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성분
편집1
편집「영민아.」
「예?」
「어쩌면 너는 네 아이 꺼정 난 유경이를 그렇게두 인정머리없이 떠내 보내느냐, 글쎄?」
남의 눈이 무서워 붙잡지 않아도 될 영민의 손목을 이끌고 신작로에서 갈라진 논두렁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 오면서 어머니는 글썽글썽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
영민은 묵묵히 걸어 갈 뿐, 아무런 대답도 없다.
「가지 말라구, 말로라두 한번 붙잡아 볼 것이지, 그처럼 몰인정하게 떠내보낸단 말이냐? 난 원 네 속을 통 알아 볼 수가 없다.」
「…………」
졋노리 때가 넘은 석양 햇볕이 꼬리를 저으며 활짝 핀 벼 이삭 위에서 바람이 불적 마다 비단결처럼 폭 넓은 무늬를 수 놓고 있었다.
「네 마음이 그렇게두 갑자기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운옥이두 운옥이지만 그래도 유경인 금동이의 어미가 아니냐? ─」
「어머니.」
「오냐, 어서 말 좀 해 보아라. 난 네 속을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어머니, 제 마음 조금두 변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유경일 한번두 붙잡질 않느냐? 그 애가 글쎄 누굴 바라구 이 벽촌에 와서 석 달 동안이나 고생을 했겠니, 글쎄?…… 그처럼 곱게 자란 서울 애가 식두 안 지난 시집에 와서 동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면서…… 어머닐 따라 논밭에 꺼정 나선 앤데……」
「어머니, 저두 다 알고 있어요. 어젯밤 아버지에게 듣구 저두 잘 알고 있어요.」
「알구 있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두 쌀쌀히 굴까?」
「어머니, 제 마음은 쌀쌀하지 않았어요. 거저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지……어머니,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내일 아침, 제 생각을 어머니께 분명히 알려 드리겠어요. 제 마음을, 저의 이 괴로운 마음은 어머니도 모르시고 아버지도 모르시고 유경이도, 운옥이도 아무도 몰라요.」
「그래두 너는 알구 있겠지?」
「그럼요. 저는 알고 있어요.」
「그럼 그걸 좀 말해 보려므나.」
「말은 못 하겠어요. 어머니.」
「왜 알구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제가 알구 있는 그 길이 과연 참된 길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결정해 놓기 전에는 한 걸음도 발을 옮겨 놓을 수가 없는 걸 어떡합니까, 어머니?」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다만 이 세상에는 두 사람의 색시를 데리구 사는 법은 없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누구가 제 아내가 되구, 누구가 어머니의 며느리가 되구 ─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그럼 무어냐?」
「현재의 제 생각으로는 유경이의 욕망두 들어 주고 싶고 운옥이의 원두 풀어주고 싶다는 말이예요.」
「그것이 그것이지 뭐냐? 애두 참 ─」
그렇다. 형식 문제에 있어서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인간제도(人間制度)의 한낱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결혼이라는 문제를 떠나 좀더 광범위한 인간성(人間性)의 규범적(規範的)인 가치 인식(價値 認識)과 좀더 깊이있는 생명력(生命力)의 창조적(創造的)인 가치 인식과의 비중(比重)에서 생기는 행동에의 부자유가 일견 인간 백 영민을 한낱 우유부단의 세계로 끌어넣는 결과를 맺었을 따름이었다.
오늘날 백 영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인간이 그의 성격에 있어서 시종일관한 명확성을 갖고 있다. 허 운옥과 오 유경을 비롯하여 오 창윤, 백 초시, 박 춘심, 장 일수, 신 성호, 김 준혁, 최 달근, 박 준길 등등 모두가 다 성격의 표현에 있어서 뚜렷한 존재이다.
그러나 백 영민만은 그리 신통하게 뚜렷하지를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욕망과 가치 판단에서 생기는 의식(意識)의 분열, 현대 문화의 복잡성과 보수적(保守的) 도덕성의 엄연한 존재와 생존 가치의 변천과 애정의 본질적 가치와 표현 가치의 변모, 등등으로 말미암은 의식의 분열이 오늘날 백 영민으로 하여금 일견 성격내지 인생관의 명확성을 상실케한 중요한 원인이 아닐 수 없었다.
2
편집그날 밤 , 영민은 운옥과 유경이가 사용하던 뜰 아래 방에서
「유경이, 유경이!」
를, 수 없이 찾으며 방안을 삥삥 돌았다.
