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4장

하늘은 맑고 송아지는 울고

편집

유경은 금동일 안고 어머니를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좀 앉아라.」

술이 얼근해 진 백 초시였다. 굳이 만류하는 오 창윤을 물리치고, 이런 때 술을 못 먹고 언제 먹느냐고 고집을 부린 백 초시었다.

「촌 음식이 돼서 보잘것 없읍니다.」

어머니는 한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으면서 오 창윤에게 인사의 말을 하였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五十[오십]평생, 이같이 맛 있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읍니다. 허허허……」

「송구합니다.」

「유경아.」

하고 오 창윤은 그때 딸을 불렀다.

「네.」

「오늘부터 너는 내 딸인 동시에 백 선생 내외분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의 딸 노릇은 하기가 쉬워도 다른 분의 며느리 노릇은 하기가 어려워.」

그때 백 초시는 오 창윤의 말을 막으며 허어 그것은 오 「 , 선생의 지나친 말씀이고……딸이나 며느리나 이 백 봉학이에게는 마찬가지의 이야기요. 오 선생의 딸 구실을 잘한 사람이면 이 백 봉학이의 며느리 구실두 잘 할 것이니까……」

영민의 출정을 계기로 해서 생긴 백 초시의 병환이었다. 그것이 오늘처럼 기꺼운 날이기 때문에 몸은 비록 쇠약해 졌지만 오늘의 한 잔 술은 말하자면 백 초시에게 있어서는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 된 셈이다. 백 초시는 기분이 좋았다.

「하여튼 오늘의 내 모양이 이렇듯 되고 보니 너같이 곱게 자란 몸을 며느리로 삼을 자격이 내게는 없어. 하지만 내 아들 영민이가 너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니 모두가 전생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백 초시는

「금동이?…… 어디 금동일 한번 안아 볼까?」

유경은 두 손으로 금동이를 공손히 받들었다.

「허어, 그놈 누구를 닮았는고?…… 음, 제 아비의 모습이 많아. 어디, 한번 웃어 봐. 쯧쯧쯧쯧……」

백초시는 신이 난다. 금동이를 붙안고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쯧쯧, 쯧쯧…… 허어, 웃는구먼, 웃어! 쯧쯧쯧쯧……허허허, 웃었어, 웃었어!」

「허,허,허……」

오 창윤도 유쾌하다. 부인도 유쾌하다. 유경이도 유쾌하다.

「어디 한번 일어나 볼까?」

백 초시는 금동일 얼싸안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 나다가 그만 비틀비틀……

「아……」

하고 부인이 외쳤을 때는 백초시의 허약한 몸이 금동이를 안은채 술상 위에 펄썩 쓸어지고 말았다.

「아, 백 선생, 좀 진정하시어야겠읍니다. 술은 그만 하시고……」

마음은 살았으나 쇠약할 대로 쇠약한 몸이 백 초시의 행복을 그 이상 더 지탱하지 못하였다. 술상이 쓸어지고 금동이가

「으악 ─」

하고 울어댔다. 부인은 얼른 금동이를 안아 일으켰다.

「으악, 으악, 으악 ─」

불이 붙은 듯이 금동이는 울어 댄다.

백 초시는 다시금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눕는 몸이 되었다.

그날 밤 유경은 콜콜 잠든 금동이를 사이에 두고 영민의 어머니와 늦도록 마주 앉아 있었다.

「우리 영민이가 정말루 아들를 낳았구나.」

어머니는 금동이의 머리를 꺼질세라 가만히 만져 보면서

「그래 어디서 해산을 했니?」

「어떤 병원에서 해산 했어요.」

「초산에 얼마나 괴로왔겠니?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 했겠니? 초산은 그저 어머니 옆에서 해야지. 그래 병원에선 손이라두 좀 도와주는 이가 있었니?」

「네, 간호원두 있구, 또 같은 방에 들었던 고마운 동무가 있어서 그 동무의 신세를 많이 졌어요. 친동생처럼 저를 귀여워하구 돌봐 주었어요.」

「아이 고마와라. 세상엔 그런 고마운 이두 있구만. 이름이 뭐라는 인데?」

「금순 언니 ─ 홍 금순이라는 이예요.」

「홍 금순……고맙기두 해라!」

「그런데 어머니.」

「응?」

「그이는 출정할 때 저를 무척 원망하고 나무랐죠?」

「그이?……아, 영민이 말이냐? 원망하는게 무어냐? 맨 마지막 날 밤, 영민은 자리에 누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하나씩 꼭 쥐고, 어머니, 아버지, 다 이야기 할까요? ─ 하면서 네 이야기를 쭉 했단다. 너를 꼭 한번 만나 보구 떠났으면 오죽 좋았겠니?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애가 그처럼 좋와하는 너를 벌써 데려 왔을걸 그랬지.그 애 아버지가 고집이 너무 세서 三[삼]대 독자 외아들을 장가두 못 들이구 이것을 치르다니……그 애가 그렇지 않다는걸 네가 좀더 빨리 알아 주었더라면……」

유경은 눈자욱이 자꾸만 뜨거워 왔다.

