪽에 설산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것이 세상에 정해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로소이다.

태자 (고민 장태식) 아― 너무도 슬프고녀. 안타까운 청춘! 애욕과 환락 뒤에 너무 빨리 오는 비애와 죽음! 어허 이 세상은 공허로다. 단지 공허에 불과하도다. 이 몸 한 번 죽어지면 재가 되고 흙이 된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그 한 무더기의 재나 흙을 가리켜 나라를 이를꼬. 오 어드메뇨. 죽음은 어드메며 삶은 또 어드메뇨. 하마나 죽음 뒤에도 목숨이 다시 있어 꽃다운 청춘만을 매양 누리는 그 세계는 어드메쯤이나 있느뇨. 참말로 참말로 아 참말로 한 줌 흙만 남겨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사멸해 버린다면! 어허 설운지고. 너무도 얄궂어라. 대체 이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나’ 라는 ‘나’는 무엇이 어찌하여야 좋을 것인고. (암흑을 직면한 듯한 우울과 고민, 한참이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우두머니 서 있다)

(행자行者의 게송偈頌 소리가 우편 멀리서 은은히 들려온다)

태자 저 노래는?

시종 을 젓사오나 출가수도하는 행자가 부르는 게송 소리오이다.

태자 출가수도? 그러면 그 어른을 이리로 뫼셔 오게 하여라.

시종 네―이. (우편으로 퇴장하면서) 여보 행자, 저기 가는 재행자.

태자 출가수도! 게송! 행자! (시종 갑을 보며) 너도 저렇게 출가수도하는 행자가 부르는 게송 소리를 전일에 더러 들어본 적이 있는지.

시종 갑 여쭙기 황공하오나 소신도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소이다.

태자 응 출가수도! 행자! 게송!

(게송 소리가 점차로 가깝게 들리며 시종 을이 행자를 데리고 우편에서 등장)

태자 (행자에게 정례頂禮) 듣사오매 출가수도하신다 하오니 출가수도를 하오면 생, 노, 병, 사의 무서운 고해를 벗어날 수가 있사오리까.

행자 네 있습니다.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출가하여 수도만 하오면 나도 죽고 병드는 그 무서운 고통을 떨쳐버리고 해탈의 자유를 얻어오며 이 세간의 염애染愛로부터 벗어나서 출생간의 정법에 의하여 무상의 대도를 뚜렷이 깨우친 뒤에는 대자대비로써 고해에 헤매이는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나이다.

태자 (점두點頭)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부르신 그 노래는?

행자 네― 그 게송은 “제행諸行이 무상하오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로다”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으니 이것이 생하고 멸하는 법이로다. “생멸이 멸망하면 적멸이 위락爲樂이라라.” 생하고 멸하는 것이 하마 멸해버리면 적적료료寂寂寥寥한 것이 낙이 되리라는 게침偈針이로소이다.

태자 (환희점두歡喜點頭) 그렇습니까. 너무나 거룩하신 말씀을 많이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출가수도를 할 수는 있사오리까.

행자 그렇습니다. 아무라도 할 수 있삽나이다.

태자 정말입니까.

행자 행자는 거짓 없는 것이 한 계행이로소이다.

태자 정말! 출가수도! 오 그러나 이 인간의 무슨 일이 출가행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랴. 출가수도의 그 길이 정말 나의 찾아갈 유일한 생명의 길이로다. 삶의 길이다. 삶의 길! 이제는 출가다 출가!

시종 갑,을 (기급하며) 마마 동궁마마.

시종 갑 출가수도 그것이 온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존엄하옵신 보위를 이으옵실 마마께옵서 출가하시다니 천부당 만부당 온 천만 뜻밖에 그런 분부가 어디 있다오리까.

태자 아니다. 아니로다. 내 오래 전부터 혼자 외로이 고민도 하며 번뇌도 하였었더니라. 그렇더니만 이제 이 자리에서 나의 살아갈 밝은 길을 확실히 발견하였도다. 이 무상한 사바 인생에서야 어찌 영생과 진락眞樂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랴. 내 만일 이대로 살다가 그만 한 번 죽어지면 일개 범부 무명태자로서 북망산 거친 땅에 한 줌 흙만 보태일 뿐이니 이것을 어찌 인생의 참된 길이라 이를 수 있으랴. 무서운 생로병사는 인생에게 그림자같이 알뜰히 따르고 있는 것을 나는 시방 깨달았노라.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해탈할 길을 찾노라고 애써 헤매었거니 불행히 시방 찾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의 갈 길을 갈 뿐이니라. (행자를 보고) 행자시여 대단히 고맙습니다. (정례)

행자 태자 전하, 아무쪼록 영생의 길을 찾아가시도록 하시옵소서. (게송을 부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좌편으로 퇴장)

태자 (발을 멈추고 행자의 뒤를 바라보며 기꺼운 듯 게송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열심으로 듣고 서서 합장 정례)

(시위 일동은 매우 불안하여 하는 동작, 시종 1인이 성문 내에서 급보 등장)

시종 (태자를 향하여 최대 정례) 지급한 전갈을 아뢰나이다. 금방 야수다라耶輸陀羅 마마께옵서 아들 아기를 탄생하옵신 줄로 상달하옵나이다.

(일동 경희驚喜의 동작)

태자 내가 큰 뜻을 결정한 이 때에 야수다라는 라후라를 낳았구나. 라후라! 라후라! 이제 또 하나 풀기 어려운 계박繫縛! 단단한 결박이 이 몸에 지워지는도다. (시위 일동을 돌아보며) 그럼 아무튼 어서 바삐 궁으로 들어가자.

(일동이 성문을 향하여 걸음을 옮길 제 기사고-다미 좌편에서 물항아리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등장)

기사고-다미 기쁘시오리 아버님께옵서

즐거우시오리 어머님께옵서
그런 아드님을 두옵신
우리 상감마마께옵서는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
기쁘시오리 동궁마마시여
즐거우시오리 공주마마시여
그런 태자님을 뫼시는
우리 야수다라 공주마마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

(태자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정례)

태자 (걸음을 멈추고 기사고-다미를 유심히 보다간) 너의 이름이 무엇이라 부르느니.

기사고-다미 기사고-다미라 하옵니다.

태자 기사고-다미! 매는 곱고 아름다운 이름이로다. 너의 집은 어디며 시방을 어디로 가는 길인고.

기사고-다미 사옵기는 빛나고 영화로운 가비라성 중中이오며 시방 가옵는 길은 인간의 신음하는 네 가지 큰 괴로움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사를 여인나라 그윽한 고행림 거룩한 히말라야 영산靈山으로 감로수를 길으러 가옵는 길이로소이다.

태자 착하고 기특하도다 너의 뜻이여! 든든하고 반가웁도다. 너의 노래여! “기쁘시오리 즐거우시오리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하는 너의 그 노래는 영안영락永安永樂을 의미하는 열반이라는 말과 흡사하도다. 아마 태자의 출가! 일후의 행복을 미리 헤아리고 그것을 기리며 노래했음이 아니냐. 너의 가상한 뜻을 (영락瓔珞 을 끌러주며) 변변치 못한 이것으로써 감사하노라.

기사고-다미 (부끄러운 듯 공손히 영락을 받으며) 너무나 감격하도소이다.

(일동 거룩하고도 환희적 정경)

시종 갑 이것을 보십시오. 가비라성의 상하신민 아니 아동주졸兒童走卒…… 이렇게 철 모르는 계집 아이들까지라도 모두 거룩하옵신 전하…… 이 세상에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군림하옵실 전하의 성덕을 만만수萬萬壽로 송축하고 있지 않삽나이까. 그러하옵는데 전하께옵서 나라나 왕위도 버리시옵고 출가수도하옵시겠다는 아까의 그 분부는 황공하오나 천만부당하옵신 처분입신 줄로 아뢰나이다.