「너무나 허전한 우주다!」
기를 쓰고 유경을 떠내보낸 영민의 그 무서운 노력이 너무나 혹독한 아픔과 쓰라림을 영민의 가슴 속에 못 박아 주었다.
「너무도 인정 머리가 없다.」
는, 어머니의 한 마디가 가슴 한 복판에 자꾸만 못질을 한다.
「너는 대체 무어냐?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유경을 그처럼 냉대하지 않으면 아니 되다었는 말이냐?」
이 너무나 허전한 공기 속에서 영민은 정말 자즈러들어서 질식할 것 같은 숨 가쁨을 무섭게 느끼는 것이다.
운옥이가 없어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 같았으나 유경이가 없어서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깨달은 영민은 절대로 아니었다. 운옥이가 영민의 앞에 나타난 직후부터 그것을 영민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운옥의 순정을 물리칠 수 있던 옛날의 영민은 아니었다. 운옥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영민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또 한편 그렇다고 해서 그「무엇이든지」라는 말 가운데 결코 「유경에 대한 자기의 애정을 희생하는 것」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 영민이 또 아니었다. 다소의 분열이 생겼을지라도 유경에 대한 영민의 애정은 절대에 가까운 그것이었다.
그러한 영민이가 오늘날 유경을 붙잡지 않은 이유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운옥을 잃어버리고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것 같고 유경을 잃어 버리고는 하루도 못살 것 같이 느껴진 자기의 감정을 영민은 실지로 저울질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운옥은 갔다. 영민은 자기의 일생이 불행해질 것을 명확히 느꼈다.
그리고 영민은 지금 생명의 공허를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거기서 영민은 다시 한번 허 운옥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과 오 유경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을 찬찬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운옥에 대한 나의 애정은?…그리고 유경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 등변 삼 각형의 二[ ] 三[ ] 절정에 서 있다 생각한 자기 자신의 애정의 성질과 깊이를 영민은 면밀하게 계산하고 규정 지어 볼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것이었다.
「대체로 한 사나이가 두 여성을……」
대체로 한 사람의 사나이가 두 사람의 여성을 동시에 똑같이 사랑할 수가 있을 것인가? 처음에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동시에 똑 같은 깊이의 애정을 가지고 두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애정의 성질이 다를 것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면 허 운옥에 대한 영민의 애정의 정제는 무엇이냐? 영민은 확실히 운 옥에게서 한 사람의 여성을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그것은 백 영민에게 있어서 전연 계산에 넣지 않았던 뜻 밖의 발견이었다. 이와 같은 한 개 이성으로서의 애정의 발견과 운옥의 헌신적인 사랑의 자태와 불행한 입장과 봉건적인 도덕성이 허 운옥이에 대한 백 영민의 애정의 종합체일것이다.
그러면 오 유경에 대한 영민의 애정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나의 순수한 입장에서 출발한 애정을 모체(母體)로 하여 성품과 교양과 취미와 인생관에서 구성된 인격의 가치 발견이 거기 있었다. 운옥에 대한 애정 가운데는 다분히 연민과 동정의 념이 혼합되어 있지만 유경에 대한 거기에는 좀더 많이 동경과 갈망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민과 동정, 이것은 유경에 대한 애정 가운데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요소인 동시에 동경과 갈망, 이것은 또한 운옥에 대한 애정 가운데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요소이다. 유경에 대한 애정에는, 그 애정을 모체로 한 인격 완성에의 갈망이 있지만 운옥에 대한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애정과 동정 밖에 없었다.
유경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책임감에서 오는 애정을 느끼는 영민이지만 운옥에 대해서는 그러한 현실적인 책임감 대신에 그저 막연한 인간적인, 환경적인, 인습적인 그것을 좀더 절실하게 느끼는 영민이었다.