「어머니의 귀하신 아드님을 그처럼 괴롭힌 건 모두 제가 미련한 때문예요. 용서하세요, 어머니!」

「용서가 다 뭐냐? 네가 이렇게 우리 집을 찾아 준것만이 그저 고맙다.」

「어머니!」

하고 유경이는 그때 눈물어린 얼굴을 조용히 들었다.

저는 이제 집을 떠날 「 때, 내일 아침 아버지와 같이 서울로 올라 갈려구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그러나 유경은, 내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을 위하여,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 선량하고 소박한 늙은이들의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유경이에게 있어서 그런것쯤 문제가 아니었다.

「저 아버님께서 병환이 좀 차도가 계실때 까지…제가 물 심부름도 하구 약 두 대려 드리구……그렇게 해두 괜찮을까요?」

「아이구, 그렇게만 해 준다면야……」

어머니는 무척 놀랐고 무척 기쁘다.

「그래두 집의 어머니가 어디 그걸 허락하겠니? 결혼식두 아직 안 지났는데……」

「그건 괜찮을것 같아요. 아버지께 제가 잘 이야기만 함 될 것 같아요. 아무 것두 할줄 모르는 저이지만, 어머님께서 잘 가르쳐만 주신담 전 열심히 해 보겠어요.」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이 외로운 두 늙은이의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영민에 대한 당연한 속죄라고 유경은 생각한다.

시골 살림을 해 보지 못한 유경이긴 하였으나 못할 것이 없을것 같았다.

그처럼도 영민을 괴롭힌 지나간 날을 생각할 때, 유경이 앞에는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괴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체면이나 면목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유경에게는 있을 수 없다. 물도 긷고 밥도 지을 수 있었다. 논밭에 나가서 김도 맬 수 있었다. 무엇이 무서우냐, 무엇이 남 부끄러우냐?…… 자기의 길을 유경으로선 열심히 걸으면 그만이었다.

「어머니, 꼭 좀 저를 옆에 두어 주세요.」

그 말에는 추호의 가식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오늘의 유경을 살리는 유일한 방도일 것 같았다.

「글쎄, 네 맘은 그래두…… 어디 그럴 수야 있겠니?」

부인은 내심 어떻게나 기쁜지 이루 형용할 수 조차 없을 지경이다. 서울에서도 쨍쨍 울리는 명망 높은 댁 무남독녀로서, 대학교를 다니고, 머리를 지지고 안경을 쓰고 ─ 그러한 유경이가?…… 부인은 정말 가슴이 터질듯이 기쁜 것이다.

뭐, 뭐 해두 내 아들 영민이가 그처럼 좋아하는 유경이었으면 六十[육십] 평생 그렇게도 기다리던 내 손주를 낳아 준 유경이가 아닌가. 그러한 유경이가 오늘 날 모든 허세와 과거의 온갖 안일한 생활의 타성을 버리고 산 설고 물 설은 이 벽촌에서 영민을 대신하여 이 늙은 시부모를 봉양하리라 결심한 것이다.

부인은 그만 유경이가 홀딱 마음에 들었다.

이튿날 늦은 아침, 자동차는 오 창윤 한 사람만을 태우고 탑골동을 떠났다. 떠날 때 오 창윤은 다시금 병상에 누워 버린 백 초시에게서 일금 二 [이]만 원을 받았다. 영민이가 신신 부탁을 하고 떠난 오 창윤의 돈 二[이]만 원이다. 아무리 사양해도 백 초시는 완강히 들지를 않았다.

「될 말씀이요? 아무리 몰락해 버린 백씨 가문이로되 이유없는 돈을 타인에게 받을 수는 없읍니다. 벌써 갖다 들여야 할 것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이렇게 늦어졌으니 과히 꾸짖지나 마시요.」

「백 선생님의 심정, 잘 알아 모셨읍니다.」

오 창윤은 하는 수 없이 돈을 받았다. 그러나 차를 타면서 오 창윤은 그 돈을 유경이에게 몰래 내주며

「노인의 약 값으로 사용하여라.」

「네.」

그리고 오 창윤은 유경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지극히 유쾌한 어조로 작별의 말을 주었다.

「음, 과연 오 창윤의 딸이다! 너를 두고 가니, 네 어머니는 또 지랄발광을 할께다만……음, 괜찮어! 그만 하면 괜찮어!」

그리고 이번에는 금동일 안은 유경이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갖다 대며 낮은 음성으로

「영감님이 벌써 너한테 녹았더라, 녹았어! 어젯밤 자면서 하는 말이, 집을 나간 운옥이두 그랬지만 어쩌면 따님이 그처럼 신통하느냐구, 보기는 새침해 보여두 웃 사람 공대하는 법이 과연 대갓집 자손이라구, ─ 어제 네가 공손히 떠 가지구 들어 간 물 한 그릇이 노인을 아주 감복케 했단 말이야.

허, 허, 허……」

그리고 금동이의 볼을 한번 꼭 찔러 보며

「그럼 금동이두 잘 자라구, 옥순이두 잘 있거라. 허, 허, 허……」

유쾌한 웃음을 남겨놓고 오 창윤은 떠났다.

맑은 하늘이었다.

「앰매 ─」

하고 오양간에서 송아지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