태자 흥 내가 설령 일후日後에 전륜성왕이 되어서 이 오천축五天筑을 모두 정복하여 차지해버린다고 한들 그것을 또 얼마나 그리 영구히 존속되어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마나 머지 않는 장래에 쇠멸해버릴 날도 반드시 있겠거니…… 났다가는 사라지고 만났다가고 헤어지며 우람한 부귀도 패망해버릴 날이 있고 소담스러운 영화도 사라져 없어질 때가 있나니. 내가 이 세상에 온 지 한 일에 만에 어마마마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거룩하고도 따뜻한 품을 여의고…… (목이 잠깐 메이다가) 그래도 시방은 무슨 전륜성왕 같은 헛되인 영화를 꿈꾸고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 세상의 무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종 갑 그러하오나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는 그리 출가하옵심만 고집하옵시면 만일 일후 비상한 때에 불행히 외방外邦이 이 가비라성을 침노하여 석가성족釋迦聖族까지 멸망해 버리는 지경이 있을지라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자 한 나라가 망하거나 흥하거나 쇠하거나 망하거나 흥망성쇠 그것은 모두가 한 가지 번뇌에 지나지 않나니 번뇌에 허튼 한 마당 꿈자리…… 만일에 그 번뇌의 뿌리를 오통으로 뽑아버리지 못한다며 우리 일체 중생을 영원토록 이 고해에서 벗어나갈 길이 없으리라.

내가 이미 열두 살적에 부왕마마의 차가車駕를 따라서 춘경제春耕祭를 구경하러 나아갔다가 밭이랑의 장기밥이 넘어갈 적에 두둑으로 뒤쳐지는 땅버러지들은 까막까치들의 밥거리로 목숨과 몸을 바쳐버리고 또 기승을 피우며 배불리 쪼아먹던 그 까막까치도 금방에 또다시 성난 독수리에게 채여가 하염없이 수리 밥이 되어버리는 것을 내가 역력히 서서 보았었노라. 약한 고기는 기세인 놈의 밥일세라. 가만한 쥐새끼는 날랜 고양이에게 갈퀴여 죽고 하루강아지는 억세인 범에게 물려가나니…… 이것이 이 세상의 상태이며 운명이었도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서 일체 중생을 구해내며 사해의 인류를 영겁으로 제도를 하려면은 그것은 예리한 병장기의 힘도 아니요. 억세고 참담한 전쟁의 공도 아닐지라. 다만 오직 거룩한 법력을 빌어 의지하는 수밖에는 달리 아무러한 도리도 없을지니…… 나는 그 법의 힘과 가르침을 널리 끝끝내 펴고 행하고자 함이 시방 출가의 발원이로다. 전쟁하지 않고도 온 천하를 감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의 힘 하나뿐이매 이 태자는 그 법의 왕 불타가 되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싶노라. 그러니 그 법의 가르침을 구해 얻자면 하루 바삐 출가하여 도를 닦는 이외에 달리 아무러한 길도 없는지라. 내 이제 어머니를 여의고 나라도 버리며 사랑스러운 아내도 떼쳐두고 수도의 길을 떠나려 함도 모두 대자대비의 큰 마음에서 우러나옴인 줄 알으라. (일신이 점차로 신성한 풍속으로 변하여 기이하고 성스러운 광채를 발하는 듯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 서서) 내 이 세상에 처음 났을 적부터 원지圓智가 맑고 밝은 칠학七學의 상호相好를 다투었으며 일곱 걸음을 걸어가서 두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켜 사자의 부르짖음으로 억세게 외처 부르짖은 줄로 깨우쳐지노니 곡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 호올로 높을 손! 무량한 생사도 이제 여기에 다 하였도다.

(일동은 이상한 감격에 부딪혀 저절로 땅에 엎드린다. 태자는 전신이 모두 방광放光한다. 시위 일동의 몸은 점차로 희미해 보인다. 숭고하고도 순純 종교적 음악이 한창 고조해진다.)

― 천천히 막 ―

<제1막>

편집

장場: 가비라성 동궁

시時: 여름 오전.

경景: 순 고대 인도식 장엄한 건축, 실달태자悉達太子가 편거便居하는 신궁전의 일부이다. 조각한 청홍색 대리석 원주圓柱가 무대 전면 좌우편에 액록額錄을 조성하여 서 있다. 무대 중앙에는 7, 8단의 대리석 층계인데 광은 3간이나 거의 넘을 듯, 층계 좌우 양단에는 커다란 대리석을 3중 조각으로 가선을 한 홍예 虹霓가 틀어져 있는데 심옥색深玉色, 금색, 연분홍빛이 고귀하게 서로 조화되어 아청鴉靑 하늘빛 배경에 좋은 대조로 보인다. 홍예 밖에는 만화색리萬花色裡에 종려와 염부수閻浮樹, 홍예 양측에는 열어 제쳐 놓은 황금 조입彫入한 청아색 고동비古銅扉이다. 무대 좌편에는 삼단 층계 위에 옥좌를 설치하였고 청과퇴색의 후장 무거운 금수면막錦繡面幕은 양측과 상부에 술이 달린 금색 굵은 줄로 걸어매어 있다. 옥좌 좌편에는 침실로 통하는 조그마한 출입구, 옥좌 우편에는 아치형의 커다란 지게문인데 궁전 현관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무대 우편에는 조금 깊숙이 들어간 각도로 휴게실, 그 양측에는 청색장이 반쯤 드리워 있다. 휴게실 우편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갸름하고도 높은 금색 테이블과 나즈막하고도 넓은 대리석 테이블, 조각한 의자향로 등이 삼삼오로 여기저기 배치되어 벽화와 석층계와 황내皇內 바닥에 깔은 융단과 모두 화려장미한 조화를 보인다.

향로의 향연香烟은 몇 줄기 소르르 떠오르는데 정면 홍예 양족에 금창을 들고 철상鐵像처럼 서 있는 두 갑사甲士 밖에는 무대가 텅 비었다. 멀리서 고조하던 음악소리가 점차 줄어지면서 군중의 환호만세 하는 소리, 박수 하는 소리, 노래 소리, 웃음소리 등이 정원 쪽에서 성고盛高히 일어난다. 아마나 태자의 마음을 위안시키기 위하여 성대한 원유회園遊會를 차린 듯.

(정중한 경필 소리가 나면서 칠십이 가까운 정반왕淨飯王은 근 백여 세의 마가남靡訶男 대신과 기타 2, 3인 중신에게 옹위되어 옥좌 우편 출입구에 천천히 등장)

정반왕 (수심이 만연한 태도로 대리석 층계 옆에 가 서서 옥좌 좌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쉬며) 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고. 태자의 출가할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돌릴 수 있을는지…… 아사타 선인의 말이 과연 맞으려는가. 마가남 그때 아사타 선인이 무엇이라고 말했던지 경은 자세히 기억하는가.

마가남 젓사오나 대강 기억하옵니다.

정반왕 그러면 그때 광경을 세세히 한 번 일러오라. 혹시 무슨 방편이 생각되더다도.

마가남 그때 동궁전하께옵서 탄생하셨을 적에 한 가지 기이하온 일은 하늘에게서 제석천帝釋天이 천녀를 데리고 내려와서 흰 비단 자리를 깔고 왕자를 바라보셨으며 땅에서는 아홉 마리 용이 솟아올라서 입으로 물을 뿜어 태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 드렸사오며 또 네 송이 연화가 피어올라 태자께옵서 걸음을 걸으시는 대로 발을 받들어 드렸사오며…… 그리하옵고 그 때 태자께옵서는 바람 위에 계옵신 듯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으시되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시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외치어 부르시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요.

정반왕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가남 그래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천화天花가 우수수 떨어지고 공중에서는 풍악 소리가 진동하였습니다. 그때의 그 광경을 어찌 이루 다 말씀으로 사뢰올지도. (추감追感이 몹시 새로운 듯)

정반왕 마가남 그리고 그 아사타 선인의 말은?

마가남 네 네 옳지 참. 아사타 선인의 말씀이 상법에 삼십이상三十二相만 갖추어도 전륜성왕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성군의 이름을 만고에 끼친다 하옵는데 팔십 종호種好까지 마저 갖춘 이는 그 전륜성왕의 실위室位도 초개같이 여길 뿐더러 나라나 처자도 헌신짝 같이 내어버리고 입산수도하여서 구의究意의 대각을 이루고 인천삼계人天三界의 대도사가 되어 삼계 중생을 제도하고 대우주의 큰 빛이 된다고 하였삽는데…… 그러하옵는데 (한숨) 우리 태자께옵서도 삼십이상에 팔십 종호를 갖추시옵셨다고요.

