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영혼
편집1
편집비도(比島) 작전이 끝나고 뒤이어 유황도(硫黃島) 마져 떨어지고 四(사)월에 들어가 미군이 오끼나와 본토에 상륙하자 드디어 신국(神國) 일본의 본토는 최후의 결전장(決戰場)으로서 직접 제 일선의 정면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니, 三(삼)월 一(일)일의 동경의 대폭격을 위시하여 전일본 八十(팔십) 여 개 도시는 B二十九(이십구)의 위협을 받아 무서운 화염 속에서 전전긍긍의 그날그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떡허면 전쟁에 이기느냐가 아니고 어떡허면 전쟁에 잘 지느냐가 문제였다.
四(사)월 七(칠)일, 소기(小磯) 내각은 쓰러지고 아남(阿南) 대장을 육상으로 한 영목(鈴木) 내각이 출현하자 화평파의 두목 길전(吉田茂〔길전무〕)은 군부의 독재적인 전쟁 시책을 비난하고 일본의 패망이 필연적으로 올 것을 논한 화평의견(和平意見)을 근위(近衛)를 통하여 천황에게 진언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四(사)월 十五(십오)일 마침내 헌병대에 검속을 당하는 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일본 헌병대는 전국을 통하여 소위 자유주의자의 낙인을 찍힌 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 하였다.
육 월 六( ) 상순의 제二(이)회 공판을 거쳐 六(육)월 하순 허 운옥은 제 三회 공판에서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고 七(칠)월 상순 제四(사)회 공판에서 드디어 검사에 구형대로 운옥은 사형의 판결을 받았을 때, 백 초시는 방청석에서 졸도하였다.
이날 아현동 오 창윤 내외는 공판정에 나가 보겠다는 유경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하여 붙잡아 두었다. 그만큼 집안 망신을 시켰으면 무던하지, 또 무슨 얼굴을 들고 댕기겠느냐고, 이번에는 아버지 오 창윤까지가 화를 냈다.
실상 오 창윤으로서는 아무리 관대하다손 치더라도 이 이상 더 참을 수는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닌 것이다.
「백군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그것은 나도 너 이상으로 인정을 한다. 그러나 너희들의 사랑이 아무리 참답고 아름다워도 이러한 환경 아래서는 행복된 가정을 이룩할 수는 없을 것 같애. 그것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네가 먼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는 하루 바삐 백군을 잊어 버리고 너는 너대로의 따로이 살아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
유경은 아버지 앞에 종시 머리를 숙였다. 유경은 운다. 유경의 그 심악스러운 성미가 종시 아버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울게 된 것이다.
어버이라는 것은 참 좋다. 자식된 자가 모든 허위를 버리고 진실에서 나오는 눈물을 흘릴 때, 어버이는 그 자식을 위할 수만 있다면 태산을 떠서 창해(蒼海)라도 만들어 주고 싶다.
「유경아!」
「………」
「너희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현실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이상, 아무리 괴로워도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너는 너대로의 갱생의 길을 걸어 나가야만 할 것이 아니냐? ── 그러니까 하루 바삐 백군을 잊어버리도록 노력을 해라. 그리고 준혁이가 걷는 길을 너도 걸어야 한다.
준혁은 멀지 않아서 영주와 결혼을 한다. 준혁은 지금 결코 불행해지지는 않은 것이다. 준혁은 지나간 날의 너와 운옥을 잊을려고 노력을 하였으니까.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다. 준혁은 말하자면 소생한 것이다. 곤란에 처하여 소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훌륭할 수 있는 것이다!」
「………」
「생각해 보면 백군의 노력은 눈물겨운 바가 있어. 나도 백군의 사람된 품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와 같은 환경 밑에서는 너에게 행복을 갖다 줄 남편은 될 수 없어 . 그러니까 백군을 곱게 잊어 버리고 또 결코 백군과 만날 필요도 없고……」
「저도 그래서 만나지 않았어요. ──」
「좋아, 잘 생각했어!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흐르는 법이다. 마음이 흘러서 백군의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을 때를 조용히 기다려 봐라.」
오 창윤은 외출복으로 갈아 입으며
「나는 좀 나가 보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해 봐라.」
2
편집유경은 운옥이가 검속을 당한 후, 아직껏 한 번도 영민과 만나지 않았다.
법정에서 한두 번 먼발로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 뿐이었다. 죽고 싶게 만나 보고 싶었으나 유경은 모든 냉정을 동원하여 그 간절한 마음을 꾹 눌러 왔다. 영민을 만나는 것은 영민을 더한층 극심한 고민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맺을 것이 빤했다.
지나간 날, 영민이가 유경을 만나려 하였을 때, 유경이가 종시 서잿 문을 열어주지 않던 그때의 심경과는 약간 다르다. 그때는 다소나마 영민을 나무래는 마음이 없지도 않았으나 지금의 유경의 심경은 그것이 아니다. 다소나마 영민을 나무래던 그러한 심경을 인제는 완전히 지양(止揚)해 버리고 오직 영민을 만남으로서 영민에게 줄 고민이 무서워서였다.
보통 사람과 달라 영민의 그 심각한 성격이 무서워서 가급적 영민의 시야에서 자기의 자태를 감춤으로서 영민의 행동에 분열을 일으키지 않기를 유경은 절실히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두 번 사무소에서 전화가 걸려 왔었지만 유경은 진심으로
「저는 지금 영민씨의 건강을 염려해요. 제가 조금도 허세없이 바라고 있는 것은 이 순간에 있어서 영민씨가 유경이라는 존재를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잊어버리고 금순 언니의 감형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 주세요. 저는 정말로 영민씨의 건강을 염려하는 일념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어떻게서 머리에 부상을 받았는지, 영민씨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니 저도 묻지 않겠어요. 그저, 몸만 편해 주세요. 유경을 잊어버리고 열심히, 열심히 금순 언니를 위해서 일하여 주세요!」
진심으로 유경은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영민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허탈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유경을 찾아 왔다.
