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의 십자가
편집1
편집이윽고 운옥은 얼굴을 들고 눈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 젊은 임신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았을 적엔 그저 예쁘고 총명한 여자로만 보았지마는 안경을 쓰고 보니 어딘가 자기와는 세계를 달리하는 하나의 교양인(敎養人)으로서의 인상을 운옥은 분명히 받았다. 그것이 더 한층 운옥으로 하여금 존경의 념을 품게 하였다.
거기서 운옥은 묻는대로 솔직히 대답하였다.
「저의 고향은 평안도 어떤 시골이야요. 거기서 저는 예수교 야학원엘 다녔어요 그런데 야학원을 . 졸업하던날 밤, 저는 그만 무심중에 애국가를 불렀어요. 그 애국가는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 밤마다 제 귀에 입을대고 몰래 가르쳐 주신 노래였어요.」
거기서 운옥은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동리 어떤 불량배를 만나 겁탈을 당할 뻔 한 이야기와 은장두로 눈깔을 찌르고 애국가를 부른 사상범으로서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 이야기를 쭉 한 후에
「그런데 그후 그 사나이가 헌병 앞잡이가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돌연 거리에서 그 사나이를 만났어요. 정말 두 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그 무지한 인간에게 끌리어 가서……」
운옥은 또 한번 머리를 깊이 숙였다.
「오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요!」
부장은 깊이 감탄을 하며
「실은 우리 오빠도 기미년 만세때 옥에서 죽었답니다. 그런데 색시 이름은 뭐요?」
「저어 운 ──」
그러다가 운옥은
「금순이예요. 홍 금순이예요.」
하고, 역시 별명을 사용하였다. 박 준길이도 무섭거니와 김 준혁이도 무서웠다.
「그래 지금 뭘 하세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산부가 물었다.
「청량리 밖 어떤 고아원에서 일을 보고 있어요.」
「보모야요?」
「네.」
젊은 산부는 그 순간, 문득 자기 배를 쓰다듬어 본다. 쓰다듬어 보면서 무엇을 골돌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보모! 고아원 보모!」
하고, 무척 감동적인 한 마디를 무심중 배앝았다.
「고아원 보모 ── 무척 좋은 직업이야요!」
「…………」
운옥은 묵묵히 산부를 쳐다보았다.
「그래 고아원 보모면 수입이 얼마나 돼요?」
「수입이라기 보다도, 그저 거기서 먹고 자구, 그리고 용돈이나 나오지요.」
「자기 애를 데리고 들어 갈 수도 있어요?」
「거야 있죠. 이번에 같이있든 보모 한 사람이 폐병으로 죽었어요. 그이에게 두 다섯 살 먹은 어린 애가 있었는데요 뭐.」
「그래요?」
무엇을 생각하는지 젊은 산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 아직 비어 있어요?」
하고, 물었다.
「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으시나요?」
「아, 아니, 그저…… 그저……」
하고, 무척 흐린 대답과 함께 피곤한 듯이 자리에 누으면서
「선생님, 또 밑배가 자꾸만 아파 와요.」
하고, 허리를 꼬았다.
「아, 안경을……」
부장은 얼른 산부에게서 다시금 안경을 벗기고 재빨리 산부의 몸을 거들기 시작하였을 때 운옥은
「저, 진통이 시작 된지는 오랫나요?」
하고, 물었다.
「이번이 두번째야요. 아까 잠깐 가벼운 진통이 있었어요.」
그때 운옥은 무척 망서리다가
「저, 누구 산부를 거두어 주실 친척 되시는 분은 오시지 않았나요?」
「아마 무척 외로우신 분인가 봐요. 입원할 때두 혼자서 하구, 누구 한 사람 찾아오는 이가 없던데요.」
배가 아파서 허리를 꼬부린 산부의 등 뒤에서 부장과 운옥은 그런 말을 바꾸었다.
「네에, 그러세요?」
운옥은 젊은 산부의 외로운 신세에 동정을 하며
「저, 선생님, 저를 조금만 더 여기에 숨겨 두어 주실 수 없을까요? ── 제가 있는 고아원에두 지금 쯤은 헌병대의 손이 뻗쳤을 꺼야요. 그리구 저도 약간 간호원의 경험이 있어요. 이분이 순산 하는 걸 제가 좀 거들어 드리구 싶어요.」
하고, 운옥은 애원을 하였다.
「아, 그러시우. 이 분도 보아하니 무척 외로우신 분 같은데 그렇다면 오즉 좋아요. 다른 사람에겐 친척이라구 ── 언니 되시는 이라구 그래 두죠.」
「네, 제발 좀 그렇게 해주세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젊은 산부가 배를 움켜 쥐었던 손을 뻗쳐 운옥의 손목을 더듬어 잡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 땀에 젖은 산부의 손을 운옥은 암말없이 꼭 쥐어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성스러운 순정과 순정의 발로였다.