정반왕 (침통한 어조로) 마가남 그래 출가 이외에는 다시 아무 도리도 없다고 하던가.

마가남 네― 그러하옵는데 아사타 선인의 나중 말씀이 만약 마야 중전마마께옵서 길이 생존해 계옵시고 또 아무쪼록 태자께옵서 출가만 하옵시지 못하게 하오면 이 세상에서 전륜성왕으로 계옵실 수가 있을 듯도 하다고요.

정반왕 (하염없이 눈물을 지으며) 그러나 중전은 벌써 18년 전 태자 난 지 7일 만에 돌아갔으니 이제는 아비된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있어 아무리 만류하나 끝끝내 들을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아무려나 이제는 마지막으로 야수다라에게나 한 번 당부를 해볼까 하였는데…… (좌편을 보면서) 야수다라를 여기서 만나자고 벌써 아까 기별을 하였었는데 온 어째 이다지도 늦을꼬. (매우 초조하고 근심하는 얼굴)

(정원에서 환호하는 소리, 대고大鼓, 동라銅鑼, 기타 관악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파사파제부인이 양삼兩三 시녀에게 옹위되어 중앙 석계石階로 등장)

정반왕 화원에서는 유흥이 매우 짙은 모양인데 동궁은 얼마나 즐겨합디까.

파사파제 네 글쎄요…… (고개를 힘없이 숙인다)

정반왕 그러면 오늘도 역시. (실망하는 태도)

마가남 동궁마마를 위하옵시와 이렇게 훌륭한 궁전까지 지으시옵고 오늘은 꽃 잔치 내일은 달 놀이로 매일같이 동궁마마의 마음만을 위로해 돌려보시려고 하도 진념하옵심…… 국난을 당하와도 아무 충성과 힘을 바치지 못하옵고 그저 성은으로 이 나이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노신 하정下情에 죄악이 지중하옴은 너무도 황공만 할뿐이로소이다.

파사파제 오늘도 역시 어제나 다름없이 가무나 음율에는 눈도 거들떠 보시지도 않고 시녀들이 그리 권하는 술잔도 듭시지 않고 매양과 같이 무슨 근심에 잠기어 침울해 하시기만 하시겠지요.

정반왕 아무리 하여도 출가하겠다는 결심은 기어이 돌릴 수 없는 모양입디까.

파사파제 네―글쎄요. 아무튼 이 몸이 친어미가 아닌 만큼 사랑이 부족하였던 탓이겠지요.

정반왕 아따 그런 사랑 얘기는 저의 아내인 야수다라나 할 말이지 중전에게야 무슨 그리 불안스러운 사정이 있겠소.

마가남 어떻든 존엄하옵신 보위까지 던져 버리시옵고 출가입산하옵시겠다는 그 결심도 모르옵건대 여간하옵신 일이 아니온 줄로 아뢰옵나이다.

정반왕 아마나 그것도 천생 팔자라고나 이를까! 반드시 출가수도하여 그 법력으로써 일천사해一天四海를 감복하는 불타가 되리라고 선인이 예언까지 하였었다더니……

마가남 아무튼 그것은 거룩한 아사타 선인의 말씀이오매 설마 과히 거짓말도 아니올 줄로.

정반왕 과연 그러하면…… 금방이라도 선양禪讓해 주려는 이 왕위도 버리고 출가를 한다면…… 이 가비라가 장차 어찌나 될는지…… 무어 이제는 이 나라에 장래할 운명도 뻔히 보이는 일인데…… (암연暗然히 낙루落淚)

(야수다라가 양삼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좌편 침전 출입구에서 등장. 시녀와 궁녀들은 정반왕에게 국궁하고 양편으로 조금 멀리 물러선다)

야수다라 (부왕에게 국궁) 시급히 입시하랍시는 처분이 계옵셔서……

정반왕 오―내가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도 매양 근심하는 바와 같이 근일에는 태자가 주야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히 차 보이니 어버이 된 나로서는 잠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고녀.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고. 너의 생각엔 무슨 좋은 도리가 더러 있는지.

야수다라 사뢰옵기 황공하오나 저의 미천한 생각에도 태자께옵서 근일에는 행동하심이 더욱 평소와 다르시옵고 매일 삼시전三時殿에서 여러 궁녀들을 시키와 노래와 춤으로써 위로도 드려보았사오나 그런 것들은 모두 귀찮아만 여기시옵고 기나긴 밤이 다 새도록 침실에 듭시지도 않사오며 늘 우울과 비탄으로만 지내시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올른지…… 그만 좁고 여린 가슴이 무너지는 듯…… (눈물을 짓는다)

정반왕 너의 심정도 응당 그럴 것이로다. 온 궁중이 아니 온 가비라 나라 백성들까지라도 모두 그로 말미암아서 걱정이거늘…… 태자가 월초月初에 사문四門 밖으로 구경다녀온 뒤부터는 기색이 점점 달라가는 모양인데 네가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의 마음을 아무쪼록 화락하게 돌려볼 무슨 도리가 없을까.

야수다라 (국궁) 황공하오나 미욱한 소견에 무슨 도리가 있사오리까. 부왕마마께옵서 아무쪼록 좋은 도리를 분부해 주옵소서.

정반왕 내가 여러 대신과 권속들에게 신칙申飭하여 이미 왕성의 열두 대문과 서른여섯 소문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고 만약 그 문을 한 번 열면 사백리 밖까지 울리게 하는 쇠북을 달아놓았으며 밤이면은 문마다 횃불을 잡혀서 만단의 단속을 철통같이 하여 놓았으나 다만 걱정은 안으로 그의 마음을 돌이킬 아무 방법이 없으니…… 그러나 다행히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이는 오직 동궁비인 너뿐인데…… 남의 아내된 도리이매 아무쪼록 정성을 다하여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의 번뇌와 고민을 풀고 화락한 기색으로 이 나라의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하였으면 하는데……

야수다라 젓사오나 부왕마마께옵서 그런 분부를 아니계옵신들 태자마마의 지어미된 저의 몸은 새로 이 가비라성과 석가족속을 돌보온들 어찌 정성과 단심을 다 하지 않사오리까. 비록 미거하오나 부왕마마께옵서 안심하옵시도록 일심정력을 다 하오리이다.

정반왕 오― 가상하다. 기특한 말이로다. 나는 이 나라의 천병만마보다도 너의 뜻을 철성鐵城같이 굳세게 믿는 것이니 그리 알고 아무쪼록 되도록 잘해 보아라. 그러면 바로 시방이라도 물러가서……

야수다라 (국궁하면서) 그럼 물러갑니다. 다시금 황공하오나 그 일만은 과도히 염려마옵소서. (국궁하고 물러간다)

정반왕 오냐 어서 가 보아라.

(야수다라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고요히 좌편으로 퇴장)

정반왕 오 이제야 마음이 다소 좀 놓이는 걸 야수다라비가 잘 힘만 쓰면 그만 일은 과연 됨직도 하다마는…… 다행히 실달다가 생각을 관념하고 정말로 이 가비라성의 황통을 이어갈 전륜성왕이었으며…… 마가남 그야말로 그 얼마나 반가웁고 경사로울 일일까.

(중신들은 국궁)

마가남 젓사오나 성수무강聖壽無彊하옵소서. 미리 이 나라에 올 큰 경사를 축례하옵나이다.

정반왕 (화기로운 얼굴로) 과연 그리만 된다면…… 그러나 그것도 다 짐의 복이 아니라 모름지기 우러러 제석천궁에 계옵신 선왕선후께옵서 거룩하옵신 음덕을 내리사 도우셨음이겠지.

(정반왕이 환궁하려고 중신들과 함께 좌편으로 향해 걸으려 할 제 전도(前導) 1인이 중앙 석계에서 급히 등장)

전도 (정반왕을 향하여 복지伏地) 동궁마마께옵서 이리 듭실줄로 아뢰오.