3
편집그러면 영민에 대한 두 여성의 정체는 무엇이냐? ─
「나에게 대한 허 운옥의 애정은?…… 그리고 나에게 대한 오 유경의 애정은?……」
오로지 영민 한 사람을 위하여 비바람 속을 방황하면서 온갖 남성의 유혹을 물리치고 최후에는 영원의 남편 백 영민의 안부를 염려하여 중지 전선으로 허덕거리며 찾아 간 허 운옥의 애정과 단 한 사람 이상의 남성인 영민을 위하여 김 준혁 박사의 독실한 사랑과 부모의 간곡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기의 전 인격을 바쳐서 오로지 사랑을 완성시키고저 노력해 온 오 유경, 전부냐 무(無)냐의 배수(背水)의 경지를 배회하면서 결혼식도 치르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서 사회의 온갖 기반과 속박을 물리치고 남부끄러운 사생아를 둘러 지고 낯 설은 타향 탑골동을 감연히 찾아나선 오 유경의 애정과 ─ 그렇다, 이 두 여성의 애정에의 노력이야말로 그 순수성과 성실성에 있어서 어느 것을 높이 평가하고 어느 것을 낮춰 평가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두 여인이 바쳐 온 애정의 깊이와 넓이가 아니고 곧 이 두 여인이 백 영민이라는 한 개 사나이에게 바쳐 온 애정의 성질이었다. 그리고 이 애정의 성질이야말로 두 여인의 성격 내지 인생관을 기초로 한 그것이기도 하였다.
「나에게 대한 허 운옥의 애정은 말하자면 절대적이다!」
그렇다. 영민에게 바쳐 온 운옥의 애정이야 말로 절대적인 그것이며 성애(聖愛)에 가까운 순수한 애정의 발로였다.
「그러나 나에게 대한 오 유경의 애정은 상대적(相對的)이다!」
그렇다. 영민의 단정과 마찬가지로 영민에게 바쳐 온 유경의 애정은 운옥의 그것처럼 절대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애정의식(愛情意識)에서 출발한 그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리고 언제든지 대서적(對蹠的)이며 상대적인 원칙이 항상 유경의 감정 세계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운옥의 애정은 영민의 호불호(好不好)를 초월할 수 있었으나 유경의 애정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를 싫어하는 영민을 운옥은 좋아 할 수 있었으나 자기를 싫어하는 영민을 유경은 좋아 할 수 없었다.
현재 영민이가 운옥에 대하여 이성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육친애를 느끼는 것은 운옥의 이러한 절대적인 애정에 기인하는 것이며 유경에 대하여 동경과 갈망을 품는 것은 유경의 이러한 상대적인 애정에서 오는 것 같았다.
두 여인의 이 두 가지 애정 가운데는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이러한 차이가 있었다. 운옥의 절대적인 사랑과 유경의 상대적인 사랑 가운데서 전전불매(輾轉不寐)의 순일(旬日)을 영민은 보냈다.
그러나 영민은 언제까지나 우유부단할 수는 없었다. 이 절박한 현실은 영민에게 행동이 있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의 강요는 백 영민으로 하여금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허 운옥의 사랑은 절대적이긴 하나 그것은 또 한편 보편적(普遍的)인 것이다.」
그렇다 여인 허 운옥의 . 애정은 아버지 허 상진의 친구인 백 초시의 아들을 대상으로 하여 발아(發芽)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허 운옥의 애정의 대상은 비단 영민이가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백 초시의 아들이 갑이라도 좋았고 을이라도 좋았을 것이다. 고마우신 시아버지 백 초시의 민며느리로서 허 운옥은 과연 영민이가 아닌, 갑이나 을에게 순정을 바치지않고 견뎌 배길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오 유경은 다르다. 유경의 사랑은 상대적이긴 하여도 특수적(特殊的)이다.」
오 유경이가 만일 백 초시의 맏며느리였더라면 백 영민이가 아닌, 갑이나 을에게 대하여 순정을 바치치는 못 했을 것이다. 허 운옥이가 만일 오 창윤의 딸이었더라면 아버지 오 창윤이의 친구의 아들인 김 준혁 박사의 독실한 사랑을 감히 물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운옥은 백 초시의 아들을 사모하였지만 유경은 백 영민을 사랑하였다. 운옥에게 있어서 영민은 영원한 남편이었으나 유경에게 있어서 영민은 이상의 남편이었다. 영민은 운옥에게 있어서 영원한 남편일지는 몰라도 결코 이상의 남편은 아니었다. 영민은 유경에게 있어서 영원한 남편은 되지 못할지 몰라도 이상의 남편이었다. 관념적으로 유경이에게는 백 영민이외에 남성이 있을 수 없었으나 운옥에게는 영민이 이외에 백 초시의 아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유경이! 아, 유경이!」
영민은 유경을 찾았다.
「그렇다. 운옥을 잊어버리고 열심히 유경을 생각하자!」
영민은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의 자세(姿勢)를 다시금 발견하였다.
그러나 백 영민이가 과연 어느 정도로 허 운옥의 존재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