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3장

탑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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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번, 이태에 한번씩 五[오]월 단오 같은 때 요지경(瑤池鏡)군이 왔다. 그 요지경 속에서만 보던 훌륭한 자동차 한 대가 지금 탑골동 앞 동리 백 초시의 집 앞 마당에 멎어 있었다. 동리 사람들이 우르르 자동차를 둘러 싸고 있었다. 물빛 에나멜을 칠한 반짝거리는 차체를 사람들은 신기해서 만져 보고 쓸어 보고 하였다.

「뿡 ─ 뿡 ─」

하고 경적을 울려 보는 애들도 있었다.

오 창윤이가 평양서부터 타고 온 호화로운 대절차다.

자동차 보다도 한층 더 신기한 사실을 동리 사람은 보았다. 오 창윤이의 훌륭한 풍채도 풍채려니와 안경같은 걸 다 쓰고 아주 새침해 보이는 예쁜 신식 여자가 동리 부녀자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열 일여덞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업고 있는 어린것이 누구의 앤지 그것도 문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 안경잡이의 아이지 뭐야?」

「옳지, 옳지. 안경잡이가 바루 영민이 하구 좋와한다는 서울 색시가 아니야?」

「그럼 아이는 영민이의 아이지, 뭐야?」

「아이, 망칙두 해라. 잔치는 언제 했기에 아이를 낳노?」

「신식 사람들이야 뭐 결혼을 하구 아일 낳구? 결혼을 하는 법이라는데……」

「아이, 남 부끄러워! 어머니 시집가는 걸 본 애가 있다더니……」

「뭘 뭘 해두, 불쌍한 건 운옥이 뿐이지.」

「그래두 백 초시 영감 성미에 안경잡이가 견데 날라구? 한 달두 못 가서 쫓겨 날 걸 뭘들 그래?」

「운옥이야 불쌍하지만, 그래두 색시 몸에 소생이 있는데 쫓아 내믄 되나?

이렇다 저렇다 해두 저 이 집 핏줄인데 뭐.」

개똥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五[오]년 전 뒷탑골 예배당 야학 졸업식 날 밤, 졸업장을 들고 엉덩춤을 추던 개똥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오 창윤 일행이 도착하여 동리 머슴아이 하나를 앞세우고 이 청기와 집으로 들어 섰을 때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허청깐에 송아지 한 마리가 누워 있었고 먹이를 줏는 병아리 떼가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흩어져 있는 쓸쓸한 뜰안이다.

안방에서 쿨렁쿨렁 기침 소리가 난다. 이어서 백초시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물, 물 좀 주소.」

백초시는 마누라가 집안 어느 구석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시중을 들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통 대답이 없다.

「할아버지, 누구가 왔어요. 자동차를 타구 누구가 왔어요.」

아이가 방문을 열었다. 그 뒤로 오 창윤은 따라 들어 가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발걸음을 멈추며 유경이의 귀에 가만히 속삭이었다.

「너 빨리 정지로 들어가서 물을 한 그릇 떠 가지고 오너라.」

「네.」

아버지의 이러한 배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경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괴팍스런 시골 노인에게 오 창윤은 자기 딸을 잘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할아버지, 누구가 왔어요, 누구가……」

어둑컴컴한 방 아랫목에 노인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다가

「무엇이?……」

광대뼈만 남은 창백한 얼굴을 백 초시는 들었다.

「이 어른이 자동차를…… 자동차를 타구 왔어요.」

오 창윤은 병인 옆에 조용히 앉으며

「백 선생, 병환이 좀 어떠십니까? ─ 서울서 내려온 오 창윤이 올시다.」

「아, 아, 누……누구시라구?」

백 초시는 깜짝 놀랐다.

「서울 사는 오 창윤이 올시다.」

「오오!」

백 초시는 만신의 기력을 다하여 자리를 일어섰다.

백 선생 그대로 그대로 「 , , 누워 계셔야겠읍니다. 신병이 중하신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올시다.」

오 창윤의 극진한 만류를 물리치고 흐트러진 옷자락을 당황히 가다듬었다.

「먼 길에 수고로이 오셨읍니다. 백 봉학(白鳳學)이라구 불러 주시요.」

그리고는 밖을 향하여

「여보 ─」

하고 마누라를 불렀다.

「할머니는 아까 목화 밭에 나갔어요.」

「아, 그래? 그럼 막둥이 너 빨리 할머니를 좀 불러다 주렴.」

「예.」

막둥이는 뛰어 나가고 ─

「손이 모자라서 이처럼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데 실수가 많소이다. 너그러이 생각해 주시요.」

「천만의 말씀을……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오히려 민망스럽습니다.」

그러는데 문이 방싯 열리며 대접에다 물 한 그릇을 떠 들은 유경이의 두 손이 반쯤 열린 문 틈으로 쏘옥 나타났다.

「아버지, 물을……」

유경이의 목소리가 가만히 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오냐.」

오 창윤은 물 대접을 받아 들고

「백 선생께서 아까 물을 찾으시기에……」

그러나 백 초시는 오 창윤의 손에서 물 그릇을 받을 생각도 없이 그 어떤 기적을 눈 앞에 보는 사람처럼 반쯤 열렸다 닫친 문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동안 하다가 백 초시는 후딱 시선을 오 창윤의 얼굴로 돌리며

「내 손주가 왔읍니까?」

하였다.

「그렇습니다. 백 선생.」

「오오 ─?」

백 초시의 창백한 얼굴에 일점 홍조가 분명히 떠올랐다.