(정반왕은 점두 후 발을 멈추고 태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 나취수喇吹手 2인이 정면 홍예 양측에 기착氣着 정립하여 기가 달린 기다란 퉁나발로 외마디 가락을 길게길게 분다. 소음과 인군人群이 둘려 있는 곳에 8인의 궁녀가 모두 꽃다발을 가지고 들어와서 층계와 실내에 꽃을 흩날릴 뿐이다. 장엄한 음악에 맞추어 12인의 갑사가 들어와 6명씩 석계 양측으로 갈라서서 장검을 앞으로 버쩍 높이 든다. 그 팔자형 의장도 밑을 통하여 실달태자를 선두로 가희 8인, 무희 8인, 궁녀 8인, 시종 갑사 4인, 어릿광대 4인, 소고잡이 12인, 요발수 4인, 여악공 6인, 기타 궁속 등 다수가 등장하여 위치를 찾아 기열나립記列羅立, 실달태자가 무대 중앙에 이르러 정반왕께 국궁 경례를 한 뒤에 노예들이 가져오는 의자에 시름없이 걸터앉는다. 어릿광대들은 태자를 둘러 책상다리를 하고 땅바닥에 앉는다. 음악소리는 점차로 가늘게 사라져 없어지고 침묵 정적, 소간小間)

정반왕 (반가움과 근심이 교차하는 듯 태자를 이윽히 보고 섰다가 천천히 걸어 태자의 곁으로 가서 태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오 실달다……

태자 (일어나 부왕께 공손히 국궁하고) 소신이 부왕마마께 알견謁見하옵고저 시방 대전으로 입시入侍하려 하옵던 길이옵더니……

정반왕 응 늙은 몸이 너무 외로이 팔중八重에만 깊이 들어 있어 하도나 적적하기에 자내 안으로 잠시 소풍이나 하고자 하여 나왔던 길인데…… 그런데 오늘도 저리 깊은 시름에만 쌓여 있어 보이니…… 너무 심상을 그리 괴롭게만 가지면 신색에도 좋지 않을터인데……

태자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정반왕 그래 이제 고만 그 출가하겠다는 뜻을 버리고 아무쪼록 심신을 편하고 즐겁게 갖도록 하여라.

태자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침묵)

정반왕 다시 더 한번 돌려 생각해 보아라.

파사파제 아무렴 그러셔야지요. 동궁마마 부왕마마께옵서는 저리도 춘추가 높으시옵고…… 더구나 천추만대 뒤를 깊이 길이 믿삽기는 오직 슬하의 동궁마마 한 분 뿐이옵신데…… 만일 노래老來에 하염없는 근심을 끼쳐 드리옵신다면…… 그야말로 동궁마마께옵서 일부러 불효불충한 허물을 범하옵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노신의 간절한 권청勸請이오니 동궁마마 아무쪼록 부왕마마께옵서도 만경晩境에 복락안강福樂安康하옵시도록…… 마음을 돌리시와 다시 사려해 보시옵소서.

태자 그야 모후마마께옵서 그처럼 진념 안 하옵신들 불초한 소신이오나 그만한 사려야 어찌 업사오리까마는……

파사파제 더구나 꽃 같은 청춘의 야수다라 마마가 가엾지 않사오리까.

태자 마마. 이 땅의 일체 중생이 모두 가엾고 불쌍한 목숨들이옵거든…… 어찌 반드시 가비라 왕궁 야수다라 귀비의 꽃같은 청춘만이 오직 가엾다고 이르오리까.

(정반왕과 파도파제비는 서로 시의是意하게 쳐다보며 점두, 아마 태자를 더 이상 권유할 필요도 없다는 눈치)

정반왕 흥…… 네가 정히 그리 고집을 하니 나도 더 이상 더 권유하지도 않겠노라. 그러나 다만…… 출가는 네 뜻대로 할 제 하더라도 아직은 심신을 유쾌히 가지고…… 내 이제라도 만승의 보위를 물리어 줄 것이니 아무쪼록 세간 환락을 마음껏 누리어 보아라. 과연 인간복락을 다 갖추어 맛본 뒤에 출가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 과히 늦은 일은 아니니까.

태자 아니올시다. 부왕마마. 거친 고해에도 물결을 타고 표랑부침漂浪浮沈 하는 불쌍한 중생을 제도하오려면 불초 소신의 출가가 한 찰나도 바쁘옵건마는…… 이 나라의 자고로 전래하는 유풍遺風이나마 “자식이 되어가지고 성혼하여 아들을 낳기 전에 출가함은 큰 죄악이라” 일컫사오매 부득불 왕손을 낳아 바쳐 왕위를 계승케 하옵고저 하였삽더니…… 이것 왕대를 받들 왕손 라후라가 출생하였건마는 소신이 또다시 왕위와 애욕에 얽매어 잡혀서 이내 출가치 못한다 하오면 오백 생을 거푸 드나드온들 어느 시절에 또 다시 출가할 겨를이나 있겠사오리까.

파사파제 일부러 출가의 괴로움을 찾아 애쓰느니보다는 만승천자의 부귀복락을 길이 누리어 보는 것이 좋지 않사오리까.

태자 그러나 삼계가 모든 화택火宅인데 복락의 그 평안한 자리를 부귀 속에서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애써 그 부귀라는 허풍선이에게 탐착眈着이 되어서 세간왕조 이른바 거룩한 자리에 높이 올라앉아 보온들 제 몸이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오지 못 하였으매 무서운 지옥의 초열번뇌焦熱煩惱를 어찌 다 견딜 수 있사오리까. (다소 괴로운 듯 주저하다가) 부왕마마 그리하와 소신이 출가하와 한사문이 되고자 하옵는 것은 소신 평생의 간절한 염원이오니 윤허하옵시기를 복원하옵나이다.

정반왕 (침묵 잠깐) 출가 입산 네가 출가 입산을 하다니…… 안된다. 안 될 말이다. 내가 떠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출가가 무엇이며 입산이 다 무엇이냐. 내가 만일 출가를 한다면 늙은 나는 어찌 되며 석가족釋迦族은 무엇이 되며 가비라 왕성은 뉘 것이 되란 말이냐. 그 대답을 먼첨 하여 보아라.

태자 (고민 침묵)

정반왕 왜 대답이 없을까. 무엇을 그리 주저하고 섰는고. 속히 그 대답을 좀 이르라.

태자 소신이 봉답하올 그 사연은 부왕마마께옵서 이미 통촉하옵셨을 줄로 아뢰옵나이다.

정반왕 그러면 너는 기어코 내 명을 거스르고야 말 작정인가.

태자 황공하오나 소신이 오늘날까지 한 번이라도 부왕마마께옵서 하명하옵심을 봉행치 않은 적이 없사온 줄로 아뢰옵나이다.

정반왕 (다소 안심한 듯이) 그야 암 그렇지. 출천出天의 충효를 가진 네가 군부의 명을 거역할리야…… 그러면 이제 아마 내 명령이면 무엇이든지 모두 순종하겠지.

태자 (몸을 좀 떨기는 하나 안색을 동요치 않고 두 눈만 멍하니 저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영혼은 벌써 아마 왕궁을 떠나 딴 세계에 있는 듯. 그러다가 자아로 돌아와서 부왕 전에 엎디어 공손히 절하며) 용서하옵소서. 부왕마마께옵서 그토록 진념하옵고 만류만 하옵시니 소신의 도리로써 도무지 어찌할 수 없삽나이다.

정반왕 (혼연히) 아무렴 그래야지.

태자 그런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부왕마마께옵서 소신이 출가를 발원하오므로 말미암아 하도 그리 진념하옵시거든 소신의 정상情相을 불쌍히 여기시와 소신의 달리 다시 소원하옵는 것을 이루어 주옵시면 출가할 뜻을 버리겠삽나이다.

정반왕 (반가운 기세로) 옳지 그래야지. 그러면 너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출가 말고는 모두 들어 이루어 줄 터이니 너의 소회所懷를 세세히 다 이르라.

태자 거룩하옵신 성지聖旨는 천은이 망극하옵고도 황공하도소이다. 소신의 소원은 네 가지가 있사옵는데…… 첫째 소원은 항상 씩씩하고 꽃답게 있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둘째 소원은 항상 병들지 않고 살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셋째 소원은 항상 늙지 말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넷째 소원은 죽지 않고자 하옵는 것이로소이다. 복원伏願 부왕마마 지금 사뢰온 이 네 가지 소원만을 이루어 주옵시면 출가를 하지 않고도 살겠삽나이다. 부왕마마 이 소원만 제발 이루어 주옵소서.