현관을 열고 영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쑥 안으로 들어 섰다.
「아이, 서방님 오시네요!」
금동일 업고 현관 안에서 놀고 있던 옥순이가 소르라치게 소리를 쳤다.
「선생님, 계시냐?」
「나가셨는데요……」
「아가씨, 계시냐?」
「네, 계셔요.」
옥순이는 냉큼 뛰어 들어 갈래다가 등에 업힌 금동을 돌아 보며
「아빠, 오셨다! 금동아, 아빠가 오셨다!」
영민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금동이의 히쭉거리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이, 아빠, 무섭데요!」
옥순이는 갑자기 표정을 가다듬었다. 영민의 얼굴은 정말 살인범처럼 무섭고 심각한 표정 속에 파묻쳐 흐트러진 머리에 창백한 얼굴, 눈과 볼이 움푹 들어가서 딴 사람처럼 광대뼈가 두두러져 보였다.
영민은 벙어리처럼 손을 뻗쳐 금동이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져주었다.
「아가씨, 서방님이 오셨지요, 서방님이!」
옥순은 뛰어들어 가면서 이층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옥순이가 부른 것은 이층 아가씨였으나 방문이 탁 열리면서 나온 것은 오 창윤 부인이었다.
「누가 왔어?」
부인의 말소리가 지극히 차다.
「서방님이 오셨어요.」
영민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오랫동안 뵈옵지 못했읍니다.」
「머리를 다쳤다던데 괜찮으신가?……」
감정을 억지로 누르면서 하는 차디찬 인사의 말이었다.
「네, 염려하신 덕으로 인젠……」
그러나 부인은 좀처럼 영민을 올라 오라지는 않는다.
「저, 유경씨를 좀 만나 보게 하여 주실 수 있으면……」
3
편집「유경인 지금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 있는데요.」
영민은 묵묵히 부인의 냉정한 얼굴을 쳐다 보았다.
「몹시 아픈가요?」
부인은 그 순간, 온갖 예의를 홱 떨쳐 버리라는 듯이
「유경을 만나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였다.
「………」
영민은 후딱 머리를 들고 부인의 얼굴빛을 한번 더 자세히 살피며
「그러나 사모님, 잠깐만 만나 보게 하여 주셨으면……」
「서로가 다 체면있는 집안인데…… 그만한 경우는 알아줘야 하지 않습니까?…… 내 딸이 무엇이 부족해서 글쎄…… 무엇 때문에 석달 동안이나 시골 구석에 가서 남부끄러운 노릇을 하구 온 줄 알으시우?…… 남들은 어떻게 볼런지 몰라두 내 집안에선 금 주고도 못 바꿀 딸이요!」
참고 참아 오던 부인의 울화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래 무엇이 잘 나서 내 딸을 나무래는 거유?…… 말좀 해 봐요! 당신두 그만한 사람이면 경우를 알아 봐야지 않우? 그래 뻔히 딴 여자가 있으면서 남의 귀한 딸을 못 쓰게 만들어? 그래 놓구는 인제 와서 또 무슨 얼굴로 유경일 만나러 오는 거유? 뻔뻔스럽게! 가요! 빨리 돌아 가요!」
부인의 기가 점점 더 올라만 간다.
영민은 고개를 숙으리고 한 마디 대답도 없다. 얼마동안 대답이 없다가 이윽고 머리를 들며
「사모님, 용서하여 주십시요. 모든 책임은 변변치 못한 제게 있읍니다! 그러나 사모님, 한 번만…… 최후로 한 번만 유경씨를 만나 보고 가겠읍니다!」
영민은 조용한 어조로 애원하였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무어요? 할 말이 있거든 여기서 해요! 나한테 해 봐요!」
「사모님, 그러나 단 한 번만……」
「안 돼요! 못 만나요! 야아, 옥순아!」
부인은 홱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며 옥순을 불렀다.
「네에?」
이층 층층대에서 옥순의 대답이 날아왔다.
「손님이 가신다. 빨리 나와 현관문을 잠거라!」
「………」
「뭘 하구 있는 거야? 빨리 나와 못 잠거? ──」
그러는데 이층으로부터 유경이가 옥순이를 앞세우고 내려왔다.
「아, 유경씨!」
먼발로 유경을 바라보자 영민은 허겁지게 불렀다.
유경의 얼굴도 종잇장처럼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고 있었다.
「아, 영, 영민씨!」
유경은 입속 말로 가느다랗게 외치며 쓰러지려는 몸을 비틀비틀 층층대 난간에 간신히 의지하였다.
「어머니!」
유경은 두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절규하는듯 가리워 버렸다.
「어머니, 다시는…… 다시는 안 만날테니 한 번만……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유경은 운다.
「무엇이?……」
부인은 기가차서 유경이 앞에 막아서며
「저런 못 난 위인을 뭣 때문에 만난다는 말이야? 안 된다! 안 돼! 빨리 들어가라! 아니, 빨리 못 들어 가겠니?」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군다.
「어머니!」
유경은 와락 어머니를 부여잡았다.
「어머니의 마음, 저 잘 알아요! 다시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테야요! 오늘 한 번만 만나고는 다시는…… 영영 만나지 않아도 좋아요! 어머니, 어서 먼저 들어 가세요!」
어머니는 홱 돌아서며
「모르겠다! 넌 너 될대루 돼려므나!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난 인젠 모른다.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