「아, 그, 그렇습니까!」

백 초시는 깊은 신음 소리와 함께 물 대접을 받아 들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 . 몇 방울 눈물이 툭툭툭 물 그릇에 떨어져 내렸다.

「오 선생, 용서하시요. 최근에 와서는 몸과 마음이 다 함께 허약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보이니, 황천길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면서 백 초시가 몇 모금 물을 들이키고 났을 때, 막동이 보다 먼저 달려간 개똥 할머니가 백 초시 마누라를 데리고 헐레벌떡 대문으로 뛰어 들어 왔다.

「아이, 누구가 왔다구? ─」

백 초시 마누라는 허벙지벙 뜰 안으로 들어 섰다.

「손주가 왔대두 그래?」

개똥 할머니가 부인의 손에서 호미를 받아 허청간 기둥에다 걸면서 하는 말이다. 그때 백 초시가 방문을 탁 열며

「여보, 귀한 분이 오셨소. 빨리 손님을 데리고 들어 오소.」

「아이머니나!」

부인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섰는 유경을 한 눈에 바라보자 발바닥이 얼어 불은 듯이 딱 멎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는 개똥 할머니는 부리나케 달려가며

「아이, 곱게두 생겼다! 돌 틈에 핀 난초 꽃같이 곱구나!」

그러다가 옆에 서 있는 옥순이를 돌아 보며

「어디 손주 관상 좀 볼까?」

그러면서 금동이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아이구, 아들이구만, 아들이야!」

그때 부인은 유경이 앞으로 달려가서

「오냐, 수고했다! 아들을 바랬기에 얼마나……」

부인은 영민을 생각하며 치마귀로 눈물을 씻었다.

이윽고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백 초시 내외는 사돈지간의 간단한 인사의 절차를 바꾼 후에 닭 두 마리를 잡아 부랴부랴 술상과 점심상을 차렸다.

일주 세병과 각종의 통조림, 양과자로 백 초시 내외를 위한 흰 고무신 몇 컬레, 광목 한 필 ─ 이것이 오 창윤이가 서울서 가지고 내려 온 조그만 선물이였다. 너무 후하면 도리어 백 초시의 비위를 거슬릴것 같아서 간단한 예의만 차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있어서의 온갖 물자가 궁핍했을 때인지라, 그것은 농촌에서만이 아니라 도회지에서도 그리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무엇하러 가지고 가세요?」

하고 반대하는 유경이에게

「그런게 아니야. 사회생활에는 이만한 예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야.」

하였다. 과연 오 창윤의 선물은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백초시 내외의 마음을 한층 더 행복하게 한 것만은 틀림 없었다.

사랑 방에 술상이 벌어졌고 안방에 점심상이 베풀어 졌다. 운전수는 뜰 아랫방, 五[오]년 전 운옥이가 쓰던 방에서 동리 청년 한둘과 술을 나누고 있었다.

「금동이 아버지 보구 싶지 않니?」

개똥 할머니가 금동이를 붙안고 어쩔줄을 모른다. 부인은 유경이 옆에 살뜰히 붙어 앉아서, 이걸 좀 먹어 보렴, 저걸 좀 먹어 보렴 하면서 닭의 똥집, 간 같은 것을 자꾸만 권한다. 어머니와 똑같다. 집의 어머니와 똑같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집의 어머니는 흰 얼굴과 매끄런 손을 가졌는데 여기 어머니는 깜투둑하게 찌들은 얼굴과 거칠은 손을 가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경이의 이성과 지성으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었다.

「집의 어머니 보다 이 어머니가 더 가치 있고 훌륭한 어머니다!」

유경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집의 어머니의 기름진 살 보다 이 어머니의 찌들은 살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경은 거침없이 그것을 단정하였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자기의 화려한 감정을 청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감정을 유경으로서는 하루 바삐 청산해야만 했다. 그 화려한 생활에 물들은 감정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자기는 영민의 아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영민이 한테서 무슨 소식이나 있니?」

「서주서 한번 아버지에게 편지가 왔을 뿐, 그 후엔 아무 소식도 없어요.」

「영민이가 널 한번 보구 떠났으면 죽어두 한이 없을텐데……」

「…………」

유경은 기가 막혔다. 자기가 할 말을 이 어머니가 대신 하여 주는 것이다.

「좀더 맛나는 게 있으면 네가 밥을 좀더 먹을텐데…… 서울 살림하구 촌 살림하군 이렇게 다르단다.」

유경은 자꾸 울고 싶다. 이 어머니가 허세없이 다정한 말을 해 주면 해 줄 수록 유경은 자꾸만 슬퍼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민씨를 내 남편 영민씨를 이처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유경은 이 어머니가 끝없이 감사하고 끝없이 고맙기만 했다.

「어머니, 저 많이 먹었어요.」

어머니라는 한 마디가 추호의 거리낌없이 유경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것은 실로 유경의 성격으로서 하나의 파격(破格)을 의미하였다.

「어머니, 저 사진 언제 찍은 것이야요?」

유경은 술을 놓고 아랫목 벽 위에 붙은 영민의 중학생 때 사진을 쳐다보았다.

「평양 학교 三[삼]학년 때 사진이란다.」

유경이가 보아 오던 영민 보다도 유달리 토실토실한 얼굴이었다.

「여보, 금동일 좀 데려 와요.」

하는 백 초시의 유쾌한 목소리가 그때 사랑 방에서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