정반왕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한참이나 어쩔 줄 모르다가) 실달다야. 너의 소회는 잘 알았다. 그리고 가엾은 그 고충을 뼈에 사무쳐 동정도 하노라. 그러나…… 그러나 인생의 일이란 인력으로 되는 것도 있고 또한 인력으로 못하는 것도 있나니라. 그러니 그러한 헛된 생각 쓸데없는 번민은 하지 말고…… (목이 메인다)

태자 (실망하는 듯 침묵)

정반왕 (다시 기전氣轉) 실달다야. 너무 그리 낙심만 하지 말아라. 이 부요한 가비라의 국토와 거룩하고도 존엄한 역대사직과 만승천자의 영화로운 보위가 모두 다 너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랴. 그리고 또한 이 늙은 아비의 흰 터럭을 좀 살피어다오…… (느끼며) 그리고 또 저 야수다라와 라후라가 가엾지 않느냐. 아무쪼록 마음을 좀 돌리어다고. 일국의 대왕이요 태자의 아비로서 이렇게 손을 모아 (합장하며) 너에게 간원이다.

태자 (황공돈수惶恐頓首) 부왕마마 황공하오나 그만하옵소서. 그러하오나 왕자의 권위와 궁중의 부귀가 그 아무리 영화스러울지라도 소신의 눈에는 다만 그 속에서 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그것만이 보일 뿐이로소이다. 부왕마마 마마께옵서는 다만 궁중 살림의 호화로운 그것만 보시옵고 어찌하여 일체 중생의 고통하는 그 신음 소리는 듣지 못하시나이까. 나의 부모는 정반왕뿐만이 아니오라 무량한 중생이 모두 다 나의 부모이며 나의 처자는 야수다라와 라후라 뿐만이 아니오라 무량한 중생이 다 나의 처자며 골육이로소이다. 부왕마마 그리하와 소신은 불효 불충 불초하온 이 소자는 이 모든 부모와 처자와 골육을 위하여 출가수도하옵기로 결심하였소이다. 황공하오나 이 미충하정微衷下情을 통찰하여 주옵소서. (국궁)

정반왕 (노기를 띠우고 한참이나 태자를 노려보다가) 출가, 출가수도! 이 늙은 아비를 버리고 그래 기어코 출가……?

(풍악 소리가 들린다)

정반왕 (일부러 기전 화기롭게) 실달다야. 자― 그러지 말고 저 삼시전三時殿의 풍악소리나 들어보아라. (소간小間) 요량한 음율! 질탕한 풍악! 저 얼마나 좋은 소리냐.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 즐겁게 놀아라.

태자 (얼빠진 듯이 서 있다)

정반왕 (좌편으로 퇴장하려다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이키어 재삼 무슨 말을 더 다시 부탁하려다가 태자의 수상한 태도를 보고 몹시도 불안이 되는 듯 단념하는 듯 중신등에게 옹호되어 무거운 걸음을 걸어서 좌편 출입구로 퇴장)

태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번민)

― 조명과 음악소리가 점차 줄어지며 막 ―

막간 1분 30초, 객석의 조명은 어두운 채로 고요한 음악과 가희의 노래가 들린다.

“꽃이라 말하오리 달이라 이르오리

곱고 둥그올사 꽃도 달도 같아서라

지는 꽃 붉은 눈물 여윈 달 푸른 시름

붉게 붙는 푸른 불 생초목 다 타옵네”

“라후라 굵은 줄이 하마나 풀리오리

끊어도 또 옭매듭 그 이름이 사랑이라

짧은 밤 길게 잡혀 외돌고 푸돌을제

좁은 가슴 쥐여짜 피덧는 하소연은”

막이 열리면 중앙 홍예 밖으로 교교한 월색, 무대 좌우편 출입구 밖에서 암바 라잇이 들이 비추이며 군데군데 창으로 스며드는 녹색 스포트라이트의 월광이 비쳐보일 뿐 그 이외는 무대 전부가 암흑이다.

(인도 악기의 고요한 멜로디가 멀리서 은은히 들린다. 태자가 좌편 출입구에서 초연히 등장하여 월광을 띠고 중앙에 서서 침전 출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출가할 결의가 굳세게 보이는 듯 야수다라가 침전 출입구에서 고요히 등장한다. 염려艶麗하면서도 천녀天女와 같이 유한고결幽閑高潔한 품격을 갖추었다. 고요한 음악소리에 싸여 태자는 로맨틱하면서도 부부애의 진심을 가득히 담은 야수다라의 애정을 몹시도 굿기는 듯한 무량한 희열과 얼마 안 있어서 이별하게 될 쓸쓸한 비애를 느끼는 듯)

야수다라 (태자를 향하여 공손히 국궁) 부르심도 없사온데 이처럼 당돌히 출입하옴을 용서하옵소서.

태자 (몹시 애련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요하고도 또 부드럽게) 오― 야수다라 왜 아직껏 취침하지 않으셨소.

야수다라 (고요히 점두) 네 어쩐 일인지 이상하게도 별안간 가슴이 몹시 두근두근 울렁거려서요.

태자 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야수다라 (태자를 한참이나 유심히 보다가) 아마 전하께옵서는 아무 기별도 없이 이 밤 안으로 출성을 하실 작정이시지요! 아마 꼭 그렇지요!

태자 야수다라! 태자가 이제껏 출성치 못하였던 것은 애처로운 그대의 안타까운 그 눈물 그 애저에 얽매어 잡히어…… 이내 헤어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요. 그러나 이제는 태자 일신만의 부질없는 애욕으로 말미암아서 일체 중생의 고뇌함을 아니 돌볼 수가 있겠소. 시방 중생들은 어두운 길에서 헤매이며 한창 괴로워하고 있소. 그러니 얼른 그 고뇌 속에서 구해내어 영원장구한 안락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홍예 밖 화원을 내다보며) 아― 향기로운 꽃도 피었다 지며 아름다운 달도 찼다 기우나니 하물며 꽃다웁다는 인생의 청춘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왕마마를 비롯하여 일체 모든 중생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란 미끼에 걸려 생로병사의 그물에 들어가는 가엾은 물고기로다. 내 이제 여기에서 대자대비의 대원大願을 발하였노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이 고해를 벗어 건네어 영생불멸의 큰 낙을 주고 싶은 것이 오직 나의 소원이로다. 야수다라비여 그대의 마음엔 어떠하신지요. (정다웁게 야수다라를 껴안을 듯이 들여다본다)

야수다라 (잠깐 사색하는 듯) 젓사오나 전하께옵서 그토록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옵거든 그 일체 중생의 하나이온 이 야수다라의 불쌍한 정상 안타까운 가슴도 좀 살펴주옵소서. 헤아려 주옵소서. 그래서 영원한 안락을 주옵소서. 전하! 네?

태자 (무언중 부인하는 동작)

야수다라 그러면 불쌍한 야수다라는 불행히도 그 일체 중생의 테 밖으로 쫓기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정말 그러시오면 야수다라가 이 자리에서 금방 죽어 없어져도 전하께옵서는 도리어 매우 기꺼우실 줄로 믿사오니 과연 죽어 없어지라고 하고 싶으시오면 차라리 어서 죽어 없어지라고 하시옵소서. 태자 전하께옵서 생각하시는 그 고해보다도 아픈 주검이라 그리 두려워 사양하올 야수다라가 아니옵거든……(다소 히스테리컬한 기미로 서둔다)

태자 야수다라! 태자가 야수다라를 알뜰히 사랑하지 않소? 사랑하므로 아니 크게 두굿겨 사랑함으로 말미암아서 시방 우리가 받는 이 고뇌를 해탈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오!

