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의 장송곡
편집1
편집보라 빛 먼 산 위에 찬란하던 저녁 노을이 사라지며 어둑어둑한 황혼의 발자국이 스름스름 숨어드는 이층 서재 ─ 흰 담벽 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쇼팡」과「리스트」의 초상도 인제는 보이지 않는다.
벌써부터 쇠를 잠가버린 피아노 위에 단 하나 아다미에서의 두 사람의 사진이 고요히 놓여 있을 뿐, 유경의 눈을 즐겁게 할 아무런 색채도, 유경의 귀를 기쁘게 할 아무런 음향도 없는 단조로운 풍경의 서재이다.
유경은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고 영민은 유경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방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유경의 두 눈은 담뿍 눈물을 먹은채 저물어 가는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유경의 두 손은 자기 무릎 위에 엎드러진 영민의 흩으러진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영민의 입김은 확확 닳아 유경의 무릎을 덥히었고 영민의 눈물은 유경의 무릎을 자꾸만 적시었다.
황혼은 점점 더 짙으게 깃들어 오고 시간은 쉬지않고 자꾸만 흐르건만 영민과 유경은 할 말이 없다. 그저 이렇듯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고스란히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최상의 행복일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무(無)의 세계 속에서 두 사람은 단지 생리적인 호흡을 영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무의 세계는 지나간 날 아다미 여사에서 달빛 비낀 들창 가에서도 두 사람은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다만 그 하나가 행복의 전주곡(前奏曲)인데 비하여 그 하나가 행복의 장송곡(葬送曲)일 따름이 아닌가.
「죽고 싶다」
돌연 머리를 들며 영민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
그 순간, 유경은 먼 하늘 가에서 시선을 후딱 떨어뜨리며 충혈된 눈을 가진 영민의 심각한 얼굴 모습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유경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영민은 유경이와 나란히 소파에 덜썩 걸터 앉았다. 그리고 자기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유경을 꽉 안았다.
「………?」
유경이의 온 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내가…… 내가 죽으면……」
확확 퍼붓는 영민의 뜨거운 입김을 정면으로 받으며 유경은 영민의 품 안에서 영민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덤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인간은 고적하고 우주는 쓸쓸하고, 자즈러들 것같은 적막 속에서 두 줄기 고달피 애끓는 숨결만이 깃들여 있는 어둑어둑한 방 안이다.
얼마동안을 그러고 앉아서 영민의 심각한 얼굴 모습을 빤히 들여다 보다가 마침내 유경은
「아아 ──」
하는 괴로운 신음 소리와 함께 그만 영민의 품 속에 얼굴을 무섭게 부비며
「나두, 나두 죽고 싶어요!」
하였다.
영민은 유경의 머리 위에 턱을 고이고 맞은편 흰 담벼락을 무서운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음!」
2
편집다음 순간, 영민은 후딱 유경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유경은 눈을 감고 있었다. 영민은 두 손으로 유경의 얼굴을 더듬어 잡고 자기 눈 앞에 가까이 갖다 대면서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눈을, 코를, 입술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유경의 숨 소리가 자꾸만 가빠온다. 죽은 사람처럼 유경은 눈을 감고 잠고대와도 같이
「영민씨…… 죽음, 죽음 같이 죽어요! 같이……」
영민의 숨결도 자꾸만 높아지며, 힘찬 어조로
「유경이, 눈을 떠요! 눈을 뜨고……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자세히 봐요! 유경이!」
영민은 그러면서 유경의 얼굴을 흔들었다.
「……혼자서……혼자서 죽음 나는…… 나는 어떻거라구?…… 싫어요!……
같이, 영민씨와 같이 나두…… 나두 죽을 테야요!」
「유경이!」
영민은 격정에 휩쓸리며 눈물어린 유경의 얼굴을 무섭게 흔들어 댔다.
「눈을 떠요! 눈을 뜨고 나를…… 나를 똑똑히 들여다 봐요! 유경이……」
「안 봐두…… 안 봐두 다 알아요! 영민씨의, 영민씨의 그리운 모습…… 제 망막 속에 이처럼…… 이처럼 똑똑히 인박혀 있어요!…… 죽는다는 건, 죽는다는 건 정말루…… 정말루 좋은 거야요! 혼자서…… 혼자서 죽음 안돼요…… 같이…… 금동이두, 금동이두 같이 데리구 죽어야지요!」
「유경이! 눈을 떠요! 눈을 뜨고 날 한번 보아줘요!」
영민은 그만 유경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무섭게 부비면서 좍좍 울었다.
「보지 않아도 당신은……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한사람 뿐인 제 남편이야요!…… 당신의 괴로움을 덜어 드리기 위하여…… 그리구, 그리구 나 자신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일까 하구…… 당신을, 영민씨를 잊어 볼려구도 노력해 봤지만…… 유경은, 유경은 당신을 잊을 수가 도저히 없었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잊어버리기 보다는 도리어 수월해요!……」
「유경이, 용서해 줘요!…… 내가 유경일 행복스럽게 해주고…… 또 나도 행복스러워 지려구 노력하려던 내가…… 오늘 날 유경을 이와같은 불행 속에 몰아넣고 말았소!…… 유경이, 용서해요.」
「……지금 제가 아무리 괴로움을 질머지고 죽는다하여도…… 제 일생에…… 영민씨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받을 수 있은 것 만이……
유경은 그저 기쁘고 황송해요……」
「고맙소, 유경이! 오늘의 이 불행이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운명적인 불행이었다…… 유경에게는 내가…… 이 백 영민이가 떠 맡긴 불행이었소. 그러한 백 영민을 유경은 정녕 원망할 것이요!」
「아니요! 조금도…… 조금도……」
유경은 살랑살랑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인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들창 가로 가서 컴컴한 정원 넘어로 멀리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그대로 서서 내려다 보았다.
「죽는다는 건 정말 좋은 거지요?」
유경은 가만히 물었다.
「좋은 거지요!」
영민도 가만히 대답을 하였다.
「현실의 괴로움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구……」
「우리들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두 사람은 또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인제 헤어짐 영영 못 만나지요?……」
「………」
「혼자 죽음 안 돼요!」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은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는 날이라고 생각합시다!」
「꼭 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