2
편집「자아, 그러면 진통이 심한듯 하니 산부를 옆방 산실로 옮겨야겠어요. 잠간만 기다려요. 내 선생님을 모시고 올께요.」
부장은 그런 말을 남겨 놓고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몹시 아프세요?」
운옥은 산부의 손을 꼭 잡은 채 산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과하진 않지만두……」
「초산이시나요?」
「네에.」
「어머님, 안 계시나요?」
「어머니는……어머니는……네, 안 계세요.」
그 순간 이 젊은 산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핑 돌아 떨어졌다.
「이런 땐 젤루 어머니가 계셔야……언니두 안 계시나요?」
「없어요.」
「제가……제가……아무것도 모르는 저이지만 제가 언니 되어 드리구 싶어요.」
그 말에 젊은 산부는 눈을 크게 뜨며 가만히 물었다.
「정말……정말이세요?」
「정말이 아니구 그럼…… 제게두 동생이 없어요. 제게두 부모가 없어요.」
「고맙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젊은 산부는 다시 얼굴을 살그머니 돌려 벽을 향하였다.
「나 미안하지만 약병 좀 쥐어 주세요. 목이 갈해서……」
운옥은 얼른 머리맡 장 위에서 약병을 쥐어 주었다. 약병에는 이 혜경(李惠瓊)이라는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 이 혜경 ── 그것은 오 유경이가 영민과 부모의 눈을 피하려는 변성명이었던 것이니, 아아, 하늘에 뜻이 있음이뇨, 하늘에 뜻이 없음이뇨?
묻노라. 가혹한 운명의 발길에 채여 한길 가의 한낱 조약돌인 양 정처없이 굴러 댕기는 수난의 여인 허 운옥으로 하여금 하늘은 어이하여 오늘 날 이 마당에서 오 유경이와의 접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고?
그것이 과연 하늘의 다사로운 배념(配念)이었던고? 그것이 과연 하늘의 악착한 뜻이었던고? ── 모른다. 작자 자신도 그것을 모른다. 운옥이와 유경이의 걸어 갈 앞길의 촌극(寸劇) 조차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아는 것은 허 운옥의 인생과 오유경의 인생이 작자의 붓 끝을 인도하리라는 것 뿐이다.
하여튼 만났다.
그러나 두 여인이 다같이 복면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에 유경인 그것이 영민의 약혼자인 허씨 딸인줄을 몰랐고 운옥은 그것이 김 준혁을 배반한 오창윤의 무남독녀 오 유경인 줄을 몰랐다. 하물며 또 그것이 영민의 씨를 몸에 받은 구원(久遠)의 애상(愛像)인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지나간 겨울, 눈 내리는 성탄젯날 밤, 장 일수의 침묵의 정열을 피하고자 청량리에서 돌아왔을 때, 운옥은 경숙이의 이야기를 듣고 김 준혁을 그처럼 절망 속에 쓰러 넣은 一[일]호실 환자 오 유경을 한번 보고 싶었었다. 그리고 그때 만일 진찰실 테 ─ 이블 위에 놓인 명함꽂이에서 「헌병 보조원 박준길」이라는 명함을 발견하지 못하였던들 운옥은 필시 一[일]호실 문을 두드리고 오 유경이란 여자를 한번 만나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 운옥은 갖지 못한채 一[일]호실 앞을 꿈결처럼 지나버린 것이 지금 와서 과연 두 여인에게 있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 그것도 역시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이윽고 부장이 숙자를 데리고 들어오면서
「빨리 담가차(擔加車)를 가져 와요.」
「네.」
바로 옆방이 산실이다. 그래서 이방은 복도를 거치지 않고도 중문으로 산실을 통하게 있는 것이 무척 편하다.
숙자가 산실에서 담가차를 밀고 왔다.
「자아, 이리 옮겨 누세요. 선생님이 곧 오신다니까.」
부장은 그러면서 운옥이와 손을 나누어 유경이를 차에 옮겨 눕혔다. 숙자는 끌고 운옥은 밀고 하여 산실로 들어갔다.
벽과 바닥이 하얀 「타일」이다. 방이 무척 청결하다.
유경이가 다시 침대에 옮아 누웠을 때, 남자처럼 굵다란 안경을 쓴 여의사가 들어와서 유경의 배를 진찰하였다.
「태아의 발육도 좋고 위치도 아주 정확합니다. 안심 하셔요.」
유경의 손을 꼭 부여잡고 섰는 운옥에게 의사는 그렇게 말하여 안심을 시켰다.
「초산인데 괜찮을까요, 선생님?」
운옥은 자꾸만 허리를 꼬는 유경이가 가엾어서 물었다.
「초산이니 다소 고통은 있지만요. 그만한 고통은 누구나 다 있는 거니까 ── 언니 되시는 분이예요?」
「네에.」
운옥은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다.
유경은 허리를 꼬면서도 입을 악물고 단 한 마디의 고통도 입 밖에 내지를 않는다.
「산부가 나이는 적어도 무척 영악하신 분예요.」
의사도 산부의 그 야무진 성품에 약간 놀라는 모양이다.