야수다라 시방은 그리 두굿겨 사랑하옵신다 하온들 만일 한 번 이 몸을 떼쳐 버리시옵고 멀리멀리 훌쳐 떠나만 가옵시면…… 사랑을 잃은 이 몸 홀로 이 넓은 궁중에 게발 물어던진 듯이…… (목이 멘다)

태자 그야 무얼 사랑에야 때를 타며 곳을 가릴 리가 있겠소. 참된 사랑이란 때와 곳을 떠나서 영원무궁한 것일 터인데……

야수다라 그러면 전하께옵서는 기어코 이 야수다라를 버리시옵고 출가를 하실 작정이십니까? 더구나 갓낳은 핏덩이 라후라! 아빠 엄마의 얼굴도 가려 알 줄 모르는 아직도 강보의 핏덩이인 그 불쌍한 것을 그냥 내어버리시옵고 꼭 출가만 하옵실 작정이시라면…… 그 아버님 된 이의 마음은 너무도 잔인하다고 이르지 않사오리까. 전하, 전하께옵서는 눈앞에 방긋거리는 갓난아기 당신 아드님이 가엾고 사랑스럽지도 않으십니까.

태자 그야 아무렴 남다르게 가엾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기에……

야수다라 아니지요. 그것도 모두 허튼 말씀이시겠지요…… 그러면 왜 그 아기가 탄생하였다는 기별을 들으시옵고 전하께옵서는 라후라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셨어요. 라후라! 라후라라는 그 말뜻은 계박! 장애! 곧 방해물이라는 이름이 아니예요? 그러니 그처럼 당신의 아드님까지도 방해물 원수 구수仇讐로 여기시옵는데 천하고도 하잘 것 없는 이 야수다라쯤이야 어느 때 어떻게 구박에 학대를 받사올른지.

태자 아니오. 그것은…… 야수다라비가 이 태자의 마음을 잘 못 알았소.

야수다라 잘못 알았어요? 아내와 자식도 떼쳐버리시옵고 기어코 출가만 하옵시겠다는 그 마음 말씀이셔요? (침전에서 영아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기의 울음! 그렇게 거룩합신 아버님을 사모하여 섧게 우는 아기의 울음! 저 울음 소리도 전하 귀에는 귀찮고 성가시럽게만 들리시겠습지요.

태자 야수다라비여. 내 말씀을 자세히 좀 들어주시오. 날짐승 길버러지라도 제 새끼는 두굿길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야 다시 이를 바이 있겠소. 다만 그때 자식의 사랑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평생의 굳은 결심이 무디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속으로 걱정을 하던 중 부지불식간에 그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이오. “사랑하는 이에게서 떠나가지 않으면 아니 될 터인데 그 괴로움 그 구슬픔의 씨가 또 하나 불었으니 출가하는데 장애가 더 늘지 않았을까” 하는 그만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속 깊은 탄식에 섞기여 라후라라는 말이 문득 나왔던 것이오. 야수다라! 그러니 그 때의 태자의 가슴과 정경情景을 좀 헤아려주시오. 네?

야수다라 낮에는 전하의 곁에 항상 뫼시와 넌즛한 웃음에 푸른 봄철 늘어진 가락을 노래하옵고 밤에는 원앙금침 보드라운 꿈자리에 고요한 안개를 속삭이었삽더니…… 그만 라후라 아기가 탄생한 이후로는 동궁비라 일컬음도 다만 아름답게 헛되인 칭호뿐이고…… (함원含怨하는 암루暗淚에 떨리는 음성)

태자 (어쩔 줄 몰라 잠깐 기전, 실내로 잠깐 거닐다가 별안간 완이莞爾 타소打笑) 아하하. 그대의 원망은 당연하도다. 애처러운 그 가슴! 안타까운 부르짖음! 그러나 그것만이…… 베개를 같이 하고 살을 섞으며 애욕에 빠져 하둥지둥 얼크러지는 그것만이 부부의 그윽한 원정을 아니련마는. 무우수無優樹 위에 뚜렷이 솟은 달을 한마음으로 사랑하고 한 가지의 방긋이 웃는 꽃을 둘이 함께 바라보며 기쁘거나 슬프거나 갈래가 없도록 마음이 합하고 넋이 어울리는 것이 이른바 삼생연분의 참된 부부가 아니겠소? 참된 부부임의 이러하거니…… (화원꽃을 가리키며) 저를 보라. 저기 저 꽃밭! 꽃다운 향기에 미쳐 날던 한 쌍의 호접도 같은 이슬을 맑게 맛보고 같은 꽃잎에 고요히 쉬는도다. 암나비는 야수다라 그대요 숫나비는 실달태자 나라고…… 피는 봄꽃에 화락한 마음은 둘지언정 어지러운 색에 집착되지는 말어지이다. 야수다라! 그렇지 않소?

야수다라 (화성이안和聲怡顔에 반기는 미소를 띠고) 일찍이 듣지 못하옵던 반가운 말씀 비와서 궂은 밤에 보름달을 뵈옵는 듯 두긋겨 주옵시는 애처로운 이 몸 쾌생 회춘의 감로수를 먹사온 듯 금방 죽사온들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 있사오리. 이제 저의 가슴에 뭉치어 있던 그 무엇이 금방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소이다. 그럼 이제 날마다 뫼시옵고 꽃구경 달구경이나 하옵도록…… (애교를 피우면서)

(태자가 야수다라비를 가볍게 포옹, 영아의 울음 소리가 또 들린다. 시녀 1인이 침전 출입구에서 조용히 등장)

시녀 (열쩍어서 잠깐 주저하다가 넌지시 국궁) 라후라 아기가 선잠을 깨시와 엄마마마를 찾으시는 줄로 아뢰오.

야수다라 아기가 오늘은 어째 그리 선잠을 자주 깨어 보채일까.

태자 응 그러면 어서 들어가서 귀여운 우리 라후라를 보채지 않도록 하시오.

야수다라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잠깐 주저하다가) 그럼 전하께옵서도 침전으로 함께 듭시지요.

태자 (다소 주저하는 빛) 먼저 들어가시오. 나는 잠깐 좀……

야수다라 무얼요. 시방 같이 듭시지요. 이 야수다라가 그렇게 보기 싫으십니까. 어서 어서 들어가십소서. (평생 용기를 다 쓰는 듯한 팔로 태자의 허리를 껴안고 떼어밀어 침전으로 들어간다)

― 음악 고조, 태자가 침실로 들어가며 막 ―

<제2막>

편집

: 실달태자궁 침전.

: 전막의 심야 달밤.

: 정면에는 청홍색 대리석 원주가 몇 개 서 있고 그 중앙 근처에 태자와 비의 기거하는 상탑床榻이 놓여 있다. 우편으로는 별전別殿으로 통하는 소문이요 좌편 후면에 정원으로부터 들어오는 계단문 우편으로 아치형 전망창, 창 밖으로 정원의 기화요초琪花瑤草와 멀리 설산이 보인다.

군데군데 청홍등 불빛이 근심스럽게 꺼물거릴 뿐인데 화려하던 낙원이 음산한 시체로 화한 듯 시녀와 가희와 무희는 모두 송장처럼 여기저기 쓰러지고 엎어져 팔다리를 함부로 내어놓고 혹은 침을 흘리고 혹은 이를 갈며 혹은 군소리를 하며 갖은 추태를 드러내고 있다.

(태자가 부시시 일어나 실내 광경을 두루 한참이나 여겨본다)

태자 (별안간 몸서리를 치며) 송장! 송장! 여기도 송장 저기도 백골 아…… 무서운 무덤! 사바! 지옥! (전망창 앞으로 쫓긴 듯이 달아난다. 한참이나 고민, 달빛에 은은히 보이는 설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엇을 결심하는 듯 별안간 주먹을 힘있게 쥐며) 오― 세상의 환락이란 이와 같이 모두 더럽고 헛된 것이다. 나는 시방 출세간의 무위진락無爲眞樂을 구하여 오…… 오냐 가자. 설산으로 가자. 기어코 설산으로 가자. 히말라야 설산이 나를 부른다. (휙 돌아서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향하여 돌진하다가 야수다라 침상 앞에 이르러 문득 발을 멈추고 다소 주저하면서) 아기와 엄마는 고요히 잠이 들었도다. (라후라를 끌어안고 뺨이라도 대어 보아 최후의 이별을 하려는 듯 하다가 다시 단념하는 듯) 아서라 그만 두어라. 라후라가 만일 잠이 깨어서 울든지 하여 야수다라마저 잠이 깨이게 되면 이 밤으로 떠날 이 길에 또 방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시방은 박정하나마 무언의 고별…… 차라리 은애恩愛를 버리고 무위에 들어서 불과佛果를 깨우친 뒤에 다시 만나보리라. (걸어 나가려 한다)

야수다라 (얕은 잠이 깬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더니 무엇이 반갑고 다행한 듯) 오! 전하 여기 계십니까. 나는 정말…… 그런데 이렇게 밤이 깊도록 왜 취침하지 않으시고 자리에 일어나 계십니까.

태자 (어색하게) 아까 잠깐 잠이 깨었다가 시방 막 다시 누우려고 하는 길이요. (자기 침상으로 간다)

야수다라 밤이 아마 늦었나 본데…… 그럼 어서 주무시지요. 아이 참 이상도 해라…… 저는 시방 어찌도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요?

태자 (시들하지 않게) 무슨 꿈을 꾸었기에?

야수다라 (태자 침상으로 가서 태자의 얼굴을 유심히 여겨보면서) 아주 참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를 치며) 아주 몸서리가 쳐지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저…… 전하께옵서 저를 그저 떼쳐버리시옵고 성을 넘어서 설산으로 도망해 들어가옵시는…… 그런 아준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에그 전하께옵서 정말 저를 버리고 가옵시면 어떡하나…… (태자의 어깨를 싸고 매어 달려 하소연하는 듯)

태자 (잠깐 침묵) 무얼 그까짓 꿈을 누가 믿겠소. 설마 하니 내가 그대를 어찌 차마 아주 버리고 갈 수야 있겠소. 그까짓 꿈…… 아무 염려 말고 잠이나 어서 잡시다. (일부러 선하품을 하며 자리에 눕는다)

야수다라 (자기 침상으로 가서 앉으며) 글쎄요…… 그 꿈이 정말 맞지 말았으면 작히나 좋겠습니까……이 야수다라가 전하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애를 태우기는 벌써 두 번째나 되어요.

태자 (미소를 띄우며) 언제 언제 두 번째나 그리 알뜰히 속을 태웠더란 말이오.

야수다라 한 번은 이번 출가하신다는 통이고……

태자 또 한 번은.

야수다라 (부끄러움을 머금은 미소) 또 한 번은 우리가 가례의 인연을 맺기 바로 그 전……

태자 (픽 웃으며) 온 참 서로 만나기도 전의 혼자 꿈타령을 누가 믿겠소.

야수다라 아니예요. 그것은 꿈타령이 아리나 정말 생시의 이야기예요.

태자 그것은 또 무슨 수수께끼인데?

야수다라 그것은요. 저…… ‘사와얀바라’ (자선식) 경기장에서요.

태자 왜요. 내가 그때 최후까지 모든 경기에 최우승을 하였었는데……

야수다라 글쎄 그러니 말이지요. 저는 높은 대상臺上 휘장 속에서 혼자 좁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었어요. “차라리 모든 경기를 중지해 버렸으면…… 혹시 불행하여 전하께서 한 가지 재주라도 다른 왕자들에게 지시게나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온종일토록 어떻게 좁은 속을 태우고 졸였던지요.

태자 그래도 최후의 승리는 내가 얻어서 이렇게 삼생의 가연을 맺게 된 것이 아니요.

야수다라 그것은 그렇게 되었지만요.

태자 그런데 무얼 사라진 옛 꿈 하소연을 이제서 하면 무슨 잠투정이시요.

야수다라 아이 참 전하도……

태자 (웃으며) 그러니 그 때는 그렇게 애를 졸이고 넋을 사루며 알뚤히 찾았던 그 인연이 이제 와서는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는 그런 하소연이지요.

야수다라 무어 꼭 그렇다는 것도 아니옵지요마는……

태자 (미소를 띄우고) 그럼 이제는 내가 출가하였다가 다시 돌아오는 꿈이나 한 번 꾸어보시요.

야수다라 (미소에 섞여 누우며) 글쎄요. 이제 그런 꿈이나 다시 한번 꾸어볼까요. (하품, 잠이 드는 듯)

(소간, 등불이 꺼물거린다)

태자 (누워 자는 체하다가 고개를 들며 야수다라의 동정을 몇 번이나 살피다가 다시 일어나) 오. 이제는 갈 때가 되었다. 출가할 제 때가 돌아왔도다. 일각이 늦으면 일각의 번민 일각의 고뇌…… 만일 또다시 이때에 떠나지 못하면 영겁의 해탈을 얻지 못하리로다. (소리 없는 눈물로 마지막 고별을 하는 듯 무대 중앙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열루熱淚를 머금은 최후의 결별. 정원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다소 석별, 계단 문턱까지 이르러 마지막 다시 돌아다본다)

라후라 (꿈을 깨인 듯 별안간에 크게 운다) 으으아아으아……

태자 (최후의 승리를 축복하는 듯, 두 팔을 힘있게 번쩍 들더니 휙 돌아서 달음박질 계단으로 내려간다)

(실내 등불이 별안간 꺼진다)

― 음악 고조, 태자가 아니 보일 때까지 천천히 막 ―

: 궁성 후문.

: 아사타월의 만월(滿月)의 날, 양력 칠 월 일 일 심야.

: 정면은 인도식 석병石屛, 중앙에 네 귀 들린 지붕 있는 소문小門, 문 우측에는 협문脇門, 문전에 철망을 걸어놓았고 횃불이 한옆에 거진 다 타 여신餘燼만 이따금 꺼물거린다. 기치旗幟와 창검 등이 병립, 소문 좌편 구석에 차익車匿의 방, 방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비치어 있다. 달빛마저 쓸쓸한 심야 정적한 정경, 성문이 가만이 열리며 실달태자 가만히 나온다.


태자 어허 다행이로다. 다행이로다. 그런데 다행한 중에도 참 신기한 일이로다. 천인의 힘으로도 열지 못한다는 이 철문이 더구나 사백리 밖까지 울리는 쇠북을 달아놓은 이 철문이 소리도 없이 불가사의하게 저절로 열리어졌으니…… 오냐 이제 궐내의 어려운 곳과 금문禁門의 경위警衛를 벗어나서 시방 이 문턱까지 넘어선 이 한 걸음이 곧 일체 중생을 고해에서 구제해내일 첫길이로다. 은애恩愛를 벗어버리고 하염없음에 들어가 처자의 쇠사슬을 끊어버릴 때는 진실로 이 때이로다. 자― 그럼 이제 어서 차익이를 찾아보아야 할 터인데…… 차익이가 있는 곳이 어디였었지? 옳지 저기 있었다. 저기야. (차익이 방 창 앞으로 가서 가만히 창을 두들기며) 차익아 차익아 얘 차익아 빨리 좀 일어나오너라. (독백) 이거 어떡하면 좋을까. (초조) 이 애 차익아!

차익 (실내에서) 으응 거기 누가 왔소? (잠 섞인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태자 (초조하던 중 일변 반가운 듯) 내다 내야.

차익 으―응 누구야 일 있거든 낼 아침에 오너라.

태자 아니 나야.

차익 내가 누구야. 알다 모르게 내가. 망할 자식 낼 아침에 오래도.

태자 (몹시 초조하며) 아니 내야. 나는 태자다 태자.

차익 (놀라워서) 네? (방문을 열고 눈을 비비고 나오면서) 아니 태자께옵서 이 밤중에 나오실 리가……

태자 쉬― 내다 내야. 정말 태자야.

차익 네― 그럼 정말! (얼결에 국궁) 정말 태자께옵서 이같이 깊은 밤에 어찌하여서 여기를.

태자 나는 이제까지 몹시 취했다가 시방 막 깬 터이라 감로수 한 모금이 몹시도 급하게 마시구 싶구나. 그래서…… 들으니 그 물은, 그 샘물은 저…… 생사를 여인 거룩한 나라에 존귀한 나라에 있다 하더라. 그러니 나는 시방 그 나라로…… 거룩한 설산 히말라야까지 가서 그 샘물을 찾아볼 터이다. 차익아 말을 그 말을 얼른 타고 갈 그 말을 빨리 좀 대령해다오. 어서어서 말을 그 말을……

차익 온 천만의 말씀! 산이 다― 무엇입니까. 이 밤중에 남 다 자는 아닌 밤중에 히말라야 설산엔 어떻게 가시며 또 무엇하러 가십니까.

태자 시방 말과 같이 감로수를 얻어 마시려고……

차익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태자께옵서 정말 그렇게 떠나가시오면 대전마마께옵서와 마가남 대신 기타 중신 아니 온 나라의 일체 신민들까지 얼마나 걱정을 하겠습니까?

태자 아니다. 나는 정말 목이 몹시 마르다. 시각이 급하다. 만일 시각이 늦으면…… 남의 눈에 뜨이면 안 될 터이니까. 차익아 어서어서 그 날랜 말을 어서 좀 끌어 오너라. (애원, 초조, 고민)

차익 안 됩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올시다. 태자께옵서 정 그렇게 분부가 계옵시면 구실이 마부인 이 차익이 타옵실 말만을 하는 수 없이 대령하겠사오나…… 암만 해도 마가남 대신께 한 마디 여쭈어 보옵고……

태자 (별안간 위엄 있는 동작을 갖추며) 괴이한지고. 너는 내 영을 거역하느냐.

차익 아, 안, 아니올시다. 그, 그럴 리가.

태자 그러면 잔말 말고 어서 바삐 그 간다가란 말을 이리로 끌어오너라.

차익 네 저…… 마가남 대신께옵서 분부가 계옵셨는데…… (머리를 긁으며 매우 주저한다)

태자 분부? 무슨 분부! 태자가 나오거든 얼른 말을 대령하라는 분부이냐?

차익 아니올시다. 도무지 말을 드리지 말으랍셨는데……

태자 흥 너는 참 미욱한 놈이로다. 그래 이놈아 생각해 보아라. 네가 그리 몹시 무서워하는 그 마가남 대감도 나에게는 하잘 것 없는 한낱 신하야. 그래 너는 신하의 말만 그리 장하게 듣고 이 태자의 영은 종시 거역할 터이란 말이냐.

(일부러 성난 얼굴로 차익을 노려보며) 그래 그런 법도 더러 있을 수 있을까.

차익 (황공돈수) 황공하올시다. 그럴 리가……

태자 그러면?

차익 (눈물을 씻으며) 그런데 황공하오나 어리실 때부터 한 번도 이 차익이 놈을 꾸중하시던 일이 없으신 태자께옵서 여간하신 일이 아니옵시면 이처럼 역정을 내실 리가 없으신데…… (다소 주저 사색하다가 결심) 네 끌어옵지요. 날랜 말을 즉각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어디까지옵든지 뫼시고라고 가겠습니다. (훌쩍이며 우편으로 퇴장)

태자 (차익의 가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충복이로다. 차익은 순진한 충복이로다. 그런데 어서 바삐 이 도성을 벗어나 이 밤 안으로 간다기강까지…… 간다기강이 몇 리라더라? 응 이백여 리! 암만 이백여 리라도 날랜 말로 질풍같이 달려만 가면……

(차익이가 황금비 산호 안장 진홍 부담의 백마 간다가乾陟를 이끌고 우편에서 등장)

차익 말을 대령하였습니다.

태자 어두운 밤에 수고하였다. (말머리를 만지며) 간다가야! 간다가야! 부왕마마께옵서는 너를 타옵시고 일찍이 전지戰地로 달리어 왕래하옵시며 여러 번 승리에 수많은 축배를 듭시었지. 간다가야! 그럴 적마다 네 등의 수고는 얼마며 네 발의 공로는 또 얼마였겠느냐. 그런데 간다가야! 나는 시방 8만1천 대마군에게 열겹 스무겹 포위를 당하여 가는 생명이 위기일발에 서 있다. 간다가야! 이때를 당하여 나를 한 번만 도와다고. 나를 구해다고. 나는 너의 힘을 빌어서 지혜의 칼날로 마군을 무찌르고 남아 대장부의 웅도가 만고에 빛나는 큰 승리를! 승리의 노래를 부르려 한다. 아무쪼록 힘껏 정성껏 달리어다오. 내가 다행히 승리만 하는 날이면 너희들 축생의 무리에게까지도 무상의 복락을 누릴 날이 있게 하리라. 간다가야! 힘껏 달려다오.

(건척乾陟이 머리를 수그리고 굽을 치며 발로 땅을 긁는다)

차익 머지 않은 장래 전하께옵서 보위에 오르옵시는 기꺼운 날에 이 말의 영광스러운 고삐를 잡아보려고 주소晝宵로 벼르며 축수하옵던 것이…… 그만 천만 뜻밖에 이렇게 초라한 밤길을 뫼실 줄이야…… (태자의 다리에 매달려 느끼여 운다)

태자 (엄연히) 늦었다. 그런 수작은 그런 하소연은 때가 늦었다. 그런 범부를 괴롭게 하는 번뇌의 대적은 쳐서 멸해버리고 무상정편정각無上正遍正覺의 큰 열매를 너희들에게 줄 대장부는 이 구담瞿曇이다. 실달라 구담이다.

오― 이제는 출가의 첫걸음! 눈물은 부당이다. 범부의 눈물은 부당이다.

차익 네 네―. (눈물을 씻고 일어나) 그럼 어서 타십시오.

(천지가 별안간 암담하고 풍우가 소란)

태자 별안간 풍우가 대작! 차익아 우장을 빨리 준비하여라.

차익 네―이. (차익이 방으로 퇴장)

(야수다라가 몽유병자처럼 초연煍然히 열려진 성문에서 등장. 태자의 광경을 보고 경악하여 화석과 같이 우두커니 섰다가 황급히 달려와 태자에게 매어 달린다.)

야수다라 전하 태자 전하! 이 야수다라와 라후라를 버리시옵고 어디로 갑시렵니까 어디로……

태자 (민련悶憐해 하는 얼굴로 야수다라를 내려다만 볼 뿐)

야수다라 (태자를 치어다보며 몸부림 하는 듯 애소하는 듯) 나의 하늘이요 나의 생명이신 태자 전하! 못 가십니다. 못 가십니다. 당신께서 떠나가옵시면 애처로운 이 몸과 가엾은 라후라! 또 이 가비라의 모든 생명들은 어찌나되라고 하십니까.

태자 (묵연히 야수다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엄연히) 야수다라여. 나라도 망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은 죽는 것이요. 시방 나는 그것을 구제키 위하여 영원불멸의 국토와 생명을 찾아서 가는 길이니 차라리 기꺼워 할지어정 조금도 서러워는 하지 마시오.

야수다라 영원불멸의 나라? 불멸의 그 나라를 어디로 찾아가시렵니까? 멀고도 알 수 없는 그 나라! 그 나라로 태자를 떠나 보내임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뫼시고 있사옴이…… (산란한 태도) 아…… 그러함보다도 차라리 이 몸 하나가…… 없어지면…… (땅에 엎드려 운다)

태자 (야수다라 등의 번쩍이는 영락瓔珞만을 묵연 응시)

(소간 차익이 우장을 가지고 등장)

차익 (태자의 광경을 보고 섰다가 두어 걸음 태자 앞으로 가까이 가서) 차익이 대령하였습니다.

태자 (꿈을 깬 듯 구원을 얻은 듯) 오…… 옳지……

차익 (태자에게 우장을 입히고 말고삐를 잡는다)

태자 (말을 타려고 돌아서며) 야수다라! 그러면 이제 이것으로 작별이오

야수다라 (일어나 원망스럽게 태자를 쳐다보며) 기어코 떠나시렵니까? (울면서 태자의 옷을 잡고) 전하께옵서 과연 이리 떠나갑시면…… 이 몸은 금방 이 자리에서 죽고야 말 터입니다.

태자 (야수다라를 잠깐 묵연 응시, 야수다라의 손을 뿌리치며 엄연히 또 힘있게) 죽으시오. 야수다라 마음대로 죽으시오.

야수다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서) 네―?

태자 (먼 하늘을 우러러 보며) 어리석은 계집아. 물러나라.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영원히 재앙이 있을 것이다. 골육이라 친척이라 일컫는 그것도 모두 다 외도外道이다. 악마이다. (손으로 야수다라를 가리키며) 사바 속세의 어리석은 계집아.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야수다라 (엎어져 기절한다)

태자 (합장) 시방세계 제불 제보살十方世界 諸佛 諸菩薩! 구담瞿曇의 대원大願을 성취하게 하소서. (말을 타고 왕궁을 향하여 경배)

― 비장한 음악, 번개가 두어 번 번쩍 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